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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썰] 서로마 제국은 어떻게 멸망했을까? (중) - 서로마의 망탁조의

ㅇㅇ(210.204) 2021.02.05 12:37:16
조회 1213 추천 13 댓글 5
														

원래 상 하로 쓰려고 했는데 자세히 흐름을 잡기 좋게 쓰려다 보니

글이 예상보다 좀 더 길어질 것 같아서 상중하로 나누게 되었다.

일단 여기에서는 로마 약탈 이후 서로마 제국의 기묘한 정치 투쟁이 주가 될 것이다.

멸망 당시와 그 전후 사정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쓰게 될 것 같다.

반응이 좋으니 다행이지만, 이번 글은 반응이 그닥일 것 같다.


이번 글은 내가 봐도 일단 너무 길다.

하지만 리키메르라는 한 인간의 일생을 한 맥락 안에 보기 위해서는

길더라도 글 하나에 다 쓰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내부 투쟁이 주가 되기 때문에 다소 지루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아비투스 치세를 다루는 초반이 좀 지루할 것인데

왜냐하면 이후 펼쳐질 상황에 대한 이해를 먼저 시키고 나서

이후에 벌어지는 그래도 다소 흥미진진한 상황이 이해가 가기 때문에

필요한 부분이라 안 짚고 넘어갈 수가 없어서 그렇다.

하지만 그 부분만 넘기고 이후의 상황을 접하면

아 이렇게 서로마가 부활의 기회를 날려먹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아래 링크는 이 글의 상편, 아에티우스의 일생이다

.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ttwar&no=905235


미리 말해두지만, 이번 글은 진짜 길다.

그러니 댓글에 글 길이 가지고 운운하지 말기를 바란다

사실 원래 이 글도 둘로 나누는 게 나았을 거 같긴 하지만

디씨에다가 걍 갈기는 글인데 뭐... 알아서들 씹고 뜯고 맛보고 즐겨라


---------------------------


지난 번에는 가이세리크의 로마 약탈까지 다루었지.

로마가 약탈당하고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까지 죽고 나니까

이게 서로마 제국에는 또 권력 공백이 발생한 것이었음.

지난 번처럼 또 황제 지망생들이 설치고 있었고

군대의 지지를 얻기 위해 난리 부르스를 추는 동안에

아에티우스가 기껏 재건해놓은 갈리아-히스파니아 속주는

아에티우스가 죽은 뒤로 다시 돌아온 게르만 왕국들에게 개작살이 나기 시작했다.

이 몇 년 사이에 가장 많이 비약한 것은 의외로 수에비 왕국이었다.

수에비 왕국은 갈라이키아(Gallaecia, 현재 에스파냐 북서부)에 정착했는데

서로마 제국의 봉신임은 대체로 인정했다.

440년부터 448년까지 수에비 왕국이 타라코넨시스를 제외한

히스파니아를 거의 통일했었는데, 서고트족이 주가 된

서로마 제국군의 반격까지 막아낼 정도였다.

그래도 수에비 왕국이 공공연히 로마의 봉신임을 부정하진 않아서

그냥 그렇게 애매한 상태로 있다가 아에티우스의 죽음이 왔던 것이다.

아에티우스가 원래 죽기 직전에 노리던 게 바로 이 히스파니아 탈환이었다.


당시 서고트족은 한바탕 내분을 겪고 난 뒤로

테오도리쿠스 1세의 아들이었던 테오도리쿠스 2세가 즉위한 상황이었는데

(왜 계속 서고트'족'이라 표기하는지는 서고트 '왕국'의 성립이

나중에 서로마 제국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라서 그렇다.)

이 테오도리쿠스 2세의 숙원은 바로 히스파니아 진입이었다.

그 때문에 같은 서로마의 봉신이었어도 수에비와 서고트는 늘 사이가 안 좋았다.

이 상황에서 가이세리크에 의한 로마 약탈이 발생한다.

이 때 테오도리쿠스 2세에게 우호관계를 재확인하는 특사로 파견돼 있었던 사람이

지난 날 아에티우스 휘하에서 외교관이자 부관으로 활약했던 아비투스라는 사람이었다.

풀네임은 에파르키우스 아비투스였다.

출생년은 불명이나 자신이 보좌했던 아에티우스와 동년배거나 오히려 몇 살 많았다.

갈리아계 로마인 원로원 의원으로서 인품이 온후해서 덕망 높은 인물이었다.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는 서고트 족의 협조 하에 갈리아를 보전하려 했기 때문에

진작부터 갈리아에서 서고트 족과 원만한 관계를 맺어 온 아비투스를 보낸 것이었다.

테오도리쿠스 2세는 이제 겨우 내분에서 빠져나와 영역 확대를 노리고 있었는데,

그 적대 대상인 수에비 왕국과의 전쟁에 서로마 제국의 지원이 필요했던 상황이었고.


아비투스 개인은 단순히 로마에 평생 충성해온 사람으로서

제위에 오르고 권력 투쟁에 참여할 생각 자체가 별로 없었던 것 같지만

(아마 그로서는 서고트족과 프랑크족의 지원을 통한 갈리아의 안정이면 족했던 것 같다)

테오도리쿠스 2세는 아비투스를 서로마 황제라 칭하고 황제 대접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탈리아 반도에는 황제 지망생만 있고 그들이 뚜렷한 힘을 가지고 있진 않았다.

아비투스 자신은 상당히 주저했던 것 같으나, 테오도리쿠스 2세가 강력하게 설득했다.

이리하여 아비투스는 서고트 족의 본거지인 톨로사(Tolosa, 오늘날 툴루즈)에서 제위에 올랐다.

테오도리쿠스 2세가 이토록 아비투스를 적극 지지한 데에는 위에 적었던 나름의 계산이 있었다.

그는 단순히 허수아비 황제를 제위에 올리고 치우려는 것이 아니었다.

테오도리쿠스 2세는 현재 카탈라우눔 전투와 아에티우스의 활약으로 인해

아퀴타니아로 확 움츠러든 서고트의 영토를 다시 회복시키고 싶다는 야심이 있었다.

그를 위해서는 여전히 아에티우스 휘하에서 재건된 서로마 제국군과의 협조가 가장 쉬운 길이었다.

아비투스에 대한 강력한 지지 의사의 표시로 테오도리쿠스는

자신이 목표로 삼는 수에비 왕국과는 일단 표면적인 평화조약을 준수하고 있음을 천명하고

자신이 거느리는 병력 중 상당 부분(아마 절반 가까이 됐을 것이다)을 떼어

당시 서고트 족에서 가장 명망 높은 군인이었던 레미스투스의 지휘 하에 새 황제에게 딸려 보낸다.


하지만 사실 이럴 필요까지도 없었던 것이

아비투스가 서로마 제국령 갈리아에 진입하자마자 속속들이 그에게 모여 충성을 했고

심지어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에 진입하자 거의 모두가 환영의 뜻을 밝혔다.

로마 원로원은 아비투스가 원로원의 인정을 받으러 이탈리아 반도에 진입하자마자

사절을 급파해 원로원이 그의 등극을 치하한다는 뜻을 전했다.

당시 서로마 황제가 안정적으로 제위를 확보하기 위해 지지를 얻어야 할 사람이 크게 넷 있었다.

1. 당연히 동로마 황제의 승인. 모두들 알다시피 동로마 황제는 당시 지중해 세계의 끝판왕이었다.

2. 서로마 제국 내의 군대. 이 순간 서로마 제국군은 아에티우스의 재건으로 인해 상당한 저력을 갖고 있었다.

3. 로마 시의 원로원. 이들의 지지가 없으면 귀족들은 끝까지 황제의 치세에 겐세이를 넣게 된다.

4. 이제는 아프리카와 며느리(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딸)를 통해 서로마 제국과 연이 깊은 반달 왕국 국왕 가이세리크.

내가 나열한 네 가지 세력의 지지는 이후의 서로마 제위를 위해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다.

위의 숫자는 그냥 나열한 것이 아니라 중요도 순이다.

끝판왕 동로마 황제의 승인이 가장 중요했고 이 승인이 있고 나서야 군대의 지지가 의미가 있었다.

사실 이게 특별한 상황은 아니었다. 원래 디오클레티아누스 이래 동-서 로마 제국은 원래 그렇게 운영되었다.


아비투스는 우선 가장 중요한 동로마 황제의 승인을 얻기 위해 마르키아누스에게 사절을 파견했는데,

마르키아누스는 쾌히 아비투스의 제위 그 자체는 승인해주었다. 이로써 가장 큰 산은 넘은 셈이지만...

사실 마르키아누스의 아비투스에 대한 태도는 상당히 모호한 것이었다.

아마 다른 대안이 없으니 마지못해 지지한다는 것이 마르키아누스의 정확한 입장일 것이다.

아비투스의 제위는 승인했으나, 정작 아비투스가 임명한 집정관은 마르키아누스에게 거부당했다.

이는 동로마 제국이 아비투스를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있지는 않다는 뜻이었다.

한편, 가이세리크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살아있어주고 아에티우스가 적당히 죽는 쪽을 바랐는데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에 의해 그가 평생 공을 들인 꿈(서로마의 실권자)이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하자

그 분노를 쉽게 거둘 생각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가이세리크는 아비투스를 제위에 인정하길 거부했다.

작년에는 로마를 약탈했지만, 거기서 멈출 생각은 없었다. 456년, 마침내 가이세리크는 카푸아를 약탈했다.

카푸아는 공화정 시대나 제정 초기만큼 중요한 도시는 아니었지만 여전히 이탈리아 내 대도시였다.

이러한 유서 깊은 도시가 약탈 당하자 아비투스도 인내심의 한계를 느껴,

앞서 테오도리쿠스 2세가 자신에게 파견한 레미스투스를 제국군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그리고 마침내 젊지만 나름대로 용명이 있던 장군 하나를 이탈리아 장관으로 발탁해 시칠리아로 파견한다.


이 장군이 바로 앞서 로마판 도원결의의 주인공, 플라비우스 리키메르이다.

물론 후대를 사는 우리는 리키메르가 유비가 아니라 오히려 조조에 더 가까운 인물임을 알고 있다.

차근차근 그의 인생 역정을 따라가 보면 정말 로마판 조조나 사마의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가 바로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하지만 나는 그가 특별히 악역이라 생각진 않는다.

물론 정의로운 주인공은 아니지만, 그가 왜 그랬는지 그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렇다.

내가 아비투스의 이러한 인정투쟁을, 좀 재미없는 주제인데 왜 길게 서술하고 있느냐 하면

첫 번째로 아비투스의 치세가 서로마 제국이 회생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기회였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 이 가장 중요한 시기에 가장 중요한 인물들이 대거 등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서술이 조금 재밌어지기 시작할 것이다.


리키메르의 배경은 앞의 글에서 잠깐 설명했었다.

원래는 아에티우스 휘하의 젊은 장교였고 로마 귀족 마요리아누스와도 친구였다.

게르만의 왕족 출신이었으나 아마 모종의 이유로 계승권을 잃고, 서로마 제국군에 입대했다.

(리키메르의 이 사례가 특별한 사례는 아니고 계승권 다툼에서 패한 게르만 왕족이나 귀족들이

장교 신분으로 서로마 제국군에 입대한 사례가 꽤 많았고, 이들이 말기 서로마 제국군에 상당한 힘이 되었다.)

이미 아에티우스 휘하에 있을 때부터 천부적인 군사적 재능으로 아에티우스의 이목을 끈 바 있다고 말했는데,

이 천부적인 재능이 가장 크게 드러난 게 바로 가이세리크와의 전쟁이었다.

리키메르는 아비투스의 명령을 받자마자 지체 없이 군대를 이끌고 반달 왕국이 깽판을 놓던 시칠리아로 들어갔다.

456년 중반, 시칠리아의 아그리겐툼에서 리키메르의 서로마 제국군과 반달 왕국군이 크게 한 판 붙었다.

전력 자체는 반달 왕국군이 우세한 상황이었는데, 그래서 리키메르가 수비하는 입장에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자세한 전투 경과는 몰라도 여하튼 리키메르는 여기서 반달 왕국군을 박살냈다.

이 전투 한 번으로 반달 왕국은 이탈리아 약탈이 거진 멎는 것으로 보았을 때 꽤 크게 패한 것 같다.

하지만 리키메르의 재능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리키메르는 내친 김에 반달 왕국의 가장 큰 해군 기지가 되어 있던 코르시카로 쳐들어갔다.

리키메르는 이 공세 한 번으로 반달 왕국의 해군을 카르타고로 쫓아보낼 수가 있었다.

이 두 전투의 연이은 승리로 인해 리키메르는 서로마 제국을 구원한 영웅으로 등극했다.


이 즈음 아비투스가 이끌고 있던 라벤나의 궁정에서는 터질 일이 슬슬 터져가고 있었다.

앞서 말했지만 아비투스는 동로마 황제의 승인만 겨우 받아내기야 했지만

마르키아누스는 아비투스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대안만 찾으면 언제든 승인은 철회가 가능했다.

문제는 로마인들의 태도였다. 처음 이탈리아에 진입했을 때의 따뜻한 환영은 곧바로 의심으로 변해 있었다.

아비투스는 그 때쯤 다시 한 번 느꼈다. 생각해보니 이탈리아에는 자신의 기반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신중하게 자신의 측근 세력을 만들고자 했다. 대체로 로마인들에게 관직이 분배되었으나,

갈리아 계 로마인들에게도 은근슬쩍 몇 개의 관직을 주었다. 이것이 귀족들의 불만을 샀다.

문제는 또 있었다. 가이세리크의 로마 약탈 이후로 로마 시에는 기아가 덮쳐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뿐만 아니라, 그 로마 시민들은 아비투스가 제국군 총사령관에 고트족을 임명한 것에 불만이 매우 많았다.

이미 로마 시민들은 아비투스에게 고트족을 신임하지 말 것을 요구했고,

일단 아비투스는 고트족 근위대를 해산하여 민심을 달래긴 했으나 이미 아비투스는 오갈 데 없는 상황에 처했다.

가이세리크로 인해 게르만 왕국들에 대한 증오심이 큰 로마 시민들은

서고트 족과 밀접하게 공조하는 아비투스의 정치 행보에 금방 싫증을 느꼈다.


실제로 아비투스는 이제는 대놓고 수에비 왕국과 전쟁에 들어간 서고트 족에게 지원군을 파견한 상태였다.

그리고 456년 말, 그 해 테오도리쿠스 2세는 수에비 왕국이 서로마 제국령 타라코넨시스를 침공한 것을 구실로

수에비 왕국과의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고 히스파니아로 진군했다.

두 군대는 캄푸스 파라무스 전투에서 격돌했는데, 이 전투에서 서고트-서로마 연합군은 수에비 왕국을 대파하고

마침내 수에비 왕국은 440년 이래로 얻은 영토를 모조리 다 토해내야 했다.

이 전투로 수에비 왕국이 멸망하진 않았지만 반신불수가 되어 다시 갈라이키아에서 움츠리고 지내는 신세가 되었다.

이 상태는 훗날 수에비 왕국이 서고트 왕국에게 흡수될 때까지 변하지 않는다.

겉으로 보면 아비투스는 제 역할을 잘 수행하는 것처럼 보였다.

동로마 황제의 승인, 반달 왕국에 대한 승리, 서고트 족과의 우호 관계, 그리고 수에비 왕국의 파멸...

물론 내부에서는 아비투스에 대한 불만이 있기야 했다. 이 불만은 아비투스가 어찌할 수가 없던 것이었다.

이 시점에서 객관적으로 이루어놓은 성과만 보면 썩 괜찮았다. 아비투스는 칭찬 받아 마땅한 황제였다.

아비투스도 이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고 온후하고 성실한 성품을 바탕으로 충분히 잘 대처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아비투스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이는 아비투스가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것이었다.


리키메르는 서로마 제국의 구원자가 된 이러한 상황,

그리고 황제 아비투스가 로마에 무방비 상태로 있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리키메르는 곧 제국 수도방위장관(Comes Domesticorum; 프로텍토레스 도메스티키의 지휘관) 직을 맡고 있던

자신의 친우인 마요리아누스와 긴밀하게 연결하여 아비투스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고 만다.

아이기디우스도 갈리아 계 로마인이라는 점을 고려해보면 아이기디우스는 자신의 출신을 버린 셈이다.

물론 아이기디우스가 이 때 무슨 역할을 맡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이기디우스 역시 이 반란에 참가한다.

익숙한 이름이 나왔으니까 잠시 짚고 가자. 바로 아토에서 볼 수 있는 프로텍토레스 도메스티키란 무엇인가.

사실 아토에도 등장하는 이 프로텍토레스 도메스티키는 병종이라기보단 특수부대라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이들은 보직에 따라 일반 병졸을 이끄는 분대장이 되거나 아니면 이들로만 이루어진 정예 부대로 근무했다.

오늘날로 치자면 하급 장교 내지는 부사관 신분이었고 당연히 이 정예 부대의 지휘관은 당연히 고위직이자 요직이었다.

생산 시간이 2턴이나 걸리는 건 다 이유가 있던 것이다....

아무튼 마요리아누스도 충분히 아비투스에게 보상을 받았던 셈이다. 다만 이 왜 반란을 일으켰는지는 분명하다.

아비투스는 테오도리쿠스가 지원한 고트족 군대와 갈리아 계 로마인 파벌에게는 여전히 지지받고 있었지

그 외에 아에티우스가 남긴 다른 모든 군대가 아비투스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기 때문이었다.

아에티우스의 그림자는 그가 죽은지 2년이 넘은 이 시점에서도 여전히 걷히지 않은 것이었다.


아비투스는 리키메르의 반란을 알자마자 바로 로마를 포기하고 라벤나로 도주했다.

리키메르는 바로 아비투스가 버린 로마에 입성하여 원로원 의원들을 모아놓고

아비투스에 대한 신임을 철회하라고 협박했다. 아비투스는 이로써 원로원의 지지를 잃었다.

당시 제국군 총사령관 레미스투스 역시 라벤나에 웅거하고 있었는데,

리키메르가 로마에 입성하면서 발빠르게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당했다.

아비투스도 그냥 당하고 있지만은 않아서, 새로 제국군 총사령관에 메시아누스라는 인물을 임명하고

그에게 갈리아에서 군대를 모아 북이탈리아로 진군할 것을 명했다.

이로써 갈리아 방면군과 리키메르의 이탈리아 방면군이 플라켄티아(현재의 피아첸차)에서 전투를 벌였다.

사실 아에티우스가 독재를 하던 시절에는 보니파키우스의 군대를 흡수한 이후로는

서로마 제국에 내전이랄 것이 특별히 없었으므로 서로마 제국군끼리의 내전은 상당히 오랜만의 일이었다.

이 전투에서 다시 리키메르의 천재적인 군사 능력이 다시 힘을 발휘했다.

방법은 알 수 없지만 리키메르는 자신이 파견된 이탈리아 방면군을 꽤 큰 규모로 불려놓고 있었고

갈리아 방면군은 플라켄티아 도시를 끼고도 리키메르 군에게 대패하였다.

정말 나라 지킬 군대는 없어도 내전을 일으킬 군대가 있다는 건 맞는 말인가보다...

아무튼, 이 전투의 결과로 아비투스는 목숨만 간신히 건져 리키메르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후의 진행을 보면 알겠지만 적에게는 굉장히 잔인한 리키메르였지만

지난 날 아에티우스 군에서 함께 싸운 옛 정을 고려한 것인지

거의 예외적으로 아비투스는 직접 죽이지 않고 바로 이 도시,

플라켄티아의 주교로 임명하는 선에서 이 내전을 마무리 짓는다.

아비투스는 이듬해까지 살았는데, 죽은 이유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아비투스는 이탈리아 밖에서는 여전히 정통 황제로 인정받고 있었기 때문에

병사했거나, 아니면 이후 제위에 오른 마요리아누스에게 죽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리키메르가 승리한 이후 서로마 제국의 제위는 공석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상태로 해가 바뀌어 457년이 되었다.

그 이유는 해가 바뀌자마자 1월 초에 동로마 황제 마르키아누스가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마르키아누스가 와병 중이었기 때문에 서로마 황제를 지명할 권리를 행사하지 못한 탓이었다.

사실 마르키아누스는 서로마 황제는 커녕 자기 자신의 후계자도 지명하지 못했는데,

자기 자신이 이렇게 갑작스레 죽을 병에 걸릴 것이라곤 생각도 못했던 것 같다.

동로마 제국에서도 테오도시우스 왕조가 단절되었다. 마르키아누스에게는 딸 밖에는 없었는데

그마저도 아르카디우스의 딸인 풀케리아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 아니어서 그 자체로는 계승권이 없었다.

이리하여 457년의 1월부터 2월까지의 한 달 간이지만 양 로마 제국의 제위가 똑같이 비는 기묘한 사태가 발생했다.

물론 동로마 제국에서는 이 사태가 오래 가진 않았는데 알란족 출신의 제국군 총사령관 아스파르가

자신의 부하 로마인이었던 레오 1세 트락스(Leo I Thrax, 영어로는 Leo I Thracian)를 제위에 옹립한다.

그러나 레오가 즉위하는 과정이 별로 순탄치 못했기도 했는데,

원로원이 당초 지명하고자 했던 젊고 촉망받던 인재이자 마르키아누스의 사위였던

안테미우스(훗날의 서로마 황제 안테미우스이다)를 아스파르가 자신의 군사력을 통해 억지로 밀어냈기 때문이다.

안테미우스는 천성이 학자스러운 면이 있어서인지 이러한 상황에 크게 불만을 표하진 않았다 한다.

그런 이유로 레오 역시 즉위 초기에는 아스파르의 꼭두각시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아스파르의 롤모델은 스틸리코, 혹은 더 정확하게는 아에티우스였던 것 같다.

신기하게도 아스파르는 아에티우스를 그대로 따라하다가, 

즉 레오의 딸을 자신의 아들과 강제로 혼인시키다가 위협을 느낀 꼭두각시 황제에게

그 아들 단 한 명만 제외하고 집안이 멸문지화를 입는 정확히 아에티우스와 같은 결말을 맞는다.

하지만 그건 더 훗날의 이야기이고, 현 시점에서는 레오 역시 아스파르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물론, 아스파르는 나름 현명한 면이 있어서 레오가 즉위한 뒤로 꼭두각시로서의 역할을 거부하더라도

적어도 겉으로는 레오를 어느 정도 존중했고, 레오 역시 그런 아스파르를 일단은 존중하는,

일단은 괜찮은 관계를 유지했다는 게 차이라면 차이였을 것이다.

어쨌든 이제부터 서로마 제국 정치의 중요 행위자로 동로마 황제 레오가 등장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아비투스를 쫓아내는 것까지는 성공적이었으나, 리키메르는 더욱 머리 아픈 상황에 처했다.

일단 제국군 총사령관(Magister Militum) 지위는 스스로 올랐으나, 제위까지 오를 수 없음은 자명했다.

그의 우상인 아에티우스는 로마인인데도 제위에 오르지 못하지 않았는가.

(아에티우스의 경우에는 사실 본인이 오르지 않은 것에 가깝지만...

아에티우스는 필요에 따라 테오도시우스 왕조를 적대하고 겁박하긴 했어도

서로마 제국의 정통 왕조에 대한 충성심 자체는 어느 정도 진심이었던 것 같다.)

또 그 아에티우스의 선배인 스틸리코는 어땠는가. 반야만인 소리를 들으며 멸시당하지 않았는가.

하물며 자기 자신은 로마인의 피는 섞여있지도 않은 아예 이방인이 아닌가.

심지어 로마인은 정통파를 신봉하는데 자기 자신은 아리우스파였다.

도저히 스스로 제위에 오를 만한 여건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황제를 세우면 발렌티니아누스 3세처럼 자기 자신을 제거하려 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런 이유로 차기 황제 옹립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그럴 때 리키메르에게 낭보 하나가 전해지는데, 새로 등극한 동로마 황제 레오가 칙사를 보내온 것이다.


칙사가 전한 레오 황제의 의중은 이랬다.

동로마 황제는 리키메르를 서로마 제국을 통치하는 동로마 황제의 대리인으로서의 지위를 부여하고

마요리아누스에게는 파트리키우스(정확히는 로마 귀족의 우두머리 역할을 하며 특권을 가진 직책이지만

사실상 담당하는 역할은 총독 혹은 재상이나 다름 없어서 서로마 제국이 있을 때에는 재상,

그 이후로는 총독이라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지위를 부여하며

서로마 제국군 총사령관 직위는 두 사람이 공유하는 것으로 한다는 칙령을 내린다는 것.

황제의 대리인이나 파트리키우스나 사실 비슷하지만 사실 리키메르가 황제의 대리인인 만큼,

마요리아누스와 큰 차이까진 없지만 리키메르에게 근소하게 높은 지위가 보장되는 것이다.

사실 리키메르가 원하는 것이 바로 정확히 이것이었다.

아마, 레오가 신임 황제를 지명하지 않고 이런 내용의 칙서를 보낸 것은

자신이 동서 로마 황제를 겸할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정확한 의중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사실 레오의 이 인선은 그 자체로만 놓고 보면 서로마 제국에 있어서는 적절한 것이었다.

이는 당시 레오가 서로마 제국의 상황, 그리고 권력 구조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아무튼 동로마 황제의 칙령을 리키메르가 원로원 회의에 안건으로 회부하자 로마 원로원은 난리가 났다.

로마 원로원은 리키메르에게 험악한 분위기로 흘러갔다.

내심 리키메르는 칙명을 수락하고 싶었는데, 원로원은 하루 빨리 리키메르에게 신임 황제를 옹립하라고 다그쳤다.

하지만 리키메르는 선뜻 황제를 옹립하려 하지 않았고, 이렇게 서로마의 제위가 표류하는 사이

서로마 제국이 내분을 하고 있다고 짐작한 알레마니 왕국이

라이티아 방면으로 알프스를 넘어 서로마 제국령 이탈리아 본토를 침공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리키메르가 망설이고 있는 사이 마요리아누스는 서로마 제국군을 이끌고 알레마니 왕국과 맞서 싸웠다.

양 군은 캄피 칸니니(오늘날에는 스위스에 속하는 호수인 마조레 호수)에서 회전을 벌였고,

여기에서 마요리아누스가 모처럼 시원하게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를 통해 고무된 병사들 역시 원로원 의원들과 마찬가지로

리키메르가 본인의 야망 때문에 황제를 옹립하지 않는 상황에 내심 불만을 갖고 있었고

라벤나로 회군하던 도중, 갑작스럽게 마요리아누스를 방패 위에 태워 그를 서로마 황제로 선포했다.

사실 마요리아누스 개인으로 보자면 서로마 황제 자리까지는 크게 욕심이 없었던 것 같다.

다른 게 아니라 아에티우스 시절부터 둘도 없는 사이였던 친우 리키메르의 입장도 고려했을 것이다.

그러나 병사들의 이 뜨거운 열망을 보자

마요리아누스의 가슴 속에 깊이 품고 있던 그 원대한 야심이 다시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 야심이란 서로마 제국을 자신의 손으로 부흥시키는 것...


리키메르가 이를 알게 되자 처음에는 친우(이자 사실 내심으론 약간 부하같이 생각했던) 마요리아누스가

자신과의 우정보다 야망을 위에 놓는 것 아닌가 하고 의심을 했다.

하지만 리키메르는 사실상 자신이 제위에 오르는 것도 봉쇄됐고,

그리고 자신이 동로마 황제의 대리인이 되어 서로마 제국을 통치하는 것도 받아들여지기 힘들다면

마요리아누스를 통해 제국을 통치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딱히 대안도 없는 상황에서 황제 옹립만 미루어봐야 나중에 레오 황제가 생각이 바뀐다면,

그리고 그가 동로마 제국군과 함께 실질적인 권력이 있는 황제를 보낸다면 리키메르는 명분이 없다.

리키메르는 그렇게 되기 전에 차라리 자기가 마요리아누스를 옹립하고

친구 마요리아누스를 통해 서로마 제국을 다스릴 수 있다 믿었다.


그런 이유로 리키메르는 마요리아누스의 황제 옹립을 인정하고,

나아가 레오 황제에게 마요리아누스를 서로마 황제로 승인해달라는 내용의 상소문을 보냈다.

레오 황제는 처음에는 이에 대해 실망감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사실 동로마 제국은 서고트 족 따위가 옹립한 아비투스를 쫓아낸 것은 그다지 기분 나쁘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새로 황제를 선출하는 골치아픈 짓거리를 하고 있다고 받아들인 것이다.

아마 레오 역시 자신의 야망과 현실 사이에서 상당한 고민을 했던 모양이다.

아마 레오의 야망은 제2의 테오도시우스 대제가 되는 것 같다. 이를 위해

정치적으로는 양 로마 제국을 통합하는 것, 종교적으로는 더욱 강한 정통파 교회 정책을 시행하는 것.

이 두 가지는 레오 치세에 레오가 가장 중요시한 것이었으며(안정된 내정보다 더 중요시했다)

따라서 서로마 제국의 제위는 비어있는 편이 레오에게는 무조건 좋았다.

레오는 리키메르의 상소에 대해 오랫동안 답을 하지 않다가

마침내 현실적인 측면을 고려하여 마요리아누스를 마지못해 서방의 황제로 승인하였다.

이게 457년 12월의 일이었으니까, 서로마 제국은 사실 1년 넘게 황제가 없는 상태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다행히 457년이 가기 전에 겨우 동로마 황제의 칙사가 주관하는 정식 대관식이 치뤄질 수 있었다.

물론, 마요리아누스는 이미 리키메르와 합의를 본 뒤부터 황제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일단 마요리아누스 황제가 정식으로 즉위하자

동로마 제국은 의외로 아비투스 때와는 다르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458년 1월, 마요리아누스와 레오는 함께 그 해의 집정관을 지명했다.

이는 동로마 제국이 마요리아누스를 공동 황제로서 완전히 신임한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마요리아누스는 이 사건으로 인해 크게 자신감을 얻었다.

이미 457년 한 해를 로마에서 원로원 의원들과 법령을 개혁하며 내정을 튼실하게 다져가고 있었는데,

아마 마요리아누스가 리키메르와 상관 없이 처음으로 독자적인 정책을 펴기 시작한 것이 이 때였을 것이다.

이미 457년 여름에 마요리아누스는 리키메르와 상관 없이 우선 자신을 지지하는 군대를 이끌고

그 사이 다시 슬그머니 이탈리아에 상륙하여 캄파니아를 유린하고 있던 반달 왕국군을 격파한다.

이렇게 가이세리크로부터 이탈리아를 지켜내자 마요리아누스의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다.

그를 옹립한 군대 역시 마요리아누스를 위해서라면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으며,

어찌되었건 가이세리크를 제외하면 앞서 안정적인 서로마 제위를 위한 요건을 전부 갖춘 것이다.

마요리아누스는 능력 있었고, 젊었으며, 동시에 제국을 살리겠다는 책임감도 강했다.

이는 마요리아누스를 지치지 않게 만들었고 그가 펼치는 정책마다 나는 기대 이상의 성과는

이제는 서로마 제국이 모처럼 일치단결해 게르만의 침입에 대응할 것이라는 희망을 주었다.

단 한 사람을 빼고, 서로마 제국의 암흑기가 끝나고 밝은 미래가 도래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 한 사람은 역시 리키메르이다.

마요리아누스는 몇몇 성공을 거두면서 명실상부한 황제로서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황제가 된 뒤로는 친구이면서도 반쯤은 상관이나 마찬가지였던 리키메르가 은근히 부담스러웠던 데다가,

또 제2의 아에티우스를 노리는 그의 야심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의도적으로 멀리했다.

리키메르는 리키메르대로 자신의 친우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을 존중한다면 자신에게 전권을 위임할 줄 알았는데, 이제는 자신이 자기의 상관처럼 행세하는 것이다.

그건 그래도 나았을 것이다. 어쨌든 황제였고, 자신도 지키고자 하는 서로마 제국을 훌륭히 이끌어나가고 있으니까.

정말 리키메르의 부아가 치밀게 한 것은 마요리아누스 이 녀석이 고의로 자신을 멀리하는 것이다.

아마 권력의 핵심에서 떨어뜨리려는 속셈이었을 것이고, 마요리아누스 입장에서는 타당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리키메르 입장에서 이는 마요리아누스가 자신을 업신여기거나 의심한다는 뜻이었다.

마요리아누스의 위치는 하루가 다르게 공고해지는데, 마요리아누스와 군권을 분점하고 있던 리키메르에게

이대로 마요리아누스가 비약한다면 자신의 위치도 곧 위험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면 이상한 것이다.

이렇게 하루가 다르게 친구가 정적이 되어가고 있었다.


458년 여름이 되자 마요리아누스는 행동을 개시했다.

마요리아누스는 아이기디우스와 함께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었다.

리키메르 대신으로 네포티아누스라는 인물이 기용되었다.

네포티아누스는 일리리아 총독 마르켈리누스의 여동생과 결혼을 했는데,

마르켈리누스는 아에티우스 시대에 일리리아 장관으로 임명되었다가

아에티우스가 죽자 사실상 독립 군주로서 행사하는 자로, 특기할 만한 것이

당시 고위직으로는 드물게 그리스-로마 다신교도였다. 

그런 그가 마요리아누스가 즉위했다는 소식을 듣자 마요리아누스에게 사자를 보내 충성을 맹세했다.

이 마르켈리누스 역시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이 원정에 리키메르가 동행하지 않은 것을 보았을 때 이미 두 사람의 사이는 많이 갈라져 있던 모양이다.

마요리아누스는 리키메르의 서로마 제국의 실권자가 된다는 야망에 전혀 부응하지 않았고

이미 지지세력이 많은 마요리아누스를 리키메르가 함부로 할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대립이 표면화되지 않았을 뿐인 것 같다.

이 깨어진 우정은 나중에 좋지 않은 결과를 내게 되지만 차차 보기로 하고

일단은 마요리아누스의 가장 빛나는 업적을 다룰 순간이 온 것이다.

그간 아비투스를 지지하던 갈리아는 공공연히 마요리아누스의 이름을 언급하기를 거부하고

마요리아누스의 대관식 이전에 자신들의 황제로 여전히 아비투스의 이름을 언급했으며

아비투스가 죽고 난 뒤로는 동로마 황제 레오의 이름만 언급해왔다.

심지어 세금 감면을 청원하는 사절도 마요리아누스는 대놓고 무시하고

동로마 황제인 레오에게 보낼 정도였다.


마요리아누스는 침착하게 하나하나 상황을 정리하기로 했다.

우선 마요리아누스는 서고트족이 아렐라테(오늘날 아를)를 포위공격하고 있다는 것을 포착하자

아렐라테로 진격하여 벌어진 아렐라테 전투에서 서고트 족을 크게 격파했다.

어찌나 크게 털렸던지 나르보넨시스 일대의 로마 도시들은 모두 탈환된 것에서 그치지 않고,

서고트 족이 그간 정복한 히스파니아와 셉티마니아를 전부 토해내고  아퀴타니아 일대로 움츠러들고,

다시 서로마 제국의 봉신이 되어 마요리아누스의 히스파니아 원정에 지원군까지 파견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어 황제는 바로 히스파니아로 들어가지 않고 말머리를 북쪽으로 돌려 부르군트 왕국을 공격했다.

당시 루그두눔(리용)은 아비투스 사후의 갈리아 반란의 주동적인 위치에 있던 도시였는데

도시를 지키기 어렵게 되자 주동자들은 부르군트 왕국에게 도시를 넘겨버린 상태였다.

그러나 마요리아누스는 이 반란군과 부르군트 왕국 모두를 격파하였고,

이로써 남부 갈리아를 상실한다면 월경지나 다름 없게 되는 북부 갈리아의 잔존 로마 세력과 연결로가 확보되었다.

이 시점에서 마요리아누스는 충직한 아이기디우스에게 갈리아 장관직을 수여해 그에게 갈리아의 관리를 일임한다.

아이기디우스는 이 기대에 충실하게 부응한다. 아이기디우스는 아르모리카(브르타뉴)에 정착한 브리튼인들과 협력했다.

아서 왕의 모델로 여겨지는 리오타무스 왕이 바로 이 때 아이기디우스의 협력자로서 활약한 인물이다.

사실 리오타무스는 이름이라기보단 칭호(웨일스어로 '전사 왕'이라는 뜻)에 가까운데

그 정체는 알 수 있는 길이 없지만 적어도 실존 인물인 것 자체는 확실한 편이다. 기록이 딱 몇 줄 있고 끝이라 문제지.

아서 왕과 밀접한 관계에 있거나 그 본인이라 생각되는 암브로시우스 아우렐리아누스가 바로 이 자가 아닐까 하고도 생각된다.

사실 대 브리튼(Britannia Maior;현재의 영국)이 아니라 소 브리튼(Britannia Minor; 현재의 브르타뉴)에서 활동한 게 에러인 데다가

지금은 아무도 아서 왕의 역사적인 모델을 찾으려고 하지도 않기 때문에 흥미 위주의 썰로 듣고 가면 된다.


아무튼 갈리아 원정이 이렇게 대 성공으로 끝나자 이듬해인 459년, 네포티아누스 장군을 보내 히스파니아 탈환에 나섰다.

이 히스파니아 원정도 쉽지는 않아서, 그간 가이세리크가 히스파니아에 친 반달 세력을 만들어놓은 것도 손봐야 했고,

다시 히스파니아를 장악하고 싶어하던 수에비 왕국을 묵사발 내는 일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지난 번 몬스 파라무스 전투에서의 대패와 함께 마요리아누스의 이 원정으로 수에비 왕국은 정말 크게 타격을 입어

갈라이키아 일부와 루시타니아 일부만 영유하는 수준으로 세력이 완전히 쪼그라들게 된다.

이제 갈리아, 히스파니아를 토벌하는 데에 성공한 젊은 황제는 아프리카를 되찾는다는 원대한 구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아프리카만 되찾는다면 서로마 제국은 당장 안심해도 될 것이다.

하지만 아프리카로 육군을 수송할 해군이 없었다. 따라서 마요리아누스는 제국 각지의 해군을 집결시키기 시작했다.

마요리아누스의 히스파니아 원정은 단순히 히스파니아를 탈환하는 것이 아니라

히스파니아 그 자체를 아프리카 공격의 교두보로 삼기 위함도 있었다.

마요리아누스는 새로 되찾은 제국령을 안정시키기 위해 이탈리아로 가지 않고

평소에는 아렐라테에서 머무르면서 제국의 개혁에 힘썼다.

가이세리크가 반달 왕국 침공 계획을 어떻게 알았는지, 서로마 제국이 갈리아와 히스파니아를 평정하자

갑작스럽게 사자를 보내 평화를 제안할 때 바로 마요리아누스의 권력이 절정에 있었다.

그러나 마요리아누스는 쇠 뿔도 단 김에 뺀다고 가이세리크의 평화 협정 요청을 거절하였다.

이에 460년이 되자 가이세리크는 어찌나 서로마 제국군의 침공을 두려워했는지

마우레타니아에 미리 청야전술을 써놓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나이 들고 겁이 많다 해도 가이세리크는 확실히 만만한 작자가 아니었다.

내부의 배신자, 혹은 가이세리크가 이전부터 서로마 제국에 거느리고 있던 첩자 때문에

황제의 이 공격 준비가 가이세리크에게 전해지는 바람에 그의 기습으로 함대가 괴멸해버리고 만다.

단순히 기습이었다면 서로마 제국군이 더 수가 많아서 어떻게 대응해볼 수 있었을 텐데

화공이 섞인 데다가 미리 가이세리크가 로마 측 장군들한테 뇌물을 듬뿍 뿌려놓아

전투의 결정적인 순간에서 이들이 배신하여 아군을 공격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 전투는 카르타고 노바 전투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카르타고 노바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도 아니었고 그보다 많이 북쪽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아무튼 이 기습으로 서로마 제국 해군은 괴멸했고, 육군은 아직 상당 부분 건재했지만

이 반달 왕국과의 전쟁에 모든 것을 쏟아부은 마요리아누스는 더 이상의 진군을 멈추게 된다.


이 때 리키메르가 무엇을 했는지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리키메르가 가이세리크한테 정보를 흘려줬다는 정황이 없는 것을 보면

리키메르가 옛 친구를 팔아먹은 건 아니고 그 때까지만 해도

어떻게 태도를 확실히 정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카르타고 노바 해전의 결과가 당도하고 마요리아누스가 병력의 상당수를 잃고

아렐라테로 쓸쓸하게 귀환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리키메르는

그제서야 마침내 자신의 야망에 모든 걸 걸어보기로 한 듯하다.

카르타고 노바 전투로 마요리아누스가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되어 있지만

사실 카르타고 노바 전투는 460년 중후반에 벌어졌고 마요리아누스의 폐위는 461년 중반이니

약간의 시차가 있긴 했던 셈이다. 그만큼 리키메르 역시 고민을 많이 했다는 뜻이 되겠다.

이어 마요리아누스에게 펼쳐진 운명은 정말 짓궃게도 아비투스의 운명과 똑같았다.

정치적 이유로 게르만 근위대를 해산한 아비투스와는 달리

자금이 없는 데다가 아프리카 원정에 정말 뒤 없이 올인을 했기 때문에

자기 휘하의 군대를 해산했다는 별로 안 중요한 차이가 있기야 하지마는

이 군비 감축이 있고 나서 리키메르는 자기 친구를 대놓고 배신하게 된다.

마요리아누스는 한동안 아렐라테에서 멘붕하다가

일단 로마로 가서 다시 시작해야겠다 싶었는지 근위대만 이끌고 이탈리아에 들어간다.

리키메르는 이를 추격해서 아비투스가 폐위된 플라켄티아 바로 근처에서 마요리아누스를 체포했다.

마요리아누스는 8월 3일 붙잡혀서 구타당하고 고문당한 뒤에 8월 7일에 처형당했다.


이 소식은 그 때까지 리키메르에게 우호적이던

모든 로마계 혹은 친로마계 세력을 리키메르로부터 등 돌리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리키메르에 대해 지지를 보내 오던 동로마 황제 레오가 이 소식에 특별히 진노했다.

레오는 은근슬쩍 서로마 제국을 재건해가는 마요리아누스가 마음에 들었고,

무엇보다 명백한 혈통의 로마인이라 그 자체로 호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그의 집정관 임명을 지지하면서 전폭적으로 힘을 실어준 것이었다.

이로부터 그간 대체로 리키메르를 지지해준 레오는 그에 대한 지지를 끊게 된다.

동로마 황제만 그를 경원시하게 된 게 아니었다.

앞서 언급한 일리리아 장관 마르켈리누스라는 자는 대놓고 리키메르를 반역자로 규정하며 비난했다.

장군 네포티아누스 역시 리키메르에게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키나

호응하는 군대가 없어 일리리아로 쫓겨났는데 마르켈리누스가 네포티아누스를 지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크게 격노한 것은 바로 아에티우스 시절부터

함께 서로마 제국을 지키자 맹세하고 노력해 온 절친 아이기디우스였다.

아이기디우스 역시 독립을 선포하고 오히려 스스로 리키메르와의 모든 연락을 끊어버렸다.

이처럼 리키메르가 서로마 제국의 실질적인 권력을 얻기 위해 품었던 야망은 그 대가가 비쌌다.

단, 리키메르는 서로마 제국 자체에 충성했던 것은 확실하다.

단지 누가 황제가 되어도 좋으니 그 실질적인 통치자는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뿐이다.

이건 아무래도 아에티우스를 보며 그를 롤모델로 삼았기 때문인 것 같다.

추후에 리키메르는 같은 짓을 한 번 더 하게 되는데 그건 그 때가서 다시 한 번 살펴보자.


리키메르는 마요리아누스처럼 자신을 권력에서 배제시킬 만한 유능한 황제가 아니라

유순한 황제 후보를 찾는데 3개월이라는 시간을 들인다.

그는 황제 후보들을 심사한 끝에 유순한 원로원 의원인 리비우스 세베루스를 옹립한다.

리비우스 세베루스는 나이가 좀 있긴 했지만 인망도 있고 독실한 정통파 신자였다.

하지만 리비우스 세베루스 개인이 어떤 사람이건 아무 상관이 없었다.

나름 잘 해내고 모두의 충성을 받을 만하던 마요리아누스를 죽인 반역자 리키메르가

제 멋대로 옹립한 찬탈자. 이것이 이탈리아를 제외한 전 로마 제국에서 세베루스의 취급이었다.

동로마 황제 레오는 리비우스 세베루스의 서로마 제위 계승 승인을 거부했다.

갈리아에 있었던 아이기디우스는 리키메르에 가장 적대적으로 나왔다.

그는 매 해 연례행사 마냥 갈리아에서 군대를 이끌고 들어가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하지만 실제로 이탈리아로 들어가지는 못 했는데, 그 이유는 서고트 족과 부르군트 왕국이

리키메르와 동맹을 맺고 아이기디우스의 진군을 방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동맹을 위해서 리키메르는 마요리아누스가 겨우 탈환한

갈리아 남부와 북부를 이어주는 요충지 루그두눔까지 부르군트 왕국에 넘겼다.

아이기디우스의 지원군은 브리튼인과 알란족, 그리고 프랑크족이 전부였는데

물론 아이기디우스는 군사적으로 유능하고 병력도 상당했지만

서고트와 부르군트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군하면 친구 마요리아누스의 원수를 갚기야 하겠지만

갈리아가 비게 되어 브리타니아 꼴이 나게 되는 것 또한 썩 내키진 않았을 것이다.

아이기디우스는 사자를 보내 자신은 찬탈자가 아니라 동로마 제국에 충성을 맹세했는데,

이는 자기 자신이 리키메르를 따르지 않고 독자 노선을 걷겠다는 것을 천명한 것이었다.


하지만 리비우스 세베루스(와 리키메르)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마르켈리누스였다.

그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바로 지척인 살로나에 자리를 잡고

강력한 군사력으로 이탈리아를 직접 침공하겠다 위협하고 있었다.

마르켈리누스는 비록 이교도이긴 했으나 자신의 로마인 핏줄을 강하게 자각하고 있어서

박해받아 마땅한 이교도지만 로마 제국에 대한 충성심 하나는 모두가 인정하는 사나이였다.

리키메르는 사자를 보내 내전 발생만은 막아 달라고

동로마 황제에게 사정을 하는 방식으로 이 난관을 돌파했다.

동로마 황제는 리키메르에 대한 신임은 거둬들였으나,

서로마 제국에 내전이 다시 일어나면 좋을 게 없다고 본 건 매한가지기 때문에

마르켈리누스에게 사자를 보내 일단 내전 발생은 자제할 것을 명령했고

마르켈리누스는 일단 이에 따름으로써 리키메르는 한 숨 돌릴 수 있었다.

이는 레오가 서로마 제국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다는 한 가지 실례가 될 것이다.

리키메르는 그러고서도 불안했던지 자신의 열렬한 추종자인

로마인 아그리피누스를 갈리아 장관으로 임명해 아이기디우스와 전쟁을 치르게 했다.

아그리피누스는 갈리아 계 로마인 출신으로 원래는 아비투스의 지지자였으나

아비투스가 죽고 나서 황제가 된 마요리아누스에게 죽을 뻔한 것을 리키메르가 구해준 적이 있었다.

이 때문에 열렬한 리키메르 지지자가 되었고 갈리아에서 리키메르를 대리했다.

심지어 아그리피누스는 아이기디우스와 예전부터 원한이 있어 이 역할에 적임이었다.

그는 아예 자신의 영지인 나르보(현재 나르본)까지 서고트 족에 할양하면서 더 크게 싸움을 조장했다.

그러나 463년 아우렐리아니 전투에서 아이기디우스는 알란-브리튼-프랑크 연합군을 이끌고

서고트 족 군대에 크게 승리를 거두어 갈리아를 나름대로 안정시키게 된다.


이에 맞서 462년, 아이기디우스는 마르켈리누스와는 물론이고 다름 아닌

반달 국왕 가이세리크와 반 리키메르 동맹을 맺기 위해 접근하기까지 했다.

가이세리크는 이것이 자기한테 과연 나쁘진 않은 제안이라 생각했고

동로마 제국까지 여기에 끌어들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우호의 증표로 지난 로마 약탈 이래로 자기들이 데리고 있던 세 모녀였던

리키니아 에우독시아(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황후), 에우도키아(장녀), 플라키디아(차녀)

이 세 사람을 모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정중하게 반환했다.

이미 에우도키아와 가이세리크의 아들인 후네리크는 460년에 결혼식을 올리고

바로 461년 그 해에 후네리크에게 적자 힐데리크를 낳아주었던 상태였다.

세 모녀 모두 테오도시우스 황가의 마지막 생존자로서 정중하게 우대받는다.

언니 에우도키아는 귀환한 바로 그 길로 예루살렘으로 가서 거기서 평생 홀로 살았지만,

동생 플라키디아는 귀환해서 바로 후일 서로마 황제가 되는 올리브리우스와 혼인을 하게 된다.

플라키디아가 455년에 이미 로마 귀족 올리브리우스와 혼인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에우도키아도 가이세리크가 후네리크와 혼인을 시키기 위해

460년에 에우도키아가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던 것을 보면

카르타고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한 이후에 혼인한 것이 더 이치에 맞는다.

아무튼 포로 반환 이후 가이세리크 자기 자신은 계속해서 이탈리아를 약탈하면서

리키메르를 점점 더 강하게 입박했다.

실제로 이 압박은 꽤 효과가 있어서 리키메르는 동로마 제국에 사절을 파견하여

가이세리크에게 영향력을 행사해달라고 탄원한 일이 있는데,

황제 레오는 가이세리크가 우리와 협정을 맺긴 했으나

서로마 참칭자의 영토를 약탈하는 것은 내 알 바 아니라는 식으로 대응을 했다.


이런 대치 국면이 리비우스 세베루스가 죽는 465년까지 3년이 이어졌다.

그 와중에 464년에 아이기디우스가 갈리아에서 사망하면서

그 아들인 시아그리우스가 뒤를 이었고,

역시나 시아그리우스는 서로마 제국 따윈 무시하고 동로마 제국에 충성 맹세를 했다.

그러나 아토로 치면 갈리아 군벌인 시아그리우스를

동로마 제국에서는 진지하게 취급하진 않았던 모양이다.

465년에 리비우스 세베루스는 자연사한 것 같은데, 사람들은 이미 리키메르가 두 번이나

자신이 섬기던 군주를 죽인 전례를 들어 이번에도 리키메르가 살해한 것 아닌가 하는

입소문이 당대에도 많았다고 한다. 그런 믿음은 확실히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긴 했다.

리키메르로서도 세베루스가 죽어주는 편이 여러모로 나았으니까.

세베루스가 특별히 리키메르에게 반대한 일은 없지만, 정치적으로 너무 가치가 없었다.

리키메르는 세베루스가 죽은 다음에는 레오가 동로마 황제를 지명하는 걸 기다린다고

아예 서로마에 황제를 다시 시우려는 시도 자체를 하지 않는다.

문제는 이 상태가 18개월이나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 18개월 간 가이세리크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둘째 딸인 플라키디아와 결혼한

아니키우스 올리브리우스라는 로마 귀족을 제위에 올릴 것을 종용하며 이탈리아를 털고 다녔다.

가이세리크는 오히려 여기서 잠시만이지만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게 된다.

가이세리크는 올리브리우스를 대놓고 황제로 옹립하면서 양 로마 제국을 압박했다.

리키메르에게 그를 황제로 옹립하라고 계속해서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약탈한다.

올리브리우스가 정식으로 제위에 오른다면 리키메르는 반드시 실각한다...

리키메르로서는 이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가이세리크는 사실 마요리아누스도 통제하기 힘에 부쳤던 리키메르와는 달리

아프리카에 탄탄한 자신의 기반을 가지고 있는 국왕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예나제나 가이세리크는 리키메르를 쫓아내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는 사람이었다.

사실 리키메르는 고민했던 게 자기가 다루기 쉬운 사람은 보았듯이 황제로서 너무 가치가 없었고

그렇다고 가치가 있는 사람을 데려오자니 마요리아누스처럼 유능하고 제대로 일을 하려 하니

리키메르로서는 하나의 딜레마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마 동로마 황제 보고 서로마 황제를 임명해달라고 했던 건 리키메르의 진심이었을 것이다.

사실 리키메르로서는 동로마 제국의 지원이 절실했다.

그 때문에 황제를 세워도 동로마 제국과 연관 있는 인물을 세우고자 했다.

실제로 가이세리크는 리키메르의 권력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내부 포섭을 통해 리키메르의 권력을 어느 정도 대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또한 딜레마인 게 동로마 제국과 연관이 있으면 자신이 황제를 함부로 하기 힘들어진다.

결국 리키메르는 이도저도 못하고 동로마 황제가 무능한 인물을 대충 앉혀주고

그를 통해 서로마 제국을 지원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어려움이 풀리기를 바랐다.

물론 이게 얼마나 자기 좋을대로 생각하는 것인지는 바로 직후 밝혀지게 된다.


해가 두 번 바뀐 467년이 되어도 리키메르가 미적거리고 있자

더 이상 참기 힘들어진 동로마 황제 레오가 하나의 정치적 승부수를 던진다.

리키메르 뿐만 아니라 가이세리크까지 난리였던 것이다.

황제가 올리브리우스에게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뤄줄 생각이 없는 뜻을 분명히 하자

(정작 올리브리우스는 참칭자도 아닌 그냥 명망 있는 귀족으로 대우받아 관직을 계속 역임했다.)

동로마 제국령의 서부 해안들을 약탈하고 주민들을 노예로 삼는 일이 벌어져

레오도 마침내 서로마 제위 계승 문제에 정식으로 개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앞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과 아마도 선제였던 마르키아누스 자신까지도

동로마 제국의 후계자로 밀던 인물이 안테미우스라고 했다.

막상 안테미우스는 자신을 밀어내고 등극한 레오를 순순히 황제로 인정했지만

레오 본인 역시 내심으로는 일말의 인간적인 미안함을 가지고 있던 모양이다.

나무위키를 보면 레오가 권모술수로 안테미우스를 서로마에 버렸다는 식으로 서술하는데

물론 어느 정도 그것도 염두에 뒀겠지만, 이후의 레오 행보를 보면 그저 '버린'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안테미우스를 황제로 모시고 싶어하는 이들은 아직 많았다. 그들이 문제였다.

그래서 레오는 인간적인 미안함, 정치적인 고려까지 합쳐서 안테미우스를 서로마의 황제로 지명했다.

사실 안테미우스는 레오보다 더 황제로서 적합한 인물이었다. 권신 아스파르 때문에 밀려났을 뿐이지.

안테미우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먼저 서로마 황제로서 즉위하고 파견되었다.

이를 통해 레오가 의도한 것은 첫 번째로 미래의 제위 지망생을 미리 제거하고

두 번째로 가이세리크가 리키메르 대신 서로마 제국의 실권자가 되는 것을 미리 방지하며

세 번째로 추후 반달 왕국을 멸망시키기 위한 유능한 군사령관을 배치해두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 행차 과정에서도 안테미우스를 위한 안배를 잊지 않았다.

안테미우스를 해로로 파견하지 않고 육로로 파견해 달마티아를 지나가게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달마티아는 리키메르에 반대해 자립한 일리리쿰 장관 마르켈리누스의 영지였다.

마르켈리누스는 동로마 황제 레오가 선임한 안테미우스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어 레오가 준 약간의 군대와 자신이 이끌고 있던 군대를 합쳐 이탈리아로 진격을 개시했다.

이탈리아에서 안테미우스는 거의 반대를 받지 않았다. 심지어 리키메르 역시 안테미우스를 인정했다.

하기야 인정하는 수 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자신이 원하던대로 레오가 서로마 황제를 지명했으니.

동로마 황제 레오는 서로마 황제 안테미우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쏟아부었는데,

이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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