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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 소백) [안녕하세요. 소리샘반 하윤이 어머니 되시나요?]

ㅇㅇ(220.79) 2019.11.21 05:21:17
조회 735 추천 33 댓글 14
														

 오후 두 시. 은주는 유치원이 끝나 원생들이 하원할 즈음이 된 시간에 갑작스레 마주한 낯선 번호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딸의 이름에 숨을 삼켰다. 별 일 아닐 것이다. 워킹맘 가정의 외동딸이 마주할 수 있는 온갖 나쁜 상황을 전부 돌려본 은주는 눈을 질끈 감았다 도리질치며 조용히 숨을 내뱉었다. 의사의 조언대로 자신의 피해망상벽을 자각하니 그 전보다 수월하게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은주는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네. 누구시죠? 하윤이가 유치원에서 뭘 했나요?"

 [아, 다름이 아니고 하윤이랑 같은 소리샘반 친구 미유네 이모에요.]


 사랑하는 딸이 밤마다 품 속에서 유치원 이야기를 재잘대던 와중 이따금씩 지나가곤 하던 가장 친한 친구의 이름과 함께 수화기 저 멀리서 아이들이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려오자 긴장은 더욱 빠른 속도로 풀려 갔다. 정말로 별 일이 아닌 것이다.


 [얼굴부터 뵈었어야 하는데 다짜고짜 전화 먼저 드려서 죄송하네요. 미유가 하윤이를 데리고 찾아와서 논다고 하기에 혹시나 걱정하실까 연락드렸어요.]


 은주는-상대방에게 보일 턱이 없지만-신경쓰지 말라는 뜻으로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아이를 맡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댁에 아이를 기다리는 보호자분이 계시나요?]


 은주는 흠칫 놀라며 침을 삼켰다. 자신이 아이의 엄마임을 알고 있음에도 구태여 보호자라는 단어를 선택한 상대방의 세심함이 내심 반갑고 고맙기까지 했기 때문에. 허나 세심하고 정확하기에 이따금씩 더욱 날카로운 말이 있다. 은주는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영정 사진에 갑작스레 울적한 기분을 느꼈다.


 [-그래서, 아이의 치수를 좀 재도 괜찮을까요?]


 치수? 은주는 깜짝 놀라며 눈썹을 까딱였다. 잠시 남편 생각에 멍해진 사이 지나간 이야기를 놓친 모양이다. 의자에서 일어난 은주는 과장의 눈총을 무시한 채 탕비실로 향했다.


 "아, 죄송해요. 잠깐 사무실 바깥으로 나오느라 듣지를 못했네요. 치수 말씀하셨나요? 어떤…?"

 [에고, 일하느라 바쁘신가 봐요. 다름이 아니고 제가 미유에게 엘사 드레스를 만들어 줬었는데, 아 겨울왕국 아시죠. 아무튼 하윤이가 많이 부러워하길래, 하윤이도 드레스 한 벌 맞춰줄까 싶어서요. 혹여나 나중에 하윤이가 '미유네 이모가 몸을 만졌어요!' 하면 서로 오해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 먼저 말씀드리려구요. 하윤이는 당연히 아주 열정적으로 오케이하는데, 어머님은 어떠세요?]


 그러고 보니 겨울왕국을 보고서는 하루종일 푸른색 이불을 망토처럼 휘감은 채 렛잇고 노래를 부르던 하윤이에게 엘사여왕 드레스를 사주겠노라 약속한 지가 벌써 몇 달이 지났다. 왜 이렇게 정신없고 바쁘게 살았던 걸까. 어찌 되었건, 수락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다음에 무엇으로 보답할지가 걱정이었지만 그것도 나중 일이다.


 "저야 대단히 감사한 일이지만, 수고스럽게 괜찮으시겠어요."

 [걱정 마세요. 아동복 한 벌 정도야 금방 만들죠.]

 "그러면 부탁 좀 드릴게요. 연락주셨는데 죄송하지만 저는 이제 일하러 가야 해서……. 이 번호로 문자 보내주시면 이따 하윤이 데리러 갈게요."


 과장의 주의를 무시하고 일어난 차에 이보다 자리를 오래 비워 둬서 좋을 것은 없다. 아마 자리로 돌아가면 이래서 애 딸린 여자는 안 된다는 소리를 에둘러 말하는 핀잔이 돌아올 것이다. 썩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다.


 [아아아, 1분만요! 혹시 하윤이가 못 먹거나 알레르기가 있는 식재료가 있나요?]

 "알레르기요?"

 [네, 저녁까지 해서 먹이고 돌려보낼까 생각중이어서요.]

 "아……. 마음은 감사합니다만 괜찮―"

 [아, 차라리 이따 퇴근하시고 저희 집에서 저녁 한 끼 같이 하시는 게 어때요? 해물 파스타 맛있게 해 드릴게요!]

 "아뇨, 이미 아이까지 봐주고 계시는데 그렇게까지는……."

 [하루종일 일하고 퇴근하시면 저녁하기 힘드시잖아요. 맛있게 준비해 놓을테니 문자로 보내드린 주소로 오세요. 저녁시간은 일곱 시. 있다 뵐게요! 일 수고하세요!]

 "네? 미유 이모님 잠시만―"


 순식간에 온갖 말을 쏟아놓은 전화는 어안이 벙벙한 은주만을 남겨 두고 뚝 끊어졌다. 분명 일방적으로 대화의 주도권을 붙잡혀 휘둘렸는데 이상하게도 기분이 그렇게 나쁘지가 않다. 결국 은주가 탕비실을 나선 것은 십 분이나 지난 후였고, 심기가 단단히 상한 과장의 잔소리가 다른 팀원들이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이어지는 와중에도 그러려니 네, 네 하며 흘려듣고 있는 은주의 머릿속엔 퇴근 시간을 향해 달려가는 시곗바늘만이 들어차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선영은 은주의 예상보다 훨씬 젊었다. 초인종을 누르기도 전 문이 벌컥 열려 당황한 은주가 말꼬리를 흐리며 어색하게 건넨 고급 양과자-퇴근하자마자 황급히 백화점에서 산-를 받은 선영이 그 앳된 얼굴 가득히 깔깔 웃음을 터뜨리며 은주의 손을 잡아끌고 들어선 저녁 식탁에는 이미 두 꼬마가 자리를 잡고 앉아서는 스파게티 면을 포크로 붙들고 볼이 미어져라 입 안으로 밀어넣고 있었다. 인기척에 고개를 돌린 하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을 벌리지도 못하고 웅얼거렸다. 아마 '엄마다!' 같은 말을 하려 했으리라 짐작하니 피곤한 얼굴에 저절로 웃음이 배어나왔다.


 "…이거 죄송해서…어쩌죠……."


 눈이 가물가물 감긴다.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선 가로등들이 어두운 차 안에 깔때기 모양 주황 불빛을 계속해서 뿌려대는 탓에 더욱 졸음이 몰아친다. 맛난 저녁을 배부르도록 먹은 하윤이는 이미 은주의 무릎을 베고 누워 꼭 쥔 치마 위에 말간 침을 흘려대고 있었다.


 전부 분위기 때문이다. 처음 방문한 남의 집에서 파스타를 두 접시나 먹은 것도, 선물로 가져왔던 과자와 함께 저녁의 티타임을 즐긴 것도, 내일 일도 생각 않은 채 치즈에 와인까지 취하도록 마셔버린 것도 전부. 그나마 내일이 주말인 것을 위안 삼아야 할까. 운전대를 잡은 선영이, 은주가 풀어져버리는 분위기를 만든 주범이 은주의 복잡한 속도 모르고 쾌활하게 대답한다.


 "같은 학부형끼리 뭘요. 술 안 먹은 사람이 운전대 잡는 게 맞지요. 102동에 주차하면 되나요?"


 벌써 다 왔나? 살짝 야속한 기분을 느끼던 은주는 뒷좌석 문을 연 선영의 손을 저도 모르게 덥석 잡았다.


 "응? 못 일어서시겠어요?"

 "어, 어? 아뇨, 아녜요. 내가 왜 그랬지……."

 "제가 와인을 너무 권했나봐요. 제가 하윤이 업을게요. 조심히 내려오세요."


 몽롱한 탓에 모든 시간이 잠시간의 꿈처럼 느껴졌다. 하윤의 옷을 갈아입혀 침대에 뉘이고 나온 선영이 소파에 널브러진 자신의 몸을 안아들고 안방 침대로 들어가는 것마저도 하늘에 두둥실 뜬 채로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저는 택시 타고 돌아갈 거에요. 스툴 위에 이온음료랑 물 올려뒀으니 자다 갈증나면 드세요. 나중에 하윤이 드레스 들고 찾아뵐게요."


 소근소근 귓가를 간질이던 선영의 머리칼과 향긋한 목소리가 멀어지고 곧이어 현관문이 잠기는 전자 차임벨 소리와 문 바깥으로 멀어지는 발소리가 은주의 머리를 울렸다. 흐릿한 눈을 떠 바라본 스툴 위에 놓인 이온음료가 공교롭게도 신혼여행 때 부부 둘이서 찍은 사진을 가로막고 있었다. 침대를 향한 시야가 막힌 사진 속의 남편이 공연히 화를 내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우습지도 않은 상황에 실실대는 웃음이 절로 새어나와서는 곧이어 훌쩍임으로 변했다.


 스툴 위의 전자시계가 밤 11시를 훌쩍 넘은 시각을 액정에 비추며 깜빡였다. 사람이 어떻게 하루만에 이렇게나 혼란스러워 질 수 있는 걸까. 은주는 전부 분위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처음 보는 선영의 앞에서 와인에 만취할 만큼 편안함을 느낀 것도 전부 분위기 때문이다. 혼자서 딸을 키우며 사람이 그립고 외로웠던 차에 단 한 번 분위기에 휩쓸린 것 뿐이다. 그래야만 했다.


 전부 분위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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