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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바이바르스가 살라딘보다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

ㅇㅇ(125.249) 2024.04.13 10:34:18
조회 143 추천 8 댓글 1
														

아랍권 밖에서는 십자군 전쟁시의 아랍의 군주로는 살라딘의 명성이 압도적이지만 아랍권 내부에서는 근대 서구 제국주의 지배 이전까지는 바이바르스의 명성이 훨씬 높았습니다. 이는 그들 자신이 이룬 위업 뿐 아니라 그들이 세운 아이유브 왕조와 맘루크 왕조에 대한 평가와도 무관하지 않다고 보여집니다.

1. 십자군의 축출

1187년 하틴 전투 승리 후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수복합니다. 이 과정에서 살리딘은 이슬람의 관용 정신을 실천하여 적들인 서유럽인들에게 기사도를 진정으로 실천한 군주라는 찬사를 얻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도 같은 아랍권에서는 이에 대해 다른 시각으로 보는 견해도 있었습니다. 동시대 역사가인 이븐 알 아시르는 살리딘에 대해 이렇게 평합니다.

'살라딘은 단호한 의지를 보여주지 않았다. 포위공격을 할 때 방어자들이 거세게 저항하면 그는 이내 지겨워하며 포위를 풀어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군주라면 그래서는 안된다. 운명이 그에게 아무리 호의적이라도 말이다. 그는 단호한 태도를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성공을 굳히기보다는 성공의 과실을 낭비하는 경우가 많았다. 살라딘이 티레에서 보여준 행동은 그런 면모를 잘 보여주는 예다. 무슬림이 그 도시 앞에서 말머리를 돌려버린 것은 분명한 과오였다.'

'아크레,아스칼론,또는 예루살렘 등 도시나 요새를 점령할 때마다 살라딘은 적의 기사들과 병사들이 티레로 망명하는 것을 허용했다. 현실적으로 이 도시를 완전히 함락하지 못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연안 지대의 프랑크인들은 바다 저편에 있는 자들에게 연달아 전령을 보냈고 이들은 원군을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렇다면 살라딘이야말로 자신의 군대에 대항하는 방어군을 조직하게 만든 장본인이 아니었을까?'

이븐 알 아시르가 아이뷰브 왕조에게 멸망한 장기 왕조에게 충성을 다하던 인물이라는 점을 고려한다 해도 이와 같은 지적은 당시에도 일리 있는 지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살라딘이 죽이지 않고 살려둔 십자군과 기독교도 주민들은 레반트의 다른 도시로 이동하여 유럽에서 오는 십자군의 거점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또한 살라딘 이후의 아이유브 군주들은 십자군 축출에 적극적이지 않았고 유화정책을 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의 뒤를 이은 동생 알 아딜은 살리딘 생전에도 리처드에 대한 유화론자였고, 레반트의 십자군 도시들을 방임하다가 결국 1218년의 5차 십자군을 맞게 됩니다. 그의 아들 알 카밀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에게 1229년에 예루살렘을 넘겨주고 맙니다. 완전히 넘겨준 것은 아니고 무슬림과 기독교도가 예루살렘을 분할한 것이지만 이 행동은 아랍권에서는 성지 예루살렘을 십자군에 팔아넘긴 배신자, 매국노라는 비난을 듣게 됩니다(재미있는 것은 프리드리히 2세 또한 기독교도들에게 십자군의 대의를 배신한 자라는 비난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서유럽에서는 성지 예루살렘을 완전히 장악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어정쩡한 분할에는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는 프리드리히 2세를 파문하고 십자군 명칭 사용을 금지합니다. 교황은 프리드리히는 십자군이 아니라 해적이며 무하마드의 추종자와 같다는 비난을 가합니다.) 이로 인해 1244년 호라즘의 유민들에 의해 예루살렘이 다시 점령될 때까지 십자군이 다시 예루살렘을 지배하는 상황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바이바르스와 맘루크인들은 살라딘과 아이유브인들과는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합니다. 그들은 이슬람의 관용보다 십자군의 완전축출에 중점을 두고 매우 잔혹한 방식으로 십자군에 대한 전쟁을 수행합니다. 그들이 취한 방식은 십자군 뿐 아니라 그들을 따르는 기독교도 주민과 도시들을 절멸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맘루크인들이 기독교도 주민들을 대한 방식은 1차 십자군이 무슬림을 대한 태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학살과 노예화라는 단 두가지 방식만을 사용했습니다. 1268년 십자군 도시중 가장 큰 도시인 안티오키아를 바이바르스가 함락했을 때 성문을 닫아걸고 모든 주민을 학살한 다음 살아남은 일부는 노예로 팔아버리고 도시는 폐허로 만듭니다. 당시 학살은 십자군 전쟁 역사상 최대의 학살로 알려져 있습니다. 바이바르스가 트리폴리에 있던 안티오키아 왕자인 보에몽 6세에게 보낸 조롱조의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너희 기사들이 말발굽에 짓밟히고, 너희 집들이 약탈당하고, 너희 여자들이 너희 돈으로 1디나르에 넷씩 팔려나갔다. 너희 교회의 십자가가 박살나고, 거짓 성서의 책장이 갈가리 찢어져나가고 총대주교의 무덤들이 파헤쳐졌다. 너희들의 이슬람 적들이 너희가 예배를 드리는 곳을 유린하고, 제단 위에서 수도사들과 사제들의 목을 따고, 총대주교들에게 돌연한 죽음을 안기고, 왕족들을 노예로 팔았다. 불길이 너희의 궁전을 집어삼켜 지옥의 타오르는 불길에 떨어지기 전에 이 세상의 불길에 타버렸다. 너희의 궁전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고, 성 바울 교회와 성 베드로 성당은 무너졌다. 너는 "차라리 내가 한 줌의 흙이었더라면! 이런 편지를 받지 않았더라면!"이라고 할 것이다.'

바이마르스는 살라딘과 달리 적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1266년 제파드에 있는 템플 기사단의 성채를 점령할 시 주민들의 목숨을 살려주기로 약속한 다음 함락된 이후 모두 몰살시켰습니다. 바이바르스는 큰 성에서든 작은 마을에서든 기독교들을 발견할 때마다 모두 몰살하거나 노예로 삼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263년에는 갈릴리에 쳐들어가 나사렛 대성당을 파괴하고 1265년에는 카이사레아와, 리처드가 살리딘을 격파했었던 아르수프도 점령합니다. 1268년 안티오크 점령 이전에는 야파를 점령하고 주민을 몰살합니다. 이에 프랑스왕 루이 9세가 마지막 십자군인 8차 십자군을 일으몄으나 시리아가 아닌 튀니지에 상륙하여 더위와 전염병으로 자멸하고 맙니다. 바이바르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1271년 가장 견고한 십자군 요새인 크라크 드 슈발리에(기사들의 요새)를 함락합니다. 그러나 이 즈음 훌라구 칸의 아들인 아바카 칸의 일 칸국 군대가 수차례 시리아를 공격합니다. 몽골군과의 전투를 위해 바이바르스는 십자군과 10년 10개월 10일 10시간의 휴전을 맺고 몽골군을 격퇴합니다.

바이바르스가 1277년에 죽은 후(독살되었다는 주장이 있고, 마유주 과음으로 죽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의 뒤를 이은 칼라운은 1289년 트리폴리 공국을 멸망시킵니다. 그의 아들 알 아쉬라프 칼릴은 1291년에 아크레를 함락시킴으로써 200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을 종결시킵니다. 칼라운과 알 아쉬라프 칼릴의 전쟁 수행 방식도 바이바르스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막론하고 모두 몰살하고 살아남은 자는 노예로 팔아버린 후 도시는 폐허로 만드는 것입니다. 마지막 십자군 거점이었던 아크레 함락시에도 6만명의 기독교도가 학살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크레 함락시에는 템플 기사단에게 주민의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한후 성안으로 들어왔을 때는 여성과 소년들을 닥치는 대로 강간하고 십자군과 주민들을 몰살시켰습니다.
바이바르스, 칼라운, 알 아쉬라프 칼릴이 십자군을 상대로 수행한 전쟁을 통해 수십만의 기독교도 주민들이 학살당했으나 십자군은 레반트에서 완전히 축출됩니다.
서유럽의 입장에서는 살라딘과 달리 십자군 기사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행동한 바이바르스를 높이 평가할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랍의 입장에서는 비록 잔혹한 방식을 사용했으나 200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을 종결시킨 바이바르스와 맘루크들을 더 높이 평가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2. 몽골군 침공 격퇴

바이바르스가 맘루크 왕조 술탄에 오르기 전인 1258년 아바스 왕조의 수도 바그다드가 홀라구 칸이 이끄는 몽골군에게 함락되고 80만의 주민이 학살됩니다. 또한 아바스의 칼리프는 몽골군에게 처형됨으로서 이슬람 세계의 중심부가 몽골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몽골군에게 학살당한 아랍 무슬림의 수는 50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십자군에게 죽은 무슬림의 수십배에 달하는 규모입니다. 십자군이 비록 성지 예루살렘을 공격하였으나 그 전장이 레반트 해안 지대에 국한된 점과 비교해 보면
몽골의 침공은 아랍의 중심부를 점령했다는 점에서 아랍 이슬람 셰계의 큰 위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몽골의 침공에 맞서서 바이바르스와 맘루크인들은 성공적으로 이집트와 시리아를 방어합니다. 1260년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바이바르와 맘루크군은 언덕에서 매복한 군사를 이용하여 처음으로 키트 부카가 이끄는 몽골군을 전멸시킵니다. 물론 이 당시에는 홀라구가 몽케칸의 죽음으로 몽골로 돌아갔고 2선급 부대만 남아있는 상황이었으나, 13세기의 몽골군은 다른 문명권에 비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다른 문명권에서는 몽골군 2선급 부대와 야전에서 싸워 승리한 전투도 상당히 드물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후 1270년대에 홀라구의 아들 아바카는 수차례에 걸쳐 시리아를 침공하나 바이바르스는 이를 모두 격퇴합니다. 이후 1299년과 1303년에 일 칸국의 가잔 칸은 다시 시리아를 침공하지만 나세르 무하마드가 이끄는 맘루크군에 의해 모두 격퇴됩니다.

3. 칼리프 제도 계승

당시 이슬람권에서 칼리프는 막부시대 일본 천황과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비록 정치적 실권은 없으나 종교적 수장이었고 이슬람의 통일을 상징하는 존재였습니다. 이슬람 세계 각 국의 술탄들은 칼리프의 승인을 얻어야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1258년 바그다드 함락과 칼리프 처형으로 이슬람권의 통일을 나타내는 정치적 상징이 소멸할 위험에 처했습니다. 바이바르스는 1261년에 처형된 칼리프의 숙부를 카이로에서 새로운 칼리프로 추대함으로써 칼리프 제도를 계승합니다.

4. 니자르파 섬멸

아이유브 왕조 이전에 이집트를 다스렸던 파티마 왕조는 이스마일파가 지배하는 체제였습니다(시아파의 다수는 12이맘파이지만 이스마일파는 7이맘파라고 볼립니다). 파티마 왕조 시기에는 이슬람의 3대 성지인 메카,메디나,예루살렘이 모두 이스마일파의 지배를 받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파티마 왕조는 아바스 왕조의 수니파 칼리프에 대항하여 스스로를 시아파 칼리프로 선언합니다. 그런데 1094년에 차기 칼리프가 될 왕자였던 니자르가 반대파에게 암살됩니다. 이때 니자르를 지지하던 하산 이븐 사바흐는 이스마일파 내에서도 소수파인 니자르파(아사신파)를 만듭니다. 나자르파의 본거지는 페르시아에 있었으나 시리아에서도 상당수가 극렬한 암살활동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때때로 십자군과 내통하여 파티마 왕조를 공격했고, 십자군에 대항하는 아랍의 단결을 저해하는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수니파인 살라딘에 의해 이집트와 시리아가 장악되자 이들은 살라딘에 대항하는 투쟁을 공공연하게 전개합니다. 살라딘도 이들에 의해 두차례나 암살 위기를 겪습니다. 그러나 아이유브 왕조 시기에는 니자르파를 제압하는데 실패합니다. 하지만 이후 페르시아의 니자르파 본거지는 홀라구칸의 몽골군에게 전멸되고 시리아의 니자르파는 바이바르스에 의해 섬멸되고 맙니다. 수니파 무슬림의 입장에서는 자신들 내부에서 테러활동을 공공연하게 전개하는 위험한 이단 종파인 니자르파를 멸망시킨 것은 상당한 업적으로 평가됩니다.

5. 인도양 무역 주도권 확보

아바스 왕조가 멸망하기 전 아랍의 해상 무역은 바그다드-페르시아만-인도양 축선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천일야화에 등장하는 '바다의 신밧드'가 모험을 한 곳도 이 축선을 중심으로 인도, 실론, 말라카 등지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1258년 아바스 왕조 멸망후 무역로는 중앙아시아 스텝 지대의 '몽골의 길'을 중심으로 행해지게 되어 이 축선을 중심으로 한 바닷길은 쇠퇴하게 됩니다. 그러나 맘루크인들은 카이로-홍해-인도양 축선을 개척하여 이후의 인도양 무역을 주도합니다. 그후 1509년 디우해전에서 포르투갈에게 패전하고 1517년 오스만투르크에게 맘루크가 멸망됨으로서 인도양 무역에서의 이슬람의 우위는 종말을 맞습니다. 이슬람 세계의 입장에서는 안타깝게도 오스만 투르크가 인도양 무역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아 해상무역은 서유럽에 의해 주도되게 되고 이는 이슬람 세계 쇠퇴의 한 원인이 됩니다. 그러나 맘루크조는 그 이전의 해상 무역을 성공적으로 계승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참조문헌 :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아침이슬), 십자군(루비박스), 이집트 역사 100장면(가람기획) 등

출처:<디펜스 코리아>, 글쓴이:<김 근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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