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 누가 이거 이야기를 했길래 잠깐 써 봄.

애니메이션 2기 9화에서 나오는 장면인데,

보면 알겠지만 평범하게 신발끈 묶어주는 친절한 친구에 대해서 아스카 얼굴을 의도적으로 안 보여줌 + 쿠미코가 뭔가 좀 당황하는 표정이라

그냥 보면 이게 대체 뭘 의도하고 넣은 장면인지 알기가 어려움

일단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음

1) 사실은 이게 아스카와 카오리의 비밀 신호임

'오늘 밤에 빠구리 한 판 뜨자 돼지 솽녀나'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을 때 이렇게…

1) 걍 신발끈 묶어주는 카오리가 귀여움

당연한 얘기지만 남 신발끈 묶어준다는 게 보통 일은 아니지.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님 신발끈 풀렸음'이라고 말해주고 신발끈 묶을 때 뒤에서 당기는… 게 아니라 신발끈 묶는 동안 기다려 주는 정도가 보통이잖아?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게 몸을 숙여서 신발끈을 묶어준다? 이건 카오리가 아스카에게 되게 호의를 갖고 있거나 아니면 엄청 친절한 아이라는 얘기지.

괜히 유코가 내내 반해서 쫓아다닌 게 아닌 키타우지 취주악부의 천사.

Q. 아스카의 표정을 제대로 보이지 않고 눈과 입을 따로 보여준 이유는?

A. 눈 나올 땐 입이 헤벌죽, 입 나올 땐 눈이 헤벌죽하고 있어서.

Q. 쿠미코의 놀란 표정은?

A. 엄청난 레즈력…!

오케이, 의문 해결…이라고 하고 싶은데….

타케다 아야노

제9회 봤습니다. 와~ 굉장해. 여운이 엄청난 화였네요.

개인적으로는 신발끈 씬이 굉장히 마음에 들어서, '그려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략)

우리의 인성갑, 인류애의 화신인 원작자가 이 파트를 보고 기뻐했다.

따라서 훈훈한 장면 아님. 네버. 에버. 포에버.

2) 아스카는 저 장면에서 싫은 감정을 느꼈다

자연스럽게 이 결론으로 올 수밖에 없는데, 친구가 신발끈을 묶어준다고 기분 나빠할 이유가 대체 뭔가?

'오늘 쿠미코랑 약속 있는데 카오리가 비밀 신호를 보내서'

물론 아스카라면 그럴 수도 있지. 인성이 썪었으니깐. 그래도 왜 썪었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썪었느냐가 문제인데….

일단 여기도 원작과 비교해 보면 꽤 도움이 됨.

　“아.”

　갑자기 카오리가 무릎을 굽혔다. 그 움직임에 이끌려 쿠미코는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스카, 신발끈 풀렸어.”

　그렇게 말하며 카오리는 끈 끝으로 손을 뻗었다. 뱅어처럼 새하얀 손가락이 아스카의 흰 신발끈을 잡았다. 남색 스커트에서 카오리의 부드러운 허벅지가 드러났다. 무릎을 꿇은 것 같은 자세로 카오리는 아스카의 신발을 보며 무게중심을 앞으로 기울였다. 남색 교복에 동그란 주름이 잡혔다. 아스카의 몸에서 뻗어 나온 그림자가 카오리의 몸을 완전히 덮어 버렸다. 아스카는 그저 가만히 내려다볼 뿐이었다. 카오리가 신발끈을 묶는 모습을 그저 가만히 바라본다. 그 눈빛에 감정은 없었다.

　카오리의 손은 능숙한 움직임으로 풀린 끈을 나비 모양으로 매듭지었다. 자. 카오리가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아스카는 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기며 큭큭 목을 울렸다.

　“고마워.”

　“천만에.”

　카오리는 별것 아니라는 표정으로 일어났다. 어쩐지 봐선 안 될 것을 본 기분이 들어 쿠미코는 의미도 없이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그럼 오우마에, 공부 열심히 해.”

　그렇게 말하며 카오리는 쿠미코의 어깨를 두드렸다. 엇갈려 지나간 순간 달콤한 향이 쿠미코의 코끝을 스쳤다.

　“고, 고맙습니다.”

　“바이바이~.”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이는 쿠미코와는 달리 아스카는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카오리는 고개만 이쪽으로 돌려 역시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녀의 등이 작아지는 모습을 다 지켜본 후에야 아스카는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입가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카오리 귀엽지?”

　대체 무슨 의미로 한 말일까. 쿠미코는 그저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발판 유포니엄 3권에서)

이것만 봐서는 여전히 의미가 확실하지 않은데('그림자가 몸을 완전히 덮었다' 같은 서술을 보면 네거티브한 인상인 건 마찬가지지만),

원작의 이 씬을 기반으로 애니에서 '추가된 대사'를 보면 달라짐.

해당 장면에서 애니판 대사는 다음과 같음.

　카오리: 아스카, 신발끈 풀렸어.

　카오리: 아직 익숙하지 않구나.

　카오리: 이거 봐, 이렇게 묶으면 잘 안 풀려.

　(신발끈을 다 묶어줌)

　아스카: 고마워.

　카오리: 별말씀을.

　카오리: 갈게.

　아스카: 응.

　쿠미코: 고생하셨어요.

　(카오리가 간 후)

　아스카: 귀엽지?

　쿠미코: 네?

　아스카: 카오리 말이야. (애니플러스판 자막)

다른 건 같은데, 신발끈 묶어줄 때 카오리 대사가 좀 다른 게 확연히 보이지?

사람의 인상마다 다르겠지만 '돌봐 주는', '가르쳐 주는' 느낌의 대사가 두 줄 추가됐음.

다만 그렇다고 해서 깔보듯한 뉘앙스인 건 아니고, 실제로는 자기 몸을 낮춰서 신발끈을 묶어주는 거니까 이건 애정에 의한 거지.

애정을 가지고, 하지만 동등하진 않은 위치에서 돌보는 존재에서 어머니가 연상되는 건 지극히 당연한 흐름이고.

강하게 키워진 갤러들도 있겠으나… 보통은 어릴 때 어머니랑 길 가다가 신발끈 풀어지면 보통은 어머니가 매 주셨을 거고.

따라서 해당 장면은 카오리가 한 행동에서 어머니가 연상되는 바람에 아스카가 불편함을 느낀 걸로 보는 게 맞을 듯해.

딱히 이것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해당 화에서는 신발끈과 마찬가지로 다시 한 번 '발'+'묶는다'가 연상되는 게 튀어나옴.

아주 대놓고.

　(공부하다가 잠깐 쉬면서)

　쿠미코: 싫은 건 아니라고 했는데,

　쿠미코: 싫은 거죠?

　쿠미코: 어머니요.

　아스카: 좋고 싫고 그런 게 아니야.

　아스카: 왜냐면 엄마는 어디까지나 엄마니까.

　아스카: 발버둥 쳐도,

　아스카: 그 사람한테서 태어난 건 변하지 않아.

ㅇㅇ 족쇄….

배경으로 신발도 보여줌.

따라서 카오리가 신발끈 묶어주는 장면에서 아스카가 어머니를,

그리고 어머니에 의한 족쇄를 생각하고 불편해했다고 생각해도 틀리진 않을 듯함.

사실 진짜 문제는 그다음인데….

아스카가 카오리의 행동에서 불쾌감을 느꼈다면, 아스카는 카오리를 싫어하는가?

백갤러 입장에선 이게 제일 중요한 질문인데(뭐, 싫어한다는 게 공식이면 싫어하는 대로 소비할 것이지만),

이쪽이야 사실 이미 답이 나와 있는 문제이긴 함.

축제도 수영장도 아스카는 늘 카오리랑 동행했고,

수영장에서 입은 수영복은 색만 다르지 디자인이 같은 커플 수영복,

해당 에피소드에서는 카오리가 생일선물로 준 컵 두 개를 사용하고 있으며,

(원작에서는 '카오리네 집에도 같은 게 있다'는 언급을 함. 커플컵….)

졸업한 이후에는 카오리가 편지로 좋아한다고, 일부러 아스카네 학교에 가까운

학교로 진학했으니 동거하고 싶다고 고백하기도 하고, (단편집2)

졸업 후 반 년 정도 지난 시점에 등장했을 땐 동거하면서 커플링을 끼고 있음 (제2악장)

그러니 얘들이 진성 백합인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요만큼도 없으나,

다만 이 시점에서 아스카 본인은 다소 복잡한 심경일 가능성이 있을 것 같음.

아스카 어머니는 집착이 너무 쩌는 바람에 결국 남편이 도망가 버리고(..) 아스카를 속박하고 있는 인물인데,

동시에 화가 나서 아스카 뺨을 때린 다음 울먹이며 사과할 정도로 정신적으로 연약하기도 함.

이런 어머니를 데리고(..) 살았으니 아스카는 자기 나이보다 좀 더 어른스럽게,

동시에 상당한 인간불신을 갖고 자랐지.

그런 인물에게 몸을 낮춰서 신발끈 묶어주는 것도 부담스러워하지 않는 카오리는 여러 가지로 복잡한 상대였겠지.

집착도 애정에서 나오는 행동이란 걸 아니까 남의 애정을 받아도 솔직히 달갑게 느끼지 않을 텐데(어머니가 그랬을 테니),

그렇다고 해도 취주악부 공인 2대 미인 중 하나 + 유코의 보증서가 붙은 상냥한 성격 + 레이나에겐 밀렸어도 악기 실력 출중

+ 자신에 대한 분명한 애정(어머니처럼 딱히 자기 진로나 행사에 간섭하는 것도 아니고)을 다 갖춘 카오리를

마냥 싫어할 수도 없을 거고.

쿠미코에게 묻는 '카오리 귀엽지?'라는 질문은

그렇게 선명하게 자기 애정을 드러낼 수 있는 카오리에 대한 감탄과

그걸 솔직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복잡한 심사가 결합된 거라고 생각함.

4줄 요약

친애 가득한 장면을 사이코스릴러 같은 긴장감으로 바꾸는 아스카 인성 대단해.

저 인성갑을 결국 함락시킨 카오리 대단해.

최종 승리가 확정된 아스카오리 코인은 안심하고 매수하셔도 됩니다.

원작자님 덕분에 작품 해석에 오해의 여지가 없어져서 참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