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에른의 유서깊은 궁전 중 하나인, (뮌헨) 님펜부르크 궁전Schloss Nymphenburg
하인리히 헬드Heinrich Held (오른쪽) -[바이에른 주지사, 1924~33]-, 바이에른 왕정복고와 민족주의 경향을 가진 바이에른 인민당의 지도자
https://en.wikipedia.org/wiki/Bavarian_nationalism
바이에른 민족주의는 바이에른이 -독일과는 다른-민족임을 주장하고 바이에른의 문화적 통합을 촉진시키는 관점이다.
이는 1871년, 바이에른을 독일 제국에 가맹한 이래로 만연하던 현상이었다.
바이에른 민족주의자들은 1871년 이래로 독일 정부가 오랫동안 바이에른의 자치권을 침해해왔다고 주장했으며, 바이에른의 독립을 요구해왔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한 후, 바이에른 민족주의는 더 영향력이 증대되어 혁명적인 정치 운동과 반동적인 정치 운동 모든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붕괴한 후, 바이에른에 오스트리아가 가입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이 시기에 바이에른 정부는 북티롤과 오스트리아 상부의 지역을 바이에른에 통합하는 데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인한 심각한 문제였으며, 상당수의 북티롤 오스트리아인들이 북티롤을 바이에른에 합류시킬 의사를 있다는 것을 표명했다.
바이에른당 로고
바이에른 민족주의가 강력한 정치운동으로 부상한 기원은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1866)과 그 여파였다.
바이에른은 프로테스탄트 프로이센인보다 정치·문화적으로 오스트리아 카톨릭에 가까웠고 바이에른인은 프로이센인들에 대한 공통된 경멸을 오스트리아와 공유하여 전쟁 발발 당시 바이에른를 오스트리아의 편에서(공동 교전국) 참전하게끔 만들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바이에른과 그 외의 동맹국들과 함께 프로이센과 그 동맹국들에게 패배하였다.
그 여파로 바이에른은 프로이센에게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1871년 프로이센 왕국이 세운 독일 제국에 합류했다.
1871년 독일과의 통일 이후 바이에른의 민족주의자들은 프로이센에 의한 독일 지배에 완강히 반대하였고 독일 제국으로의 더 이상의 통합을 거부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패배와 동시에 바이에른 왕정이 무너지고 바이에른이 독립 공산주의 국가(바이에른 평의회 공화국Münchner Räterepublik)로 선포되는 등 혁명이 바이에른을 비롯한 독일 전역에 퍼졌다.
공화국의 붕괴 이후, 반프로이센주의와 반유대주의적 경향과 연관된 바이에른 민족주의는 급진적인 운동과 반동적인 운동들 사이 모두에게서 인기가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붕괴 이후, 오스트리아의 바이에른 가입 제안이 이루어졌다.
바이에른 정부는 북티롤과 오스트리아의 상층부를 바이에른에 통합하는 데 특히 관심을 가졌다.
그러한 제안들은 바이에른에 합류하기를 희망하는 상당수의 사람들-북티롤인-에 의해 흥미롭게 받아들여졌다.
바이에른 정부의 조치는 독일 정부로 하여금 오스트리아 합병Anschluss을 추진하게끔 했다.
1923년, 구스타프 리터 폰 카르(Gustav Ritter von Kahr)주지사와 바이에른 인민당(Bavarian People 's Party)장관은 바이에른 정부를 장악한 뒤 바이에른의 독립을-독일과 무관한- 선언하고 바이에른의 군주정을 복원하려고 시도했다.
이 바이에른의 분리주의적 쿠데타 시도는 당시 (작은) 나치당의 행동-뮌헨 폭동- 때문에 좌절되었다.
이때부터 바이에른 민족주의자들과 나치당은 지지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경쟁했다.
1932년 선거에서도 나치당이 승리를 거두었을 때, 나치당은 바이에른 남부의 (카톨릭) 바이에른 인민당을 능가하지 못했고 북부 개신교 지역에 영향력을 확보했다.
나치당이 독일을 접수한 이후, 정권은 바이에른의 분리주의적인 여러 음모의 존재를 주장했고, -바이에른 정부를 전복하는 것을 포함한- 바이에른 정부의 반대를 억압하기 위해 이러한 주장을 사용했다.
처음에, 많은 바이에른인들은 이것이 반공 운동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2차 세계 대전에서)독일의 전쟁 수행을 지지했다.
그러나, 종전이 가까워질수록 전쟁에 대한 바이에른인의 지지는 급속히 감소하였다.
바이에른 민족주의는 전쟁 후반기에 다시 대두되었고,바이에른 민족주의자들은 독립국 바이에른의 수립을 위해 연합군의 지지를 얻기 위한 방안을 모색했다.
결국, 독일 연방 내에서 바이에른에 대한 자치권이 받아들여졌다.
1950년대, 분리주의적인 바이에른당Bayernpartei은 주 및 연방 선거에서 5~20% 이상으로 투표하면서 바이에른 주의 정치에서 주요 역할을 담당했다.
바이에른당은 1954년부터 1957년까지, 주지사 빌헬름 회그너Wilhelm Hoegner 치하에서 사회민주당, 자유민주당과 함께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그러나 당의 선거 지지율은 이후 수십 년 동안 현저하게 하락했다.
2013년 주 선거에서 바이에른당이 전체 투표에서 2.1%의 득표율을 기록했던 것이다.
이와는 별개로, 유고브(YouGov)가 실시한 2017년 여론조사에서 바이에른 전체의 3분의 1이 넘는 32%가 독립론을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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