마르크스주의와 철학 by 카를 코르쉬
Marxism and Philosophy by Karl Korsch
Marxism and Philosophy by Karl Korsch (1923) (marxists.org)를 중역함
“우리는 유물론적인 견지에서 헤겔 변증법에 대한 체계적 연구를 조직해야만 한다.”
– V. I. 레닌, 「전투적 유물론의 의의에 관하여」 中.
아주 최근까지, 부르주아적 사상가든 맑스주의적 사상가든 모두 맑스주의와 철학의 관계가 이론적으로도 실천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별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철학교수들에게, 맑스주의는 기껏해야 19세기 철학사에서 “헤겔주의의 쇠락”으로 일축되는, 비주류적인 세부부문에 불과했다. “맑스주의자” 또한 자신들 이론의 “철학적 측면”을 그리 강조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지만, 그 이유는 꽤나 달랐다. 맑스와 엥겔스는 역사적으로 독일 노동운동이 “과학적 사회주의”를 통해 독일 고전철학의 유산을 물려받았음을 크게 자랑스러워하며 명시했다. 그러나 과학적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기본적으로 “철학”이라는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맑스와 엥겔스는 과학적 사회주의의 과제를 이전의 부르주아적 관념론 철학만이 아니라 철학 전체의 형식과 내용을 극복하고 대체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후에 나는 맑스와 엥겔스의 개념에 따랐을 때 이러한 대체의 성격이나 [최소한] 이러한 대체로 의도된 성격이 무엇인지 설명해야 될 것이다. 일단은 이후의 맑스주의자들에게는 이 사안이 역사적으로 문제삼아지지 않았다고만 해두겠다. 이후의 맑스주의자들이 철학의 문제를 다룬 방식은 엥겔스가 헤겔철학에 대한 포이어바흐의 태도를 묘사하는데 사용했던 여실한 용어로 가장 잘 묘사되는데, 이것이다: 포이어바흐는 그저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옆으로 밀어두었다.’ 사실, 이후의 매우 많은 맑스주의자들은 성실하게 스승의 지시를 매우 정통적으로 지키면서도, 헤겔철학만이 아니라 철학 전체를 똑같이 건성으로(unceremonious) 다루었다. 예를 들자면, 프란츠 메링은 자신이 스승들의 (맑스와 엥겔스) “불멸할 성과”인 “모든 철학적 환상들의 거부”를 승인했다고 말하는 것으로 철학의 문제에 대한 자기의 정통 맑스주의적 입장을 여러번 간결하게 표현했다. 이 진술은 “맑스와 엥겔스의 철학적 기원에 대해서 내가 다른 그 누구보다도 더 관심을 기울였느니라”라고 정당하게 말할 수 있는 인물에게서 튀어나온 것이요, 이는 제2인터내셔널의(1889~1914) 맑스주의 이론가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모든 철학적 문제들에 대해 일반적으로 지배적인 입장에 관하여 극도의 중요성을 갖는다. 당대의 저명하신 맑스주의 이론가들은 협의적으로는 본질적으로 철학적이지도 않으며, 그냥 맑스주의 이론의 일반적인 인식론적-방법론적인 토대들과만 관련되있을 뿐인 문제들에 대한 관심을 기껏해야 그냥 뻘짓으로[시간과 노력의 낭비로] 여겼다. 물론, 이 양반들은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간에, 맑스주의자 모임에서 저런 철학적 쟁점들을 논의하도록 허용했으며, 가끔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허나 그렇게 함으로써 이들은 그런 문제들의 해명을 프롤레타리아적 계급투쟁의 실천과는 완전히 무관하며 계속 그런 상태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것을 아주 공고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런 개념은, 이론과 실천으로서의 맑스주의가 본질적으로 조금도 변경불가하며(totally unalterable) 모든 철학적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입장과 무관하다는 전제 하에서야만 그 자체 명증하며 논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으리라.
이는, 예를 들어보자면, 맑스주의 이론가가 철학에 관해 사적으로는[사적인 철학적 생활에서는]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추종자가 되는 것이 불가능하게 여겨지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당대 동안에는, 맑스주의 이론과 부르주아 이론 사이의 상충점이 얼마나 컸단들, 이 한 지점에서는 두 극단들 사이의 의견 일치[동의점](agreement)가 있었다. [그 지점이 무엇이냐 하면] 부르주아적 철학교수들은 맑스주의에는 고유한 철학적 내용이 없다면서 – 그리고 자기들이 이를[맑스주의 고유의 철학을] 반대하면서 중요한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면서 서로를 안심시켰다. 정통 맑스주의자들 또한 자기네들의 맑스주의는 그 성격상 철학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면서 – 그리고 자기들이 이를[맑스주의 고유의 철학을] 찬성하면서 중요한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면서 서로를 안심시켰다. 거기에다 이 동일한 기본적 입장에서 시작된 제3의 경향도 있었으니, 이 시기동안 유일하게 사회주의의 철학적 측면을 좀 더 철저하게 숙고하려던 경향이다. 이 경향은 자신들의 임무가 문화철학(Kulturphilosophie)1의 발상이나 칸트 혹은 디츠겐, 또는 마흐, 아니면 여타 철학들의 개념을 가지고 맑스주의 체계를 “보충”하는 것이라고 보았던 몇몇 “사색적(philosophising) 사회주의자들”2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정확히 이들이 맑스주의 체계에 철학적 보충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들은 자기네들이 보기에도 맑스주의 그 자체에 철학적 내용이 너무나도 부족함을 아주 공고하게 만들었다.
부르주아적 학자와 정통 맑스주의자가 한 마음으로 주장하는, 맑스주의와 철학 간의 관계에 대해 순수히 부정적인 개념이 요즘에 흔한데, 이는 두 경우 모두 다 역사적-논리적 발전에 대한, 매우 피상적이고 불완전한 분석에서 부상한 것이다. 하지만 이 둘이 이러한 결론을 내리게 된 조건들은 아주 상이하기에, 나는 이를 별도로 나누어 설명하려 한다. 그리하면 이 두 계기들[원인들; 모티브들] 사이의 거대한 심연에도 불구하고, 이 둘이 하나의 결정적인 지점에서 일치한다는 것이 명백해지리라. 부르주아적 학자들은 19세기 중후반부 50년 동안 헤겔철학을 완벽하게 등한시했는데, 이는 저들이 철학과 실재 간의 관계를, 이론과 실천 간의 관계를, 즉 헤겔의 시대에서는 모든 철학과 과학의 원리를 구성하는 그런 관계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과 완벽히 일치한다. 다른 한 편으로, 맑스주의자들은 같은 방식으로 변증법적 원리의 본래적인 함의를 동시에 점점 더 잊어버리고 마는 경향이 있었다. 게다가 두 청년 헤겔주의자인 맑스와 엥겔스가 1840년대에 헤겔로부터 멀어졌을 때 상당히 고의적으로 독일 관념론 철학으로부터 벗어나서는 역사와 사회에 대한 유물론적 개념으로 전환했던 것이 것이 바로 이것인데도.
우선 나는, 19세기 중반 이후로, 부르주아적 철학자들과 역사가들이 철학사의 변증법적 개념을 지속적으로 폐기해간 이유와, 그리하여 그들이 맑스주의 철학과 19세기 철학의 일반적 발전에 있어서의 그 중요성을 충분히 분석하고 제시할 수 없게 된 이유를 개괄하고자 한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에 대한 무시와 오해에는 직접적인 이유가 있기에 변증법이 폐기된 것과 관하여 이를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할 수도 있겠다. 철학사를 다룬 19세기의 저술에서 의식적인 계급적 성향[행동양식](instinct)이 마르크스주의를 형식적으로만(perfunctory) 취급하는 것과, 그에 더해 다비드 프리드리히 슈트라우스, 브루노 바우어,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등의 부르주아 “무신론자”와 “유물론자”를 비슷하게 취급하는 것에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기여했음은 옳다. 그러나 단순히 부르주아 철학자들이 의식적으로 그들의 철학이나 철학사를 계급적 이해에 종속시켰노라고 죄를 묻는다면, 매우 복잡한 상황을 실제로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극도로 조야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조야한 테제에 들어맞는 사례들도 있다. 허나 일반적으로 한 계급의 철학적 대표자들과 그 대표자들이 대표하는 계급 사이의 관계는 훨씬 더 복잡하다. 맑스는 『브뤼메르에서의 18일』에서 이런 유의 상호관계를 구체적으로 다룬다. 맑스는 여기에서 전체로서의 한 계급이 그 “물적 토대”로부터 “구분되며 특수히 형성된 감정, 환상, 사유의 양태와 삶의 관점으로 이뤄지는 하나의 전체 상부구조”를 만들고 형성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계급에 의해 규정되는” 상부구조의 한 부분임에도, 그 “물적이고 경제적인 토대”로부터 특히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그 계급의 철학이다. 이는 그 내용에 있어서 가장 명백하지만, 종국적으로는(in the last instance) 그 형식적 측면에도 적용된다. “유물론적이며 따라서 과학적이다” – 맑스가 한 이 말의 의미로 맑스주의의 철학적 내용에 대한 부르주아적 철학사가들의 완전한 무지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 현상을 그 “세속적 핵심”을(즉 계급의식과 “최종적으로”(in the last instance) 은폐 되어있는 경제적 이해를) 가지고 직접적으로 그리고 무매개적으로 해명하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과제는 최대의 “객관성”을 가지고 “순수한” 진리를 탐구하고자 했던 부르주아 철학자와 역사가가 맑스주의의 철학적 내용을 완전히 놓치거나 아니면 불충분하고 피상적인 방식으로만 해석할 수 밖에 없었던 과정의 매개를 상세히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매개들 중 우리의 목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의심할 필요도 없이 19세기 중반의 부르주아적 철학 전체가, 특히 철학사에 대한 부르주아적 저술들이, 사회경제적인 이유들로 헤겔철학과 그 변증법적 방법을 폐기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철학과 철학사 저술의 방법이 맑스의 과학적 사회주의와 같은 현상에서 그 어떤 것도 “철학적”으로 만들지 못하게 되는 것으로[결과로] 돌아왔다.
19세기 철학사에 대한 부르주아적 저술가들의 일반적인 개괄에 있어서, 매우 인위적인 방식으로만 조금이라도 극복할 수 있는 어느 특수한 부분에 공백이 하나 존재한다. 이들은 완전히 이데올로기적이고 절망적일 정도로 비변증법적인 방식으로 철학적 사유의 발전을 “사상사”의 순수한 과정으로 제시하기를 바란다. 그렇기에 이들은 1850년대 즈음에는 헤겔의 웅장한 철학은 그 추종자가 독일에 사실상 남지 않았고, 곧 완전히 곡해되었지만, 1830년대 후반 즈음에는 헤겔의 가장 큰 적들마저(쇼펜하우어나 헤르바르트Herbart) 헤겔의 압도적인 지적 영향력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었다는 사실을 합리적으로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찾지 못한 것이다. 이들 대부분은 그런 설명을 제시하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고, 그냥 “헤겔주의의 쇠락”이라는, 전적으로 부정적인 항목명(rubric) 아래에 헤겔 사후 일어난 논쟁들을 연대기에 기록하기만 했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들의 내용은 매우 중요했으며, 형식적인 철학적 수준은, 오늘 날의 기준으로도,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 이 논쟁들은 헤겔학파의 다양한 경항들 사이에서, 즉 헤겔 우파, 헤겔 중앙파, 특히 슈트라우스, 바우어, 포이어바흐, 맑스와 엥겔스 등의 헤겔 좌파 사이에서 일어났다. 이 기간을 종결하기 위해, 이 철학사가들은 단순히 헤겔철학 운동에 어떤 절대적인 “종언”을 설정했다. 그러고선 칸트로의 복귀로(헬름홀츠, 젤러, 리프만, 랑게) 1860년대를 시작하는데, 이 복귀는 다른 어떤 것과도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철학적 발전의 새로운 시기로 나타난다. 이런 식의 철학사는 세 가지의 큰 한계를 갖는데, 이 중 둘은 그 자체를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사상사의 영역 안에서 어느정도 완전히 수정될 수 있다. 실제로, 최근 몇년간 좀 더 철저한 철학자들은, 특히 딜타이와 그 학파는 이 두 측면에 있어서 일반적인 철학사에 대한 제한된 관점을 꽤나 확장했다. 따라서 이 두 한계는 원리적으로야 극복된 것이지만, 실천적으로는 아직도 살아남았고 또 오랫동안 존속할 것이다. 그러나, 세번째 한계는, 사상사의 영역 안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해결될 수 없으며, 결과적으로 현대의 부르주아 철학사가들이 원리적으로도 극복하지 못했다.
19세기 후반 부르주아 철학사의 세 한계 중 첫째는 “순수히 철학적”이라는 것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 당대의 이데올로그들은 철학에 포함된 사상이 철학뿐만이 아니라 실증과학이나 사회적 실천에도 나타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이러한 일이 정확히 헤겔철학과 관련하여 대규모로 시작되었다는 점을 보지 못했다. 두 번째 한계는 “지역적”인 것으로, 지난 세기 후반 독일의 철학교수에게 전형적인 것인데, 바로 이 뛰어난 독일인들이 독일 국경 저 너머에 다른 철학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 것이다. 그렇게 몇몇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헤겔의 체계가 수십년 동안 독일에서는 죽은 것으로 공표되었지만 몇몇 외국에서는 단지 내용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그 체계와 형식 또한 계속하여 번창했다는 것을 보지 못했다. 최근 수십년간 철학사의 발전에 있어서 그 관점에 대한 처음의 이 두 한계는 원리적으로 극복되었고, 전술한 1850년대 이후의 교과서적인 철학사는 최근에 상당히 개선되었다. 그럼에도 부르주아적 철학자나 역사가들은 자신들의 역사적 전망에 대한 세 번째 한계를 극복할 수 없을진데, 그에 대한 극복은 이 “부르주아적” 철학자와 철학사가들이 자신들의 역사적이고 철학적인 학문 전체에 가장 본질적으로 선험적인 것을 구성하는 부르주아 계급적 관점을 폐기하는 것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19세기 철학의 순수히 “사상적인” 발전으로 현상하는 것은 사실 부르주아적 사회 전체의 구체적인 역사적 발전과 연관지어짐으로써만 완전히 그리고 본질적으로 파악될 수 있기에 그렇다. 부르주아적 철학사가들이 현재의 발전 단계에서 주의깊고 또 공명정대하게 연구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관계이다.
이는 오늘까지 19세기 철학의 일반적인 발전 단계가 왜 “초월적”으로 남아있어야만 했는가를 설명해준다. 현대 부르주아적 철학사에 왜 “공백”이(1840년대 헤겔주의 운동의 “종언”이나 그 이후 및 1860년대 철학의 “재부활” 이전 사이의 빈 부분과 관련하여 이미 설명하였음) 있는지도 설명해준다. 오늘 날 부르주아적 철학사가 이전에는 성공적으로 이해했던 구체적 본질을 지닌 독일철학의 한 시기를 어찌하여 더 이상 일관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지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달리 말하자면, 헤겔 이후 철학사상의 발전도, 칸트에서 헤겔로 향하는 이전 철학의 진화도 단순한 사상의 사슬로 이해될 수 없다. 일반적으로 역사서에서 “독일 관념론”의 시대라 불리는 최근 시기 전체의 본질과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려는 시도는 그 무엇이든지 간에 그 전체 형태와 과정에 중핵적인 특정 관계들을 함께 고려하지 않거나 단지 피상적으로 혹은 뒤늦게 고려하는 한 절망적으로 실패하리라. 이것이 저 시대의 “지적 운동”과 그 동시대에 있었던 “혁명적 운동” 사이의 관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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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1) 대충 딜타이나 리케르트, 카시러처럼 정신과학이나 상징형식 타령했던 양반들을 말하는 듯.
2) 사회주의에 칸트 윤리학 박은 베른슈타인이나 마흐 실증주의 박은 보그다노프 같은 양반들을 말함. 플레하노프가 자주 깠음.
대충 2~3개 정도로 나눠서 올리려고 했는데 뭔가 중간에 커찮다고 드랍할 느낌이라 때려침 방지를 위해 초반부만 일단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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