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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 소백)폭탄으로도 어쩔 수 없다(下)

장기짝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9.11.23 02:11:27
조회 251 추천 17 댓글 3
														

“안녕, 실비아. 몰리 대신 왔어. 그 편이 편할 것 같아서.”


재클린은 평소와는 달리 사뭇 어색한 표정으로, 한 팔에 드레스를 걸친 채로 실비아를 대했다. 실비아는 아마 자신도 저런 표정을 짓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차 타고 온 거야? 관용차?”


“응. 내가 몰리 집에 가서 받아 왔어. 몰리도 피곤해보여서 나 혼자 왔어. 그 편이 좋을 것 같아서. 어제 네가 말했듯이 꼭 필요한 여행은 아닐지 모르지만... ”


“아냐, 내가 잘못 말했어. 어제는 그냥... 괜한 심술이었어. 미안해. 고마워.”


평소엔 영 마뜩찮았을 재클린이었지만, 지금 실비아에겐 반갑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과 기분에서 몰리를 만나는 것보다는.재클린과 어색한 대화를 나누는 편이 몇 배는 나았다. 그렇지만 실비아만큼이나 재클린도 평소 같지 않았다. 평소의 쾌활함은 어디로 가고, 마치 용기를 짜내는 듯한, 재클린에게서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었던 그런 분위기였다. 재클린은 살짝 입술을 깨물면서, 실비아에게 넌지시 물었다.


“저기, 너도 오늘 많이 힘들었지?”


“아, 어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아니, 그래서 말고. 몰리 일 때문에....”


“뭐?”


실비아는 순간 자기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재클린은 실비아가 상황을 파악할 틈도 주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나도 예상 못했어. 아니 아무도 예상 못했지. 그러니까.. 그래, 오늘 웬디가 그러더라. 덩케르크의 기적 같은 일이었다고. 아무도 예상 못했던...”


“아니, 아니. 좋은 일이잖아. 덩케르크에서 그랬던 것처럼 몰리도 전혀 불가능할 줄 알았는데 그 중위랑...”


“그래, 그치만, 덩케르크와는 달라. 나도 알아, 네가 어떤 기분일지. 게다가 남들이 기뻐할 때 기뻐할 수도 없고.”


실비아의 머리 속이 다시금 새하얘졌다. 재클린은 알고 있었다. 실비아가 몰리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아냐. 미안한데 지금 네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어.”


“갑자기 이렇게 말해서 미안해. 하지만 우리 둘 뿐일 기회가 지금 뿐이라... 괜찮아. 나는 이미 알고 있었어. 네가 지금 얼마나 힘든지도 알고...”


실비아는 눈앞이 아득해졌다. 둘 뿐일 기회가 지금뿐이라 일부러 찾아왔다니, 하지만 인정할 수 없었다. 인정해선 안 됐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기,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 오늘 이렇게 와 줘서 고마워. 드레스, 줄래?”


“실비아, 괜찮으니까.”


“제발, 그 드레스 좀 줘.”


실비아는 빌다시피 말했다. 사실 그 드레스를 받고 싶지도 않았다. 뭐가 좋다고 몰리에게 이런 드레스를 빌려줬는지. 차라리 재클린이 가지고 눈앞에서 사라졌으면 했다. 그래, 그냥 문을 닫아버리자. 꼴도 보기 싫은 재클린도 그 드레스도, 몰리에 대한 감정과 함께 눈 앞에서 치워 버리자.


실비아가 그렇게 말했을 때, 귀를 찢는 듯한 사이렌이 거리에 울려퍼졌다. 공습 경보였다.




실비아는 혹시 자신이 환청을 듣는 게 아닌가 했다. 하지만 재클린도 도로 쪽을 바라보면서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필 지금... 실비아, 가까운 방공호가 어디야?”


“집에 지하실이 있어. 블리츠 때도 지하실에서 버텼어. 얼른 들어와.”


“뭐?”


재클린은 실비아의 말이 믿기지 않았는지 멍청한 말투로 되물었다.실비아는 살짝 짜증은 내며 재클린을 재촉했다.


“얼른! 왠만한 방공호보다 괜찮을 거야.”


재클린은 집 앞에 세워둔 관용차를 잠시 바라본 뒤 집 안으로 냉큼 들어왔다.


“다른 가족은 없어?”


“없어, 나 뿐이야. 아버지랑 동생은 입대했고, 어머니는 공장 근처에서 생활하셔. 지하실은 이 쪽이야.”


“드레스는?”


“그냥 거기다 내려놔. 공습이 끝나면 알아서 정리할게.”


그때까지 이 집이 무사하면 말이지, 실비아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차라리 어제 공습이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그때 그냥 폭격을 맞고 죽었으면 좋았으련만. 하지만 이제 재클린이 함께 있으니 폭격을 맞아도 곤란했다. 재클린을 평소에 어떻게 생각하건 간에, 자신이 죽고 싶다고 함께 죽을 생각은 없었다. 재클린은 그런 실비아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부엌에 드레스를 대충 던져넣은 뒤 실비아를 따라 지하실로 내려갔다.




지하실은 재클린의 상상 이상으로 잘 꾸며져 있었다. 물이 새거나 금이 간 곳도 보이지 않았고, 등의 밝기도 적당했다. 실비아는 한쪽 벽에 붙인 벤치에 앉아 불안한 표정으로 머리 위를 바라보았다. 재클린은 그런 실비아 옆에 선뜻 앉지 못하고 머뭇거리면서, 마찬가지로 불안하게 머리 위를 바라보았다.


“공습. 한 동안 없었던 것 같은데.”


재클린이 그렇게 중얼거릴 때 저 멀리서 대공포 소리가 미약하게나마 들려왔다. 실비아는 그때야 비로소 재클린이 아직 어색하게 서 있는 걸 깨달았다.


“뭐해? 왜 서 있는 거야? 그냥 여기 앉아.”


실비아는 그렇게 말하고서 바로 후회했다. 조금 전까지 문을 사이에 두고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떠올려버렸던 것이다. 재클린은 실비아가 몰리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아는 것처럼 말했다. 그런데 옆에 와서 앉으라고 하다니, 무슨 의미로 받아들일지는 뻔했다.


“너만 괜찮다면.”


의외로 재클린은 그렇게 말하고는 실비아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 와중에 대공포의 폭발음이 점점 더 커지고 다양한 높낮이로 울리고 있었다. 폭격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의미였다.


“하필 이런 때라서 미안하지만, 아까 하던 이야기를 계속 해도 될까?”


하필 괴링의 폭격기들이 우릴 죽이러 날아오는 상황에 말이지, 실비아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공습이 끝나기 전까지는 재클린과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재클린이 알아서 나가주지라도 않는다면. 그리고 하필 재클린을 지하실로 데려온 건 실비아였다. 하필 이럴 때 공습이라니.


“실비아, 네가 몰리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아. 웬디와 베티는 아직 모르는 눈치야. 그래, 몰리도. 몰리도 안다면 오늘 그렇게 함부로 말하진 않았겠지.”


그나마 다행이네, 하지만 네가 눈치챈 시점에서 다행이 아니야. 실비아는 그래도 인정할 수 없었다. 끝까지 부정해야만 했다.


“아냐 재클린. 지금 뭔가 단단히 착각하는 거 같아. 너도 잘 알잖아. 나 남자친구도...”


“아, 그 대서양에 있다는? 하지만 넌 어느 구축함에 타고 있는지 단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어. 물어봐도 대충 얼버무렸겠지. 웬디나 베티, 몰리에겐 몰라도 나한테는 너무 뻔히 보였어. 무언가를 숨기려고 일부러 그러고 있단 걸. 게다가 그러면서 몰리에게는 유독 잘해주잖아. 물론 요즘은 다들 드레스나 립스틱을 돌려쓰긴 하지만, 넌 너무 뻔히 보였어. 적어도 나하넨 말이야.”


실비아는 이미 늦었다는 걸 깨달았다. 재클린은 눈치챈지 오래였다. 그런데 왜 굳이 지금와서 이러는 거람? 그 와중에도 대공포 소리가 점점 더 커져왔다. 폭격기는 이 근처로 오고 있었다. 실비아는 의미없다는 걸 알면서도 저항을 시도했다.


“그건... 그럼 재클린 넌? 너도 남자 친구 있고, 몰리에게 잘해주잖아. 어제도, 오늘도 몰리 때문에 관용차를 타고...”


재클린은 실비아가 말을 끝맞치기도 전에 깔깔 웃었다.


“실비아, 너 진짜 모르는 구나?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어.”


“뭐? 뭐가?”


대공포가 울리고, 지하실이 한번 흔들렸다. 머리 위에서 먼지가 쏟아졌다. 재클린은 어느샌가 활짝 웃으면서 실비아의 두 손을 붙잡고 말했다.


“우선 맞은 것부터 말하자면, 맞아. 내 남자친구도 사실 없어. 아니 없는 사람은 아니지만, 남자 친구는 아냐. 중동에서 지금 한참 모래와 싸우고 있지. 그 사람이 차에 탔을 때 바로 눈치챘어. 그 사람 여자에게 관심 없다는 걸. 그 사람도 반대로 눈치챘더라. 나는 남자에 관심 없다는 걸. 그래서 내릴 때쯤 서로 좋은 핑곗거리를 만들기로 했지. 왜 이성에 그리 관심이 없냐 그럴 때 쓸 핑계거리를. 너처럼 말야!”


실비아의 머리가 벌써 몇번째인지 모르지만 땡 울렸다. 전쟁 중이라 교회 종이 울리지 않은지 오래였지만, 어쨌거나 실비아의 머리 속에서는 벌써 몇 번이나 울린 것 같았다. 그녀에겐 안타깝게도, 재클린은 아직도 할 말이 더 남은 것 같았다.


“그리고 이게 제일 중요한 건데, 넌 잘못 짚었어. 관용차를 함부로 쓴 건 맞지만. 몰리한테 잘해주려고 그런 건 아냐.”


“말도 안 돼. 그럼 왜 굳이...?”


이젠 대공포의 폭발음 속에서, 폭격기들의 엔진 소리가 섞여 들어왔다. 그리고 재클린은 그 와중에 깔깔 웃었다.


“바보 같긴! 널 보고 싶어서 그랬지!”


그리고 폭발음이 들려왔다. 실비아의 집 근처였다. 독일 폭격기들이 바로 위에서 폭탄을 떨어트리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를?”


귀를 찢는 듯한 폭음도, 지하실로 전달된 진동도 실비아의 질문을 막을 순 없었다. 재클린은 폭발음이 들려온 방향을 불안한 눈빛으로 슬쩍 보면서도, 웃으면서 답했다.


“그래, 실비아 널 만나러 온 거야! 몰리를 도와주는 척 하면 널 볼 수 있으니까. 어제도 네가 몰리와 같이 차를 타면 좋아할 줄 알았는데, 잘못 생각했지 뭐야. 둘이서만 걸어가고 싶었던 거겠지? 오늘도 왜 몰리 대신 드레스를 갖고 왔겠어?”


실비아는 이제야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재클린이 자신에게 보내던 시선은, 사실 자신이 몰리에게 보내던 시선이나 마찬가지였다. 재클린이 눈치채는 것도 당연했다. 갑자기 실비아의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고, 근처에 또 다시 폭탄이 떨어지면서 폭음과 진동이 지하실에 울려퍼졌다.


“나... 난, 모르겠어. 왜 하필 오늘 그걸 밝히는 거야?”


이제 실비아는 부인할 수도 없었다. 재클린이나 자신이나 똑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니. 게다가 그 상대가 자신이었다니.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자신이 혼자인 줄 알았는데 안도감이 들면서도, 새로운 불안감이 들었다. 재클린은 그런 불안을 느낀 듯, 태연한 척 웃으며 답했다.


“몰리가 말했잖아. 그 공군 중위, 전쟁 중에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몰리에게 고백했다고. 나도 그런 생각이 들었어. 지금이야 공습이 예전만 못하지만, 언제 또 심해질지 몰라.”


그 와중에 한번더 폭음과 진동이 밀려왔다. 이전의 두 번보다 훨씬 강했다. 폭탄이 점점 더 근처에 떨어지고 있었다. 재클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나도 그런 생각이 들었어.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몰라. 공습을 받을지도 모르고, 밤에 차를 몰다가 등화관제 때문에 앞이 안 보여서 사고가 날지도 몰라. 내... 내 친구 중에는 야간 열차를 타가다, 다른 열차와 충돌해서 죽은 경우도 있었어.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게다가 몰리 때문에 네가 너무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지금 찾아온 거야.”


실비아는 재클린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요즘은 죽음이 너무 많았다. 실비아의 가족은 운이 좋은 편이었지만, 가족 중에 몇 명을 잃는 건 흔한 일이었다. 운이 나쁘면 온 가족이 한번에 사라질 수도 있었다. 죽음이 아니더라도, 몇 년 전에는 일상적이었던 일들이 이제는 달라졌다. 배급제 때문에 이제는 배불리 먹을 기회도 없어졌고, 그나마 배급제가 아닌 식료품은 찾아보기가 어려워지거나 질이 안 좋아졌다. 옷도 배급제가 되면서 드레스는 서로 돌아가면서 나눠입어야 했다. 새 스타킹을 구하는 건 하늘의 별 따기라 온갖 창의적인 방법으로 수선해야만 했다. 화장품은 새로 생산이 되질 않으니 아껴 써야만 했다. 자동차가 있어도 배급받는 기름으로는 멀리 갈 수도 없었다.


그렇게 비일상적인 일들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애정을 숨기면서, 애정을 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건 언제 끝날지 모른다.


“그래서 오늘 밝히기로 한 거야.”


재클린은 한 번 더 그렇게 말했다. 실비아는 이제 어쩔 줄을 몰랐다. 왜 하필 나일까, 정작 재클린에게 차갑게 대했는데.


“모르겠어, 나는... 나는...”


“실비아, 너는 예뻐. 같이 일을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렇게 느꼈어.”


둘은 전쟁이 터지기 전부터, 1938년부터 함께 일했다. 이젠 거의 5년째였다. 그때부터라니. 그런데 눈치를 못 채다니.


“이럴 수가. 그럼 넌 내가 몰리를 좋아하는 걸 알면서도...”


“그건 어쩔 수 없잖아.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건. 나도 실비아에게 그렇게 느꼈다면, 너도도 남에게 그렇게 느낄 수 있지.”


어쩔 수 없을 리가 없었다. 대체 무슨 감정이었을지 실비아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아니, 이젠 상상할 수 있었다. 지금 실비아가 몰리를 보는 심정이 그랬으니까.


“미안해, 진작에 알아야 했는데... 진작에...”


“그럼 난 진작에 말해야 했지. 나도 겁이 나서 말을 안 했으니까. 그러니까... 말을 안 하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어. 우리 시대의 평화랄까? 체임벌린을 보면서 배웠어야 했는데. 결국 그러다가 전쟁이 났으니까. 어차피 피할 수도 없는 일이었는데.”


실비아는 정말 너무 늦었다고 느꼈다. 하필 이렇게 공습이 이루어지는 와중에, 또 폭탄이 바로 근처에 떨어지는 와중에야 알게 되다니. 공습의 불안감 때문인지 실비아의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심장의 박동이 멈출 줄을 몰랐다. 재클린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일 텐데, 공습을 당하고 있으니, 사랑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있으니 심장이 미친 듯이 뛸 텐데 웃고 있었다.


“재클린, 지금이라도 괜찮다면...”


그리고 폭발이 일어났다. 둘의 바로 머리 위였다. 미약하던 불빛이 사라지고, 모든 게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재클린은 망설이지 않고 실비아를 감싸안았다.




실비아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다.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눈을 떴을 때,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눈 앞에 보였다.


“괜찮으십니까? 정신이 드십니까? 괜찮습니다! 제가 꺼내드리겠습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소방관이었다. 소방관은 실비아의 상반신부터 들어올렸다. 그 와중에 몸에 쏟아졌던 온갖 잔해들이 떨어지고, 먼지 구름이 일었다. 실비아는 그 먼지에 숨이 막혀 기침을 해버렸지만, 얼굴 전체가 먼지로 뒤덮여 있어서 오히려 더 많은 먼지가 코와 입 안으로 들어올 뿐이었다.


“거기 발 조심하십시오. 여기 여자 한 명 더 있다! 일단 무사해 보여! 아가씨, 혹시 다른 가족들 없었습니까?”


소방관은 실비아를 부축하고, 한때는 실비아의 집이었던 잔해 더미 사이를 조심스럽게 나아가며 물었다. 실비아는 기침을 콜록이면서, 대체 왜 그런 걸 묻는지 궁금해했다가 비로소 깨달았다. 이 집이 폭격을 당했다는 걸. 소방관들은 생존자들을 찾아야하니 집에 누가 더 있는지 묻는 게 당연했다.


“없어요. 가족들은 모두... 집에 없었어요. 나 뿐이에요. 나 뿐인데... 맙소사!”


실비아는 그제서야 재클린을 떠올렸다. 재클린은 실비아를 찾아왔다가 지하실로 피신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폭격으로 머리 위가 무너질 때, 실비아를 감쌌다.


“안 돼요, 돌아가야 해요. 아직 한 명이... 제 친구가...”


실비아는 소방관을 뿌리치고, 몸을 돌려 자신이 있던 자리로 되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이제 막 정신을 차린 그녀에게 그런 힘이 있을리 없었다. 소방관은 몸부림치는 그녀를 꽉 붙잡고는 외쳤다.


“친구라고요? 혹시 친구와 단 둘이었습니까?”


“네, 네. 여자인데. 둘 뿐이었어요. 둘 뿐인데, 지하실에 같이 있었는데, 저를 감싸고는... 아직 저기 있을 거에요. 그러니까...”


“괜찮습니다!”


그럴리가요, 실비아는 속으로 그렇게 외쳤다. 실비아는 이제야 재클린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 제대로 안 순간에 이렇게 되어버리다니. 실비아는 다시 한 번 몸부림을 치면서 애원했다.


“안 괜찮아요! 이제야, 이제야...”


“괜찮습니다!”


“재클린이 저기 있어요!”


“아뇨, 친구 분은 이미 구조되셨습니다! 아가씨보다 먼저요!”


소방관이 그렇게 외치자, 실비아의 온 몸에서 힘이 빠졌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재클린은 앰뷸런스 안에 담요를 쓴 채 누워 있었다. 마지막에 실비아를 감싸고 있었으니, 먼저 발견되는 게 당연했다. 재클린은 실비아가 그 옆의 의자에 몸을 뉘이자 힘없이 웃었다.


“우리들의 최상의 시간이네.”


“별로 최상의 상태는 아닌 것 같은데.”


“총리님께서도 우리 꼴을 보면 그렇게 말하실 거야.”


실비아도 재클린도 실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둘의 꼴은 말도 아니었다. 재클린은 그나마 간호사가 몸을 좀 씻겨낸 것 같았지만, 여기저기 생채기가 난 건 숨길 수가 없었다. 고작 그런 생채기 정도에 그쳤으니 오히려 다행일지도 몰랐다. 실비아는 간호사가 얼굴을 씻는 것도 물리치고, 친구와 꼭 만나봐야겠다고 억지를 부려서 들어왔기 때문에 구조될 때의 모습 그대로, 온 몸이 먼지 투성이었다. 다행히도 큰 외상도 보이지 않았고, 다른 집에서 중환자가 실려오면서 간호사의 정신이 팔린 덕에 실비아는 재클린에게 올 수 있었다. 재클린과는 아직도 할 이야기가 남아 있었으니 꼭 그래야만 했다.


“마지막에, 심장이 너무 두근거렸어.”


실비아가 그렇게 털어놓자 재클린이 피식 웃었다.


“머리 위에 폭탄이 떨어지니 당연하지.”


“그야 당연하지만, 그렇게 당연한 일은 아니었어. 굉장히 특이한 일이야.”


“폭탄이 떨어지는 건 비일상적인 일이야.”


“그래서가 아니야. 누가 날 좋아한다는 게. 그게 너무 특별한 일이라서.”


실비아의 그 말에 재클린은 피식 웃었다. 지금 꼴로 봐서는 모든 힘을 다해서 웃는 게 분명했다.


“아무도 없었어? 나 말고는?”


“없었어. 모르겠다. 내가 눈치 못 챘을지도 몰라. 그래도 네가 처음이었어. 알게 된 건.”


“그래서 두근거렸다는 건 착각일지도 몰라. 폭격을 받으면 누구나 그래.”


“아냐. 블리츠 때도 공습은 받아봐서 알아. 그래서가 아니었어. 재클린, 네 탓이었어.”


“저기, 지금 꿈을 꾸는 건 아니겠지? 혹시 나 폭격을 받고 구조된 게 아니라 천당에 온 거야?”


재클린은 가볍게 말했지만 그 목소리에는 감정이 느껴졌다. 실비아는 이제 재클린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당연한 건데 왜 지금까지 몰랐던 걸까.


“나도 천당에 온 게 아니라면. 적어도 아직은 천당이 아니야.”


“천당이 아니라면, 여러모로 다행이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신이시여 날 보호하소서.”


재클린은 어느새 여왕이 된 모양이었다. 실비아도 마찬가지였다. 왕이라도 이런 기쁨은 느끼기 어려울 터였다. 하지만 기쁘다고 폭격을 당한 게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었다.


“어쨌거나 큰 일이네. 이제 집도 없는데 어쩌면 좋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비아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알고 있었다. 일단 가족들에게 폭격당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직장에 사정을 설명하고, 새 숙소를 구하고... 블리츠 때 남들도 다 하던 일이었다. 실비아도 그걸 모르진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좋을 때에, 하필 폭격을 당해 시간을 허비해야 하다니. 하지만 누워 있던 재클린이 전혀 예상치 못한 제안을 했다.


“실비아, 너만 괜찮다면... 내 방도 있어. 하숙집인데, 원래 두 사람이 쓸 수 있는 방인데 나 혼자 쓰고 있거든.”


“그건... 정말 좋은 제안인데. 너 혹시 일부러 내 집에 폭격한 건 아니지?”


“저는 등화관제는 철저하게 지킨답니다, 아가씨. 작은 불빛으로 모두가 죽을 수 있으니까요.”


“하긴, 네가 끌고 온 차도 못 쓰게 됐더라. 핑곗거리가 있어야 할 거야.”


“그 정돈 괜찮아. 장군님은 무급 운전사 한 명을 잃을 뻔 한 게 더 아까울 테니까.”


실비아는 깔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실연당하고, 폭격까지 당하고. 끔찍한 일을 그렇게 연달아 당했는데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이성적으로는 기쁠 수가 없는데, 어쩐지 기뻤다. 너무 기쁜 나머지, 기뻐선 안 될 이유를 무의식적으로 찾아버릴 정도였다.


“그래도, 갈 수 있는 건 내 몸 뿐이네. 이제 내 집인지도 못 알아보겠더라. 그 드레스도, 립스틱도... 아마 찾지 못할 거야. 찾아도 쓸 상태도 아닐 거고. 가봐야 너만 고생할 거야.”


“그건 나보단 웬디에겐 안 좋은 소식이네. 웬디는 다른 데서 드레스를 빌려야할 테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총리님이 말하셨다시피, 우리에겐 피와 땀과 눈물 밖에 안 주어지니까. 실비아 양의 피와 땀과 눈물은 제 방에선 환영이랍니다.”


재클린은 웃으라고 한 말이었겠지만, 실비아는 무심코 눈물을 흘려버렸다. 그 눈물을 훔치면서 비로소 깨달았다. 실비아의 얼굴은 아직도 먼지 투성이었다.


“맙소사, 지금 내 꼴 좀 봐. 진짜 엉망이야. 이런 꼴로 와 버리다니. 못 볼 꼴을 보여버렸어.”


“못 볼 꼴이라니, 그럴 리가.”


재클린은 여느 때처럼 깔깔 웃었다.


“실비아 넌 먼지 투성이어도 예뻐. 폭탄으로도 어쩔 수 없을 정도로.”


폭탄으로도 어쩔 수 없는 건 바로 너야, 실비아는 그렇게 답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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