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인사이드 갤러리

마이너 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갤러리 본문 영역

[ℹ️정보] 1950년 6월 25일부터 9월 1일까지의 한국에서의 해군작전-1

회전날개불안정광속핵추진철갑확률성유도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3.06.02 19:57:10
조회 470 추천 6 댓글 5
														

0395907fb2826df420afd8b236ef203e8095a5be46fcdf629b56

NKPA (North Korean People's Army) gains, 30 June–1 August 1950. Map from The Inchon-Seoul Operation, U.S. Marine Operations in Korea, 1950–53, Vol. II (NH 97052).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4개의 주공 축선을 통해 총 병력 8만 9천여명의 6개 사단과 기갑 여단으로 구성된 인민군이 남한과 북한을 가르는 38도선을 넘어서 침공해왔다. 선봉은 200여대의 소련이 공급한 T-34전차와 120여대의 전투기와 지상공격기로 구성되었으며 중포 사격과 전술적 기습에 힘입어 인민군은 빠르게 전방에 배치된 3만 8천명의 전차와 대전차 화기가 없고 충분한 훈련을 받지 못했으며 항공지원도 받지 못했으며 경고조차 받지 못한 한국군을 격파했다. 기갑 여단과 두 인민군 보병 사단(제 3,4사단)은 두 개 사단을 예비대로 두고 38선에서 단 30마일 남쪽에 위치한 한국의 수도인 서울로 향했다. 인민군 1,6 보병사단은 7 보병사단이 중부 산맥을 공격하고 5보병사단이 동해안에서 고속도로를 따라 남하할 때 서울로 들어가기 전에 좀 더 서쪽에서 공격해 들어가고 있었다.


1948년 주한미군 철수에 따라 북한의 무력으로 통일을 시도할 위험이 있다는 전략적 정보 경고가 있었고, 국경을 따라 북한의 군사력 증강에 대한 광범위한 경고가 있었지만, 정확한 공격 시기는 여전히 의외였다. 첫날이 저물 무렵 한국 지상군은 괴멸되었으며 전면적으로 후퇴했으며 한국공군(훈련기 6대가량만 있으며 전투기는 없는)은 사용되지 않았다. 북한군은 서울 근교에 27일 새벽 도착하였다.


1950년 6월 26일,대한해협 전투


공격 첫날의 압도적으로 절망적인 상황에서 유일한 희소식은 신생 대한민국 해군에서 전해졌다. 한국 해군에서 가장 거대한 배는 모항인 진해에 있었고 이 배는 한반도의 남동쪽 끝인 부산에서 18마일 떨어진 곳을 순찰하던 중 어둠 속에서 미확인 선박을 발견했다.이전에 PC-823이였던 구잠함 백두산(PC-701)은 신호등을 통해 미확인 증기선에 식별을 시도했지만 답신은 없었다.그러자 백두산이 그녀의 서치라이트를 증기선에 비추자 엄청난 기관총 사격이 날아와 조타수가 사망하고 갑판사관이 중상을 입었다. 백두산은 그녀의 3인치 단장포와 6정의 50구경 기관총을 이용해 증기선과의 교전을 시작했다.


미식별 1000톤급 증기선은 사실 49년 10월에 남한지역 빨치산에 의해 탈취되어 북쪽으로 넘어간 미군 수송선이였다. 이 증기선은 1950년 6월 25일부터 26일 밤에 부산항을 점령하기 위해 600여명의 북한 766 독립보병연대를 수송중이였다.400야드 미만의 치열한 교전에서 백두산은 빠르게 도망치려는 기선을 침몰시켜 탑승했던 거의 모든 북한군을 사살했다. 한국 해군 수병들은 배로 접근하려는 북한군에게 M-1 소총을 발사했다.백두산에서는 2명이 죽고 2명이 다쳤다.


한국 해군이 "대한해협 전투"라 부르는 이 전투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승리였다.당시 부산항의 방어는 매우 취약했다.북한군의 기습작전이 성공했다면 전쟁의 결과는 매우 달라졌을 것 인데 8월 초까지 부산은 남한에 남은 유일한 항구였기 때문이다.그래서 부산은 한반도 전체를 집어삼키려는 북한의 공세를 막을 미군의 유일한 초기 진입지점 이였다.


또한 전날인 1950년 6월 25일 아침에 한국 해군은 한국 동해안에 상륙하려는 북한군의 상륙시도 두개중 하나를 막아내 부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첫 북한 콘보이(구잠정 한척,소해정 한 척,20척의 병력수송 스쿠너)는 인민군 4개대대를 해안도로로 퇴각하려는 한국군을 막기 위해 38선에서 한참 남쪽인 강릉 인근에 상륙시켰다.두번째 북한군 콘보이(소해정 두척,경비정 한척,구잠함 한척과 여러대의 스쿠너들)는 삼척인근에 빨치산들을 상륙시켰다.한국해군의 소형 소해정인 YMS-509는 콘보이와 교전해 두척의 스쿠너를 침몰시켰으나 북한의 31호 소해정과의 전투후 후퇴했다.


전쟁이 시작될 때 한국 해군은 비참하게도 자금,장비,훈련 모두 모자랐으며 백두산과 15척의 동력 소해정(대부분은 이전에 일본군이 사용하던 것이였다),한척의 중고 미국산 LST를 포함하여 몇 척의 미군 중고 함선과 구 일본군 함정으로 구성되어있었으며 이것들 대부분은 최근에 얻은것이였다.한국 해군은 1200명의 해병대를 포함해 총 7천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었다.한국 해군의 '기함'인 백두산은 한국 해군 병력들의 월급에서 차감된 기금과 사관후보생들이 판 고철값,해군 병력들의 아내들이 빨래를 해서 번돈으로 구매되었다. USS PC-823은 1946년초에 퇴역해 해군 상선사관학교로 옮겨져 화이트헤드 소위로 함명이 변경되었다. 한국 해군이 배를 구매해 뉴욕에서 하와이(3인치포가 다시 설치되었다)와 괌(3인치포탄 100발을 구매했다)을 거쳐 한국으로 올 때 배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대조적으로 북한 해군은 만 3천 여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었으며 대부분의 장비를 소련으로부터 지원받아 한국 해군보다 더 크고 잘 무장된 상태였다. 북한 해군은 3척의 OD-200 구잠정과 3척의 G-5 어뢰정, 두 척의 YMS형 미군 소해정(2대전시기에 미국에서 소련으로 랜드리스 되었다), 한 척의 구 일본군 소해정, 수상기지 하나, 한척의 군 수송선, 6척의 다양한 동력 건보트, 100척에 달하는 잡다한 함정들, 스쿠너, 정크, 삼판, 기타등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역주: 글이 3년 전 꺼라 최신 연구결과 반영 안됨, 최근 연구에서 대한해협 해전에서 교전한건 소련 정보수집함으로 나옴)


한국전 발발당시의 미해군 지휘체계


해군 장관은 Francis P. Mathews로 해군 고위 장교들에게는 조롱하듯이 "Rowboat"로 불렸다. 정치자금 조달자였던 Mathews는 그의 전임자인 John L. Sullivan이 Louis Johnson 국방장관이 일방적으로 슈퍼캐리어 유나이티드 스테이츠(CVA-58) 건조를 취소했을 때 항의 표시로 사임하자 그를 대신해 해군장관에 취임했다. Johnson은 해군에 쓸모가 없었을 뿐 아니라 경멸감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다. Johnson 장관은 유나이티드 스테이츠를 취소한다는 결정을 내리기전에 해군장관인 Sullivan이나 해군 참모총장인 Louis 제독에게 어떠한 의견을 묻거나 알리지도 않았다. Johnson의 주요 목표는 국방예산을 대폭 삭감해 자신의 대선 출마를 준비하는 것 이였다.


Johnson 장관은 해군이 쓸모없고 미래의 전쟁은 새로운 미 공군(1947년 국가 안보법에 의해 별도 군종으로 창설됨)의 핵탑재 B-36 대륙간 폭격기를 이용해 전투를 벌이고 승리할것이라 믿었다. “Rowboat” Mathews는 Johnson의 살인청부업자였고 두 사람은 한국전 발발당시 미 해군의 처참한 준비상태에 대해 실질적인 책임이 있다.(많은 미 해군 고위 장교들이 신규 항모(CVN-75)의 이름을 해리 S 트루먼으로 명명하면서 좋아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궁금하다면 이것이 이유인데 그 배의 원래 이름은 유나이티드 스테이츠였다.)


1949년엔 48년에 트루먼이 재선에 성공하면서 예산이 대폭 삭감되어 해군은 엄청나게 줄어들었다. 2차대전중 건조된 24척의 에식스급 항모는 5척만이 작전 가능한 상태였으며(세척의 미드웨이급 항모가 더해진다) 49년에 Johnson장관은 작전중인 항모의 수를 4척으로 줄이라고 명령한다(이것은 육군이 적당하다고 생각한 수였다.공군은 항모를 모두 없애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또한 전함 한 척을 제외하고는 모든 전함이 수많은 순양함과 구축함처럼 모스볼 상태에 들어갔다. 아마 더 중요한것은 연료보급선같은 보조함이 크게 줄어들어 해군의 해상작전 능력이 크게 떨어진 것이였다.


해군 참모총장인 Forrest P. Sherman 제독은 그때까지 해군 참모총장에 오른 제독중 가장 젊었다(1970년 Elmo Zumwalt 제독의 취임전까지). 그는 지중해의 미 해군 사령관 이였으나 49년에 Louis Denfeld 참모총장의 해임으로 워싱턴으로 돌아와 그의 자리를 맡게 되었다. Denfeld 제독은 무지막지한 해군 예산 삭감(실행되었다면 모든 항모가 모스볼 상태에 들어갔을)과 공군의 핵 투발 전략폭격기 전략(그리고 점점나빠지는 국민 여론)에 대항하여 고위 해군 장성들이 항명한 사건인 "제독들의 반란"에 대한 Mathews의 보복성 인사로 해임되었다. 1949년에 제독들은 의회로 행진하여 Mathews장관이 해군의 준비 태세를 얼마나 개판으로 만들었는지에 관해 보고했다.


Forrest Sherman 제독은 항모 와스프(CV-7)가 1942년 8월 일본군 잠수함의 뇌격으로 침몰할당시 와스프의 함장이였고 이 일로 해군 십자상을 수훈했다. 그는 니미츠 제독의 최고 보좌관으로서 태평양 전쟁기간 대부분을 보냈고 중부 태평양에서의 성공적인 미군 공세계획의 핵심이였다. 그는 또한 51년 7월 54세의 나이로 집무실에서 사망한 가장 어린 해군 참모총장 일것이다.


1948년부터 미 태평양함대 최고 사령관은 Arthur W. Radford 제독이였다.Radford는 태평양전쟁기간동안 항모기동부대 사령관으로서 뛰어난 능력을 보였고 예산 삭감과 공군전략에 반대하여 일어난 "제독들의 반란"이 끝난뒤로도 자리를 보존하였다. 그러나 한국전 발발당시 미 7함대의 지휘권은 극동지역해군사령관에게 넘어간 상태였다.극동지역해군사령관은 육군원수이며 그뒤에 유엔 한국파견군 총사령관을 맡은 더글라스 맥아더 원수에게 지휘를 받고 있었다. 그로인해 Radford 제독은 한국전내내 작전지휘를 맡지 못했으나 53년에 합동참모의장이 되었다. 교전이 개시될당시 미 태평양함대는 작전가능한 함선이 에식스급 3척,중순 5척밖에 없었으며 전함은 없었다.


1949년 뒤로 극동지역해군사령관은 C. Turner Joy 중장이였다. 그는 44년부터 45년동안의 핵심적인 대일전 작전 계획가이자 순양함 전단 사령관이였다.극동에서 일본 해군을 물리친 미해군의 무적함대는 1950년에는 축소되어 대공경순양함 주노와 구축함 4척,잠수함 한척,소해정 10척(일부는 노후화되었으나 몇몇은 교체되지 않았다),지상발진초계비행대대 하나,왕립 오스트레일리아 해군 초계함 한척이 합류한 상태였고 이 모든것이 Turner Joy 중장의 지휘하에 있었다.다행히도 4척의 배로 구성된 상륙부대 하나가 일본 수역에서 훈련중이였고 이들은 극동지역해군사령관의 지휘하에 있었다.


미 7함대 사령관은 Arthur D. Struble 제독이였는데 그는 2차대전중 노르망디와 서태평양에서의 상륙작전을 포함해 주요 상륙부대의 지휘를 맡아왔었다. Struble은 필리핀 수빅만에서 작전중인 항모 벨리포지와 중순 로체스터,구축함 8척,잠수함 4척(한척은 극동지역해군사령관과 함께 작전함)을 지휘하여 Joy보다 다소 강한 전력을 보유 중 이였다.



75e59d77bc8375a77ff1dca511f11a396261f86274f41c41

Vice Admiral Charles Turner Joy, Commander, U.S. Naval Forces Far East (COMNAVFE). Drawing, colored pencil on paper, by Herbert C. Hahn, c. 1951 (88-191-AQ).


전쟁이 터졌을때 Struble은 워싱턴에 있었다. 7함대의 부사령관은 John M. “Pegleg” Hoskins 소장이였고 3항모 전단 사령관이였다. 그는 보통 벨리포지를 기함으로 삼고 홍콩으로 향하였다. Hoskins는 화려하며 공격적인 장교였다.그가 경항모 프린스턴(CVL-23)의 예비 함장으로있을때 레이테만 해전에 참가하였고 44년 10월 24일에 일본군의 폭탄이 프린스턴에 직격하였다. 그는 배의 탄약고가 폭발하여 배가 치명타를 입었음에도 최소한의 승무원만을 이끌고 데미지 컨트롤을 도왔다.Hoskins는 해군십자상을 받았으나 발을 잃었다.그는 예편될 뻔했을 때 "해군은 사람이 발로 생각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복귀했다. 그가 회복하였을때 그는 전후에 취역한 새로운 에식스급 프린스턴(CV-37)의 함장으로 임명되었다.


북한의 공격 소식이 들리자마자 Hoskins는 함대를 홍콩에서 수빅만으로 재급유를 위해 이동시켰으며 중간에 서태평양에서 가장 거대한 수상함인 8인치포 9문을 가진 중순 로체스터와 합류하였고 6월 27일에 "제 77기동부대"는 이미 한국을 향해 침로를 북으로 향하고 있었다.


서울에서의 탈출


북한군이 놀라운 속도로 서울을 향해 진격해왔기에 주한 미 대사인 John J. Muccio는 극동지역해군사령관에게 한국의 수도인 서울에 있는 미국 국민들의 탈출을 요청했다. 극동지역해군사령관은 빠르게 이 요청에 응답해 6월 26일에 구축함 만스필드와 드 헤븐이 노르웨이 국적의 수송선 Reinholt를 호위하면서 인천에 도착하였고 1630시부로 700명의 미국인과 동맹국 국민들이 배에 탑승하여 인천을 떠났다. 드 헤븐은 파나마 수송선을 호위하기 위해 뒤에 남았고 대피자들이 더 탑승하였다. 이 해상탈출을 위한 항공엄호는 곧 북한군에게 넘어갈 비행장에서 이륙한 미공군기들이 진행하였다. 북한군의 La-7 전투기와 IL-10 공격기는 전쟁 첫날에 매우 적극적으로 싸워 미군 C-54 수송기 한대를 지상에서 격파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27일에 750여명의 미국인과 동맹국 국민들이 비행기로 탈출하였고 850여명이 28일에 탈출하였다.


F-80 슈팅스타 직선익 제트전투기를 포함한 공군기들은 수송기를 호위하고 공격해오는 북한군 전투기들에 맞서 싸웠다. F-82 트윈머스탱 전투기가 전쟁 전체를 통틀어 첫 공대공격추를 기록했다.27일에는 6기의 미군 전투기가 한국 김포비행장(다음날 북한군에 넘어갔다)상공에서 북한 공군기 7대를 격추했다. 28일에 북한군 Yak-9 전투기들이 수원 비행장을 맹 폭격하여 B-26 폭격기 한대와 F-82 트윈머스탱 한기를 격파했다.B-26 폭격기 20기가 철도차량기지와 38과 서울사이의 선로를 폭격하였고 B-26 폭격기 한기가 심하게 손상되어 불시착하였으나 승무원 전원이 사망하였다. 북한군 항공기가 추가로 격추되었다.북한 공군의 손실비율은 1950년 11월에 중국에 기지를 두고 러시아인이 조종하는 후퇴익 제트전투기인 Mig-15가 도입되기 전까지는 심하게 높았기에 북한공군은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며칠내로 미 공군의 출격지점은 부산 인근의 별로 좋지 않은 들판 두 곳과 일본의 기지밖에 남지 않았기에 비행시간이 길어져 한국 상공에서 오랫동안 머무를수 없었다.


1950년 6월 27일,서울이 진군해오는 북한군에게 함락되었다. 전쟁에서 4번이나 주인이 바뀐것 중 첫번째였고 민간인들은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되었다. 북한군은 서울 시민 20만명 이상을 처형하였고 8만명 가량을 북송하였다. 반면 한국군은 4천명의 피난민이 다리 위에 있는가운데 한강대교를 폭파하여 수백명의 사람들이 사망하였고 수천명의 사람들이 북쪽 강가에 갇혔다. 수많은 한국 민간인들이 전쟁 중 죽었다. 양측 모두에 의해 무고한 피난민들이 학살당한 사례도 있었다. 북한군은 피난민들을 인간방패로 사용할 수 있었고 그들 중 다수는 화망속에서 죽거나 적 전투원들이 민간인틈에 섞일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 미군에 의해 학살당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끄는 한국정부는 먼저 대구로 피난했다가 부산으로 피난하였다.(이승만은 1960년까지 독재정권을 이끌며 한국 대통령자리에 있었다)


또한 27일에는 6대에서 8대의 수빅만에 기지를 둔 제47초계비행대대 소속의 마틴 PBM-5 마리너 비행정이 일본으로 이동하여 한반도에서 초계를 시작했다.


​1950년 6월의 UN과 미국의 주요 활동들


1950년 6월 25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군의 한국 침공을 비난하는 결의안(UNSCR 82)을 채택하였다.27일에 안보리는 북한군의 침공은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행위라고 비난하였고 회원국들에 한국을 지원해줄것을 요청하였다(UNSCR 83).당시 소비에트 연방은 안보리를 보이콧중이였기에 결의안에 반대표를 던지지 않았다.소련의 보이콧은 49년에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중국 공산당 정부나 대만섬으로 피난을 간 국민당정부중 누가 안보리 의석에 앉아야하는가를 놓고 벌어진 일이였다.


당시 소련과 서방 연합국은 냉전중이였다.소련은 49년 8월에 핵실험을 진행하였고(미국 프로그램에 잠입해있던 스파이들의 도움을 받아)"철의 장막"이 공산화된 동유럽과 자유로운 서유럽을 갈라놓았다. 소련이 서베를린을 48년 6월부터 49년 5월까지 봉쇄하여 베를린 공수 작전이 실행되었다.소련 인근에서 미 해군 정찰 비행에 대한 소련의 반응은 점점 더 적대적으로 변해갔다. 1950년 8월 8일 프랑스령 모로코의 Port Lyautey를 기지로 하는 VP-26 A 분견대 소속의 PB4Y-2 프라이베이터 초계기가 서독 비스바겐에서 이륙하여 발트해에서 정찰비행 도중 라트비야 리예파라 앞바다에서 소련에 의해 격추되어 탑승자 전원이 사망하기도 하였다.


당시 미국의 국방전략(처참하게 예산이 모자란)은 트루먼 독트린에 기초하여 소련과 그 공산주의 동맹국들, 새로운 중화인민공화국을 '봉쇄'하는 것이였다. 47년에 제시된 트루먼 독트린에 의하면 미국은 소련을 (적어도 무력으로는)침공하거나 전복시키려 하지는 않을 것이나 그 확장은 막을 것 이였다. 이 전략은 유럽이 주요 전장이라는 가정하에 짜여졌으며 따라서 미국의 병력 배치나 구조는 미래에 있을 소련의 유럽을 향한 확장을 저지하는데 맞춰져 있었으며 동시에 그리스처럼 반공반군에 관여된 국가를 지원했다. 트루먼 행정부는 중국이 공산주의자들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는걸 포기한지 오래였다. 미국이 원했던 마지막 것은 극동에서의 전쟁이였는데 이는 유럽의 "주 전력"을 분산시킬 것이였다.


한국은 오랜 시간동안 중국과 조공관계를 유지해왔으나 1800년대 후반에 점점 더 강해져 가는 일본이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기 시작했다(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의 참패로 인한 결과였다). 1905년 러일전쟁 이후로 일본은 1910년에 한국을 병합하고 가혹하게 통치하기 전까지 한국 내에서 점점 더 영향력을 키워갔다. 소련이 1945년 8월에 일본과 전쟁을 시작했을 때 소련군은 만주국을 넘어 한국 일부를 점령하였다. 1943년 연합국의 카이로 회담에서는 한국이 통일된상태로 독립하여야한다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북쪽은 소련이, 남쪽은 미국이 점령하였다.


1948년에 한국엔 두 개의 분단된 정부가 생겨났는데 산업화된 북쪽은 김일성(현재 북한의 "친애하는 영도자" 김정은의 할아버지)이 이끄는 소련이 지원하는 공산주의 정부가 세워졌으며 농경 사회였던 남쪽은 이승만 대통령이 이끄는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 소련과는 다르게 미국은 빠르게 철수하기를 바랬고 남쪽에서 공산주의 반군들이 설치고 다녔음에도 미군 200명 만을 남기고 모두 철수하였다.이로 인해 김일성이 한반도를 적화통일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소련의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김일성의 계획을 얼마나 알고 승인 했는가에 관한 내용은 최근 몇년간 뜨거운 감자였다. 최근의 정보에 의하면 정확한 타이밍에 그가 놀라긴 했으나 그는 공격계획을 알고서 승인했으며 그의 목표는 미군을 아시아의 지상전에 발을 묶이게 하는것이였다(전쟁이 발발했을 때 미국 지도자들이 정확히 두려워했던 것이였다). 그 증거로서 스탈린이 냉소적인 태도로 북한에 원조를 하긴 했으나 빠르게 전쟁을 이길정도의 수량은 아니라는것도 있었다.


북한의 침공은 미국의 국방계획을 쓰레기통 속에 쳐넣어버렸다. 미국은 이 침공이 유럽에서의 소련의 행동에서 미국이 눈을 돌리게 하려는 소련의 책략일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었다. 미국은 소련,특히 남한을 둘러싸고 핵전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으며 미국과 한국사이에는 방위조약조차 없었다. 1950년 1월의 유명한 연설에서 딘 에치슨 미 국무장관은 한국(또는 대만)을 미국의 중요한 이익을 지키는 방어 경계선 내로 포함시키지 못했고 이는 김일성이 침공을 결심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침략은 너무나 노골적이였고 제2차 세계대전 전 나치에 대한 유화 정책의 교훈을 의식한 트루먼 대통령은 북한의 침략을 중단해야 한다는 결정을 재빨리 내렸는데, 특히 새로운 유엔이 이전에 비효율적이였던 국제연맹 이상의 것이 되려면 더욱 그러했다. 그 속임수는 소련과 완전히 전쟁하지 않고 침략을 막는것이였다.한가지 분명한 것은 원폭으로 무장한 B-36 대륙간 폭격기는 이 상황에서 쓸모가 없었다. 갑자기 트루먼 행정부는 해군의 항모와 수륙양용작전능력이 이 상황을 구원하기 위해 필요하단 걸 깨달았다(슬프게도 여전히 탄약과 보급은 모자랐다).


UNSCR 83의 통과에 따라 트루먼은 미 해군과 공군에 한국을 지원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는 또한 7함대에 공산중국이 대만섬을 침공하지 못하게 할 조치를 취할것을 명령하였다.이 명령의 결과로 항모 벨리포지가 포함된 제77기동부대는 6월 27일부터 28일까지 대만해협을 통과하면서 중공을 저지하고 국민당을 안심시키기위해 공군력 시위를 벌였다.추엉라이 중화인민공화국 총리가 미해군 행동에 대해 항의를 표시하긴 했으나 이것은 중공의 공군, 해군력 부족과 상륙수단의 부족이 더 큰 원인일것이다. 대만해협의 중국쪽에 모여있던 수많은 정크선들은 중화인민공화국이 대만을 침공할 의도가 있었음을 말해주었다. 한국에서의 전쟁 내내 미국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간의 전쟁이 나는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7함대 함정들은 양쪽에서 이동하지 못하도록 대만해협을 순찰했다. 미국은 심지어 미국인들이 원하지도 필요로 하지도 않는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한국에서 함께 싸우고 싶다는 국민당 측 제안을 거부했다.


6월 27일자로 7함대 지휘권은 태평양함대 사령관에서 극동지역 미군 총사령관 휘하의 극동지역해군 총사령관으로 이전되었다.


28일에 영국 해군사령부는 극동지역해군사령부에 영국해군을 배치했다. 영국 해군 소장 William G. Andrewes경의 지휘하에 있는 이 함대는 항모 HMS 트라이엄프와 두척의 경순양함(HMS 벨파스트와 HMS 자메이카), 두 척의 구축함과 두 척의 초계함을 포함하고 있었다. "영연방"군에 오스트레일리아 구축함 한 척과 초계함 한 척이 추가로 배속되었다. 극동지역해군사령관은 일본 사세보가 소련이나 중공의 공격에 위험할 수 있었기에 이들 함대가 오키나와의 버크너 만에서 7함대와 77기동부대에 합류할 것을 요청했다.



75ed9d01a8866af03ce886fb06df231d6608ba1dcf7669f164bda58065

USS Valley Forge (CV-45), initially only U.S. carrier in Asian waters at the beginning of the Korean War, and USS Leyte (CV-32) are shown moored at Sasebo, Japan, circa October/November 1950. USS Hector (AR-7) is moored beyond the two carriers, with other U.S. and British warships in the distance (80-G-426270).



0395907fb28269f620afd8b236ef203e4f42fa8243ded10184

HMS Triumph, which operated with USS Valley Forge (CV-45) off of Korea during the summer of 1950, is shown underway off Subic Bay, Philippines, during combined U.S.-British naval exercises, 8 March 1950. Planes on her deck include Supermarine Seafire 47s, forward, and Fairey Fireflys aft (NH 97010).


1950년 7월 초의 주요 미 해군 해상 전투​


Jesse Clyborn Sowell 대령이 지휘하며 43년 7월 13일 콜롬방가라 해전에서 뇌격당해 자침한 구축함 그윈에 승함해 제 23구축함대를 지휘하여 해군십자상을 받은 John M. Higgins 소장이 지휘하는 제5순양함대의 기함인 경순양함 주노가 50년 6월 1일 일본에 도착했다. 주노는 전쟁이 발발했을때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해적을 막기위해 대한해협을 초계 중 이였다.


주노는 극동지역해군사령관이 가용 가능한 가장 거대한 배였으며 Higgins 중장은 테스크그룹 96.6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처음에는 구축함 만스필드와 드 헤븐을 서울에서의 탈출을 엄호하기 위해서 파견했으며 Higgins는 6월 28일에 주노를 동해로 진입시켰고 다음날 전쟁 중 이뤄진 수많은 해안포격 중 첫번째로 Bokuku Ko에 집결한 북한군 병력에 포격을 가했다. 주노는 그 뒤로 철도와 다리를 포격하여 북한군의 동해안에서의 진격을 지연시켰다(Higgins 중장은 이 작전으로 해군수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6월 29일에 주노의 레이더는 한국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는 두개의 수상함 그룹을 포착했다. 주노는 모든 한국해군 함정들은 남쪽으로 대피했다고 들었기에 포격을 개시했다. 한척이 침몰했고 나머지는 흩어졌다. 유감스럽게도 목표는 한국해군 기뢰부설함(구일본군함정)인 JML-305였다. 당시의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이 사건으로 인해 러시아 순양함이 한국 동해안에서 목격됐다는 루머가 돌았다.


북한에 대한 공습과 미 지상군 파병명령,1950년 6월 29-30일


트루먼 대통령은 처음에 소련과의 총력전으로 커져 유럽 전역으로 확장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 북한에 대한 공습이나 지상군 파병을 꺼렸다. 그러나 상황이 점점 악화되면서 그는 빠르게 마음을 바꿨다.6월 29일에 미 공군 B-26 폭격기 18기가 평양 인근의 Heijo비행장을 폭격하여 26기의 전투기를 지상에서 격파했다(이것은 북한공군에 심각한 피해였다). 미 공군 전투기들은 5기 이상의 북한 전투기들을 격추했으며 4발엔진 폭격기인 B-29폭격기 기총사수가 하나를 격추했다.


6월 30일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을 한국 파병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으며 미 해군에 한반도 전체를 봉쇄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해군이 엄청난 군축으로 인하여 그럴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실망하여 화를 냈으나 해군은 최선을 다해서 명령을 이행했다.


제77항모기동부대가 전투를 위해 한국으로 향하다, 50년 7월 1일​


극동지역해군사령관의 명령에 따라서 제77기동부대는 오키나와의 버크너만에서 7월 1일에 출항했다. 항모 벨리포지와 HMS 트라이엄프는 7월 3일로 예정된 한국 서해안에서의 북한 공습을 위해 황해로 향했다.


그녀의 승조원들에게 "해피 벨리"라 불린 벨리포지는 2차대전중 건조된 24척의 에섹스급 중 한 척이나 46년 11월까지 취역하지 못했다. 다른 전투항모들과는 다르게 피해를 입지 않았기에 다른 많은 배들처럼 예비역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86기의 항공기로 구성된 그녀의 비행단은(제5항모비행단) 두 개의 제트 전투비행대대가 소속되어 있었는데 VF-51과 VF-52 두 비행대대 모두 F9F-2/3 직선익 제트전투기로 편성되어 있었다. VF-51은 처음으로 제트전투기 함상 운용 인증을 받은 미해군비행대대였는데 50년대 중반에 엥글드덱과 다른 개장이 적용되기 전에 이것은 매우 위험했다. 제5항모비행단은 F4U-4B 전투폭격기로 구성된 두개의 전투비행대대인 VF-53과 VF-54가 포함되어 있었으며 막대한 무장을 탑재할 수 있었기에 "덤프트럭"으로 알려진 14기의 신형 AD-4 스카이레이더 피스톤엔진 폭격기로 구성된 비행대대 하나가 있었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극동에서의 영국 항공모함은 한국 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하나로 줄어들었다.HMS 트라이엄프는 버크너만에서 제77기동부대에 합류하라는 명령을 홍콩에 접근중일때 받았다. 트라이엄프는 48기의 항공기로 구성된 비행단을 가지고 있었는데 827 비행대대의 슈퍼마린 FR.47 시파이어(유명한 스핏파이어의 함상운용형)와 800비행대대의 페어리 FR.1 파이어플라이 전투폭격기/대잠초계기였으며 둘모두 2차대전에서 그 우수함이 입증되었다.


1950년 7월 1일,주일 미지상군이 한반도로 향하다


7월 1일에 미 24보병사단 지휘부가 항공편으로 한반도에 도착하였다,그리고 사단의 나머지 인원들은 해상편으로 왔는데 일부는 일본인이 운용하는 LST나 급히 전세낸 일본 배편을 통해 한반도에 왔다.일본에서의 몇년간의 주둔으로 인해 24사단은 인원 부족에 장비부족, 훈련부족으로 약해져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곳에 주둔 중이던 사단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투를 치를 준비가 되지 않은 병력들의 노력은 재앙이 될 것이였다. 후속으로는 25보병사단이 왔는데 대부분 전세선으로 왔기에 부산항은 굉장히 혼잡해졌다.


한편 태평양함대 사령관은 미국 서해안의 모든 작전가능한 함선을 찾아 즉시 극동에 배치할 준비를 하기 위해 Walter Boone 소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테스크포스 요크를 만들었다.


주문진항 해전,1950년 7월 2일


영국 경순양함인 HMS Jamaica와 슬루프(초계함) HMS Black Swan은 북한의 침공이 시작되기 이전에 홍콩에서 일본으로 향하고 있었다. 두 배는 경순 주노와 Higgins 소장에게 동해에서 합류할 것을 지시 받았다.B lack Swan은 국공내전 중 양쯔강에서 49년 4월에 중공군 포격으로 손상된 상부 구조물의 수리를 마친상태였다.그녀는 강에서 좌초되어 중공군의 포격을 뒤집어 쓰고 있던 자매함 HMS Amethyst를 구조하려했으나 7명이 부상을 입고 구조에 실패했다.


50년 7월 2일에 주노, 자메이카, 블랙 스완은 38선 남쪽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동해안에서 작전 중 이였고 남하 중인 북한군에 포격을 날려줄 준비를 하고 있었다. 0615시에 블랙 스완이 탄약을 보급하고 북쪽으로 향하는 북한 호송대를 발견했다. 호송대는 탄약 운반에 사용된 10척의 동력 트롤어선과 호위 중이던 4척의 어뢰정과 두 척의 동력 건보트로 구성되어 있었다.


유엔군이 교전을 위해 접근하자 북한 PT보트들은 일제히 반전해 돌격해오기 시작했다. 순양함들은 11,000야드에서 포격을 개시했다 4천야드까지 접근해 왔을때 PT-24는 침몰했고 PT-22는 물속에서 죽었다, PT-23은 해변으로 향하려 했고 PT-21은 북으로 도주하려했다. 전투가 끝났을 때 PT보트 4척중 3척이 침몰했고 동력 건보트 두척은 모두 침몰했다. 자메이카가 두 명의 북한군 포로를 잡았다. 유엔군의 피해는 없었다. 북한군의 피해는 알 수 없으나 침몰한 5척의 승조원 대부분이 포함될 것 이다. 10척의 탄약운반 트롤어선은 탈출했으나 며칠 뒤 주노의 추격과 공격으로 침몰했다. 북한군의 프로파간다는 영웅적인 어뢰정들이 중순 Baltimore (CA-68)를 침몰시켰다고 주장하나 그때 Baltimore는 퇴역하여 브레머튼에서 예비역으로 있었으며 51년 11월까지 현역으로 복귀하지 않았다.


"주문진항 해전"은 유엔 해군과 북한해 군과의 처음이자 마지막 교전 이였는데 북한이 유엔의 제해권에 다시 도전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남아있는 북한해군은 소련과 중국의 항구로 피난할것이였다. 그러나 (7월 중순 경에 3척의 구잠정이 추가되어 강력해진) 한국해군과의 수상교전이 있을 것이며 북한의 소형함들은 유엔군의 전선 뒤에 침투하여 병력, 물자, 탄약들을 보급하려고 시도할 것 이였다.


그리고 7월 2일에 포항에 있는 한국해군 소기지는 북한군의 상륙침투 시도를 찾아내 격멸하였다. 다음날 한국의 남서쪽에 있는 출포리에서 한국해군 소해정인 YMS-513이 북한군 보급선 3척을 발견해 침몰시켰다. 작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한국해군은 전쟁 첫해에 가장 공격적이고 효과적으로 싸운 한국군으로 명성을 얻게 될 것이였다(공정하지만, 한국해병대는 아직 독립되지 않았고 공군은 매우 작았다).


7월 3일 2020시에 두 대의 북한군 지상공격기(아마도 IL-10일것이다)가 안개 낀 육상에서 튀어나와 블랙스완을 공격해 경미한 구조손상을 일으키고서 피격당하지 않고 이탈했다.공중 공격이 가능할 것이라는 경고가 담긴 정보가 있었다.이것이 북한군의 첫 대함 항공공격이였다. 다음날 77기동부대의 항공기가 북한 공군 기지를 기습했기 때문에 이런 공격은 매우 적을 것 이였다.



75ed9d01a88669f137e680fb06df231d4e2b505f4e1995be77c08460c1

USS Juneau (CLAA-119) receives ammunition and fuel at Sasebo, Japan, on 6 July 1950. Flagship of Rear Admiral John M. Higgins, Commander, Task Group 96.5, Juneau actively patrolled and bombarded along the Korean east coast from 28 June to 5 July 1950. She was the first U.S. Navy cruiser to see combat action during the Korean War. Note Japanese floating crane alongside 80-G-417996).


1950년 7월 3일,첫 해군 공습


황해에서 작전 중이던 HMS Triumph는 50년 7월 3일 이른 아침에 평양에서 남쪽으로 65마일 떨어진 해주의 비행장의 공습하기 위해 12기의 파이어플라이 전폭기와 로켓으로 무장한 9기의 시파이어 전투기를 출격시켰다. 잠시 뒤 벨리포지에서 16기의 콜세어와 12기의 스카이레이더를 평양주변과 내부의 비행장과 다른 목표들을 공습하기위해 출격시켰다. 마지막으로 8기의 팬서 제트전투기를 출격시켰으나 그들의 빠른 속도덕에 콜세어와 스카이레이더가 공습을 개시하기 전에 목표상공에 도달할수 있었다. 이것은 팬서와 스카이레이더의 첫 전투임무였다.


VF-51의 팬서 두기는 두 번째로 평양비행장에 공격을 가할 때(북한군의 대공사격은 별 효과가 없었다.) 북한군의 Yak-9 전투기가 격납고에서 나와 수초 만에 이륙했다. Leonard H. Plog 대위는 두 번째 Yak-9기로 회전해 들어가 20mm 기관포를 점사해 날개를 날려버렸다. Plog은 2차대전 후기에 에식스의 VB-83의 SB2C 헬다이버 조종사였고 이제는 한국전 중 첫 격추를 기록한 해군 조종사였으며 해군의 첫 제트 공대공 격추전과를 세운 조종사였다. 몇 분뒤에 Elton W. Brown소위가 다른 Yak-9기를 격추했다. 다른 팬서들은 콜세어와 스카이레이더들이 연료저장소, 격납고, 다른 비행장 시설들을 날려버리면서 활주로에 구멍을 내고 인근 차량기지를 손상시키는동안 지상에 주기 중 이던 항공기 3기를 파괴했다.


그날 오후, 벨리포지의 항공대는 평양을 다시 한번 타격했는데 이번 목표는 도로, 철도, 다리였다. 항모 함재기를 이용한 공습은 7월 4일까지 이어졌으며 북한의 기관차와 철도시설에 심대한 피해를 입혔다. 스카이레이더는 대동강 대교 상판을 무너뜨렸으며 4대의 스카이레이더가 대공포에 피격당해 손상되었다. 스카이레이더 중 한기는 벨리포지에 착함시도 중 플랩이 내려가지 않아 튕겨올라와 그물을 넘어 항공기들이 주기된 함수로 돌진했다. 다른 항공기들은 경미한 손상을 입었으나 그 스카이레이더는 완파됐으며 콜세어 두 대도 파괴되었다.


항모들은 황해 남쪽으로 이동해 북한군 병력이동과 남한에서의 집결지를 공습하였다. 초기에 북한군은 대낮에 밀집대형으로 남한의 도로를 따라 빠르게 남하하였다. 미 해군 항모와 일본에서 전개한 공군기가 그 행렬을 공습해 매우 큰 피해를 입혔으나 진격속도는 별로 느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높은 손실률로 인해 북한군은 낮에 숨어있다가 밤에 이동하게 되었으나 그것은 나중의 일이다.


스미스 특임대의 붕괴, 1950년 7월 5일


1950년 7월 5일에 "스미스 특임대"라 이름붙여진 미 24사단의 선봉인 대대규모의 부대는 오산 인근에서 남하중인 북한군을 저지하려고 시도하였으며 이것은 미 육군과 북한군간의 첫번째 전투였다.540명의 미군 병력은 34대의 북한군 T-34 전차를 막을 수단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전차들이 미군 방어선을 뚫고 들어왔으며 그와 동시에 어마어마한 수의(약 5천명가까운)북한군이 방어선을 우회해 들어왔다.미군 60명이 전사했으며 82명이 포로로 잡혔고 21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나머지는 간신히 탈출하였다. 전쟁 초기에 북한군이 포로로 잡힌 미군을 처형한경우도 여러번 있었다.


비록 숫자가 큰 차이를 만들었으나 북한군은 잘 훈련 받았으며, 잘 무장하였고, 잘 단련되어 있었기에 적은 사상자 만을 내었다.어떤 경우에는 미군이 군기가 무너지고 위치를 포기했으며, 장비를 망실한 상황에서 적에게 상처를 입힐 때도 있었다. 스미스 특임대는 수 년간 전쟁대학에서 전투준비가 되지 않은 병력이 적을 만났을때 무슨일이 벌어지는가에 대한 예시로 활용되었다. 그 뒤로 24사단의 다른 부대들도 북한군의 진격을 늦추기 위해 여러 번 시도했으나 더 심한 사상자를 낸체로 스미스 특임대와 같은결과를 냈다.


기타 작전, 1950년 7월 중반


1950년 7월 5일, 극동 지역 해군 사령부는 트루먼 대통령의 한반도 봉쇄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작전 명령 50호를 발령하였다.


7월 6일, 샌디에이고에서 수산(AVP-53)에 실려 오키나와 버크너 만에 VP-56 소속 PBM-5 마리너 비행정이 도착했다. 마리너는 중국 해안을 따라 순찰을 시작했다. 7월 18일, 수산과 마리너들이 대만섬 우측에 있는 펭후 섬으로 이동했다. 한편 7월 8일자로 9기의 VP-9 소속 일본 배치 P2V-3 넵튠 해상 초계기가 한국 동해안을 따라 정찰을 시작했다. 7월 16일자로 9기의 VP-28 소속 PB4Y-2 프라이베티어(B-24 사발 폭격기의 해군 버전)들이 오키나와에 배치되어 중국 해안을 따라 정찰을 개시했다.


7월 7일, 유엔 안보리가 주한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맥아더 원수를 지명했다. 이것은 맥아더 장군에게 대한민국을 포함한 모든 연합군 병력들의 작전통제를 가능케 했고, 그 확장으로 C. 터너 조이 중장이 대한민국 해군을 포함해 연합군 해군의 작전통제를 가능케 했다.


7월 8일, HMS 자메이카가 남한의 동해안에 위치한 해안표적들을 포격했고, 그때 그녀가 북한군의 76mm 포에 피격되어 6명의 영국인 수병들이 사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은 작전을 계속해 목표를 타격했다. 이 시점에서 자메이카와 블랙스완은 프리깃 HMS 알라크리티와 HMS 하트에 합류해 동해에서의 한국동부 지원그룹(CTG 96.5)의 영국 부분을 형성했다. CTG 96.5는 해안을 따라 남하하는 북한군 제 5 보병사단을 저지하기 위해 노력했고, 소정의 성과를 거뒀다.


마이클 J. L. 루오시 중령과 한국 해군


전쟁이 터졌을때 한국해군 참모총장은 손원일 제독이였고, 하와이에서 전 미해군 구잠정 3척의 배송을 실시 중 이였다. 조이 중장은 새로 온 마이클 J. 루오시 중령을 극동해군 부사령관으로 임명하고서 UN의 권한하에 한국해군의 작전통제권을 인수하도록 지시했다. 루오시는 미 해군사관학교 1933년 졸업자였으며, 2차대전의 첫 절반은 해군사관학교에서의 교관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는 1943년부터 45년까지 구축함 스프로스톤(DD-577)을 1943년부터 1945년까지 지휘해 전투를 치룸으로서 두개의 동성훈장을 수훈했다, 그리고 1945년부터 47년까진 볼델론(DD-881)을 지휘했다. 미국이 유엔군을 지도하게 되면서 다른 연합군들도 미군의 작전통제를 받았고, 따라서 손 제독은 해군 참모총장직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한국해군의 작전권은 루오시 중령이 UN 권한으로 가지게 되었다. 한명의 중위와 다섯명의 수병들로 구성된 참모진들을 데리고 부산에 도착한 루오시는 7월 9일자로 한국해군의 작전통제권을 인수했다. 그 다음해와 또 반년간 루오시는 해군수훈근무장과 두개의 공로장을 그의 뛰어난 노력으로 수훈했다.


루오시의 지휘하에 들어온 한국해군의 첫 박전은 한국해군 LST를 이용해 한국 서남해안의 군산으로 600명의 한국 해병들을 수송하는 것으로, 7월 15일에 그곳에 상륙해 항구를 사수하는 것 이였다. 그러나 압도적인 북한군 병력이 서해안을 따라 남하했고, 해병들은 7월 19일, LST를 이용해 빠르게 퇴각했다. 7월 17일, 손 제독은 새로 인수받은 구잠정 3척(PC-702,- 703, -704)과 함께 도착했고 한국 해군의 전력은 유의미하게 증가했다. 한국해군은 빠르게 연안을 따라 탄약, 보급품, 병력을 수송 및 전개하려는 북한군 함정들과 교전했다. 도로들은 북한군 병력과 보급품을 수송하기에는 극도로 위험한 장소가 되었는데, 미 해군과 공군의 공습으로 인한 것 이였다. 북한군들은 해안을 따라 소형 함정들로 보급품을 수송하려 노력했고, 이는 1950년 8월, 그들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기 위한 총공세를 펼침으로서 절정에 달했다.


북한에 대한 첫 UN 상륙, 1950년 7월 11~12일


7월 10일, 주노와 구축함 만스필드가 동해 북쪽으로 항해해 북한 해안에 폭파반을 상륙시켰다. 그들의 임무는 한국 북동해안에 있는 단천과 송진(현 김책시) 사의 중요한 철도 터널을 폭파시키는 것 이였다. 이를 수행해 낸다면 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오는 철도노선을 끊어 소련에서 오는 보급품을 훨씬 먼 만주를 통해 돌아오게 끔 할 수 있었다. 주노의 부장인 윌리엄 B. 포터 중령이 이끄는 부대는 대위 하나, 4명의 해병대 사병들, 그리고 4명의 포수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7월 11~12일 밤, 만스필드는 북한 해안 1000야드 이내로 접근했다. 폭파반은 동력보트에 타 해안으로 향했다. 절벽에 가까운 지형을 오르는 것 외엔 침투는 매우 잘 수행되었고, 두개의 60파운드 폭약이 터널에 설치되어 다음 열차가 지나갈때 폭파되도록 설정되었다. 포터 중령과 그의 팀은 북한을 "침략"한 첫 미군 병력이 되었다. 포터는 작전을 지휘한 공로로 전투로 인한 동성훈장과 공로장을 수훈했다.




https://www.history.navy.mil/about-us/leadership/director/directors-corner/h-grams/h-gram-050/h-050-1.html


3년전에 던져둔거 좀 이어서 한거라 퀄차이 보일듯

자동등록방지

추천 비추천

6

고정닉 6

0

댓글 영역

전체 댓글 0
등록순정렬 기준선택
본문 보기
자동등록방지

하단 갤러리 리스트 영역

왼쪽 컨텐츠 영역

갤러리 리스트 영역

갤러리 리스트
번호 말머리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추천
2856 설문 주위 눈치 안 보고(어쩌면 눈치 없이) MZ식 '직설 화법' 날릴 것 같은 스타는? 운영자 24/04/29 - -
2854 AD [원신] 신규 5성 아를레키노 등장 운영자 24/04/26 - -
412451 공지 밀씹 몬무스 대회를 개최함 [9] 슐레딩거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4.04.18 1081 4
180183 공지 신고게 [1] ㅇㅇ(222.121) 22.02.07 33384 8
416263 일반 무제목319에 뭘 그리지 OO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13 2 0
416262 일반 건강미그자체 Colaxaes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12 3 0
416261 일반 지듣노 (J-Pop풍으로) [1] xwing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59 18 0
416260 일반 3822.jpg [5] 앵두열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57 22 0
416259 일반 나스 이새끼 마밤 2,3부 낼 생각 있긴 한가 [2] 4321_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50 32 0
416258 일반 공기질 (나쁨) [2] 프티야사일런트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41 41 0
416257 일반 앙냠냠 [4] OO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37 31 0
416256 일반 일본 애들의 과장된 이상화 트렌드를 이해 못하겠어 [4] 4321_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35 66 0
416255 일반 리틀아머리 PKM 재생산계획이 없다던데 [4] Ranestar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34 51 0
416254 일반 3대 500의 길은 멀다.. 알좆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9 20 0
416253 일반 nous defions [1] -ESSEX-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7 34 0
416252 일반 로디지아군은 전투화 지급을 안 했나 [10] 무수단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5 66 0
416251 일반 내 가슴... 너무 작아서 보기 숭하지...? [6] 로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2 60 0
416250 이상성 비 이제 좀 강하게 내리네 [3] LRHW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5 33 0
416249 일반 레데리2 기차털이 함 해봤는데 이거 가성비가 너무 안좋은데 [11]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1 43 0
416248 일반 M249 도색한거 [10] Ranestar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9:56 64 4
416247 이상한 틀딱겜 룩딸 [1] ㅇㅇ(118.235) 19:56 38 2
416246 일반 교양 답쓰다가 손목 작살나는줄 늒네그자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9:55 24 1
416245 일반 알리에 이런 패치가.. [2] -ESSEX-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9:54 40 0
416244 일반 자수정 눈나 꽤좋은듯 [5] ㅅㄹㄴㅇㅈㅅㄱ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9:36 64 0
416243 일반 열상 - 클립온vs열상스코프 -ESSEX-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9:31 36 3
416242 일반 좋아하는 스코프 [4] 브옹베아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9:30 46 1
416241 일반 하 야외주차 ㅈ같네 [4] 알좆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9:26 35 0
416240 일반 거열형 [4] 152mm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9:18 50 0
416239 일반 가끔씩 밀애갤 옛날 글들 탐사하다 보면 [12]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9:18 120 0
416238 일반 주 4일 야간근무 얼마나 할 수 있을까 [3] 브옹베아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9:13 32 0
416237 일반 하루에 두세번은 가는 편의점서 일하니까 거이 걍 안방이네... [1] 앵두열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9:07 40 0
416236 일반 평누도 탈출해서 다행이다 대양해군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9:04 47 0
416235 일반 주일미해병대랑 제3해병원정군이랑 다른건가? [1] 인내김아완족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9:04 15 0
416234 일반 짤글이 또 잘리는구나 LRHW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9:02 18 0
416233 일반 아직 콜옵 할인 함? ㅇㅇ(203.228) 19:00 17 0
416232 일반 제가 에케충인데요 솔직히 그래도 뭔가 [4] 앵두열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9:00 57 0
416230 일반 마이어 아재 명언 [3] FirstBlood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8:53 56 0
416229 일반 아무말바듬 [4] -ESSEX-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8:51 43 0
416228 일반 데드하다가 뭔가 머리가 따땃해지는 기분 들어서 [8] 알좆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8:49 47 0
416226 일반 뭐 근데 소위 말하는 여성향 그런거 [1] Avelia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8:46 32 0
416225 일반 콜옵은 그 와중 신작이 블옵5인가봐 [5] -------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8:39 55 0
416224 일반 홈짐 장비 늘리고 싶다.. 알좆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8:37 16 0
416223 일반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그림체중 하나 [6] 香格里拉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8:36 52 0
416222 일반 사과라는게 참 어려운게 맞는건가 싶기도하고 [3] 디어눈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8:35 45 0
416221 일반 근데 남성작가가 그린 여캐는 결국 남자에 여캐 스킨 씌운거고 [1] 武蔵改2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8:35 46 0
416220 일반 고오전 씹딱짤들 한무더기 [1] LRHW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8:32 35 0
416219 일반 대전차화기를 쏴요 -ESSEX-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8:29 33 0
416218 일반 사실 요즘 여성향 그림체 하면 생각나는 것 [6] ㅇㅇ(203.228) 18:27 57 1
416217 일반 놔 혈관이라도 터졌나 진통제가 안먹네 [4] 이ga-eun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8:24 53 0
416216 일반 컨벤 데드 pr 갱신 [2] 알좆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8:21 21 0
416215 일반 재화 전부 털어서 만들어줌 [4]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8:19 43 0
416214 일반 씹덕 농쭉빵보다 좋은 것... [1] 武蔵改2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8:17 42 1
416213 일반 여성향 그림체하면 이런느낌부터 떠오르긴 하는데 [9] 香格里拉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8:17 62 0
416211 일반 나만 당할 순 없지 [2] 로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8:12 40 0
갤러리 내부 검색
제목+내용게시물 정렬 옵션

오른쪽 컨텐츠 영역

실시간 베스트

1/8

뉴스

디시미디어

디시이슈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