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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후한의 대외정책 (2)앱에서 작성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4.05.22 19:5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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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후한 중기의 대외정책 (1)

이시기 후한 대외정책은 동시대의 로마제국처럼 이민족의 비중이 매우 컸음.(*1) 한족 인구 감소와 군사력의 약화는 후한이 이전처럼 광범위하게 패권을 행사하기 보단 몇몇 군사행동을 통해 남흉노•북흉노•서강 등 이민족의 연계를 끊는 것을 목표로 하였음.

혹자는 후한이 북흉노 정벌, 서강 진압 등 군사적 성과를 냈기에 군사력은 그대로였다 말함. 그러나 이는 당대 후한의 군사 구성비를 간과한 것임. 광무개혁의 결과로 후한의 상비군 체제는 붕괴했고, 후한군의 주력은 숙련된 중국인 지휘관의 지휘를 받는 이민족 보조병이었음.(*2)

이러한 현상은 광무개혁에서 초래되었음. 후한은 전한과 달리 변경 거주민만 정기적으로 훈련을 받도록 했는데, ’국경 배후지의 몰락‘과 ‘유학적 낙관론에 따른 대규모 군축’으로 군사 시스템이 붕괴하여 국경 수비대는 예정된 훈련을 시행할 수 없었고, 국경수비대는 참담한 질적인 저하를 겪었음.(*3)

이렇듯 후한이 이민족 보조병에 군사력을 의존함에도 국경 방어체계가 나름 작동할 수 있었던 것은 이주한 이민족이 후한의 통제에 복종하고, 이이제이 전략이 효과적이었기 때문임.

서역은 북흉노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후한과 협력했고, 강족은 후한이 제공하는 사법 사비스와 교역에 만족했고, 남흉노는 기근과 황충으로 후한에 곡물을 의존하면서 완전히 목줄 잡혔고, 오환은 선비의 압력을 피해 도망치기 바빠 간간히 후한에게서 현상금을 챙기는 정도였고, 선비는 현상금과 세폐에 만족하여 중원을 공격하기 보단 초원패권에 집중함.(*4)

여러 행운과 외교적 성과에 힘입어 권신 두헌은 남흉노 선우의 표문을 근거로 북흉노 정벌을 추진함. 북흉노는 이미 몰락하여 굴욕적으로 평화를 구걸하는 처지였기에 후한 조정 내의 반발이 심했지만 두헌은 밀어붙임.

89년, 두헌은 자신이 총사령관(거기장군)을 맡고 경병을 부사령관(정서장군)으로 삼아 오영•도료영•호아영•변경 부곡병•강족/오환 보조병•남흉노 주력군으로 구성된 4만의 원정군을 데리고 출정함. 원정군은 연전연승하여 91년에 끝내 선우정을 파괴하고 북흉노를 멸망시킴.

비슷한 시기, 반초의 서역 원정 또한 성황리에 마무리 됨. 두헌과 마찬가지로 이민족 보조병이 주력이었던 반초의 서역원정군은 95년 최후의 적성 세력 언기국을 정벌했음. 그러나, 후한의 군사적 성공은 여기까지였음.

후한 내부의 권력 투쟁이 시작되며 막북•서역 평정의 뒷처리는 제대로 이행되지 못했고, 그 결과 대규모 반란과 군사적 재앙이 연달아서 일어나게 됨. 가장 먼저 균열이 일어난 곳은 흉노의 영역이었음.

본디 두헌은 북흉노 선우의 동생 어제건을 괴뢰로 삼으려 했으나, 어제건이 중원으로 오던 중 화제의 친위쿠데타로 두헌은 주살되고 어제건 괴뢰 계획은 무산됨. 어제건은 낌새가 이상함을 눈치채고 도망치려 했지만 후한군은 끝까지 쫓아가 어제건을 주살하고 북흉노 선우의 혈통은 단절됨. 

귀부한 옛 북흉노 15부 출신 20만 유민은 일단 남흉노로 소속되었음. 그러나 남흉노와 북흉노는 어마어마한 갈등을 겪었고(*5), 옛 북흉노인들은 결국 반란을 일으킴. 89년 원정군과 비슷한 구성의 4만 진압군이 파병되어 북흉노의 재건 자체는 막았지만, 15만 유민은 막북으로 탈출에 성공했음.

서역에서도 초원과 마찬가지로 대외정책의 처참한 실패가 있었음. 102년 반초는 서역도호에서 은퇴했고, 그 후임으로 부임한 임상은 심각한 실수를 저질렀음.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반초의 관용적인 통치와 달리 억압적인 통치를 강요한 임상에 맞서 서역의 모든 독립도시가 봉기하였음.

상황을 더욱 심각하게 만든 것은 후한의 대응이었음. 임상은 면직됐지만, 후한은서역을 달래기는 커녕 서역 전역을 포기하고 철수한다는 미친 결정을 내렸음. 덕분에 후한은 비단길을 완전히 상실했고, 변변찮은 무기도 없이 교역에 의존하던 강족은 불안에 휩싸이게 됨.

결국 선령강의 한 갈래인 전령이 구심점이 되어 강족은 반란을 일으킴. 변변찮은 무기가 없었던건 후한도 마찬가지였기에 죽창과 청동거울 등의 임시방편을 내세운 강족은 빠르게 세력을 확장해갔고, 역참을 차단하여 후한군의 무기와 물자를 빼앗으며(*6) 량주 대부분을 장악함

처음엔 평화로운 해결책을 갈구했던 후한은 상황이 심각해짐을 깨닫고 상비군을 영끌해서 진압군을 편성함. 거기장군 등즐의 지휘하에 북방 정규군(도료영•호아영(오원)), 중앙군(오영), 수도권 방위군(삼보•하남•하내•하동의 군병), 신규 징집병(여남•남양•영천 징집병), 선비/오환 보조병까지 포함한 5만 병력이 파견됨

그러나, 이 5만명이 집결하기 전에 강족은 선제공격을 하여 등즐군은 1000명이 전사하는 극심한 피해를 입음. 게다가 진압군이 집결한 후 일어난 평양 전투에서는 8000명이 전사하면서 후한군의 실질전투력이 소멸하는 대참사가 일어남. 강족은 승리한 직후 삼보•익주•조군•위군을 공격하여 후한군의 보급선을 끊었고, 후한군은 급히 퇴각하여 팔관 수비병으로 전환하며 수도 방위에 급급하게 됨.

진압군의 부장 임상은 소수의 친위병을 데리고 현지병을 규합하여 어떻게든 저항하는 임무를 받았지만, 회전에서도 대패한 후한군이 현지의 미숙련병을 데리고 제대로 방어를 할리가 없었기에 후한군은 연전연패함. 

109년 기도위 임인이 현지병력을 규합하여 삼보를 구원하고자 어떻게든 긁어모은 후한 중앙군을 데리고 파견되었지만 장안 근처에서 참패하고 말았음. 그 결과 제국 서북변 전권대리인인 농서도위가 사로잡힐 정도로 후한의 방어선은 붕괴되었음. 같은 시기, 한인 한종이 남흉노 선우에게 후한에게서 독립하기 최적의 시기라 선동하여 남흉노까지 반란을 일으켰고 후한은 양면전선의 위기에 처함.

후한 조정은 남흉노를 먼저 진압할 필요를 느끼고 강족 전선은 수세로 전환함. 한중 태수가 포중현까지 와 주둔했고, 임상의 서량 지방군 잔존병은 재편성 과정을 거침. 임상을 호위하던 여남•남양•영천의 소수 병력마저 후퇴했고, 임상이 이끌던 지방군은 장안만이라도 사수하고자 경조호아영•옹영으로 재편됨.

그러나, 한중태수가 파중현 공격에 대응하여 출진하다 유인당해 격파당하고 호아영•옹영도 이에 휘말리면서 3천명이 죽고 주요 지휘관이 모조리 전사하는 참패를 겪음. 연이은 패전으로 후한군에선 항명 사태가 일어나 사령관 임인이 교체될 정도로 극한 상황에 놓임. 항명 사태야 어떻게든 진정되었으나 강족에 대한 방어 작계는 여전히 전무했고, 남흉노에 대한 대응이 급했던 후한 조정은 장안이 알아서 버텨주길 바래야 했음.

다행히도, 남흉노는 강족과 연계하지는 않았음. 두 세력 사이의 물리적 거리가 상당했고, 남흉노는 문명 수준이 낮은 강족에 무관심했음.(*7) 남흉노는 도료장군의 죽음으로 지휘권 공백 사태가 발생한 후한군을 상대로 초전에는 성과를 낼 수 있었음. 그러나, 명령계통을 수습한 후한군은 반격을 시작했고, 당황한 선우가 항복하여 남흉노 전선은 빠르게 진정됨.

남흉노 전선과 달리, 강족 전선은 여전히 답이 없었음 111년 강족은 수도 방어선(팔관) 마저 돌파하여 수도 근교인 하동•하내 마저 약탈당하는 지경이 이르렀고, 수도권에선 남쪽으로 대규모 피난민이 발생함. 설상가상으로 수도권과 화북은 106년부터 112년까지 황하에서 매해 발생한 홍수로 심각한 피해를 입어 후한 조정의 세수는 급격하게 감소했을 정도였음.(*8) 

황하 홍수의 피해는 제국 서북부에서도 마찬가지 였고, 후한 조정은 량주를 완전 포기하는 것을 진지하게 논의하기 시작함. 국가의 자존심과 장안의 방어체계 때문에 량주 포기 계획은 백지화 되었으나, 후한은 량주와 병주에 대한 실질적 영유권을 상실한 상태였음. 결국 후한은 농서•안정•상규 등 접경지역의 주둔군을 철수시키고 거주민을 강제이주 시키며 청야전술을 펼쳤고, 북방군은 맹진까지 철수하여 수도 방어만을 목표로 하였음.(*9)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 후한은 또한번의 천운을 얻음. 112년에 강족 제국의 천자 전령이 급사하여 어린 아들 영창에게로 제위가 넘어갔음. 영창은 아비와 같은 군재와 전략안이 없었고, 낭막이라는 참모가 보좌했음에도 강족 제국은 분열되기 시작함. 이때 후한군은 뇌강•당전종•늑자종•대추호 등 강족의 분파와의 교전에서 승리를 거둠.

자신감에 찬 후한은 재차 원정을 계획함. 115년, 정서장군 사마균이 지휘하는 근위기병(둔기교위), 삼보의 지방군(우부풍•좌풍익), 경조호아영, 북방군(안정•북지)로 구성된 8천 진압군과 한양태수 휘하 7천 강족 보조병이 파견되었음. 그러나, 이또한 처참한 실패로 끝났음. 

동쪽을 맡은 한양태수 방삼의 7천 강족 보조병은 두계공에게 참패하고 후퇴하였음. 단독으로 진군하게 된 사마균의 진압군은 초전엔 승리했지만, 두계공에게 유인당해 주요 지휘관 대부분과 3천명이 전사하는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고 전투력을 상실함. 사마균은 소환되어 처벌받기 전 자살했고, 방삼은 패전의 이유로 처벌받음.

어떻게든 북방군과 옹량주의 병력을 영끌했던 115년 원정 마저 참패로 끝나면서 후한은 전례없는 위기에 처함. 불안했던 영창의 지위는 이번 승전 덕에 공고해졌고, 후한은 장안을 지키기 위해 황제의 근위대인 우림•제기와 수도 방위군인 오영병을 보내는 처지에 놓임.

115년에 도료장군이 동원한 남흉노 보조병들이 강족 제국의 중심지인 북지군을 기습하여 영창의 아내와 자식을 참하는 대성과를 거두지만, 이는 단발적인 성과에 그쳤고 강족 제국은 여전히 굳건하게 버티고 있었음.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은 기적적으로 반전됨. 117년에 당전종강 유귀 외 5인이 현실 어크 찍으면서 강족제국의 명장 두계공을 암살했고, 같은해 효공종 호봉이 강족제국의 천자 영창을 암살하면서 강족제국은 붕괴하기 시작함. 이를 눈치챈 마현•임상이 북지군을 공격해 부평현에서 60일 간의 전투 끝에 낭막(강족제국의 탁고대신이자 실권자)의 군대를 무너뜨림. 잔존 세력과 버티고 있던 낭막마저 임상이 보낸 암살자에게 암살당하며 강족 대반란은 끝나게 됨. 

이후에도 강족의 반란은 잦았지만, 강족제국 수준의 결집력은 보이지 못했음. 후한은 당분간의 평화를 얻을 수 있었지만, 변경지대는 완전히 초토화되고 국고는 텅비게 되었음. 또한, 후한군이 참패를 거듭하는 와중 이민족 보조병만이 성과를 거두었음.(*10) 반란의 기세를 꺾은 115년 도료장군 원정과 반란을 끝맺은 117년 원정의 주력은 이민족 보조병이었다는 사실은 초원과 중원 사이의 군사력 역전을 보여줌.



 1) Northern Frontier, Rafe de Crespigny, ANU, p.89

 2) Northern Frontier, p.88

 3) Northern Frontier, p.95 >> “북방군의 인적 구성은 몰락한 상인이나 순박한 농민이 대다수였다. 그들은 규율은 있었으나 전투 기술이 전무했고, 훈련을 받지도 경험을 쌓지도 못했다. 그들의 능력은 평판과는 괴리가 심해 위급 상황에 투입하는 것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4) Northern Frontier, p.294

 5) Northern Frontier, p.277

 6) Northern Frontier, p.94, “The cut of Long Road probably included the seizure of government military equipment."

 7) Northern Frontier, p.287

 8) Northern Frontier, p.99

 9) Northern Frontier, p.105

 10) Northern Frontier, p.111






 4. 후한 중기의 대외정책 (2)

북흉노와 강족 대반란 평정 이후, 후한 대외정책의 핵심은 ’오환•선비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였음. 1세기까지는 오환•선비가 충분히 성장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각자가 초원의 패권을 두고 혈전을 벌이느라 중원 약탈에 거의 관심이 없었기에 후한은 그들은 보조병으로 활용할 수 있었음.

그러나 2세기 들어 상황은 크게 달라졌는데, 1세기 말 요동선비라는 이레귤러가 요동 지역에 약탈을 시작한 것을 계기로 선비족 사이에서 중원 약탈이 점차 확대되었음. 1세기까진 요동에 대한 산발적인 습격에 그쳐 오환의 도움을 받아 극복할 수 있었지만, 10년이 지난 후에는 북방 변경에 대한 대규모 공격으로 확대되었음.

특히 북흉노 잔존세력(89년에 남흉노 식민지배에서 탈출한 15부 유민)이 117년 선비에게 대패하고 초원패권이 선비에게 완전히 넘어가면서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됐음. 118년에는 대군으로 만명이 넘는 선비족이 넘어와 대규모 약탈을 벌였고, 그해 겨울에는 오환교위 치소 근처인 거용관이 공격당하고 상규군이 초토화됨.

다행히도 강족 반란이 진압된터라 후한은 군을 재배치할 여유가 있었고, 여양영과 북방군을 상곡군에 배치시킴. 이듬해 선비족이 침입하자, 도료장군이 선발한 궁기병 3천기와 중랑장이 거느린 남흉노 보조병이 출격하여 침입한 선비족을 격파하고 큰 피해를 줌. 덕분에 요서 선비의 대인 기지건이 복속을 청하면서 전선은 2년이라는 짧은 세월 동안 안정되었음.

그러나, 이러한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음. 121년, 힘을 되찾은 기지건은 재차 반란하여 병주를 공격해 운중 태수를 죽이고 오환교위를 포위했음. 도료장군 휘하 변경 주둔군을 오환교위 구원군로 삼아 파견했지만, 그들은 선비를 밀어내는데 그침.(*1) 이러한 군사적 성과에 힘입어 기지건은 선비의 구심점으로 설 수 있었고, 선비의 공격성은 급격히 증가하여 수만기의 궁기병이 약탈에 나설 정도였음.

123년부터는 상황이 더욱 심각해졌음. 123년과 124년에 선비는 남흉노군을 격파하고 군왕 둘을 살해했고, 이러한 거듭된 연패와 잦은 동원으로 인해 불만을 품은 남흉노 내부에서 폭동이 일어났을 정도였음. 다행히도 남흉노 반란군은 선우를 납치하기 직전까지 갔다 진압되었지만, 북방 방어선이 큰 위기에 처했다는 것이 명백해졌음.

후한은 감찰여양영을 중산군 북쪽으로 전진배치 시키고, 북방군의 규모를 확대하고 정규 군사훈련을 재개했음. 126년 선비가 대군을 침입해 태수를 죽이자, 후한은 남흉노군 1만을 동원한 보복 공격을 실시해 선비를 크게 격파했음. 동시기에 발생한 요동 약탈에 대해서도 오환 보조병을 데리고 요격을 실시해 큰 성과를 거둠.

오환은 원래부터 선비에게 압박받던 처지였기에 후한에게 충실하게 협조했고, 확고한 동맹에 만족한 후한은 많은 포상과 칭호를 내림.(*2) 128년과 129년, 131년에 이루어진 선비의 공격은 오환의 적극적인 협력 덕에 선비의 패배로 끝났음. 133년 사흉노중랑장이 남흉노군을 이끌고 선비를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고, 후일 기지건이 죽으면서 선비는 재차 분열되어 단석괴가 등장할 때까지 위협이 되지 못했음.

선비가 한풀 꺾였음에도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음. 잦은 징집과 지도자의 과도한 굴종에 불만을 품은 강족과 남흉노는 140년대에 반란을 일으켰음. 먼저 봉기한 것은 남흉노였는데, 선우가 낙양에서 지내며 후한에 굴종하는 것을 못마땅해 했던 좌부의 군왕 오사와 거뉴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음.

그들이 처음 병력은 궁기병 3천기에 불과했지만, 서하군 약탈을 성공한 덕에 남흉노 우현왕•오환•강융을 끌어들여 수만명 규모로 확대됨. 그들은 미직•삭방•대의 장사를 죽이며 북방을 초토화했고, 경조호아영을 격파하고 유•병•기•량 4주를 약탈했음. 

후한은 변경 주둔군•오환/강족/선비 보조병으로 구성된 2만 진압군을 투입하였고, 그들이 141년에 결정적 승리를 거두면서 남흉노의 독립 시도는 좌절되었음. 후한에 항복한 거뉴와 달리 오사는 끝까지 저항했고, 오사가 후한의 암살자에게 살해당하고 그의 세력이 흩어지며 남흉노 전선은 정리됨.

남흉노와 달리 강족전선에서는 이번에도 참사가 발생했음. 강족 반란군에 의해 황중의종을 비롯한 친한파 강족과 삼보 지역이 초토화당했고, 남흉노 반란군과 협조하여 경조호아영을 박살냈음.  삼보 지방군이 박살나고 북방군은 남흉노를 진압하느라 바빳기에 삼보 지역에는 일시적인 군사적 공백이 일어났음. 그 결과 제국 서부에서는 대규모 피난민이 발생하고, 후한은 마현을 정서장군으로 삼아 좌우우림•오교•오영•주군병으로 구성된 10만의 수도 방위군을 파견하여 수습을 시도함.

수도군단의 규모가 무색하게도, 10만 중 5~6천 정도만 유의미한 전투 병력이었음.(*3) 이 병력을 이끌고 진군한 마현은 강족에게 대패하여 본인과 두 아들이 죽었고, 이러한 군사적 대참사를 목격한 강족은 동/서강 모두가 반란에 합류하고 변경을 약탈하기 시작함. 오영병과 전국의 군병은 철군하고, 하내/남양/여남 군병이 파견되어 총원 15000의 수도군단이 여전히 삼보에 주둔했으나, 약탈을 막지 못했음.

군사적 역량이 소진된 후한은 더이상 이전과 같은 대외정책을 시행할 수 없었고, 북지•안정군 등의 변경을 포기하고 이민족을 갈라치는 새로운 대외기조를 도입함. 141년 파견된 조충의 행적은 이를 나타내는데, 그는 강족에 맞선 군사행동을 하는 동시에 지속적인 회유 전략을 사용했음. 144년에 조충은 강족과의 최후의 전투에서 동귀어진 하면서 강족은 기세를 잃었고, 2차 강족 대반란은 진압됨.



1) Northern Frontier, p.300

 2) Northern Frontier, p.303

 3) Northern Frontier,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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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532 일반 사마소님은 중국의 크롬웰인데 어째서 까이는거죠 [1] ㅇㅇ(223.62) 06.18 56 0
99531 일반 보편제국 오스만에서 터키민족의 공화국으로 넘어갈때 [1] ㅇㅇ(223.38) 06.18 42 0
99530 일반 근데 후백제 쿠데타는 견신검의 뜻이었을까 [1] ㅇㅇ(121.157) 06.18 52 0
99529 일반 조용한 갤을 타오르게 할 떡밥 [1] 위진갤러(219.241) 06.18 70 1
99528 일반 ?? : 젖탱이라니 저급하게... LucidAria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18 62 0
99527 일반 '지역사'에 대한 한국 역덕들의 반감도 솔직히 좀 비이성적인듯 [2] ㅇㅇ(223.62) 06.18 191 8
99526 일반 전쟁터에서의 유찌찌의 멘탈은 이게 인간이 맞는건지 [4] ㅇㅇ(118.219) 06.18 105 4
99525 일반 왕맹없는 전진 VS 모용각없는 전연 게임라이더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18 31 1
99524 일반 역사 알리는것도 좋기야 한데 [3] 위진갤러(223.222) 06.18 69 1
99523 일반 "뭐? 프랑스가 6주컷 났다고?" 태조고황제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18 86 0
99522 일반 후폐제 유욱은 진짜 연쇄살인마가 따로 없더라 [1] 사막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18 56 0
99521 일반 나는 위진갤하기전까지만 해도 관평이 관우 양자인줄 알았음 [4] 사막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18 59 0
99520 일반 유방이랑 전충, 중팔 차이 보면 확실히 어린시절, 청년기가 중요한거같기도 [1] ㅇㅇ(223.62) 06.18 89 5
99519 일반 중국 역사 최악의 골육상쟁 [7] 모용소종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18 166 7
99518 일반 근데 모용수 말년은 자업자득 아니냐 [1] ㅇㅇ(126.145) 06.18 62 2
99517 일반 전충이햄 보면 회음후 없는 한고조 아님?? [6] 위진갤러(124.28) 06.18 89 4
99516 일반 금척 전설의 의문……? [4] ㅁㄴㅇㄹ(125.138) 06.18 69 2
99515 일반 "고자가 될지언정 젖을 빨진 않겠다" [2] LucidAria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18 84 0
99514 일반 모용희 얘도 결국 군재 문제가 아닌가 싶음 [2] LucidAria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18 60 1
99513 일반 공산 전투 당시 왕건의 출발지는 [6] 태조고황제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18 167 8
99511 일반 그냥 지렁이햄은 범부들과 결이 다른것임 [16] LucidAria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18 176 3
99510 일반 오대십국,후삼국 둘은 확실히 명장지 맞는듯 ㅇㅇ(223.39) 06.18 40 0
99509 일반 모용수 말년 폼은 역대급 같은데? [6] ㅇㅇ(223.39) 06.18 96 2
99508 일반 명나라 당새아도 대단한 여걸이지 [4] 위진갤러(112.152) 06.18 7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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