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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 나르시시스트가 많은 이유와 변증

김민섭 99(14.32) 2024.05.17 10:59:40
조회 338 추천 7 댓글 4

기독교에 나르시시스트가 많은 이유와 변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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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숲


Dec 22. 2023


나르시시스트를 경험하고 기독교 이단에 빠진 사람들이 이단에서 탈퇴 후 왜 성경에 대한 재교육을 받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가스라이팅으로 인한 왜곡으로 한동안 성경을 보지 못했는데 특히 성경에서 나를 축복하고 살리는 말씀을 보면 그 사람이 떠올랐다. 


나를 그리 괴롭히고는 그 인간은 다 용서받는다는 건가. 


그 사람이 나를 학대하고 나서 자주 하던 말이 있었다. 


"넌 개혁주의자라서 이혼할 수 없어"라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서약한 것을 왜 지키지 않느냐고 반문하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도 사람의 선택이 있는 거라고 말했다. 


나의 집에서 사자대면이 있던 진실의 그날. 


그는 자신의 카톡 프로필을 시편 23편으로 바꾸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라고. 


-생략-


너무 지나치게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으로 묘사하여 나도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아주 틀린 말은 아닌 듯하다. 


정말 기독교의 이미지가 왜 이렇게 된 것일까. 


내가 돌싱이 되고 나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은 참으로 슬프게도 다 기독교인이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내 얘길 듣고 "이혼은 흠도 아니야. 나와 술 먹자 밥 사줄게"라고 말했다.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이 있을 거라며 내가 당한 폭력을 정당화하고 자신의 행복한 삶과 비교하고 어떤 일을 당했는지를 궁금해했다. 


내가 어디가 모자란 사람인 것처럼. 


타인에 대한 배려심과 어쩌면 나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기독교는 기독교라 말할 수 있을까.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너무 싫어 한동안 교회에 안 나갔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꼴도 보기 싫었다. 


나는 이런 상태의 두신 하나님을 원망했지만 그를 떠날 수는 없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다. 


당시의 나는 하나님이 나를 버렸다고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다. 


그는 나의 상황 인지와 상관없이 나를 귀히 여기신다. 


모든 크리스천이 이기적인 것이 아니다. 


내가 회복하는 것에 큰 힘을 준 것도 크리스천들이다. 


악하고 아픈 부류의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는 것이다. 


성경을 이용하여 가스라이팅하는 교회 안의 나르시시스트들과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말이 무엇이었는지 변증 하고자 한다. 


나는 남은 학자금대출과 생활비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늘 이중직 사역을 했다. 


마케팅 회사를 다니면서 사역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이미 교회 안 가스라이팅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취약한 상태였다. 


내가 사역하고 있었던 교회의 담임목사는 자신의 말은 하늘에서 직접 오는 말이라고 했다. 


처음 사역을 시작할 때는 주일 사역만 하면 된다고 했었는데 그 강도와 범위가 점점 넓어졌다. 


새벽예배 설교, 교회유치원 선생님 등 해야 하는 일들이 점점 많아졌다. 


과로하게 되어 한 달에 두 번을 쓰러졌고, 독감 1번, 코로나 2번을 걸리게 되었다. 


나는 결국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을 원했으나 그 담임목사는 나에게 못된 것만 배웠다며 비난했다. 


나는 내가 사역자로서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혼탁한 상황 속에서 그를 소개받은 것이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님과 같은 태도를 가지십시오. 


그분은 원래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고 계셨지만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려고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의 모든 특권을 버리시고 종의 모습으로 사람들과 같이 되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며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5-8)



성경은 그리스도가 인간을 위해 죽기까지 복종하셨기에 우리도 이웃에게 그렇게 대하라고 가르친다.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하게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자기 이익만 생각하지 말고 남의 이익도 생각하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나는 그를 불쌍히 여겼고, 그가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허용했다. 


나의 탓을 많이 했다. 


나는 왜 이렇게 사랑이 부족할까 여기며 나 자신을 보호하지 못했다. 


교회 안에 나처럼 여린 마음으로 상처받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나의 존재 역시 하나님에게 너무나 존귀하다는 것을 잊지 마셨으면 한다. 


그의 직업은 청소년/청년 사역자이면서 장애인복지관 사회복지사였다. 


그가 장애인복지관 사회복지사인 것이 그때에는 겸손하고 좋아 보였다. 


사회에 소외된 자들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사회복지사라는 직업은 클라이언트의 정서와 밀접한 직군이기에 지적으로 발달이 안된 장애인복지관에서만 일했던 이유가 있었구나 싶다. 


종교지도자와 사회복지사는 외형상 선한 이미지를 갖는다. 


교회는 사역자에게 큰 영향력을 부여한다. 


단지 사역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이를 불문하고 존경을 받고 인기를 얻는다.


사역자는 교회에서 연예인 대우를 받는다. 


기도해 달라. 


사인해 달라. 


사진 찍어달라 하는 성도분들이 계신다. 


그들의 사모하는 마음은 너무나 감사하지만, 사역자도 똑같은 사람일 뿐이다. 


사역자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일 뿐, 그들에게 자신의 믿음을 맡겨서는 안 된다. 


그들이 전하는 대로 다 살고 있을까? 


물론 그런 진정성 있게 사역하는 분들도 분명히 계신다. 


그러나 혹시 이 글을 크리스천이 보신다면, 사역자에게 너무 큰 영향력을 부여하지 말 것을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너무 무례히 대하지 말아 주세요. 


그들도 누군가에겐 귀한 자식입니다.


칼은 요리사에게 쥐어지면 사람을 살리는 맛있는 요리가 되지만 강도의 손에 쥐어지면 사람을 죽이는 무기가 된다. 


성경은 누구의 손에 쥐어지느냐에 따라 여러 해석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한 책이다. 


기독교에 유독 이단이 많은 이유는 해석의 가능성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무한하신 하나님을 유한한 인간이 다 알 수없다. 


어떤 사람도 성경을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제대로 안다면 잘못된 교리에 빠져들거나 미혹될 수 없다. 


성경과 교회가 욕을 먹는 것은 성경 말씀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성경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도구로 사용하는 가룟유다와 같은 악의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즘은 교만에서 온다. 


교만은 파멸의 선봉이며,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다(잠언 16:18). 


나르시시스트는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고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며 자기 뜻대로 하기 위하여 상대방을 여러 방법으로 조종하려 한다. 


나르시시스트에게 인간관계란 빼먹을 것이 있는 사람에게 기생하는 관계일 뿐이다. 


그들은 자신을 이용하고, 도구화하지 못하는 사람을 우습게 생각한다. 


종교와 동호회는 사람이 모이는 곳이다. 


내 생각에 종교는 동호회와 큰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종교에서는 사람들이 모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서로 속사정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는 '기도제목'을 나누는 시간이 있다. 


인간관계가 서로 깊어지면 자기의 삶과 고민에 대해서 털어놓기 마련이다. 


그러나 만난 시간에 비해 쉽게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기도제목을 서로 나누는 건 정말 바람직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나르시시스트들은 이를 통해 상대방이 느끼는 결핍을 인식하고 다가온다. 


그들에게는 이미 축적된 데이터들이 있기 때문에 결핍 냄새를 맡고는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를 고민한다. 


'너는 부족해, 너에게는 내가 필요해.'라는 인식을 심어주며 상대의 삶에 영향력을 행하게 되는 것이다.


위키백과에 나와있는 DSM-5군의 인격장애 파트에서 자기애성 인격장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자기애성 인격장애(Narcissistic Personality Disorder, NPD)는 자신이 중요하다고 믿으며, 자신의 재능이나 능력을 과대평가한다. 


그래서 사람들의 평가절하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남들의 평가에 굉장히 집착한다. 


심한 경우에는 자기를 향한 공격성을 보이기도 하며 대체적으로 헌신적이지 못한다. 


지나치게 과장된 자존감, 칭찬에 대한 욕구, 그리고 감정이입의 결여와 같은 광범위한 양상이 초기 성인기에 시작되어 다양한 상황에서 다음 중 5개 이상의 항목으로 나타난다.


자신의 중요성에 대해 지나치게 과장된 자존감이 있음 


(예 : 자신의 성취나 재능을 과장함, 뒷받침될만한 성취가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뛰어남을 인정받고자 함)


끝없는 성공, 권력, 탁월성, 아름다움, 이상적인 사랑에 대한 공상에 빠진다.


자신이 특별하고 독특해서 다른 특별하거나 상류층인 사람 또는 기관만이 자신을 이해할 수 있거나, 그런 사람들과만 어울려야 한다고 믿는다.


과도한 찬사를 요구한다.


특권의식 즉 특별대우를 받을 것에 대한 불합리한 기대감이나, 그럴만한 이유가 없는데도 특별대우나 복종을 바라는 불합리한 기대감을 가진다.


대인관계가 착취적이다. 


즉,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이용한다.


공감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즉 타인의 감정이나 욕구를 인정하거나 자신의 감정 또는 욕구와 같은 선상에서 보려 하지 않는다.


종종 타인들을 시기하거나, 타인들이 자신을 시기하고 있다고 믿는다.


거만하고 방자한 행동이나 태도를 보인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아의 늪에 빠져 안타까운 인생을 살며 주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든다. 


나르시시스트가 기독교 안으로 들어왔을 경우, 어떤 특성을 보이는지 내가 겪은 경험과 함께 설명하고자 한다.


1) 과장된 자존감


(특권의식)


내가 그에게 어떻게 사역자가 된 것이냐고 물었을 때 했던 말이 있다. 


그가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는데 동창은 무속인이었다. 


그 친구는 나르시시스트가 신앙을 갖기 전에 알던 친구였다고 한다. 


그가 자신이 사역을 하고 있다고 말하니 그 무속인 친구는 "너에게서 유대인이 보인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을 굉장히 특별한 사람처럼 이야기했다. 


무속인 친구가 알아볼 만큼 자신은 목사가 되어야 할 사람이라고 했다. 


하나님이 자신을 정말 사랑하기 때문에 선택했고, 사역의 길을 가야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때는 그 말이 하나도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특별한 존재이다. 


자신이 특별해서 선택받은 것이 아니라, 그냥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하나님은 돌들로도 자신의 일을 하시는 분이다. 


내가 특별한 만큼 다른 사람도 특별하고 소중한 법이다. 


그리고 그 무속인도 하나님의 때에 신자가 될지 누가 알겠는가?


2) 자기 합리화


그는 떠오르는 대로 말을 함부로 했다. 


매 맞는 것보다 언어폭력이 더 아프다고, 영혼이 사라지는 것 같다고 울부짖으면 그는 말했다. 


사람에겐 바뀌지 않는 것이 있다고. 


그걸 좀 인정하라고. 


내가 바라는 것이 너무 많다고.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의 텅 빈 자아를 인정하는 것을 극도로 거부한다. 


상대방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 같으면 멀어지고, 멀어지는 것 같으면 다가온다. 


나랑 다투고 친누나의 집으로 갔을 때 가장 먼저 나와의 페이스북을 끊었다. 


그러나 이혼조정 기간 중에는 신혼여행 가서 찍은 내 사진을 올려두고 모든 사람과 모든 일에 감사하다고 상태메시지를 바꿨다. 


그리고 여전히 그의 페이스북 게시물에는 결혼 축하한다는 댓글, 장인어른이 자신의 생일날 양고기 30만 원어치를 사줬다는 댓글 등이 남아 있다.


3) 말씀 구절로 타인을 조종한다


나르시시스트가 나를 학대하고 나서 했던 말이 있다. 


"너는 개혁주의 자니까 이혼할 수 없어"라고. 


그는 잘 훈련된 개를 원하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성경을 이용해 나를 가스라이팅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어쩌고 저쩌고. 


너는 왜 나한테 순종하지 않냐! 


나는 니 머리라고! 라면서. 


화인 맞은 양심이다.



"아내들은 주님께 순종하듯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것처럼 남편은 아내의 머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자기 몸인 교회의 구주가 되십니다.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듯 아내들도 모든 일에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5: 22-24)



세상엔 멋진 남편, 아빠가 있다. 


자신의 가족을 자기처럼 보호하고 사랑하는 멋있는 남자들이 있다. 


그리고 조금은 부족하더라도 아내를 사랑하기 위해 애쓰는 남자들이 있다. 


가정에는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가 있다. 


그것이 남편의 머리 됨이다. 나는 기꺼이 남편의 머리 됨에 순종할 마음과 의지가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일주일에 한 번씩 나에게 이혼하자고 말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도 반문을 했다. 


예수님은 나에게 목숨을 바치신 만큼 사랑하셨는데 왜 너는 그렇게 사랑하지 않느냐고.



남편들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교회를 물로 씻고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시고 얼룩이나 주름이나 그 밖의 결점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로 자기 앞에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이와 같이 남편들도 아내를 제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기 몸을 미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양육하고 보살피듯이 모두 자기 몸을 양육하고 보살핍니다.


(에베소서 5:25-29)



아내 된 여러분은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남편이라도 말없이 실천하는 여러분의 행동을 보고 하나님을 믿게 될 것입니다.(...) 


남편 된 여러분은 아내를 잘 이해하며 함께 살아가십시오. 


아내는 더 연약한 그릇이며 은혜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함께 누릴 반려자로 알고 소중하게 여기십시오. 


이것은 여러분의 기도 생활에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베드로전서 3:1,7)



그는 나의 신앙을 이용해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했다. 


그는 "선악과는 여자가 남자에게 준 것"이라고 말하면서 나를 괴롭혔다. 


나는 "하나님은 남자에게 먼저 말씀하셨고, 여자를 연약한 그릇으로 돌보라"라고 하셨다고 말했다. 


내가 성경에 나와있는 지식을 말할수록 그는 내가 가진 신학을 비웃었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그가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폭력을 휘두르면서 밖에서는 말씀을 전하고 다니는 사람이라는 게 너무나 위선자 같았다. 


모두가 어느정도의 페르소나를 갖고 살지만, 이렇게 앞뒤가 다른 사역자라니. 


나는 나의 소중한 사람들 앞에서의 서약을 잘 지키고 싶었다. 


내가 받은 많은 축복들을 보답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는 나를 생각하는 인간으로 대하지 않고 목줄 단 개처럼 대했다. 


그가 나에게 '너는 왜 남편에게 순종하지 않느냐'라고 말하면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고.


4) 자신은 우월한 존재이기 때문에 존경과 칭찬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사역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그는 교회에서 자신이 받은 칭찬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담임 목사님이 어쩌고 저쨌고, 권사님이 어쨌고 저쨌고. 


내가 그의 설교문을 몇 번 보았을 때, 그렇게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자신의 설교문을 고쳐 달라고 했던 적도 있었다. 


그가 할 말이 없게 성경적으로 반문하면 그는 내게 말했다. 


'너는 신학을 하면 안 됐던 사람이야'라고. 


그는 자아의 늪에 빠져서 나와 가족들을 불행하게 했다.  


5) 타인의 생각이나 감정은 내 것만큼 중요하지 않다.


내가 그와 별거하게 된 이유가 있었다. 


그에게 상담을 권하는 나에게 '바가지를 긁지 말라'라고 소리쳤다. 


나는 그가 진심으로 걱정되었고, 이 결혼이 진심으로 깨지지 않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집에 내가 우울증이 심해져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하고는 친누나가 살려고 비워둔 집으로 갔다. 


그러고 나서 그의 카톡은 시편 23편의 말씀으로 바뀌었고, 상태메시지는 '00아, 내가 기쁘다'로 바뀌었다.  



시편 23편은 다윗의 시로 다음과 같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라.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며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나를 의로운 길로 인도하시는구나.


내가 죽음의 음산할 계곡을 걸어가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지키시니 내가 안심하리라. 


주께서 내 원수들이 보는 가운데 나를 위해 잔치를 베푸시고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셨으니 내 잔이 넘치는구나. 


주의 선하심과 한결같은 사랑이 평생에 나를 따를 것이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히 살리라.



나는 그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라고 말했다. 


그는 나에게 '맞는 사람에게도 이유가 있는 거야'라고 말했다.


6) 공감능력이 없다.


나르시시스트는 정말 공감능력이 없다. 


인간과 대화를 하는데 대화가 안 되는 그 답답하고 참담한 심정을 아는가? 


벽대고 혼자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차라리 벽이라면 혼자서 편하기라도 하지, 비난의 소리를 듣지는 않지,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이런 잘못된 결혼을 택하게 된 부정적 영향을 준 이전 사역지에서 사역을 그만둔다고 말했을 때, 나르시시스트 담임목사는 나에게 "못된 것만 배웠다"라고 말을 했다. 


본인 때문에 병에 걸려 쓰러져 사역을 더는 하지 못하게 된 것인데 못된 것만 배웠다니... 


담임목사가 원하는 대로 나를 이용만 했다는 것에 너무 충격을 받았고 울며 주차장으로 내려왔는데 그가 말했다. 


"그게 힘든 건가? 


목사님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어." 


나는 정말 이때 그럴 수도 있는 걸까? 


생각했다. 


스튜핏!!!!!  




나르시시스트는 성경 구절을 이용하여 자신의 악행을 합리화했다. 


내가 너무 괴로워 앞뒤가 맞는 말을 하라고 하면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때?'라고 말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은 죄인이고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하러 이 땅에 오셨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그렇다면 함부로 내 맘대로 살고 예수님의 용서를 받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은 왜 필요할까?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유죄 판결이 없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님의 능력이 죄와 죽음의 굴레에서 여러분을 해방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타락한 성품 때문에 율법이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자기 아들을 죄 많은 인간의 모양으로 보내시고 우리의 죗값을 그에게 담당시키신 것입니다. 


그것은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님을 따라 사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은 육신의 일을 생각하지만 성령님을 따라 사는 사람은 성령님의 일을 생각합니다. 


육적인 생각은 죽음을 뜻하고 영적인 생각은 생명과 평안을 뜻합니다. 


(로마서 8:1-6)



누가복음 6장에서는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는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책잡는 장면이 나온다. 


바리새인들은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로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온전히 지켜야 한다는 열심히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열심은 위선이고 외식이었다.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고 계시는데 거기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 주는가를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이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그 불구자에게 `일어나 앞으로 나오너라.' 하시자 그가 앞으로 나왔다. 


그때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하나 물어보자.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과 악한 일을 하는 것, 사람을 살리는 것과 죽이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옳으냐?' 하고 물으셨다. 


그리고서 예수님은 그들을 둘러보시고 손이 오그라든 그 사람에게 `네 손을 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가 손을 펴자 오그라든 그의 손이 완전히 회복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화가 잔뜩 나서 예수님을 없애 버릴 방법을 의논하였다. 


(누가복음 6:6-11)



신호등을 지키는 것은 조금 귀찮지만, 나와 타인의 생명을 지켜준다. 


율법이란 하나님이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 누구도 온전히 율법을 지킬 수 없기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성자 예수님이 인간이 되셨다. 


예수님께서 내가 받아야 할 죄의 값을 대신 십자가에서 치르시고 우리를 구원하셨다. 


이 사실을 '믿기만 하면' 우리는 구원을 얻는다. 


그리고 이 구원은 창세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확정하신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관심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는 완벽한 척을 하고 있던 것이다. 


이는 손 마른 자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입지를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맞는 말을 하니 화가 났다. 


맞는 말을 들었으면 자신을 돌아봤어야 하는 것인데 자아에 눈이 멀어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이 둔하여졌다. 


그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가를 지켜보고 있었다. 


성경은 이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분노한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열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목 박아 죽인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신실함'의 정도는 어디까지인가. 


나는 정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으니 나도 누군가를 위하여 그렇게 살고 싶었다. 


하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가르쳐주셨다. 


나는 말씀대로 살고자 했다. 


나를 학대하고 괴롭히는 사람을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다 죽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이것이 맞는 걸까?



주님 형제가 내게 죄를 지었을 때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일곱 번만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마태복음 18:21-22)



나는 관계에 갈등이 생겨나면 모든 것을 내 탓하는 버릇이 있었다. 


'내가 더 성숙했다면, 내가 더 이해했다면, 내가 더 지식이 많았다면.' 내 생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많은 일들을 겪었고, 내 나름대로의 생존방식이 '내 탓'이 되었다. 


그러나 인간관계라는 것은 쌍방이고 서로가 노력해야 한다. 


한쪽의 일방적인 희생은 바른 관계가 될 수 없다. 


모성애가 많고 "아니요"를 잘못한다면 자신을 위한 경계선을 세워야 한다. 


예수님도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를 지셨는데 나도 그래야지 생각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내 탓하는 버릇은 나를 보호하지 못했다. 


타인이 나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해도 그대로 두게 하는 결과가 됐다. 


알아주지 않아 섭섭하고 상대방은 나의 선을 모르니 계속해서 침범하는 것이다. 


결국 나의 "NO"는 나도 살리고 타인도 살리는 것이 된다. 


그러니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희망인가.



그러나 자유를 주는 완전한 그리스도의 법을 마음속에 새기고 그것을 지키는 사람은 듣고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가 하는 일에 복을 받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믿는다고 하면서도 함부로 말을 내뱉으면 자기를 속이는 것이며 그의 믿음도 가치가 없습니다. 


(야고보서 1:25-26)



여러분이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으려고 한다면 여러분은 이미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끊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님을 통해 믿음으로 의롭게 되기를 바라는 희망을 가지고 삽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고 안 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만이 중요합니다. 


(갈라디아서 5:4-6)



성경은 이 두 상반되는 말씀을 모두 인정하고 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진짜 믿음은 행함을 통해 나타난다. vs


율법을 실천하여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진 사람이다.



너희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아라. 


그것들이 발로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마태복음 7:6)



거룩한 것은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는 돼지에게 던지지 말아야 한다. 진주는 진주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에게 주어야 한다. 


나르시시스트가 계속 나쁜 행동을 하도록 그대로 두는 것은 그가 그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해서 악행을 저지르게 하는 결과가 된다. 


내가 가진 선함은 나의 가치를 알아주고 고맙게 여기는 사람에게 주어야 한다. 


나의 선을 상대에게 알려줘야 그가 나를 만만하게 대하지 않고 소중하게 여길 것이다.



보아라,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마치 양들을 이리들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해져라. 


(마태복음 10:16)



내가 상대방에게 선을 그으면 나타나는 반응은 두 가지이다.


나를 떠나거나, 나에게 선을 지키고 소중히 대하거나. 


이때 나를 떠나는 사람을 거를 수 있는 것은 잘된 일이다.



여러분은 진리에 순종하여 자신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였고 진심으로 형제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순결한 마음으로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베드로전서 1:22)



사랑 없는 복종. 


하나님은 나를 이용하기 위해 부른 것이 아니다.


그는 스스로 영광 받으시는 분이다. 내가 없어도 이미 영광 받고 계시는 분.


그러나 나를 부르신 것은 그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사람이 나를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그 사람이 떠나면 더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 됩니다.


누군가 나를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나 자신을 가꿔가세요. 


당신은 정말 소중해요!


모든 사람을 친절하게 대하세요. 


그러나 나의 친절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나를 만만하게 대한다면, 선을 그어주고 알려주세요. 


내 선은 여기까지다.라고요. 


그 선을 넘으려 하면 꺼지라 하세요! 


너는 개혁주의자이기 때문에 나랑 이혼 못해?


아닌데? 


내가 믿는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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