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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번역] 기술과 경제적 인간

ㅇㅇ(218.147) 2020.07.17 21:2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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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자크 엘륄 - 기술의 역사 (기술 사회, Technological Society, 1954, 박광덕 옮김) 中 발췌




경제적인 인간은 자유시대의 경제적 독트린의 첫 번째 산물이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문제(question)는 문제(problem)를 이해하는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에게는 경제적 인간이란 경제적 탐구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하나의 추상이었고 이론화를 위한 하나의 가설이었다. 이것은 인간이 생산자와 소비자라는 경제적인 측면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소유해야 하는 어떠한 인간적인 특성을 생략함으로써 틀이 구성되었다. 이러한 추상적인 개념은 이분법적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19세기 초의 완전한 인류학에 해당되었다.

 

인간에 대한 이러한 개념은 계속 변해 왔다. 경제적 인간에 관한 메리고(Jean Merigot)의 연구는 현재의 독트린과 경제이론의 견지에서, 이러한 추상적 개념화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수용될 수 없다는 점을 입증한다. 첫째 인간은 하나의 전체이며, 이러한 전체는 분석되는 바로 그러한 행위에 따라 변하며, 둘째 경제현상은 인간의 전체성에 대해 상관적으로 작용하고 변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메리고는 그러한 일방적인 견해에 만족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 하지만 그런 모든 것은 순전히 지적인 차원에만 머물며, 그가 설명하는 발전은 정치경제 서적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저자들에 의해 입증된 경제하는 인간(homo economicus)은 죽었다라는 만족은 순전히 이론적인 채로 남게 되었다.

 

나는 또 다른 일련의 발전을 지적하고자 한다. 기술, 특히 경제기술은 책 속에서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인간과 부딪힌다. 현대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실들 중의 하나는 경제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그것은 경제적인 인간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더욱 사실적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단순히 가설이었던 것이 현실화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은 경제환경의 압력하에서 서서히 변해가고 있으며,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구성한 단순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순수한 이론적인 존재가 실현화되는 전이는 바로 이 점에서 우리와 관계가 있게 된다. 그것은 이론적인 경제학자들이 인간의 현실적 복합성을 고려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발생한다. 그러나 이미 모든 것을 상실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복합성을 인간은 잃어가고 있다. 결과는 현대의 경제학자들은 여전히 추상적인 것을 위험을 무릅쓰고 이론화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는 철학적으로 상상되거나 역사적"맑은 고딕";mso-fareast-theme-font:minor-latin">전〮통적 이미지의 인간에 대해 말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늘날의 인간, 즉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속에서 우리 자신의 형상을 발견하거나 우리 자신의 미래의 운명과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경제적 활동의 도식이 되어버린 경제적 인간은 19세기 후반 두 개의 경향에 의해 공식화되었다. 첫 번째는 전체로서의 인간의 더욱 광범위한 경제적 틀 속으로의 흡수이고, 두 번째는 경제적이지 않은 모든 인간활동 및 추세의 평가절하이다. 그때부터 인간의 모든 다른 면들은 점차 사라지는 반면, 그의 소비-생산측면에 대한 확인이 일어났다. 인간의 이러한 변형은 승리한 부르주아의 지배하에서 완벽해지기 위한 첫 번째 움직임이었다. 지금 여기에서 이 기간 동안 돈이 차지했던 엄청난 중요성을 다시 회상하여 설명한다는 것은 거의 소용없는 일이다. 경제적, 사회적 구조 속에서 사업세계와 개인생활에서의 모든 일들이 돈이라는 매개를 통해 일어났다. 돈이 없이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유일한 인간의 주요 관심사는 돈을 버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사실상 이것은 경제에 대한 인간종속의 상징이 되었다. 원시인들에게 있어서는 사냥과 같은 것들이 경제적 굴복을 나타내는 것이었지만 이러한 굴복은 보다 주술적이고 씩씩한 행위였다. 반면에 19세기의 부르주아 지배는 합리적 지배였다. 그것은 모든 감상적인 열정을 배제하였다. 그것은 파라다이스가 아닌 권력을 추구하였고, 왔다가 사라져 갈 것에 대해 경탄을 하였으며, 새로이 발견된 경제적 요소들을 선택의 수단으로 삼았다. 하지만 그러한 도구를 사용한다는 것은 그것들에 대한 굴복을 의미하였다. 부르주아 그 자신들이 먼저 굴복하였고 다른 사람들을 굴복하도록 강요하였다. 세계는 두 개의 계급으로 나누어졌다. 하나는 경제를 창조하고 그것의 본질을 축적하는 계급이며, 나머지 하나는 경제에 굴복해서 그 부를 생산하는 계급이다. 이 두 계급 모두 경제에 의해 지배되었다. 두 갈래의 공격에서 부르주아는 경제적 가치의 총체성을 소진시켜 경제적인 힘에 인간을 굴복시키는 경제 도덕을 구축하였다. 궁극적으로 새로운 부르주아적인 도덕이 붕괴되어 경제의 우월성이 손상되지 않게 내버려두는 새로운 정신적 환경이 창조된 것이다.

 

부르주아적인 도덕은 근본적으로 노동 및 전문기술(metier)에 대한 도덕이었고 현재도 그러하다. 노동은 숭고하고 고결한 것이며 그 자체로 하나의 미덕이자 구원이다. 노동은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유일한 것이며 신과 정신적 삶을 대신한다. 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노동은 신과 동일시된다. 성공은 축복이 되며, 신은 열심히 일해 온 사람들에게 돈을 나누어줌으로써 그의 만족을 표현한다. 다른 모든 미덕보다 우선한 이것 앞에서, 다른 모든 것들은 퇴색한다. 게으름이 모든 악의 어머니라면, 노동은 모든 선의 아버지였다. 이러한 태도는 너무 진행되어 부르주아 문화는 노동을 제외한 모든 것이 무시되었다. 성인 부르주아에 있어 유일한 중요한 것은 전문기술자가 되는 것이며, 젊은이들에게 있어서는 직업의 선택과 그에 대한 준비였다. 일종의 경제적 운명이 대부분의 가정에서 이루어졌다. 인간의 운명은 돈을 버는 데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이 바로 부르주아의 관점이었고 현재도 그러하다.

 

프롤레타리아에게 있어서 그 결과는 인간에 대한 경제의 지배를 의미하는 소외였다. 우리는 프롤레타리아로부터 모든 인간적 내용 및 진정한 실체가 비어 있음과 경제력에 의해 지배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의 노예였고, 인간적인 조건에 대한 타인, 경제적 기계들로 가득차있으며 경제적 스위치에 의해 작동되는 일종의 자동인형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는 소외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그러한 상황을 더 이상 용인할 수 없다. 그러한 환경을 만듦에 있어 부르주아는 시스템에 대해 사형영장에 서명을 하였다. 소외된 인간의 정신적 상황은 혁명을 나타내며, 희망이 없는 그의 굴종은 혁명적인 신화의 창조를 요구하였다. 인간에 대한 경제의 우위성(또는 경제에 의한 인간의 지배)이 문제가 되어 왔을 수도 있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상화된 것이 아니라 현실의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를 추방하고 돈을 버는 일에 전적으로 전념해 왔다. 이러한 혁명을 달성하기 위한 프롤레타리아의 수단은 노동조합이다. 그리고 노동조합은 그들의 혁명적인 의지를 만족시키고 순수하게 경제적인 목적과 관련된 그들의 의지를 소진시키는 과정에 있어, 경제적 기능에 더욱 더 그 구성원들을 종속시킨다.

 

부르주아 그 자신은 기반을 잃고 있으나 인간에 대한 그들의 개념은 입지를 넓혀가고 있다. 부르주아에 대해 말하자면 프롤레타리아에 있어 인간은 생산과 소비를 위한 기계에 불과하다. 그들은 생산과 소비를 할 의무가 있으며, 경제가 그들에게 제공하는 것을 흡수해야만 한다. 사실 역사적으로 유래가 없는 상품의 소비 앞에서 저소비의 위기와 같이 과잉생산의 위기를 설명한다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노동에 대한 인간적 삶의 필요한 변형은 탐욕으로의 변형이다. 만일 인간이 특정한 욕구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러한 것들은 만들어져야만 한다. 중요한 관심사는 인간의 심리적, 정신적인 구조가 아니라 발명으로 인해 경제가 생산하는 모든 상품의 끊임없는 흐름인 것이다. 인간영혼의 무한한 분쇄, 그것의 진정한 문제는 선전이다. 그리고 광고로 변형되는 프로파겐다는 행복과 이미 있는 삶을 소비와 결부시킨다. 돈을 가진 자는 그가 가진 돈의 노예가 되며, 돈을 못 가진 자는 그것을 얻기 위한 미친듯한 열정의 노예가 된다. 가장 우선되는 큰 법칙은 소비인 것이다. 이러한 절대명령을 제외한 어느 것도 그러한 삶에 있어 어떠한 가치도 가지지 않는다.

 

이러한 간단한 설명으로 우리는 종속적이고 불일치한 방식을 빨리 이해할 수 있게 되며, 인간은 그 속에서 경제적 인간과 밀접하게 관련된 두 개의 변수가 되는 경향이 있다. 또한 다른 모든 중요성은 이러한 이상화된 개념에서 배제된다. 돈이 중요한 것이며 문화, 예술, 정신, 도덕들은 웃음거리가 되며 중요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 점에서 다시 한 번 부르주아와 공산주의자간의 완전한 일치점이 있다.

 

우리가 여기서 목격하는 현상은 고전적 경제학자들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 왔던 경제적 인간의 현실적 출현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경제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러나 개념은 상대적으로 단순하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더 큰 경제적 사건들의 압력으로 인해 없어서는 안될 물질적인 토대를 획득하기 위해 인간을 이러한 압연기와 연결할 필요가 있었다. 작업은 항상 쉬운 것은 아니었다. 때때로 기계가 고장도 났다. 부르주아는 정신적인 삶을 제거하는 데 전적으로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노동계급에 있어 진정한 정신적 삶은 세기의 전환기 무렵에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랭보(Rimbaud)의 문학과 반 고흐의 미술은 압연기와 비교하면 엄청나게 매력적이었다. 인간은 전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의 거세에 불만인 채로 남아 있었다. 이미 한 약속들은 지켜지지 않고, 경제적 위기로 인해 계속해서 새로운 축복들이 위험에 처하게 될수록 더욱 그러하였다.

 

이러한 발전의 두 번째 단계는 경제적 영역내에서 정신적 만족을 찾기 위한 인간의 시도였다. 맑스는 교묘한 전략을 실행하여 부르주아로부터 인계 받아 계속해서 그 일을 하였다. 인간적, 정신적인 삶의 차원에서 맑스는 단순히 형식적이 아니라 깊은 의미에서 부르주아 사상의 충실한 대변자였다. 그는 티에르(Thier)나 기조(Guizot)의 방식으로 부르주아의 공식적으로 사상을 옹호한 것이 아니라 사상적으로 물질적이고, 실제적으로는 더욱 그러한 평범한 사람들의 현재 사상을 대변하였다. 맑스는 부르주아가 상실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연구하였으며, 떠오르는 프롤레타리아의 정신적인 힘에 경제적인 요소를 더하였다. 그는 혁명을 모든 생활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세계로 통합하였다. 그는 이론적, 과학적으로 그와 동시대 사람들의 공통된 정서를 성화시켜, 그것에 변증법이라는 특권을 더하였다. 프루동(Proudhou)과 바쿠닌(Bakunin)은 경제적인 질서에 대항하여 정신적인 요소를 강조하였으나, 맑스는 그들에 대항해 단순히 역사적 우위성이 아닌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우위로서 경제의 우위성이라는 부르주아적 질서를 옹호하였다. 만일 경제적 조건이 바뀐다면 인간도 바뀔 것이다. 마침내 맑스는 끔찍한 몰수를 하는 데 성공하였다. 압제에서 해방된 정신적인 원천들은 압제자(사실상 부르주아의 압제가 아니라 경제의 압제)를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이중적인 움직임(경제력에 대한 인간의 종속)의 두 번째 갈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지 않고 경제하는 인간에 의해 대표되는 종속적인 산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모험하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된다. 우리는 이러한 개념이 얼마나 서서히 그리고 우회적으로 특정한 사고양식과 사회적 조건 및 독트린에 의해 형성되고 있는지에 대해 검토해 왔다. 발전은 은밀하고 때로는 암중모색한다. 그러나 개인은 여전히 그것을 빠져나갈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탈출구는 좁았고 점점 좁아지고 있다. 때로는 그러한 탈출구는 꿈에서나 발견되었다. 시는 이러한 목적에 유익하다. 예를 들어 로스탕(Rostand)은 경제하는 인간에게 정신적인 환상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을 만족시키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리귀(Reguy)는 그의 저서에서가 아니라 삶에 있어 전체로서의 인간(whole man)이 여전히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쳤다. 환경이 보다 엄격해짐에 비례하여 경제적 세계는 더욱 완벽함에 접근하였다. 사람이 살기 위해 노동이 아닌 다른 것으 한다는 것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서 노동을 해야 하는가? 그것은 전적으로 소비를 위해서이다. 여가가 인간에게 부여되었으나 그것은 소비자의 여가일 뿐이다. 만들고 기도하고 판단하는 인간의 본질적인 기능들이 치솟는 물질적인 상품들의 흐름 속에 사라져 버렸다. 결정적인 실행을 위한 상황들이 마침내 무르익었다. 기술은 주위를 맴도는 그 움직임을 마치고, 현재의 것을 되어져야 할 것으로 변형시켜 단순한 암중모색으로부터 부정할 수 없는 단순한 경향을 만들어내는 기술의 일관된 절차에 따라 경제적인 인간에 대한 마지막 손질을 대었다.

 

경제기술(예를 들어 계획)이 성공하기 위해 인간은 기술의 필요조건을 충족시켜야만 했다. 기술 그 자체와 같은 것은 없다. 기술의 저항할 수 없는 발전과정에 있어 기술은 인간에게 동반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경제학이 단지 하나의 독트린이었을 때의 작업가설이었던 경제적 인간은 현실이 기술적이 될 때, 경제적 인간이 현실이 되도록 강요된다. (우리가 이미 검토해 온 방식으로 준비되어 있었던) 이러한 변형은 기술의 완전한 창조물은 아니었으나 기술은 그 속에서 그것이 요구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처럼 스탈린도 인간을 자본으로 간주하였다. 기술적인 관점에서 아벤투르는 인간이 자본으로 평가되어야만한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이러한 개념 앞에서 반동하는 것은 단순한 감정적인 반응일 뿐이다. 평균적인 인력생산비용 및 인력수익능력에 대한 정확한 평가 없이는 효율적인 기술이 가능하지 않다. 인간은 자본이며 그는 완벽하게 이러한 역할에 적응해야만 한다. 인간을 이러한 역할을 하도록 교육시키기 위해 기술이 제시하는 방법은 두 가지 뚜렷한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범주는 필연적으로 경제적이며, 인간에 대한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작용으로 인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두 번째 범주는 다양한 전문적인 기술의 결합과 인간의 생활 속으로의 기술의 개입을 의미한다.

 

첫 번째 범주에서 두 개의 개념인 생산자와 소비자의 결합이 발견된다. 전통적으로 양자간에는 구분이 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계획은 그들을 결합시킨다. 그로 인해 인간은 특정한 통일체로 복귀되지만 새로운 현실은 모든 것을 수용한다. 모든 인간기능은 생산-소비복합체로 편성된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러한 통일성의 회복은 진일보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산과 소비는 상호 완벽하게 적응하고 두 개의 상관적이고 상호의존적인 기능이 자유자본주의에서와 같이 더 이상 분리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의미에서 통일체에 복귀한다는 것은 다른 의미에서는 전체로서의 인간의 속박을 의미할 수도 있다. 기술적인 균형상태에 머물기 위해 인간은 기술적 현실에 의해서가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는 살아갈 수 없으며 기술이 인간을 위해 구성한 사회적 측면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의 욕구가 밝혀질수록 그는 더욱 기술의 모체 속으로 통합된다. 인간의 욕구가 존중되기 때문에 인간은 기술화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것 같다. 하지만 기술 그 자체는 욕구는 개인적이 아니라고, 보다 정확하게 말해 개인적인 욕구는 무시된다고 인간에게 가르친다. 기술은 욕구로서 간주하는 것은 통계에 의해 드러나는 것과 같은 사회적 욕구이다. 기술은 인간의 사회적 필요조건만을 고려할 수 있고 고려할 것이다. 물론 어느 누구도 개인적인 욕구가 존재하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모든 인간적인 요소가 사회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노동에 의해 이끌려지고, 이러한 요소들이 교육, 오리엔테이션, 적합한 환경 및 공중위생을 포함할 때, 그와 동시에 개인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상품은 드물고 발견하기 어려운 반면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필요한 상품은 많고 획득하기 용이할 때, 어떠한 것도 개인적 욕구가 존재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순수한 유토피아적인 추상적 개념에 불과하다. 오히려 인간의 본성이 개인적 욕구가 존재하는 것을 막는다. 기술은 욕구의 사회화를 야기시킨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회적 욕구만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왜 기술이 점점 가치의 객관적인 기준의 근본에 작용하도록 강요되는지를 설명한다. 객관적이 되어온 가치의 측정은 인간을 훨씬 더 경제적인 상황에 통합되도록 만든다. 인간의 경제적인 가치에 기초한 엄격한 규칙이 명시될 때 계급질서는 훨씬 잘 확립될 수 있다.

 

인간에게 직접 전달되고 인간을 변형시키는 기술적 행위의 두 번째 범주는 지금 막 논의하였던 바를 강하게 입증한다. 인간이 계획을 수행함에 있어 그가 조그마한 공헌을 하도록 만들기 위해, 그 자체로서는 무시될 수 있는 정도이지만 전체에 대해서는 필수적이며 기술이 그에게 할당해 온 기능의 일부인 생산자의 자격으로 개인에게 작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수백 명의 노동자의 작업은 수학적으로 엄밀하게 어느 한 개인에 의해 이루어진 작업에 의존한다. 동일한 기술에 종속되어 있는 모든 노동자들의 공동책임이라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정당하다. 이러한 공동책임의 이름으로 그것은 개인적 헌신을 요하는 열정으로 그의 임무를 엄격하게 실행하도록 하기 위해 모든 노동자들을 구속한다. 이러한 헌신을 강요하기 위한 기술적 수단은 인간관계기술에서부터 다른 종류의 프로파겐다[예를 들어 쇼크 브리게이드(shock brigades), 스타하노비즘 및 사회주의적인 경쟁 등]까지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러한 기술적인 수단들에 대한 연구는 우리의 경제분야에 대한 연구에 있어 논의할 대상들이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경제기술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고, 그러한 것들이 없다면 경제기술이 구체화될 수 없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와 유사하게 소비자로서의 개인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 가능하다. 대략적으로 말해, 여기서 문제는 인간의 욕구를 계획의 필요조건에 따라 변형시키는 것이다. 소비자로서의 인간에게 작용하는 속박은 생산자로서의 인간에게 작용하는 것만큼 날카롭고 무자비하지는 않다. 이미 밝힌 바와 같이, 우리 시대의 모든 사람들 중에서 사회적인 욕구의 자발적인 창조는 경제기술의 적용을 합리화시킨다. 하지만 계획이 욕구와 기술적 자료 모두를 만족시켜야만 하더라도, 이 둘간의 일치가 완벽한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 다음 요구되는 것은 약간의 조정이다. 결국 여기서 사회적 욕구만이 문제가 된다. 즉 우리 개인주의자들이 당황하게 될 조그마한 이유가 있다. 개인이 의식이 아니라 사회적 조류가 수정되어야만 한다. 또한 이러한 목적에 대한 수단은 우리를 안심시켜야만 하지 않겠는가? 기술이 발전할수록 그러한 것들은 더욱 신중하게 된다. 소련의 건국 후 첫 몇 년에서와 같이 경찰의 사용, 심지어 기아와 같은 급진적인 수단의 사용은 어떠한 기술적인 결함과 요령의 부족을 보여준다.

 

필요한 조정은 가격조작 및 홍보를 통해 수행된다. 심리분석은 홍보의 영향력하에서 욕구의 순응성을 보여주었다. 자유주의 경제에 유효했던 것처럼 동일한 영향력이 사회적 욕구에 대해 여기에서도 작용한다. 유일한 차이점은 이러한 수단의 지향점과 그것들을 사용하는 사람에 있다. 과학적 활용은 체계적이고 정확하게 경제적인 인간을 창조하며, 그러한 인간은 욕구-생산 복합체가 된다. 그러나 인간은 더 이상 이것에 대해 어떠한 특별한 번민을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경제기술의 거의 환상에 가까운 결과들이 완벽한 조정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자본주의하에서는 경제기술의 발작적인 변덕과 그것의 정신적인 불만족으로 인해 고통을 받았던 사람들과, 공산주의 정권하에서의 두려움과 억압으로 인해 고통을 받았던 개인들은 어떤 체제에서건 기술이 우세하게 될 때 경제기술에 적응함으로써 그 자신이 해방되는 것을 느낄 것이다. 두 체제의 상황에서는 인간의 정신적인 욕구는 부분적으로 프로파겐다에 의해 만족되지만 기술은 그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구한다. 그것은 심지어 조직과 기계에 더 잘 봉사하기 위해 지성적이 될 것을 요구한다. 인간이 기계적 폭군의 단순한 노예였던 단계는 이미 지났다. 인간 그 자신이 하나의 기계가 될 때 그는 무의식적인 자유, 기계 그 자체의 자유를 달성하게 된다. 하지만 정신적, 도덕적 생활이 그에게 요구된다. 왜냐하면 기계도 그러한 생활의 필요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기술도 무도덕적, 무사회적인 사람에게는 가능하지 않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 책임이 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는 자기 자신을 하나의 객체로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경제적인 세계에 동화됨으로써 객체가 되어 왔고, ‘경제하는 인간이 됨으로써 잘 적응해 왔다. 다시 말해 외형적인 개인적 생활이 그에게 있어 현실적 생활이 되도록 조건지어졌다.

 

따라서 경제기술의 발달은 공식적으로는 정신을 파괴하지는 않지만 그것은 기술의 위대한 계획의 실현에 종속된다. 지금까지는 경제적인 인간이라는 가설에 대해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었다. 개인의 삶의 전부는 경제기술의 한 기능이 되어 왔다. 기술의 실현화에 있어 기술은 고전적인 경제학자들의 소심한 가설을 훨씬 능가해 왔다. 인간은 그 자신이 더욱 자유로워 질것으로 안다. 왜냐하면 기술은 모든 자연적인 요소를 배제해 왔고 이러한 방식으로 그에게 그의 운명의 주인이 될 것이라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앞에서 창조되고 있는 인간, 인공적인 지상낙원에 들어가기 위해 정확하게 만들어지고 있는 인간, 그가 그 자신을 위해 채택한 수단의 세부적이고 필요한 산물은 다름 아닌 바로 나 자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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