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시각장애인한테는 온 세상이 본격 추리 소설이라는 말에 공감돼서 며칠 전 있던 에피소드 하나 얘기해볼게.

밤에 음료수가 먹고 싶어서 냉장고를 열었더니 추석 때 받은 음료수가 남아있었어. 포도, 배, 알로에, 토마토 네 종류의 음료수가 두 개씩 8병이 들어있던 건데 세 병이 남아있더라고.

난 토마토를 별로 안 좋아해서 토마토 외에 다른 걸 마시고 싶었어. 참고로 내가 좋아하는 순서는 포도, 배, 알로에, 토마토 순이야.

병의 모양은 똑같고 누군가에게 물어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추리를 시작했지.

빛은 잃었지만 두뇌는 그대로 미궁을 모르는 추붕이! 진실은 언제나 하나!

병은 가로 네 칸, 세로 두 칸짜리 박스에 담겨있었고, 가로로 네 종류의 음료수가 세로로 두 병씩 놓여있는 형태였어. 남아있는 세 병은 ㄱ자 모양으로 남아있더라고. 누군가 날 엿먹일려고 배치를 임의로 바꾸지 않았다고 전제하면 두 종류의 음료수가 하나는 한 병, 하나는 두 병 남아있다는 거겠지......

일단 남아있는 음료 중에 배는 확실히 제외할 수 있어. 왜냐면 이미 내가 두 병 다 마셨거든, 그럼 나머지 알로에, 포도, 토마토 중 두 종류라는 건데 일단 두 병이 남아있는 음료는 아마 알로에도 제외할 수 있을거야 왜냐하면 가족 중에 알로에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며칠이나 지났는데 알로에가 두 병 모두 남아있을 리 없다고 추리했어. 그럼 두 병 남아있는 음료는 포도나 토마토일 거야. 그리고 난 포도보다는 토마토일 확률이 더 높다고 추리했어. 왜냐면 우리 가족 모두 토마토 음료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정리해 보자.

나는 토마토 외의 음료를 마시고 싶어.

두 병이 남아있는 음료는 포도나 토마토, 토마토가 아닐 확률 50%

한 병만 남아있는 음료는 알로에, 포도, 토마토, 토마토가 아닐 확률 66%

그럼 확률적으로 한 병만 남아있는 음료를 꺼내서 마셔야겠지?

그리고 결과는!

토마토였네 씨발!

3분의1에 꽝을 뽑고 말았다.

진상은 이러하다......

가족들이 내가 포도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포도 두 병 모두 남겨뒀던 거야.

큭, 가족의 정이라는 변수를 계산에 넣지 못한 나의 실수였다.

사실 요즘은 인공지능의 시대잖아. 폰으로 사진찍어서 OCR하거나 이미지 설명해주는 앱 쓰면 간단하게 알아볼 수 있음. 이래서 추리소설 쓰기가 힘들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래 글 보고 떠오른건데 난 일상미스터리를 별로 안 좋아해 근데 지금까진 그 이유를 반 다인이 말한것처럼 추리소설에는 살인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런줄 알았는데 생각해보니까 그냥 내 일상이 일상미스터리였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오늘도 수수께끼가 하나 풀렸다.

P.S.

추붕이들이 궁금해할만한 거 몇 개 얘기해줄게.

Q: 책은 어떻게 보나?

A: 시각장애인 전자도서관이나 리디에서 이북 사서 봄. 이북 나오기 전에 제목으로 스포하는 새끼들 때문에 빡침.

Q: 직업이 뭔가?

A: 정년보장되는 일. 슬프지만 대한민국에서 웬만하면 다 아는 대학 나와도 중증장애인이 그나마 사람대접받으면서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적다.

Q: 시각장애인은 소설 속 묘사를 어떻게 느끼나?

A: 몰루 나는 후천적 시각장애인이라서.

Q: DC는 어떻게 알게 됐나?

A: 현생에서 가끔 나오는 질문인데 아니 한국에서 인터넷하면 누구나 아는 곳 아닌가? 이걸 왜그렇게 신기해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