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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롭고 여유로운 샬레의 어느 하루.
간만에 일이 별로 없다는 말을 한 선생이었지만 벌써 몇 시간 째 끊임없이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었다. 그의 기준이었던 거겠지.
그래도 경보가 울린다거나 습격을 받는다거나 왠지 콧김이 거친 학생의 습격 없이 일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인 건 좋았다.
아마 당번의 영향도 있겠지. 선생이 키보드 옆에 놓인 편의점 커피─벌써 빈 커피통이 4개에 달했다─를 한 모금 머금으며 당번 학생을 슬쩍 바라봤다.
오늘의 당번은 아마우 아코. 역시 행정관이라는 직책을 단 덕분인지 작업 속도가 빨랐다. 다른 학생들과 비교하는 건 실례지만 아마 한 손에 꼽을 수 있지 않을까.
특히 오늘은 작업 기세가 말도 못할 정도로 높은 것이 귀기 어렸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였다.
"아, 선생님. 커피 쌓여있어요. 치울게요."
"고마워."
아주 잠깐 숨 돌릴 틈을 타 아코가 선생 자리의 빈 캔들을 치웠다.
깡깡 소리를 내며 쓰레기통 안으로 들어가는 캔을 보던 그녀가 아주 잠깐, 정말 잠시간 자신의 주머니 안을 만지작댔다.
목줄 형태의 무언가가 손에 잡혔다. 특수 주문 제작하여 원하는 문구가 들어간 목줄이었다.
'내기해야 하는데.'
이미 승패가 아닌 내기라는 행위 자체에 중독된 아코였기에 당번을 빌미삼아 내기를 하려고 했었지만..
'이게 일이 별로 없는 거라고요? 진짜로요?'
일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조바심의 영향도 있겠지만 그걸 배제해도 차고 넘칠 정도로 많긴 했다.
속으로 그렇게 물어봤지만 당연히 선생에게서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아코."
아니, 있었다. 생각이 새어나가기라도 한 건지 선생이 아코에게 말을 걸었다.
"네?"
가시 돋친 태도를 고수하긴 하지만 언제나 그런 태도를 고수하는 건 아니다.
평상시에도 그런 식으로 사람을 대하면 서로에게 스트레스가 상당할 거였다. 거기다가 너무 날카롭게 몰아붙이면 선생에게 미움 받을 수도 있을 거고..
..상당히 부끄러운 생각과 손아귀에 잡혔던 목줄을 동시에 숨긴 아코가 물었다.
"힘든 거면 쉬어도 돼. 어차피 일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저 사람은 항상 그런 말을 하지.
"평소에도 일 많이 하고 있잖아? 당번할 때만큼은 마음 놓고 쉬어. 아, 히나가 열심히 일 하고 있는데 이런 말은 조금 그럴 수도 있겠지만."
갤러리에 자주 보이는 그 사람의 말버릇이 절로 이해되는 상냥함이었다.
다크서클을 달고 다닐 정도로 과로하는 사람이 저런 말을 하다니.
아코가 주먹을 꼭 쥐었다. 이건 선생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승패를 가르는 내기를 위해서라며 속으로 누구에게 하는 건지 모를 변명을 내뱉고는, 선생의 뒤로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턱 얹었다.
"선생님."
"응?"
"앞으로 일 얼마 안 남았다고 했죠?"
"그렇지? 그냥 적당히 마무리 작업만 하면 돼."
"그러면 제가 마무리 지을게요. 선생님은 들어가서 쉬어주세요."
"아니, 그럴 수는 없지. 내 일이니까."
이럴 때의 선생은 완고하다는 걸 알고 있는 아코였지만 오늘만큼은 물러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나름대로 선생과의 유대를 쌓아온 아코였기에 어떤 식으로 나와야 선생이 물러날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게 걸리긴 했지만, 그런 문제는 앞으로 이어질 내기를 생각하면 적당히 참아낼 수 있었다.
"..선생님께서 또 괜찮은 척 하시면서 속으로는 곪아가고 있다면 저 정말로, 걱정돼서 행정관 업무도 손에 안 잡힐 거예요."
가시를 감추고 직접적으로 전하는 걱정과 호의.
"숨긴다고 숨겼었는데, 눈치챘었어?"
"눈치 안 챈 사람이 더 많을 거예요."
"그런가? 그러면 뭐.."
멋쩍게 머리를 쓸어내리며 툭 던진 한 마디. 한 발 물러난다는 뜻이었다.
"아코도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하? 무리 같은 건 안 해요! 컨디션 조절만큼 중요한 건 없으니까요!"
평소와 같은 아코의 반응에 얼굴에 미소를 내건 선생이 휴게실로 들어갔다.
당번도 꽤 많이 했겠다, 아코를 믿기에 할 수 있는 바통 터치였다.
선생이 자신을 신뢰하는 것에 약간의 간질간질한 감정을 느끼던 아코였지만 가뜩이나 한정된 시간을 더 유예할 수는 없었다.
'얼마 안 남기는 무슨..'
역시 선생의 기준에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거지 아코의 기준에서는 상당히 많았다.
선생이 선잠을 마치기 전까지 처리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기우. 어제부터 일의 능률이 무서울 정도로 오른 아코에게 이런 일의 마무리를 짓는 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찾아오는 학생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대충 보내며 일을 마친 아코. 거기까지 걸린 시간은 대략 3시간. 일의 양에 비해 나쁘지 않은 시간 소모였다.
으그그 기지개를 펴고 있자니 타이밍 좋게 휴게실에서 선생이 나왔다. 아코의 표정과 줄어든 서류의 양에 정말로 놀란 기색이었다.
"..아코? 설마 진짜 다 끝낸 거야?"
"뭔가요? 그 말은? 설마 제가 못 끝낼 거라고 생각하셨던 건가요?"
"아니 그건.."
잠시 말을 늘이던 선생이 아코를 응시하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진짜 고마워, 너무 큰 신세를 졌네. 괜히 당번 와서 일만 시켜버리고."
"뭐, 이건.."
마찬가지로 간질간질한 기분에 손사래를 치려 했던 아코가 말을 멈췄다. 중대한 할 일을 까먹을 뻔했어!
"그렇다면 제가 한 고생의 대가를 받아야겠죠!"
"아, 그렇지. 당연히 줘야지."
그렇게 말하고는 음─이라며 고민하는 선생. 아무래도 아코에게 줄 선물을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고민 안 하셔도 돼요. 원하는 건 있으니까."
"원하는 거?"
"네. 그러니까.."
아코가 자리에 놓여있던 컵 두 개를 가리켰다. 모양과 크기가 똑같은 컵이었다.
"내기하죠! 저희!"
"내기?"
"네."
아코가 웃었다. 드디어 자신의 목적을 말할 수 있었으니.
선생도 선잠으로 인해 컨디션을 회복한 것 같으니 만만세였다. 만약 선생의 컨디션이 난조였다면 죄책감에 제안하지 못했을 거다.
"야바위 아세요?"
"야바위.. 알고 있긴 한데, 컵은 두 개로 하는 거야?"
아코가 끄덕이자 선생이 의문을 표했다. 컵 두 개로 하는 야바위는 너무 쉬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뭐, 자신의 일이 아닌데도 열심히 해준 아코를 위해서라면.
헌신적인 선생의 태도 덕에 의심 없이 내기를 할 수 있게 된 아코. 거의 다 왔다!
"그러면 공격은 제가 하죠. 이견 있나요?"
"없지. 오늘 고생한 거 아는데 있어도 넘어가야지."
"좋은 마음가짐이네요. 그러면 조속히!"
─하기 전에!
"벌칙은 반드시 수행해야 한다는 언약을 맺죠. 이견 있나요?"
"반드시 수행.. 은 확답을 못 주겠는데? 아무래도 내 몸으로는 못 할 일이 많으니까."
"괜찮아요! 선생님께서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아니, 선생님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지.
"그렇다면야. 알겠어."
"약속 어기면 새끼 손가락 자르기예요!"
야쿠자야? ..여하튼 할 수 있는 일이라니까.
선생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코가 배시시 옅은 미소를 지으며 컵 안쪽에 작은 종이를 붙였다.
"맞히시면 이기시는 거예요. 단판 승부고요!"
"알았어."
"시작!"
아코의 손이 움직인다. 느릿하게.
'아, 조금씩 빨라지는 건가?'
휙.
휙.
"자, 맞추세요."
"..응?"
"뭔가요? 그 의심하는 것 같은 눈빛은? 제가 무슨 수작 부렸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아니, 지금 맞추라고?"
아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따라 선생의 미간이 조금 좁혀졌다.
딱 두 번. 심지어 종이를 어디에 넣었는지도 처음에 보여줬다.
못 맞추는 게 이상한 상황이 되레 선생의 의심을 불러 일으킨다.
'수작 부렸냐고 물어봤지 수작을 안 부렸다고는 말 안 했잖아?'
고도의 심리전. 가위바위보에서 '난 바위 낼 거야'라고 말하는 방식의, 듣는 이에게 강압적인 추리를 요구하는 심리전.
선생이 아코의 표정을 살폈다. 선생이 속임수에 걸릴 걸 기대하듯 입꼬리를 씰룩씰룩 움직이고 있었다.
이어서 손. 여느 때처럼 장갑을 낀 손끝이 한 쪽 컵을 가리키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플러팅. 오히려 속이는 거겠지.
역시 아직 학생, 완벽하게 마음을 숨기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법이니까.'
선생이 아코가 손으로 톡톡 건드리던 컵의 반댓편을 가리켰다.
"..진짜인가요? 바꿀 기회 있는데요?"
그 말이 곧 선생의 선택이 정답이라는 거였다.
"바꿀 생각 없어. 바로 열게?"
"앗!"
연 컵에는 선생의 생각대로 종이가..
"어?"
종이가 없네?
"아니 정말! 뭐 하는 건가요! 답까지 이렇게 톡톡 찍어줬는데!"
"아니, 어? 답을 왜 찍어.."
"그건 됐어요! 설마 학생을 의심한 건가요? 그래서 다른 쪽을 선택한 거잖아요!"
선생이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속은 건 자신이었나.
이러나 저러나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법. 순순히 패배를 인정해야겠지.
"그러면 제가 이긴 거네요. 맞죠?"
"그렇지?"
"선생님께서는 아까 말했던 벌칙을 수행해야 하고요. 맞죠?"
"내가 할 수 있는 선이라면."
"말이 다르잖아요~!! 부담 없는 벌칙이니까 반드시 하겠다고 맹세하세요! 맹세맹세~!!"
곧 바닥에 드러누워 떼를 쓸 것 같았다. 샬레 업무실이 깨끗하긴 하지만 신발을 신고 들어오는 곳에 누우면 곤란하니까.
선생이 얼른 고개를 끄덕이자 아코가 주머니를 뒤적였다.
"뭐 꺼내는 거야?"
"벌칙에 쓸 물건이요!"
"벌칙.. 아, 설마."
목줄인가? 설마 자신이 그 목줄을 차야하는 거고?
몇 번이고 아코와 내기를 하고 이기는 나날이 이어졌었고, 아코에게 목줄을 채우는 나날이 계속됐지만 그렇다고 자신도 찰 준비가 되어있던 건 아니었다.
조금 당황한 선생 앞에 목줄이 놓여졌다.
"잡으세요."
손잡이 부분.
"얼른요!"
그걸 잡자마자 아코가 기다렸다는 듯 목줄을 찼다.
자신의 목에.
왜?
"어.."
"왜 그러시나요? 목줄 차는 거 처음 보시는 것도 아닌데."
그건 아니지만.
선생의 시선이 아코의 목을 향했다. '주인님의 영원한 노예 아마우 아코♥' 라고 적혀 있었다.
대체 왜?
"큭.. 수치스러워.. 잘 됐네요? 선생님!? 저한테 이런 수치심을 안겼으니까!"
"아니, 딱히.."
"딱히 수치스럽지 않다구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네요! 패배한 선생님께 수치심을 안겨드리지 못한다면 벌칙이 아니니까!"
수치를 느껴야 하는 건 본인 아닐까? 어쩌면 선생 자신에게 수치심을 주는 것에 혈안이 되어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모르는 걸 수도.
그런 거라면 조금 재밌는 상황이었다. 사진으로 찍어서 나중에 아코에게 다시 보여준다면 엄청나게 기겁하지 않을까?
좋은 생각이 떠오름에 선생이 핸드폰을 들려 했지만, 이어지는 아코의 행동이 그것을 막았다.
"따라오세요! 벌칙은 이제 시작이니까!"
"시작이라고? 앗, 아코!"
아코가 빠르게 선생을 끌고 갔다. 영문도 모른 채 그런 아코를 따라가는 선생.
..
실시간으로 비어있는 선생의 손이 조금씩 위로 올라온다. 보지 말라는 듯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덮은 꼴이 D.U.를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는다.
아니, 시선을 붙잡는 가장 큰 이유는 선생이 아니라 그의 손에 잡힌 애완동물 탓이리라.
"하아.. 하앗..! 어때요! 부끄러운가요!? 수치스럽죠!? 선생님!!"
부끄러워.
"아직 돌아가면 안 돼요! 세 바퀴는 더 돌 거니까!"
수치스러워.
어째선지 부끄럽다기보다 흥분한 것 같은 아코가 네 발로 앞장 서 산책을 주도하고 있었다.
이런 아코의 기행이 다른 곳에도 퍼진 건지, 아니면 너무 수상해서 접근할 수 없는 건지 사람들이 하나 같이 그들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조용하니 산책하기 딱이네요! 물론 선생님과 산책하는 게 너무 좋은 건 아니지만!"
"어, 어. 그래."
"대답이 시원찮잖아요! 그런 걸로는 벌칙이 될 수 없다구요!"
"어.. 노력해 볼게."
"돌아가면 산책 수고했다고 샤워도 같이 하는 거죠!? 거기까지 해야 선생님께서 수치스러워 하실 거 같으니까!"
"이미 충분히 수치스러워.. 진짜 엄청난 벌칙이네, 아코. 그리고 샤워는 같이 안 할 거니까."
"뭣! 어째서인가요! ..어쩔 수 없네요! 그 대신 한 바퀴 더 돌 거니까!"
텐션이 오른 아코가 앞으로 향했다. 학생을 이런 곳에 놔두고 도망칠 수 없는 선생을 알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찰칵!
셔터음이 들렸다.
초현실적인 광경에 정적이 흐르는 주변이었기에 그 소리가 상당히 크게 울렸지만, 선생은 그 소리를 잡아내지 못했다.
초현실적인 광경에 정신이 멍해진 건 이쪽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자! 하아, 하아, 하아..! 다음은 저쪽으로!!"
'..스트레스가 쌓인 걸까.'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그런 생각을 하는 선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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