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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심심해서 세보는 쬬공 군사전적(스압)

LucidAria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4.05.19 00:10:17
조회 452 추천 8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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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탄 모바일로 우회해서 올림

윾식아 PC버젼 좀 어떻게 해봐라 65535자 제한이 뭐냐 ㅡㅡ

추가적인 가독성은 PC버젼으로 다듬어봄

승​
무​
​패​


1. ​ 파재 토벌전​


​황제가 기도위(騎都尉) 조조(曹操)에게 병사를 통솔케 하여 보냈는데, 황보숭과 조조는 주준과 군을 합하여 다시 전투를 벌여 적을 크게 격파, 수만 급의 목을 베었다. 조정은 황보숭을 도향후(都鄉侯)에 봉했다. 황보숭과 주준은 승기를 타고 진격하여 여남(汝南), 진국(陳國)의 황건당을 토벌했다. 파재를 양책(陽翟)에까지 추격, 팽탈(彭脫)을 서화현(西華;여남군)에서 공격하여, 이들을 모두 격파했다.〔四〕 남은 적들은 항복하거나 흩어져 도망했다. 세 개 군은 드디어 안정을 되찾았다. <후한서 황보숭전>


​2. ​변수 전투​


장막이 장수 위자(衛茲)에게 군사를 나누어 주어 태조를 뒤따르게 했다.

형양(滎陽-하남군 형양현)의 변수(汴水-황하의 지류)에 도착해 동탁의 장수 서영(徐榮)과 조우하여 싸웠으나 불리(不利)하여, 죽거나 다친 사졸들이 매우 많았다. 태조는 날아온 화살에 맞았고 타고 있던 말이 상처를 입었는데, 종제(從弟)인 조홍(曹洪)이 태조에게 말을 주어 밤중에 달아날 수 있었다. 서영은 태조가 이끄는 군사가 적은데도 온종일 역전(力戰-힘써 싸움)하는 것을 보고 산조(酸棗)는 쉽게 공략할 수 없다고 여겨 또한 군을 이끌고 돌아갔다. <위서 무제기>


3. ​반란 평정


태조의 군사가 적었으므로 하후돈(夏侯惇) 등과 함께 양주(揚州)로 가서 모병하니 (양주)자사 진온(陳溫), 단양태수 주흔(周昕)이 군사 4천여 명을 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용항(龍亢-예주 패국 용항현)에 당도하자 사졸들이 다수 모반했다. 질(銍-패국 질현), 건평(建平-패국 건평현)에 이르러 다시 군사 천여 명을 모으고 진군하여 하내에 주둔했다.<위서 무제기>

[위서] – 군사들이 모반하여 밤중에 태조의 장막을 불태우자 태조가 손수 검으로 수십 명을 죽였고 나머지가 모두 패하여 흩어지자 영(營)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모반하지 않은 자는 5백 여 명이었다.


4. 동군 전투


흑산적 우독(于毒), 백요(白繞), 수고(眭固;휴고) 등 10여 만 무리가 위군(魏郡-기주 위군), 동군(東郡-연주 동군)을 침략했다. 왕굉(王肱)이 이를 막지 못하자 태조가 군을 이끌고 동군(東郡)으로 들어가 복양(濮陽-동군 복양현)에서 백요를 격파했다. 이에 원소가 표를 올려 태조를 동군태수로 삼으니 동무양(東武陽-동군 동무양현)을 치소로 삼았다.<위서 무제기>


5. 동무양 전투 / 6. 내황 전투


초평 3년(192년) 봄, 태조가 돈구(頓丘-동군 돈구현)에 주둔하자 우독 등이 동무양을 공격했다. 이에 태조가 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산으로 들어가 우독 등의 본둔(本屯-본영)을 공격했다. [25]

[25] [위서] – 제장들은 모두 응당 (동무양으로) 돌아가 구원해야 한다고 하자 태조가 말했다,

“손빈(孫臏)은 조(趙)나라를 구하기 위해 위(魏)나라를 공격했고 경엄(耿弇)은 서안(西安-청주 제국 서안현)을 패주시키고자 하여 임치(臨菑-제국 임치현)를 공격했소. 적이 우리 군이 서쪽으로 간다는 말을 들으면 (본둔으로) 돌아올 것이니 무양의 어려움은 저절로 풀릴 것이오. 만약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우리 군이 능히 그들의 본둔을 깨뜨릴 수 있고, 적은 결코 무양을 함락시키지는 못할 것이오.”

그리고는 이를 실행했다.

우독 등이 이 일을 듣고 (동)무양을 버리고 되돌아왔다. 태조는 수고를 요격(要擊-도중에서 차단하여 공격함)하고 또한 흉노 어부라(於夫羅)를 내황(內黃-위군 내황현)에서 공격해 모두 대파했다. <위서 무제기>


7. 황건적과의 싸움


[위서] – 태조가 보기 천여 명을 이끌고 전지(戰地)를 시찰하다 갑자기 적의 둔영에 맞닥뜨려 싸웠으나 불리하였다. 죽은 자가 수백 명에 이르니 군사들을 이끌고 돌아왔다. 적이 뒤이어 전진했다.


8. 황건적 평정


황건은 도적이 된지 오래고 여러 차례 승세를 탔으므로 병사들이 모두 정예하고 사나웠다. 태조의 군사들은 구병(舊兵-오래된 군사)이 적고 신병(新兵)들은 제대로 훈련 받지 못했기에 전군이 모두 두려워했다. 태조가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친히 장사(將士-장병)들을 순시하며 상벌을 분명히 권하니 군사들이 다시 기세를 떨쳤다. 그 기세를 이어 토격(討擊)하자 적들이 점차 꺾이어 물러났다. 이에 적이 태조에게 서신을 보내 말했다,

“예전에 제남(濟南)에서 신단(神壇)을 허물어뜨렸을 때는 그 도(道)가 중황태을(中黃太乙)과 같아 그대가 도를 아는 것처럼 보였는데 이제 다시 미혹(迷惑)되었구려. 한(漢)의 운수가 이미 다하고 황가(黃家)가 설 것이니, 하늘의 대운(大運)은 군(君-그대)의 재능과 역량으로 감당할 수 있는 바가 아니오.”

태조가 격서(檄書)를 읽고는 이를 꾸짖으며 욕했다. 여러 차례 항복할 길을 열어 보여 주고는 기병(奇兵)과 복병(伏兵)을 설치했다. 밤낮으로 어울려 싸워, 싸울 때마다 번번이 포로로 사로잡히자 이에 적들이 퇴주(退走)했다. <위서>


9. 평원 전투


원술이 원소와 서로 틈이 벌어지자 공손찬에게 도움을 청했다. 공손찬은 유비를 고당(高唐-청주 평원군 고당현)에, 선경(單經)을 평원(平原-평원군 평원현)에, 도겸을 발간(發幹-연주 동군 발간현)에 주둔하게 하여 원소를 핍박했다. 태조가 원소와 만나 이를 공격해 모두 격파했다.<위서 무제기>


10. 광정 전투


초평 4년(193년) 봄, 견성(鄄城- 연주 제음군 견성현)에 주둔했다. 형주목 유표(劉表)가 원술의 양도(糧道-군량 수송로)를 끊자 원술이 군을 이끌고 진류로 들어와 봉구(封丘-진류군 봉구현)에 주둔하고, 흑산적의 남은 무리와 어부라 등이 그를 도왔다. 원술은 장수 유상(劉詳)을 광정(匡亭)에 주둔하게 했다.
태조가 유상을 공격하자 원술이 그를 구원하니 더불어 싸워 대파했다. <위서 무제기>


11. 원술 추격전


원술은 봉구(封丘)로 물러나 지켰고 이에 봉구를 포위했는데 맞붙어 싸우기도 전에 원술은 양읍(襄邑-진류군 양읍현)으로 달아났다. 이를 추격하여 태수(太壽)에 당도하자 수로의 물을 터뜨려 성에 물을 끌어들였다. (원술은) 영릉(寧陵-예주 양국 영릉현)으로 달아났고 또다시 추격하자 구강(九江-양주 구강군)으로 달아났다.


12. 도겸 10성함락


가을, 태조가 도겸을 정벌해 10여 성을 함락시켰으나 도겸은 성을 지킬 뿐 감히 나오지 못했다.


13. 담성 전투


도겸이 담성(郯城)으로 물러나 지키니, 조조가 이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고, 이에 되돌아갔다.<후한서 도겸전>


14. 도륙


지나는 길에 있던 추려(取慮), 저릉(雎陵), 하구(夏丘)를 함락시키고, 모조리 도륙(屠戮)하였다.<후한서 도겸전>


15. 재차 시작된 도겸 공격


여름, 순욱(荀彧), 정욱(程昱)에게 견성을 지키게 하고 다시 도겸을 정벌하여 다섯 성(城)을 함락시키니 공략한 땅이 동해(東海-서주 동해군)에까지 이르렀다.<위서 무제기>


16. 담현 전투


돌아오는 길에 담(郯-동해군 담현)을 지나는데 도겸의 장수 조표(曹豹)가 유비와 함께 담(郯) 동쪽에서 태조를 요격했다. 태조가 이를 격파하고 마침내 양분(襄賁-동해군 양분현)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지나는 길에 잔륙(殘戮-살륙)한 곳이 많았다.<위서 무제기>


17. 복양 전투


여포가 출병하여 싸웠는데 먼저 기병으로 청주병을 공격했다. 청주병이 달아나 태조의 진영이 어지러워지자 (태조는) 말을 달려 불길을 벗어나다 말에서 떨어져 왼쪽 손바닥에 화상을 입었다. 사마 누이(樓異)가 태조를 부축해 말에 오르게 하고 이끌고 빠져나왔다.<위서 무제기>

원위(袁暐)의 [헌제춘추]獻帝春秋 – 태조가 복양을 포위하자 복양의 대성(大姓)인 전씨(田氏)가 내통하여 태조는 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동문을 불태워 돌아갈 뜻이 없음을 보였는데, 싸움이 벌어지자 군이 패했다. 여포의 기병이 태조를 붙잡았으나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물었다,

“조조는 어디에 있는가?”

태조가 말했다,

“황마(黃馬)를 타고 달아나는 자가 조조입니다.”

이에 여포의 기병이 태조를 놓아주고는 황마를 탄 자를 뒤쫓았다. 성문의 불길이 여전히 거세었으나 태조는 불길을 뚫고 빠져나왔다.


18. 복양 대치


둔영에 도착하기 전 제장들은 태조가 보이지 않자 모두 두려워했다. 이에 태조가 친히 군사들을 위로하고 군중에 영을 내려 속히 공구(攻具-공성 무기)를 만들도록 했다. 그리고 다시 여포를 공격하여 백여 일 동안 서로 대치했다. 황충(蝗蟲-누리)이 일어 백성들이 크게 굶주리고 여포의 양식 또한 소진되니 각각 군을 이끌고 물러났다.<위서 무제기>


19. 정도 전투


흥평 2년(195년) 봄, 정도(定陶-제음군 정도현)를 습격했다. 제음태수 오자(吳資)가 남성(南城)을 지키니 함락시키지 못했다. <위서 무제기>


20. 여포 격파


때마침 여포가 도착하자 또한 여포를 공격하여 깨뜨렸다. <위서 무제기>


21. 거야 전투


여름, 여포의 장수 설란(薛蘭), 이봉(李封)이 거야(鉅野-연주 산양군 거야현)에 주둔했다. 태조가 이를 공격하자 여포가 설란을 구원했는데, 설란은 패하고 여포는 달아났고 마침내 설란 등을 참수했다. <위서 무제기>


22. 동민 전투


여포는 다시 동민(東緡-산양군 동민현)에서부터 진궁과 함께 만여 명을 이끌고 와서 싸웠다. 이때 태조의 군사들이 적었는데 복병을 설치하고 기병(奇兵-기습부대)을 풀어 공격하여 이를 대파하니 여포는 밤중에 달아났다. <위서 무제기>

[위서] – 이때 군사들이 모두 보리를 수확하러 나가 있어 남아 있는 자는 천명도 안 되었고 둔영은 견고하지 못했다. 이에 태조가 부인(婦人)들에게 영을 내려 비(陴-성가퀴. 성 위에 쌓은 낮은 담)를 수비하게 하고 남아 있는 전군으로 여포에 맞섰다. 둔영 서쪽에 큰 둑이 있었는데 그 남쪽 숲이 매우 깊었다. 여포는 복병이 있을까 의심하여 서로 말하기를,

“조조는 속임수가 많으니 복병 가운데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

고 하며 군을 이끌고 남쪽 10여 리 되는 곳에 주둔했다. 다음 날 여포가 다시 오자 태조는 둑 안에 병사들을 숨기고 나머지 절반의 군사는 둑 밖에 두었다. 여포가 점차 진격하자 영을 내려 경병(輕兵-경무장병)으로 싸움을 걸게 했다. 서로 맞부딪치자 복병들이 일제히 둑 위로 오르며 보기(步騎-보병과 기병)가 함께 진격하여 여포군을 대파하고 북과 수레를 노획했다. 여포군의 둔영에까지 추격했다가 돌아왔다.



23. 정도 함락


태조는 다시 정도(定陶)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군을 나누어 여러 현들을 평정했다. <위서 무제기>


24. 옹구 전투


장막은 여포를 뒤따르면서 동생인 장초(張超)에게 가속들을 이끌고 옹구(雍丘-진류군 옹구현)를 보전하도록 했다.
가을 8월, 옹구를 포위했다.
겨울 10월, 천자가 태조를 연주목(兗州牧)으로 임명했다.
12월, 옹구가 무너지고 장초는 자살하였고 장막의 삼족을 멸했다. 장막은 원술에게로 가서 구원을 청하려다 그의 병사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위서 무제기>


25. 진국 공략


연주가 평정되자 동쪽으로 진(陳-예주 진국)의 땅을 공략했다.
이 해 장안에 난이 일어나 천자가 동천(東遷)했다. 조양(曹陽)에서 (이각군에게) 패하자 황하를 건너 안읍(安邑)으로 행차했다.
건안 원년(196년) 봄 정월, 태조군이 무평(武平-예주 진국 무평현)에 임하자 원술이 임명한 진상(陳相-진국의 국상) 원사(袁嗣)가 항복했다. <위서 무제기>


26. 협천자 과정에서의 위기


위략魏略에서 「진眞은 본래 성姓이 진秦이었는데 조씨曹氏의 양자가 되었다. 혹은 ‘그의 부친인 백남伯南[2]이 일찍부터 태조太祖와 서로 친했는데 흥평興平(194-195년) 말에 원술袁術의 부당(部黨,도당,일당)이 태조와 서로 공겁(攻劫,공격)하니 태조가 출군하였다가 적군에게 뒤쫓겨 달아나 진씨秦氏(의 집)으로 들어가자 백남이 문을 열고 그를 맞아들였다. 적군이 태조의 소재를 묻자 답하기를 ’내가 그 사람이다‘ 하였다가 마침내 해를 입었다. 이로 말미암아 태조가 그의 공을 기려 그의 성을 (曹로) 바꾸었다.’고도 한다.」 하였다.


27. 여남 전투


여남과 영천의 황건적 하의(何儀), 유벽(劉辟), 황소(黃邵), 하만(何曼) 등은 각각 그 무리가 수만에 이르렀는데, 처음에 원술에 호응했다가 다시 손견에 붙었었다. 2월, 태조가 진군하여 이를 토파(討破)하고 유벽, 황소 등을 참수하자 하의의 무리가 모두 투항했다. 천자가 태조를 건덕장군(建德將軍)으로 임명했다. <위서 무제기>


28. 양봉 격파



조조가 낙양이 무너지고 황량하여(殘荒 = 破败荒凉) 마침내 황제를 옮겨 허許현으로 행차하였다. 양봉, 한섬은 거가를 막으려 하니(要遮=拦截) 이르지 못했고, 조조가 치니, [헌제춘후獻帝春秋 : 거가가 낙양에서 나와 轘轅(山名, 在河南 登封县 西北三十里)의 동쪽에서부터 양봉, 한섬이 군을 이끌고 추격하였다. 경기병이 이미 이르니, 조조가 양성산陽城山 골짜기 가운데의 요충지에 복병을 놓으니, 크게 패하였다. ] 양봉, 한섬은 원술에게 달아나 마침내 양주楊와 서주徐 사이에서 제멋대로 횡포하였다(縱暴=肆意暴虐).<후한서 동탁전>


천자가 동쪽으로 향하자 양봉은 양(梁)에서부터 이를 요격하려 했으나 미치지 못했다.

겨울 10월, 공(公)이 양봉을 정벌하니 양봉은 남쪽으로 원술에게로 달아났고 마침내 양봉의 양(梁)에 있던 둔영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위서 무제기>


29. 완성 전투


2년(197) 봄 정월, 공(公)이 완(宛-형주 남양군 완현)에 이르자 장수가 항복했는데 그 뒤 이를 후회하여 다시 모반했다. 공(公)이 더불어 싸웠으나 군이 패하고 날아온 화살에 맞았고, 장자(長子-큰 아들) 조앙(曹昂), 제자(弟子-동생의 아들. 즉 조카) 조안민(曹安民)이 해를 입었다.<위서 무제기>


30. 장수 추격군 격파


이에 공은 군을 이끌고 무음(舞陰-남양군 무음현)으로 돌아갔는데, 장수가 기병을 이끌고 와서 노략질하자 공이 이를 격파했다. 장수는 양(穰-남양군 양현)으로 달아나 유표와 합쳤다.
공(公)이 제장들에게 말했다,

“내가 장수 등을 항복시켰으나 실수로 인질을 잡아 두지 않아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소. 내가 패한 이유를 알만 하오. 제경(諸卿)들은 이를 잘 살펴 지금 이후로 다시 패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그리고 허도로 돌아왔다.


31. 수춘 전투


가을 9월, 원술이 진(陳-예주 진국)을 침략하자 공이 동쪽으로 가서 정벌했다. 원술이 공이 친히 온다는 것을 듣고 군(軍)을 버리고 달아나며 그의 장수인 교유(橋蕤), 이풍(李豊), 양강(梁綱), 악취(樂就)를 남겼다. 공이 도착하여 교유 등을 격파하고 모두 참수했다. 원술이 달아나 회수를 건넜다. 공이 허도로 돌아왔다.


32. 호항 전투


겨울 11월, 공이 친히 남쪽으로 정벌하여 완에 도착했다. 유표의 장수 등제(鄧濟)가 호양(湖陽-남양군 호양현)을 점거하니 이를 공격해 함락시키고 등제를 사로잡자 호양이 항복했다. <위서 무제기>


33. 무음 전투


무음(舞陰)을 공격해 함락시켰다.<위서 무제기>



34. 장수 포위


3월, 공이 양(穰-남양군 양현)에서 장수(張繡)를 포위했다.
여름 5월, 유표가 군사를 보내 장수를 구원하며 군(軍)의 배후를 끊고자 했다.

[헌제춘추] – 원소를 배반한 병졸이 공에게로 와서 말했다,

“전풍(田豐)이 원소에게 허도를 빨리 습격하라고 하면서 만약 천자를 끼고 제후에게 호령하면 가히 사해(四海)를 지휘해 평정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에 공이 장수(張繡)에 대한 포위를 풀었다.


35. 추격군 격파


공이 군을 이끌고 퇴각하려 하는데 장수의 군사들이 추격해 와 공의 군이 전진할 수 없자 둔영을 연결하며 점차 전진했다. 공이 순욱(荀彧)에게 서신을 보내 말했다,


“적이 와서 우리 군을 추격해 와 비록 하루에 몇 리 밖에 행군하지 못하지만 내가 헤아려 보건대 안중(安衆-남양군 안중현)에 도착하면 반드시 장수(張繡)를 격파할 수 있소.”


안중(安衆)에 도착하자 장수가 유표의 군사와 합쳐 험지를 지키니 공의 군은 앞뒤로 적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에 공은 밤중에 험지를 뚫어 땅굴을 만들고 치중(輜重)을 모두 지나게 한 후 기병(奇兵)을 두었다. 날이 밝자 적은 공이 달아났다고 여겨 전군이 추격해왔다. 이에 기병(奇兵)을 풀고 보기(步騎)로 협공하여 적을 대파했다. <위서 무제기>



36. 추격군에 패배



가후가 장수에게 (군대를) 재촉해

"다시 추격하십시오. 다시 싸우면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라 하자 장수가 거부하며

"공의 말을 쓰지 않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소. 지금 이미 패하였는데, 어찌 다시 추격하겠소?"

라 했다. 가후가

"군대의 형세에는 변화가 있기 마련이니, 빨리 추격해 가면 필히 이로움이 있을 것입니다"

라 했다. 장수가 이 말을 믿고, 마침내 흩어진 군졸을 거두어 추격해 가서 크게 싸웠는데, 과연 이기고 돌아왔다. <위서 가후전>


37. 팽성 전투


9월, 공이 동쪽으로 여포를 정벌했다.
겨울 10월, 팽성(彭城-서주 팽성국)을 함락하고 팽성상(相) 후해(侯諧)를 사로잡았다.<위서 무제기>


38. 하비 국지전


진격하여 하비(下邳)에 이르니 여포가 친히 기병을 이끌고 역격(逆擊)했다. 이를 대파하고 여포의 효장(驍將-맹장)인 성렴(成廉)을 사로잡았다.<위서 무제기>


39. 하비 함락


이때 공이 연달아 싸워 사졸들이 피폐해졌으므로 돌아가려 하다가, 순유(荀攸)와 곽가(郭嘉)의 계책의 써서 사수(泗水)와 기수(沂水)의 물을 성에 끌어들였다. 한 달이 지나 여포의 장수 송헌(宋憲), 위속(魏續) 등이 진궁을 붙잡고 성을 들어 항복하니, 여포, 진궁을 사로잡아 모두 죽였다. <위서 무제기>


40. 사견 함락


마침내 공(公)이 황하를 건너 사견(射犬)을 포위했다. 설홍, 무상이 무리를 거느리고 항복하자 열후에 봉하고 오창(敖倉)으로 환군했다. 위충(魏种)을 하내태수로 삼아 하북(河北)의 일을 맡겼다.
당초 공이 위충(魏种)을 효렴으로 천거했었는데, 연주(兗州)가 모반하자 공이 말했다,

“오직 위충 만은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위충이 달아났다는 말을 듣고 공이 노하여 말했다,

“위충이 남쪽으로 월(越)로 달아나지 않고 북쪽으로 호(胡)로 달아났을 것이니 너를 내버려두지 않으리라!”

사견(射犬)을 함락시킨 후 위충을 사로잡자 공이 말했다,

“오로지 너의 재능을 아낄 뿐이다!“

이에 묶인 것을 풀어주고 그를 기용했다.<위서 무제기>


41. 소패 전투


공이 장차 친히 동쪽으로 유비를 치려 하자 제장들이 모두 말했다, “공과 천하를 다투는 자는 원소입니다. 지금 원소가 바야흐로 쳐들어오려 하는데 이를 내버려두고 동쪽으로 가시려 하니, 원소가 이를 틈타 우리 배후를 친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공이 말했다, “무릇 유비는 인걸(人傑)이니 지금 공격하지 않으면 필시 후환이 될 것이오. 원소는 비록 뜻은 크지만 사세를 살피는 일에 더디니 필시 움직이지 못할 것이오.”
곽가 또한 공에게 권하자 마침내 동쪽으로 유비를 쳐서 깨뜨리고 유비의 장수 하후박(夏侯博)을 사로잡았다. <위서 무제기>


42. 하비 항복


유비는 원소에게로 달아났고 유비의 처자를 사로잡았다. 유비의 장수 관우는 하비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다시 진격하여 공격하니 관우가 투항했다.


43. 백마 전투


2월, 원소는 곽도(郭圖), 순우경(淳于瓊), 안량(顔良)을 보내 백마(白馬)에서 동군태수 유연(劉延)을 공격하고, 원소 자신은 군을 이끌고 여양(黎陽)에 도착해 장차 황하를 건너려 했다.
여름 4월, 공이 북쪽으로 가서 유연을 구원했다. 순유(荀攸)가 공을 설득하며 말했다,

“지금 군사가 적어 대적할 수 없으므로 적의 세력이 분산되도록 해야 합니다. 공께서 연진(延津)에 도착해 장차 황하를 건너 원소군의 배후로 향하는 것처럼 하면 원소는 필시 서쪽으로 가서 이에 대응할 것입니다. 그 연후에 경병(輕兵-경무장병)으로 백마(白馬)를 기습하여 엄기불비(掩其不備-적이 방비하지 못한 곳을 엄습함)하면 가히 안량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공이 이 말에 따랐다.
원소는 (공의) 군사들이 도하하려 한다는 것을 듣고 즉시 군사를 나누어 서쪽으로 가서 이에 대응하게 했다. 그러자 공은 군을 이끌고 급히 진군하여 백마로 나아갔다. 10여 리 떨어진 곳에 채 이르지 않았을 때 안량이 크게 놀라 (군을 이끌고) 와서 맞서 싸웠다. 장료(張遼), 관우(關羽)를 선봉에 세워 이를 격파하고 안량을 참수했다. 마침내 백마에 대한 포위를 풀고 그 백성들을 황하를 따라 서쪽으로 옮겼다. <위서 무제기>



44. 연진 전투


이에 원소는 황하를 건너 공의 군대를 추격하여 연진(延津) 남쪽에 이르렀다. 공은 군을 이끌고 남쪽 둑 아래에 주둔하고 군사를 시켜 망루에 올라 살펴보게 하니 ‘가히 5-6백기는 된다.’고 보고했다. 얼마 후 다시 ‘기병은 점점 많아지고 보병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고 했다.

공이 말하길, “다시 보고하지 마라”고 하고는 기병들에게 영을 내려 말안장을 벗기고 말을 풀어놓게 했다. 이때 백마에서 치중(輜重)이 길을 떠났다. 제장들은 적의 기병이 많으니 돌아가 둔영을 보전하는 게 낫다고 하였다. 순유가 말했다,

“이는 적을 유인하려는 것인데 어찌 되돌아간다는 말이오!”
원소의 기장(騎將) 문추(文醜)는 유비와 함께 5-6천 기를 이끌고 앞뒤로 이르렀다. 제장들이 다시 말하길,

“말에 올라야 합니다.”

고 하자 공은

“아직 아니오.”

라 했다. 얼마 후 기병이 점차 많아지고 혹 나뉘어져 치중으로 향했다. 공이 말했다,

“이제 되었소.”

이에 모두 말에 올라탔다. 이때 기병이 6백을 채우지 못했으나 마침내 군사를 풀어 공격하여 원소군을 대파하고 문추를 참수했다. 안량, 문추는 원소의 명장이었으나 두 번 싸워 모두 죽임을 당하니 원소군이 크게 진동했다. <위서 무제기>


45. 관도 회전


8월, 원소가 둔영을 연결하며 점차 전진해 모래언덕에 의지해 둔영을 세웠는데 동서로 수 십리에 이르렀다. 공 또한 둔영을 나누어 서로 대치하고 합전(合戰-맞붙어 싸움)했으나 불리했다.<위서 무제기>


46. 관도 공방전


원소가 높은 망루(高櫓)를 만들고 토산(土山)을 일으켜, (조조군의) 진영 속으로 활을 쏘니 진영에서는 모두 방패로 덮고서는 다들 크게 두려워했다. 태조가 이에 발석거(發石車)를 만들어 원소의 누각을 공격하니 모두 격파되고, 원소군에서는 이를 벽력거(霹靂車)라 불렀다.

주 : 『위씨춘추(魏氏春秋)』에 이르길 「옛날에도 화살과 돌이 있었고 또 전(傳)에 이르길 “괴(旝=돌쇠니)가 작동하면 북을 친다”고 하였는데 『설문』에 이르길 “괴는 돌을 쏘는(發石) 것이다”라 하였으니, 이에 발석거를 만든 것이다.

원소가 땅굴(地道)를 만들어 태조의 진영을 습격하여 했다. 태조가 번번이 안쪽에서 긴 참호를 만들어 막아내고, 또 정예병을 보내 원소군의 운반수레를 습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거기에 실린 양곡을 다 불살라 버렸다. 태조가 원소와 서로 대치한지 시일이 오래되어, 백성들은 피폐하고 곤핍하니, 많은 이가 반역하여 원소에게 호응하였고 군량도 모자랐다. <위서 원소전>


46. 오소 전투


순우경 등은 공의 군사가 적은 것을 멀리서 보고 진문(陳門) 밖으로 출진했다. 공이 급히 들이치니 순우경은 물러나 둔영을 지켰고, 다시 이를 공격했다. 원소는 기병을 보내 순우경을 구원하게 했다. 좌우에서 어떤 이가 말했다,

“적 기병이 점점 접근하니 군사를 나누어 맞서십시오.”

공이 분노하며 말했다,

“적이 등 뒤까지 오거든 그때 말하라!”

사졸들이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 순우경 등을 대파하고 모두 참수했다. <위서 무제기>



47. 창정 전투


6년(201년) 여름 4월, 황하 일대에서 군세를 떨치고, 창정(倉亭)에 있던 원소군을 쳐서 깨뜨렸다. 원소는 돌아가 흩어진 병사들을 다시 거두고 반기를 든 여러 군현들을 공격해 평정했다. <위서 무제기>


48. 여남 전투


9월, 공이 허도로 돌아왔다. 원소가 격파되기 전 유비를 보내 여남을 공략하게 했었는데, 여남의 적(賊) 공도(共都) 등이 이에 호응했다. 채양(蔡揚)을 보내 공도를 공격했으나 불리했고 공도에게 격파 당했다. 공이 남쪽으로 유비를 정벌했다. 유비는 공이 친히 온다는 것을 듣고 유표에게로 달아났고 공도 등은 모두 흩어졌다.<위서 무제기>



49. 여양 전투


가을 9월, 공이 이를 정벌해 연달아 싸웠다. 원담, 원상이 여러 번 패하자 물러나 굳게 지켰다.<위서 무제기>


50. 외성 전투


8년(203년) 봄 3월, 그 외성(郭)을 공격하자 (원담 등이) 출전했으나 이를 대파하니 원담, 원상은 밤중에 달아났다 <위서 무제기>


51. 원상의 역격


조조가 계속 공격해 오자 원상이 역격하여 조조를 격파했다. <후한서 원담전>


52. 모성 전투


2월, 원상이 다시 원담을 공격하며 소유(蘇由), 심배(審配)를 남겨 업(鄴)을 지키게 했다. 공이 진군해 원수(洹水-강이름)에 당도하자 소유는 항복했다. 도착한 후 업을 공격했는데 토산과 땅굴을 만들었다. 무안장(武安長-위군 무안현의 현장) 윤해(尹楷)가 모성(毛城)에 주둔하며 상당(上黨-병주 상당군)으로 양도(糧道)가 통하게 했다.

4월, 조홍(曹洪)을 남겨 업을 공격하게 하고, 공은 친히 군을 이끌고 윤해를 공격해 깨뜨린 후 돌아왔다. <위서 무제기>



53. 한단 전투


원상의 장수 저곡(沮鵠)이 한단(邯鄲-기주 조국趙國 한단현)을 수비하니 또한 이를 공격해 무너뜨렸다. <위서 무제기>


54. 부수 전투



가을 7월, 원상이 돌아와 업을 구원하자 제장들이 모두 이르길,

“이들은 귀사(歸師-퇴각하는 군사)라서 군사들이 모두 스스로 싸우고자 하니 피하는 것이 낫습니다.”

고 했다. 공이 말했다,

“원상이 큰 길을 따라 온다면 응당 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서쪽 산을 따라 온다면 사로잡을 수 있다”

원상이 과연 서쪽 산을 따라 와서 부수(滏水) 에 임해 둔영을 세웠다.

[조만전] – 척후병을 여러 부(部)의 앞뒤로 보내 살피게 했는데 모두 말하길,


‘서쪽 길을 따라왔고 이미 한단에 있다’

고 했다. 공이 크게 기뻐하며 제장들에게 말했다,

“내가 이미 기주를 얻은 것과 마찬가지오. 제군들은 이를 아시오?”

모두

“모릅니다.”

고 하자 공이 말했다,

“제군들도 오래지 않아 알게 될 것이오.”


밤중에 군사를 보내 포위망을 침범하자 공이 역격(逆擊)하여 패주시키고 마침내 그 둔영을 포위했다. 어울려 싸우기 전에 원상이 두려워하여 전 예주자사 음기(陰夔)와 진림(陳琳)을 보내 항복을 청했다. 공이 이를 허락치 않고 포위를 더욱 급하게 했다. 원상은 밤중에 달아나 기산(祁山)을 보전했고 공이 이를 추격했다. 원상의 장수 마연(馬延), 장의(張顗) 등이 (공의) 진(陳)으로 와서 항복하자 원상군이 크게 허물어졌고 원상은 중산(中山-기주 중산국)으로 달아났다. 원상의 치중을 모두 노획하고 원상의 인수(印綬), 절월(節鉞)을 얻어 원상으로부터 항복한 자들을 시켜 그의 집안사람들에게 보여주자 성안의 사람들이 무너지고 기가 꺾이었다. <위서 무제기>
55. 업성 함락
​5월, 토산과 땅굴을 허물어버리고, 성을 둘러싸는 참호를 파고 장수(漳水)를 터뜨려 성 내로 끌어들이니, 성 중에 굶어 죽는 자가 절반을 넘었다.
​8월, 심배의 형 심영(審榮)이 자신이 수비하던 성의 동문(東門)을 열어 군사들을 안으로 들였다. 심배가 맞서 싸웠으나 패했다. 심배를 사로잡아 참수하고 업을 평정했다. 공이 원소의 묘에 임해 제사를 지내고 곡을 하고 눈물을 흘렸다. 원소의 처를 위로하고 그 가인(家人)들과 보물을 되돌려 보내고, 잡다한 비단과 솜을 내리고 관에서 양식을 공급하도록 했다.<위서 무제기>

56. 평원 전투


12월, 공이 평원으로 입성하고 여러 현들을 공략해 평정했다.<위서 무제기>


57. 남피 전투


10년(205년) 봄 정월, 원담을 공격해 격파하고 원담을 참수하고 그 처자를 죽이니 기주가 평정되었다.

[위서] – 공이 원담을 공격할 때 아침부터 시작해 한낮에 이르기까지 판가름 나지 않았다. 이에 공이 친히 북채와 북을 잡자 사졸들이 모두 분발했고 이때에 응하여 적을 격파했다.


58. 광평 전투


여름 4월, 흑산적 장연(張燕)이 그 무리 10여 만을 이끌고 투항하니 열후에 봉했다. 고안(故安)의 조독(趙犢), 곽노(霍奴) 등이 유주자사, 탁군태수를 죽였다. 삼군의 오환이 광평(獷平)에서 선우보(鮮于輔)를 공격했다.
가을 8월, 공이 이를 정벌해 조독 등을 참수하고, 노하(潞河)를 건너 광평을 구원하자 오환이 새(塞) 밖으로 달아났다.<위서 무제기>


59. 호관 전투


11년(206년) 봄 정월, 공이 고간을 정벌했다. 고간이 이를 듣고 그 별장(別將)을 남겨 성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흉노로 들어가 선우에게 구원을 청했으나 선우는 거절했다. 공이 호관을 석 달 동안 포위해 함락했다. 이에 고간은 형주로 달아났으나 상락도위(上洛都尉) 왕염(王琰)이 그를 붙잡아 참수했다.<위서 무제기>



60. 관승 정벌


가을 8월, 공이 동쪽으로 해적(海賊) 관승(管承)을 정벌해 순우(淳于-북해국 순우현)에 도착했다. 악진, 이전을 보내 이를 격파하자 관승은 바다의 섬으로 달아났다. 동해(東海)군의 양분(襄賁), 담(郯), 척(戚)현을 떼어내 낭야(瑯邪)군에 더하고, 창려군(昌慮郡)을 없앴다.<위서 무제기>


61. 백랑산 전투


가을 7월, 큰 홍수가 나서 바다에 면한 길(傍海道)이 통하지 않았는데, 전주(田疇)가 향도(鄕導-길 안내자)가 되기를 청하자 공이 이를 따랐다. 군을 이끌고 노룡(盧龍)의 새(塞)를 나오니 새 밖의 길이 끊어져 통하지 않았다.

이에 산을 파고 계곡을 메우며 500여 리를 가서 백단(白檀)을 거치고 평강(平岡)을 지나 선비정(鮮卑庭-선비족의 앞뜰, 영역이란 말로, 오환선비동이전에 의하면 당시 오원, 운중에서 동쪽으로 요수에 이르기까지 영역을 선비정이라 부름)을 건너고 동쪽으로 유성(柳城)으로 향했다. (유성에 도착하기) 2백리 전에 적들이 이를 알아챘다. 원상, 원희는 답돈(蹋頓), 요서 선우 누반(樓班), 우북평 선우 능신저지(能臣抵之) 등과 함께 수만 기를 이끌고 맞섰다.
8월, 백랑산(白狼山)에 올랐다가 졸지에 적과 조우했는데 그 무리들이 매우 많았다. 공의 거중(車重-치중)은 후방에 있고 갑옷을 입은 자는 적으니 좌우가 모두 두려워했다. 공이 높은 곳에 올라 적의 진지가 정돈되지 못한 것을 보고는 이에 군사를 풀어 공격하며 장료(張遼)를 선봉으로 세웠다.
적군이 크게 붕괴되니 답돈과 명왕(名王-관직명) 이하를 참수하고, 투항한 호인(胡人), 한인(漢人)이 20여 만 명에 이르렀다. 요동 선우 속복환(速僕丸)과 요서, 우북평의 여러 호족들은 그 종인(種人-종족)들을 버리고 원상, 원희와 함께 요동으로 달아났는데, 그 무리들이 수천 기에 이르렀다. <위서 무제기>


62. 장판 전투


조공은 군비가 충실한 강릉을 선주가 먼저 점거하는 것을 두려워해, 치중(輜重)을 내버려두고 경군(輕軍-경병)으로 양양에 도착했다.
선주가 이미 지나갔다는 것을 듣고 조공은 정기(精騎-정예기병) 5천을 이끌고 이를 추격했다. 하루 밤낮에 3백여 리를 달려 당양의 장판(長阪)에 이르렀다. 선주는 처자를 버리고 제갈량, 장비, 조운 등 수십 기를 이끌고 달아났고, 조공은 그의 무리들과 치중을 크게 노획했다. <촉서 선주전>


63. 적벽 전초전


손권은 곧 주유와 정보 등을 파견하여 유비와 힘을 합쳐 조조에게 대항하도록 했다. 두 군대는 적벽(赤壁)에서 만났다. 당시 조조의 병사들은 이미 질병에 걸려 있었으므로, 처음 한 차례 싸움에서 조조의 군대는 패하여 장강 북쪽에 주둔했다.<오서 주유전>


64. 적벽대전


영웅기(英雄記)에 말하기를 “조조(曹操)가 진군(進軍)하여 강(江) 위쪽에 이르러 적벽(赤璧)을 따라 강을 건너고자 하였다. (그러나) 배가 없어 대나무 뗏목[竹排]을 만들게 하여 부곡(部曲)들로 하여금 그것에 타게 하였다. 한수(漢水)를 따라서 아래로 내려와 큰 강으로 나왔고 포구(浦口)에 (뗏목을) 대어 놓고 아직 건너가지 아니하였다. 주유(周瑜)는 또 밤에 몰래 경선(輕船-날랜 배)과 주가(走舸-노를 젓는 큰 배) 100척으로 하여금 (조조군의) 뗏목을 불 지르게 하니 조조는 이에 밤을 틈타 달아났다.” 하였다.

- 태평어람 권771 -


65. 동관 전투


공이 동관에서 북쪽으로 강을 건너려 했는데 미처 건너기 전에 마초가 배를 향해 달려와 급박하게 싸웠다. 이에 교위 정비(丁斐)가 우마(牛馬)를 풀어 유인하자 적들이 우마를 취하느라 어지러워졌고 이에 공이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 <위서 무제기>

[조만전] – 공이 장차 황하를 건너려 하여 선두부대가 막 건널 때 마초 등이 돌연 당도했는데 공은 호상(胡床)에 앉아 일어서지 않았다. 장합 등이 사태가 급박한 것을 보고 함께 공을 이끌어 배에 타게 했다. 황하의 물이 빠르고 세차 물에 들어가자 4-5리를 흘러갔고, 마초 등이 기병으로 추격하며 활을 쏘니 화살이 비오듯 쏟아졌다. 제장들이 군이 패하는 것을 보았는데다 또한 공이 있는 곳을 알지 못해 모두 황망하고 두려워했는데, (공을) 만나보고는 슬퍼하고 또 기뻐하며 어떤 이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공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 하마터면 소적(小賊)들에게 곤란을 당할 뻔 했구나!”


조조를 따라 동관(潼關)에서 한수(韓遂)와 마초(馬超)를 토벌했다. 조조는 북쪽으로 가기 위해 황하를 건너기 전에 먼저 군대를 건너가게 하고, 허저와 호사 백여 명을 남쪽 언덕에 주둔시켜 뒤를 끊도록 했다. 마초는 보병과 기병 만여 명을 이끌고 조조군을 추격하여 왔는데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허저는 조조에게 적군이 너무 많이 오고, 지금 병사들은 이미 다 건넜으니 떠나야만 한다고 말하고는 조조를 부축하여 배에 태웠다. 적의 전투가 급해지고, 군사들이 건너려는 것을 다투니, 배가 무거워 가라앉으려 하였다. 허저는 배에 매달린 자들을 참하였고, 왼손으로 말 안장을 들어 조조에게 날아오는 화살을 막았다. 사공이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자, 허저는 오른손으로 배를 저어 나아가게 하여 가까스로 황하를 건넜다. 이날, 허저가 없었다면 조조는 위험에 빠졌을 것이다.<위서 허저전>


66. 위수 둔영 전투


황하를 따라 용도(甬道-담을 양쪽에 쌓아 만든 통로)를 만들며 남쪽으로 진군했다. 적이 물러나 위구(渭口-위수가 황하로 유입되는 입구)를 지켰다. 이에 공이 의병(疑兵-속이는 군사)을 여럿 두고는, 배에 군사들을 태워 몰래 위수(渭水)로 들어가 부교(浮橋)를 만들고, 밤중에 군사를 나누어 위수 남쪽에 둔영을 세웠다. 적이 밤중에 둔영을 공격하자 복병(伏兵)으로 이를 격파했다.


67. 위수 도하


9월, 진군하여 위수를 건넜다.

[조만전] – 공의 군대가 위수를 건널 때마다 매번 마초의 기병이 충돌(衝突)해 둔영을 세울 수 없었고, 또한 땅이 대부분 모래라 보루를 세울 수 없었다. 누자백(婁子伯)이 공에게 말했다,

“지금 날씨가 차니 모래로 성을 만들어 물을 부으면 가히 하룻밤에 완성할 수 있습니다.”

공이 이를 좇아, 비단주머니를 많이 만들어 물을 길어와 도강한 군사로 밤중에 성을 만들게 하니 날이 밝을 무렵 성이 세워졌다. 이에 공의 군대가 모두 위수를 건널 수 있었다.


68. 회전


뒷날, 공이 또 한수에게 서신을 보냈는데 여러 곳의 글자를 첨삭해 마치 한수가 고친 것처럼 보이게 하니, 마초 등이 더욱 한수를 의심하게 되었다.
이에 공이 날짜를 정해 회전(會戰-어울려 싸움)했다. 먼저 경병(輕兵)으로 싸움을 걸고 싸움이 매우 오래 지속된 후 호기(虎騎)를 풀어 협격(夾擊)하여 대파하고 성의, 이감 등을 참수했다. 한수, 마초 등은 양주(涼州)로 도주하고 양추는 안정(安定)으로 달아나니 관중(關中)이 평정되었다. <위서 무제기>


69. 1차 유수구 전투


18년(213년) 정월, 조조가 유수(濡須)를 공격해 손권과 한 달 남짓 서로 대치했다. 조조는 멀리 손권의 군대를 보고 그들의 정제하고 엄숙함을 찬탄하고는 곧 물러갔다.<오서 오주전>
오력(吳歷): 조조는 유수(濡須)까지 진격해 와서 유선(油船;배의 일종)을 만들어, 밤에 중주(洲)를 건넜다. 손권은 수군을 움직여 포위하고는 3천 명을 붙잡았으나, 그의 군대 역시 빠져 죽은 자가 수천이나 되었다. 손권이 몇 차례 싸움을 걸었지만, 조조는 굳게 지킬 뿐 나오지 않았다. 손권은 스스로 빠른 배를 타고 유수구로부터 조조의 군대로 들어갔다. 조조의 장수들은 오나라 군대가 공격해 오는 줄 알고 그들을 치려했다. 조조가 말했다.
『이는 필시 손권이 우리 군대의 대오를 보려고 오는 것이다.』
군중에 명을 내려 엄숙함을 보이게 하고, 궁노들에게는 함부로 활을 쏘지 말도록 했다. 손권은 5, 6리를 나아가다가 군대를 철수시키려 북을 올렸다. 조조는 그 북소리에 맞춰 정연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아들을 낳으려면 응당 손중모(손권) 같아야지 유경승(유표)의 아들들은 개돼지와 같구나!』
라고 했다. 아울러 손권은 조조에게 서찰을 보내어 말하기를
「봄물이 바야흐로 불어나니 공은 속히 떠나십시오!」
라고 했다. 그리고 또 다른 종이에
「당신이 죽지 않으면 나는 안심할 수 없습니다.」
라고 위협했다. 조조는 여러 장수들에게
『손권이 나를 속이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하고는 철수했다.

위략(魏略)에서 이르길, 손권이 큰 배를 타고 전황을 살펴보니, 조공이 궁노수(弓弩)로 하여금 마구 쏘게 하여 화살이 배에 꽂히고 있었다. 배가 한쪽으로 기우뚱하자 손권은 배를 돌려 다시 한쪽 면에 화살을 꽂히게 하여 배의 평형을 맞춘 뒤 돌아왔다.


70. 저족 격파


3월, 공이 서쪽으로 장로(張魯)를 정벌해 진창(陳倉)에 이르렀는데, 장차 무도(武都)로부터 저(氐)로 들어가려 했다. 저인(氐人)들이 길을 막자 먼저 장합(張郃), 주령(朱靈) 등을 보내 공파(攻破)했다.
여름 4월, 공이 진창으로부터 산관(散關)을 나와 하지(河池)에 도착했다. 저왕(氐王-저족의 왕) 두무(竇茂)의 군사 만여 명이 험한 지세에 의지한 채 복종하지 않았다.
5월, 공이 이를 공격해 무찔렀다. 서평(西平), 금성(金城)의 제장들인 국연(麴演), 장석(蔣石) 등이 함께 한수(韓遂)의 수급을 베어 보내왔다.<위서 무제기>


71. 양평관 공성전


가을 7월, 공이 양평(陽平)에 이르렀다. 장로(張魯)는 동생 장위(張衛)와 장수 양앙(楊昂) 등을 시켜 양평관(陽平關)을 점거하게 하고, 산을 가로질러 10여 리에 걸쳐 성을 쌓았는데, 이를 공격하여 함락시키지 못하자 군을 이끌고 돌아왔다.<위서 무제기>


72. 양임 격파


적은 대군이 물러나는 것을 보고 그 수비가 흐트러졌다. 이에 공이 은밀히 해표(解剽), 고조(高祚) 등을 보내 험한 곳을 오르도록 해 야습하여 대파하고 그 장수인 양임(楊任)을 참수했다. 진격하여 장위를 공격하자 장위 등은 밤중에 달아나고 장로는 무너져 파중(巴中)으로 달아났다. <위서 무제기>


73. 2차 유수구 전투


겨울 10월, 군사들을 조련하고 [103] 마침내 손권(孫權)을 정벌하여 11월, 초(譙)에 이르렀다.
[103] [위서] – 왕이 친히 금고(金鼓-징과 북)를 들고 진퇴(進退)를 명했다.
22년(217년) 봄 정월, 왕이 거소(居巢)에 주둔했다.
2월, 진군하여 장강 서쪽의 학계(郝谿)에 주둔했다. 손권은 유수구(濡須口)에 있으면서 성을 쌓아 거수(拒守-막아서 지킴)했는데, 마침내 이를 핍박해 공격하니 손권이 퇴주(退走)했다. <위서 무제기>


21년(216년) 겨울, 조조는 거소(居巢)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곧이어 유수(濡須)를 공격했다.
22년(217년) 봄, 손권은 도위(都尉) 서상(徐詳)을 파견하여 조조를 만나 항복을 청하도록 했다. 조조는 사자를 보내 화의에 동의한다고 대답하고 새로 결혼하게 될 것을 약속했다.<오서 오주전>


후에 조공에 유수로 크게 출병하자, 손권은 여몽을 독으로 삼아 이전에 세워둔 제방을 먼저 점거하고, 그 위에다 강노(彊弩) 1만 대를 설치하여 조공에게 대항했다. 조공의 선봉이 둔영을 채 세우지도 못했는데, 여몽이 이를 공격해 격파하니, 조공이 군대를 이끌고 퇴각했다. 여몽을 좌호군(左護軍) 호위장군(虎威將軍)으로 배수했다. <오서 여몽전>


74. 한중 전투


조공이 장안으로부터 친히 대군을 이끌고 남쪽을 정벌했다. 선주가 멀리서 이를 헤아려 말했다,


“비록 조공이 온다해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니 내가 반드시 한천(漢川)을 차지할 것이다.”


조공이 도착하자 선주는 군사들을 모아 험고한 곳을 지키고 끝내 교봉(交鋒-교전)하지 않자 (조공이) 여러 달이 지나도 이를 함락하지 못하고 사망자가 날로 많아졌다.

여름, 조공은 과연 군을 이끌고 돌아가니 선주가 마침내 한중을 차지했다.<촉서 선주전>

​===
​시발 존나많네
​암튼 정리해보면 존나 많은데서 싸웠고 이긴 양반임


전적 정리하면 54승 16패 4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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