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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번역] 5. 바스티아(Frédéric Bastiat) (2)

헌드레드필드프라이징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4.02.07 21:5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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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제스 공부하기 Mises Studies in Korea - 경제사상사-오스트리아 학파의 위대한 경제학자 15인_박종운 역 5. 바스티아(Frédéric Bastiat): 프랑스 혁명과 한계 혁명의 중간 - 딜로렌쪼(Thomas J. Dilorenzo) 끌로드 프레데릭 바스티아(Claude Frédéric Bastiat)는 사유재산권, 자유시장, 그리고 제한 정부를 옹호했던 프랑스의 경제학자, 법률가, 그리고 저술가였다. 바스티아 저작들의 주요한 근본 주제는 아마도, 정부가 시민들을 도둑들이나 침략들로부터 생명, 자유, 그리고 재산을 보호하는 기능으로 국한하는 한, 자유시장이 내재적으로 개인들 간의 “경제적 조화”의 원천이라는 것이었다. 바스티아에게 정부의 강압은, 그것이 개인의 안전, 자유, 그리고 재산권을 보장하는데, 정의가 모든 사람들을 통치하도록 하는데 봉사한다면, 그때만 정당하다.* (*주: Frédéric Bastiat, <법(The Law)>, Selected Essays on Political Economy, George B. de Huszar, 편집 (Irvington-on-Hudson, N. Y.: Foundation for Economic Education, 1995), p.52.) 바스티아는―오스트리아 학파의 주요 주제인―자유시장의 계획 조정 기능(plan-coordination function)을 강조하였다. 이는 그의 사고가 애덤 스미스의 저작들 일부에 의해서 그리고 위대한 프랑스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인 세(Jean-Baptiste Say), 케네(François Quesnay), 트라시(Destutt de Tracy), 콩트(Charles Comte, 프랑스의 법률가 언론인 정치평론가. [사회학자 오귀스트 콩트와는 다른 사람임]),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프랑스로 이주했던) 캉티용, 그리고 튀르고에 의해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들 프랑스 경제학자들은 역동적이고 경쟁적인 과정으로서의 시장, 화폐의 자유 시장 진화, 주관적 가치 이론, 한계효용 및 한계수익 체감의 법칙, 원료 가격의 한계 생산성 이론, 그리고 특별하게는 가격통제의 무용성 그리고 전반적으로는 정부의 경제 간섭의 무용성 등등의 개념을 앞서 발전시켜 옴으로써 현대 오스트리아 학파에 대한 선구자들이 되었다. 바스티아의 지적 배경 바스티아는 10살 때 부모를 잃었고, 엄한 조부모에게서 양육되고 교육받았다. 약 17살에 학교를 떠나 바욘(Bayonne) 읍에 있는 가족의 수출사업체에 일하러 갔다. 거기서 그는 문닫은 창고들, 줄어드는 인구, 그리고 무역 제한 덕에 야기된 가난과 실업의 증가를 관찰하면서 먼저 보호주의의 악들을 알게 되었다. 25세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뮈그롱(Mugron)의 가족 장원(莊園)을 물려받아 다음 20여 년간은 신사 농부이자 학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바스티아는 사람들을 고용하여 가족 농장을 경영하고, 그럼으로써 자신은 지적 추구에 열중할 수 있었다. 그는 서적들을 탐독하였고, 사실상 모든 유형의 문헌들을 가지고 친구들과 토론하고 논쟁하였다. 그의 절친한 친구는 그의 이웃인 쿠드로이(Felix Coudroy)였다. 쿠드로이와 바스티아는 철학, 역사, 정치학, 종교. 여행, 시(詩), 정치경제, 전기(傳記) 등등에 대한 엄청나게 많은 책들을 독파하였다. … 이들 대화 속에서 바스티아의 사상들이 발전되고 그의 사고들이 성숙되었다.* (*주: Dean Russell, Frédéric Bastiat: Ideas and Influence (Irvington-on-Hudson, N.Y.: Foundation for Economic Education, 1969), pp. 22-23.) 쿠드로이는 본래 루소(Rousseau) 추종자였고, 대부분의 루소 숭배자들처럼, 그 경우 지금도 그러하듯이, 사회주의자였다. 그러나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연설을 하는 것보다 항상 1대1 대화를 선호했다고 이야기했던 바스티아는 쿠드로이를 고전파적 자유주의로 전향시켰다. 바스티아는 1834년 4월에 글을 처음 출간하였다. 그것은 보르도(Bordeaux), 르아브르(Le Havre) 그리고 리용(Lyons)의 상인들이 농업생산물에 대한 관세를 없애되 제조업에 대해서는 유지해달라는 청원(請願)에 대한 반응이었다. 바스티아는 농업생산물에 대해서는 상인들의 입장을 칭찬하였지만, 그들 자신을 위해서 보호주의를 원하는 그들의 위선에 대해서는 그들을 맹비난하였다. 그는 “당신들은 소수를 위한 특권을 요구한다”고 썼다. 그렇지만 “나는 모두를 위해 자유를 요구한다.”* (*주: Ibid., p. 24.) 그 뒤 그는 왜 모든 관세들이 완전하게 사라져야 하는지를 설명하였다. 바스티아는 <세금과 포도주(The Tax and the Vine)>라는 제목의 두 번째 글에서 포도주에 대한 모든 내국세에 반대하면서 경제적 자유를 위한 그의 주장을 계속해서 연마했다. 그리고 세 번째 글에서는 토지에 대한 모든 세금 그리고 모든 형태의 무역 제한들에 반대하였다. 그런 뒤 1844년 여름에 바스티아는 프랑스에서 가장 권위 있는 경제학회지인《이코노미스트지(Journal des Economistes)》에 프랑스와 영국의 관세 효과에 대한 원고를 자청해서 보냈다. 편집자는 <영국과 프랑스 관세의 영향(The Influence of English and French Tariffs)>이라는 글을 1844년 10월 판에 실었는데, 그것이 전 유럽은 아니라고 해도 프랑스에서 나타났던 주장 중 일반적으로 경제적 자유를 위한, 특별하게는 자유무역을 위한,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글에서 바스티아는 전(前) 오스트리아 학파 전통의 경제학자들에게 축적된 지혜를 완전하게 이해하고 있음을 먼저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자신을 경제적 사상들을 명석하게 종합한 사람이자 조직한 자로 우뚝 세웠다. 그는 즉각적으로 전국적 국제적 명성을 얻었고, 자유무역에 대한 동료 옹호자이자, 1850년에 영국에서 모든 무역 제한들을 폐지하는데 성공했던 영국의 반곡물법연맹(Anti-Corn Law League) 지도자 콥덴(Richard Cobden)과도 친구가 되기 시작했다. 바스티아는 프랑스에서 비슷한 조직―프랑스 자유무역협회―을 만들었다. 이것은 바스티아 사망 10년 후 1860년대에 프랑스에서 대부분의 무역 장벽들을 제거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바스티아는 자유무역협회의 신문 《자유교환(Le Libre-Exchange)》의 편집자로서 그의 영향력을 전파하는데 특별히 힘을 발휘했다. 20년간의 격렬한 지적 준비 이후, 바스티아의 입에서 글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틀림없이 그때까지 자유무역을 가능한 한 가장 잘 방어한 최고의 문헌인 《경제적 변론(Economic Sophisms)》이라는 그의 첫 번째 책을 곧바로 냈다.* (*주: Frédéric Bastiat, 《경제적 변론(Economic Sophisms)》, (Irvington-on-Hudson, N.Y.: Foundation for Economic Education, 1966).) 그는 곧이어 《경제적 조화(Economic Harmonies)》* (*주: Frédéric Bastiat, 《경제적 조화(Economic Harmonies)》, (Irvington-on-Hudson, N.Y.: Foundation for Economic Education, 1966).) 를 냈고, 그의 글들은 프랑스 전역의 신문과 잡지들에 실리게 되었다. 1846년에 그는 프랑스 과학아카데미의 교신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그의 저작은 즉각적으로 영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그리고 독일어로 번역되었다. 자유무역협회는 곧 벨기에, 이탈리아, 스웨덴, 프러시아, 그리고 독일에서도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이 모든 것이 바스티아의 프랑스 자유무역협회에 기초를 둔 것이다. 바스티아의 오스트리아 학파적 발상들 바스티아가 프랑스에서 경제적 여론을 형성하는 동안, 카를 마르크스는 《자본론(Das Kapital)》을 쓰고 있었고, 자본가의 경제적 이득들이 필연적으로 노동자들을 희생시켜서 온 것이라는 “계급 갈등”과 같은 사회주의적 관념이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바스티아의 《경제적 조화(Economic Harmonies)》에서 그는 왜 계급갈등의 반대가 맞는지를, 만일 인류의 이해관계들이 정부가 자신의 책임성을 도둑들, 살인자들 그리고 국가를 자신의 동료 시민들을 약탈할 수단으로 사용하려고 하는 특수 이해관계 그룹들을 억제하는데 한정하는 그런 자유로운 사회에서 발휘될 수 있다면, 그것들은 본질적으로 조화로운 것임을 설명했다. 자본 이론 바스티아는 자본축적이 노동의 한계 생산성을 올림으로써,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 봉급을 올림으로써, 노동자들이 어떻게 부유하게 되는 것으로 귀결되는가를 완벽하게 설명함으로써 오스트리아 학파의 자본이론에 기여했다. 바스티아가 썼듯이, 자본축적은 또한 더 싸고 더 나은 질의 소비재로도 귀결될 것이다. 이는 또한 실질 임금도 올릴 것이다. 그는 또한 자본이 더 많아질수록 자본에 대한 이자가 어떻게 하락하는지도 설명하였다. 따라서 자본가들과 노동자의 이해관계들은 정말이지 조화로운 것이며, 자본시장에 대한 정부간섭이야말로 자본 소유자들은 물론 노동자들을 빈곤하게 만들 것이다. 바스티아는 또한 자본을 다른 사람들에게, 즉 소비자들에게 혜택을 주는 방식으로 사용하지 않는 한, 왜 아무도 자유 시장에서 자본 축적을 할 수 없는가도 설명하였다. 바스티아가 쓰기를, 현실에서는 자본은 항상 그것을 소유하고 있지 않은 사람들의 바램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사용된다. 그의 선행자들 대부분과는 전혀 다르게, 바스티아는 “경제학을 소비자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필요하다. … 모든 경제적 현상은 … 반드시 그것들이 소비자에게 가져오는 이익 및 불이익들에 의해서 판단되어야만 한다.”* (*주: Russell, Ideas and Influence, p. 32.) 고 믿었다. 미제스는 《인간행동(Human Action)》에서, 비록 은행가들이 일상적 결정을 통해 자본의 배분을 “통제하는” 듯이 보일 수는 있지만, 성공적인 사업들이 뒷바라지하는 것은 소비자들의 선호이기 때문에, 경제라는 배의 “선장”은 소비자들이라고 적음으로써 이 점을 재차 확인하였다. 주관적 비용 주관적 가치 이론에 대한 바스티아의 가장 위대한 기여는 그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What is Seen and What is Not Seen)>이라는 글에서 그 이론을 엄격하게 적용했던 방법이다.* (*주: Bastiat,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What is Seen and What is Not Seen)>, Selected Essays, pp. 1-50. ) 그 글에서 바스티아는 정부의 자원할당에 숨어있는 기회비용들에 초점을 들이댐으로써 정부 지출로 일자리들과 부를 창출할 수 있다는 원(原) 케인스주의적 관념을 박살내었다. 《경제학 하나의 교훈으로(Economics in One Lesson)》 초판에서 헨리 해즐릿은 다음과 같이 썼다. 현재의 논의가 견지하고 있는 종류의 설명 틀과 관련하여 나는 바스티아의 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What is Seen and What is Not Seen)> 덕을 가장 크게 입고 있다. 현 저작은 사실상 바스티아의 팸플릿에서 발견되는 접근법을 현대화하고, 확장하고, 그리고 일반화한 것에 불과할 수 있다.* (*주: Henry Hazlitt, 《경제학 하나의 교훈으로(Economics in One Lesson)》, (New York: Harper and Brothers, 1946), p.1.) 인간행동의 과학 바스티아가 지적 노력으로서의 경제학에 대해 서술했던 방식은 현대 오스트리아 학파가 인간행동의 과학 즉 인간행동학(praxaeology)이라고 명명했던 것과 사실상 똑같다. 바스티아는 자신의 책 《경제적 조화(Economic Harmonies)》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정치경제학의 주제는 인간이다. … 비교하고, 판단하고, 선택하고, 그리고 행동할 능력을 갖춘 인간이다. 서로를 위해서 일하고, 자신들의 노력들을 전달하고 자신들의 서비스들을 시간과 공간을 통해서 교환할 … 이 재능이 … 엄밀하게 말해서 경제과학을 이루는 것이다.* (*주: Bastiat, Economic Harmonies, p. 35.) 현대 오스트리아 학파들과 마찬가지로, 바스티아도 경제학을 “교환의 이론(the Theory of Exchange)”으로 보았다. 시장 참여자들의 바램은 “저울질될 수도 없고 측정될 수도 없다. … 교환은 가치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이다.”* (*주: Ibid., p. 36.) 그래서 바스티아에게는 현대의 오스트리아 학파에게서처럼 가치는 주관적이며, 사람들이 사물에 대해서 가치를 어떻게 매기는가를 알 유일한 방법은 시장 교환에서 드러나듯이 그들이 보이는 선호들을 통해서다. 자발적인 교환은 따라서 반드시 상호 이익이 된다. 이것은 경제이론의 역사에서 중요한 이론적 혁신이었다. 왜냐하면 많은 영국 경제학자들이―물리적 대상의 생산에 의해서만 가치가 결정된다는 오도된 관념인―“물리학적 오류(physical fallacy)”에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다. 로스바드가 지적했듯이, 가치가 자발적 교환에 의해서 창출된다는 것을 이해한 덕분에 “바스티아와 프랑스 학파는 자유시장이 원활하고 조화로운 경제의 조직화로 이어지는 길임을 강조할 수 있었다.”* (*주: Murray N. Rothbard, Classical Economics, vol. 2, An Austrian Perspective on the History of Economic Thought (Cheltenham, U. K.: Edward Elgar, 1995), p. 446.) 로스바드 자신도 바스티아의 주관주의 교환이론을 1세기 후의 현대 복지경제학(welfare economics, 후생경제학)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에서 훨씬 더 충분하게 발전시켰다. 바스티아의 저작에서 또 다른 로스바드적 주제(혹은 로스바드의 저작에서 바스티아적 주제)는 토지 지대와 관련이 있다. 바스티아 시대에 사회주의자들은 결국 토지를 만든 것이 현재의 토지 소유자들이 아니라 신이기 때문에 토지 지대를 받을 자격이 있는 이는 없다는 주장을 만들어냈다. 바스티아의 반응은 토지 지대야말로 정말이지 정당하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토지 소유자들이 토지를 가다듬고 배수를 하고 농업에 적합하게 만드는데 가치 있는 서비스를 투여했기 때문이다. 만일 이 모든 투자비용들이 자본화된다면, 그 경우에는 토지 소유자들이 결국 토지 지대를 통해 예외적 소득을 버는 것이 아닌 가치 있는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임이 분명해진다고 바스티아는 설명했다. 로스바드는 이후 그의 “정주론(homesteading)”을 사유재산권을 수립하는 적절한 수단으로 방어할 때 이 사상을 더 충분하게 발전시켰다. 정부의 약탈 바스티아는 자발적 거래가 내재적으로 조화로운 것임을 확립하는 한편, 어떻게 해서 정부의 자원 배분이 자유시장의 자연적 조화에 반드시 적대적이고 파괴적인가도 설명했다. 정부가 그 자신 부를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에, 정부는 반드시 일부에게서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주어야 한다―피터(Peter)에게서 강탈하여 폴(Paul)에게 주는 것이 정부의 본질이라고 바스티아가 기술했듯이. 더욱이 특수 이해관계 그룹들이 국가의 보호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돈에 점점 더 많이 눈독을 들일수록 그들은 자유시장의 생산적 능력을 잠식한다. 바스티아는 “국가는 커다란 가공(架空)의 실체인데, 그것을 통해 모든 사람이 다른 모든 사람들을 희생시켜 살려고 한다”고 썼다.* (*주: Bastiat, Selected Essays, p.144.) 바스티아는 아마도 순수 경제이론이 아니라―경제와 국가의 상호관계에 대한 연구인―정치경제학 분야에서의 저작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을 것이다. 그는 국가가 어떻게 작동되는지를―무슨 동기가 그것을 유도하는지를―이해하려고 하였고, 그리고 어느 누구보다도 더 그것을 잘 해냈다. 여기서는 바스티아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사상에 대해서 심도 있는 논의를 할 여유가 없어서, 몇 가지 사례를 드는 것만으로도 족할 것이다. 바스티아에 따르면, 정부는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자신의 “본질적” 기능들에 한정되었을 때만 그러하다. 그는 “어떤 사회도 법률들이 일정 정도 존중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고 믿었지만, 그러나 동시에 법률 자체들이 존중받을만할 때만 사회들이 생겨날 수 있다.* (*주: Russell, Ideas and Influence, p. 5.) 더 나아가 법률은 다수결에 근거하여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떤 개인도 다른 개인을 노예화할 권리가 없기에, 그 경우 [다수라는] 어떤 개인들의 그룹도 그런 권리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주: Ibid.) 다수결 민주주의를 통한 모든 소득 재분배는 따라서 “법적 약탈(legal plunder)”이고 정의(定義) 상 부도덕하다. “재화가 국경을 넘어 다니지 못하면, 군대가 국경을 넘을 것이다.”라는 구호는 흔히 바스티아가 한 말로 돌려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가 자유 무역이 아마도 번영뿐만 아니라 평화로 향한 가장 확실한 길일 것이라는 주장을 너무나 강력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는 역사를 통틀어 관세야말로 전쟁의 주된 원인이었음을 이해했다. 결국 보호무역주의야말로 전쟁 시에 적들에 의한 (해상봉쇄) 시도와 동일한 종류의 해악을 평화 시에 정부가 자신들의 시민들에게 끼치려는 시도다. 경쟁적 발견 바스티아는 자유시장의 경쟁이 하이에크의 말을 빌면 “역동적인 발견 절차(dynamic discovery procedure)”임을 이해했다. 여기서는 개인들이 자신들의 경제적 목표들을 달성하기 위해 자신들의 계획을 조정하려고 애쓴다. 모든 형태의 정부 간섭은 그 과정을 방해하거나 왜곡한다. 왜냐하면 일단 법률이나 규제가 공포되면, 사람들은 더 이상 논의할 필요도, 비교할 필요도, 미래의 계획을 세울 필요도 없다. 법률이 그들을 위해서 이 모든 것을 해주기 때문이다. 지혜는 사람들에게 아무 쓸모없는 것이 되고, 그들은 개성을 잃고, 자유도 잃고, 재산권도 잃는다.* (*주: Ibid., p.11) 거짓 이타주의 바스티아는 또한 사회주의자들의 거짓 “박애주의(philanthropy)”를 꿰뚫어보았다. 그들은 국가의 보호를 통해서 다른 순진한 사회구성원들의 부를 약탈함으로써 이런 저런 사람들이나 그룹들을 도울 수 있다고 끊임없이 제시하지만, 그러한 모든 계획들은 “법적 약탈, 조직된 불의(organized injustice)”에 바탕을 둔 것이다.* (*주: Ibid.) 오늘날의 신보수주의(neo-conservative)처럼, 1800년대 사회주의자들도 고전파 자유주의에 “개인주의자”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는 고전파 자유주의가 박애, 공동체, 그리고 제휴에 반대하는 것이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바스티아가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지적했듯이, (다른 고전파 자유주의자들처럼) 자신은 오직 강제된 제휴에만 반대한 것이지, 순수하고 자발적인 공동체들과 제휴들의 경우는 옹호하였다. “정부가 했던 한 가지 일에 반대할 때마다, 사회주의자들은 [그릇되게도] 정부가 하는 모든 종류의 일에 우리가 반대하고 있다고 결론짓는다.”* (*주: Ibid., p. 12. 또한 Bastiat, <정의와 박애(Justice and Fraternity), Selected Essays, pp.116-139도 보라.) 자연권과 교환의 자유 바스티아는 또한 1600년대와 1700년대 자연권 이론가들과 현대의 오스트리아 학파 구성원들, 특히 자유 시장의 방어를 그저 효용주의자들의 주장에만 근거하기보다는 자연권에도 근거를 두고 있는 로스바드를 잇는 연결고리로 보일 수도 있다.* (*주: 자유에 대한 하이에크의 방어는 대체로 편의(그것이 사회에서 지식의 효율적 사용을 촉진하는가?)와 효용주의(“불편부당한” 판단에 의해서 결정된 대로 “사회적” 편익이 “사회적” 비용을 능가하는가?)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미국의 (혹은 스웨덴의) 복지국가를 규정하는 모든 정부 간섭을 사실상 시인한다. 로스바드와 바스티아 같은 자연권 이론가들은 이런 일을 결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스티아에게는 모든 형태의 집단주의가 (합법화된 도둑질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도덕적으로 비난받아야 하고, 그리고 자유시장과 사유재산권으로 가능해지는 인간 이해관계들의 자연적 조화에 대한 장애물이었다. 바스티아는 집단주의가 법적 약탈이라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천성적으로 자신이 (주관적으로) 원하는 것들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자신의 이기심 내에서 행동하는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인간의 본성을 완성하는데 사유재산권이 본질적이라고 믿기도 했다. 사유재산권에 반대하는 주장은 도둑질과 노예제가 도덕적으로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사유재산권 보호는 정부의 (유일하게 정당하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우선적인 기능이다. 정치가는 “우리들 사람들에 대한 그리고 우리들의 재산에 대한 어떠한 권위도 가지고 있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그에 앞서 존재하기 때문이고, 그의 임무는 그것들을 보장으로 둘러싸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 Bastiat, <재산권과 법(Property and Law)>, Selected Essays, pp. 97-115.) 바스티아는 그때까지 만들어졌던 어떤 것보다도 강력하게 자유무역을 방어하였다. 그의 주장은 수많은 경제학 개념 위에 수립되었다. 자유무역을 옹호하는 주장을 집약하자면, 그것은 관세의 문제가 아니라, 권리의 문제, 정의의 문제, 공공질서의 문제, 재산권의 문제였다. [정부가 창출했던] 특권은 어떤 형태로 표현되건 재산권의 부정 혹은 그에 대한 비아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재산권은 일단 한 가지 형태로 약화되면, 곧바로 수천 가지의 다른 형태로 공격을 받을 것이다.”* (*주: Ibid., p. 111.) 《경제적 변론(Economic Sophisms)》에서 바스티아는 그때까지 구축되었던 어떤 것보다 더 완전하게 자유무역을 옹호하는 주장을 완성했다. 이는 자발적 거래의 상호 이익, 비교 이익의 법칙, 소비자뿐만 아니라 생산자에게도 경쟁이 이익이 된다는 것, 그리고 무역장벽과 전쟁 사이의 역사적 연결고리와 같은 경제적 개념들에 적용되었다. 바스티아가 설명하기를, 자유무역이 의미하는 것은 더 낮은 가격에 재화와 서비스가 풍부해지는 것, 더 높은 실질 임금에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일자리를 얻는 것, 제조업자들에게 더 많은 이윤이 돌아가는 것, 농부들에게 더 높은 생활수준이 이뤄지는 것, 세금의 형태로 보통의 혹은 더 낮은 수준에서도 국가에 더 많은 수입이 생기는 것, 자본과 노동 그리고 천연 자원들을 더 생산적으로 사용하는 것, 우선적으로 관세들 독점들 기타 시장의 합법적 왜곡들과 같은 경제적 불의에 기반한 … “계급 투쟁”의 종식, 식민주의라는 “자살적인 정책”의 종식, 국가정책으로서의 전쟁의 제거,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가능한 한 최고의 교육, 주택정책, 그리고 의료보호를 제공하는 것일 것이다.* (*주: Russell, Ideas and Influence, p. 42.) 바스티아는 이 모든 경제 원리들과 결과물들을 풍자와 우화들을 사용하여 설명하는데 천재성을 발휘했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다음과 같은 법률을 공표할 것을 “요구했던” “양초 제조자들의 청원”이다. 햇볕이 집으로 들어올 수 있는 모든 창문들과 천정의 창 그리고 다른 문들, 구멍들, 틈새들을 모두 막아야 한다. 이 공짜 햇볕이야말로 양초를 만드는 우리 사업을 해치고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바스티아의 또 다른 풍자는 “국제수지”가 반드시 흑자여야 한다는 보호주의자의 주장을 분쇄한 것이다. 프랑스 상인이 5만 달러 가치가 있는 재화를 미국으로 실어 보냈고, 17,000달러의 이윤을 보고 팔았다. 그리고 67,000달러의 가치가 있는 미연방 면화를 구매했고, 이것을 그는 프랑스로 수입했다. 따라서 프랑스는 수출했던 것보다 더 많이 수입했기 때문에 프랑스는 국제수지의 “적자”를 “겪는다.” 바스티아가 비꼬면서 적고 있듯이, 더 “흑자인” 상황은 상인이 미국에서 두 번째 거래를 시도했던 곳에서 출항하자마자 폭풍우를 만나 배가 침몰했던 상황이었어야 할 것이다. 항구에 있는 관세사무소는 따라서 아주 “흑자”인 국제수지를 만들어냄으로써 수입보다는 더 많은 수출을 기록하게 될 것이다. 바스티아는 그러나 폭풍우에 의존할 수 없다면, 정부로 하여금 모든 상인들의 재화가 프랑스 항구를 떠난 뒤 그것들을 바다에 내던지도록 하는 것, 그럼으로써 “국제수지의 흑자”를 보장하는 것이 “최선의” 정책이라고 논증했다! 이런 종류의 문학적 천재성이 발휘되었기에, 바스티아의 사후 1세기만에 헨리 해즐릿이 바스티아의 떨어진 망토를 집어 들고자 하는 의욕을 가졌다. 오스트리아 학파에 대한 바스티아의 지적 유산 바스티아의 저작은 세, 캉티용, 드 트라시, 샤를르 꽁트, 튀르고, 그리고 케네와 같은 전(前) 오스트리아 학파 경제학자들의 사상들과 카를 멩거 및 그의 제자들의 오스트리아 학파 사이를 잇는 지적 다리를 놓아주었다. 그는 또한 일반 경제 교육―특히 국가가 그리고 국가를 지적으로 변호했던 이들이 창출했던 수많은 신화들 및 미신들을 깨버리는 종류의 경제교육―도 경제학자들의 (의무는 아니라고 해도) 본질적 기능이라는 것을 믿었던 오스트리아 학파의 학자적 모델이기도 했다. 미제스는 이런 점에서 뛰어난 역할 모델이었고, 다른 오스트리아 학파 경제학자들 중에서도 해즐릿과 로스바드도 그러했다. 미제스가 말했듯이, 초기 경제학자들은 “경제학의 문제들을 연구하는데 헌신했고,” 그리고 “강의를 하고 책을 씀으로써 그들은 동료 시민들에게 자신들의 사고의 결과들을 전파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건전한 정책들이 퍼지도록 하기 위해서 여론에 영향을 끼치려고 하였다.”* (*주: Ludwig von Mises, Human Action: A Treatise on Economics, 3수정판 (Chicago: Henry Regnery,1963), p. 869.) 오늘날까지 바스티아의 저작은 마땅히 받아야할 만큼의 칭찬을 받지 못했다. 로스바드가 설명했듯이, “열렬히 그리고 일관되게 반간섭주의(laissez-faire)적인 사람이면 누구나 당연히 중요한 학자이자 경제 이론가일 수 있다는 믿음을 경제적 자유에 대한 오늘날의 무절제한 비판들에서는 발견하기가 힘들기”* (*주: Rothbard, Classical Economics, p. 449.) 때문이다. 심지어 일부 현재의 오스트리아 학파 경제학자들도 경제 사상들―특히 경제 정책 사상들―을 일반 대중에 전파하는 행동이 “경제과학”의 실천자로서 왠지 무가치하다고 믿는 듯한 것은 기이하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바로 미제스 자신이 채택했고, 모든 면에서 위대한 프랑스인 오스트리아 학파 경제학자인 바스티아(Frédéric Bastiat)적 전통에 있는 로스바드가 엄청나게 공격적으로 그리고 뛰어나게 이행했던 학자적 모델이었기 때문이다. 읽을 거리들 Bastiat, Frédéric. 1995. Selected Essays on Political Economy. George B. de Huszar, ed. Irvington-on-Hudson, N.Y.: Foundation for Economic Education. --. 1966. Economic Sophisms. Irvington-on-Hudson, N.Y.: Foundation for Economic Education. --. 1966. Economic Harmonies. Irvington-on-Hudson, N.Y.: Foundation for Economic Education. Hazlitt, Henry. 1946. Economics in One Lesson. New York: Harper and Brothers. Mises, Ludwig von. 1963. Human Action: A Treatise on Economics. 3rd rev. ed. Chicago: Henry Regnery. Rothbard, Murray. 1995. Classical Economics. Vol. 2. An Austrian Perspective on the History of Economic Thought. Cheltenham, U.K.: Edward Elgar. Russell, Dean. 1969. Frédéric Bastiat: Ideas and Influence. Irvington-on-Hudson, N.Y.: Foundation for Economic Education. | Facebook

경제사상사-오스트리아 학파의 위대한 경제학자 15인_박종운 역 5. 바스티아(Frédéric Bastiat): 프랑스 혁명과 한계 혁명의 중간 - 딜로렌쪼(Thomas J. Dilorenzo) 끌로드 프레데릭 바스티아(Claude Frédéric Bastiat)는 사유재산권, 자유시장, 그리고 제한 정부를 옹호했던 프랑스의 경제학자, 법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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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티아의 지적 배경


바스티아는 10살 때 부모를 잃었고, 엄한 조부모에게서 양육되고 교육받았다. 약 17살에 학교를 떠나 바욘(Bayonne) 읍에 있는 가족의 수출사업체에 일하러 갔다. 거기서 그는 문닫은 창고들, 줄어드는 인구, 그리고 무역 제한 덕에 야기된 가난과 실업의 증가를 관찰하면서 먼저 보호주의의 악들을 알게 되었다. 25세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뮈그롱(Mugron)의 가족 장원(莊園)을 물려받아 다음 20여 년간은 신사 농부이자 학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바스티아는 사람들을 고용하여 가족 농장을 경영하고, 그럼으로써 자신은 지적 추구에 열중할 수 있었다. 그는 서적들을 탐독하였고, 사실상 모든 유형의 문헌들을 가지고 친구들과 토론하고 논쟁하였다. 그의 절친한 친구는 그의 이웃인 쿠드로이(Felix Coudroy)였다.


쿠드로이와 바스티아는 철학, 역사, 정치학, 종교. 여행, 시(詩), 정치경제, 전기(傳記) 등등에 대한 엄청나게 많은 책들을 독파하였다. … 이들 대화 속에서 바스티아의 사상들이 발전되고 그의 사고들이 성숙되었다.*2


(*주2: Dean Russell, Frédéric Bastiat: Ideas and Influence (Irvington-on-Hudson, N.Y.: Foundation for Economic Education, 1969), pp. 22-23.)



쿠드로이는 본래 루소(Rousseau) 추종자였고, 대부분의 루소 숭배자들처럼, 그 경우 지금도 그러하듯이, 사회주의자였다. 그러나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연설을 하는 것보다 항상 1대1 대화를 선호했다고 이야기했던 바스티아는 쿠드로이를 고전파적 자유주의로 전향시켰다.


바스티아는 1834년 4월에 글을 처음 출간하였다. 그것은 보르도(Bordeaux), 르아브르(Le Havre) 그리고 리용(Lyons)의 상인들이 농업생산물에 대한 관세를 없애되 제조업에 대해서는 유지해달라는 청원(請願)에 대한 반응이었다. 바스티아는 농업생산물에 대해서는 상인들의 입장을 칭찬하였지만, 그들 자신을 위해서 보호주의를 원하는 그들의 위선에 대해서는 그들을 맹비난하였다. 그는 “당신들은 소수를 위한 특권을 요구한다”고 썼다. 그렇지만 “나는 모두를 위해 자유를 요구한다.”*3 그 뒤 그는 왜 모든 관세들이 완전하게 사라져야 하는지를 설명하였다.


(*주3: Ibid., p. 24.)



바스티아는 <세금과 포도주(The Tax and the Vine)>라는 제목의 두 번째 글에서 포도주에 대한 모든 내국세에 반대하면서 경제적 자유를 위한 그의 주장을 계속해서 연마했다. 그리고 세 번째 글에서는 토지에 대한 모든 세금 그리고 모든 형태의 무역 제한들에 반대하였다. 그런 뒤 1844년 여름에 바스티아는 프랑스에서 가장 권위 있는 경제학회지인《이코노미스트지(Journal des Economistes)》에 프랑스와 영국의 관세 효과에 대한 원고를 자청해서 보냈다. 편집자는 <영국과 프랑스 관세의 영향(The Influence of English and French Tariffs)>이라는 글을 1844년 10월 판에 실었는데, 그것이 전 유럽은 아니라고 해도 프랑스에서 나타났던 주장 중 일반적으로 경제적 자유를 위한, 특별하게는 자유무역을 위한,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글에서 바스티아는 전(前) 오스트리아 학파 전통의 경제학자들에게 축적된 지혜를 완전하게 이해하고 있음을 먼저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자신을 경제적 사상들을 명석하게 종합한 사람이자 조직한 자로 우뚝 세웠다. 그는 즉각적으로 전국적 국제적 명성을 얻었고, 자유무역에 대한 동료 옹호자이자, 1850년에 영국에서 모든 무역 제한들을 폐지하는데 성공했던 영국의 반곡물법연맹(Anti-Corn Law League) 지도자 콥덴(Richard Cobden)과도 친구가 되기 시작했다. 바스티아는 프랑스에서 비슷한 조직―프랑스 자유무역협회―을 만들었다. 이것은 바스티아 사망 10년 후 1860년대에 프랑스에서 대부분의 무역 장벽들을 제거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바스티아는 자유무역협회의 신문 《자유교환(Le Libre-Exchange)》의 편집자로서 그의 영향력을 전파하는데 특별히 힘을 발휘했다.


20년간의 격렬한 지적 준비 이후, 바스티아의 입에서 글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틀림없이 그때까지 자유무역을 가능한 한 가장 잘 방어한 최고의 문헌인 《경제적 변론(Economic Sophisms)》이라는 그의 첫 번째 책을 곧바로 냈다.*4 그는 곧이어 《경제적 조화(Economic Harmonies)》*5를 냈고, 그의 글들은 프랑스 전역의 신문과 잡지들에 실리게 되었다. 1846년에 그는 프랑스 과학아카데미의 교신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그의 저작은 즉각적으로 영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그리고 독일어로 번역되었다. 자유무역협회는 곧 벨기에, 이탈리아, 스웨덴, 프러시아, 그리고 독일에서도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이 모든 것이 바스티아의 프랑스 자유무역협회에 기초를 둔 것이다.


(*주4: Frédéric Bastiat, 《경제적 변론(Economic Sophisms)》, (Irvington-on-Hudson, N.Y.: Foundation for Economic Education, 1966).)


(*주5: Frédéric Bastiat, 《경제적 조화(Economic Harmonies)》, (Irvington-on-Hudson, N.Y.: Foundation for Economic Education,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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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19 질문 대륙철학하는 애들은 왜 대체로 빨갱이 루트로 감? [2] ㅇㅇ(211.235) 03.20 168 0
5215 일반 자유지상주의 사회에서는 ㅇㅇ(211.234) 03.18 134 5
5213 정보 공리주의와 자유주의의 관계에 대해서 ㅇㅇ(1.247) 03.18 115 0
5212 촌평 문화적 보수주의 관련해서 짚고 싶은 것 [21] 한호배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17 405 3
5211 일반 안캡혁명론 ㅇㅇ(1.247) 03.17 108 4
5210 질문 이런 무리가 나타난다면 긍정적으로 볼 일인가 [4] ㅇㅇ(106.101) 03.17 180 0
5209 자료& [세비라]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ㅇㅇ(1.247) 03.17 69 0
5208 자료& 달러 탈출은 현실(De-Dollarisation)이자 미래다 ㅇㅇ(1.247) 03.16 79 0
5207 일반 물리적 제거가 자유지상주의에서 필수요소인 것은 아님 [1] ㅇㅇ(223.39) 03.16 160 0
5204 촌평 오늘 자 이재명 발언 [4] ㅇㅇ(1.247) 03.14 212 0
5202 일반 출산률의 감소는 긍정적인 현상인가 부정적인 현상인가 [2] ㅇㅇ(118.235) 03.13 139 0
5200 시사 비트코인, 장중 1억원 돌파…사상 최고가 경신 ㅇㅇ(1.247) 03.11 72 0
5199 자료& 6. 카를 멩거(Carl Menger) (12) 헌드레드필드프라이징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09 40 0
5192 질문 이 갤에서 주로 얘기하는 "국가주의"에 대해 질문이 있다 [5] ㅇㅇ(106.101) 03.06 24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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