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처리』
왕도 리 에스티제.
왕국의 수도인 이 오랜 대도시를, 두 남자가 활보하고 있었다.
[제로]
흥……
잠 덜 깬 표정이나 짓고들 있군.
밤길을 걷는 덩치 큰 사내. 그의 이름은 제로.
그러나 밤중이라고는 하지만 번화가에 가까운 가도를 걷고 있음에도
그를 눈여겨보는 사람은 없다.
그는 뒷세계에 서식하는 자. 눈에 띄지 않게 행동하는 방식은 늘 무의식하에 새겨져 있다.
[말름비스트]
평화에 찌들었단 거려나?
왕국도 딱히 옛날부터 평화로웠던 건 아닐텐데.
매년 같이 제국과 카체 평야에서 회전을 했잖아?
뭐, 그 덕분에 우리도 이래저래 많이 뜯어낼 수 있었지만.
[제로]
……우리들, 인가.
[말름비스트]
기분 상했나?
뭐 확실히 이전까지였다면,
우리 ‘경비부문’에 떨어지는 꿀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제로]
입 놀리는 건 그쯤 해둬라, 말름비스트.
실없는 소리 작작해.
아직, 은 말이지.
[말름비스트]
오케이, 보스.
자 그럼. 늘 그랬듯 나는 밖에서 대기하면 되나?
[제로]
필요없어. 너도 안으로 들어가라.
어차피 앉을 자리는 부족하지 않을테니까.
.
.
.
[???]
어머, 제로잖아.
당신도 왔구낭. 다행이야.
틀림없이 나 혼자밖에 안 오는 건가 하고 망연자실하던 참이었어.
그 얼굴을 볼 수 있어서 기쁘다구.
[제로]
이쪽도 기쁘다, 코코돌.
가장 먼저 괴멸한 노예매매 부문의 수장이
성실하게 이 회합에 얼굴을 내밀고 있을 줄이야.
[코코돌]
뭐 그렇지.
무단결석을 책망당해서, 너희들한테 목이 휙 날라가서야 못 참는다구?
근데 나보다 더 겁 많은 애들이 있나보넹.
그것도 여섯 명…… 의장을 포함하면 일곱 명이나 말이지.
[제로]
흥, 어쩔까. 한명씩 잡아서 찌그러뜨릴까?
의장은 없지만 이건 우리가 정한 규칙이다. 불평은 없겠지.
[코코돌]
그만두자구. 자기 목을 조를 뿐이야, 제로.
뭐, 당신의 굵은 목을 조를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거 같진 않지만.
[제로]
과대평가 하지 마.
나도 그 '균열'이란 놈 때문에
목에 겨우 풀칠이나 하고 살게 된 동지 신세니.
[코코돌]
어머, 경비 부문도 그래?
도박이나 마약이라면 몰라도, 오히려 수요가 올라서
혼자 승리자 만끽하고 있지 않을까 했는데.
[제로]
바보같은 소리 하지 마.
만약 그렇다면 지금쯤은 밀수쪽 녀석들도 거기 앉아있었겠지.
[코코돌]
그것도 그렇네.
애초에 어디나 구성원이 송두리째 없어졌는걸.
움직일 말이 없으면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엉.
[제로]
흥. 그런 건 별 상관없어.
결국은 그것들 때문이야. 허둥지둥 대고 있기는.
[코코돌]
……아아, 그것들 말이지.
뭐, 노예매매 부문은 그렇지 않아도 버림받기 시작했지만 말이징?
[제로]
자업자득이다.
[코코돌]
어머 엄하기도 하셔랑.
──어스름한 방 안에 두 남자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하지만 곧 방은 다시 정적에 지배되었다.
이들에게 농담을 건네며 담소나 나눌 여유는 없다.
여덟 손가락이라는 조직이 있다.
그 이름은 왕국은 물론 인근 국가에까지 알려졌다.
그들은 왕국의 뒷사회를 좌지우지하는 거대 범죄조직이었다.
이 정례회의는 본래 여덟 손가락 각 부문의 장이
반드시 참석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무단결석은 절대 허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의 참상은 어떠한가.
8명의 부문장과 의제 진행을 담당하는 의장.
이들 중 의장을 포함해 7명이 정각이 지나도록 전혀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
제로도 코코돌도.
제로의 종자로 대기하고 있는 남자── 말름비스트조차도
여덟 손가락의 현 상태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여덟 손가락의 역사가 종언을 맞이할 때는 가깝다, 라고.
[코코돌의 부하]
저, 저기……?
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코코돌 씨.
[코코돌]
응? 뭐야?
호위인 당신한테 발언권은 없는데?
[제로]
뭐 들어줘라고, 코코돌.
어차피 달리 아무도 없잖아.
내부사정을 얘기해도 우리밖에 들을 사람도 없어.
[코코돌의 부하]
그, 그런 게 아니고요!
……그, 아까부터 두 분이 말하고 계시는……
‘그것들’이란 게 대체 뭔가 해서요.
[코코돌]
……아, 그거구나.
미안해 제로. 호위에게는 쓸데없는 것을 가르쳐봤자
의미 없다고 생각했거든.
[제로]
훗, 신경쓰지 마라.
너희들은 우리 부문과는 달리
간부가 곧 우수한 호위가 되는 게 아니니까.
코코돌. 대신 내가 설명해주마. 그렇다면 이의는 없겠지?
[코코돌]
그래? 그럼 부탁할게.
아직 원래 모임시간이 끝날 때까지 좀 걸릴 거 같고.
쓸데없이 빨리 끝나도 곤란하니 말이지.
[제로]
어이, 너.
우리 여덟 손가락의 단골 손님이 누구인지는 당연히 알고 있겠지?
[코코돌의 부하]
네, 네에……
왕국의 높으신 분들…… 귀족 놈들, 맞죠?
[제로]
이야기가 빠르네. ‘그것들’라는 건 그 녀석들을 말하는 거다.
어때, 이걸로 이야기가 이해되냐?
[코코돌의 부하]
네, 네에…… 그렇, 군요…….
[제로]
호오. 그 낯짝은 모르겠다는 낯짝이군.
괜찮겠지. 좀 더 자세히 알려주마.
지금, 왕국의 매우 중요한 과제는…… 뭐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제일 큰 이슈는 오염된 짐승이나 혼돈짐승에 대한 대책이다.
저게 실제 해의 근원이니까.
[코코돌의 부하]
예. 굉장히 세다고 들었습니다.
위의 것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난이도가 50을 넘는다던가.
[제로]
그리고 다음으로 큰 것이, 뭐 부흥 사업이지.
집, 밭, 길…… 그런 것의 유지나 개수, 재건. 그리고 의식주를 잃은 난민의 보호.
하지만 이것들은 어디까지나 뜻밖의 사태다. 당연히 즉응대응할 여력을 왕국은 모아두지 않았지.
……그렇다면 뭐가 필요하게 되겠지?
[제로]
그래, 돈이다. 뭐라 해도 왕국은 돈이 없어.
제도와 비교해도 이렇게나 초라한 거리가 수도인 나라잖아.
그런 건 뻔하겠지?
[코코돌의 부하]
하, 하지만…… 귀족들은 그 정도의 돈이라면 갖고 있지 않습니까?
특히 우리와 거래가 있는 놈들이라면…….
[제로]
그래. 그래서 왕국의 영리한 패거리들은 이렇게 생각했지.
좋은 재원(財源)이 있잖아, 라고.
[코코돌의 부하]
……! 즈, 즉……?
[코코돌]
그래. 누가 부추긴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징.
예를 들어…… 조금이라도 뒤가 구려보이는 귀족이 있다고 해보자. 확증은 없긴 하지만.
그런 녀석을 추궁하는 거야.
“당신은 이 세계의 위기에 임박했는데도 숨기고 있는 게 있는 것인가?”……라고.
지금까지는 국왕이라도 섣불리 귀족들을 의심의 화살을 돌릴 수는 없었어.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명분을 낳아버렸단 거야.
[제로]
뒷처리가 허술한 귀족들은 차례차례로 재산의 몰수를 선고받고 있지.
역시 6대 귀족급 되면 팔팔하지만.
[말름비스트]
즉 머리가 나쁜 귀족은 애초에 돈이 없어서 우리쪽에서 거절.
조금은 제대로 된 귀족들은 줄지어 우리와의 교제를 재검토하겠다 지껄이고 있다는 것.
알겠나?
[코코돌의 부하]
자, 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코코돌]
그 ‘조금은 제대로 된 귀족들’이라는 것들도
지금은 빠짐없이 나라에 헌금 같은 걸 하고 있다는 것 같아.
귀족의 의무다, 라면서 말이지.
아-아, 정말 싫어.
거래를 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지만, 후원자까지 걸려서야 속수무책이지.
모처럼 순회사님을 턱짓으로 부렸는데 그 뚱보도 벌써 걸려버렸어.
비뚤어진 욕심의 판로를 잃어서 본인은 서운한 듯 했지만.
[제로]
정말이지 말이다. 나도 백작으로부터 끝장을 선고받았으니.
돈은 줄 수 없다, 이게 위자료 대신 이라며
대량의 쓸데없는 특산품을 건네받았어.
어쩔 수 없으니까 팔아치워 보려 했더니 양만 많은 싸구려들이더군.
[코코돌]
좋은 타이밍이라며 재고처분에 사용당했단 말이구나.
후후, 안심했엉. 손해본 건 우리만이 아니었단 거네.
[제로]
은퇴, 도망, 야반도주……
이것이 여덟 손가락의 말로인가. 하찮군.
[코코돌]
글쎄. 개중에는 갱생해서 바깥 세계로 나간다, 며
시치미 떼는 녀석도 있는 것 같은데?
[제로]
……힐마 슈그네우스인가.
[코코돌]
들어봤구나.
정말 변신이 빠른 여자란 말이지.
[제로]
……너는 어떻게 할 거냐? 코코돌.
대부분의 구성원이 해고되었다고 들었는데?
[코코돌]
응, 폐업했어.
적어도 여덟 손가락 부문으로서는 말이지.
어쩌면 구두쇠 창관 하나쯤은 계속할지도 모르지만……
뭐, 이젠 당신과 만날 일은 없겠지.
[제로]
그런가.
……나에 대해서는 물어보지 않는 거냐?
[코코돌]
응. 서로 깊게 파고들진 말기. 그게 우리 규칙이잖아?
그럼 난 이만 슬슬 가봐야겠어.
잘 있어. 제로.
[제로]
훗…… 의리 있는 놈이다.
뭐? 목이 날라갈까봐 무서웠다고?
[말름비스트]
코코돌 씨, 아쉬워하는 거 같던데 말이지?
[제로]
좋게도 나쁘게도 안정적이었던 때를 되돌아보면
싫어도 아쉬움쯤은 있겠지.
확실히 우리는 여덟 손가락이라는 묶음으로 있으면서, 서로 견제하고 있었다.
결코 아늑한 조직은 아니었지만──
[말름비스트]
그럼 보스. 당신도 아쉬운 마음이 있으신가?
[제로]
……우문이군.
돌아간다, 말름비스트.
[말름비스트]
헷, 그렇게 말해줄 줄 알았다고.
보스는 그 녀석들과는 다르구먼!
──────────────────
2화 『권유』
여덟 손가락이 명실상부 해산한 밤으로부터 며칠인가 지난 어느 날.
제로는 드물게도, 사람이 많은 술집에 들어와 있었다.
[말름비스트]
과연 보스. 눈에 띄나 본데.
[서큘런트]
몸을 숨기는 데 능하다는 것은
그 반대도 쉽다는 거잖아?
[제로]
하찮은 소리 하지마라.
우리는 그저, 일반시민처럼 행동하고 있으면 된다.
[말름비스트]
그랬지 참.
우리는 일반 시민. 시민이 술집에서 먹고 마시는 게 뭐 이상할 게 있나.
[서큘런트]
서민들에게 그렇게 생각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니까.
우리의 풍모는 시민이라기보단 모험자라는 느낌이지만.
[말름비스트]
그나저나 여기 밥은 맛없네.
옛날에 먹던 게 상태가 더 좋았을 정도야.
[서큘런트]
어쩔 수 없잖아. 벌이가 막힌 건 둘째쳐도
왕도에 들어오는 물자도 줄어들고 있는 것 같으니까. 가격이 오르고 있어.
그러니까……인 거지? 보스.
[말름비스트]
이봐 이봐, 여기서 그런 이야기는 아웃이잖아.
우리들은 어디까지나 선량한 일반──
[???]
아아, 겨우 찾았네.
그 덩치가 어디갔나 했더니 이런 데서 뻔뻔히도 있었구나. 제로.
[말름비스트]
……아앙?
[???]
그래도 다행이네. 이미 왕도를 떠났을 가능성도 있었으니까.
너라면 주먹 하나로 먹고 살 것 같고.
[서큘런트]
너는…….
[???]
동석한 두 사람도 본 적 있는 얼굴이네.
아, 자리는 안 비워도 돼. 그래서 이 자리에서 말을 건 거니까.
잠시 이야기 좀 들어주지 않을래?
옛 동료의 정으로 말이야, 제로.
[제로]
……힐마 슈그네우스.
……우리들의 룰에 준거하면, 너는 배신자라는 게 된다.
살해당하고 싶어서 온 건가?
[힐마]
바보 같은 소리 하지마. 그럴 마음도 없는 주제에.
애초에── 하. 그거는 이미 끝장난 거야.
규칙이고 뭐고 없어.
[제로]
무슨 일이시지. 마약제조 부문장 나으리.
코코돌와 함께 끝까지 조직을 붙들고 있으려나 했는데
갑자기 종적을 감춘 여자가 새삼스럽게.
[힐마]
뭐야, 그건 딱히 친구모임 같은 게 아니잖아.
그런 말을 들을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
[제로]
옛 동료라고 말한 것은, 네 쪽이었다만……?
[힐마]
아아, 예이예이. 그랬네.
여기, 앉도록 할게.
[서큘런트]
아.
아, 어이!
[힐마]
금방 끝날 이야기야.
게다가 무슨 용무냐고 물은 건 너희 보스 쪽인데?
[제로]
표면 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고는 들었지만
이렇게도 당당하게 모습을 보일 줄이야.
[힐마]
당신도 동류인 거지?
그래서 이렇게 백주당당 술집에서 한가롭게 지내는 거고.
[제로]
……말해 봐.
[힐마]
이야기가 빨라서 괜찮네.
그럼…… 어디서부터 이야기하면 되려나.
내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제로]
몰라. 어디에다 자기를 팔았다곤 들었는데 말이지.
[힐마]
표현 좀 조심했으면 좋겠는데,
조금은 알고 있다는 거지. 과연과연.
지금 나는 ‘에 란텔’이라는 도시를 거점으로 하고 있어. 에 란텔은 알고 있지?
[서큘런트]
토브 대삼림의 남쪽에 있는 도시였지,
제국이나 법국과 경계에 접하는 도시.
[힐마]
맞아, 그 에 란텔.
그 지리특성도 있고 해서 난민들이 밀어닥치고 있는 거야.
[말름비스트]
토브 대삼림은 숲의 현왕을 비롯한 몬스터의 소굴이니까.
오염된 짐승이나 혼돈짐승도 잔뜩 나오겠지.
[힐마]
그래. 주변 부락에서 오는 피난민이 끊이질 않아.
[제로]
제국이나 법국에서도 말인가?
[힐마]
뭐…… 없는 건 아니라는 느낌이랄까.
맞아, 하프엘프 같은 아인도 있었던가.
[말름비스트]
그래서, 그게 네 현 상황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지?
[힐마]
흥, 너 겉모습과 달리 성격이 급하구나.
지금부터 그걸 말할 참이잖니?
에 란텔은 왕도와 달리 도시 내부에도 손상이 있거나 해서 말이지.
나 같은 인재에게 수요가 있었던 거야.
[제로]
……마약의 지식인가.
[힐마]
표현 좀 조심해달랬지.
……뭐, 약은 맞지만.
지금 나는 에 란텔 약사조합에 적을 두고 있는 거야.
주로 전면에는 못 나서는…… 연구쪽이지만 말야.
[서큘런트]
조합……? 하핫.
설마 거기까지 신분을 만들었을 줄이야.
아니, 감탄했다고. 그치 보스.
[제로]
입 다물고 있어라.
……그 지방도시의 조합원이 나한테 무슨 일이지?
신참 조합원이면 발언권도 없을 터. 너도 신원이나 경력은 설명해뒀겠지.
그런 믿을 수 없는 여자가, 지금은 건달에 지나지 않는 나에게 접촉한다.
……아무래도 뒤가 구린 이야기인 것 같은데.
[힐마]
뭐, 반은 맞았으려나.
확실히 제 경력은 별로 좋은 쪽으로 작용하지 않고 있어.
하지만 이건 네가 걱정할 만한 얘기가 아니야.
그다지 공식적으로는 할 수 없긴 해도, 이것은 조합원으로서 하는 일이야.
[제로]
……조합이 영락한 건달인 나에게 대체 무슨 볼일이 있단 거지.
[힐마]
어려울 거 없는 이야기잖아? 제로.
너 정도의 힘이 있으면, 이 녀석들── 동료의 힘이 없어도 먹고 살 수 있어.
즉, 너의 수요는 가치가 떨어지지 않았어.
귀족들에게 버림받고 가치가 반토막이 난 다른 동료들과 비교해도 말이지.
[제로]
……확실하게 말해.
[힐마]
너를 꼬시러 온 거야.
그것도 에 란텔의 도시 간부로부터의 은밀한 지명으로 말이지.
그 정도로 그 마을은…… 사태가 절박한 거야.
[제로]
도시 간부로부터의 지명이라고……?
[힐마]
그래 맞아.
지금 에 란텔에서는 예외적으로 각종 조합이
적극적으로 도시 측과 협조하고 있어서 말이지.
신참인 나라도 이전보다 훨씬 편하게 그 녀석들과 접점을 가질 수 있다는 거야.
[말름비스트]
조합은 어디까지나 중립을 유지한다는 것이
그 녀석들의 입장 아니었나?
[힐마]
그렇게 말하고 있을 수도 없다는 거야.
뭐야? 너희도 평화에 찌들은 걸까?
[말름비스트]
뭣이……
[제로]
……용건을 말해라.
언제까지 지루한 얘기를 계속할 거냐.
[힐마]
에휴. 나로선 순서대로 설명할 생각인데 말이지.
이야기는 간단해. 너의 부문은 경비부문.
그것도 제일의 무투파지. 간부 다섯 명도 모험자로 비유하면 다들 아다만타이트급.
[말름비스트]
조건부로, 라는 녀석도 있지만 말이지.
[서큘런트]
그런 너도──
[서큘런트]
읍.
미안하다, 보스. 잡담은 그만하기로 하지.
[힐마]
계속해도 될까?
아까도 말했지만, 에 란텔은 특히 오염된 짐승이나 혼돈짐승의 출몰이 많아.
원래부터 고블린이니 오우거니 몬스터가 서식하던 곳이라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제로]
……즉 그 땅에서 병사── 아니.
모험자가 되라는 건가?
[서큘런트]
하지만 에 란텔은 왕가의 영지였을 텐데?
임시 징병도 있었지. 귀족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지금이라면 병력은 모여있지 않은가?
[힐마]
오염된 짐승이나 혼돈짐승을 국가의 병사 정도로 막을 수 있을 거 같아?
가제프 스트로노프의 전사단이라면 모를까,
제대로 상대할 수 있는 것은 모험자와── 아니, 모험자뿐이야.
그래서 어쨌든 전력이 필요한 거야. 막료는 나름대로 유능한 것들이 갖춰져 있지만 말이지.
……어디서나 알아냈는지 내 신상을 바로 알아 맞췄어.
[제로]
그래서 비밀리에 거래를 제의하러 왔단 말인가.
[힐마]
반은 오답.
비밀리에, 같은 쩨쩨한 이야기가 아니야.
이는 에 란텔 도시장 등 최고 간부와도 엮어있는 건이야.
[말름비스트]
도시장이라고……!?
국왕의 직할령을 다스린다면 왕국의 귀족이라는 뜻.
그런 놈이 전직 여덟 손가락을──
[제로]
말름비스트!!
[힐마]
……그래.
에 란텔의 도시 간부는 나나 너의 과거 경력에는 눈감아준다고 해.
……아니 없던 일로 해줄 수조차 있어.
물론 당신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경우이기는 하지만,
국군의 중추에 등용될 기회도 있겠지.
적어도 당신과 그 동료에게는 아다만타이트급 모험자와
동등 이상의 대우를, 에 란텔은 약속하고 있어.
[서큘런트]
갑자기 아다만타이트라고……!?
승격시험도 없이?
[힐마]
모험자 조합에 소속하게 될지 어떨지는 못 들었지만 말이지.
하지만 아다만타이트급의 대우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
게다가 저 ‘청장미’에도 말을 걸고 있다는 모양인데,
조합 내에서는 상당한 발언권이 주어질 거라고 해.
[힐마]
여기서 마시고 있다는 것은 당신도 표면 세계에 뿌리내릴 생각인 거지?
그렇다면 이 이상의 이야기는 없을 거야.
게다가 당신이라면,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어서 제멋대로 그만두어도
트집 잡을 수 있는 놈들은 그야말로 ‘청장미’ 정도뿐이지.
밑져야 본전. 어때, 이 얘기. 받아보지 않을래?
[서큘런트]
확실히 구미 당기는 이야기야…… 이보다 나을 게 없겠지.
[말름비스트]
보, 보스……?
[제로]
………….
…………흥.
거절한다.
[힐마]
……후우~
금방 끝난다고 했는데 그만 길게 말해버렸네.
그런데, 뭐가 불만인 거야?
[제로]
나는 누구 아래로 들어가는 짓은 못한다.
기르는 개가 된다니 논외로군.
[힐마]
그건 인식의 문제잖아?
당신은 당신대로 이용해주겠다는 마음으로 있으면 되는 거야.
이해가 일치하는 동안은 말이지.
[제로]
그렇다 하더라도 싫단 거다.
애당초 너를 턱으로 부리는 패거리에 들어갈 정도라면
바보 같은 귀족들이 나아.
[힐마]
………….
[제로]
할 얘기는 그것뿐인가?
밥이 식는다. 빨리 돌아가라.
[힐마]
……그렇게 하도록 할게.
하아, 헛걸음이었나. 어렴풋이 예상은 했었지만.
하긴 왕도도 나름 괜찮은 사냥터지. 네 실력이라면 여기서도 충분히 해낼 수 있을테지.
……하지만 당신에게는 실망했어. 그 ‘투귀’ 제로가 이렇게까지 보수적인 남자였다니.
[제로]
………….
[힐마]
뭐, 말해도 소용없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럼 나는 에 란텔로 돌아갈게. 이제 너랑 만날 일도 없겠지.
[말름비스트]
갔나…….
[서큘런트]
보스. 저건 그런대로 흥미있는 이야기였던것 같은데……
즉단해도 괜찮았던 건가?
[제로]
……후후후후.
저 여자, 코코돌와 같은 말을 내뱉었어.
아무래도 인연이라는 것은 끊어도 좀처럼 끊어지지 않는 것 같군.
.
.
.
[말름비스트]
돌아왔어. 보스와 서큘런트도 마찬가지야.
[서큘런트]
오랜만에 모두 모인 것 같네.
여덟 손가락 최강의 존재…… 여섯 팔의 6인이.
[제로]
에드스트룀.
[에드스트룀]
예이.
[제로]
말름비스트.
[말름비스트]
오우.
[제로]
페슐리안.
[페슐리안]
…….
[제로]
서큘런트.
[서큘런트]
아아.
[제로]
그리고 데이버노크.
[제로]
너희들 전원이 이곳에 집결했다.
그 의미는 알고 있겠지?
[말름비스트]
당연하지 보스.
저 여자에게는 조금 말이 막혔지만, 뭐 당초 계획에 영향은 없겠지.
[에드스트룀]
아까 스쳐 지나갔어.
마약 거래의 힐마 슈그네우스인가?
……뭐, 끝난 이야기인 것 같으니까 묻지 않을게.
[페슐리안]
……이미 왕도의 녀석들에게 얼굴은 팔고 있다.
여덟 손가락 시절의 패거리에게도, 그 이외의 녀석들에게도.
[서큘런트]
다른 부문의 정보도 가능한 한 밝혀내뒀어.
앞으로 다시 귀족들과 연줄이 닿으면 보다 상세한 정보도 얻을 수 있을지도 몰라.
[데이퍼노크]
상황이 바뀐 지금이야말로
우리 일에 활기를 불어넣을 절호의 기회라는 것이다.
[제로]
……여덟 손가락은 괴멸했다.
놈들은 어차피 이 정도의 이변으로 살아남지 못한 약자에 불과한 거지.
하지만 우리들은 다르다.
공백지대가 된 이 왕국의 뒷사회에서, 우리가 다음 시대를 만드는 것이다.
[제로]
여덟 손가락의 신은 실추했다.
이제부터는 여섯 팔의 신이 이 세계를 누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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