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3/0003812112?sid=100
왕년에 배구 선수였다는 말이 있을 만큼 박영선은 키가 컸다. ‘저격수’의 맹렬했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서울시장 낙선 후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에서 반도체를 파고들었다고 했다. ‘반도체 주권국가’(나남)라는 제목의 책도 최근 출간했다. “총선 출마용이냐” 묻자, “내 요즘 관심은 반도체”라며 웃었다. 손바닥 뒤집듯 하는 게 정치인의 말이지만, 시비 걸 일도 아니었다.
총선 출마? 하버드로 돌아간다
-정치의 계절에 책을 냈다. 출마하시나.
“전혀 아니다. 책 출간 때문에 들어왔고 이달 말 하버드로 돌아간다.”
-영문판도 낸다던데.
“반도체는 AI와 함께 전 세계의 관심사다. 내 연구 주제도 ‘반도체의 무기화와 패권 국가의 전략’이라 하버드에서도 영문판으로 내주길 원했다.”
-어쩌다 반도체에 꽂혔나.
“30년 전 MBC 경제부 기자 시절부터다. 제주서 열린 전경련 간담회에서 이건희 삼성 회장이 ‘반도체의 미래’를 얘기했다. 앞으로 반도체가 대한민국을 먹여 살릴 거라고, 나는 지금 반도체에 미쳐 있다고 하더라.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꾸라’던 이건희의 프랑크푸르트 선언(1993년)이 나오기 전이었다. 그리고 반도체는 내가 근무하던 방송국 기자재의 핵심이기도 했다. TV, 통신의 진화가 곧 반도체의 진화였다. 진공관에서 시작해 트랜지스터로, 집적회로에서 나노 경쟁으로. 반도체가 미래 산업의 핵심이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건희 회장이 세상을 떠났을 땐 추모 글을 올렸다.
“이병철 회장이 대한민국에서 반도체를 처음 시작했다면, 이건희 회장은 90년대 일본이 독점했던 메모리 반도체 생산의 중심축을 한국으로 옮기며 반도체 신화를 일군 주역이다. 그의 통찰력에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박영선은 ‘삼성 저격수’였다.
“재벌 개혁은 그와는 별개의 트랙이다. 재벌의 지배 구조를 바로잡지 않으면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을 분리하는 금산 분리법을 발의한 이유다.”
-책에는 정의선 현대자동차 회장에 관한 언급이 많더라.
“금산 분리법을 통과시킨 뒤 2010년부터 ‘일감 몰아주기 근절’을 추진했다. 어느 날 정의선 회장이 만나자고 하더니 ‘저를 개혁하시면 됩니다’ 하더라. 무엇을 어떻게 고치면 되는지 허심탄회하게 말해달라면서. 실제로 절반 이상 바꾸더라. 그는 경청하고 실행하는 기업인이었다. 다양성과 유연성으로 기존의 ‘현대 스타일’을 벗어났다. 디지털 대전환 시대에 현대차가 꽃을 피우고 있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잃어버린 30년’ 재무장하는 일본
-’무기화된 반도체’가 책의 키워드다.
“미국이 반도체에 올인하기 시작한 건 베트남전의 패인을 분석하면서다. 100발 중 90발이 오발탄이 되는 상황에서 미국은 더 이상 재래식 무기로는 전쟁을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명중률을 높이기 위해 센서와 통신 장치를 결합한 유도 무기를 만들기 시작했고, 그 핵심이 반도체였다. 그렇게 20년을 투자해 개발한 전략 무기로 대승을 거둔 게 걸프전이다.”
-반도체가 우주 전쟁도 좌우할 거라고 했다.
“명중률의 핵심은 연산력이다. 얼마나 정확하게 계산을 하느냐가 반도체에 달려 있다. 우주 영토 확장도 마찬가지다. 달에 가는 속도와 거리를 얼마큼 정확하게 계산하느냐. AI 광풍을 주도하는 것도 챗GPT에 필수인 HBM 같은 초고속 반도체다. 스마트폰부터 우주까지 칩(반도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대다. 21세기 패권의 중심에 반도체가 있다.”
-일본의 반도체 재무장은 얼마나 위협적인가.
“기시다 총리는 과학기술 장관, 외교 장관을 거치며 아베 시절부터 반도체 플랜을 만들어온 사람이다. 그래서 어마어마한 돈을 전방위적으로 쏟아붓고 있다. 네덜란드의 ASML은 홋카이도에 거점을 마련하고, 대만의 TSMC는 구마모토에 반도체 공장을 짓고 있으며, 미국 마이크론은 히로시마에 HBM 공장을 건설한다. 소재·부품·장비 강국인 일본이 반도체 제조 역량까지 확보해 자체 조달을 시작하면 한국엔 굉장한 위협이 될 것이다.”
-대만의 새 총통 라이칭더도 정치 초년병 때부터 반도체 산업의 핵심에 있었다더라.
“자신의 지역구인 타이난을 TSMC 핵심 생산 기지로 자리 잡게 한 주역이다. 대만 국민의 반도체 사랑도 엄청나다. 대만에선 기근이 들면 반도체용수가 우선이냐 벼농사를 위한 농업용수가 우선이냐가 정치권 최대 이슈로 떠오르는데 그때마다 반도체에 쌀을 희생한다. TSMC가 대만의 안보와 직결된 보험이기 때문이다.”
-바이든의 투자 금지령으로 중국의 반도체 굴기는 주춤한 양상인데.
“타격을 받은 건 맞지만 시진핑의 의지는 너무도 강력하다. 2025년까지 자국에서 소비하는 반도체의 생산 비율을 70%까지 끌어올린다는 목표로 천문학적인 투자를 하고 있다. 메모리 반도체 기술은 한국을 거의 따라잡았고, 전쟁·안보와 직결되는 양자 컴퓨팅에서도 미국이 긴장할 만큼 무서운 기세로 성장하고 있다.”
-한국은 위기의식이 크지 않다고 했다.
“지난해 하버드에선 무기화된 반도체를 주제로 한 포럼과 심포지엄이 봇물 터지듯 열렸다. 백악관은 물론 일본 경제산업성, TSMC에서도 왔는데 한국만 없더라. 주최 측에 물어보니 한국 정부와 기업은 너무 수직적이고 경직된 문화라 의사 결정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미국의 주요 정책을 결정하는 핵심 라인에 한국이 없다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한국이 미 동맹국들이 중심이 된 반도체 국제 분업에서 중요 역할을 하는데도 영향력이 없다는 건가.
“일본은 소재·부품·장비 산업에서 세계 최고다. 한국은 매뉴팩추어링, 즉 제조를 잘하는데 이건 대체가 가능하다고 미국은 보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하버드에서 발표된 미국 반도체의 새 공급망 안에 한국과 대만이 보이지 않았다. 한국이 하던 일을 일본으로, 대만이 하던 일을 싱가포르로 분담시키려는 의도로도 읽힌다.”
-한국과 대만의 지정학적 리스크 때문일까.
“일본이 미국을 그런 식으로 집요하게 설득하고 있다. 일본 경산성 실장이 홋카이도 반도체 단지를 설명하면서 딱 이렇게 말하더라. ‘반도체 제조의 3대 요소는 물·전기·사람인데 홋카이도는 물이 풍부하고, 풍력을 활용한 재생에너지로 생산 단가를 낮출 수 있으며, 잘 훈련된 노동력이 있다. 게다가 미국에서 가장 가깝다.’”
반도체 지원, 재벌 특혜 아니다
-한국의 생존 전략은 팹리스(설계)부터 파운드리(위탁 생산), 패키징(조립)을 아우르는 생태계를 만드는 것인가?
“2000년대 이후 삼성은 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를 유지하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이것이 삼성의 최대 약점이기도 하다. 메모리 반도체에 편중돼 있는 포트폴리오 탓이다. 패키징, 칩렛 등 부가가치가 높은 영역으로 빠르게 확장해 가야 한다. 삼성과 SK하이닉스가 HBM과 칩렛을 활용한 패키징 분야에서 좀 더 큰 플레이어가 돼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세계 최대 규모의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 계획을 발표했다.
“관건은 물·전기·사람이 있느냐는 것이다. 특히 전기가 문제다. 용인 클러스터가 2050년이 되면 10GW의 전력을 쓰게 되는데 이는 수도권 전체 수요의 4분의 1이다. 정부는 LNG 화력발전소 6기와 강원·경북의 석탄화력발전소, 원자력발전소에서 생산한 전력을 공급한다지만 난관이 많다. 속도전인 반도체 전쟁에서 송전 선로를 제때 구축할 수 있느냐, 그리고 RE100(재생에너지 100%)이다. 반도체 최대 수요 기업 중 하나인 애플은 2030년까지 RE100 달성 목표를 세우고 협력 업체들에 동참을 요구하고 있다. 삼성과 SK하이닉스도 RE100에 가입한 만큼 재생에너지 전력 공급원을 늘려가야 한다. 이에 대한 정부의 대안이 있는지 의문이다.”
-반도체 클러스터 지원이 재벌 특혜라는 비판도 있다.
“그렇지 않다. 21세기 패권을 좌우할 반도체는 국가와 민간 기업이 완전히 한 몸으로 움직여야 한다. 정부·기업·학계로 구성된 국가반도체위원회를 컨트롤타워로 세우고 공동 대응해야만 이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힐러리도 궁금해한 20대 젠더 갈등
-정치할 때보다 편안해 보인다. ‘저격수’란 별명을 좋아하나.
“너무 싫다. 성격이 아버지 닮아 직선적이긴 한데 흙 만지고 화초 가꾸는 걸 좋아하는 부드러운 사람이다(웃음).”
-정치 인생에서 가장 뿌듯했던 순간은?
“2019년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를 주무 장관으로 이겨냈을 때다. 대한민국 최대 수출 산업인 반도체 생산 라인이 멈출 뻔한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 우리는 일본이 규제한 불화수소, 불화폴리이미드에 특허를 가진 국내 중소기업이 두 군데나 있다는 걸 알아냈고 적극 지원했다. 일본의 규제는 한국의 소·부·장 국산화를 촉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가장 아팠던 시기라면.
“BBK 의혹 제기로 정권의 보복성 사찰을 받은 남편이 아이와 함께 일본으로 떠났을 때, 그리고 서울시장 선거에서 낙선했을 때다.”
-서울시장 선거에선 박영선답지 않게 무기력했다.
“출마를 세 번 고사했는데…. 준비 기간도 너무 짧았다.”
-여성 정치의 한계를 느끼나.
“네트워킹, 연대에 취약하다. 각자도생이라 세(勢)를 만들기 힘들다.”
-여성을 앞세우면 비난받는 시대이기도 하다.
“지난해 세계 여성 지도자 포럼에 갔더니 힐러리가 너희 나라에선 왜 그렇게 20대 남녀가 싸우냐고 묻더라. 정치권은 왜 대책을 세우지 않느냐고.”
-제3지대 신당의 출연은 긍정적으로 보고 있던데.
“양당이 너무 극단화돼 있고 점점 나빠지고 있기 때문이다. 제3당이 출연해 양당에 자극을 주고 정치를 정상화해주면 좋겠다.”
-기자 시절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은 ‘한국 정치의 진보와 보수 갈등을 어떻게 보느냐’는 당신의 질문에 ‘그건 제3의 예술’이라고 답했더라.
“진보·보수의 장점을 가지고 융합하라는 뜻으로 나는 받아들였다. 제3당이 그렇게 가면 성공할 수 있다고 본다. 좌우 이념 싸움에 국민들은 신물을 내고 있다.”
-신당에 합류할 가능성은?
“전혀. 나는 요즘 반도체에 미쳐 있다(웃음).”
☞박영선
1960년 경남 창녕 출생. 경희대 지리학과 졸업 후 MBC에 입사, 첫 여성 메인 앵커와 LA특파원, 경제부장을 지냈다. 2004년 정계에 입문해 서울 구로에서 4선 국회의원을 했으며 법사위원장, 원내대표를 거쳐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을 지냈다. 미국 CSIS 선임고문에 이어 현재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선임연구원, 서강대 초빙교수로 있다.
김윤덕 기자 si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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