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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객석 98년 7월호 - 디아길레프와 니진스키모바일에서 작성

ㅇㅇ(39.7) 2024.05.16 12:43:24
조회 906 추천 32 댓글 13

98년도 기사라 그런지 퀴어혐오 워딩이 있긴한데
내용 자체는 알차서 가지고 왔어
불편한 부분은 흐린 눈하고 한번 읽어 봐!!












객석

1998년 7월호


위대한 예술가들의 세기적 불화: 디아길레프와 니진스키

그들의 한계는 그릇된 동성애에 있었다

발레 뤼스의 창단자이자 당대 예술계 최고의 극장 흥행주 디아길레프와 그 무용단의 주도 댄서로 활약하며, 일명 '무용의 신'이라 불렸던 니진스키. 이들의 만남은 세계 발레사의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기록된다. 그들은 예술적 고련관계로서 위대한 춤의 유산을 남겼음은 물론, 연인관계로서도 충분한 흥미거리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역사의 영역에선 '가정법'이 허용되지 않겠지만, 예술가에 불후의 업적을 남긴 창조적 천재들의 행적을 탐구하다 보면 너무나 자주 가정법을 적용하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된다. 이를테면 만약에 모차르트가 요절하지 않고 하이든만큼만 장수했다면, 또한 슈베르트가 10년만 더 살 수 있었다면, 만약에 베토벤이(사실상 머릿속에선 완전 상태였던) '교향곡 제10번'과 '레퀴엠'및 '파우스트'등을 창조할 수 있을 만큼만 더 수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면, 그리고 만약에 랭보가 스무 살에 시작(詩作)을 중단하는 대신 계속 시인으로 활약했다면, 또한 만약에, 만약에...이런 식으로 아마도 몇 페이지는 계속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만약에 니진스키가 결혼을 하지 않고(또한 미치지도 않고) 계속 발레 뤼스에 남아 디아길레프와 끝까지 함께 일했다면, 과연 세계 발레사에 얼마만한 유산이 더 축적될 수 있었을까에 대한 상상을 뿌리치기는 힘들다.


참으로 발레사를 통틀어 디아길레프와 니진스키 이상으로 흥미진진한 대상도 없다. 디아길레프의 사설 발레단인 발레 뤼스는 서구에서 러시아 발레의 창세기를 열어주었으며, 이것은 곧 현대 발레의 창세기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디아길레프의 발레 뤼스를 분수령으로 하여 현대 발레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발레 뤼스의 주도 댄서로 '무용의 신'으로 불렸던 니진스키는 디아길레프의 '애인'이기도 했던 것이다. 따라서 디아길레프와 니진스키의 만남은 발레사의 거의 기념비적인 사건이랄 수 있으며, 이 둘의 불화사건은 당대 예술계의 최대 스캔들로 기록될 만한 것이다. 아마도 극장 이면사에서 이보다 더 풍부한 얘깃거리를 제공한 사건도 드물 것이다.


'무용의 신'으로 칭공받은 발레 뤼스의 주도 댄서 - 니진스키

바슬라브 니진스키는 역사상 어떤 무용가와도 공통점이 전혀 없었다. 그의 춤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한결같이 그를 가리켜 '신처럼 춤춘다'고 말했지만, 참으로 그는 마치 새가 노래하듯이 춤을 추었다. 자신의 영혼을 쏟아부을 유일한 통로가 춤이라고 느끼는 사람에게 당연한 단순성과 기쁨을 가지고 그는 춤으로 자신의 존재를 표현했던 것이다.


니진스키의 춤을 거의 전부 목격한 발레 비평가 피터 리븐 공은 "그의 춤을 직접 보지 못한 모든 사람들에게 심중 깊이에서 연민을 금치 못한다"고 쓰고 있다. " 그는 마치 춤추기 위해서 태어난 존재요. 그 외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의 모든 동작은 자연스럽고 가벼우며 유니크했다. 어떤 댄서로 니진스키처럼 손을 사용하거나 머리를 기울이거나 몸을 움직이지는 않았다. 그의 동작은 그와같이 조형적이고 그처럼 놀랄 만큼 단순하며 설득력이 있었다. 도대체 인공적이거나 긴장 따위 하물며 속임수 같은 건 찾아볼 수도 없었다. 마치 그는 자신에게 고유한, 자연스럽고 특수한 동작언어로써 관객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관객들 역시 비록 말로써 번역할 수는 없어도 그가 전달하는 메시지의 의미를 직감적으로 파악하는 것처럼 보였다."

니진스키가 춤추는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들은 누구나 그에겐 이른바 '중력의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음을 증언하고 있다. 그가 공중에 날아오느는 방법은 너무나 불가사의해서 합리적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했다. 테크닉 면에선 니진스키 못지않게 높이 도약하거나 엘르바시옹(날라오름), 앙트르샤(도약해서 공중에 있는 동안 두 다리를 십자형으로 서로 엇갈리게 부딪치는 동작의 되풀이)를 포함한 온갖 복잡한 묘기를 과시하는 댄서들이 많이 있었지만 -또한 현대에 이를수록 테크닉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그러나 어떤 댄서도 니진스키가 창출하는 '예술적 효과'를 관객에게 전달하지는 못했다.  도약하건 떨어져내리건, 그는 전혀 힘들이지 않고 공중으로 넘나들었으며, 그럴 때의 그 가벼움과 아름다움은 도저히 언어로썬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실로 그것은 하나의 신비였다.

대대로 무용가 가문의 후손으로 폴란드 출신의 탁월한 무용가를 양친으로 태어나 러시아 황실무용학교에서 교육받은 니진스키는 열두살 때 이미 신동으로 러시아 전역에 알려졌으며, '세계의 여덟번째 불가사의'란 찬사를 듣기까지 했다. 니진스키의 명성이 상승일로에 있을 무렵 그는 디아길레프를 만나게 되는데, 이것은 그의 삶과 예술에 운명적인 전기가 되었다.  '디아길레프가 아니었다면 니진스키는 니진스키가 될 수도 없었을 것'이라고 극언하는 평자도 있을 만큼 디아길레프와의 관계를 언급하지 않고선 니진스키의 생애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좋은 의미건 나쁜 의미건 그는 니진스키의 삶과 예술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예술적 통합의 천재이며, 발레 뤼스의 창단자 - 디아길레프

세르게이 드 디아길레프는 실로 역사상 유례가 없을 만큼 희유한 천분을 지닌 예술애호가요 감식가로서 유럽 예술의 특수한 시기를 창조한 전설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이미 30대 초반에 러시아의 미술과 음악을 대대적으로 서구에 알린 성공적인 기획으로 그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마에세나스'로 알려졌으며, 그의 명성은 국제적인 것이 되어 있었다. 1906년엔 러시아 회화를, 이듬해엔 러시아의 음악, 그리고 1908년엔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를 파리에서 선보인 후 마침내 발레 뤼스의 파리 데뷔(1909)에서 그의 창조적 과업은 정점에 이르게 되는데, 이후 20년에 걸쳐 그가 세계의 발레와 일반 대중에게 남긴 유산은 진실로 기념비적인 것이다.

지속적인 재정적 뒷받침을 갖지 않은 조직체의 책임자로서 흡사 창조의 악마에 사로잡힌 것 같은 한 사람의 전제군주-그리고 이 사람은 새로운 예술의 지평선을 향한 갈망으로 수많은 경이로운 천재들과 깊이 결속돼있었으나-그가 바로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였다. 니진스키, 스트라빈스키,박스트,드뷔시,포킨느,피카소,콕토,라벨,마신느,브라크, 사티,브노아, 슈트라우스,발란신,마티스,프로코피예프 등등...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이처럼 가장 높은 예술적 재능을 과시하는 눈부신 인재들을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나 러시아 혁명등으로 동요하는 20세기의 휘몰아치는 흥분의 수년간에 걸쳐 끊임없이 서방세계에 공급했으며, 이들 인재들은 사실상 디아길레프의 촉매작용에 의해 불후의 걸작들을 창조했던 것이다.


어떤 의미로 디아길레프에겐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활'이라고 말하는 개인적 삶이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누구에게도 흥미를 일으킬 수 없다. 흥미있는 것은 나의 생애가 아니라 나의 과업"이라고 한 그 자신의 말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의 회상기에 나타난 디아길레프에 관한 다양한 언급이나 그 자신의 행적에 비추어볼 때 그는 대체로 메마른 인간이었으며, '인간적'인 감정을 거의 갖지 않은 냉혹한 인물이란 인상을 받게된다. 그에겐 우리가 일반적으로 '친구'라고 말할 때 뜻하는 그러한 유형의 친구는 한 사람도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에겐 어떤 인간도 하나의 객체, 더 정확히 말해 그의 일에 소용되는 하나의 재료에 불과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당연히 독재적이 될 수밖에 없었고 일을 위해선 동료를 배신하는 것도, 자신의 자존심마저 희생하는 것도 사양치 않았다. 브노아를 비롯해 박스트,포킨느,스트라빈스키 등 수많은 동료들과 자주 싸웠고, 그들로부터 냉혹하게 등을 돌렸다가도 다시 그들이 필요해지면 주저치 않고 달려가 모자를 벗고 공손히 그들과 화해하기를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발레 뤼스의 많은 스타들이 몇번이나 그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곤 한 사건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게다가 그는 자기보다 높은 신분의 귀족에겐 아첨하고 필요이상으로 공손한가 하면, 동요나 낮은 신분의 사람에겐 거만하고 냉혹했을 만큼 때론 구역질나는 속물근성을 발휘했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렇게도 많은 당대의 천재들과 탁월한 예술가들, 부유한 귀족과 남녀 후원자들이 끊임없이 그에게 열중하거나 그를 숭배하는데 그치지 않고 '오직 디아길레프를 위해' 일하기를 주저치 않았다는 사실은 무얼 말해주는가? 결국 그의 인품속에는 사람의 마음을 굴복시키는 무언가 수수께끼와도 같은 마력이 있었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일평생 독신. 소년시절 충격으로 남색가의 성향을 띠게 됨

디아길레프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으며, 여성에게 관심이 없었다. 여성과의 성적 관계에 대해선 오히려 혐오감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젊었을 때의 어떤 경험 때문이었다.  그가 17세 때 그의 부친은 아들에게 젊었을 때 방탕하도록 설득하는 것이 교화를 위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고는 가장 수월하고 가장 위험이 적은 방법으로 그걸 수행할 수 있는 장소를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비록 위험이 적긴 했으나 그는 감염의 희생자가 되었다. 가벼운 감염이었기에 빨리 치유되긴 했으나 이때의 경험은 그의 일생을 통해 여성과의 성행위에 대해 지울 수 없는 혐오감을 갖게 했다. 여성과의 성관계로선 처음이며 유일한, 이 극도로 불행한 체험은 결국 그에게 공포증으로까지 발전되었을 만큼 끔찍한 것이 되고 말았다.


디아길레프가 남색가가 된 것은 순전히 이 끔찍한 체험 때문이었는지 확실히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최초의 경험에서 유래한 공포증은 여성과의 사랑에 일종의 심리적 차단역할을 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결과 그가 같은 동성의 대상에서 열정의 출구를 발견했다 한들 조금도 이상할 게 없다. 그러나 동성애자들이 공공연히 저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는 오늘날과는 달리 디아길레프가 몸담고 있던 당시 러시아에선 남색은 극도로 백안시되었으며, 저명 인사의 경우 동성애적 성향이란 의심만 받아도 사회에서 매장되기 마련이었다. 따라서 당연히 디아길레프는 자신의 성향을 신중히 숨겨야만 했다. 그가 공개적으로 이를 인정한 것은 수년 뒤 그가 러시아와 결별하고 서구에 정착한 이후부터였다. 그러나 그의 친구와 지인들이 모두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해도 서구 이류 신문들이 이를 스캔들로 기사화했을 정도로 화제가 되었던 것이다.

생각건대 디아길레프가 일생을 통해 자신의 참된 항구적 반려를 동성 속에서 찾으려고 한 것은 그의 삶의 비극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이끌린 대상은 언제나 동성애 성향이 아닌 정상적인 남자였기 때문이다. 그의 대상은 예외없이 성숙단계에 있는 가장 남성적인 젊은이였는데, 이들은 남성으로서 충분히 성숙되자마자 맨 처음 매혹당한 여성을 위해 디아길레프를 떠났던 것이다. 그는 유혹자나 엽색가 타입이 아니었다. 버리는 쪽은 항상 그가 아니고 상대방이었다. 따라서 그의 사랑은 끊임없는 행복과 실망의 연속이었으며 - 슬픔과 놀람과 배신감을 보상처럼 남겨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설사 두 사람의 관계가 성적인 관계로 발전했다 해도 디아길레프의 흥미가 성적인 것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아니 오히려 그가 이끌린 것은 그들의 육체가 아니라 그들의 정신, 재능이었다. 아무리 완벽한 육체를 지녔다해도 그가 평범한 보통의 남자라면 결코 디아길레프의 관심을 끌 수 없었다. 사실 그의 사랑을 받았던 대상은 모두가 의심없이 위대한 예술가의 혼을 지닌 창조적 천재들이었다. 아직 완전히 성숙되지 않은, 그래서 그 자신의 이념에 따라 형성하고 지도해 줄 수 있는 그러한 마음에 이끌렸던 것이며, 아직 꽃봉오리인 이들 미성숙의 인격체를 화려하게 만개시키는 데서 그의 사랑은 절정에 달했다 할 수 있다.

비록 대상은 바뀌어도 그의 사랑은 변함없이 이같은 패턴을 되풀이 했다. 그리고 아마도 니진스키와의 만남에서 그는 자신의 이상을 최고의 형태로 실현시킬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재료를 발견했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희유한 만남도 끝내는 파국에 이르고 말았으니, 그것은 사필귀정이었다. 다만 이 경우에는 비록 니진스키가 결혼을 하긴 했어도 결과적으로 가장 사악하고 무자비한 방법으로 상대를 버린 쪽은 오히려 디아길레프 자신이었다는 점이 다르다. 니진스키의 결혼 소식을 듣고 디아길레프가 보인 반응은 은연중 둘의 관계의 본질을 감지할 수 있게 해준다. 그는 복수심에 가득차서 외쳤던 것이다.

"현재 니진스키가 서 있는 자리가 높으면 높을수록

나는 그만큼 저급한 지위로 그를 밀쳐낼거야."

그리고 사실상 니진스키를 최고의 자리에 올라서도록 전심전력을 다한 사람은 바로 디아길레프 자신이었던 것이다.


두 천재의 세기적 만남

디아길레프가 니진스키를 처음 만났을 무렵은 그의 삶에서 절정의 시기였다. 확실히 그는 니진스키가 학생이었을 때부터 그를 알고 있었고 그의 재능을 찬미해 온 터였지만 두 사람이 직접 대면한 것은 1907년, 마린스키에서 니진스키가 '아르미드 관' 초연에서 춤춘 뒤였다.

이 일은 주선한 사람은 부유한 귀족으로 니진스키의 강력한 후원자이자 찬미자였던 류보프 왕자였다. 그 역시 디아길레프와 같은 남색가로 니진스키를 사랑하고 있었지만 그 자신은 니진스키의 예술적 미래를 증진시켜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디아길레프에게로 인도했던 것이다. 디아길레프는 그러나 이 젊은이를 다른 어떤 사람과 공유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만큼 류보프 왕자에게 진정으로 니진스키의 미래를 걱정한다면 앞으로 그를 다시 만나지 말라고 했다. 순수하게 니진스키의 성공과 안녕을 심려한 왕자는 이별의 아픔을 감수하고 자신이 희생하는 길을 택했다. 니진스키와 류보프 공은 이후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디아길레프와의 만남은 니진스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드넓은 새 삶의 지평선이 확 트였던 것이다. 디아길레프는 그의 스승이요 친구며 연인이기도 했다. 세의 니진스키에게 35세인 디아길레프는 예술과 삶의 선도자였다. "나는 진지하게 그를 찬미했다. 그리고 그가 여성에 대한 사랑은 끔찍한 것이라고 말했을 때 나는 그를 믿었다. 그를 믿지 않았던들 나는 감히 그러한 일을 저지르지는 못했을 것이다."라고 그는 후에(1918-19년에 씌어진)일기 속에서 고백하고 있다.  일기엔 또 이런 구절도 있다.

"나는 디아길레프를 좋아하지는 않았으면서도 그와 함께 살았다.우리가 알기 시작한 첫날부터 나는 그를 미워했다. 그의 권세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주 다퉜다. 나는 종종 내 방문을 잠그고-우리들의 방은 터놓고 지냈다-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는 했다. 나는 그를 두려워했다. 나의 모든 생활이 그의 손아귀 속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디아길레프는 만사에 있어 내가 그의 생도라는 걸 믿게 만들려고 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 디아길레프는 나보고 그가 묵고 있는 호텔 유럽에 와달라고 청했다. 나는 그의 지나치게 자기만족에 찬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행운을 찾아 그에게로 갔다. 나는 나의 행운을 발견했다. 당장에 나는 그가 나를 사랑하는 걸 허용했다. 나는 마치 나무 잎사귀처럼 떨었다. 나는 그를 증오했지만 그걸 내색하진 않았다. 그러지 않으면 어머니와 내가 굶어죽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디아길레프를 만난 첫 순간부터 그라는 위인을 파악했다. 그래서 즉시로 그에게 동의하는 척했던 것이다. 어쨌든 우선 살아야 했다. 그러므로 내가 치러야 할 희생이 어떤 형태이든간에 어차피 그건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5년동안 함께 살았다. 애초부터 디아길레프에 대한 니진스키의 감정에는 이율배반적인 데가 있었다. 그러나 부정적인 측면은 처음엔 무의식의 밑바닥에 숨어있었기에 본인도 깨닫지 못했다. 그가 인간과 예술가로 성숙해감에 따라 처음의 기대와 찬탄은 환멸과 불신으로 바뀌어갔을 것이다. 선도자인 디아길레프는 마치 형성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밀가루 반죽같이 유연한 재료인 니진스키를 자신의 이상에 맞게 교육하고 그에게 삶의 지평선을 넓혀주었으며, 세계의 눈부신 각광을 받으면서 최고의 위치에 오르도록 그를 도와주었다. 그러나 이 제자가 인간적으로 성숙하고 스스로 독자적인 예술가의 길을 가려고 했을 때 그걸 용납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제 니진스키를 그의 의도대로 형성괼 수 있는 '재료'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디아길레프는 이 사실을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두 사람의 불화는 바로 여기서 싹텄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1913년 여름, 발레 뤼스의 런던 시즌이 끝날 무렵 파국은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왔다. 니진스키는 1912년(23세)에 [목신의 오후]로써 안무가로도 데뷔했는데, 발레의 완전히 새로운 유형을 제시한 이 작품은 온 파리를 발칵 뒤집어 놓았을 정도의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이듬해엔 오늘날 '20세기 발레의 종자를 심은 발레'로 평가되는 [봄의 제전]을 안무해서 이 역시 대소동을 일으켰지만, 1912년 봄 시즌의 [유희]는 실패했다. 사실 [봄의 제전]과 [목신의 오후] 두 작품만으로도 니진스키는 안무가로서도 절대무류의 감식력을 지닌 천재임을 입증했지만, 발레 뤼스의 단원들을 포함해서 대다수의 예술가와 대중들은 너무나 시대를 앞지른 이들 발레의 진가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따라서 재정적 뒷받침과 극장들의 요구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디아길레프로선 확실한 매표 수익을 보장할 수 없는 니진스키의 발레를 계속 신작으로 내놓을 수는 없었다. 니진스키가 안무가로 데뷔했을 때 발레뤼스 초창기부터 이 발레단의 발레마스터였던 포킨느는 화가나서 발레 뤼스를 떠났는데, 이제 디아길레프는 재정적 후원자를 포함한 주위의 요구에

따라 포킨느를 다시 데려오려고 했다. 그런데 포킨느는 다시 돌아오는 조건으로 니진스키가 안무가로서도 댄서로서도 발레 뤼스에 없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기업의 성공과 발레 뤼스를 위한 재정적 압박에 강요되어 결국 디아길레프는 이 조건을 수락해야만 했다.


딜레마에 빠지게 된 디아길레프는 자기와 니진스키 사이에 화해할 수 없는 이견이 있을 때마다 번번이 중재를 부탁했던 니진스키의 누이로 발레 뤼스 단원인 브로니슬라바(후에 위대한 안무가가 된다)에게 고충을 털어놓았다. 니진스키를 잘 달래어 설득시켜달라고. 그러나 누이에게서 이 사실을 알게 된 니진스키는 걷잡을 수 없게 화를 내며 디아길레프를 맹렬히 비난한다. 그는 점점 더 신경과민 상태가 되었고, 마치 자신의 주변에 그물이 짜여져 바야흐로 자신을 덮어씌우려는 듯한 압박감에 시달렸다.

니진스키의 결혼으로 배신감에 광분한 디아길레프

그해 여름 발레 뤼스와 더불어 남미순회공연을 떠났을 때 니진스키는 바로 이런 상황 속에 있었다. 디아길레프는 이 때 처음으로 자신이 직접 발레단을 인솔하지 않고 발레 뤼스의 재정적 원조자로 포킨느의 대변인인 귄스부르크 남작에게 그 임무를 맡겼다. 따라서 니진스키는 발레 뤼스와 제휴한 이래 처음으로 디아길레프에게서 벗어나 자유로운 상태가 되었다.

사실 디아길레프는 한 1년쯤 니진스키를 발레 뤼스에서 떠나 있게 할 생각까지 했으며, 내심 니진스키의 해고를 합리화할 모종의 스캔들이 일어나기를 은근히 바라기까지 했다. 그러나 결과는 그가 감히 상상도 하지 않았던 '니진스키의 결혼'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천성적으로 종교적 성향이 강했던 니진스키는 남미행의 선상에서 디아길레프와의 사랑이 전적으로 그릇된 것이라 성찰하게 되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시베리아로 가 설교승이 되어버리고 싶은 갈망에 사로잡히지만, 춤을 포기한다는 것은 그에겐 사는 것을 그만두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이같은 진퇴유곡 속에서 그는 아마도 결혼이란 제3의 선택을 했는지도 모른다.

상대는 헝가리의 드 풀츠키 백작과 국민적 여배우인 에밀리아의 딸인 로몰라였는데, 당시 17세였던 그녀는 부다페스트에서 니진스키의 공연을 본 이래 지구 끝까지라도 그를 따라다니겠다고 결심한 터였다.  '뚜쟁이' 귄스부르크 남작의 공작으로 두 사람이 서로 말 한번 건네보기도 전에 니짐스키의 이름으로 귄스부르크가 청혼했고, 다음날 선상 갑판에서 니진스키 자신이 로몰라에게 직접 청혼했다. 그리고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도착하자마자 둘은 결혼했다.  


디아길레프는 니진스키의 하인(자신이 니진스키에게 빌려준)이 보낸 전보에 의해 베니스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자신 한동안 니진스키와 떠나 있을 생각까지 했으면서도 이 소식은 그에게 가히 벼락의 일격과 같았다. 슬픔,분노, 당혹, 배신감, 복수심...그리하여 그는 곧 니진스키에게 '해고' 전보를 쳤고, 이후 니진스키의 앞길을 가로막는 온갖 책략으로 그에게 보복했다. 훗날 니진스키가 정신의 붕괴를 겪은 후 디아길레프는 다시 한 번 그의 삶 속으로 들어오게 되지만 둘의 우정은 다시 되살아나지 않았다. (이덕희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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