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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대학생 영원승지 또 쪄옴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4.17 00:33:21
조회 983 추천 50 댓글 9
														

예전에 쓴 거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lilyfever&no=544499


스물다섯 복학생 권승지

스물하나 새내기 지영원

중식당 하이안의 사장님 송채휘

가 나온다고 생각하면 됨


전에 쓴 거랑 다르게 보고싶은 장면만 골라서 써 봄




[영원따라 알바간다]


승지는 오늘로 네번째 교육학개론 강의를 들었고, 영원과 점심식사를 함께 한 것도 오늘로 네번째였다. 그러나 강의는 일주일에 한 번만 있었고 그 때를 제외하면 영원을 만날 일이 없었기에 승지에겐 뭔가가 영 부족하게 느껴졌다. 학생식당에 마주앉아 설렁탕을 뜨는 영원을 가만히 바라보며 승지는 입을 열었다.


"어째 자주 만나질 못하네요."

"네?"


미친, 뭐라는 거야. 승지는 애써 침착하게 그럴듯 한 말을 늘어놓았다.


"아니, 과제도 같이 해야하는 데 강의 끝나고 잠깐잠깐 밥 먹으면서 얘기하는 걸로 되려나 몰라."

"단톡방 있잖아요."


승지의 조는 총 4명이었으나 그 중 조원 구실을 하는 건 승지와 영원뿐이었다. 단톡방에는 이틀째 사라지지 않는 숫자 2가 말풍선마다 붙어있었다. 승지는 발표날 그 년놈들의 이름을 뺄 각오를 하고 있었다. 패디과 이준빈, 경영학과 구본기. 다 뒤졌어.


"사실상 과제 하는 건 우리 둘 밖에 없잖아요. 둘이서라도 더 자주 만나서 해야할텐데..."

"아..."

"시간 언제 될 것 같아요?"

"...제가 알바가 있어서..."

"알바 해요?"


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승지는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고생 모르고 자랐을 것 같은데. 세상물정 모르는 희고 반듯한 얼굴이 그래보였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몇번인가 손목에 스포츠밴드가 감겨있는 걸 본 적이 있었다, 승지는 영원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알바 뭐하는데요?"

"아, 홀서빙해요."

"그렇구나."


홀서빙, 더럽게 힘든데. 승지는 제 스무살 적의 첫 알바가 생각나 떨떠름해졌다.


"어디있는 식당인데요?"

"강남역 근처에 있어요, 하이안이라는 중식당이에요."

"맛있어요? 나중에 한 번 가봐야겠다."

"앗, 그..."


영원은 뭔가 망설이며 입을 오물거렸다. 승지는 그 모습을 보고 계속 말하라는 듯 눈썹을 치켜세웠다.


"...엄청 비싸요..."


중요한 비밀이라도 얘기하는 듯 속삭이는 목소리며 심각하게 굳어진 영원의 얼굴에 승지는 웃음을 터뜨렸다. 영원은 그 웃음에 짐짓 화난 얼굴을 하고는 따졌다.


"진짜 비싸다니까요? 왜 자꾸 제 얘기 들으실 때마다 웃어요?"


승지는 입가를 가리고 킥킥거렸다. 저게 화를 내는건가 애교를 부리는 건가. 캉캉거리는 강아지 한 마리를 마주한 기분에 승지는 실실 웃음을 흘렸다. 영원은 이해가 안간다는 듯, 그러나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 듯 승지를 흘겨보며 다시 수저를 들었다. 우물거리며 밥을 먹는 영원의 귀가 발개졌다.


둘은 식사를 마치고 헤어졌다. 커피 사줄까요? 라는 승지의 말이 무색하게 영원은 다음 수업이 있다고 했다. 고개를 꾸벅이고 멀어져가는 영원을 승지는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편의점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질질 끌렸다. 대충 저렴한 이온음료를 한 캔 사들고 아무 벤치에 앉아서는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백개가 좀 넘게 떠있는 카톡 알림을 상큼하게 무시하고 승지는 캔을 땄다. 음료를 홀짝이며 알바 구인앱을 뒤적이던 승지가 스크롤 내리던 걸 멈췄다.


"어, 여기."


중식 레스토랑 하이안 - 강남점, 영원이 말한 곳이었다. 승지는 식당일이라면 질색이었지만 괜히 세부사항을 읽어보았다. 홀서빙, 시급 만원, 4대 보험 보장, 최소 3개월 이상 근무. 조건이 썩 나쁘지 않았다. 같이 게시된 식당의 내부 사진은 영원이 비싸다고 강조한 만큼 깔끔하고 돈 들인 인테리어를 보여주었다.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팔짱을 낀 채 서있는 훤칠한 여성이 사장인 듯 해 보였다. 어째 재수없게 생겼네. 승지는 괜히 캔을 들었으나 조금 남은 음료는 가볍게 찰랑일 뿐이었다. 몇 번인가 캔을 더 흔들어보던 승지는 곰곰히 생각했다. 통장에는 제법 넉넉한 돈이 들어있었지만 그것만 믿고 있기엔 불안했다. 자취방은 전세였지만 생활비는 좀 벌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면 부산시절 하던 개고생에 비해 홀서빙은 애교스러웠다.


하루가 지나고 공강이던 승지가 자취방에서 뒹굴거릴 때 하이안에서 문자가 왔다. 이력서를 잘 봤으며 면접을 보고싶은데 시간은 언제가 괜찮냐는 내용이었다.

오늘 괜찮으시냐고 문자를 보내자 바로 괜찮다며 3시부터 5시 사이에 와달라고 답이 왔다. 2시였다. 승지는 일어나 단정해 보이도록 준비를 마쳤고 집을 나섰을 땐 3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도착하면 4시가 좀 안될 것이었다. 지하철역으로 향하며 승지는 영원에게 카톡을 보냈다.


지금 어디에요?>

<알바하러 가요.

지난번에 말한 거기?>

<네.


답장이 재깍재깍 왔다. 승지는 이따가 마주할 영원의 표정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답을 보냈다.


난 면접가요. 붙었으면 좋겠다.>

<붙을 수 있을거에요. 화이팅!


따라붙은 이모티콘은 강아지가 폴짝거리는 것이었다. 이모티콘도 꼭 저같은 걸 쓴다. 가슴 속이 간질간질해졌다. 지하철 창 밖으로 흘러가는 한강에 노을빛이 녹아들었다.



[이름은 하나인데 애칭은 서너개]


같은 곳에서 일하고, 같은 자취방에서 지내고. 결국 영원과 승지는 자연스럽게 알바 출근길을 함께하게 되었다. 승지와 덜컹이는 지하철에 나란히 앉아 영원은 조금 졸았다. 승지는 휘청이며 꾸벅거리던 영원은 제 어깨에 기대게하고 한 손으로 카톡을 했다. 송채휘는 영원을 저보다 오래 알았다고 꼴에 챙기고싶어 난리였다. 자취방이 몇 평인데 같이 지내는거냐, 밥은 어떻게 해 먹이는 거냐, 내가 애한테 챙겨준 옷 뺏어입지 말라는 둥 별 쓰잘대기없는 카톡이 1분 간격으로 열개 가량 와 있었다. 승지는 그걸 찬찬히 읽어보고는 아무런 답장도 하지 않았다. 송채휘 열 좀 받으라지. 직장 상사의 이런 간섭은 부당하니까, 암 그렇고말고. 승지가 만족스러워하던 차에 영원이 잠에서 깨어났다. 몇 번 눈을 씀벅이던 영원이 잠이 덜 깬 눈으로 승지를 한 번, 승지의 핸드폰을 한 번 바라보았다. 승지의 핸드폰에 시선이 좀 오래 가있더니 눈망울에서 잠기운이 닦여나갔다. 승지는 의아해져 제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승지의 핸드폰에는 사장님도 아닌 송채휘 세 글자가 담백하게 박힌 카톡방이 있었다. 아차. 침착하게 화면을 껐지만 영원은 이미 존칭 없는 승지의 무례함을 보고 말았다. 괜히 시선을 돌리고는 건너편 사람들의 신발을 하나하나 훑어보던 영원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는 뭐라고 저장되어 있어요?"


송채휘의 간섭을 들킨 줄 알았는데 아니라는 것에 승지는 안심했다. 승지는 빙긋 웃으며 전화번호부에 저장된 영원의 번호를 들어보였다. 영원은 불안한 듯, 기대하는 듯한 얼굴로 승지를 흘끔거리더니 화면으로 눈길을 돌렸다. 제 번호 위로 '울 애기' 라는 글자가 읽혔다.


"아, 이게 뭐야. 바꿔줘요. 맨날 애기래."

"애기 맞잖아."

"네 살 차이가 그렇게 커요? 바꿔줘요."

"음... 그럼 자기랑 여보 중에 골라봐."

"...일부러 그러는 거죠?"


영원은 입술을 꾹 깨물며 승지를 노려보았다. 승지는 그런 영원이 무섭기는 커녕 귀엽기만 했지만 졌다는 듯이 두 손을 들어보였다.


"알겠어, 그냥 이름이면 되는거지?"

"...성은 붙이지 말고요"


딱딱한 이름 석 자와 차별을 두려는 소심한 부탁에 승지는 피식 웃었다. 아, 얘 왜이리 귀엽지. 잠자코 고민하던 승지는 뭔가 생각난 듯 씩 웃으며 저장된 이름을 바꿨다. 승지가 당당히 들어보인 화면엔 숫자 세 개가 찍혀있었다. 012. 영원은 암호라도 보는 듯 멀뚱히 바라보더니 물었다.


"이게 뭐에요?"


승지는 손가락으로 고리를 만들어보여 영, 손가락을 쭉 뻗어보이며 원, 손가락을 두 개 펴보이며 이, 하고 또박또박 말해주었다. 영원은 듣고도 몇 초간 눈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뒤늦게 이해하고는 승지에게 따져들었다.


"아 그게 뭐에요-."


승지는 투탁거리는 애가 사랑스러워 자꾸 웃음이 났다. 핸드폰을 뺏으려는 듯 자꾸 손을 뻗는 영원을 피하며 승지는 곧 내려야한다고 화제를 돌렸다.




[첫 가족, 마지막 가족, 진짜 가족]


송채휘가 없으니 직장이 평화로웠다. 손님도 적어 널찍한 식당이 한산했다. 승지는 할 일이 없어 멀뚱히 서있는 영원을 괜히 쓰다듬고 건드렸다. 영원은 그런 승지를 무시하려고 애썼지만 달아오르는 얼굴은 감출 수 없었다. 승지는 솜털이 보송한 볼을 찌르며 살살 웃었다.


"복숭아가 잘 익었네."


영원은 참다참다 못해 주방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영원아, 어디가아- 말끝을 장난스레 늘이며 따라붙으려던 승지는 막 들어온 손님을 보고 카운터로 발길을 옮겼다.

척 봐도 비싸보이는 외투를 입은 중년의 여성이 가게 안을 두리번 거렸다. 뒤에 따라붙은 덩치들이 꼭 주먹들 같다고 생각하며 승지는 영업용 미소를 지어보였다.


"세 분이신가요?"


"사람 하나 찾으러 왔는데."


용건부터 들이미는 여자의 목소리가 냉랭했다. 승지는 묘한 불쾌감과 불안감을 느끼며 물었다.


"누구신데요?"


저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에 승지는 기분이 나빴다. 경계심이 어린 승지의 눈빛을 잠시 응시하던 여자는 입을 열었다.


"나 지영원 고모되는 사람인데, 지영원 여기서 일하니?"


유아독존같은 태도며, 깐깐한 인상이 여러모로 영원과 반대였다. 영원의 가족이라는 사람은 도저히 영원의 가족같지 않았다.


승지의 말에 불려나온 영원은 고모라는 인간을 마주하자 뻣뻣하게 굳었다. 따라 나오라는 듯 말없이 가게 밖으로 나가려는 고모 무리를 불러세운 건 영원이었다.


"저 일하는 중이에요. 8시면 끝나요."


여자는 걸음을 멈추고 어처구니 없다는 듯 영원을 돌아보았다. 영원의 태도가 거슬리는지 주름진 얼굴이 한층 더 구겨졌다. 여자는 옆건물의 카페에 있겠다고 짤막한 한마디를 던지고 밖으로 나갔다. 영원은 그 자리에 뿌리내린 듯 미동없이 서 있었다. 승지가 어쩐지 위태로워보여 영원의 어깨에 제 손을 얹었다. 영원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승지를 올려다 보았다. 밝은 눈동자에 혼란과 곤란이 뒤섞여있었다. 영원은 걱정스러워하는 승지의 눈빛을 피해 눈을 굴리더니 주방으로 들어가버렸다. 4시부터 8시까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동안 영원은 멍하니 있었다. 승지는 뜨거운 찻주전자며 쌓인 접시등으로부터 영원을 떨어트려놓으며 그 힘없는 몸을 눈으로 좇았다.


8시가 되어 영원과 승지가 식당 밖으로 나왔다. 영원은 조금 망설이는 듯 하더니 입을 열었다.


"...먼저 가실래요?"

"아니."


단박에 거절하는 승지의 태도에 영원은 조금 놀란듯 했다. 영원은 승지가 따라오지 않았으면 하는 눈치였지만 승지는 그 눈길을 피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불안했다. 지난 몇년간 뒷골목에서 구르며 얻은 육감이 경종을 울렸다. 승지의 감이 맞다면 영원의 고모되는 사람은 부산 시절 만났던 속 시커먼 대가리들과 같았다.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니 커피잔을 노려보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영원과 마주치던 눈빛이 제게 와 부딫혔다. 매서운 눈매였다. 여자는 반지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가족끼리 얘기해야하는데 자리 좀 비켜줄래요?"


분명 존대였지만 상대에게 명령하는 듯 한 목소리였다. 여자의 뒤에 선 덩치들이 승지를 바라보았다. 위압적인 눈빛이었지만 저정도는 익숙했다. 승지는 자리에 앉으며 받아쳤다.


"저 영원이 애인이라서 안되겠는데요."


애인이라는 단어에 여자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여자끼리? 라고 묻는 듯 한 눈빛에 승지는 개의치않고 맞섰다. 여자의 눈은 영원을 향했다. 혐오감을 감추지않은 눈빛에 영원은 주눅들었다. 승지는 여자를 노려보며 영원을 앉히고 테이블 아래로 영원의 손을 잡았다. 승지가 손을 잡아오자 영원은 잠시 망설이는 듯 우물거렸다. 승지는 깍지를 끼고 영원이 손을 빼지 못하도록 붙들었다. 여자는 영원과 승지를 번갈아보더니 입을 열었다. 역시나 여자는 속셈이 있었다. 번드르한 명함에는 지회숙 이름 석자와 처음 듣는 회사 이름, 사장 직함 따위가 있었다. 유통과 관련된 회사라고는 했으나 주력 상품은 언급하지 않았고, 쥐어줄 돈은 말했지만 책임질 것은 입에 담지 않았다. 승지는 저런 떡밥을 던지는 놈들을 못해도 열명은 봤다. 지회숙은 하나뿐인 조카를 이용해먹을 생각이었다. 따라오길 잘했네. 승지는 속으로 웃었다.


"집안 사업이니 가족이 맡아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영원이에게도 좋은 일이고."


혹시라도 일이 틀어지면 책임을 질 사람이 필요하다. 일단 혈육이긴 한 네가 적격이다. 돈 좀 쥐어줄테니 적당히 받고 돈 값을 해라. 결국은 그런 소리였다. 영원이 처럼 착하고 여린 애를 그런 더러운 계산에 집어넣는 게 화가 났다.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어보이는 회숙은 꼭 밀랍인형 같았다. 승지는 주름진 입가며 건조한 눈빛을 건너보며 입술을 씰룩였다.


"멀긴 해도 가족이잖니."


자꾸 문장마다 따라붙는 가족이라는 단어가 거슬렸다. 뭐하러 저리 강조에 강조를 거듭하나. 아니라다를까 가족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영원의 눈빛은 멍해졌다. 그러나 번지르르하게 말을 늘어놓는 코 앞의 가족이 아니라 어딘가 멀리 있는 신기루를 좇는 눈빛이었다. 그런 영원이 신기루를 쫓다 영영 어딘가로 사라질 듯 해 승지는 겁이 났다.


"저기요 죄송한데, 영원이 혼자서도 꿋꿋하게 자기 생활 이어가고 있습니다."


남이 얼핏 보기에 화목했을 법 한 가족의 재회는 승지가 끼어들어 망가졌다. 회숙은 어딜 끼어드느냐는 듯 승지를 노려보았고 영원은 바로 옆의 승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저도 옆에서 도와주고, 앞으로도 도와줄 거고요."


자신이 영원에게 충분할 만큼 도움을 주는가, 자문한다면 자신만만하게 답하지는 못할 것이다. 다만 끼니를 거르려는 애가 안쓰러워 소박하게나마 밥을 차려주는 등, 옆에서 걱정하고 신경을 쓰는 거라면 할 수 있고, 하고 싶고, 하고 있었다. 적어도 그런 건 눈 앞의 고모라는 작자보다 제가 더 잘 할 수 있었다. 여지껏 어렴풋이 느껴왔던 왠지 모르게 챙겨주고 싶고, 안쓰럽고, 곁에 두고싶던 감정들이 승지의 마음 속에 단단하게 자리잡혔다. 회숙이 대놓고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학생도 제 앞길 챙기기 바빠보이는데... 이제 가족이 챙기러 왔으니 신경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아."


한 쪽 입꼬리가 비틀린 웃음이 모멸적이었다. 알바로 먹고사는 새파란 어린애에 대한 비웃음이었다. 승지는 발끈해 소리쳤다.


"내가 챙길 거라고요. 못알아들어요?"


괜히 이제와서 신경쓰는 척, 이용해먹을 생각하지 말고 가세요. 이 말은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저를 찾아와준 가족이 저를 이용해먹을 생각이라는 것, 영원에게 그러한 사실은 큰 상처가 될 것이다. 가만히 있어도 아파보이던 영원에게 굳이 아픔을 더하고싶지 않았다. 회숙은 드세게 나오는 승지를 무감하게 바라보더니 영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제안을 건냈다.


"지영원, 네가 골라보렴. 어쩌고싶니?"


영원은 또 다시 멍해졌다. 승지는 두려웠다. 영원아, 가지마. 깨문 입술 사이로 말이 새어나올 것 같았다. 영원이 입술을 달싹거릴 때 여지껏 헐겁게 잡혀있던 영원의 손이 승지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둘은 그렇게 카페를 나왔다. 지회숙은 생각보다 미련없는 사람이었다. 이용해먹을 수 없다는 걸 아쉬워할 지언정 붙잡을 위인은 아니었던 것이다. 영원은 승지의 손을 잡고 일어났고 승지도 따라 일어났다. 맞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지하철을 타고 둘은 자취방까지 왔다. 오기까지 아무도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적막을 깬 건 영원이었다.


"술 마실래요?"


승지는 술집을 갈까 고민했으나 그만두고 둘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영원은 군말없이 승지를 따라갔다. 소주를 두병 정도 꺼내놓고 마른 안주를 늘어놓았다. 둘은 말없이 술잔을 주고받았고 세 병이 비었을 즈음 얼굴이 발개진 채 영원은 입을 열었다. 덧난 상처를 보여주듯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머나먼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친구에 대한 언급 하나 없던 학창시절.

저를 버리고 도망간 어머니와 제 등록금을 받아가서는 연락두절된 아버지.

겨우 찾아간 고모댁의 높은 담벼락, 그보다 높은 냉대에 돌려야했던 발걸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했던 지난 1년.


오겠다던 어머니는 오지않았고, 찾아온 아버지는 돈을 찾아온 것이었다. 일말의 기대, 판도라의 상자처럼 온갖 재앙과 비극이 쏟아져나온 후 남은 자그마한 희망 조차 영원을 떠나갔다. 영원의 곁엔 아무도 없었다. 오고 떠나고, 오고 또 떠나가는 인연아닌 악연들은 영원으로 하여금 기대를 잃어버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영원은 다시한번 기대하고 만다. 제게 친절을 베푸는 사람, 아름다운 사람, 멋있는 사람. 이런 사람이 왜 나를 좋아할까. 버려지고 치이고 바닥을 기던 자신에게 왜 이리도 다정할까. 권승지는 영원에게 그런 사람이었다. 기대하지 않고 싶은데 기대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말했다. 제 덧난 상처를 굳이 갈라보이며 영원은 읊조렸다. 여기는 베인 상처고, 여기는 데인 상처다. 당연히 얻어맞은 적도 있는데 그 상처는 너무 자잘해 말할 것이 없다. 너는 나에게 무엇이 될까. 나는 다시 아파하며 울게될까. 영원은 눈 앞의 승지에게 기대하고 싶었다.

소주가 썼다. 더럽게 썼다. 영원의 이야기엔 많은 것이 생략되었다. 얘기하기 싫은 듯 했다. 슬프기보다는 지쳤는지 영원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이야기 속엔 없었지만 영원의 곁에 남은 마지막 사람은 권승지, 자기 자신이었다. 외로웠다고 한다. 저 여리고 예쁜 아이가 그토록 외로웠다. 영원은 얘기하지 않았지만 느껴보지 못한 온기를 제게서 느낀 듯 했다. 그제야 제 품에 파고들던 작은 몸이 이해되었다. 그냥 좋아서가 아니었다. 영원은 아득하게만 느껴지던 걸 온 몸으로 느끼고 싶어했다. 그저 귀여운 걸 보듯 쓰다듬고 부비적거릴 게 아니었다. 온 몸으로 안아줘야했다. 승지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서야 마른 몸을 껴안고는 뼈가 도드라진 등을 토닥였다. 승지가 말없이 안아오자 영원은 조금 굳어졌다. 그러나 몇분을 토닥였을까, 등이 조금 떨리더니 영원이 기댄 어깨가 젖어왔다. 승지의 등 너머로 갈 곳이 없던 양 손이 승지를 끌어안았다. 버려지기 싫은 듯, 놓치기 싫은 듯 제 등에 파고드는 작은 손에 승지는 영원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사람 한 몸으로 꽉 차는 고시원 단칸방에서 영원은 얼마나 숨이 막혔을까. 또 얼마나 외로워하고 눈물 흘렸을까. 영원은 지난 삶을 죽은 듯 살았을 것이다. 기댈 곳 없으나 넘어질 수도 없어 오뚝이처럼 휘청이던 지영원. 그런 영원을 위해 승지는 뭐라도, 무엇이든 해 주고 싶어져 가슴 어딘가가 저릿해졌다. 영원의 귀 언저리, 부슬거리는 머리칼에 얼굴을 파묻고 승지는 속삭였다.


영원아, 내가 널 사랑해.


영원은 귓가에 속삭여진 사랑이 너무나 눈물겹고 눈부셔 그만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마지막 문장인 눈물겹고 눈부시다는 이정하 시에서 따온 구절임

아! 계차수열, 내가 주말을 기다리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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