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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창작] [문학상] 선배의, 선배 이상의 히로인

vig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2.07.22 14:51:56
조회 807 추천 28 댓글 16

														


「선배」

「저의 연기 실력이 이렇게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었던 건 유우 선배가 곁에서 항상 응원해주신 덕분이에요」

「이미 충분히 감사한 일이지만, 조금 욕심을 부려서...」

「선배가 다른 사람이 아닌, 오직 저만을 응원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렇다면 저는... 오직 선배만을 위해, 선배만을 떠올리며 무대에 서겠어요」

「아직 많이 부족한 저라도, 선배와 함께라면 어떤 난관이든 넘어설 수 있을듯한 기분이 들어요」

「사랑해요, 선배. 저를 선배의 히로인으로 받아들여 주시겠어요?」



시즈쿠는 편지가 들어있는 가방을 살짝 끌어안았다.

가마쿠라에서 오다이바로 이어지는 기나긴 등교길도, 오늘만큼은 조금 특별하게 느껴졌다. 차창 밖으로는 꼭 하트를 닮은 모양의 구름이 소리없이 흘러갔다. 갈아타는 역의 발차 멜로디가 로맨스 영화의 도입부를 장식하는 감미로운 배경음악처럼 들려왔다.

아직 선배에게 편지는 전하지도 않은 상태지만, 시즈쿠는 준비가 완벽하다고 느꼈다. 교문을 통과하는 발걸음은 경쾌했고, 부실의 문을 열어젖히는 손길은 자신감에 가득 차있었다.

시즈쿠「좋은 아침이에요, 선배」

유우「아, 시즈쿠쨩 좋은 아침」

시즈쿠「오늘 가져온 대본은 '오페라의 유령' 이에요」

유우「저번주에 DVD를 빌려줬던 그거구나」

시즈쿠「여주인공 크리스틴이 처음으로 유령의 가면을 벗기고 놀라는 장면인데...」

시즈쿠「제가 유령을 맡을 테니, 선배가 크리스틴을 맡아주세요」

둘의 관계는, 유우가 부활동 홍보 연극에서 시즈쿠의 연기를 처음 보고 반해버렸다는 단순한 사건으로 시작되었다. 유우는 그 길로 곧장 연극부의 문을 두드렸다. 그녀의 소꿉친구라는 아유무가 함께였다. 아유무가 연극 무대에 선 모습을 보고 싶다고 설득한 끝에 이쪽은 시즈쿠처럼 무대에 서는 쪽으로, 본인은 매니저 같은 역할로 모두를 지원해주고 싶다며 연출팀으로 입부했다.

유우「그럼, 시작할게」

유우「...」

유우「기억나」

유우「안개... 안개가 투명한 호수 위를 휘감고 있었지...」

유우「저 그림자 속에 있는 건 누구?」

유우「저 가면 속 얼굴은 누구의 것일까?」

특히 입부의 계기가 되어준 시즈쿠에게 유우는 곁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 시즈쿠가 아침 일찍 등교해 대본 읽기 연습을 하는 금요일에는 유우도 일찍 와서 상대 역을 맡았다. 연기에 대해선 잘 모르는 유우지만, 나름대로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열심히 목소리를 냈다.

처음엔 당연히 어색한 사이였다. 왜 이렇게까지 자신을 도와주냐는 물음에 유우는 '시즈쿠쨩의 연기에 반했고, 이게 나의 응원방식' 이라고 답했다. 그렇게 대본 읽기를 거듭하면서 시즈쿠도 자연스레 마음을 열어갔다. 시즈쿠를 자기자신보다도 먼저 챙기는 헌신적인 모습에 나중에는 오히려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시즈쿠「...이게 네가 보고 싶어하던 것이냐?」

시즈쿠「네가 꿈꾸던 것보다 더 괴상한 모습이지」

시즈쿠「지옥의 불길에 타버린, 하지만 비밀스럽게 천국을 꿈꾸는」

시즈쿠「그러나 크리스틴, 두려움은 사랑으로 바뀔 수 있어」

또한 연극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유우에게 시즈쿠는 많은 고전명작들을 추천해주었다. 시즈쿠가 보여줬던 연기나, 추천해준 작품에 대한 감상을 나눌 때 두 사람의 생각도 항상 결이 비슷했다. 두 사람의 관심사가 항상 비슷한 곳을 향해 있었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거리는 가까워졌다.

더군다나 이건 최근의 일이지만, 시즈쿠는 자신과 이야기를 나눌 때의 선배가 미묘하게 부끄러워한다고 느꼈다. 눈을 잘 마주치지 못 하고, 거리가 좁혀지면 뺨이 살짝 붉어졌다. 단순한 감의 영역보다는 조금 더 확실했다. 그렇고 그런 기류는 생각보다 확실히 전해져왔다.

시즈쿠「네가 보려고 한다면, 이 괴물 뒤에 있는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될 거야」

시즈쿠「비밀스럽게 아름다움을 꿈꾸는」

시즈쿠「비밀스럽게, 비밀스럽게... 오, 크리스틴」

시즈쿠「...돌아가야겠군」

시즈쿠「내 극장을 운영하는 두 바보들이 당신을 찾을 테니」

이제는 그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시즈쿠는 대본에서 시선을 떼고 눈앞의 선배를 바라보았다. 역시 대단하다며 자신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더욱 자신감이 끓어올랐다.

유우「역시 시즈쿠쨩」

유우「돌아가야겠다며 분위기가 확 바뀔 때 나도 모르게 소름돋았어」

시즈쿠「그러는 선배도, 팀 옮겨서 같이 무대에 서도 될 거 같아요」

시즈쿠「연습이라고는 하지만 배역에 진지하게 몰입하려고 노력하는게 느껴지네요」

유우「뭘, 실제 무대에 서는 시즈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시즈쿠「저기, 선배」

시즈쿠「잠시...」

「실례합니다」

평소라면 더이상 드나들 사람이 없을 부실 문이 시즈쿠의 말을 가로채듯 덜컥 열렸다. 나타난 것은 유우의 소꿉친구라는 선배였다. 붉은색 계통의 머리카락에 한쪽만 달린 경단이 인상적인 그녀는 자연스럽게 유우의 코앞까지 다가섰다.

아유무「유우쨩, 말도 없이 먼저 가버리면 어떡해?」

유우「에? 말도 없이?」

유우「아... 말해두는거 깜빡했다...」

유우「미안, 아유무. 그래도 금요일에는 시즈쿠쨩의 연습을 도와준다고 했으니까...」

아유무「시즈쿠쨩? 아, 좋은 아침」

시즈쿠「좋은 아침이에요...」

뒤늦게 인사를 건네는 아유무의 얼굴을 시즈쿠는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딱히 잘못을 저지르진 않았지만 상황이 너무 어색했다.

유우「먼저 교실 들어가있으면 끝나고 바로 갈게」

아유무「...너무 늦지 않게 와야 해?」

문이 닫히고 시즈쿠와 유우는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미 끊긴 흐름을 단둘이서 되돌리는 것은 힘들어보였다.

그리고 시즈쿠의 안에서, 하루라도 빨리 유우 선배와의 관계를 확실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싹트기 시작했다.





카스미「오늘도 대본 읽기 연습하다 왔나보네」

시즈쿠「응...」

교실 앞 복도에서 만난 카스미는 시즈쿠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했다. 평소와 다름없는거 같기도, 힘이 빠진거 같기도 한 오묘한 얼굴이었다.

카스미「뭔가 안 좋은 일 있었어?」

시즈쿠「아니, 음... 그런 게 있어」

카스미「에...? 아, 잠깐만!」

카스미는 궁금해할 틈도 없이 혼자 앞서나가버리는 시즈쿠의 뒷모습을 쫓았다.





방과후, 수업을 듣는둥 마는둥 흘려보낸 시즈쿠는 종례가 끝난 교실에서 홀리듯 걸어나왔다. 유우는 오늘같이 연극부 모임이 없는 날에는 느긋하게 하교한다고 했다. 시즈쿠는 그때 교실로 직접 찾아갈 생각이었다.

이미 마음의 준비는 되어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시간이 다가오니 느낌이 달랐다. 유우의 교실 뒷문 앞에 선 시즈쿠는 편지를 등 뒤에 숨긴 채 심호흡을 두 번 했다. 오는 길에 스쳐지나갔던 2학년 학생들 중에 유우는 역시 없었다. 아직 이 안에 남아있는 몇 안되는 사람들 중에 있을 것이다.

「오늘은 안 하면 안돼?」

시즈쿠가 문 손잡이를 향해 한 손을 뻗으려는 찰나, 출입문 근처에서 오가는 대화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익숙한 선배들의 목소리였기에 시즈쿠는 자신도 모르게 움직임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아유무「과제발표 준비한다고 말을 너무 많이 해서 입도 아프고... 좀 피곤한데」

유우「아유무는 벌써부터 애정이 식은 거구나」

유우「나는 항상 방과후만 되면 들떠있는데...」

유우「매일 안 빼먹고 하던 거잖아? 부실에서나, 우리집에서나...」

아유무「유우쨩도 참 열심이라니까...」

아유무「서로 자리를 바꾸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야」

유우「후훗, 뭐 생각은 해볼게」

유우「아, 그리고 오늘 부모님 안 계시니까 좀 큰 소리가 나도 상관없을 거야」

아유무「하아. 알았어. 대신 오늘은 너무 길게 안 끌고 짧게 끝내기다?」

시즈쿠는 머릿속이 하얘진 채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했다. 교실 안에서 이성적으로 따라가지 못할 대화내용이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이 적나라하게 펼쳐졌다. 잘못 들은 거라고, 우연히 그런 뉘앙스로 들렸을 뿐일 거라고 생각해보지만 놀란 가슴이 진정되진 않았다. 아니, 애초에 머릿속에서 저 대화내용이 이해가 되어버렸다는 사실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유우가 뒷문을 열고 나오려다 그녀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을 때 시즈쿠의 정신이 간신히 되돌아왔다.

유우「시즈쿠쨩? 여기서 뭐하고 있어?」

시즈쿠「아...」

시즈쿠「선배는...」

시즈쿠「아유무 선배와... 평소에 무슨 일을 하고 계신 건가요?」

유우「에? 무슨 일?」

고개를 갸우뚱하는 유우의 옆으로 아유무가 천천히 다가왔다. 시즈쿠는 자신과 다르게 살짝 미소까지 띈 여유로운 아유무의 모습에 더욱 당황했다.

아유무「아무것도 아냐, 시즈쿠 씨. 유우쨩이 조금 말실수를 한 것 같네」

아유무「우리가, 시즈쿠 씨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그런 일을, 몰래 하고 있을 리 없잖아?」

그렇게 말하면서도 유우에게 어깨를 바짝 맞댄 아유무의 모습은 치사했다. 두 사람의 0에 수렴하는 간격이, 아유무의 말과는 다르게 시즈쿠가 떠올린 장면은 진짜라고 말해주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아니, 이건 진짜로 착각일까?

선배와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고백하면 바로 이어질 수 있을 정도라 생각했는데. 뭔가 매우 분했다. 자신은 선배에 대해 의외로 아는 게 없는 걸지도 모른다. 하긴 선배를 훨씬 오래 전부터 봐왔을 사람이 당장 옆자리를 지키고 있다. 소꿉친구간의 애정이 이 정도로 무거울 수가 있는 건가. 아니면 두 사람은 애초에 단순한 소꿉친구가 아니었단 말인가.

자신과 비슷할 정도로 당황한 유우, 줄곧 여유 한 점 잃지 않고 당당한 아유무, 두 사람을 앞에 두고 머릿속이 점점 뒤죽박죽이 되어갔다. 어떤 말을 해도, 어떤 말을 들어도 역효과가 날 것 같았다.

유우「아유무, 무슨 말이야?」

시즈쿠「...실례했습니다」

입술을 꽉 깨문 시즈쿠는, 천천히 등을 돌리고,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자신을 부르는 듯한 목소리가 뒤쪽에서 울렸다. 하지만 잘 들리지 않았기에, 듣지 않고 싶었기에 그저 묵묵히 나아갔다. 복도를, 계단을, 신발장을 지나며 담담히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그럴 수록, 가슴 한 켠이 죄어왔다.





초가을의 바깥바람은 서늘했다. 얼마나 많이 걸어나왔을까. 멀리 학교 건물을 등지고 홀로 선 시즈쿠는 문득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햇빛이 생각보다 쨍쨍했던 탓에 얼마 못 가 눈을 감아버리자, 진한 보라색 잔상이 닫힌 눈꺼풀을 뚫고 욱신거렸다.

마치 멍이 든 것 같네, 고개를 숙인 시즈쿠는 중얼거렸다. 당연히 실제로 눈이 아프진 않았다. 욱신거리는 곳은 따로 있었다.

「...」

엿들은 정보에서부터 비롯된 상상 속 장면들이 계속해서 시즈쿠의 머릿속을 잠식해간다. 떠올리고 싶지 않다고 느낄 뿐, 매 순간 머릿속에서 굴러다니고 있었다.

애써 관심을 돌리려던 중 문득 위화감을 느낀 시즈쿠는 자신의 양손을 펴보았다. 손에 들려있어야 할 편지 한 장이 보이지 않았다. 유우에게 전해주려 했던 시즈쿠의 소중한 마음이었다. 가방과 주머니도 열심히 뒤졌지만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직접 건네줄 생각이었기에 다행히 자신의 이름을 쓰진 않았지만, 이름모를 누군가에게 고백편지를 읽힌다는 것은 부끄러윘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혹시 유우나 아유무라면ㅡ 상상하기 싫었다.

아침에 품고 왔던 기대감이 무색할 정도로 잘 풀리는 게 하나도 없는 그런 날이었다.



~~~~~~~~~~~~~~~~



ㅡㅡㅡㅡㅡLINEㅡㅡㅡㅡㅡ
(유우 선배)

[시즈쿠쨩, 늦은 밤에 미안한데 일어나있어?] 오후 11:54

[말해줘야 될 것 같은 게 있달까... 어쨋든 둘이서 얘기하고 싶은 게 있거든] 오후 11:54

[어차피 내일 11시부터 문화제 공연 연습때문에 학교로 와야 하니까,
니지가쿠역 앞의 카페에서 10시에 보자] 오후 11:55

1 오후 11:56 [알겠습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시즈쿠는 숫자 1이 '읽음'으로 바뀐 것을 확인하고 홈 화면으로 돌아갔다. 잠시후 유우에게서 온 "응, 잘 자 시즈쿠쨩. 내일 보자" 라는 답장을 팝업창 알림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평소에 곧잘 덧붙이던, 손으로 하트를 만들고 있는 캐릭터 스탬프 같은 건 오지 않았다.

시즈쿠는 그대로 화면을 끄고 휴대폰을 책상 위에 올렸다. 그리고 등을 돌려 침대로 몸을 던졌다. 가슴은 여전히 두근거리고 있었지만, 푹신하고 익숙한 감촉이 지친 하루를 위로해주듯 몸을 감싸왔다.

이질적인 포근함에 휩싸인 채 애써 눈을 감자 자연스레 유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말해줘야 될 것. 그때의 일과 관련있겠지만 그 이상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혹시 지금이라도 선배가 편지를 주웠는지 물어볼까 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작게 한숨을 쉰 시즈쿠는 이내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했다. 내일은 1시간 더 일찍 일어나야 했다. 학교까지의 거리를 생각하면... 그래, 7시 정도에는.



~~~~~~~~~~~~~~~~



유우「...좀 늦었다. 빠른 걸음으로 가야겠네」

아유무「유우쨩?」

유우「아, 아유무?! 보, 복도에서 만나다니 우연이네」

아유무「유우쨩 어디 가는 거야? 연습은 거의 2시간이나 남았는데」

유우「그냥 요 앞에... 그러는 아유무는?」

아유무「연습 가기 전에 소품을 좀 사가기로 했는데... 아, 지금 한가하면 같이 쇼핑몰 들렀다 가지 않을래?」

유우「지금?」

아유무「응」

유우「시즈쿠쨩이랑 둘이서 얘기할게 있다고 하면, 무슨 얘기냐고 자세히 캐물어볼 거 같은데...」

아유무「응? 뭐라고?」

유우「아... 아무것도 아냐. 나는 역 앞의 서점에 잠시 들렀다 갈 생각이어서 같이 못 갈 거 같아, 미안 아유무」

아유무「거기, 어제 역 앞을 지나가다가 봤는데 오늘까지 휴무랬어」

유우「휴무?!」

아유무「응. 서점이라면 쇼핑몰에도 있으니까 거기로 가면 되겠다」

유우「아... 근데 거기는 좀 멀지 않을까? 여기서 거의 30분 정도는 걸릴텐데」

아유무「시간이 2시간이나 남아있는 걸?」

유우「그, 그러네. 응... 가자 그럼」



아유무「...유우쨩, 걸으면서 뭐하고 있어?」

유우「다음에 만나자 아유무한테 붙잡혔어 정말 미안... 이라고 라인 보내놓자...」

아유무「메시지 보내는 거야?」

유우「에? 아무것도 아냐」

아유무「왜 휴대폰을 숨기는 거야?」

유우「수, 숨긴 게 아니고 걸으면서 화면 보면 위험하니까... 메시지가 오긴 했는데 그냥 스팸이었어」

아유무「오늘 유우쨩, 뭔가 이상해」

유우「기분탓일 거야」

유우「큰일이네... 급하게 숨기다가 잘못 건드리진 않았겠지... 쇼핑몰 들어가면 화장실 간다고 하고 확인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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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ㅡㅡㅡㅡLINEㅡㅡㅡㅡㅡ
(유우 선배)

[다음에] 오전 09:53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시즈쿠「다음에...?」

유우의 터치 실수로 보내진 메시지를 받고 시즈쿠는 생각에 빠졌다.

오늘 말고 다음에 보자는 뜻으로 받아들이기엔 문장이 너무 간결했다. 전화도 아니고 라인 메시지라는 점도 좀 이상했다. 시즈쿠는 그게 무슨 뜻인지 묻는 내용의 답장을 보내놓고, 화면을 끄지 않은 채 계속해서 들여다보았다.

조금 있으면 보내지 못한 메시지들이 마저 올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여가며 무작정 기다린지도 30분이 지났다. 눈앞에 놓인 카페오레의 머그컵은 바닥을 보였다. 10시 쯤에 유우가 오지 않자 빈 테이블에 계속 앉아있기 눈치보여서 시켰던 것이었다. 아까운 쪽은 다 마신 커피인지, 낭비해버린 시간인지, 초조하게 컵 손잡이만 만지작거리고 있는 시즈쿠. 메시지 옆의 1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반쯤은 믿고 반쯤은 의심하는 수준이었던 시즈쿠의 생각도 이제 차츰 바뀌기 시작했다. 시즈쿠는 오늘 만나자고 했던 이유가 아유무와의 사이에 대해 자신에게 털어놓거나, 오해였다면 그것을 풀기 위해,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 조심성 없는 태도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음 한 구석이 뭉친 듯 답답하고 불편했다.

시즈쿠는 불안을 떨쳐내지 못하고 결국 유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연결이 되지 않아...」

하지만 이어지지 못하는 연결음과, 기계적인 안내멘트만이 공허하게 울릴 뿐이었다. 시즈쿠는 휴대폰을 가방 속에 대충 던져넣었다. 그리고는 빈 머그컵이 올려진 쟁반을 들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벽시계의 분침은 가장 아래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시즈쿠가 카페를 나온 직후에, 물론 시즈쿠는 보고 있지 않은 검은 화면 속에서 마침내 1이 사라졌다. 유우는 실수로 전송된 메시지를 보고 머리를 감싸쥐었다. 잠시동안 멍하니 앉아있던 유우는 이내 시즈쿠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조금 전과 같은 상황이 사람만 서로 바뀐 채 되풀이 되었다.

한편 자연스레 학교 쪽을 향하던 시즈쿠는 문득 망설이기 시작했다.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스스로가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에 내면에서 새어나온 거부감이 무겁게 실려있었다. 분하지만 연습에 가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선배는 그래놓고 뻔뻔하게 연습에 얼굴을 비추는 걸까? 아유무 선배와 다정하게 팔짱을 낀 채?

연습을 빠지진 않겠지. 그토록 기대된다던 문화제 연극의 첫 연습이니까 말이다. 자기가 기획을 돕고 세팅을 도운 무대가 문화제에서 공연되는 상상을 하면 벌써부터 두근거린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 선배를 이제부터 눈앞에 두고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묻는다면, 솔직히 전혀 그렇지 않았다. 문화제 공연 주연 자리의 무게감도 무시 못 할 수준인데, 그쪽의 고민까지 떠안을 자신은 없었다.

시즈쿠는 몸을 돌려서 반대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



유우「시즈쿠쨩...」

유우「이미 갔네」

유우「일부러 학교에서부터 걸어왔는데, 카페에 들어온 지금까지 만나지 못했다는 건...」

유우「...」

유우「아, 저기 지나가는 1학년 아이, 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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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곳은 있었지만, 돌아갈 곳은 없었다.

「다음은... 무사시코스기...」

이대로 전철에 몸을 맡기면 일단은 가마쿠라로 갈 수 있다. 시즈쿠는 하나뿐인 짐인 가방을 고쳐안았다.

부정하고 싶은 현실로부터의 도피처, 지쳐버린 몸과 마음의 안식처... ‘가마쿠라’에 붙이고 싶은 이명은 하나로 좁히기 힘들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지금 집으로 간다고 해도 '돌아간다'라 하기는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 단어는 너무 안정적이고 아늑한 느낌이었다.

'놓고 와버린 것들'이 너무 많은 시즈쿠에게는, 어디로 발걸음을 옮기든 결코 편하지 못 할 것 같았다. 오다이바를 비롯한 자신의 행동반경 곳곳에 마음의 유실물들이 흩어져 있는 듯 했다. 하지만 니지가쿠앞역에 유실물센터 같은 건 없었고, 그것들을 회수하는 것은 전부 본인의 몫이었다. 그리고 시즈쿠는 아예 눈을 돌리는 것을 선택해버렸다.


(띵동, 띵동)

시원한 바람과 함께 문이 열리고 두세명의 사람들이 오간다.

전철은 한산하고 몸은 나른해지는 주말 오후. 하지만 연습을 통째로 빠지고 집으로 간 적은 당연히 처음이었기에 그것을 떠올리면 정신은 아주 또렷해졌다. 그때마다 시즈쿠는 연습에 참가할 상황이 아니었던 건 확실하다며 스스로를 다독여보았다. 그래도 지금쯤 자신을 찾기 시작했을, 연극부나 유우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지워낼 수는 없었다.

이따금 숨이 막혀오는 듯한 기분이 들어, 시즈쿠는 한숨을 내쉬며 차창 밖 풍경으로 주의를 돌리려 애썼다. 스위치처럼 생각을 끄고 켤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심을 돌린 저편에서도 결국 선배는 어딘가에 서있었고 또 이쪽을 향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머릿속 어디에나 있는 사람을 완전히 떨쳐내긴 힘들었다.

전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하는 물음이 시즈쿠의 안에서 떠오른다. 시즈쿠의 갑작스런 고백은, 연극으로 따지면 하나의 애드리브 연기였을까? 아직 애드리브는 서투른 시즈쿠가 그 장면을 선보이기에는 무대 경험이 너무 부족했던 걸까?

하지만 적어도 그것이 치밀하게 계획된 대본 상의 연기였다면ㅡ 선배의 소꿉친구 같은, 방해받을 만한 요소에 대해서도 충분히 대비했을지도 모른다.
둘은 서로 가까운 곳에 산다는 것 같고, 특히 요즘같이 공연을 앞둔 때는 연기를 봐주거나 할 지도 모르니 붙어있는 시간도 길 것이다. 평범한 친구 사이가 아니었다면 그런 와중에 눈이 맞는다 해도 사실 이상하진 않다.

아유무 선배는 유우 선배의 흐트러진 모습도 볼 수 있겠지. 어쩌면 매일 밤마다. 부끄럽지만 부러웠다. 불은 끄는 쪽일까, 켜는 쪽일까? 어두워도 서로 보일 만한, 입김이 맞닿는 거리에서 애정어린 눈빛이 오갈 것이다. 촉촉히 젖은 입술이 맞닿아 상냥하고도 끈적한 대화를 나눌 것이다. 엿들은 내용으로는 리드하는 쪽으로 보이는 게 유우 선배였으니, 그 뒤는, 유우 선배의 손이, 아유무 선배의...




「다음은, 가마쿠라, 가마쿠라...」



차내방송이 알람처럼 울려퍼졌다. 휴대폰 기본 벨소리처럼 익숙한 지명이 담겨있었다. 악몽과도 같은 망상에 빠져 허우적대던 시즈쿠는 그것으로 인해 현실로 건져졌다. 희고 가녀린 손은 가방 손잡이를 꽉 붙잡은 채였다.

문이 열리자 시즈쿠는 반사적으로 전철에서 내려서 사람들을 따라 걸었다. 하지만 발걸음은 무거웠다. 개찰구 앞에 선 시즈쿠는 잠시 가방을 내려다보았다.

전철은 가만히 앉아있어도 저절로 움직이고, 계속해서 다른 풍경을 보여주어서 좋았다. 하지만 이곳을 나가면 매일 질리도록 봐왔던 거리를 스스로 걸어나가야 한다. 여전히 집으로 돌아갈 만한 기분도 아니었다.

방향을 잡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던 그때, 휴대폰이 짧게 한 번 울렸다. 유우 선배의 라인 메시지라면 알람을 꺼버릴 생각으로 화면을 켰다. 하지만 표시된 이름은 전혀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

시즈쿠「카스미 씨...」

ㅡㅡㅡㅡㅡLINEㅡㅡㅡㅡㅡ
(나카스 카스미)

[시즈코 지금 어디야??] 오후 12:17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시즈쿠는 답장을 보내지 않고 고개를 든다. 집으로 가고 있다고 보내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고 왜? 하며 되물어본다면 지금의 기분으로는 조금 공격적으로 보일 것 같았다. 이건 카스미와는 관련없는 일이다. 그냥 전철역에 서있어? 카스미의 성격상 어째서 그러고 있는지 꼬치꼬치 캐물어 올 것이 분명했다.

그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천장에 붙어있는 안내판이었다. 나가는 곳이 두 개, 동쪽 출구와 서쪽 출구, 서쪽으로 나가면 에노시마 전철로 갈아타기...

ㅡㅡㅡㅡㅡLINEㅡㅡㅡㅡㅡ
(나카스 카스미)

[시즈코 지금 어디야??] 오후 12:17

읽음 오후 12:20 [집 근처 바닷가에 가는 중]

[시즈코 집 근처 바닷가???] 오후 12:20

[어디더라....] 오후 12:21

읽음 오후 12:21 [있어, 시치리가하마라고 해]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개찰구를 통과하는 시즈쿠의 얼굴은 여전히 밝아보이진 않았지만, 조금 평온해진 듯했다.



~~~~~~~~~~~~~~~~



시즈쿠는 바닷가를 좋아했다.
「다음은, 시치리가하마, 시치리가하마」

역에서 몇 발자국 걸어나오자 그런 바닷가가 시즈쿠의 눈앞에 펼쳐졌다. 가마쿠라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잠시 훑어본 그녀는 이내 모래사장에 발을 들였다.

부서지는 파도소리를 듣고, 거친 바닷바람을 맞고, 푸석푸석한 모래바닥을 밟는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때 시즈쿠는 종종 이곳에 왔다. 주변에는 고민을 부드럽게 받아들여줄 만한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가끔은 이런 식으로 투박하게 쓰다듬어지고 싶었다.

파도에 막혀 더이상 나아갈 수 없게 되자 시즈쿠는 발걸음을 멈췄다. 하늘과 바다가 겨우 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 깔끔하게 나뉘어져 있었다. 시즈쿠는 그것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시즈쿠쨩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어머니가 동화책을 읽어주시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 순수했던 그때는 책의 모든 내용이 진짜 같았고, 모든 대사가 실감났었는데...」

시즈쿠는 머릿속에 울리는 선배의 상냥한 목소리에 무심코 '싫다'라고 중얼거렸다. 진심으로 싫은 건 아니었지만, 아무튼 더이상 선배의 목소리는 떠오르지 않았으면 했다. 잊어버리고 싶었다. 지금 보고 있는 저 풍경처럼 자신과 선배 사이에도 깔끔하게 선이 그어지고 싶었다.

연극부를 그만두기에는, 시즈쿠의 연기에 대한 열정 또한 너무나도 강했다. 분명히 아쉬울 것이다. 미련이 있다고 하면 산더미같이 쌓여있었다. 그곳에서 이뤄냈던 것을 전부 내던지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연극부를 계속한다면 유우나 아유무와의 만남은 피할 수 없었다. 지금의 두 사람을 항상 마주친다면 연극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연극부가 아니더라도 연극에 대한 열정을 태울 수 있는 방법은 있다고 믿었다.

시즈쿠는 이번 문화제 공연이 끝나면 내 연극부 활동도 끝이라고 생각을 굳혔다. 마음이 약해진 지금은 오랫동안 고민하는 것마저도 괴로웠다. 진심이 아니라 연기라도 좋으니까, 이번 한 번만 유우 선배를 싫어하고 연극부를 나가고 싶어하는 오사카 시즈쿠가 되면 편해진다. 그러면 된 거다.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바다를 조금 더 보고, 마음이 완전히 편해지면.







그 뒤로 몇 번의 파도가 더 밀려왔을까.

「시즈쿠쨩」

등 뒤에서, 여기서 들릴 수가 없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또렷히 들려왔다. 시즈쿠는 놀란 나머지 무언가 생각할 틈도 없이 몸을 돌렸다.

시즈쿠「...선배」

두 사람이 서 있는 해변은 온통 주황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수평선 위로 거대한 스포트라이트 하나가 모래사장을 밝게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선배와 자신이 10m 정도의 거리를 두고 얼굴을 마주보고 있었다. 오다이바도 아닌, 집 근처의 조그마한 바닷가에서. 너무나도 생소한 풍경이었다.

여기에 있는 것을 어떻게? 아니, 애초에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은 것은 어째서? 당장 묻고 싶은 것들은 산처럼 쌓여있었지만 오히려 입술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것들을 신경쓰기 이전에, 선배를 만나자 순수하게 '기쁘다'고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선배를 잊고 싶다고 생각했던 지난 몇 분 간을 비웃듯이 이제는 시즈쿠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수평선을 등지고 선 채 선배와의 선이 다시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모두 다 잊고, 정말로 동화책 속 주인공이 된 것처럼 선배와 함께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고 싶었다. 바보같고 부끄럽고 어이없는 감정을 그럼에도 도저히 부정할 수 없었다.

이것이 오사카 시즈쿠의 진심이었다면, 시즈쿠는 거짓된 감정으로 만들어진 가면을 쓰고 싶지 않았다. 아직 그 뒤로 두 사람은 한 마디도 더 하지 않았지만 눈빛과 상황을 통해 유우의 생각이 전해져오는 듯했다. 말없이 서있는 유우의 표정은 결연했다. 생각치도 못한 오해가 있었다면 이제부터 차근차근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해서 스스로의 진심 또한 받아들이고, 그 진심을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전하자고ㅡ 시즈쿠는 결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의 목소리가 잘 들릴 만큼 몇 발짝 다가온 유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유우「기다렸지」

시즈쿠「네, 많이요」

유우「뭐하고 있었어, 여기서?」

시즈쿠「...선배 생각이요」

유우「나밖에 모르는 후배한테 너무 미안한 짓을 해버렸네」

유우「약속장소에 가려는 나를 아유무가 붙잡아두려 했었는데, 이젠 해결됐어」

유우「더 궁금한게 많겠지만... 음, 나중에 전부 자세하게 말해줄게」

시즈쿠「지금 다 얘기해주면 안되는 건가요?」

유우「응. 오늘 전하려고 했던 말을, 늦었지만 지금 먼저 해버리고 싶거든」

유우는 숨을 가다듬었다. 마주선 하늘빛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천천히 생각했다. 자신이 이 자리에 서있는 이유. 둘도 없는 소꿉친구를 뒤로 하고, 동경했던 문화제 무대의 연습을 뒤로 하고, 낯선 해변가를 향해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려온 이유.

아유무를 정말 좋아한다. 하지만 소꿉친구로서다. 언제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유무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고 싶은 욕심이 드는 건 시즈쿠쪽이었다. 솔직히 지금껏 느끼지 못했지만, 편지를 주워 읽고 나서 스스로의 반응을 보고 깨닫게 되었다.

보낸 사람의 이름은 없었지만 그 편지가 시즈쿠의 것이라는 것은 내용을 읽어보면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뒤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애정이 흘러넘치는 시즈쿠의 편지를, 부서질 듯 뛰는 심장소리를, 힘이 풀린 채 떨려오는 손가락을 아유무에게 들키지 않는 것 단 하나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유우「아유무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유우「적어도 나에게 아유무는, 그냥 매일 밤 함께 대본 읽기를 하는 소꿉친구일 뿐이야」

유우「그날도 끝나고 대본 읽기 연습하자는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유우「나중에 아유무에게 듣고 알게 된 거긴 하지만 이 부분도 뭔가 오해가 있었던 거 같아서...」

시즈쿠「에...?」

시즈쿠「평범한 대본 읽기 얘기였다니, 분명 저는...」

유우「그때 들었던 내용, 그냥 대본 읽기 얘기라고 생각하고 다시 한 번 떠올려봤으면 좋겠어」

시즈쿠「아...」

시즈쿠「매일 안 빼먹고 했다는건...」

상상이 망상이었다는 것을 알아낸 시즈쿠와 그것을 설명하는 유우, 두 사람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유우「시즈쿠쨩」

유우「오늘 할려고 했던 얘기, 사실 두 가지의 고백이었어」

유우「하나는 방금 말했던 아유무와의 관계에 대한 것」

유우「그리고 하나는...」

유우「...」

유우「아아, 좀 더 멋지게 하고 싶었는데」

시즈쿠「...네?」

시즈쿠는 의아해하며 유우를 올려다본다.

유우「그런데 지금와서는 의미 없어져버렸네」

유우「아끼는 후배의 감정은 커녕, 내 스스로의 감정도 제대로 눈치챌 줄 모르고」

유우「그 후배와의 약속도 안 지키고, 바람맞게 하는 선배를 좋아할리가 없지만」

유우「지금이라도 숨기지 않고 그대로 전할게」

유우「만약 받아들이기 싫다면 차라리 여기서 깨끗이 거절해줬으면 좋겠어」

뒷일은 아직 자세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거절'이라는 단어에서 유우가 전하려는 말이 왠지 모르게 전해져오는 것만 같았다. 촉촉해진 눈동자 너머로는 강한 결단이 보이는 듯 했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한 번 그녀를 시즈쿠에게로 이끌었을 것이다. 시즈쿠의 표정은 차츰 담담해져갔다.

유우「나의 연극에 대한 지식이 이렇게 성장하고, 감각을 일깨울 수 있었던 건 시즈쿠쨩이 내 곁에 있어준 덕분이야」

유우「이미 충분히 고마우니까 더 욕심같은건 부리지 않을게」

유우「시즈쿠쨩, 앞으로는」

유우「나만을 위해 무대에 서지 않아도 돼」

유우「나만을 위해 연기하지 않아도 돼」

유우「나만을 위해 노래하지 않아도 돼」

유우「그래도 나는, 네가 무슨 일을 하든 상관없이, 내 일생이란 연극의 여주인공인 것처럼 오직 너만을 응원할게」

유우「시즈쿠쨩이 난관에 부딪히는 일 따위 애초에 없도록 항상 곁에서 서포트 해줄게」

시즈쿠「...제 편지, 선배가 주워서 읽어버렸군요. 그것만으로도 부끄러운데 그런 식으로 돌려받으니까, 뭐랄까요, 훨씬...」

시즈쿠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 유우는 그런 표정의 변화에 눈을 떼지 않으면서 계속 말을 이어갔다.

유우「그냥 시즈쿠쨩이 떠난 자리에 떨어져 있었단 말이지. 그래도, 미안」

유우「근데 그 편지 덕분에」

유우「어떻게 전해야 될 지, 전해도 받아줄 지 모르겠던 내 마음에 어느정도 확신이 생긴 것 같아」

유우「역시 서로에 대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네, 우리들」

유우「아무튼, 시즈쿠쨩」

유우가 성큼 다가왔다. 이제 손을 뻗으면 서로가 닿을 정도의 거리였다.

유우「그래서 진짜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유우「...」

유우「...」

유우「사랑해」

유우「나의 히로인이 되어줄래?」



끝나지 않는 겨울이 올 거라고 시즈쿠는 생각했다. 더는 바뀌지 않을 마지막 계절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늘이 지나면, 얼어붙기 전 마지막 온기를 토해내듯 전력으로 다음 연극에 몰입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연극부를 박차고 나와버리는 것은 정말 싫었다. 마지막 연극 후에 품는 감정은 뿌듯함보다는 허탈감과 공허함일 것이 뻔했다. 그리고 그 감정들은 지금도 이미 느끼고 있었다. 그것들에 파묻혀 떠밀리듯이 찾아온 곳이 이곳이었다. 유우 선배와 애초부터 만나지 않았더라면, 같은 쓸데없는 만약의 경우를 떠올리며.
유우와 다시 만나고 그녀에게서 나의 히로인이라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분명히 그랬다.

추위에 움츠러든 꽃봉오리처럼 굳어있던 시즈쿠의 얼굴은, 따스한 기쁨의 눈물과 만나 이보다 밝을 수 없을 봄을 알리며 만개했다.

시즈쿠「...네」

어느샌가 마주잡고 있던 손을 통해 푸른 봄은 퍼져나가, 유우의 얼굴에도 새싹같은 미소를 틔워냈다.



~~~~~~~~~~~~~~~~



막이 내리듯 어둠이 깔리고, 태양빛은 수평선 아래로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불 꺼진 무대같은 분위기의 해변가에 놓인 벤치. 시즈쿠와 유우, 둘만의 세계를 이루고 있는 것은 지금 그 벤치 하나가 전부였다.

두 사람은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듯한 느낌에 나른하기도 했고, 또 은은하게 전해져오는 옆 사람의 온기에 포근하기도 했다. 그 미묘한 편안함에 잠겨서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고 그저 깜깜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즈쿠「...그나저나 선배, 궁금한게 좀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요?」

유우「응, 지금이라면 뭐든지 대답해줄 수 있을 것 같아」

시즈쿠「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건가요?」

유우「아... 나카스 씨?랑 우연히 만났는데, 너랑 같이 있는 걸 몇 번 본 것 같아서 부탁했어」

유우「혹시 시즈쿠쨩이랑 친하면 라인으로 좀 물어봐달라고...」

시즈쿠「카스미 씨... 월요일에 만나면 설교가 좀 필요하겠네요」

유우「그, 그때는 방법이 거의 없어서...」

시즈쿠는 유우의 반응을 확인하고 후훗, 하며 웃어보였다. 솔직히 별로 신경쓰이지 않았다. 과정보다는 지금 이렇게 함께 있다는 결과가 더 중요하게 느껴졌다.

시즈쿠「그나저나 아유무 씨랑도 비슷한 연습을 하고 있었군요...」

시즈쿠「생각보다 두 분에 대해 모르는게 많았네요」

유우「뭐 그렇지, 둘을 비교하고 싶진 않지만 아유무 쪽은 그렇게라도 열심히 해야 나머지 부원들을 따라잡을 거 같아서」

유우「...」

유우「으으, 저녁이라 좀 춥네」

유우는 어느새 팔짱을 낀 채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시즈쿠「저는 아직 괜찮긴 한데, 그래도 슬슬 돌아갈까요?」

유우「...아니, 시즈쿠쨩이 괜찮다면 조금만 더 이렇게 있자」

유우「혹시 시즈쿠쨩도 추워지면 말해줘」

시즈쿠「네」



파도소리가 전부인 기나긴 침묵이 흘렀다.

달빛만이 은은하게 해변을 비추는 가운데,

시즈쿠의 얼굴만은 꼭 빛이 나는 것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시즈쿠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유우를 바라보았다.

이미 둘 사이의 거리는 한 뼘 남짓이었고,

유우에게는 한 가지, 확인해보고 싶은 것이 생겼다.

갑작스럽지만, 불그스름하고 도톰한 저 부분의 온도가 너무 궁금했다.

유우는 망설임 없이 다가갔고,

시즈쿠의 얼굴이 조금씩 가까워졌다.

시즈쿠는 살포시 눈을 감았다.

.

밖은 춥지만, 어쨋든, 봄날처럼 따뜻했다.





~~~~~~~~END~~~~~~~~



처음 써본 SS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최자가 주제 셋 다 안 들어가도 된다고는 했는데

쓰고 보니까 나 말고는 다들 잘 넣어놨더라..

장마도 한 번 넣어볼 걸 그랬나 좀 후회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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