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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고려시대 지방에는 왜 깡촌만 있었을까?

lemiel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3.02.24 18:56:00
조회 4576 추천 43 댓글 29
														




 이전 연재글에서는 전근대 한국의 중앙집권에 의한 재분배경제가 왜 시장경제 발전을 지연시켰는지 봉건적인 연방제국가로 발전해나간 중세 일본을 사례로 해서 소개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전근대 한국의 상공업 발달이 미진한 것이 충분히 납득되지 않는다는 분들이 많았죠.


 아마도 고려와 조선의 중앙집권화에 의해 형성된 재분배경제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만큼 설명드리지 못해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재분배경제를 통해 오히려 조선 전기에 시장이 발전한건지 시장 발전이 억제된건지는 제대로 다뤄봐야 알 수 있다는 반응도 있었거든요.


 또한 이미 이전 연재글에서 지적한 한반도의 기후상의 상대적 불리함, 즉 한반도가 똥땅이기 때문에 농업생산력이 떨어져서 그런것 뿐이지 정치체제와 상공업 발전의 지연하고는 별 관계없을거라거나, 한국이 원래 중국과 일본보다 경제력이 규모면에서 취약한 거라서 이런 분석은 허수아비 치기에 불과하다거나, 일본은 은이 많이 나기 때문에 시장경제가 발전한거라는 다양한 반론이 제기되었습니다.


 이미 이전 연재글인 "무본억말? 상공업이 흥하면 농업이 망한다고?"에서 14~16세기의 한국과 일본의 인구추정치에 대해서 설명한바 있지만,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양자의 농업생산력 격차로 인해서 시장경제 발달의 격차가 나타난거라면, 이를 확인하는건 간단합니다. 전근대 농업생산력의 결과는 인구를 통해 나타나므로 인구밀도가 한국이 두드러지게 낮게 나타났을 겁니다.


 인구밀도가 낮기 때문에 거래할 수 있는 잉여의 총량이 적고, 때문에 지역 내부와 지역간 교역이 활성화되지 못하여 유통망 발달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자급자족적인 경제체제가 만들어집니다. 화폐의 수요가 작으니 유통도 잘 되지 못하는거죠.


 진짜 그럴까요? 대체 얼마나 인구밀도가 낮으면 국내 교역이 활성화가 안될 정도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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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의 인구 추이, 김재호의 "11-19세기 일본과 한국의 경제성장과 소분기 참조---


 권태환, 신용하의 "조선왕조시대 인구추정에 관한 일시론"은 조선 인구 추계에서 가장 많이 인용됩니다. 비교적 호구추계가 정밀하다고 추정되는 서울(漢城)의 호구자료를 기준으로 인구를 추정했습니다. 이에 따르면 14세기 말의 한국 인구 추정치는 550~570만 수준으로 추정하며, 다른 견해로는 750만까지 늘려 잡기도 합니다.


 일본의 경우는 토지대장인 전적(田積) 기록으로 당시 인구를 추정하는데, 경제학자 키토 히로시(鬼頭宏)를 비롯한 여러 연구들은 14세기 일본의 인구를 700~800만명으로 제시합니다.


 14세기 일본의 인구추정치는 한국의 130~140% 수준입니다. 이 시기 한반도의 한반도 너비가 22만km² 정도이고, 홋카이도를 제외한 일본의 면적은 29만km² 정도로 일본의 국토 면적은 한반도에 비해 133% 정도 더 큽니다. 면적의 비율과 인구의 비율이 매우 흡사하지요?


 14세기를 기준으로 양자의 인구밀도는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이후 양자의 격차가 벌어지게 되지만, 중세 한국과 중세 일본의 인구밀도의 격차는 그다지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이 보다 조기에 이앙법과 이모작을 보급한건 사실이지만 고려후기부터 조선 전기까지 한국의 농업생산력 성장도 만만치 않았거든요. 


 이러면 농업생산력 부진으로 인한 인구밀도의 차이, 즉 잉여의 부족이 시장경제 발달을 지연시켰다고 보기 어렵게 됩니다. 잉여의 부족이 아니라 잉여가 어떻게 경제체제 내에서 분배되는 방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게 되는거죠.


 이를 잘 보여주는 요소가 바로 지방시장과 지방도시입니다. 

 



전근대 한국 도시는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쇠퇴할까?



 중세 일본의 경우 율령제 국가의 해체 이후 장원공령제의 발달이 이루어지면서 지역에 정기적으로 열리는 시장이 출현하였다는 것은 이미 설명드린바 있습니다. 이는 지역간 교역을 촉진시키고 결과적으로 지방의 발달을 견인하게 되었을 겁니다.


 이로 인해서, 수도인 교토(京都)이외의 지방에 다수의 지방도시가 태동하게 됩니다. 지역내부와 지역간 교역의 활성화는 지방의 경제적 중심지를 형성하게 되고, 인구가 증가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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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의 지방도시 분포도, 가마쿠라 시기부터 시작되어 전국시대에 꽃피우게 된다. sekainorekisi.com/japanese_history 참조


 항구마을이라고 할 수 있는 미나토마치(港町), 정치적인 중심지인 성 밑 마을이라고 할 수 있는 조카마치(城下町), 시장이 설치된 사찰이나 신사 앞에 형성되는 몬젠마치(門前町), 사찰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지나이마치(寺内町)등 일종의 교역중심지가 촌락에서 시작되서 지방도시들로 성장하기 시작하죠.


 대표적인 것은 오사카 근방의 사카이(堺)로 수도에 인접한 항구도시로서 1399년 인구 추정치가 5만에 달하였습니다. 물론 이것은 수도인 교토로 유입되는 수운유통의 거점이라서 그랬다고 할수도 있겠죠. 하지만 교토 인근의 기나이(畿内) 지방 외에서도 지방도시는 다양하게 성장합니다. 


 주코쿠 지방에서 오우치 가문의 조카마치(城下町)로서 발전한 야마구치(山口)는 그 인구가 1400년대에 4만명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규슈의 하카타(博多)도 1471년 인구 5만에 달하는 대표적인 지방도시로 발전합니다. 


 작게는 1~2천에서 많게는 1~5만에 달하는 지방도시들이 16세기가 되면 두드러지게 성장한 모습을 보이게 되죠. 물론 이 인구가 전부 도시(City)의 거주자로서 비농업인구로 볼수는 없으나, 상당한 규모의 상공업 인구가 도시에 집단적으로 정주하는 것이 지방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세 일본과 한국의 차이가 단순히 기후의 차이로 인한 농업생산력 차이에서 나타난 거라면 양자의 인구밀도 격차가 크지 않은 13~15세기에 한반도에서도 다수의 지방시장과 이를 기반으로 하는 지방도시가 출현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중세 한반도에서 이런 지방시장과 이에 기반한 도시의 발전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고려나 조선의 지방도회(地方都會)라 할 수 있는 읍치들은 상공업자들이 집단거주하는 인구밀집지역이 아닙니다. 읍치에 거주하는 것은 대체로 지방관과 관청에서 근무하는 관노비 및 아전의 가족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읍치의 인구가 증가하는 것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나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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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편한국사-한국호구표와 지방도시 인구 참조


 한반도에서 지방도시가 발전하는건 17세기 후반에 들어가서야 시작됩니다. 18세기 후반에도 2만명 이상의 인구를 가진 도시는 개성이나 평양등 극히 일부에 불과했습니다. 인구밀도가 상당히 높아진 이후에도 지방도시 발전이 지연되었음을 알 수 있죠. 


 왜 한반도 지방도시의 발전이 지연되었을까요? 한 때 한반도 최대 도시였던 서라벌을 통해 살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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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문화원이 제작한 신라황성도.. 비현실적인 대도시---


 서라벌은 통일신라의 수도로서, 삼국유사에 따르면 178,936호(戶)에 달하는 인구가 거주했다고 합니다. 1개 가구당 5인이라고 가정하면 100만에 가까운 인구이지만, 아마도 실제 도시로서의 수도에 거주하는 인구는 10~20만을 상회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신라보다 인구가 늘어난 고려의 수도인 개경도 10만호(戶)에 불과하고, 그보다도 인구가 늘어난 조선의 수도인 한성의 경우도 그 인구는 세종 시기 17,015호(戶)로 10만 내외의 인구였다고 추정되니까요. 여기서 문헌자료가 분명한데 내려치기 한다고 분노하시면 안됩니다. 오히려 인구를 높게 잡을수록 문제가 커지기 때문입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경주부(慶州府)의 인구는 1,552호(戶), 인구가 5,894명(口)입니다. 안강현이 1,450명, 기계현이 491명, 신광현이 448명, 자인현이 1,006명으로 경주부와 합하면 가호의 수는 2,332호이고 인구는 9289명입니다. 여기서 구(口)를 성인 남성에 한정해서 실제 인구를 3~4배로 추정하면 이지역 일대의 인구는 3~4만에 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재 경주시보다 넓은 면적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경주부는 서라벌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낮은 인구밀도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경주부와 그에 속한 지역의 농지는 1만 9천 7백 33결(結)에 달합니다. 세종시기 기록에 의하면 절대다수인 잔호(殘戶)가 가구당 6~9결, 잔잔호(殘殘戶)는 가구당 5결 이하였습니다. 경주부의 경우 가호당 평균 약 8.46결의 토지면적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인구 대부분은 농민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세종 시기 경주부의 인구인 3~4만이 이 지역의 신라시대보다 훨씬 발전한 농업생산력으로 지탱할 수 있는 한계선이었다고 본다면, 통일신라 시기 서라벌은 당시의 농업기술 수준을 고려할 때 자체적인 농업생산만으로는 절대 10~20만에 달하는 인구를 감당할 수 없었을 겁니다.


 이는 전근대 한반도의 모든 수도가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지방에서 조세를 통해 대량의 곡식과 현물을 수취해서 공급해야만 수도의 대규모 비농업 인구를 부양할 수 있었겠죠. 이런 지방으로부터의 조세수취가 끊기는 순간, 서라벌은 몰락하기 시작했을 겁니다.


 가장 먼저 몰락하는건 서라벌의 왕성 성문에 설치되었던 시장인 동시(東市), 서시(西市), 남시(南市)였을 겁니다. 비농업인구가 빠르게 유출되고, 유입되던 곡물과 현물이 감소하면서 생업을 영위할 수 없는 상인들이나 수공업자들은 개경이나 다른 지역으로 빠르게 흩어졌겠죠. 


 이제 신라의 수도 서라벌이 아닌 고려, 조선의 지방행정구역 경주(慶州)가 된 이후에는 조세수취를 통한 물자유입이 아니라 지역의 교역중심지나 수공업 중심지와 같은 민간수요를 창출해 내야만 지방도시로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고려시대에도 동경(東京)으로서 나름의 지위를 가지고 있던 경주의 시장에 대한 기록은 그 이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고려 후기 이전까지 개경 이외의 지역에서 시장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건 평양이 유일합니다.


 사민(四民)이 각각 그 생업에 오로지 종사하게 되면 진실로 나라의 근본이 되는데, 지금 듣건대 서경(西京)의 습속이 상업(商業)에 종사하지 않아서 민(民)이 그 이익을 잃고 있다 하니, 유수관(留守官)은 그 아뢴 대로 화천별감(貨泉別監) 2명을 차정(差定)하여 날마다 시장의 가게[市肆]를 감독하게 하여 상인들로 하여금 모두 힘써 무역의 이익을 얻게 하라

고려사, 권79 식화(食貨) -  숙종(肅宗) 7년(1102) 9월


 서경의 시장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양계 지방이 조세를 중앙으로 운송하지 않는 잉류(仍留)지역이기 때문일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조차도 민간에서의 유통이 자체적으로 발달한게 아니라 국가주도의 시전 설치였음을 알 수 있죠.


 고려시대 서경에는 이때문인지 유수관에 호조소속의 화천무(貨泉務)가 소속됩니다. 하지만 서라벌의 후신인 동경, 즉 경주의 유수관에는 그런 부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즉 서라벌에 발달했던 시장은 중앙권력을 상실한 순간 빠르게 쇠락해 버리고, 그를 대체하는건 국가의 공적 수취를 위한 창고였죠.


 동경유수(東京留守)로 있을 때 오래된 창고가 하나 있었는데 민으로부터 능라(綾羅)를 거두어[賦] 저장하는 곳으로 갑방(甲坊)이라고 불렀다. 공납으로 바치는 양을 채우고 남는 것이 매우 많았으므로 모두 유수(留守)가 되면 사사로이 소유하고자 하였다.

고려사, 권단(權㫜, 1228년 ~ 1311년) 열전


 경주와 같은 주요 행정단위의 치소나 세곡을 보관하고 수송하는 거점지역인 조창(漕倉)은 분명 중세 한국의 중요한 물류 중심지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중앙집권적 물류거점들은 중세 일본의 주요 교역 중심지와 달리 지방도시로 발전하지 못했죠. 조선 후기에 가서야 주요 물류거점인 포구들에 장시와 비농업인구가 증가한 촌락들이 발전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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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및 조선시대 조창과 조운로, 인천일보 황해로드 기사 참조----


 중앙권력에 의해 현물을 무상으로 수취하는 시스템은 민간영역에서 특산물의 생산이나 유통망의 발전을 자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라시대와 달리 경주가 이 지역의 교역 중심지로서 지방도시로나마 유지되지 못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을 겁니다.


주군(州郡)의 토산물[土産]은 모두 관아[公上]에 들어가므로, 상인[商賈]들은 멀리 돌아다니지 않는다. 다만 대낮에 시장[都市]에 가서 각각 자기에게 있는 것으로써 없는 것을 서로 바꾸는 정도에 만족한다. 

선화봉사고려도경, 백성[民庶] 1123년경 기록


 지역간 교역은 해당 지역에서 구할 수 없는 재화를 구하기 위한 거래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역의 교통이 용이한 지점들에서 이러한 거래가 활성화되면 자연스럽게 상인과 수공업자를 비롯한 비농업 인구들이 정주하는 촌락이 만들어지고 점차 성장하면서 지방도시가 발전하게 되겠죠.


 하지만 국가가 대가를 치르지 않고 직역(職役)을 부과해 특산물을 수취하여 필요한 곳으로 운송하는 방식을 취하면 특산물의 생산자는 생산성 증가를 위해 노력하지 않게 되고, 유통하는 상인들 역시 이익을 얻을 수 없으므로 지방보다는 수도로 몰리게 될겁니다. 세곡 운송에 강제동원되는 직역을 세습하는 선원인 조졸(漕卒)은 배타는 일이라면 질색이었겠죠?


 이런 여건에서는 항구나 내륙수운/육로의 요충지에 지방도시가 생겨나기 어려울겁니다.


 이는 한반도에서 화폐의 유통이 지연되도록 만듭니다. 사실 화폐유통에 있어서 귀금속 생산을 통한 금속화폐의 제조와 유통은 화폐유통을 확대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 화폐유통 자체를 시작하게 만드는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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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미 은광, 막대한 은생산량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중세 일본의 시장경제를 태동시킨 것은 은광하고는 별 관련이 없다.-----


 고대 및 중세 일본의 금속기술사 연구자인 葉賀七三男에 따르면 나라시대~무로마치시대(710~1467)의 일본의 은 생산량 추정치는 연평균 13kg에 불과하며 아즈치 모모야마시대(1468~1602)에 가서야 연평균 7.5톤으로 증가합니다. 일본에서 은의 생산증가는 1538년 하카타 상인 카미야 주테이(神谷寿禎)에 의해 연은분리법이 조선으로부터 일본에 도입되면서 본격화됩니다. 


 중세 일본에서는 광석에서 은을 추출하는 효과적인 방법을 습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은 생산량이 상대적으로 제한적이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중세 일본에서 시장의 발전과 화폐의 유통이 12세기에 시작된다는걸 생각하면 일본에서의 은 생산량의 증가는 시장경제 발전의 과정과 결과이지, 시장경제를 태동시킨 원동력이 아니란걸 알 수 있죠.


 은 생산량이 많지 않았던 시절에도 중세 일본은 지방의 시장경제가 발전했습니다. 국외에서 송나라 동전을 수입해서라도 화폐유통이 확산될 수 있었던 반면에 한반도는 지방의 시장경제 발전이 미약해서 화폐의 수요 자체가 제한적이게 됩니다. 지역간 교역이 제한적이고 지방에서의 화폐수요가 작으므로 화폐유통이 활성화되기 어려워지는거죠.


 이 때문일까요? 한 때 한반도에서 제일 번화했던 대도시였던 경주의 시장에 대한 기록은 고려 말기 경주호장선생안(慶州戶長先生案)에 실려있는 14세기 왜구격퇴사실기(倭寇擊退事實記)에 시장 곁에 있는 영흥사(市邊永興寺)라는 대목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조선 전기의 경주부의 인구와 당시 시장의 발전양상을 볼 때 이 시기 경주에 있던 시장은 본격 정기적으로 열리기 이전의 촌시(村市) 수준에 불과했을 겁니다. 때문에 고려나 조선 전기의 선비들이 한때 번화했던 시장이 없어져 버리고 논밭으로 바뀐 양상을 시로 남기기도 했죠.


 고려 장일(張鎰, 1207~1276)의 시에, “4백 년 동안 전 장상의 집, 다투어 누대(樓臺)를 지어 몇 번이나 웅장함을 자랑하였던고? 지금은 그 화려하던 것 누구에게 물으리. 들 살구 산 복숭아가 꽃이슬에 우네.” 


 김조(金銚, ~1455)의 시에, 고개 숙인 기장과 벼가 축축 늘어진 모두 농가(農家)인데, 유적지마다 절들이 많네. 오래된 나라 천년에 조시(朝市, 조정과 시장)가 변하였건만, 산 꽃은 여전히 봄을 차지했네.....


 최숙정(崔淑精, 1433~1480)의 시에, “계림의 누런 잎에 가을바람 일어나던 그때, 옥피리 소리 그치자 왕운(王運)이 끝났네. 50대 전하던 성곽은 남았건만, 1천 년이 지난 뒤 조시(朝市)는 비었구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상도(慶尙道) 경주부(慶州府) 제영(題詠)


 현물을 직접 수취해서 국가운송체계를 통해 중앙으로 운송하고, 이를 재분배하는 구조는 한 때 한반도에서 가장 발전했던 대도시조차도 권력을 상실한 이후에는 농가로 가득찬 시골로 전락하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중세 일본에서와 같이 교역중심지가 지방도시로 발전하는 양상은 수백년 동안 나타날 수 없었죠.


 대체 현물재정이 어떻게 돌아갔길래 이런 결과를 만들었을까요?




고려와 조선의 현물재정 구조의 양상



 고려의 토지세인 조세(租稅)는 곡식을 수취한다는 면에서 현물수취에 속하긴 하지만, 지금 살펴보려는 건 곡식 이외의 여러 현물수취입니다. 고려시대에는 공부(貢賦)라고 지칭했습니다.


 고려 전기의 현물수취는 크게 2가지로 나뉩니다. 일반적인 행정구역인 군현(郡縣)에는 삼베인 포(布)가 할당되었습니다. 이는 중국의 조용조의 조(調) 시스템과 유사합니다. 그리고 특수행정구역인 소(所)에는 일부 전문 수공업자들과 농민으로 구성된 소민(所民)들에게 구리, 철, 자기, 종이, 먹(墨)과 같은 원재료나 수공업 제품들이 공물(貢物)로 수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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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강진군에서 출토된 고려시대 청자 접시 조각, 강진군에는 자기소(磁器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신라시기 성(成)이라는 행정단위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는 특수행정구역인 소(所)는 국가가 원재료나 수공업제품을 전담해서 생산해 국가에 바치도록 할당한다는 점에서 이후 공납으로 이어지는 전통을 시작합니다.

 

 소(所)에는 물론 장인들도 있었지만 수공업소들의 자연촌락 위치들을 통해 볼 때 기본적으로 농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소민(所民)들이 대부분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조선 후기 이전까지 장인들도 대부분은 농업을 겸업으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물론 공물을 바치고 남은 시간에 만든 특산물을 판매하는 것도 생계유지에 도움이 되긴 했겠죠. 


 하지만 고려는 기본적으로 지방시장발달이 매우 미진한 상태라 소민(所民)들이 공물수취하고 남은 생산물을 판매해서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수요가 충분치 않고 유통망도 발전하지 못했으니까요.


 시장경제가 상당히 발달한 조선 후기 지방의 사옹원 분원에서 입역(入役)하여 일했던 사기장인들도 사적으로 제조한 도자기를 팔아 생계를 유지했으나 때로 굶어죽을 정도였다는걸 생각하면 소민(所民)의 생활여건이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았을 것을 유추하는건 어렵지 않습니다. 


 자연스럽게 고려가 건국된지 200년도 안되서 소(所) 수공업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기본적으로 무상으로 현물을 직접 수취하는건 필연적으로 수취대상에게 거주지에서 도망가게 만들 정도로 과중해지기 쉬웠기 때문입니다. 


 동소(銅所)·철소(鐵所)·자기소(瓷器所)·지소(紙所)·묵소(墨所) 등의 여러 소(所)에서 별공(別貢)으로 바치는 물건들을 너무 과중하게 징수하여 장인(匠人)들이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여 도피하고 있으니, 담당 관청으로 하여금 각 소에서 별공과 상공으로 바치는 공물의 많고 적음을 참작하여 다시 정하여 아뢰어 재가를 받도록 하라.

고려사 식화1(食貨一)  1108년 2월


 시장경제가 발달하지 않은 상황에서 중앙권력에 의해 공물이 수취되는 구조는 필연적으로 수취대상들의 생계부담을 증가시키고 이들이 직역에서 이탈하도록 만듭니다. 이는 고려-조선시대 내내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결과 이미 12세기에 소 수공업이 흔들리기 시작해 점차 해체되면서 조선 전기인 15세기로 가면 아예 사라집니다.


 이러한 소 수공업의 해체 양상을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새롭게 생겨난 현물수취체제에 대한 기록입니다.


 1226년 상요(常徭)와 잡공(雜貢)이라는 수취항목이 새롭게 등장합니다. 상요와 잡공에 대해서 유일하게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으로, 이는 토지세인 조(租)와 별도로 그 지역의 소출로 국가에 납부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12세기 이후 소(所)나 부곡(部曲)과 같이 특별행정구역에만 국한되던 특산물의 현물수취가 소나 부곡이 해체되어가면서 군현에 할당하게 되는데 이를 지칭하는 표현이 상요(常徭)와 잡공(雜貢), 또는 이를 통칭하는 요공(徭貢)입니다.


 이제 소(所)에 속하지 않는 일반적인 군현이 다양한 특산물을 할당받아서 바치도록 하는 공납제의 원형이 13세기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기존에는 특별한 행정구역만 공물수취로 고통받았지만 그 행정구역이 무너지면서 이제 모두가 다 공납제의 고통 속으로 빠져들게 되는 셈입니다.


 이는 고려시대 현물수취제도가 지방의 특산지를 발전시키는데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줍니다. 그 결과 그 수취대상은 보다 비전문적인 절대다수의 농민들로 확대되는거죠.


 이외에도 토지에서 떠나 유망하는 농민들을 정착시켜 공호(貢戶)로 특정한 물자를 생산하여 납입하도록 하는 제도나, 아예 전세(田稅)를 수송이 까다로운 곡물이 아니라 삼베나 면포, 꿀, 기름등으로 납부하는 전세공물(田稅貢物) 제도가 12세기 이후 고려에서 공물이 국가재정에서의 비중을 늘려나가고 있었다는걸 보여줍니다. 


 국가재정 비중에서 현물수취의 비중이 늘어날수록 고려의 민간경제에서 특산물이나 원재료, 수공업 제품이 잉여로서 시장에서 거래되기 어려워질 겁니다. 이는 지방에서 지역 내 거래와 지역간 교역을 어렵게 만들겠죠. 자연스럽게 지방에서 시장이 출현하거나 교역거점이 발전하지 못하도록 만들었을 겁니다. 


 기존의 군현의 조세는 토지를 기준으로 과세 기준이 결정되지만 상요와 잡공과 같은 현물수취는 군현별로 무엇을 얼마나 낼지만 결정되고 기준이 모호했습니다. 지방관의 재량에 따르다 보니 결과적으로 최악의 과세기준, 인두세로서 가호마다 배당되는 식이 되기 쉬웠습니다. 상대적으로 가난한 농민들에게 부담이 가중되는 셈입니다. 


 대동법이 도입되는 17세기까지 이어지는 백성이 가장 고통스러워 했던 공납제의 폐단은 고려 후기에 형성되었다고 하겠습니다.


 13세기에 군현에 공물의 수취가 확대되면서 자연스럽게 방납의 폐단으로 이어지게 되죠. 


 근래에 외방(外方)에 변고가 많고 공부(貢賦)를 납부하는 것이 때를 잃어 제사(諸司)의 관리와 모리(謀利)하는 사람들이 자기 물건을 먼저 납부하고(先納己物) 문건을 빙자하여 향리로 내려가서 잉여를 남기기 위해 값을 취하고 있는데, 민이 실로 감당할 수 없으니 진실로 마땅히 금지해야 할 것입니다.

고려사 형법(刑法) 1296년 5월


양 창(倉)의 녹전(祿轉)과 각 관청의 공물(貢物)을 수송하여 납부하는 시기를 근래에 잃었기 때문에 써야 될 것이 부족하게 되어서, 장사치[貨殖]의 무리들로 하여금 이 때를 틈타 이익을 노려 먼저 그 본전을 납부하고 즉시 그 고을[鄕]로 가서 이자를 배로 거두게 하게 되었으니, 민(民)이 어떻게 이를 감당할 수 있겠는가? 

고려사 식화1(食貨一)  1339년 5월


 사실 농민이 대다수인 군현의 백성들에게 구리나 철을 채취해오라거나 종이나 먹을 제작해오라 하면 자연스럽게 차라리 곡식이나 포(布)로 값을 치르는걸 선호하게 될겁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이런 악조건 하에서도 고려에서 시장경제가 발전하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거래를 통해 공물을 구할 수 있는 민간시장의 발전을 의미하니까요.


 문제는 이 과정을 감독하는 지방관이나 향리들이 대납업자들과 결탁해 백성을 착취하는 문제가 발생한다는거죠.


 중세 일본에서는 자연스럽게 이런 현물이나 부역의 수취가 대전납(代銭納)으로 대체되었으나, 국가권력에 의한 현물수취를 굳이 고수한 고려나 조선에서는 이 과정의 부패와 불공정행위가 발생하기 쉬웠습니다. 중간과정에 국가권력이 개입하거든요. 공물을 수취하는 향리나 지방관, 개경에서 공물을 수령하는 중앙관서의 관원들은 방납업자와 결탁해서 이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정해진 양 이상의 현물을 수취하는 횡렴(橫斂), 다음 해의 공물을 미리 징수하는 예징(豫徵), 도망친 이에게 할당된 공물을 다른 이에게 추가로 거두는 가징(加徵)등이 발생합니다. 명확한 과세기준을 설정하기 어려우므로 자연스럽게 일어난 현상이죠.


 권력과 결탁해 대납과정에서 농민을 착취하는 상인이나 향리의 사악함이 문제였을까요?


 아니면 이런 문제를 발생시키는 중앙권력의 현물 수취제도 자체가 문제였을까요?


 조선의 건국세력인 신진사대부는 현물수취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백성을 괴롭히는 폐단이라고 인식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뭔지에 대해서 인식하지는 못했습니다. 


 공부 상정 도감(貢賦詳定都監)에서 글을 올렸다...(생략)

 옛날의 그 나라를 잘 다스리는 사람은 토지의 생산을 헤아려 그 공부(貢賦)를 정하고, 재물의 수입을 헤아려 그 용도를 절약하였으니, 이것이 경상(經常)의 법입니다. 무릇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이것에 삼가야만 되는데 하물며 창업의 초기이겠습니까?....(생략)


 신 등이 삼가 예전 전적(田籍)을 상고하여 토지의 물산(物産)을 분변하여, 공부의 등급을 마련해서 전의 액수를 적당히 감하여 일정한 법으로 정하고, 그 철따라 나는 물건[時物]으로써 일정한 공부가 될 수 없는 것은 일정한 공부의 외에 열록(列錄)하고, 이를 명칭하여 별공(別貢)이라 했으니, 귤(橘)과 유자(柚子)의 유와 같은 것이 이것입니다....(생략)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절약하고 검소하여 시종토록 변하지 않으시고, 용도를 절약하고 백성들을 사랑하여 만세의 가법(家法)을 삼게 하소서. 지금 정한 바의 공부의 액수를 갖춰 기록하여 책을 만들어서 장계(狀啓)와 함께 올리오니, 비옵건대, 중앙과 지방에 반포하여 영구히 성법(成法)으로 삼게 하소서."

태조실록 1년 10월 12일 (1392년)


 조선 건국집단인 신진사대부가 공납의 폐해를 극복할 방법으로 제시한 것은 다시 옛 방식대로 현물을 바치도록 하고 공물을 바치는 양을 가능한 줄이기 위해 근검절약하자는 거였습니다. 물론 단순히 근검절약만 하자는건 아니었죠.


 고려 후기에 번잡하게 중복되어 있는 포(調)·공(貢)·상요·잡공·호포(戶布)의 현물수취제도를 공물(貢物)로 단일화하고, 해마다 바치는 상공(常貢)과 부정기적으로 바치는 별공(別貢)으로 정리함으로서 가능한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정부패나 폐단을 줄이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특산물이 나는 곳에 공물을 적절히 재할당함으로서 백성의 부담을 감소시키고, 기존의 방납, 횡렴, 예징, 가징등의 부정부패를 엄금하고자 했죠.


 물론 현물의 직접적 수취라는 공납의 기본 체계를 바꾸지 않고 폐단을 줄이겠다는 공안(貢案) 개정 방식은 미봉책에 불과했습니다. 현물수취로 인한 공납제의 폐단은 고려시대에 나타난 것과 마찬가지로 반복됩니다. 


 대체 왜 조선의 건국집단은 현물수취 제도를 계속 고수한걸까요? 


 사료를 곧이곧대로만 본다면, 조선의 건국집단인 사족들이 현물수취 제도를 대대적으로 개편하지 않고 부분적인 수정만으로 고수하고자 하는 것은 유학의 복고적인 사상 덕택입니다. 


 고대의 우임금이 천하를 나누고 각지의 물산을 거두었다는 임토작공(任土作貢)의 뜻을 다시 한번 한반도에 바로 세운다는 복고적 정책을 추구하는 것이죠. 유학의 본토인 중국보다 동방의 소중화인 조선이 진정 하(夏)·은(殷)·주(周) 삼대(三代)를 정치적 이상으로 한반도에 실현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단편적으로만 봐선 안됩니다.


 물론 대동법 도입시점에서조차 이러한 성리학적인 명분론은 대동법 도입에 있어서 조선 건국시점과 유사하게 부분적인 개혁을 실시하자는 공안개정(貢案改正)과 대동법 도입 논쟁과정에서 꽤나 영향을 주었으니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보다 현실적인 측면을 살펴봅시다.


 고려시대에 국가재정에서 현물수취의 비중이 커진 것은 확실하지만, 그 비중이 얼마나 되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조선 초기의 재정 관련 자료들을 통해 이 시기의 국가재정에서 현물수취의 비중이 어느정도였는지를 제한적으로나마 추정할 수 있습니다. 


 소순규는 "고려 말 조선 초 재정 구조의 연속성과 공납제 운영"에서 1391년 실시된 양전(量田)을 통해 여말선초 시기의 과세 토지가 총 80만결이었고, 이중 35~40만결만이 중앙으로 수송되어 중앙재정으로 사용되었으며, 이중 15만결 정도의 전세가 미곡이 아닌 포화(布貨)나 잡물(雜物)과 같은 현물로 수취되었다고 보았습니다. 


 즉 토지세로 과세된 중앙재정의 40%가 미곡이 아닌 공물이었다는 이야기죠. 여기다 전세가 아닌 공물을 통해 수취되는 것들을 감안하면, 여말선초 시기 국가재정에서 미곡이 아닌 현물재정의 비중이 압도적이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태종 및 세종대에 군량미나 미곡비축을 위해서 전세로 미곡 대신 공물을 납입하던 전세공물의 비중을 줄이거나 1405년 재차 양전(量田)을 실시해 126만결로 과세토지를 늘리는 등의 변화가 이루어지긴 했지만, 이로 인한 공물조달이 어려워지게 되자 공물의 부족분을 늘려서 부과하는 공안개정이 세종대에 이루어지기도 하죠.


 대동법 도입 시기에 토지세인 전세(田稅)가 1결당 4두(斗)에 불과했던 반면, 공물을 대체하는 대동세의 비중이 1결당 12~16두(斗)에 달했다는걸 생각하면 적어도 공식적인 국가재정의 75~80%가 토지세가 아니라 공납을 통해 조달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실질적으로는 그 이상이었을 가능성도 있죠.


 즉 현물을 직접 수취하는 제도를 건드리는건 국가재정에 심각한 위기를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신생국가 조선의 건국집단에게는 정치적 불안정성을 늘릴 수 있는 위험한 개혁은 불가능했겠죠. 이건 사전개혁보다 오히려 정치적으로 더 위험한 일이었을 겁니다.


 신진사대부는 실질적으로 가장 고려의 농민에게 고통스러웠고, 앞으로도 고통스러울 제도는 일정 이상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공납을 통한 현물재정은 대동법 도입 이전까지 나라 살림의 근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대체 왜 현물재정이 고려와 조선의 국가재정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한 걸까요?  이거 대동법 빨리 도입해서 해결할 수 없는겁니까?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제기되는 원인이 수송의 어려움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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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8년 태안반도에서 침몰한 마도 1호선을 복원한 국립해양문화재 연구소의 고려시대 조운선----


 소순규는 "고려 말 조선 초 재정 구조의 연속성과 공납제 운영"에서 고려 후기 현물수취의 비중이 증가한 주요 요인으로 몽골의 침공과 왜구의 침입으로 인해 국가의 수취 및 조운 인프라에 상당한 타격이 가해지고, 이로 인해서 상대적으로 수송이 어려운 미곡을 지방에서 수취하기 보다는 수송이 용이하게 부피나 무게가 작은 각종 현물의 비중이 증가했으리라고 추정했습니다. 

 

 가만히 보건대, 경상도는 산이 막히고 바다가 막히어, 조세 수납(輸納)의 어려움이 다른 도의 배가 되기 때문에, 고려조(高麗朝) 이래로 그 지방 산물(産物)의 편의에 따라 혹은 주포(紬布)로 거두고, 혹은 면서(綿絮)로 거두어, 일찍이 조[粟]와 쌀[米]을 거두지 않았으니, 백성의 희망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제도를 정하여 5백 년을 내려오며 행하였어도 폐단이 없었습니다...(생략)


 지난 신사년에 주포전(紬布田)에서 거둔 곡식[粟]이 2만 8천여 석인데, 수운[漕轉]으로 상납한 수는 6천여 석에 지나지 못합니다. 금년 임오년의 초·이번(初二番) 녹봉(祿俸)의 전청(傳請)한 수가 만여 석에 이르니, 그렇다면 주포전에서 거두는 조(租)가 다만 그 도의 군자(軍資)에 충당할 뿐이고, 경성(京城)의 저축에는 도움이 없습니다.

태종실록 2년 9월 24일(1402년)

  

 토지세를 미곡으로 수취하지 않고 현물로 수취하는 전세공물이나, 상대적으로 먼 거리에 위치한 경상도의 경우 전세를 미곡으로 수취하지 않고 포(布)로 납부하는 기록은 조세의 수송에 있어서 미곡이 상대적으로 까다로왔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것만이 원인이었을까요? 미곡이 수송하기 어렵다면 수취한 미곡으로 지방의 특산물을 사서 운송하면 되는거 아니겠습니까? 


 물론 지방시장이 발달하지 않아서 이게 어려웠을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른 요인에 보다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고려시대에 토지에 과세되는 세율이 어느정도냐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들이 있습니다. 국가 소유의 공전(公田)이 25%이고 사전(私田)이 50%라는 의견에서, 10%라는 해석까지 명확하게 결론내리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대체로 고려 후기로 갈수록 토지세의 세율 자체가 10%에 가깝게 저하된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의 과전법도 1결당 300두의 수확량을 감안해 30두, 즉 10%의 세율을 설정합니다. 이후 조선 전기에 토지세율은 1결당 4두까지 내려가 2%도 안되는 세율이 되죠.


 고려 후기에는 국가 소유의 공전(公田)이 감소하고, 민전(民田)이 증가하는 등 토지제도가 이완되고 토지세의 수취량이 감소하면서 재정문제가 심화되는 양상을 보입니다. 조선이 건국되기 이전부터 국가의 과세체계에서 토지에 대한 과세는 감소하는 추세를 보여줍니다. 


 국가의 중앙집권화나 관료제가 발달할수록 재정부담은 증가합니다. 이를 충족시키는 과정에서 고려나 조선 모두 토지세에 대한 과세는 감소하고 가호(戶)에 부과되는 현물수취의 비중은 증가하죠. 


 이건 누구에게 유리하고 누구에게 불리할까요?


 고려 후기 - 조선 전기에 전장(田莊) 또는 농장(農場)이라 불리는 사족(士族)들의 직영 농지가 발전합니다. 토지소유권이 발달하는 시기이기도 하죠. 토지에 대한 과세부담을 줄이는 것은 농장주이자 사회 기득권층인 사족들에게 매우 유리합니다. 


  명확한 부과기준이 없이 군현에 일정한 양이 부과되고 지방관이나 향리에 의해서 누가 부담할지 결정하게 되는 현물수취를 증가시키면 이 부담은 사족보다는 자연스럽게 농민들에게 전가되겠죠? 


 대동법 도입 이전까지 국가 재정에 있어 현물 수취의 비중이 높게 유지될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고려와 조선의 기득권층에게 상대적으로 유리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이는 물론 백성에게 고통스러운 일이었겠지만, 기득권층인 사족(士族)들에게 호의적인 수취체계를 통해 정치적 안정성을 제공합니다. 



-----고려와 조선의 중앙권력에 의한 현물재정 시스템은 시장경제가 발전하지 못하도록 수백년간 칼침을 먹였다. 이래도 발전할래? 어? 이래도? -----


 다만 자연스럽게 지방의 시장에서 거래되어야 할 잉여 생산물을 국가의 수취체계가 빨아들임으로서 지방에서의 지역 내부와 지역간 교역을 활성화시키지 못하게 만들었을 겁니다. 자연스럽게 시장경제의 발전이 지연되고, 이는 수공업의 발전을 억제했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15세기 후반에 조선의 지방에 정기시가 출현했다는건 그야말로 국가의 통제와 현물수취가 수요와 공급을 통한 잉여생산물의 거래로 인해 시장경제가 자연스럽게 발달하는 것 자체를 늦출수는 있어도 아예 막을수는 없다는걸 알려줍니다.


 자 여기까지 보면 삼국시대에 중국으로 부터 도입된 율령제의 영향 이후, 한반도의 중앙집권화와 현물수취 제도가 시장경제의 발전을 저해함으로서 중국이나 일본과 비교할 때 상공업의 발전이 느려지고 그 결과 수공업의 생산성이 떨어지게 만든 "거시적 요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설명만 들어서는 이 주장에는 헛점이 있습니다. 다른 분들을 대신해서 제 주장을 공격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전근대 고려와 조선의 행정 및 조세수취능력은 매우 한계가 있었습니다. 고려는 모든 군현에 지방관을 파견하지 못해서 재지세력인 호족에게 호장(戶長) 직위를 내려 상당 부분 통치를 위임해야 했습니다. 조선시대에 와서야 모든 군현에 지방관을 파견할 수 있게 되지만, 실질적으로 파견되는 지방관 1명으로는 한계가 분명했죠.


 게다가 고려나 조선의 국가재정이란게 전체 경제규모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현대 공산주의 국가처럼 국가가 경제를 전체적으로 통제할 만한 능력이 없다는 이야기죠.


 즉 국가가 민간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수요를 충족시킬 수도 없고, 그럴 의지도 없다는 겁니다. 


 물론 전근대 사회에서 국가는 생산물의 가장 큰 수요자라고 할 수 있겠지만 전체 경제에서 국가의 수요가 민간의 수요를 모두 만족시킬 순 없죠. 국가가 농민이 필요로 하는 농기구를 모두 제작해서 나눠줍니까? 사족이 필요로 하는 도자기를 국가가 다 공급해주나요? 집을 만들거나 가구를 수리할 때 사용할 쇠못을 국가가 만들어 나눠주겠습니까? 고려나 조선은 국가수요를 충족시키는 것도 힘들어했습니다. 


 민간 수요를 국가가 충족해주지 않는 한 현물수취로 국가수요를 충족시켰다고 시장경제 발전이 느려진다는 주장이 말이 되냐는거죠.


 그래! 중앙집권화와 현물수취가 시장경제를 말아먹었다는 니 주장은 개소리라고!!!!




 맞습니다. 고려나 조선의 재분배경제 하에서 국가수요가 현물의 직접적 수취로 충족되었다 할지라도 민간수요가 존재하므로 지역 내부, 지역간 교역은 여전히 활성화될 수 있습니다. 민간수요가 시장경제의 원칙에 따라 충족된다면 말이지요.


 국가재정에서 토지에 대한 과세보다 인두세의 비중이 높아지는 현물재정은 고려와 조선의 사족들에게 간접적인 혜택을 부여했습니다. 과세부담은 상대적으로 적지만 국가가 제공하는 외적이나 내란으로부터의 보호, 재산권의 보장, 범죄로부터의 안전과 같은 서비스는 동일하게, 정확히는 더 많이 누릴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이건 간접적인 혜택에 불과합니다. 실질적으로는 더 큰 혜택이 주어졌습니다.


 고려와 조선의 사족계층은 과세기준이 모호한 공물(貢物)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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