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감정을 거세하고 싶었어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학창시절 내내 우울증에 시달렸다
구태의연한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내가 불량품이라고 생각했어
소위 이야기 하는 세상의 규격에 몸을 구겨넣는 게 어려웠고
만성화된 우울증은 지독하게 나를 괴롭혔다

군은 처절하게 버텨 전역했지만
전역 이후의 4년은 공백의 시간이었어
고등학생 때 깊게 사귀었던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이별과 재회를 반복하다가 스물다섯쯤 재회했고
나는 그 애와 사랑하면서,
사랑한다고 착각하면서 언젠가부터 살아가는 일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잠깐 가졌어

나는 사랑이 아닌 감정들로는 내 여백을
채울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됐고
사랑이라는 수없이 쓰이고, 읽히고, 불려진
관념에 얽매인 채 살게 됐다. 그러나
여자친구는 나의 불안정을 견디지 못하고 재회한 지 2년 만에
떠나게 됐어. 내가 나를 차단한 그 애의 소식을 알게 된건
헤어진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어떤 날에 지인의 SNS에서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본 순간이었다

그날 이후로 불량품이었던 나는 완전히 망가졌어
회사에는 병가를 신청해 두어 달을 쉬었고
약 복용량을 멋대로 늘리는 등 무절제한 생활이 반복됐어
하루는 아빌리파이 한 통을 한번에 들이켰는데
며칠 동안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더라

때로 결혼을 이야기 하고는 했던 깊었던 연애의 실패는
우울증으로 침전하고 있던 나를 압제하는,
감정의 심해를 향해 짓누르는 거대한 추처럼
불안정한 일상으로의 복귀조차 불가능하게 만들었어

나는 나와 마음을 닫기로 약속했어
다시는 사랑이라는 치명적인 관념으로부터
받을 상처를 견딜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러나

약속을 어기고 다시 다른 사람을 사랑했다가
실패를 경험한 지금
나는 비로소 내 삶에 존재하는
불행의 관성이 완성됐다고 느낀다
이 이상한 가역반응도 다시 겪을 일이 없을테고


그래, 돌이켜봐도
나는 많은 것들을 바라지 않았어
채워지고 싶었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