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아르코와 리보를 키워낸 전설적인 생산자 페데리코 테시오는 이런 말을 남긴 바가 있다.

"The Thoroughbred exists because its selection has depended, not on experts, technicians, or zoologists, but on a piece of wood: the winning post of the Epsom Derby. If you base your criteria on anything else, you will get something else, not the Thoroughbred."

"서러브레드는 (말) 전문가들이나, (말을 관리하는) 기술자나, 동물학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엡섬 더비의 위닝 포스트라는 나무조각 한 장으로 인해 존재한다. 만약 그 기준을 다른 어떤 것으로 정의한다면, 서러브레드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보게 될 것이다."

그의 말대로 엡섬 더비가 그 권위를 지켜온 오랜 세월 동안, 생산자들은 더비에서 이길수 있는 말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고, 서러브레드 혈통 개량의 역사는 거칠게 말하면 더비에서 이기기 위한 개량의 역사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리고 그 긴 세월동안 코스의 변화가 거의 없이 유지되어온 엡섬 다운즈의 독특한 특성은, 경주마에게 요구되는 모든 종류의 능력을 테스트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게 여겨진다.

이번 글에서는 엡섬 다운즈(그중에서도 더비와 오크스가 열리는 2420m 코스)를 공략하기가 얼마나 까다로운지, 그리고 여기서 승리하기 위해 어떤 능력치들이 요구되는지 간단하게 훑어 본다.

1. 코스 개략

일본이나 미국, 한국 등에서 흔히 보이는 순환형 코스가 아닌 유럽에 흔한 편도 코스.

좌회전의 말발굽형 모양이다. 자연지형을 그대로 쓴 덕분에 기복이 심하지만, 

그것뿐만 아니라 다른 코스에서는 찾을 수 없는 독특한 특색들이 여럿 있다.

1. 전반부의 공략

말붕이들도 잘 아는 고저차 40m짜리 오르막.

이 전반부에서 갉아먹히는 체력 때문에 선행형 경주마들의 부담이 크다.

하지만 이 전반부에는 하나의 함정이 더 있는데...

코스가 완전한 직선이 아닌 S자라는 점이다. 뭐가 문제냐고?

레이싱 게임 해 본 사람이면 짐작이 갈 텐데...

연속 코너 공략할때 라인을 어떻게 잡아야 최단거리가 되는지.

전체적으로는 좌회전 코스지만 첫 커브는 우회전.

그래서 오르막 끝자락에 있는 코너에 진입할때 인코스로 들어가려면 저런 주행라인을 잡게 된다.

실제로 더비 영상 보면 스타트 하자마자 다들 아웃코스로 달려가는걸 볼 수 있다.

그래서 통념과는 다르게 안쪽 게이트일수록 포지션 싸움에 어려움을 겪게 되고,

최내각인 1, 2번 게이트의 별명은 coffin(관짝)이다. 승률이 확 떨어지니까...

2. 태튼햄Tattenham 코너

최종 직선 진입 직전의 이 코너는 오랜 세월동안 더비 도전자들에게 악명을 높여 왔다.

이 코너는 지도에서 보듯 굉장히 급한 구배를 갖고 있어서 정석적으로는 저속으로 돌아야 한다.

그러나 코너의 출발점에서 최종직선에 이르기까지 근 10m나 내려가는 내리막이라는게 문제.

(대충 이정도 내리막)

느리게 돌아야 하는 급한 커브+저절로 속도가 붙어버리는 내리막이라는 모순된 조합은 도전자들에게 선택을 강요했다.

속도가 너무 빨리 붙은 채로 커브를 돌다가는 원심력의 가호로 밖으로 쭉 밀려나 버리거나 아예 자빠질 수도 있다.

그렇다고 코너를 안전하게 도는데만 신경쓰다가는 가속시점이 너무 늦어져서 이길 방도가 없다.

챔미에서 접속기 터지고 안터지고 차이가 어마어마한거 떠올려 보자...

그래서 이 코너를 도는 테크닉이야말로 엡섬 더비의 승부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곤 했다.

 - 최대한 인에 붙어 달리면서 

 - 가속시점을 가능한한 빨리 잡고

 - 직선에 들어설때 마군에 막히지 않게 하는 것

저 셋에 더해 마장이 부드러울수록 직선에 들어서기 전까지 최대한 앞선으로 나가야 하는 운영도 필요했는데, 이건 최종 직선 편에서 후술.

3. 최종 직선

근 700여 미터를 줄창 내리달리는 긴 직선...으로 간단히 설명되곤 하는데, 여기도 함정이 두개 더 숨어 있다.

첫째는 바로 캠버.

바깥쪽에서부터 안쪽으로 갈수록 쑥 하고 내려가는 경사camber가 있다.

만약 코너에 이런 캠버가 있다면 원심력이 억제돼서 

속도를 높인 상태에서 코너를 돌수 있는 이점이 있다지만...

직선에서는? 그저 뛸때의 밸런스를 조져놓는 악조건일 뿐.

그냥도 뛰기 힘든 조건인데 좆같은 언덕 올라와서 좆같은 코너를 돌아온 상황.

아무 제어 없이 전력으로 몰았다간 당연히 왼쪽으로 기대게 되는데...

문제는 마장 컨디션이 부드럽고 무거울수록

최종 직선은 잔디 상태가 가장 좋은 바깥쪽(오른쪽)을 달려야 한다는 것.

기수들은 막판에 말을 전력으로 몰면서도 왼쪽으로 쏠리는 진로를

억지로 오른쪽으로 바꿔야 하는 난제에 시달린다.

거기에 바깥쪽 자리를 잡으려면 태튼햄 코너를 빠져나오는 시점에서 앞선에 있어야 자리싸움이 유리.

작년 스노우폴의 오크스 퍼포먼스가 대단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코너 탈출때만해도 중단 뒤쪽에 있었는데 미친 가속력과 몸빵으로 치고 나오면서 

최외곽을 우격다짐으로 채 버린 다음에 16마신차 승리.

다만 파워가 상대적으로 우세한 수말들의 경우는 그냥 무시하고 최단거리 인코스를 공략하는 경우도 많다.

마장 컨디션이 동일하다면 대체로 오크스보다는 더비 쪽이 인코스 공략을 하는 경우가 많음.

마장 컨디션은 똑같이 Good to Soft로 발표됐지만 스노우폴과는 다르게 인을 파는 아다야르와 다른 수말들

그리고 직선은 사실 쭉 내리막이 아니라 골 직전 100m부터는 다시 오르막으로 바뀐다.

골이 목전이라 힘이 빠질대로 다 빠진 상태에서 엿을 먹이는 오르막.

이렇게 우회전, 좌회전, 파워, 코너링, 균형감각, 스피드, 스태미너, 근성 어느 하나 빠지지 않고 요구하는 코스 특성상

경주마의 덕목을 모두 갖춘 올마이티 능력마일수록 엡섬 더비에서 잘 뛰게 된다.

그래서인지 엡섬에서 이기는 말은 요구하는 바가 다른 롱샹의 개선문상에서는 의외로 별 재미를 못봤다.

1965년 시 버드 이후로 엡섬 더비와 개선문상을 같은 시즌에 이겼던 말은 그 오랜 기간동안 딱 여섯마리 뿐.

(밀 리프, 람타라, 신다르, 시 더 스타즈, 워크포스, 골든 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