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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조프르와 갈리에니 이야기 2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4.04.26 21: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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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에니 진영은 조프르를 무너뜨리는 일에 착수했고, 상원의원 두메가 선두에 나섰다


두메는 포슈에게 '내가 전쟁장관이 된다면 조프르를 무능을 이유로 해임하고 갈리에니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할 거요.' 라고 이야기했다


이 말은 즉시 조프르의 귀에 들어갔다


하원의원 괴시 또한 갈리에니를 옹호하며 우상을 찬양하는데 생을 바쳤다



조프르가 1차 마른 전투 승리의 영광을 누리게 된 후, 그의 진영은 공격 보다는 방어에 집중했다


이러한 태도는 보통 패자보다는 승자에게서 보인다


특히 타르디외가 조프르를 보호하는데 앞장섰다



1914년 10월 10일, 뒤늦게 조프르가 친애하는 갈리에니에게 편지를 보내 마른 전투 때 파리 요새화지대에서 얻은 증원병력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그는 편지를 '충실하고 헌신적으로 당신의 성공을 기원'하며 매우 친근하고 격식없이, 그러면서도 이보다 더 크고 깊은 경의를 표할 순 없는 방식으로 마쳤다


이건 갈리에니에게 자기를 계속 무책임한 아랫사람으로 취급해달라는 부탁이나 다름없었다


조프르가 콤플렉스를 키우고 있었던 걸까?



하지만 조프르는 째째하게 굴 줄도 알았다


그는 1915년 9월 25일이 되어서야 갈리에니에게 1차 마른 전투의 공로로 군표창을 수여했는데, 그것도 전쟁장관 밀르랑의 요청으로 마지못해 했다


표창 수여식은 양쪽의 위계질서를 당사자는 물론 모두에게 보여준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된다


갈리에니의 수여식에서 조프르가 한 말엔 따뜻함이 이상할 정도로 부족했다


그는 의무적으로 해야할 말만 하고 끝냈다


갈리에니는 회고록에서 자신은 마다가스카르에서 조프르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수여식을 했다고 지적했다


그건 사실이지만, 정말로 그가 자신을 조프르의 아랫사람으로 생각한 게 아니라면 어째서 조언까지 무시해가며 표창을 받았는지 의문이 든다


이야기를 되돌려서, 조프르의 GQG가 작성한 마른 전투 기밀 문서엔 모누리의 야전군과 파리 요새화진지와 갈리에니가 취한 조치에 대한 언급이 전혀 들어가있지 않다


이게 사실을 왜곡한 건 아닐지도 모르지만, 명백히 은폐한 것이다


이 문서는 마른 전투의 승자에 대한 논쟁에 어떻게 불이 붙기 시작했는지 명확하게 보여준다



마른 전투에 대한 고찰을 마무리하며, 이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본 사람들의 말을 인용하겠다


포슈는 마른 전투의 승자가 조프르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당연히 조프르의 업적입니다. 조프르가 준비했고,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마른 전투는 분명히 위대한 승리였습니다. 조프르는 거기에 꼭 필요한 사람이였습니다.'


갈리에니는 어떻냐는 질문엔 이렇게 대답했다


'갈리에니 말입니까? 갈리에니는 자신이 때가 왔음을 알아챘다 주장했지요. 조프르가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결정을 내린 건 결국 조프르입니다.'


스피어스는 다른 관점을 보였다


그는 영국인이라 프랑스인들의 분쟁에 끼어들지 않을 것 같은데도, 조프르 지지자들보다 더욱 노골적인 주장을 펼쳤다.


'갈리에니 장군은 자기가 마른 전투의 승자임을 증명하고 싶다는 불안한 열망 때문에 자신을 그 작전의 선동자로 묘사하기 위하여 실제로 한 것보다 훨씬 덜 훌륭한 역할을 스스로에게 부여했다.'





독일군이 후퇴한 직후부터 제6 야전군이 조프르에게 돌아갔고, 갈리에니에겐 주의를 분산시킬만한 것이 없어졌다


갈리에니에 자신의 영지와 요새화지대만 남게 되었지만 여전히 할 일이 많았다


전투가 끝난 직후인 9월 18일, 그는 보르도에 머물고 있던 전쟁장관에게 예전에 했던 요구를 상기시키기 위해서 편지를 보냈다


그는 요새에 주둔하는 병력의 숫자는 방어해야 할 둘레의 길이에 비례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비율은 지난 40년 동안 참모 장교들이 결론내려왔던 수치였다


따라서 갈리에니는 짧은 계산을 마친 후 10개 사단이라는 인상적인 요청을 했다


이 10개 사단은 갈리에니 본인이 설명했듯이 순수하게 요새에 주둔시킬 목적으로 필요했다


그는 파리에 기동부대가 있어야 한다고 덧붙이며 6개 사단을 추가로 요구해 깊은 인상을 더했다


즉 합쳐서 25만명의 병력을 요구했다


밀르랑은 이 요구를 조프르에게 전달하지도 않았다




갈리에니는 그 편지에서 이렇게 불평했다


'현재 파리는 적이 공격해올 시 방어하기 위해 필수적인 자원을 조금씩 제거당하면서 바닥없는 물자 창고처럼 이용되고 있습니다.'


파리를 물자 창고로 이용하고 있던 사람의 이름을 추측해보라


밀르랑은 보르도에서 갈리에니의 편지에 동봉된 긴 요청 목록을 하나하나 검토한 후 답장을 보냈다


'그 일은 어떻게 야전군이 요새의 파리 수비군과 협력할지 계획할 때 상황과 전반적인 작전 진행을 고려하며 현재 모든 병력을 지휘하고 있는 총사령관에게 달려있습니다.'


요컨대 갈리에니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갈리에니의 요구가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하지만 그가 작전 수행에서 독립적인 역할을 하겠다는 비밀스러운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쉽게 설명 가능하다


실제로 그의 요구사항엔 야전군에게 필수적인 장비 목록이 포함되어 있다


그가 지휘하는 병력은 야전에 배치되는 용도가 아니였는데도 말이다


이들은 공성전 교리에 명시된 조항에 따라 요새화지대에서 30km 이상 벗어나는 게 금지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들에겐 야전군의 보급에 필수적인 수송수단이 필요없었는데도, 갈리에니는 이를 요구했다



갈리에니의 요구가 받아들여지면 2개 야전군을 얻으면서 전쟁장관의 부하로 남게 되는데, 그의 입장에선 조프르보단 밀르랑이 다루기 훨씬 쉬웠을 것이다


그는 자신만의 전쟁을 수행하고 무언가 역할을 하기 위해서 작전이 가능한 야전군을 원했다


괴시는 갈리에니가 저녁식사에서 기동군이 있어야 전쟁을 종결시킬 수 있다 말했다고 증언한다


전쟁 전엔 갈리에니를 만날 때마다 칭찬세례를 퍼붓곤 했던 푸앵카레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그는 별개의 군대 2개를 만든 다음 하나를 지휘하고 싶어하는 듯 했다.'




이 요구가 조프르를 밀어내고 무대 중앙에 올라서려는 갈리에니의 뿌리깊은 욕망을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닐까?


갈리에니는 1915년 전까지 상원과 하원의 군사위원회에 기동군을 창설하자고 끊임없이 헛되이 요구했다


그가 기동군의 사령관으로 누굴 염두해두고 있었을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1914년 9월 24일, 조프르가 밀르랑에게 Ad Latus를 포슈로 교체해달라고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는 포슈를 이렇게 칭찬했다


'포슈 장군은 인격과 군사 사상을 고려했을 때 타 지휘관들과 비교하지 못할 정도의 능력적 우위를 점하고 있다.'


심지어 조프르는 갈리에니 때와는 달리 포슈를 곁에 두려고 했다


밀르랑과 정부는 현재 진행중인 작전이 끝날 때까지 이 요구를 비밀로 한다는 조건으로 Ad Latus 교체 요청을 받아들였다


후방에서 서류 작업만 하게 될 것을 우려한 포슈의 거부로 결국 결정이 내려지진 않았다


갈리에니가 이 소식을 들었을까?



조프르는 전쟁장관에게 보내는 또다른 편지에서 파리 방어와 관련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그는 갈리에니가 요새화를 완료하기 위해 향토사단까지 요구하자 전쟁장관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이번에는 갈리에니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며 호통을 쳤는데, 보고 느낀 점을 말해보라


'갈리에니 장군이 제시한 이유들은 주목할 가치조차 없어 보입니다. 우리 전선이 강화될수록 파리 전쟁장관이 우려하고 있는 가상의 위험이 줄어들게 됩니다. 모든 사령관들이 각자 해야할 일을 하고 있습니다. 갈리에니 장군은 만약 요구사항이 변하면 저에게 알려야 할 것이며, 저는 그를 만족시키기 위해 해야할 일을 할 것입니다.'


조프르가 보내는 편지의 어조는 전례없이 건조해졌고 비정상적으로 격렬해졌다.


여러 알려지지 않은 사건들, 특히 마른 전투의 승자에 관한 논쟁이 두 사람 사이의 긴장을 고조시켰을 것이다.




1915년 1월 18일, 갈리에니는 다시한번 밀르랑에게 불만을 쏟아냈다


'파리 주둔군의 약점을 상기시켜드릴 의무를 느꼈습니다.'


피로감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시간만 흘러가고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갈리에니는 일기의 여러 페이지를 불만으로 가득 채웠다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았다


전립선 암이 악화되어 종종 침대에 누워있어야 했다


잠을 자기도 어려워졌다


점차 악화되는 체력은 그의 비관론을 심화시켰고, 주변의 군인과 민간인에 대해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게 되었다



갈리에니에게 무엇을 해줘야 했을까?


그는 파리의 구원자로 불릴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었지만, 그건 조프르에게 더 어울리는 칭호였다


갈리에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이 검토되었지만 아무 것도 실행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그는 로마 대사로 고려되기도 했고, 동방으로 보내자는 이야기도 나왔다


조프르는 갈리에니에게 자리를 찾아달라는 요청을 듣고 야전군 사령부가 준비되었다고 말했지만, 존재하지도 않는 알자스 야전군을 제시했다


조프르는 이 기회를 틈타 대통령에게 향토사단을 파리에 계속 주둔시키고 있을 군사적 이유가 없다고 지적했다



갈리에니 문제가 1914년 말과 1915년을 관통했다


그는 GQG의 골칫거리일 뿐만 아니라 이젠 정부의 골칫거리였다


조프르는 떠올릴 수 있었던 가장 좋은 방안인 제6 야전군 사령관을 제안했지만, 갈리에니가 거절했다


한편 또다른 분쟁이 시작되었다


이번엔 군사 작전이 문제였다


조프르는 독일군이 다시는 파리를 목표로 작전을 펼치지 못하도록 수도 북쪽과 북동쪽에 일련의 진지를 준비하자고 요청했다


참호와 포좌로 구성된 그 진지는 영구적 요새가 아니라 필요시 야전군이 배치되어 사용하기 위한 요새였다


갈리에니와 그의 주둔군이 GQG가 원하는 작업을 맡았는데, 이 조치가 파리 요새화진지를 강화해주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방어선은 1914년 9월에 건설되기 시작했고 양쪽 참모들 사이에서 달콤하고 시큼한 서신이 오갔다


그 내용을 전부 인용할 순 없으니 전쟁장관이 중립적인 태도를 취했다는 것만 알고있으면 된다



요새화지대는 이제 훈련소로 변했다


갈리에니는 새로운 향토사단을 받을 때마다 훈련이 끝나면 전선으로 보내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는 작업을 혼란시켰기 때문에 갈리에니는 시민들의 도움을 받아 장애물을 세워야 했다


1915년엔 방어선 3개나 완성되었는데, 첫번째는 에프트와 우르크 강 사이에 완성되었고, 두번째는 리지 쉬르 우르크에서 믈룅까지 뻗었다


여름과 가을엔 파리 남동쪽의 세나르 숲을 틀어막았다


갈리에니는 작업을 마친 후 전쟁장관에게 방어선을 더 건설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조프르는 전선에 2차 방어선을 건설하는데 인력을 써야 한다고 주장해 그의 요청을 묵살시켰다


GQG는 갈리에니의 구상을 좋지 않게 보았고, 새로운 참호를 만들기 보단 지금있는 전선의 참호를 보강하길 원했다




1915년 가을에 비비아니의 불안정한 내각이 무너진 후 브리앙이 권력을 잡고 전쟁장관으로 군인인 갈리에니를 임명했다


비비아니는 집무실을 떠나며 푸앵카레 앞에서 조프르에게 짧은 질문을 던졌다


'만일 우리가 전쟁장관으로 군인을 선택한다면 누가 임명 되리라고 생각하시오?'


'뒤바일입니다.'


'갈리에니는 어떻소?'


조프르는 잠시 생각하더니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좋습니다.'



그렇게 갈리에니는 전쟁장관이 되었다


그는 조프르에게 승낙해야할 도덕적 의무를 느꼈다고 편지로 이야기했다


이 시기에 갈리에니는 일기에서 평화와 안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으나, 그같은 사람이 잃어버린 영광을 되찾을 기회를 놓칠리가 없다


한편으로, 이는 조프르와 갈리에니의 관계를 알고있던 브리앙 입장에서 위험한 수였다


일단은 두 사람이 정치인이라는 공공의 적을 두고 한동안 협력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갈리에니는 브리앙의 취임식 연설에서 조프르의 공로를 치하하고 그의 능력을 칭찬했다


두 사람은 겉으로는 서로를 지지하며 만장일치를 이루는 모습으로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안타깝게도 문제가 오래 지나지 않아 터져나왔다


갈리에니는 장관 자리에 머무르길 참지 못했고, 양쪽의 지지자들은 의도적으로 악의적인 소문을 퍼트리고 트집을 잡으며 싸움을 부추겼다



최고사령부를 재조직하려는 계획이 몇달 동안 지속되었다


전쟁이 여러 전역으로 확대되며 프랑스군이 다중전선을 수행하게 되어 필요성이 지속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은 이 기회에 전쟁 수행 통제권을 군부한테서 뺏어오기 위하여 다양한 방법을 제시했다


예를 들어 조프르와 타 전선 프랑스군 총사령관의 지위를 동등하게 만드는 방법도 제시되었고


조프르를 서부전선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아닌 프랑스군 총사령관으로 올린 다음 서부전선을 책임지는 참모총장 자리를 새로 만드는 방법도 제시되었다


후자의 경우 성공하면 조프르를 무대에서 그의 패거리인(이는 갈리에니의 표현이다) 르누아르, 가믈랭, 바일과 함께 쫒아내게 될 터였다


정치인들은 당연히 갈리에니에게도 의견을 물었다


갈리에니는 매우 긴 시간이 지나서야 의견을 표했는데, 조프르를 새로운 자리로 쫒아내는데 동의하지 않았다


한편 갈리에니의 군사보좌관 부카이유(그는 통킹에서 갈리에니와 만났다)가 전쟁장관을 모든 전역의 총사령관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브리앙이 업무 과중을 지적하며 거절했다


푸앵카레에 따르면 갈리에니는 매우 품위있게 그 지적에 동의했다



1915년 12월의 2일이 되자 조프르를 프랑스군 총사령관으로 한단계 올리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조프르는 자신의 지휘권에 드리워진 위협을 알아챘다


12월 4일에 Le Petit Parisien이 검열을 어떻게 통과했는지 궁금해지는 기사를 하나 냈다


'프랑스 전선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이 새로운 군인에게 맡겨질 예정이다.'


알고보니 그 군인이 전쟁 전부터 조프르의 사람이였던 카스텔노였기에(다만 카스텔노는 점차 갈리에니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조프르는 간신히 살아났다


한숨 돌린 GQG는 이러한 계략의 배후가 갈리에니라고 확신했다



1915년은 힘든 시간이였다


서부전선의 1915년을 그리뇨타주의 시기로 부르는데, 조프르가 모든 공세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의회는 현자의 돌을 연성하는 방법에 대해 보고만 끊임없이 늘어놓는 연금술사같은 총사령관에게 질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조프르는 자신에 대한 공격에 격분했고, 갈리에니가 자신을 보호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건강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던 갈리에니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면서도 양측 사이에 낀 채 정치적 투쟁을 즐겼다





1916년에 베르됭이 조프르와 갈리에니의 갈등의 또다른 원인이 되었다


예비역이였던 몇몇 장교들이 정치계에 있는 친구들에게 GQG의 실수에 대해 알리기 시작했다


정치인들의 관심을 끄는 편지는 최고사령부가 관심을 덜 보내고 있던 모든 전선에서 날아왔다


편지를 보낸 장교들이 베르됭에만 있던 건 아니지만, 베르됭이 가장 큰 관심을 끌었다



이러한 장교들 중 제일 유명한 사람은 드리앙이다


생 시리앙인 그는 예비역이였고, 하원 군사위원회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치계에 인맥이 두터웠다


드리앙은 브리앙에게 뫼르트, 툴, 베르됭의 방어가 부적절하다고 경고했다


예를 들어 참호는 불충분하거나 존재하지 않았고, 철조망은 너무 적었으며 종심이 너무 얕았다


브리앙은 드리앙을 갈리에니에게 보냈다


갈리에니는 펜을 들고 조프르에게 이런 문장으로 끝나는 서한을 보냈다


'이런 상황에서 적이 돌파구를 마련하는데 성공하면 장군 뿐만 아니라 정부도 법적 책임을 지게 될 것이오.'


조프르는 뺨이라도 얻어맞은 기분이였고(회고록에서 그정도로 솔직하게 표현하진 않았지만), 엄청난 분노로 GQG를 뒤흔들었다


그는 갈리에니에게 수많은 세부사항을 담으면서 이렇게 끝나는 답장을 보냈다


'이러한 우려가 방어 준비의 결함을 지적하여 여러분의 관심을 끈 보고서들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그 보고서들을 저에게도 보여주시고 누가 보냈는지도 알려주시길 요청합니다.'


조프르는 지나치게 자신만만했다


독일군은 실제로 베르됭을 노리고 있었다


덕분에 갈리에니는 자신을 총사령관보다 전선의 상황을 더 잘 알고있던 명석한 사람으로 포장할 수 있었다



조프르가 갈리에니에게 보낸 답장엔 사실상 정치인들에 대한 자신의 정보원이 되라는 요구도 들어있었다


당연히 갈리에니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대신에 '정부는 당신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소.' 라는 내용의 편지로 그를 진정시키려 했다


이는 그가 보낸 혐의를 생각하면 크게 물러선 움직임이였다


사실 갈리에니는 1915년 12월에 내린 지시 때문에 베르됭 사태의 책임이 자신에게 튈 위험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참모들을 전선으로 보내고, 지휘관들을 참모부로 보내는 교환을 지시했었다


GQG는 지속적인 인사 이동 때문에 참모부가 혼란스러워져 독일군의 공세에 대응하지 못했다는 악의적인 소문을 퍼트렸다


갈리에니는 당연히 조프르가 자신을 표적으로 삼았다고 생각했다




분위기가 험악해졌고 양측은 갈수록 강경해졌다


조프르의 적들은 총사령관을 최대한 빨리 몰아내고 싶어 안달했다


갈리에니는 이에 동의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몸상태가 심각해졌기 때문인지 총사령관에 대한 공격에 미약하게 반응했다


조프르는 1916년 1월부터 클레망소, 페리, 아캉브레 등에게 말 그대로 끊임없이 씹혔다


하원 군사위원회에서 가장 격렬한 공격은 아캉브레와 페도야 장군이 벌였다


조프르 지지자는 프레시네, 브리앙, 두메르게, 타르디외, 프랑스 남서부의 지역신문사인 La Dépêche du Midi 뿐이였다


정치인들은 갈리에니로 조프르를 제거하려고 온 힘을 다했다



최후의 순간이 임박했고, 1916년 3월 7일에 각료회의가 열렸다


갈리에니가 연설문 한 장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이는 조프르와 GQG에 대한 기소장이였다


먼저 갈리에니는 전쟁이 수행되어온 방식과 문민통제 회복의 필요성에 대한 전문적인 발언으로 시작했다


대부분 정당한 지적이였다


갈리에니는 시민 권력과 군부의 역할을 제시했고, 전쟁 전에 정치인들이 소홀히 했던 영역을 장악해버린 GQG의 권한을 축소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더이상 전쟁을 군인 혼자에게만 맡겨두어선 안 됐다



하지만 전쟁장관의 권한 밖인 군사 작전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자, 갈리에니가 갑자스레 검찰로 돌변했다


'베르됭의 경우처럼 현 전쟁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거나 지난 18개월 동안 발생한 전례없는 사건의 요구에 대응하지 못했음이 증명된 몇몇 사람에 대한 징벌적 조치를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오트 드 뫼즈 고지에서 펼쳐진 것과 같은 재앙적인 사건으로 인한 위험에 프랑스가 꼬리자르기를 당한 자 외엔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으며 노출되는 일이 다시는 없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우리 군대가 기동할 수 있도록 작전 초기에 적절한 배치가 적용되었는지, 전선이 고정된 후의 알맞은 전쟁 수행 방식을 이해했는지, 공성전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한 모든 조치를 제때 취했는지, 중포와 참호박격포의 중요성을 즉각 파악했는지, 참모들의 업무 방식과 배치, 특히 연락장교의 사용이 실제 상황에 정말로 적절했는지 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의 연설의 결론은 짧고 직설적이다


'낡고 오래된 교리에 얽매여 현 전쟁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장교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는 조프르와 GQG를 저격했다


제거라는 단어는 이런 자리에서 흔히 선택되는 조심스러운 표현들과 극명히 대조된다


연설문을 민간인이 작성했다면 덜 놀라웠을 것이다


하지만 공동의 책임을 지고있는 군인이 작성했기 때문에 모두가 경악했다





조프르는 그의 발언을 용납하지 못했다


갈리에니의 연설은 오늘날에도 지나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전쟁이 터지기 전 갈리에니는 상임전쟁심의회와 최고국방협의회에 동시에 소속되어 있었기에 프랑스군이 내린 모든 군사적 결정의 책임을 공유한다


제6 야전군을 얻은 10일 남짓한 기간에 보인 그의 개념은 조프르의 것과 차이가 없었다


그는 기동이 더이상 불가능해진 시기에 기동군이 있어야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갈리에니에게 얼마나 대단한 군사적 지식이 있었길래 그런 연설을 한 걸까?


그가 제기한 사안들에 대해 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직관을 언제 어떻게 얻었을까?


이 갑작스러운 직관력이 어디서 왔을까?


어떤 계시를 받아 번뜩이는 깨달음을 얻었던 걸까?


불확실한 미래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밀을 알려주는 마법의 공식을 찾아놓고 그동안 입다물고 있던 걸까?


당연히 아니다


갈리에니가 이런 연설을 한 이유는 단순히 조프르와의 갈등이 한계점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정부는 즉시 갈리에니 때문에 불안한 침묵에 잠겼다


갈리에니는 연설문의 복사본을 인원 수만큼 준비했지만, 푸앵카레를 제외하고 모두가 받기를 거부했다


브리앙과 푸앵카레는 갈리에니를 압박해 상황이 진정될 때까지 해군장관 라카즈가 건강 문제를 핑계로 전쟁장관의 업무를 대신 처리하도록 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갈리에니는 곧 사임했고, 수술을 받기 위해 베르사유의 한 병원에 입원했다


그는 1916년 5월 27일에 두번째 수술 중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다음날 조프르가 GQG를 통해 발표했다


조프르는 이렇게 끝마쳤다


'우리 모두 영원히 갈리에니를 이 나라 최고의 군인 중 한명으로 기억해야 합니다.'


예상대로 갈리에니 지지자들이 찬사가 불충분하다고 항의했다


조프르는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브리앙의 추모사는 Veni, vidi, vessie(왔노라, 보았노라, 방광 질환으로 죽었노라) 세 마디 뿐이였다


필자는 정치에 개입하고 싶어하는 모든 군인들이 브리앙의 추모사를 기억했으면 좋겠다!




갈리에니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그는 다음 전쟁에서 군대를 지휘하는 것으로 경력에 정점을 찍게 되리라 믿었고, 그럴 운명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전쟁이 그가 은퇴한 후에야 발발했다


1911년에 총사령관이 될 기회가 왔을 때, 그에겐 기회를 잡을 능력과 의지가 부족했다


그는 자기가 메시미의 제안을 거부한 이유를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마침내 전쟁이 일어나자 총사령부를 장악하고 싶어했고, 그 자리의 정당한 소유자가 자신이라고 믿었고, 정치적 동반자인 메시미가 다시 전쟁장관이 되었으니 가능성 있다고 판단했다


갈리에니는 갖은 수를 다 써봤지만 아무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조프르와 정부의 갈등이 고조될 때마다 오르내렸지만 그뿐이였고, 애초에 총사령관이 될 수 있는 몸상태도 아니였다


그는 조프르를 공격하려는 1916년 각료회의가 자신의 최후로 변할 것임을 알면서 부카이유와 함께 초고를 써내려갔다


그것은 자신이 이기지 못한 경쟁자를 끌어내리려는 한 절망에 빠진 남자의 마지막 시도에 불과했다


갈리에니는 자신의 이름이 조프르의 적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오르내리게 만들었다


그는 마지노 등 여러 정치인에 의해 정기적으로 인용되었다


이는 죽어서도 입을 열려하는 사람의 광기에 휩싸인 증오를 보여준다


갈리에니는 전쟁 전엔 조프르를 존중했지만, 그건 제자가 자신을 뛰어넘지 않기를 바라는 스승의 존중이였다


결국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버리고 프랑스의 전례없는 시간에 스스로 일어나려고 했다


스승은 배은망덕을 비난했고, 덜 중요한 사람으로 취급받게 되자 아픈 배를 참지 못했다


매우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한 노인이 젊은이에게 권력을 승계했다가 너무 성급했음을 깨닫고 후회하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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