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란히 잠든 그들에게 원정의 마지막 날이 희미한 빛으로 찾아들었다. 전날부터 방향이 바뀌며 잦아들던 서풍이 이제 다시 북풍으로 바뀌어 일기 시작했다. 호비트들이 누워 있는 어둠속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태양빛이 서서히 스며들었다.
"자, 최후의 그날이야!"
샘은 이렇게 소리지르며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프로도에게 몸을 숙여 가만히 일으키자 그는 신음소리를 냈다. 프로도는 온 힘을 다해 비틀거리며 일어섰지만 다시 무릎을꿇으며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는 간신히 두 눈을 뜨며 높이 솟아오른 운명의 산 검은 경사면을 쳐다보고 측은하게도 두 손으로 기기 시작했다.
이를 본 샘은 가슴 속에서 눈물이 솟아날 지경이었지만 말라 버린 그의 두 눈에서는 아무것도 흘러내리지 않았다. 샘은 중얼거렸다.
"내 등이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프로도씨를 모시고 가겠다고 했어, 난. 꼭 그렇게 할 거야."
샘은 외쳤다.
"프로도씨! 제가 대신 그 반지를 가지고 갈 수는 없어요. 하지만 프로도씨와 반지를 함께 메고 가면 돼요. 일어나세요! 자, 프로도씨. 제 등에 업히세요. 어디로 가야 하는지만 일러 주세요."
프로도가 업히자 두 팔은 목 둘레로 축 늘어졌고 다리는 그의 팔 밑에 착 달라붙었다.그 순간 샘은 비틀거렸다. 그러나 무게는 가볍게 느껴졌다. 사실 샘은 자신이 프로도만이라도 업을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그러면서 그러한 걱정 이상으로 그 저주받은 반지의 엄청난 무게를 자신이 분담할 수 있기를 바랐었다. 그러나 그런 걱정과는 달리 예상 밖의 무게였다. 프로도가 칼의 상처와 통증뿐 아니라 슬픔과 공포로 가득한 객지의 오랜 방황으로 인해 몸무게가 다 빠져 나간 것인지, 아니면 샘 자신에게 마지막 원기라도 솟아서 그런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어쩄든 샘은 고향땅 샤이어의 풀밭에서어린 호비트를 등에 업고 장난을 치고 뛰놀 때처럼 어렵지 않게 프로도를 업을 수 있었다. 샘은 심호흡을 한번 하고 출발했다.
북쪽 산기슭에 도착했다. 약간 서쪽으로 자리잡은 그곳은 잿빛 긴 비탈을 이루고 있으며 더러 끊기긴 했지만 그리 가파르진 않았다. 프로도는 아무 말도 없었다. 샘은 기력이 다하고 의지마저 꺾여 버리기 전에 어서 빨리 높이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만 가진 채 있는 힘을 다해 걸어 올라갔다. 경사가 심한 곳을 피해서 이리저리 돌아가기도 하고 가끔씩 비틀대기도 하면서 쉬지 않고 올랐다. 그러다 마침내 그는 등에 업은 무거운 짐을 이기지 못해 뱀처럼 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팔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더이상 갈 수 없게 되자 업고 있던 프로도를 가만히 내려 놓았다.
프로도는 눈을 뜨고 숨을 내쉬었다. 산 아래쪽에 퍼져 있던 독한 연기를 벗어나게 되자 숨쉬기가 훨씬 쉬워졌던 것이다. 쉰 목소리로 프로도는 말했다.
"고마워, 샘. 얼마나 더 가야 하지?"
"모르겠어요. 우리가 어디로 가는 건지 전 모르니까요."
샘은 뒤를 돌아보고 나서 다시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노력으로 상당히 높이 올라온 것을 알고 놀랐다. 불길하게 우뚝 솟은 운명의 산은 산 아래서 보았을 때 훨씬높아 보였는데 여기까지 와서 보니 프로도와 함께 올랐던 에펠 듀아스의 고개보다는 낮은 듯했다. 거대한 산기슭의 헝클어진 지맥은 평지에서 약 천 미터 정도 솟아 있었으며 그 위로는 중앙에 다시 그 절반 정도의 높이로 화산추가 솟아 있어 마치 꼭대기에 톱니 모양의 분화구로 덮개를 한 거대한 가마나 굴뚝 같아 보였다. 그들은 이미 산아래로부터 절반 이상을 올라온 것이었다. 저 아래 고르고로스 평원은 연기와 어둠에싸여 거의 보이지 않았다.
위를 올려다보았을 때 목구멍이 다 말라 버렸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탄성이 나올 뻔했다. 서쪽으로부터 허리띠처럼 생긴 길이 뱀처럼 산을 감싸고 올라 이쪽에서 보이는 길의 끝부분은 마침 동쪽 화산추 발치에 닿고 있었다.샘은 현재 위치에서 그 길의 진입로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곳에서 비탈의 경사가 심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올라가면 그 길로 들어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을 정복할 수 있으리라는 가느다란 희망이 다시 솟았다. 샘은 중얼거렸다.
"그래, 길이 있는 것도 무슨 이유가 있어서겠지. 만일 저 길이 없었다면 나도 끝장이 난 거지 뭐."
그 길은 샘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은 물론 아니었다. 하지만 샘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바랏 두르에서 사마스 나우르 즉 불의 방까지 이어진 사우론의 길이었던 것이다. 암흑의 탑 서문으로부터 시작된 그 길은 깊은 계곡 위에 거대한 다리를 놓아 이어져서는 평원을 가로질러 연기를 피우는 두 개의 협곡 사이를 지나 드디어 운명의 산 동쪽의 긴 비탈길과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감아돌며 오르는 그 길은 화산추까지 이르는데 그곳에서 연기를 피우는 정상까지는 여전히 멀리 떨어지긴 했지만, 암흑에 둘러싸인 사우론의 요새의 눈의 창이 정면으로 보이는어두운 입구였던 것이다. 화산폭발로 인해 길은 종종 막히기도 하고 파괴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수많은 오르크가 동원되어 복구되었다.
샘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길은 보이는데 어느 방향으로 올라가야 할지 몰랐다. 우선 쑤시는 등을 풀어야만 했다. 그는 프로도 곁에 잠시 드러누웠다. 둘 다 아무 말이 없었다. 서서히 빛이 밝아왔다. 갑자기 샘은 알 수 없는 긴박감을 느꼈다. 누군가 '지금이다! 지금 하지 않으면 늦는다!' 하고 소리치는 것만 같았다. 샘은 온몸에 불끈 힘을 주며 일어섰다. 프로도 역시 그런 외침을 들은 듯 무릎을 대고 일어서려고 했다. 그는 숨찬 소리로 말했다.
"기어서 가겠어, 샘."
그들은 한발 한발 마치 작은 회색 곤충처럼 기어서 비탈을 올라갔다. 마침내 그들은 길을 찾았다. 깨진 돌조각과 재로 다져진 길은 넓었다. 프로도는 기어서 그 길까지 올라가서는 마치 어떤 강제적인 힘에 의해 동쪽을 향해 몸이 돌려지는 것처럼 천천히 움직였다. 저 멀리 사우론의 암흑이 드리워져 있었다. 암흑의 세계로부터 일어난 돌풍 탓인지, 아니면 내부의 엄청난 소동으로 말미암아 동요하는 것인지, 주위를 에워싼 구름이 소용돌이를 치다가 잠시 흩어졌다. 바로 그 때 사방의 어둠보다 더 시커멓게 윤곽을 드러낸 바랏 두르의 첨탑들과 가장 높이 솟은 탑침이 보였다. 한순간 그저 응시하기만 하던 빨간 눈의 불길은,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곳에 있는 커다란 창문에서 솟아나오는 듯 북쪽을 향해 찌를 듯 쏘아보았다. 곧이어 다시금 어둠이 뒤덮여 무시무시한 환영은 사라졌다. 암흑의 눈이 샘과 프로도에게 미처 주의를 돌릴 겨를도 없이 서부의 지휘관들이 북쪽 평원에서 시선을 끌었던 것이다. 암흑의 힘이 무시무시한 공격을 가하기 위해 이동했기에 악의에 찬 그 눈길에 얻어맞기라도 한 듯 쓰러졌다. 그는 손으로 목 언저리를 더듬어 줄을 찾았다.
샘은 무릎을 굽혀 그 곁에 앉았다. 프로도는 거의 들릴락말락하게 말했다.
"도와 줘, 샘! 도와 줘, 샘! 내 손을 잡아 줘! 막을 수가 없어."
샘은 프로도의 두 손을 손바닥이 맞붙게 모아 쥐며 입을 맞추고나서 자신의 손에 감싸쥐었다. 그 때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샘은 중얼거렸다.
"그가 우릴 발견했어! 모든 게 끝장이야. 아니 곧 끝장나겠지. 이봐, 샘 갬기, 이젠 정말 끝 중에서도 끝인 모양이야."
샘은 프로도를 다시 업고 그의 손을 자기 가슴 쪽에 끌어당겼다. 그러자 프로도의 두 다리는 허공에 매달린 상태가 되었다. 샘은 고개를 숙이고 전력을 다해 오르막길을 올랐다. 길은 보기보다 쉽지 않았다. 다행스러운 것은 키리스 운골에서 본 것처럼 화산폭발로 인해 주로 남쪽과 서쪽 비탈이 용암으로 뒤덮였을 뿐 이쪽 길은 막히지 않고 제대로 뚫려 있는 점이었다. 하지만 곳곳에서 길의 흔적을 찾기 힘들거나 가로로 갈라진 틈이 있었다. 얼마간 동쪽을 향하던 길은 갑자기 예리한 각도로 꺾여 잠시 서쪽을 향했다. 꺾인 부분의 길은 오래전 이 산의 분화구에서 토해진 후 오랜 세월 동안 풍우에 시달린 바위산을 깊이 깎아 만든 것이었다. 그 길을 돌 때 샘은 고통을 느꼈다. 그리고 온전하게 시야에 들어오진 않았지만 작고 검은 돌조각 같은 검은 형체가 바위에서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무거운 물체가 그에게 달려들어 그는 앞으로 넘어졌다. 프로도의 손을 꼭 쥐고있던 샘의 손등이 찢겼다. 머리 위에서 증오에 가득찬 소리가 울렸다.
"나쁜 주인! 우릴 속였어! 스메아골, 골룸을 속이다니. 그 길로 가면 안 돼! 그 보물에 해를 입히면 안 돼! 스메아골한테 내놔! 우리에게 줘! 내놓으란 말야!"
간신히 몸을 일으킨 샘은 즉시 칼을 뽑았다. 그러나 그 이상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가없었다. 골룸과 프로도가 한데 엉겨붙어 있었다. 골룸은 프로도를 마구 할퀴며 반지와 줄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완력으로 보물을 빼앗아 가려는 이러한 공격이 프로도 내부에서 꺼져 가고 있던 불씨에 불을 붙인 게 틀림없었다. 그는 격노해 맞싸웠다. 골룸은 물론이고 샘조차 놀랄 정도였다. 골룸이 전과 다르게 변하지 않았다면싸움의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골룸은 간절한 희망과 무서운 공포에 이끌려, 갈증과 배고픔, 그리고 고독에 시달리면서 걸어온 험난한 길 때문에 가혹한 변화를 감수해야만 한 것이었다. 그는 뼈와 가죽만 남은 형편없는 말라깽이가 되어 있었다. 그의 두 눈에서는 분노의 불길이 타올랐다. 그러나 그에게 남은 힘은 적을 향한 적의에 따르지 못했다. 프로도는 그를 내동댕이치고나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떨어져라! 떨어져!"
프로도는 가슴팍으로 손을 가져가 가죽웃옷 아래 있는 반지를 움켜쥐고 외쳤다.
"떨어져라! 이 비열한 놈! 썩 꺼져버려! 이젠 네놈도 끝장이야. 네놈이 날 속이거나 죽일 순 없어, 이젠!"
바로 그 때 샘은 에민 뮐의 그림자 아래로 이들 두 적수가 환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한 형체는 몸을 웅크리고 있었고 생명체의 그림자와 같이 보였으며, 완전히 패배하긴 했지만 여전히 사악한 욕망과 분노로 가득차 있었다. 그 앞에 흰 옷을 입은 형체는 동정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엄격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며 가슴에 불의 바퀴를 쥐고 있었다. 그 불 속으로부터 명령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썩 꺼져라! 날 더 이상 괴롭히지 마라! 다시 날 건드린다면 넌 운명의 불길 속에 던져질 거다!"
그러자 웅크리고 있던 형체는 깜박이는 두 눈에 공포와 채울 수 없는 욕망을 동시에 가득 담고 뒤로 물러나 사라졌다.
환영이 사라지자 프로도가 다시 보였다. 손을 가슴에 얹은 채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으며 그 발치에는 골룸이 무릎을 꿇고 양 손바닥을 땅바닥에 대고 있었다.
"조심해요! 덤벼들지도 몰라요."
샘이 소리치고 칼을 휘두르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는 다시 외쳤다.
"빨리요, 프로도씨! 가세요! 가세요! 시간이 없어요. 이놈은 제가 맡을 테니 어서 가세요!"
프로도는 마치 멀찍이 선 사람을 바라보듯 하며 말했다.
"그래, 가야겠어, 샘. 안녕! 이젠 정말 끝이야. 이 운명의 산에 종말이 다가오고 있어. 안녕!"
프로도는 돌아서서 느린 걸음이지만 몸을 꼿꼿하게 세우고 오르막길을 따라 올라갔다.
"자, 드디어 네놈을 처치할 수 있게 됐다!"
샘은 소리치며 칼을 뽑아 싸울 준비를 하고 앞으로 껑충 뛰어올랐다. 그러나 골룸은 덤벼들지 않았다. 골룸은 바닥에 픽 쓰러지며 우는 소리로 말했다.
"우릴 죽이지 말아. 비정한 칼로 우릴 베어선 안 돼. 제발 살려 줘. 잠시만 더 살아있게 해줘. 항복이야. 우리가 졌어. 보물이 파괴되면 우리도 죽고 말아. 같이 재로 변하고 말아."
그는 앙상한 긴 손가락으로 길 위의 재를 움켜쥐며 말했다.
"재!"
샘의 손이 마구 떨렸다. 그의 머리 속은 험악한 기억과 분노로 끓어올랐다. 수천 번 죽여 마땅한 이 반역의 살인마를 죽이는 것이 천만 옳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망설이게 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었다. 완전히 패배해 비참하게 호롤 이 잿더미에 쓰러져 있는 놈을 향해 칼을 휘두를 수가 없었다. 잠시이긴 했지만 절대반지를갖고 있던 골룸이 아닌가. 그 절대반지에 예속된 운명으로서 다시금 살아 평화와 안락을 찾을 수 없게 된 골룸의 영혼의 고뇌를 샘은 희미하게나마 짐작해 보았다. 하지만 샘은 자신의 느낌을 표현할 적절한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에이, 저주받은 놈! 구린내나는 놈! 썩 꺼져 버려! 난 네놈을 발로 차버릴 수 있을 때가 아니면 널 믿지 않아. 꺼지지 않으면 이 비정한 칼로 네놈을 베겠어."
골룸은 사지를 뻗치며 일어나 몇 발짝 뒷걸음질을 쳤다. 샘이 발길질을 하려 하자 그는 길 아래로 뛰어 달아났다. 샘은 그에게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갑자기 프로도가 궁금해져 위쪽을 쳐다보았지만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샘은 걸음을 재촉해 길을 따라 올라갔다. 만일 뒤를 돌아보았더라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골룸이 다시 돌아서뒤따라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골룸은 두 눈에서 광기를 발하며 잽싸게그러면서도 아주 신중하게 바위틈에 몸을 숨기며 뒤따라 기어오르고 있었다.길은 계속 위로 향하다가 다시 꺾어졌다. 화산추 바깥면을 따라 절단된 부분으로 이어지는 길은 동쪽으로 향하는 마지막 길로서 이 산 측면에 자리한 검은 문에 닿아 있었다. 그 문은 바로 사마스 나우르의 문이었다. 저 멀리서 남쪽으로 향해 연기와 안개를가르며 떠오르고 있는 태양은 침침한 붉은색 원판 모양으로 불길하게 타올랐다. 그러나 산을 에워싼 저 아래 모르도르의 평원은 마치 죽은 대지처럼 어떤 무시무시한 일이일어나기를 기다리는 양 어둠에 잠겨 괴괴했다.
샘은 떡 벌어진 통로 입구에 이르러 안을 들여다보았다. 내부는 칠흙같이 어둡고 열기로 가득했으며 요란한 소리로 뒤흔들리고 있었다.
"프도로씨! 프로도씨!"
그러나 응답이 없었다. 잠시 서 있는 동안 공포로 인해 심장이 고동쳤다. 샘은 안으로들어섰다. 검은 물체가 그 뒤를 따랐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갈라드리엘의 유리병을 꺼내 보았지만 떨리는 손 안에서 차갑고 창백한 빛만 지닌 채 이 숨막힐 듯한 어둠을 밝히지는 못했다. 그가 서 있는 이곳은 바로 사우론의 영토에서도 그 심장부에 해당하는 곳으로 옛날 사우론이 중간계에서 최고의 세력을 떨쳤을 때 그 힘의 용광로였던 곳이다. 그래서 다른 어떤 힘도 여기서는 기세를 펴지 못하는 것이었다.
어둠 속에서 샘은 몇 발짝더듬거리며 움직였다. 그런데 갑자기 한 줄기의 붉은 섬광이 위를 향히 획을 그으며 높은 지붕을 강타했다. 그 순간 샘은 여기가 산의 화산추 속으로 뚫린 긴 터널 내지는동굴 속이라는 것을 알았다.
바로 눈 앞에서 바닥과 양 측면 벽이 커다랗게 갈라져 있었는데 바로 그 틈에서 붉은 빛이 비쳐 나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저 아래로부터 마치 쉬지 않고 돌아가는 기계소리 같은 요란한 굉음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또다시 빛이 솟아올랐다. 그 순간 그 운명의 틈 가장자리에 서 있는 프로도가 눈에 들어왔다. 빛으로 형체는 거무스름하게 보였지만 그는 마치 돌로 변하기라도 한 듯 꼼작도 않고 똑바로 서 있었다. 샘이 외쳤다.
"프로도씨!"
그러자 프로도는 몸을 움직이여 또렷한 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여태껏 샘이 들어 본 중에서도 가장 또렷하고 힘찬 것으로 운명의 산에서 터져 나오는 굉음을 압도하며 지붕에, 벽에 울려퍼졌다.
"마침내 여기까지 왔지만 난 그 일을 할 수가 없어. 아니, 하지 않겠어. 이 반지는 내것이야!"
그렇게 외치면서 반지를 손가락에 끼는 순간 프로도는 샘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샘은 입을 딱 벌렸다. 하지만 소리칠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많은 일이 벌어졌다. 등 뒤에서 무언가가 세게 강타하는 바람에 샘은 머리를 바닥에 부딪히고 나뒹굴었다. 검은 물체가 그를 덮친 것이었다. 샘은 꼼짝도 못했으며 잠시 사방은 어둠에 잠겼다.
프로도가 절대반지를 자기소유라 주장하며 손에 끼는 순간 바랏 두르의 거대한 힘이 뒤흔들리며 탑의 밑바닥으로부터 꼭대기에 이르기까지 진동을 했다. 비로소 암흑의 군주가 그를 알아차리고 어둠을 꿰뚫을 수 있는 눈을 돌려 대평원으로부터 이곳 문을 주시했다. 비로소 사우론은 자신의 엄청난 실수를 깨달았다. 적의 책략이 이제서야 환하게 드러나 보였다. 그러자 분노가 이글이글 타올랐고, 한편으로는 그를 에워싼 검은 연기처럼 두려움이 솟아올랐다. 그는 지금 마지막 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그의 정신은 온갖 술수와 음모의 그물로부터, 온갖 책략과 전쟁으로부터 멀어졌으며 그의 영토 전체가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다. 그의 옷자락이 떨렸고 군대도 활동을 중단했다. 갑자기 조종대를 잃은 그의 부하들이 풀이 죽어 동요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존재가 두목의 관심 밖으로 내던져졌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장악하고 있던 힘이 이제 운명의 산에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그의 소환에 따라 반지의 악령, 나즈굴들이 마지막 힘을 다해 바람보다 더 빨리 질풍을 일으키며 운명의 산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샘은 일어셨다. 현기증이 났으며 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려 두 눈으로 들어왔다. 앞을 보자 이상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벼랑 끝에서 골룸이 미친 듯 뭔가와 싸우고 있었다. 이리저리 몸을 내던지며 벼랑 끝에서 떨어질 뻔하다가 뒤로 물러서고, 바닥에 쓰러지면 다시 일어나고 또 넘어지고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줄곧 씩씩거리기만 할 뿐 말은 없었다.
아래쪽에서 불길이 타올라 붉은빛이 환하게 뿌려졌다. 동굴 전체가 불빛과 열기로 가득했다. 그 순간 갑자기 골룸이 긴 손을 자기 입 근처로 가져가는 것이 보였다. 하얀 어금니가 번득이는가 하더니 무엇인가를 물어 뜯었다. 그러자 프로도의 울부짖음이 들렸다.
프로도가 벼랑 끝에 쓰러진 모습이 보였다. 골룸은 미친 듯 춤을 추며 반지를 치켜들었다. 잘라진 손가락 하나가 반지에 끼워져 있었다. 반지는 살아 있는 불같이 빛을 발했다.
"보물! 보물! 보물! 내 보물! 아, 내 보물!"
골룸이 외쳐 댔다.
그러나 그는 반지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벼랑 끝에 걸려 잠시 버둥대가다 결국 비명을 지르며 떨어져 버렸다.
심연 깊숙한 곳으로부터 '보물!'하는 그의 마지막 외침이 울려 왔고 이제 그는 영원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엄청난 굉음이 사방에서 터져나왔다. 불길이 솟아 지붕을 뚫고 올라갔다. 쿵쿵 소리는이제 거대한 폭음으로 변했고 산 전체가 요동을 쳤다. 샘은 프로도에게 달려가 그를 문 밖으로 끌어 냈다. 모르도르평원 위 사마스 나우르의 문턱에서 샘은 놀라움과 공포로 인해 석상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구름 사이로 드높은 권세를 자랑하며 쌓아 올린 산만큼이나 높이 솟은 탑들과 흉벽들이, 거대한 궁정뜰과 지하토굴, 절벽처럼 깎아지른 창없는 감방들, 그리고 강철과 금강석으로 만들어진 문들이 보이는가 하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성벽도 산산조각이 나 흔적도 없이 허물어졌으며 증기를 뿜으며 피어오르는 거대한 연기의 탑들이 위로 위로 솟아오르다가 마침내는 위압적인 파도처럼 쓰러지고 정수리가 물결치다가 거품을 일으키며 땅 위로 퍼져 갔다.
그때 멀리서 우르르 하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고막을 찢는 듯한 굉음으로 변했다.
땅이 진동을 하며 갈라지고 융기하자 오로드루인산 전체가 얼레에 감긴 연처럼 들어올려졌다. 꼭대기로부터 불이 토해졌다.
하늘에는 번개가 번쩍였고 천둥이 요란했다. 후려치는 채찍마냥 검은 빗줄기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폭풍의 중심부를 뚫고 구름을 가르며 온갖 다른 소리들을 무색게 하는 굉장한 울부짖음과 함께 나즈굴이 나타났다. 번개처럼 빠른 속도로 날아오던 반지악령들은 곳곳에 나뒹구는폐허와 충돌하여 조각조각 흩어져 버렸다.
"자, 이것으로 끝이 난 거야, 샘 갬기."
옆에서 소리가 들렸다. 프로도는 지칠 대로 지쳐서 창백하기까지 했지만 긴장감도, 광기도, 두려움도 모두 사라지고 이제 그의 두 눈에는 평화가 깃들여 있었다. 무거운 짐도 이제 사라져 버렸다. 그는 고향 샤이어에서 즐겁게 지내던 때의 다정한 프로도로 돌아와 있었다.
"프로도씨!"
샘은 소리치며 무릎을 꿇었다. 천지가 파멸 속에 빠진 바로 그 순간 샘은 환희를, 엄청난 환희를 맛보았다. 짐이 사라졌다. 프로도씨도 구출되었고 다시 자유로운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 순간 피를 흘리는 그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가엾은 손! 동여맬 것도 없고, 약도 없어요. 차라리 그놈한테 내 손가락을 주는 건데. 하지만 그놈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영원히 가고 말았어요."
"그래. 하지만 자넨 갠달프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어?
골룸이 할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던 말 말이야, 샘.
그가 없었다면 난 그 반지를 파괴하지 못했을 거야.
최후의 순간까지 와서 우리의 원정이 수포로 돌아갈 뻔했어.
그러니 그를 용서하기로 하지.
원정은 성공했고 이제 모든 것이 끝났으니까 말이야.
자네가 지금 나와 같이 여기 있어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
샘. 모든 것이 다 끝난 이 순간에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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