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전기에 신호가 들어온다. 응당 응답해야할 토끼가 응답한다.

-여기는 22번 초소. 연락 받았습니다.

--토끼머리가 22번 초소에 연락. 이상 없는지?

-아, 이상 있음. 지금 21번 초소 방향으로 요정 이십여기 이동 중. 수분내 도착 예상입니다.

--확인했다. 추가로 보고할 사항은?

-동료가 제게 너무 걱정이 많다고 합니다.

--무엇이 걱정이지?

-무엇이 걱정인지 모르겠는데 동료가 제가 걱정이 많아서 죽을지도 모른다고 걱정입니다.

--동료는 왜 그런 걱정을 하지?

-제가 토끼머리의 목소리가 많이 익숙하다고 하니 걱정합니다.

--익숙한 게 당연하다. 지금까지 계속 토끼머리에서 22번 초소와 연락했다.

-앞으로도 계속 합니까?

--당연하다.

-혹시 토끼머리는 제 목소리가 익숙합니까?

--당연하다. 계속 22번 초소에 연락했으니까. 또 보고할 건?

-요정 이십여기 여전히 21번 초소 방향으로 이동 중. 23번 초소 방향은 보이지 않아서 확인 불가합니다.

--당연하다. 22번 초소에서는 23번 초소가 보이지 않으니까.

-아, 제가 왜 걱정이 많은지 알 것 같습니다. 21번 초소 방향은 관측할 수 있지만 23번 초소 방향은 불가합니다.

--당연하다. 22번 초소는 21번 초소만 관측할 수 있다.

-그럼 23번 초소 방향에서 요정들이 22번 초소로 오면 어떡합니까?

--걱정없다. 23번 초소는 22번 초소 방향을 관측할 수 있으니까.

-그럼 22번 초소가 21번 초소로 가는 요정을 관측했으니, 23번 초소는 22번 초소로 가는 요정을 관측 가능하군요?

--그렇다.

-그럼 23번 초소는 24번 초소 방향을 관측 가능합니까?

--불가하다.

-그럼 24번 초소 방향에서 요정이 23번 초소로 오면 관측할 수 없고, 23번 초소 방향에서 요정이 22번 초소로 오면 관측할 수 없군요?

--그렇지 않다. 24번 초소가 23번 초소 방향을 관측할 수 있다.

-알겠습니다. 그럼 24번 초소는 25번 초소 방향을..

--26번 초소가 25번 초소 방향을 관측 가능하다. 추가로 보고할 게 있는가?

-알겠습니다. 요정의 이동방향 변경 없습니다. 이상.

--토끼머리가 22번 초소에게. 연락 끝.

무전기에 신호가 들어온다. 응당 응답해야 할 토끼가 응답한다.

-여기는 21번 초소, 연락받았습니다.

--토끼머리가 21번 초소에 연락. 이상 없는지?

-아, 이상 없음. 달의 도시로 가는 방향에 요정은 보이지 않습니다.

--확인했다. 추가로 보고할 사항은?

-동료가 제게 너무 걱정이 많다고 합니다.

--무엇이 걱정이지?

-22번 초소 방향을 관측할 수 없어서 걱정입니다.

--당연하다. 21번 초소는 달의 도시로 가는 방향만 관측할 수 있으니까.

-그럼 22번 초소 방향에서 요정들이 21번 초소로 오면 어떡합니까?

--걱정없다. 22번 초소는 21번 초소 방향을 관측할 수 있다.

-그럼 22번 초소는 21번 초소 방향으로 요정이 향하면 관측할 수 있군요?

--그렇다.

-알겠습니다. 토끼머리의 목소리가 익숙합니다.

--익숙한 게 당연하다. 지금까지 계속 토끼머리에서 21번 초소와 연락했다.

-앞으로도 계속합니까?

--당연하다.

-혹시 토끼머리는 제 목소리가 익숙합니까?

--당연하다. 계속 21번 초소에 연락했으니까. 또 보고할 건?

-제가 22번 초소 방향에서 요정들이 올까봐 걱정이 많다고 동료가 걱정입니다.

--22번 초소는 요정을 관측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요정은 여전히 보이지 않습니다. 이상.

--토끼머리가 21번 초소에게 연락 끝.

무전기에 신호가 들어오지 않고 응답해야 할 토끼도 없다. 그리고 이미 응답한 토끼는 잔소리를 듣는다.

"링고는 걱정이 많아서 탈이야. 걱정만 하다가 죽겠어. 나처럼 위험한 일을 하지도 않으면서 뭐가 그리 걱정이야?'

링고는 무전기에 팔을 걸치고, 경단을 하나 우물거리면서 속으로 대답한다. 정말 걱정만 하다 죽게 생겼네.

그런 링고의 생각을 짐작도 못하고 23번 초소의 책임자인 세이렌은 태평한 투정을 계속했다.

"아까 토끼머리와 연락했는데 무전기는 왜 계속 붙잡고 있어? 게다가 그 무전기는 원래 이 초소 것도 아니잖아?"

맞다. 링고는 원래 23번 초소 소속도 아니다. 22번, 21번 초소는 더더욱 아니다.

그냥 동료인 세이렌이 있는 23번 초소에 멋대로 찾아온 불청객이고,

그저 첩보용 무전기로 21번과 22번 초소의 연락을 대신 응답했을 뿐.

토끼머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도 익숙하다.

링고에겐 22번 초소와 21번 초소에 연락한 목소리가 익숙하다.

21번 초소는 달의 도시 방향만 관측할 수 있고, 22번 초소 방향은 관측할 수 없다.

초소들은 요정들의 공격을 버틸 재간따윈 없다.

21번 초소가 무너지면 달의 도시를 관측할 수도 없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걸까?

하지만 링고에겐 아무래도 상관이 있다. 이제 링고는 알아버렸다.

토끼머리는 토끼 초소에서 누가 응답하건 상관하지 않는다.

23번 초소는 24번 초소 방향을 관측할 수 없지만 상관하지 않는다.

23번 초소로 요정들이 24번 초소 방향에서 와도 상관하지 않는다.

달의 도시조차 무너져도 상관 없다.

이런 걸 알아버린 토끼는 상관 있을 테다.

어차피 이 초소에 남아 있어도 요정이 오면 상관 없는 일이 되나?

이대로는 걱정만 하다 죽을 테지.

링고는 무전기의 발신장치를 툭툭 건드린다. 저 건너편에서 23번 초소의 무전기에 신호가 들어온다.

"세이렌, 네 무전기 신호 들어온다."

링고의 지적에 세이렌이 화들짝 놀라 무전기로 달려든다.

무전기에 신호가 들어온다. 응당 응답해야할 토끼가 응답한다.

-여기는 23번 초소. 연락 받았습니다.

--토끼머리가 23번 초소에 연락. 이상 없는지?

-아까처럼 이상 없습니다! 22번 초소 방향으로 요정 관측되지 않습니다!

--23번 초소는 이 목소리가 익숙한가?

-네? 토끼머리 아닙니까? 익숙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습니다.

--맞다. 새 명령이다. 초소에 있는 모두가 이동한다. 지금 바로.

-어디로 이동합니까?

--지상으로.

-확인했습니다. 지금 바로 초소에 있는 모두와 지상으로 이동합니다!

--걱정은 하지 않나?

-왜 걱정합니까?

--22번 초소는... 아니다. 토끼머리가 23번 초소에게 연락 끝.

세이란은 무전이 끝나자 고개를 갸우뚱 거린다. 링고는 무전기에 여전히 몸을 기댄 채로 묻는다.

"무슨 연락인데 그래?"

"지금 바로 지상으로 이동하래. 지금 초소에 있는 모두."

링고는 그 대답에 살짝 놀란 듯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지금 초소에 있는 모두면 나돈가. 지상이라. 걱정되는 걸."

"어휴, 링고는 걱정만 하다 죽을 거야. 걱정할 게 뭐가 있겠어?"

링고는 세이란의 말에 남몰래 동의했다. 맞아, 나는 걱정만 하다 죽을지도.

그러니 걱정만 하다 죽을 순 없지.

링고처럼 걱정 많은 토끼가 있어야, 23번 초소도 살 길이 있는 법이다.

세이란처럼 걱정 없는 토끼도 있어야, 링고도 살 수 있는 법이다.

22번 초소와 21번 초소까지 걱정하기엔, 링고는 걱정이 너무 많고 세이렌은 걱정이 너무 없다.

링고는 그렇게 생각하며 짐을 간단히 꾸리기 시작했다.

캐치22 느낌의 팬픽 써보고 싶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