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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번역] 제브 슈테른헬 - 소렐주의와 민족주의의 접점

ㅇㅇ(220.120) 2020.07.01 17:5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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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Ze'ev Sternhell - The Birth of Fascist Ideology


소렐은 1909년 여름 통합적 민족주의로 자신의 태도를 바꾸었다. 그해 4월, 군주제 연구(Enquête sur la monarchie, 샤를 모라스)의 재판본을 읽은 이후, 그는 이미 악시옹 프랑세즈의 설립자인 샤를 모라스를 향해 존경을 표한 바 있었다. 3달이 지난 7월 10일, 그는 이탈리아의 혁명적 생디칼리즘을 선도하는 저널이자, 모라스주의에 지대한 기여를 한 엔리코 레오네(Enrico Leone)의 Divenire sociale를 출간했는데, 이것은 악시옹 프랑세즈가 “반의회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이라는 제목으로 8월 22일 재출간했다. 이 글은 통합적 민족주의와 소렐식 혁명적 생디칼리즘의 “정상”회담을 알렸었다 – 그러나 실제적인 통합은 아니었던 이 회담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젊은 소렐리안 세대에 의해 성취될 운명이었다.


악시옹 프랑세즈의 짤막한 소개는 소렐이 모라스주의를 향한 혁명적 생디칼리즘의 지적 지도자의 지지가 가지는 중요성을 글로 표현하도록 만들었다. 소렐은 결코 이렇게 과분한 찬사를 받아온 적이 없었다. 그 어디에서도 그런 적이 없었으나, 그의 투철한 제자들의 모임에서, 그는 무수한 찬사를 받았다. “우수하고 심오한 반민주주의적 사회주의의 이론가이자, 폭력에 대한 성찰(Réflexions sur la violence)과 드레퓌스 혁명(La Révolution dreyfusienne)이라는 저서로 이미 상당한 명망을 얻은 저자”였다는 사실만으로는, 그가 드레퓌스 혁명에서 주로 자유민주주의를 향해 미미한 공격적 수사를 반복했던, 생기 없고 진부한 짧은 글들을 만들어내는 것 이상의 행위를 실제적으로 할 수 없었다. 실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드레퓌스 혁명이 프랑스의 도덕력을 심각하게 훼손했다”는 그의 신념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격렬한 저항은 데카당스의 정신을 적대시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악시옹 프랑세즈만이 교양과 신앙 이 둘을 동시에 요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었다. 모라스의 친구들은 우리나라에서 손에 닿는 모든 것들을 타락시켜온 무뢰배들에게 최후를 가져다줄 싸움에 참여하게 될 대담한 전위를 형성한다. 이러한 젊은이들의 가치는 역사에서의 위대함으로 나타나게 될 것인데, 우리는 그들 덕분에 멍청함의 지배가 언젠가 근 시일내로 종말을 고할 것을 희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라스주의자들은 그에게 우레와 같은 찬사를 보냈다. 한편에서 그들은 소렐의 “비교할 수 없는 분석력”을 논하고 그를 “모더니즘 사상의 가장 심오한 비평가”로 바라보면서, 다른 한편에서 그는 “가장 통렬하고 강력한 프랑스 사회학자”로 칭송받았다. 왜 이런 일들이 가능했는가? 그 이유는, 바레스(Barrès)와 에두아르 드루몽(Édouard Drumont)과 함께 그는 “페기(Péguy)의 잔다르크의 자애심에 관한 신비로움(Le Mystère de la charité de Jeanne d’Arc)에서 표현된 프랑스적 애국심의 새롭고 심원한 현현”을 찬미했기 때문인데, 그는 1910년 4월 14일 악시옹 프랑세즈에서, “아마 우리 문학의 마스터피스 중 하나로 기록 될 걸작”이라고 표명한 바 있다. 그가 기록하길, 이 저작 덕분에 “위선”과 “강베타주의적인(Gambettist) 엉터리 이야기들”에게 끝을 고하고, “애국심이 기회주의적인 협잡꾼들에 의해 웃음거리가 되지 않았었다면 불가능했을 드레퓌스파의 혁명”을 종식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애국심은 그것의 기독교적 본질 없이 존재할 수 없었다. “조국의 가치를 이야기하길” 소망하는 모든 작가들은 “기독교적 초자연성”을 환기시켜야 했다. 그렇기에 “강력한 카톨릭의 확언”은 “온 무뢰배들이 자신이 향유하고 있는 오늘날의 정치적 권력이 위협받고 있다고 느끼는” 상황의 징후와도 같은 것이었는데, 이러한 글들에 동화된 “독자들은 프랑스의 영원한 혼과 끊임없이 마주보고 있는 자신을 확인하게 되기” 때문이다. 소렐에게 있어, 페기의 카톨릭적 애국심은 위대한 반지성주의의 성전에 또다른 차원을 더해 나가는 것이었다: “애국심은 따라서 그 어떠한 경우에도 합리주의에 적합할 수 없음을 하나의 방식으로 드러낸다… 예술은 정세에 만족하는 거짓 과학으로부터 승리를 거두며, 이것은 실체를 얻는다.”


소렐은 통속적인 맥락에서 갑작스레 민족주의자가 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조잡하고 쇼비니즘적인 애국심을 고수하지 않았다. 그는 부유하고 명예로운 단순한 보수주의 정치가가 되어버린 바레스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데룰레드(Déroulède)가 늘어놓은 장광설에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갑작스레 왕정주의적 정신을 전개한 것이 아니었다. 소렐은 쥘 르메트르(Jules Lemaître)가 아니었다. 그는 모라스주의적 체계에서의 합리주의적이고 실증주의적인 양 측면에 의해 이끌리지 않았으며, 악시옹 프랑세즈의 창립자의 권위주의적이고 거슬리는 성격에도 매료되지 않았다. 소렐 자신은, 보통 변절자로 여겨지며 정치 생명에 투신한 이래 함께 해온 모든 이들과 사이가 틀어졌던 심술궂은 늙은이로서, 결코 이들과도 쉽사리 잘 지내기 어려웠었다. 역사가들에게는 또렷하게 보이는 내적 일관성을 지닌 그의 “바리에이션”은 결국 당대인들에게 기이하고, 불안정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인물로 보이도록 만들었다. 크로체는 그에게 호의를 보냈으나, 1898년 안토니오 라브리올라(Antonio Labriola), 그리고 1906년 조레스(Jaurès)와 베른슈타인, 그리고 1910년 라가르데르(Lagardelle)는 그를 언제나 완전히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떠나버리는 경향을 가진 종잡을 수 없는 인물로 여겼었다.


진실은, 몇 년간 일어났던 지적 발전의 과정을 끝마친 그의 주장에는 극도의 일관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소렐은 순간의 이끌림에 따른 것이 아니라 악시옹 프랑세즈의 특정한 근원적인 양상에서 친연성을 발견한 결과에 따라 행동한 것이었다. 폭력을 찬미하며 부르주아 질서와 자유 민주주의, 18세기, 프랑스 혁명에 반하며 프롤레타리아에게 종식 투쟁으로 나설 것을 촉구하고, 기독교적 비관론의 미덕을 찬양한 그는 동시에 혁명적 노동자들에게 “역사적 계승의 원칙을 인식하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그는 나폴레옹 체제와 연계하여, “가장 위대한 혁명에서 보수의 크나 큰 역할”을 강변했다. 이러한 개념들이 모라스주의자들을 기쁘게 할 거란 사실은 너무나 자명하다. 이 단계에서, 소렐의 사상은 특히 파시즘의 지역적 변형이라 할 수 있는, 독일에서 만연했던 “보수 혁명”의 프랑스`적 변형처럼 보인다. 이 학파는 오스발트 슈펭글러, 아르투어 묄러 판 덴 브루크, 파울 드 라가르드(Paul de Lagarde), 율리우스 랑벤(Julius Langbehn), 에른스트 윙거의 저작을 통해 명성을 얻었었다. 또 한 명의 보수 혁명가 – 그는 바로 1912년의 소렐이었다.


소렐이 모라스주의 운동에 이끌리게 되었다면, 그 이유는 혁명적 에너지의 새로운 원천을 찾고자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를 사로잡은 것은 왕정주의가 아니었으며, “악시옹 프랑세즈에 참여하는 열정적인 청년들”이었다. 소렐은 왕정주의 때문이 아니라, 왕정주의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에 접근한 것이었다. 그 시기의 악시옹 프랑세즈는, 상기한 대로, 1920년대 지배적인 위치에 있었던 후원가, 지주, 해군 장교들의 운동과는 대단히 달랐었다. 실제로, 악시옹 프랑세스에 속한 학생들의 조직인 왕의 카멜롯(Camelots du Roi)은 여전히 전간기 라틴 구(Latin Quarter)에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었으나, 이 운동은 더 이상 대중적 기반을 확립하거나 “사회적”인 것과 “민족적” 원소를 융합할 것을 주장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20세기 초 모라스주의가 가진 야망이었다. 피에르 드리외 라 로셸(Pierre Drieu La Rochelle)은 1914년 이전 악시옹 프랑세즈의 “파시즘을 향한 대중적 열정”에 관해 1934년에 정확히 이야기한 바 있었고, 소렐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피에르 앙드뢰(Pierre Andreu) 또한 1936년에 쓴 글에서 소렐 그리고 생디칼리즘 이론가와 민족주의자와의 화해(rapprochement)를 다루며 “Fascisme 1913”이라는 제목을 붙였었다. 드리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내가 악시옹 프랑세즈로부터 이끌림을 받았었다면, 일정 부분은 생디칼리즘 혁명을 촉발시킨 프루동서클을 통해 접점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겠다.”


피에르 앙드뢰에게 다시 한번 집중을 기울여볼 필요가 있는데 – 1930년대의 피에르 앙드뢰 – 그는 특히 소렐에 관해 정확히 이해하고 있던 자였다. 그가 말하길, “소렐은 맑시즘 중에서 단지 계급 전쟁 담론만을 취했었다. 이 전쟁은 그에게 있어 사회주의의 정수이자 희망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는 사회주의를 자본주의에 대치시키지 않았다. 그는 프롤레타리아트를 부르주아지에 대치시켰으며, 이것을 영웅적인 전쟁으로 바라보았다. 소렐은 자본주의적 생산 시스템에 대한 비판 이상으로 부르주아를 공격했었다. 그는 모든 사회주의 체제를 격렬하게 비판했었다. 그는 자본주의를 비판한 것이 아니었다.”


동시기에, 역시 열정적이고 통찰력이 있었던 또다른 관찰자 티에리 몰니에(Thierry Maulnier)는 겉으로 보이는 것과 전적으로 달리 소렐은 결코 진정으로 변하지 않았음을 알아보았다. 민주주의에 적대적이었던 소렐은 상황에 따라 모라스 아니면 레닌을 향해 주의를 기울였었다. 몰니에가 기록하길, 소렐은 레닌에게서 “민주주의의 저속함을 향한 인간, 지도자, 창조자의 보복, 사회주의적 배반을 향한 프롤레타리아적 폭력의 앙갚음”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1914년 8월의 대격변을 앞둔 해, 악시옹 프랑세즈는 유일하게 실제적인 반대파 운동을 주도하고 있었다. 좌파의 경우, 공화주의적 합의로의 통합 과정이 상당히 가속화되었다. 소렐이 이론가로 있었던 혁명적 생디칼리즘은 발돋움에 실패했고, 노동자 대중들은 민주주의적 사회주의의 길을 걸었다. 심지어 민주주의 공화국 반대파의 상징이었던 귀스타브 에르베(Gustave Hervé)조차 동원의 시기가 다가오기 이전에 이미 극단적인 반애국주의를 버렸었다. 1912년이 다가오자, Le Mouvement socialiste을 계속 발행해왔던 라가르데르처럼, La Guerre sociale의 편집자였던 그[에르베]는 확립된 질서와의 평화를 주장하게 되었다. 확립된 질서 – 민주주의적 사회주의 또한 그 일부였다 – 에 반하여 여전히 투쟁을 이어나가던 유일한 조류는 모라스주의 운동이었으며, 단지 체제와 그것의 제도, 관행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체제의 정신적 기반 또한 부정하는 유일한 운동이었다. 악시옹 프랑세즈는 민족주의와 공화제의 절대적인 양립 불가능성을 선언하며, 공화제의 총파괴를 추구하고,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적 개념들을 패퇴시킬 수 있는 힘의 통제권을 얻는 것을 자신의 목표로 삼았다. 악시옹 프랑세즈는 고대에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가 아시아의 민주적인 무리들을 극복했던 것”처럼, 자유민주주의를 극복하게 될 “Brigade de fer”(철의 여단)을 형성하길 바랬었다. 이것은 소렐에게 충분한 호소력을 지니는 하나의 목적이자, 하나의 사고방식, 하나의 언어였다. 자신들의 격렬하고 폭력적인 지도자들과 함께 혐오스럽고 증오스러운 부르주아 공화국을 향한 매일 같은 투쟁에 참여했던 악시옹 프랑세즈의 젊은 투사들은 대체로 소렐의 당연한 우군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유일하게 가능성을 찾은 집단이었다. 모라스주의자들과 같이 그에게 있어 민주주의의 합법성이란, 천성에 반하는 허울만 그럴듯한 악의 체현이었다.


자신들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민주주의 체제의 외부에 놓은 사람들과의 만남은 악시옹 프랑세즈의 노력으로 급격히 촉진되었는데, 악시옹 프랑세즈의 원년에서부터 그러했으며, 보통은 노동 집단에서, 그리고 특히 혁명적 생디칼리스트 사이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모라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SFIO[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 Section Française de l'Internationale Ouvrière]와 그것의 여러 세포조직들과 함께해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한편에서, 프랑스 사회주의는 민주주의로 향하는 길을 따라 돌이킬 수 없는 지점까지 이미 도달했으며, 이것으로는 서구 유럽에서의 여타 사회주의 운동들이 따랐던 동일한 과정을 뒤따르는 것 이상의 것을 할 수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드레퓌스 사건은 대통합의 한 요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악시옹 프랑세즈는 따라서 드레퓌스 혁명의 저자이자, 이 유명한 사건의 가혹한 비평가이며 그것이 낳은 결과들을 무효화시키자고 격렬히 열변했던 소렐에게 향하게 되었다. 소렐은 이제 하나의 상징이자 희망이 되었다. 그 시기의 민족주의 그룹 내에서, 소렐의 기여는 공화주의적 합의에 저항하는 투쟁의 힘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이다.


당연히 처음부터 모라스주의 운동은 비순응주의적인 좌파의 발전상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며 뒤따라왔었다. 마르크스주의의 상당한 수정 – 사유 재산도, 이익도, 자유주의 경제도 그것만을 전적으로 내세우며 의문을 제기하지 않되, 자유민주주의와 그것의 철학적 기반들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회주의 – 에 기초한, 이러한 새로운 사회주의는 악시옹 프랑세즈에게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1900년 이래, 모라스는 비순응주의적 좌파로 향해 길을 터놓는 것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순수한 사회주의 체제에는 민주주의적 요소들이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그는 말했다. 모라스가 마르크스주의적 평등주의와 국제주의를 의심의 여지없이 공격을 가한 한편, 그는 동시에 “민주주의적이고 코스모폴리탄적인 구성 요소들로부터 해방된 사회주의는 아름다운 손에 걸맞은 훌륭한 장갑처럼 민족주의에 알맞은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자크 뱅빌(Jacques Bainville), 장 리방(Jean Rivain), 그리고 조르주 발루아(Georges Valois)는 자유민주주의, 보편적 선거권, 18세기, 프랑스 혁명의 유산, 모든 정치적 행위 그리고 무엇보다도 프롤레타리아트와 공화국 간의 임박한 파열에 대한 희망을 위해 후퇴하는 전반의 사상에 대하여 저항하는 모든 징후들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이러한 “극좌 반민주주의자들”, 이러한 “반민주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의 출현은 이를 다룬 모임들에게서 높이 평가받았으며, 초기 악시옹 프랑세즈는 이것에 큰 가치를 부여했다.


모라스주의자들은 소렐의 저작에게서 충만한 의의를 가장 먼저 인지한 자들 중 하나였다. 장 리방은 “일류의” 저작들을 쓴 저자이자, “혁명적 생디칼리즘의 기관, Le Mouvement socialiste의 합작자들” 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귀를 기울였던” 저작을 칭송하려고 “야수들의 몰락”을 마냥 기다리지 않았다. 이 민족주의 권위자는 [폭력에 대한] 성찰을 해석하는데 있어서도 별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기에, 그에게 있어 이 책이 내린 결론들은 너무도 자명하게 다가왔었다. 소렐의 지적 전개와 저작에 담긴 그의 인식에 대한 리방의 이해는 바로 그가 노동 조합의 사회주의적 미래(L’Avenir socialiste des syndicats)와 근대 경제로의 입문(Introduction à l’économie modern)을 다루는데 오랜 시간을 보내도록 만들기 충분했다. 예컨대, 리방은 조합적 기업과 협동조합에 대한 소렐의 개념에 담겨있는 엘리트주의적 특징을 지적했다. 물론, 소렐은 만일 협동조합이 “성공을 거둔다면, 이는 조합이 비효율성을 제거하고 이들 사이에서의 한 집단이 고용인의 역할인 업무 경영을 다룰 수 있도록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소 기업가의 진정한 연합체들이다”라고 생각했었다. 소렐은 다음의 말을 각주에 덧붙였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이들을 귀족이라 칭했을 것이다.” 리방은 소렐주의적 사회주의가 자본주의 경제뿐만 아니라 사유 재산의 소멸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충실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구상은 엘리트를 필요로 하며, 지극히 반민주주의적이고 반루소주의적 특성을 지녔었다. 총명하고, 충실한 주장을 담고 있으며, 방대한 인용으로 주장을 뒷받침하는 그의 분석을 세세한 부분까지 파고 들어갈 필요는 없다. 리방은 민주주의와 혁명적 전통에 대한 소렐의 시각을 완벽히 이해했었다. “혁명적 철학”에서, 그는 소렐이 “악시옹 프랑세즈로부터 취해질 법한 원칙과 우리가 표방할 수도 있었던 원칙의 선언”을 공표했다고 기록했다.


1911년 11월 7일, 비순응주의적인 좌파와의 접촉을 담당하고 있었던 조르주 발루아는 악시옹 프랑세즈의 네번째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공표했다: “우리의 벗들이 생디칼리즘의 투사들과 만나게 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민족주의 운동과 생디칼리즘 운동은, 이 둘의 현재 위치와 지향점 때문에 얼핏 서로 이질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의 공동 목표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발루아는 초기의 의견을 반복할 뿐이었다. 1908년에 이미 장 리방은 생디칼리스트와 악시옹 프랑세즈의 공동 목표는 “공화정과 민주주의 체제의 파괴”였다는 것을 이야기하며 그에 대해 언급했었다. 분명히, 민주주의 정치 문화와 그것의 철학적 기반, 그리고 그것의 원칙과 관행에 대한 무자비한 비판은 소렐과 악시옹 프랑세즈의 접점이었다. 젊은 모라스주의자들에게서 느꼈었던 장엄함, 권력, 그리고 폭력으로의 갈망은 소렐을 매료시켰다. 그는 이들이 내세우는 현존하는 도덕과 정치 질서에 대한 절대적 거부에 갈채를 보냈다.


1910년 소렐은 발루아에게서 큰 타협의 가능성을 바라보았으며, 에두아르 베르흐(Édouard Berth)와 발루아가 함께하는 자리를 마련한 것도 그였다. 그 시기에 민족적 사회주의 저널인 La Cité française의 사상은 결실을 맺게 되었다. 하찮은 경쟁의식 때문에 이 저널은 빛을 바랬지만, 1910년 7월 그것의 다가오는 출현을 알렸던 강령은 기획의 의의를 충실히 표현했다. 이것은 소렐에게 인정을 받았었다. “이 저널은 민주주의의 어리석은 자부심, 인간지상주의적 넌센스, 국외의 유행으로부터 반감을 사고 있으면서, 프랑스 정신에서의 독립성을 복원하길 희망하는 자, 그리고 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민족적 사상의 대가들이 열어놓은 고귀한 길을 따르길 결심한 분별있는 사람들이 만들어 나간다.” 이러한 개념들은 La Cité française의 “Déclaration”에서 찾아볼 수 있다.


La Cité française의 창립자들은 다양한 형태의 일반론을 주장하고 있으나, 그들은 다음의 사항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를 표한다: 만약 근대 세계에 제기된 의문들을 문명에 호의적인 방식으로 해결하길 바란다면, 이는 틀림없이 민주주의 제도의 파괴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당대의 경험들은 민주주의가 사회의 전 계층, 특히 노동 계급에게 있어 가장 거대한 사회적 위협이라는 것을 가르친다. 민주주의는 소수의 정치가 집단들이, 금융가들과 연합하거나 그들을 지배하에 두어 생산자들을 착취하는 것을 허락하기 위해 계급을 섞어 희석시키려 든다.


따라서 누군가는 민주주의의 사상권의 외부에서 사회를 조직해야 한다. 누군가는 민주주의 외부에서, 민주주의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에 반하여 계급들을 조직해야 한다. 누군가는 계급들이 반드시 가져야 하는, 그리고 민주주의 관념에 의해 오늘날 억눌리고 있는 스스로의 의식을 각성해야 한다. 누군가는 그 누구도 이것의 역사적 사명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에 개의치 않고, 각 계급에 적합한 미덕들을 일깨워야 한다…


이 투쟁으로부터 우리는, 투쟁의 필요성을 인식한 모든 이들에게, 열정적인 협동과 무조건적인 헌신을 청하는 바이다.


에두아르 베르흐, 조르주 소렐, 장 베리오(Jean Variot), 피에르 질베르(Pierre Gilbert), 조르주 발루아.


La Cité française에서 실패를 겪고나서 6개월 후, 소렐과 발루아의 무산된 계획의 목적을 다시 응집한 L’Indépendance가 모습을 드러냈다. 만일 Cité française가 장 베리오를 향한 조르주 발루아의 반감 때문에 순조로운 출발을 하지 못했었고, 그리고 만약 베리오에 대한 충의의 발현으로 소렐이 혁명적 생디칼리스트와 민족주의자들의 첫 공동 계획을 방해하는 것을 선택했다면, 그는 자신이 바라던 대로 L’Indépendance를 완전히 자유롭게 굴릴 수 있었을 것이다.


1911년 3월에서부터 1913년 7월까지 논평을 냈었고, 격주로 총 47호가 발간되었다. 존립기간 내내 저널은 타로(Tharaud) 형제와 장 베리오에게 주로 지원을 받던 저널의 창립자에게 알맞은 적절한 공식, 정확한 서식, 편집부원을 구하는데 난항을 겪었다. 1912년 10월, 바레스, 부르제(Bourget), 그리고 프랑시스 잠(Francis Jammes)이 편집부원으로 합류했으나, 논평에 강렬함, 색채, 특징을 부여하는 것 만으로는 이러한 변화가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베르흐와 발루아는 이부분에 있어 전혀 역할이 없었고, “노동자의 요구는 민족의 요구만큼 정당하다”고 여김을 표명했음에도, L’Indépendance는 주간으로 발행하는 악시옹 프랑세즈와 구분될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여기서 민족주의, 반유대주의, 문화의 수호, 고전주의, 그리스-로마의 유산, 그리고 대학과 세속적 교육에 반대하는 투쟁이라는 공통 주제를 발견할 수 있다. L’Indépendance는 강베타와 [현 체제에서의] 국가의 수호 (현 공화국은 비스마르크의 창조물이라고 주장했었다)에 대항하는 장기간의 캠페인을 벌였고 프랑스 남부 왕정주의자의 봉기에 활발히 기여했었다. 파레토, 르 봉, 그리고 클로델(Claudel)과의 협업에도 불구하고, 자기 고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실패했고, 처음에 구상했던 요구를 충족시키는데 실패했다. L’Indépendance의 시기동안, 소렐은 그저 악시옹 프랑세즈의 한 대변인이자, 모라스의 도구가 되어가고 있었다. 1910년에 이미 그는 악시옹 프랑세즈의 불필요한 언쟁들을 옹호했고, 자신이 경멸했던 보수 우파에 대항하여 반체제 인사들과 혁명가들처럼 모라스주의 운동을 열정적으로 옹호했다.


L‘Indépendance는 동일한 저변을 가지고 있었다. 새 논평의 정책 성명에서 나타나는 좋은 의도의 표명에도 불구하고 – “L‘Indépendance는 그 어떠한 정당이나 학구 운동의 도구가 되지 않을 것이다” – 그저 악시옹 프랑세즈의 증보판을 읽는 듯한 인상을 보여주었으나, 원본보다 딱히 더 생산적이고, 예리하고, 정교할 게 없는 것이었다.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소렐은 1912년에 “프랑스 문화의 수호는 오늘날 샤를 모라스의 손에 달려있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 시기 소렐은 모라스의 사상에 상당히 심취해 있었는데, 그의 논평은 에두아르 드루몽의 구 저널 La Libre Parole 또는 쥘 게링(Jules Guérin)의 신문 L’Antijuif에서 내세운 것과 다를 바 없는 반유대주의의 기관지 노릇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악시옹 프랑세즈에게 반유대주의란 방법론적 필요성을 가진, 하나의 실제적인 역사의 필요조건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모라스는 1911년 3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반유대주의의 우연적 발생 없이는 모든 일들은 불가능하거나 지극한 난해함을 드러낸다. 이것은 모든 것을 조정해주고, 바로잡으며, 단순화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만일 반유대주의가 애국심을 관통하지 않았다면, 이것은 단지 하나의 단순한 기회주의적 의미를 관통하게 될 뿐이다.” 소렐은 이 주장을 지지했으며 기나긴 과격한 반유대주의 캠페인에 자기자신을 내던졌다. 그는 살아있는 가장 저명한 반유대주의자이자, “프랑스인은 모든 것을 지배하려는 유대인 침략자들에 맞서 자신의 국가, 자신의 관습, 자신의 신념을 반드시 수호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주장하도록 독려했던 우르뱅 고이에(Urbain Gohier)을 칭송하는 장문의 글에 서명을 했었다. “드레퓌스의 시대에서”(Aux temps dreyfusiens) 라는 글에서, 그는 전방위적으로 유대인들을 위협하며 그들에게 프랑스의 데카당스의 책임을 물었다. 5월 제 1호와 제 15호의 발행물 그리고 1912년 6월 제 1호의 발행물은 “유대인의 가식”이라는 제목을 달은 3부로 구성된 방대한 에세이를 담고 있었다. 여기서 유대인들, 그리고 특히 유대 지식인들과 작가들은 프랑스를 정복하길 바라며 “이주의 위험으로 인해 받아들여진 사회의 정신적 유산을 반대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1913년 6월 제 1호는 이삭 블룸첸[Isaac Blümchen, 우르뱅 고이에의 필명]이 일부 논평에서 역설했던 “프랑스에서의 유대어”(Jewish Words on the French)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글의 목적은 한 유대인에게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프랑스인을 위협하는 악의 천성을 보여주고자 함에 있었다. 1912년 4월호와 1913년 2월호와 4월호에 기고된 “2주간의 기록”(Notes de la quinzaine), 그리고 “반향”(Échos) 또한 유사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드레퓌스 사건의 종식과 나치즘의 도래 사이에 놓인 서구 유럽 전역에서, L’Indépendance는 여전히 대담하게 유대인들에게 의례적 살해에 대한 비난을 가하던 몇 안되는 출판물 중 하나였다. 이전보다 더 나아가서, 마치 그것이 성 프란치스코의 성흔과 성 야누아리오의 피에 대한 빈번한 암시와 조화를 이루는, 하나의 명백한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여겼는데, 이는 크로체에게 보낸 소렐의 편지에서 드러나며, 그가 기적과 반유대주의적 발언들에 대한 주목을 확산시킨 것과 관련성을 지닌다. 이것이 비이성을 향한 그의 매료에 대한 하나의 측면임에는 틀림없다. 반유대주의는 통합적 민족주의와의 접점을 이루는 요소들 중 하나였다. 마리오 미시롤리(Mario Missiroli)에게 보낸 소렐의 편지에서, 반유대주의적 언급들은 더욱 강박적인 성격으로 드러나는데, 이러한 언급들은 베르흐와 라가르데르와의 일치성을 더욱 증진시켰다. 동시에, 여타 많은 자존적인 반유대주의자들과 같이, 소렐은 특정 유대인들에게 친밀감을 드러냈는데, 베르그송이나 고대 유대민족에 대한 모종의 매료, 혹은 근대 시오니즘에 대한 열정과 같은 “훌륭한 유대인”을 향해 경의를 표출했었다.


소렐의 반유대주의는 모라스에 종속된 결과로 나타난 것이 아니었으며, 하나의 진실 어린 사상적 공통성의 실존이었다. 더욱이, 쉽고 빠르게 모라스주의의 정치적 조류로 흡수된 사실은, 비록 하나의 일시적인 현상일지언정 – 드레퓌스시기의 양상이나 레닌주의에 대한 공감에서 나타나는 양상과 다를 바 없이 – 민족주의적 포용력에 대한 그의 믿음이 파열을 일으켰다는 것을 반증한다. 한편 부르주아지의 악의에 타락해버린 프롤레타리아의 엘리트들이 자신들의 도덕적 파산, 민족주의, 그리고 당연히 그것의 미래를 드러내며 서서히 발흥하고 있었다. 이것에 대해서는 극좌와 극우를 가릴 것 없이 모두가 동의했었다. “우리는 민족주의의 부활을 목도하고 있다. 이것은 이 세상에 만연하고 있다.” 1911년 4월 프랑시스 드 프레상스(Francis de Pressensé)는 이와 같이 말했다. 2년 뒤, 악시옹 프랑세즈의 여섯 번째 회합에서, 발루아는 다음의 내용들을 단도직입적으로 주장했다: “오늘날, 사회적 변화를 이끌 책임을 지니게 될 사유와 감정의 힘을 이끌어내는 것은 다름아닌 민족주의다.” 그가 말하길, “민족주의의 상승”은 “대중의 정신에 각인된 사회주의적 가치들을 대체할 민족적 가치들을 바라보게 된”결과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발루아와 베르흐 이 둘은 하나의 새로운 감정이 나타나고, 반체제 모임들이 새로운 요구들에 부응하고자 골몰하는 것을 느꼈다. 폭력에 대한 성찰과 진보의 환영(Les illusions du progress)에서 최종적인 진술을 한 것처럼 보였던 과거 소렐의 L’Indépendance는 대 실패였던 셈이다. 민족주의로의 고수 이외에도, 소렐이 새로운 신념을 표현한 것은 몇 년 후의 일이었다. 소렐이 La Cité française의 작업에 착수하고자 준비했었던 시기에 같이 활동하고자 격려했던 베르흐와 발루아는 이제 이 공동 협업을 다시 이어 나가기로 결심했다. 1911년 12월 16일에 프루동 서클의 첫 모임을 가졌었고, 그 다음 해 1월 서클의 첫 팜플렛(Cahiers)이 모습을 드러냈다.


첫번째 팜플렛의 서문에 실린 서클의 “선언”(Déclaration)은 미완으로 멈춘 Cité française의 출현에 관한 머리말에 쓰였던 기존의 사상들과 공식들을 다시 반복하고 있었다. La Cité française의 출현을 알린 강령은, “프랑스에 출현했던 유일무이한 사회주의 저자”인 프루동의 권위를 불러일으키길 기원하며 결론을 맺었다. 모든 측면에서 – 그것의 내용, 정신, 그리고 서술과 관련하여 – 이 새로운 논평은 소렐이 기존의 계획을 어쩔 수 없이 폐기했을 즈음, La Cité française의 무산된 프로젝트를 다시금 결집하는 데 착수했다. 팜플렛에 실린 첫번째 강령의 서두에서, “선언”에서의 이 첫 두 문단은 다음과 같은 기조를 확립했다.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거나 의식적으로 잊어버려왔던 창립자들은 – 공화주의자, 연방주의자, 통합적 민족주의자, 그리고 생디칼리스트 – 프루동의 저작과 현대 생디칼리즘 운동에서 발견한 프랑스 전통으로부터 가져온 원칙들과 조화를 이루는 프랑스 사회의 조직에 열정적으로 동의하며, 이들은 다음의 사항들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다:


민주주의는 과거 세기가 낳은 가장 큰 오류이다. 살고자 한다면, 일하고자 한다면, 사회적인 삶 속에서 생산과 문화를 향해 가장 위대한 인간의 맹약을 다짐하길 바란다면, 문명의 도덕적, 지적, 그리고 물질적 자산들을 보존하고 번창하길 바란다면, 민주주의 제도를 파괴하는 것은 절대적인 필수불가결이다.


소렐은 왜 La Cité française와 동일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 이러한 팜플렛의 착수에 개인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는가? 이들은 결국 그의 사상의 연장선상에 놓여있었다. 물론 그는 프루동과 관련하여 모라스주의자의 진실성에 의문을 품고 있었고, 어떤 시기에 그는 베르흐에게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없는 일”과 연관되어서는 안된다고 조언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에르 앙드뢰가 소렐이 베르흐에게 보낸 미출간된 편지들을 소개할 때 지적했듯이, 이러한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인 이후, 소렐은 “서클의 반민주주의적 열정에 이미 설득된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왜 유보적인 입장을 취한 것인가?


유일하게 자명한 것처럼 보이는 해답은 소렐의 사상보다는 그의 성격과 연관 지어보는 것이다. 그는 팀워크에 충실하지 않았었기에, 아마도 그는 La Cité française의 작업에 착수할 때 수반했던 것과 같이, 피할 수 없는 언쟁과 개인적인 경쟁의식 때문에 저널리즘적 모험에 대한 흥미를 잃었을 것이다. 분명 창립자들은 자신들의 솔직한 헌신을 다짐하고자 혈안이 되어있었는데, 서클은 프루동과 소렐의 가호 하에 자신들을 수놓았다. 더욱이, 서클에 영감을 불어넣은 당대의 사상은 의심의 여지없이 소렐의 사상이었다. 팜플렛의 내용은 이 사실을 여실히 증명한다. 첫 팜플렛이 (1912년 1월-2월) 프루동에 대한 헌신을 나타낸 것이라면, 두번째는 (3월-4월) 프루동과 소렐로 양분된 것이었으며 (질베르 마이르(Gilbert Maire)는 “조르주 소렐의 철학”이라는 제목을 달은 기사에서 이 부분을 다뤘었다), 2개의 호로 이루어진 세번째는 (Cahiers 3-4 [1912년 5월-8월]) “조르주 소렐에 대한 경의”를 이야기하는 데 전념했었다. 이 팜플렛은 특히 1차세계대전 당시 사망했던 가장 촉망받는 젊은 모라스주의자들 중 한명인 앙리 라그랑주(Henri Lagrange)가 쓴 흥미로운 글인 “소렐의 업적과 프루동 서클”(Sorel’s Work and the Cercle Proudhon)을 포함하고 있었다.


심지어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소렐은 결코 프루동 서클의 생디칼리즘-민족주의의 합성을 거부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 서클은 결코 모라스에게 경의를 나타내지 않고 오로지 소렐에게만 드러냈으며, 모라스의 권위는 소렐의 권위보다 덜 언급했다는 사실이다. 모라스는 자신과 관련하여 팜플렛에 짧은 기사를 하나 기고했으며, 소렐은 그저 짤막한 글을 기고했었다. 설령 이 두 권위자들이 젊은 세대와 직결되는 일에 관하여 거리를 두고자 했다고 한들, 이들이 끼친 영향의 존재에 관해서는 한 치의 의심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렐의 영향력은 가장 쉽게 인식할 수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소렐이 Cahiers 프로젝트가 시작됐을 당시 L’Indépendance의 출판을 지속했던 소렐처럼 모라스 또한 자신만의 발행기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서클의 주도권은 새로운 정치적 활로를 모색하고 젊음의 열정으로 무장한 채 모험으로 나서고자 한 급진 분자들의 몫이었다.


그렇기에, 설령 서클이 소렐이 만든 것이 아니라고 한들, 그는 이 서클을 향한 자신의 후원, 자신의 이름, 혹은 자신의 명성을 이용하는 것을 결코 부인한 바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저작에서 영감을 얻고 적절한 결론을 이끌어낸 것에 대한 이들의 정당성에 결코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제명하고, 비판하고, 항의하는데 놀라운 재주를 가졌던 그 사람, 너무나 까다로운 성격을 가진 (소렐은 과거 사소한 문제로 페기와 관계를 끊었다) 그는 결코 Cahiers가 선전하는 사상에 반하는 한 마디 말도 꺼내지 않았었다. 비록 좌파 전체가 – “분열”을 격렬하게 비난했던 Le Mouvement socialiste의 구성원들을 포함하여 – 그를 변절자로 여겼음에도, 소렐은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의 통합이 자신의 의지에 반하거나 자신과 무관하게 이루어진 것이라고 이해할 만한 여지를 남기는 글을 쓰거나 발언을 한 바가 전혀 없었다. 그런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막은 요인들은 전혀 없었다. 그는 자신의 논평을 스스로 편집했고, 계속 상당수의 글을 써왔으며 단지 침묵을 지켰을 뿐이다. 이탈리아의 언론과 (상대적으로 덜한) 프랑스 언론이 대번에 이 주제에 관한 논평을 쏟아내며 거대한 동요를 야기했던 당시, 이러한 침묵은 단지 동의의 뜻을 표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L’Indépendance가 사라진 이후, 자신의 저작이 베르흐에게 참고 자료로 사용되길 꾀했던 것은 다름아닌 소렐 아니었던가? 나는 여러분들이 민주주의의 구성에 관해 다룬 챕터를 읽어보는 것을 권한다. 아마도 여기서 다소 중요한 개념들을 얻어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마르셀] 리비에르가 (Rivière) 프롤레타리아 이론을 위한 자료 (Matériaux pour une théorie du proletariat)라는 [소렐의] 책에서 그 부분을 활용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프루동 서클의 팜플렛(Cahiers du Cercle Proudhon)을 참조하길 권하고 싶다.


그러므로 소렐의 이름이 Cahiers의 편집 위원의 명단에서 보이지 않는 것은 지적 사유, 정치적 사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진짜 이유는 가장 유명한 그의 이탈리아 제자들 중 하나였던 안젤로 올리베티(Angelo O. Olivetti)가 설명하길, 이 “불로뉴쉬르메르(Boulogne-sur-Mer)의 불평분자” (원문 그대로의 표현) [소렐]는 집단적 기획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주로 자신의 인색한 성격과 스스로를 굽히지 않으려는 자들과 약간의 시간이라도 협업하는 부분에 있어 무능력함을 나타내는 이 권위주의적인 사람은 Le Mouvement socialiste가 만들어진 무렵인 12년전에도 이미 그 부분이 명백하게 드러났었다. 자신의 시대적 과제 혹은 필요한 지적 위상에 걸맞은 혁명적 사회주의의 현자 역할을 수행하기 보다는, 소렐은 끊임없이 신랄하게 비꼬며, 편지에 쓴 자신의 조언을 라가르데르가 따르는 데 실패할 때마다 날카로운 반응을 나타내며, 어떤 일이 혹은 어떤 사람이 자신을 불쾌하게 만들 때 마다 적개심을 품은 비난을 날리며 공격적인 발언을 해왔다. 베르흐와 발루아가 새로운 모험을 시작하려 할 즈음, 수많은 패전을 경험한 소렐은 편집실에 들어가 다시 본연의 일에 복귀하기엔 썩 내키지 않은, 한 명의 늙은 남자일 뿐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의 통합에 대한 자신의 완고함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이 어느 편에 있는지 보여주기 위해, 그는 에두아르 베르흐의 지식인의 폐해(Les Méfaits des intellectuels)라는 저서에서 온정적인 느낌의 서문을 써주었다. 이것은 그 문제에 관해서 더 이상 어떠한 의문도 남기지 않는다. 1914년 1월에 쓴 이 중요한 글귀는 서문의 글쓴이가 그 책의 내용들과 관련하여 저자에게 완벽한 동의를 나타낸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 책의 목적은 바로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의 통합을 체계화함으로써 프루동 서클의 업적에 대미를 장식하려는 것이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이것은 통합에 대한 베르흐의 서술에서 나타나는데, 소렐에게 조금의 거리낌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형제애로 뭉친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의 동맹으로부터, 그리스 불후의 비극이 탄생했다… 이와 같이, 모라스와 함께 아폴론적 정신의 새로운 현현이라 할 수 있는 악시옹 프랑세즈는, 소렐과 함께 디오니소스적 정신을 표상하는 생디칼리즘과의 협력을 통해 결국 오랜 기간동안 세상을 찬란하고 매혹적으로 만들어 내는 역사적 성취들 중 하나가 될, 새로운 위대한 세기를 열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소렐주의의 역사적 의의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의 진정한 차원들은 구 19세기 세계를 지나간 순간, 1914년 여름에 단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을 뿐이다. 그 해 1월, 소렐은 이미 그 영향에 관하여 “이 무대 위에서, 오로지 영웅주의만이 크나 큰 역할을 맡을 뿐이다”라고 윌리엄 제임스에게 말한 바 있었다. 이 일대의 사건의 기대감에 가득 찬 그의 이탈리아 제자들처럼, 소렐 또한 전쟁의 혁명을 기다렸다. 오랜 시간동안, 기나긴 유럽의 평화는 그에게 “도덕적, 지적 나약함의 한 원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기업의 정신이 시들어지는, 경제적 나약함”의 원인으로 보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현 상황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으리라는 사실은 너무나 자명하다: 프랑스에서 호전적인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금방의 일이며, 그러한 각성은 전 유럽의 격변을 야기할 것이다. 거대한 전쟁은 오늘날 온건으로의 취향, 사회적 평온을 향한 소망을 부추기는 요소들을 제거하는 결과를 가져다 올 것이다.”


소렐은 어디에서나 똑같이 이야기했다. 그는 “통치에의 의지를 지닌 권력자의 도래, 혹은 부르주아가 혁명의 현실을 깨닫게 만들고 조레스가 부르주아를 구슬리는 인도주의적 상투어들에 대한 혐오감을 이들에게 내던지게 될 프롤레타리아 폭력의 거대한 확장을 가져다 올 거대한 대외 전쟁”을 기대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 그가 그렇게도 고대했던 전쟁이었다 – 소렐은 이를 맹렬히 비난했었다. 그는 자유민주주의가 굴복을 하려는 찰나가 아니었음을 재빨리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소렐은 정치적인 인간은 아니었다. 그는 무솔리니의 직감을 지닌 것도 아니고 여타 이탈리아 생디칼리즘 이론가들과 지도자들 – 미헬스(Michels), 파눈치오(Panunzio), 오라노(Orano), 올리베티(Olivetti), 데 암브리스(De Ambris), 비앙키(Bianchi), 그리고 비범한 리더였던, 코리도니(Corridoni) – 의 반사동작 능력을 지닌 것도 아니었다. 그는 유럽의 전쟁이 제공한 기회를 포착하지 못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소렐은 외부 세계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늙고 지쳐버린 그는 1914년 10월 베르흐에게 모든 것과 모든 이들에 대한 자신의 비통함과 경멸을 드러내는 절망적인 편지를 썼던 앙베리외앙뷔제(Ambérieu-en-Bugey)에서 바라본 것으로 상황들을 평가했었다. 신성 동맹(Union sacrée)에게 있어, 무엇보다도 알베르 드 몽(Albert de Mun)과 모라스를 에르베, 바일랑(Vaillant), 쥘 게드(Jules Guesde)와 함께 아우르는 연합은, 그의 주장에 따르면 “국가의 근본적인 소유물을 수호할 필요성에 의해” 동기를 부여받은 것이 아니라 “프로이센이 가지고 있던 규율의 개념에 대한 증오”에 의해 촉발된 것이었다. 그 다음, “분열의 원인 제공자들과 평화를 이루고자 했던” 교황에게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가 말하길, “군주제 국가에서 사회 세력들이 어떻게 되어야 할 지에 대해 진지한 개념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던” 모라스에게도 그랬었다.


소렐은 “여전히 유럽에 살아 숨쉬는 진실되고 장엄하며 로마적인(Roman) 모든 것을 끝장내버릴 것”이라고 자신이 말했던, 이 끔찍한 연합이 승리를 거둘 것임을 곧 직감했다. 그러나, 혁명적, 반유물론적, 반마르크스주의적, 반자유주의적인 새로운 파장이 거둘 첫 성과는 그리 머나먼 일이 아니었다. 이 성과는 소렐이 죽은 직후 확실해졌다. 초기 파시스트의 이데올로기는 생디칼리즘과 민족주의의 통합으로부터 초기의 근원적인 내용을 끌어왔다. 이 통합은 소렐 고유의 기여 없이는, 18세기가 남긴 유산, 볼테르와 루소, 프랑스 혁명, 합리주의와 낙관주의, 자유민주주의와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경멸을 설파했던 소렐 없이는, 민주주의적 평등주의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를 찬미했던 소렐 없이는, 대중 사회의 무리들을 이끌 엘리트의 권리를 향해 경의를 표하고 고전 문화와 전통의 힘 안에 깃들어진 강인한 믿음, 그리고 유산을 향한 숭배를 요구했던 소렐 없이는, 카톨릭정신을 규율의 원천으로 여겨 파괴 세력에 맞서 언제나 보호받는 문명의 근본적인 요소로 여겼던 소렐 없이는, 그리고 자신의 목표를 유럽 문명에게서 기독교적이고, 염세주의적이고, 영웅적인 시대의 장엄함을 복원하는 것으로 두었던 소렐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파시즘의 기저를 이루는 소렐주의적 통합에 있어 하나의 중요한 요소였다), 기독교정신에게서 중요하게 여긴 것은 그것의 사회적 덕목이었지 – 규율, 순결, 염세관 – 신앙이 아니었다. 그 세기 초의 모든 반항아들이 그랬듯이, 그리고 바레스와 모라스와 같이, 소렐은 기독교적 형이상학이 아닌 문명의 미래를 담보할 질서의 핵심으로서 관심을 가졌었다.


소렐을 사로잡은 것은 프롤레타리아의 운명, 민족의 운명이 아닌 문명의 운명이었다. 프롤레타리아 공동체 혹은 민족 공동체는 그의 눈에서 단지 자신이 바라던 거대한 변화를 이끌어 낼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한 이유로 이 혁명은 자본주의 경제의 기조를 결코 건드리지 않았었다. 소렐의 반자본주의는 자유주의 체제와 부르주아 체제에서의 정치적, 지적, 도덕적 측면에 엄격히 한정되어 있었다. 그는 자본주의 경제가 가지고 있는 토대, 원칙, 그리고 경쟁 매커니즘에 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소렐주의 혁명은 자연권 이론의 근절, 인간 권리의 철폐, 그리고 민주주의 정치 문화의 공리주의적이고 물질주의적인 토대들을 뿌리 뽑는 것을 추구했으나, 사유 재산을 건드리진 않았다. 프롤레타리아의 개념이 생산자의 개념을 대체해 나가길 시작할 때, 소렐주의자들은 계속해서 자신들의 대가가 남긴 혁명 이론을 정교하게 만들며 혁명적 자본주의의 토대 – 생산자들에 의한 자본주의, 금권 정치와 거대 금융 거래에 대한 적개심, 주식 거래, 중개업자, 수전노에 대한 적개심 – 를 마련했다. 이 혁명 이론은 시장 경제, 경쟁, 경제 활동에서의 국가의 불간섭과 관련하여 상당한 친연성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정치 관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은, 신화를 통해 대중을 동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형태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것은 덕목을 창조하는 폭력의 신념을 지지했다. 이것은 도덕적, 지적, 그리고 정치적 혁명을 마음속에 그려냈다. 이것은 열정적인 비관론과 본질적인 반합리주의를 수반하는 정신주의적 혁명을 필요로 했다.


그가 활동의 마무리를 지으려던 시기에, 자신의 업적을 이어 나가려고 했던 제자의 책의 서문을 썼을 때, 소렐은 운동력을 부여하는 힘의 천성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나는 15년 혹은 20년 내로, 베르그송주의 덕분에 데카르트 이래 지성주의 철학자들이 창조해낸 유령들이 사라진 우리의 새로운 세대는, 악의 이론의 실체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귀를 기울일 것임을 확신한다… 나는 여러 번 심연 속을 들여다보았지만, 감히 그곳에 들어가고자 할 수는 없었다. 진보의 환영(Les Illusions du progress)말미에 파스칼이 쓴 약간의 글귀들을 해설하는 것을 잠시 고려해 본 순간이 있었지만, 우리 시대의 사람들에겐 너무나 끔찍하게 다가올 주제를 꺼내지 않는 것이 더 현명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몇몇의 조짐으로부터 악의 형이상학을 본래의 자리로 돌려보낼 시대가 이미 다가오고 있음을 인식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제 좀 쉬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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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9 일반 책 사려는데 어떰?? [2] PzKur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4.10 236 1
19117 일반 히틀러를 그저 '그때 살았던 한 사람'으로 봐야 한다 [1] PzKur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4.10 272 7
19116 일반 우리는 그저 팝콘이나 까면 됩니다. 오헝오헝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4.10 168 3
19115 운영 아랫글과 같은 밭갈이는 분탕 탭으로 옮기겠습니다. 민족주의자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4.10 161 6
19114 분탕 지금 조선 상황 이거 맞나요??? [2] ㅇㅇ(175.223) 04.10 274 0
19113 일반 두창견 상납견 사망 ㅅㅅㅅㅅㅅㅅㅅㅅㅅ 나갤러(118.235) 04.10 127 5
19112 일반 무효표 던지고 옴 [3] ㅇㅇ(211.229) 04.10 150 3
19111 자료& 북한의 민족주의에 대한 입장 [1] 나갤러(223.39) 04.10 210 9
19109 건의 한국에 파시즘 정당이 있나? [4] 외로운늑대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4.10 264 3
19107 일반 일부 김항의 <정역> 소개. 장산범을타라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4.10 129 4
19106 질답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파시즘에 가까운 대통령이 박정희임? [3] 나갤러(223.39) 04.09 252 2
19105 자료& 제1공화국 국가개조운동사 이범석 어록 발췌 민족주의자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4.09 190 10
19104 일반 이딴 갤러리가 있네 ㅋㅋㅋㅋㅋ [3] 나갤러(14.32) 04.09 300 8
19103 일반 반미자주로 정상국가화중인 일본 [1] ㅇㅇ(118.235) 04.09 249 14
19102 생각의 민족주의를 애초에 공산주의자가 주장하는게 말이 됨? [5] ㅇㅇ(211.234) 04.09 225 7
19101 일반 로갤 애들이 왜 중국공산당을 욕하는지 이해가 안됨 [4] 나갤러(124.54) 04.08 208 7
19100 일반 웃긴 짤 [2] ㅇㅇ(211.229) 04.08 148 4
19098 일반 전역하고 독일군 리인액트하는 게 목표임 [1] PzKur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4.07 167 0
19097 생각의 나갤 여러분들이 로자갤보다 훨씬 신사적이시네요 [15] ㅇㅇ(211.234) 04.07 597 17
19096 생각의 오마르센세의 교시(教旨)를 따르라 [2] 유교탈레반(118.109) 04.07 187 3
19094 일반 盧자슨셈부르크 갤러리에 질문하러 갔는데 완장이 삭제해서 그런데 질문좀 [8] 정치가에이신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4.07 299 2
19093 질답 혹시 중국/북한을 파시스트 국가라 평가할 수 있을까요? [9] ㅇㅇ(211.234) 04.06 243 0
19092 일반 한민족은 서구의 사상과 공존할수 없다 생각함 [3] 전문파ㄱㄱ(45.14) 04.06 257 3
19090 일반 민문회의 문제 [4] ㅇㅇ(188.241) 04.05 236 5
19088 일반 여기는 대충 사상이 뭐임? [14] 외로운늑대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4.05 397 0
19086 일반 좌파면서 반이민 성향인 커뮤니티 있음? [5] ㅇㅇ(223.39) 04.04 272 0
19085 일반 자기개발영상 비판하는 글 어디갔노 [1] ㅇㅇ(119.69) 04.03 129 0
19083 일반 트럼프 차별금지법 추진 [4] ㅇㅇ(125.141) 04.03 220 5
19082 일반 심각심각 동남화는 인종열화 [8] ㅇㅇ(45.14) 04.03 281 6
19081 질답 여기는 한아람이란 사람 암? [8] 외로운늑대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4.03 302 0
19079 자료& 2차대전 독일 최고의 명장, '아돌프 히틀러' [5] PzKur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4.01 413 15
19078 자료& 살불살조(殺佛殺祖) [2] PzKur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4.01 205 2
19077 자료& 부처의 유훈 PzKur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4.01 119 4
19076 일반 주체적 태도에 대한 떡밥이 도니깐 생각나는 일화를 소개하겠음. 최태민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4.01 189 12
19070 자료& 자유주의와 전체주의를 넘어 자유협동사회로... 나갤러(218.239) 03.29 149 3
19069 휴지통 민족주의는 해도 파시즘은 하지마라 [6] ㅇㅇ(211.36) 03.28 366 3
19067 질답 이런 주장은 상당히 극단적인 편인가 [2] ㅇㅇ(106.101) 03.28 264 2
19066 일반 영화 파묘본 갤럼있음? 나갤러(14.32) 03.27 133 2
19064 일반 애니와 만화가 사탄의 것인 이유 [1] ㅇㅇ(218.37) 03.27 238 9
19063 일반 2찍 두창견 총선 좆망 예정이니깐 이곳저곳에서 분탕이나 치고 다니네 [1] 나갤러(118.235) 03.27 271 18
19062 생각의 이새 끼들은 무슨 봇같은거 돌리나? 김갑식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26 405 15
19061 일반 논리로 쳐발리니까 자삭하네ㅋㅋㅋ [1] 오헝오헝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26 17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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