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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팬픽)미연시에서 돌아와도 할 일이 많은 건에 대하여 -10-

ㅇㅇㅍ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3.09 21:27:46
조회 1567 추천 22 댓글 4
														

15세기 중엽 오스만을 물리치고 잿더미 속에서 다시 한 번 일어난 제국은, 왈라키아라는 단 한 번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도나우 강 북쪽을 위협하지 않았다. 야노슈 1세를 시작으로 하는 헝가리 왕국의 후냐디 왕조 역시 그런 제국의 의사를 파악하고 암묵적인 동맹관계를 유지했기에, 도나우 강은 역사상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었던 600여 년에 가까운 평화를 누려왔다.


그런 도나우 강 남쪽에 위치한 옛 세르비아 왕국의 수도, 스메데레보는 그야말로 오랜 평화로 번영한 도시였다. 종주국인 제국과 함께하며 무슬림의 위협도,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합스부르크의 위협도 없었던 덕분이었다. 도시들의 여왕이라 불리는 콘스탄티노플과 비교하기는 뭣해도, 고색창연하면서도 활기찬 번영이 느껴지는 도시였다.


더군다나 이 날은 아직도 명예직으로 세습되고 있는 세르비아 왕실의 아가씨가 결혼하는 날이었다. 원래라면 아무리 왕실이라지만 방계, 그것도 왕의 오촌조카딸 정도라면 결혼식도 그저 세르비아 지역에서 자그마한 화제가 되고 그쳤겠지만, 이번엔 달랐다. 세르비아 왕실에서 주관하고, 심지어 황제까지 참석하는 결혼식이 자그마한 행사라고 할 수 있는 제국인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그와 칸타쿠제노스 네가족이 처한 상황이 이 결혼식에 온 제국인들의 시선이 쏠려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바글바글하군요. 요안니나, 손을 놓지 말아주세요."


바로 옆에 있는 사람과도 떨어질 것 같은 혼잡 속에서 그가 요안니나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언뜻 보기에도 명가의 일원임을 짐작할 수 있는 사람들부터, 언론의 취재진, 단순한 구경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종과 문화의 사람들이 몰려 북새통을 이루고 있는 스메데레보 역은 빠져나가기부터가 쉽지 않았다. 마중나온 차에 탄 후에도, 인파는 그대로 교통체증으로 모습을 바꾸어 나타났다. 결국 결혼식이 열리는 성당에 도착했을 때는 모두가 기진맥진한 상태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 요안니나는 들러리 복장으로 갈아입어야 한다고 황급히 대기실로 떠났으며, 인파에 지친 마리아는 디미트리오스의 부축을 받으며 성당 밖으로 나섰다. 그러고나니 아직까지 결혼식 준비와 손님 맞이로 분주한 성당 안에 남은 것은 그와 안드레아스뿐이었다. 그리고 둘 사이에서는 침묵이 흘렀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한 쪽이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다른 한 쪽이 무덤덤하게 무시당하는 걸 받아들였을 때와 달리, 사이가 이전보다는 좋아진 양쪽 모두 상대를 의식하며 어떻게든 침묵을 깨야한다는 묘한 강박에 시달리고 있었기에 오히려 예전보다도 더 어색한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결국 연장자로서의 연륜을 과시할 겸, 한때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높은 장인을 두었던 경험에서 나온 동병상련을 느낀 겸,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안드레아스였다.


"자네, 그-"


"아, 칸타쿠제노스 제독님! 안녕하십니까!"


한때 현직 황제 앞에서 따님을 주십사하고 외칠 때 만큼이나 용기를 낸 안드레아스의 결단은, 무수히 쏟아지는 인사의 파도 앞에서 산산조각 났다. 모처럼 낸 용기가 쓸모 없어진 사실에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안드레아스는 제국 내에서도 둘째가면 서러울 명가의 주인으로서 애써 웃으며 그 인사를 하나하나 받아주었다.


안드레아스가 자신을 알아보고 인사해오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인사하는 동안, 그는 옆에서 꿔다놓은 보릿자루 마냥 서있었다. 다만 안드레아스에게 인사하는 사람 가운데 몇인가는 분명히 시선을 그에게 보내고 있었다. 제국에 처음 왔을 때와 일전의 사건을 제외하면 기자나 파파라치가 그에게 붙은 적은 없었다. 어쩌면 서울에서 만났던 자신을 스프란체스라고 한 이민국 요원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동분서주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가십지에서 황제의 조카인 요안니나에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안드레아스와 인사를 나누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알고있다해도 이상할 것 없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도 노골적인 이들의 시선에, 그는 속으로 자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그것을 눈치채기라도 한듯, 간신히 인사의 물결에서 벗어난 안드레아스가 그에게 다가와 퉁명스럽게 말했다.


"지쳐보이네만."


뭔가 굉장히 많이 생략된 말이었지만, 그래도 일단은 안부를 묻는다는 점에서 걱정은 걱정이었다. 평소의 안드레아스답지 않은 배려에 그는 놀랐으나, 이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이런 인파에는 익숙합니다."


친왕으로서, 황제로서 자신만을 바라보는 인파는 질리도록 겪어본 그에게 이 정도 인파는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안드레아스는 그의 대답을 그다지 믿지 않았는지, 다 안다는 듯 한숨을 쉬며 말을 이어나갔다.


"명가 사이에 있다는건 피곤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 내가 평생을 군인으로 살아와서 그럴지도 모르겠네만..."


"아, 왠지 알 것 같군요."


11살 때 펠레폰네소스 원정을 시작으로, 41세에 보스포러스를 건너기까지. 드라가시스로서의 삶은 어찌 보면 황제라기보다는 군인에 가까운 것이었다. 끊임없이 황권을 탐내는 황후, 능글맞은 상인들, 꿍꿍이가 있는 동맹들과 상대해야하는 궁정과 적과 맞서는 전장 가운데 어느 쪽이 더 편했는지 그는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진심으로 고뇌하는 듯한 그를 보며 안드레아스는 피식하고 웃었다. 그 직후, 갑작스레 누군가가 안드레아스를 불렀다.


"칸타쿠제노스 제독 아니십니까. 여기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껄껄!"


등 뒤에서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에 안드레아스는 표정을 눈에 띄게 구긴 다음 자신의 예상을 확인하고선 더더욱 표정을 구기며 내뱉듯이 화답했다.


"...트레비존드 공, 오랜만이구려."


안드레아스가 내뱉은 호칭은 제국에서 명예직으로 세습되는 옛 군주의 자리였다. 트레비존드의 메가스 콤네노스가 콘스탄티노플에 왔을 때를 떠올리며, 그는 그들의 대화를 지켜봤다.


"공께서는 요즘도 흑해를 돌아다니시느라 바쁠거라 생각했소만."


"하하, 따지고 보면 모든 명가는 우리 콤네노스에서 비롯된 것 아니겠습니까? 명가에 이런 경사가 있는데 바쁘다고 빠져서야 되겠습니까."


"이런 서쪽 끝까지 메가스 콤네노스의 관심이 닿다니 의외로군요."


"당연한 일이지요. 저는 군인이 아니라 정치인이지 않습니까?"


겉으로는 웃으며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던 두 사람이 여전히 찌푸린 얼굴과 서글서글한 웃는 얼굴을 유지하는 가운데, 대화주제는 어느새 결혼식에 다다라 있었다.


"아, 그러고보니 오늘 신랑신부 얘기는 들으셨습니까?"


점점 많아지는 하객들을 보며 마치 방금 생각났다는 듯이 말하는 다비드-메가스 콤네노스의 이름이었다-는 갑작스레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그 모습에 안드레아스는 다시 한 번 짜증을 참으며 퉁명스레 대답했다.


"세르비아 왕 라자르의 오촌조카가 신부였지 않소. 신랑은 처음 보는 가문 출신이었지만."


요안니나가 소피야의 청첩장을 건너줬을 때, 안드레아스는 신랑의 성을 보고서는 처음 보는 성이니 명가는 아니겠거니하고 대충 넘어갔다. 시대가 어느 때인데 이제와서 귀천상혼이니 뭐니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런 안드레아스의 생각과는 정반대에 서있는 사람이 바로 앞에 있었다.


"듣자하니 신부 집에 고용됐던 시종이라고 하더이다. 신부 아버지가 신부와 그 시종이 교제했을 때부터 펄펄 뛰었는데도 신부가 떼를 써서 결혼하는 것이라고 하던데..."


다비드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는 아테네에서 만났을 때 남자친구를 자랑하던 소피야의 모습을 떠올렸다. 600여 년 전의 소피야가 자신의 사랑한 시종을 아버지가 죽였다는 비극을 겪은 것에 비하면, 아버지를 설득하는데 조금 힘들었다는 정도로 넘어간 현대의 소피야는 충분히 행복했으리라. 행복하게 지내고 있냐는 자신의 질문에 일말의 주저 없이 미소지으며 그렇다고 대답한 소피야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가 미소 짓는 동안, 안드레아스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다비드에게 대답했다.


"그런거야 흔한 일 아니오? 콘스탄티노플에서 자기 딸을 이긴 명가의 가주가 나온지도 꽤 오래된 걸로 아오만. 혹시 트레비존드에는 그런 소식이 알려지지 않은거요?"


안드레아스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래서 뭐 어쩌라고와 너희 동네는 깡촌이다를 돌려 말하자, 다비드의 미소에 조금 금이 갔다. 하지만 노회한 정치인은 금세 웃음을 되찾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 소식은 당연히 트레비존드에도 알려져있지요. 아무래도 트레비존드에서는 그다지 없는 일이니 사람들도 신기하게 여기지 않겠소?"


메가스 콤네노스의 피를 잇는다는 자부심에 가득 찬 다비드는 그렇게 말하더니 씨익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내 걱정되는건 이러다 명가에서 외국인과도 피를 섞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해서라오. 칸타쿠제노스 역시 명가 중의 명가잖소?"


안드레아스 옆에 선 그를 흘낏 바라보고서 말을 마친 다비드를 보며, 그는 그제서야 이 오랜 가문의 주인이 처음부터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어처구니 없기도 했다. 600여 년 전 자신들의 피의 가치를 내세우며 혼인동맹을 요구하던 메가스 콤네노스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모습에 그는 절로 눈쌀을 찌푸릴 뻔했으나, 이 자리에서 앞장 서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안드레아스였다. 때문에 그는 다비드의 말을 흘려듣기로 하고선 무덤덤한 얼굴을 했다.


정확히는, 안드레아스가 다비드의 멱살을 잡기 전까지는 그랬다.


"칸타쿠제노스 제독, 뭐, 뭐하는거요?"


"다비드, 우리가 참 오래된 사이 아닌가?"


잔뜩 찌푸리고 있던 방금 전까지와는 달리 안드레아스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고 말투도 상냥하기 짝이 없었지만, 정작 보이는 행동은 정반대였다. 그 차이에 안드레아스를 제외한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놀랐지만 안드레아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오랜 시간 동안에도 불구하고 자네가 여전히 칸타쿠제노스가 어떤 가문인지 모르는 모양이니 내 오늘 가르쳐줌세."


"지, 지금 무슨 말을 하는거요! 이런 무례한..."


당황한 나머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다비드가 그제서야 항의했지만 안드레아스는 무시했다.


"회생제와 함께하신 우리 디미트리오스 칸타쿠제노스 마그누스께서 말씀하시길, 배를 타고 싸울 수만 있다면 어떤 피가 흐르건 상관 없다고 하셨지."


회생제와 같은 시대에 활약한 재건된 제국 해군의 총사령관, 디미트리오스 칸타쿠제노스의 수기에 남아있는 저 말을 두고 여러 해석이 있었으나 이윽고 후손들은 하나의 결론을 내는데 합의했다. 그것은 아라곤인으로 주로 구성된 구호기사단과 최초의 세 척, 이후 제국인뿐만이 아니라 투르크인, 제노바인, 라구사인 등 다양한 출신으로 재건된 제국 해군을 비유했다는 것이었다. 


디미트리오스 이후 대대로 해군에 입대하며 뱃사람의 길을 걸어온 칸타쿠제노스 가문은 이를 다양한 민족과 종교를 포용하는 제국의 보편성으로 여겼고, 거친 바다에서 같은 배를 타고 같이 피를 흘리는 이상 같은 제국인이라는 디미트리오스의 유지로 여겼다. 몇몇 단순한 자들이 해군 지원자가 부족했던 당시 실정을 말한 것이 아니냐는 의견을 제시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소수의견일 뿐이었다.


선조가 그랬듯 별 생각없이 해군사관학교로 진학하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가 일러준 말을 떠올리며, 안드레아스는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히 말을 이어나갔다.


"다른 피가 명가에 섞이는걸 자네가 두려워하는걸 같으니 말해주는 건데, 칸타쿠제노스의 피는 이미 옛저녁부터 갑판 위에서 함께 쓰러진 이들의 피와 섞였다네."


그렇게 말하고서 안드레아스는 다비드의 멱살을 거칠게 놓았다. 주위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툭툭 털기까지하며 상쾌한 표정을 짓는 안드레아스를 보며 주위 사람들이 할 말을 잃은 동안, 안드레아스는 그제서야 생각났다는 듯이 다시 표정을 구기며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그러고보니 소개를 안했구려. 이쪽은 딸이 한국에서 데려온 예비사위요."


다시금 구겨진 얼굴로 태연하게 그를 소개하는 안드레아스를 보며, 그가 미처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안드레아스로부터 풀려난 다비드가 언성을 높였다.


"제독 당신 후회할거요! 다른 명가들이 얌전히 있을 것 같소?!"


축복과 인사로 시끌벅적하던 결혼식을 앞둔 성당이 다비드를 중심으로 조용해져간다. 결혼식이라는 경사를 앞둔 분위기로 적절하다고 하기엔 힘든 분위기 속에서 다비드는 흥분으로 얼굴을 붉게 물들여가며 말을 이어나갔다.


"젠장! 처음에는 서쪽 산골 놈들이더니만, 이제는 어딘지도 모르는 나라 출신이라고? 대체 당신은 명가라는-"


"메가스 콤네노스 의원, 경사스러운 결혼식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언행이시군요. 조금 진정하시는게 어떻겠습니까."


자신의 뒤에서 갑작스레 나타난 인기척에 화들짝 놀라 말을 멈춘 다비드는 고개를 돌려 그 인기척을 확인하고서는 순식간에 낯빛이 창백해졌다. 새하얗게 센 머리가 남자의 나이가 적지 않음을 말해주고 있었지만, 독수리 같이 또렷한 눈빛과 날카로운 인상이 보는 사람을 압도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위치상 백발의 남자를 가장 먼저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그는 남몰래 식은땀을 흘렸다.


'천부의 재능, 끝없는 노력, 풍부한 경험...을 모두 갖췄다면 이렇게 되는건가.'


콘스탄티누스 광장에 있는 제르지의 동상이 왜 자신과 동갑이면서도 젊은 시절의 모습인지 그는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노년의 모습을 똑같이 만들었다간 콘스탄티누스 광장을 지나는 아이들 중 상당수는 그대로 오줌을 지리지 않았을까. 그야말로 나이가 들어 원숙해진 제르지 카스트리오티의 모습을 한 남자를 보며 그는 몸서리쳤다.


"아, 알바니아 왕..."


다비드의 눈동자가 흔들렸으나, 알바니아 왕이라 불린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는 카스트리오티입니다. 폐하께서 5분 전에 스메데레보 역에 도착하셨다니 곧 결혼식이 시작하지 않겠습니까? 자리로 돌아가시지요. 아니면..."


문득 자신이 주위 분위기를 너무 싸늘하게 만든 것이 아닌지 생각한 현 알바니아 왕이자 예비역 육군 대장인 제르지 카스트리오티는 웃는 얼굴로 분위기를 띄우려고 하며 다비드에게 말했다.


"서쪽 산골짜기의 왕이 모실까요?"


제르지 나름대로 위트를 담은 농담이었지만, 그의 미소는 안타깝게도 주위 사람들에게는 연쇄살인마의 웃음처럼 보였기에 농담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다. 뭐라 대꾸도 하지않고 자신의 자리로 황급히 돌아가는 다비드의 뒷모습을 보며 제르지는 혼자서 의아해했다. 주변까지 섬뜩하게 만드는 그 모습에 나선 것은 안드레아스였다.


"제르지 5세 전하를 뵙습니다."


안드레아스의 말에 제르지는 그대로 인상을 찌푸리며 답했다.


"자네까지 그러긴가? 다들 너무하는군."


진심으로 섭섭하다는 듯 말하는 제르지의 모습에서 많은 이들이 연쇄살인마가 칼날을 핥는 모습을 연상했지만, 그 감상을 감히 입에 담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대신 안드레아스는 피식하고 웃으며 말했다.


"카스트리오티 대장님, 농담 정도는 구분하실줄 아셔야지요."


익숙하다는듯 제르지에게 대응하는 안드레아스에게 사람들의 소리없는 경탄이 쏟아지는 가운데, 제르지는 그제서야 멋쩍다는 듯 관자놀이를 긁었다.


"아, 그렇군. 미안하네. 나도 늙어서 그런가보네. 어쨌든 폐하께서 곧 도착하실테니 자네도 어서 자리로 가게나."


당신께선 젊었을 때도 그러셨습니다라는 말을 목구멍 안쪽으로 삼킨 안드레아스는 지금까지도 전설로 남아있는 퇴역 군인에게 애써 웃어주었다. 밖에 나가있던 사람들 역시 소식을 들었는지 안으로 돌아오면서 저마다의 자리를 찾아 가는 가운데, 그와 안드레아스 역시 칸타쿠제노스 가문의 자리를 찾아갔다. 아직 마리아와 디미트리오스가 돌아오지 않아 다시금 침묵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번에는 그가 먼저 침묵을 깼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많은 의미를 담은 그 질문에 안드레아스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답했다.


"뭐가 말인가?"


"트레비존드 공이라던가, 다른 명가들 말입니다. 언뜻 보기에도 기자들이 한둘이 아니더군요."


걱정어린 그의 목소리에 안드레아스는 콧방귀를 뀌었다.


"다비드의 영역은 의회일세. 그리고 군 인사권은 폐하와 장관에게 있지. 그리고 설령 다비드 놈한테 동의하는 명가가 있더라도, 명가 사이에서 메가스 콤네노스의 인망은 바닥 중의 바닥이야. 평소부터 잘난 척을 어지간히 했어야지. 기자 놈들? 그 놈들이 명가에 대해 써대는 가십 정도로 칸타쿠제노스가 흔들릴 것 같은가? 그래, 폐하께 명가다운 태도를 보이라고 한 소리 들을 수도 있기야 하겠지. 답이 됐는가?"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내는 안드레아스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는 다시 한 번 질문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똑같은 질문에 안드레아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난데없이 던져진 똑같은 질문에 안드레아스는 짜증을 내며 되물었다.


"뭐가 말인가?"


"사람들 앞에서 저를 예비사위라고 부르셨습니다만."


이번에는 약간 장난기어린 그의 목소리에 안드레아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젠장, 난 아직 완전히 인정한게 아니야! 내가 다비드 놈한테 화가 난건 자네 때문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선조와 회생제의 유지에...뭘 그리 웃는가?!"


어느새 소리죽여 웃고 있는 그를 보며 안드레아스는 발끈해 했지만,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가지는 않았다. 자기도 모르게 씰룩이는 자신의 입꼬리를 억눌러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잠시 동안 웃던 그는 다시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세 번이나 이어지는 그의 똑같은 질문에 안드레아스는 결국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그의 질문에 답했다.


"그래, 괜찮네. 뭔지는 몰라도 말이지."


안드레아스가 가벼운 마음으로 답한 반면, 그 답을 들은 그의 표정은 약간 어두워졌다. 그 모습에 안드레아스가 의아해 하자, 그는 잠시 망설이다 눈을 꽉 감으며 말했다.


"부인께서 아무래도 처음부터 다 보신 것 같습니다만."


이번에는 안쓰러움이 가득 묻어나오는 그의 목소리에 안드레아스는 뻣뻣해진 고개를 천천히 뒤로 돌렸고, 그곳에는 희노애락의 다양한 감정이 회오리치는 마리아 칸타쿠제노스가 서있었다. 안드레아스는 눈을 감았다.


"로마인 황제이자 군주이신, 콘스탄티노스 17세 드라가시스이십니다!"


제일 중요한 하객이 성당에 들어서면서, 결혼식이 시작됐다.


---

서른다섯번째 롬연시 팬픽.


많이 늦었습니다...이 말도 최근엔 매번 쓰는 것 같은데...죄송합니다...요즘 안팎으로 바쁜 일이 너무 많았습니다...

분량조절도 또 실패했습니다...이 부분 플롯은 원래 한 줄이었는데...이 말도 점점 매번 쓰는거 같은데...? 사죄도 너무 자주 하면 가치가 떨어진다고 하는데 증말 죄송합니다...


원 역사보다도 빨리 성립된 후냐디 왕조에 대해서 생각해봤습니다. 공식 설정에 따르면 후냐디의 헝가리 계승에 폴란드가 이의를 제기하고, 후에 블라드 3세가 이끄는 제국군이 폴란드를 저지, 그 결과 신성로마제국과 폴란드가 약화되고 제국은 왈라키아를 종속시켰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이후는? 제국과 헝가리의 이해가 일치하면서 도나우+왈라키아를 경계로 서로 안정된 후방을 확보했다고 대충 썼습니다. 그래서 세르비아 왕국의 수도는 여전히 스메데레보인걸로. 베오그라드는 3차 오스만전때 헝가리한테 넘겼으니...


저는 결혼식 들러리면 아침 일찍부터 나간다고 알고 있었는데, 여자사람한테 물어보니까 그냥 그때그때 다르다고 합니다. 여자사람이 그렇다니까 그런걸로 치기로 했습니다.


8화에서도 언급했지만, 트레비존드의 메가스 콤네노스는 괜히 뻗대다가 왕으로 인정받지도 못했던 걸로. 원작에서도 봉신으로 합류하라 했을 때 도나우 이남을 다 차지한 제국과 1:1 대등한 동맹을 맺겠다고 하는게 참...그래서 갈궜습니다. 제 의지로.


원작에서 해군 재건 업무에 혼이 빠져나가던 디미트리오스 칸타쿠제노스한테 마그누스를 붙여줬습니다. 사실 폼페이우스가 마그누스 칭호를 해군으로 딴건 아니지만 뭐 어때하는 심정으로 붙여줬습니다. 후손들한테 왜곡까지 당했는데 이 정도도 못참겠습니까?


제르지 카스트리오티는 원작에서부터 약간 눈새 아싸기질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구글에서 초상화를 찾아봤는데, 노년의 모습에서 약간 싸이코패스 같다는 느낌을 받아서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미안해요, 제르지. 원작에서도 주인공이 경험만이 부족했다고 평한만큼 중년 이후부터는 그야말로 날아다녔으리라 생각합니다. 팬픽 내에서는 적당히 대충 어디 분쟁지역에서 날리던 분이라고 쳤습니다.


정교회식 결혼식 전례 찾는다고 정말 열심히 했는데...분량상 결혼식은 못썼습니다. 다음 화에는 진짜 소피야 결혼식 합니다.


라노베 테이스트를 재주껏 넣어보려고 하고 있는데 잘되는건진 모르겠네요.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조아라/문피아에서 작가님의 신작 제목이 '앙시엥 레짐'에서 '나 죽고 혁명해라'로 바뀌었습니다. 직관적이네요.


항상 재밌게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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