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우리는 각본 속에서 헤매고 있는 건지도 몰라. 말해 줘. 너는—여기에 있는 거지?”
내 옆에 의식을 잃고 쓰러진 희연을 쓰다듬으며 나는 낮게 속삭였다. 그녀의 살결에 갖다 댄 손가락을 쓸어 내리자 손끝에서 부드러운 감촉이 전해져 왔다. 그녀는 이곳에 존재했다.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숨을 쉬고 있었고, 호흡을 할 때마다 몸이 부풀었다가 수축했다. 그 선명한 모습이 나를 안심시켰다. 내 맥박이 그녀의 부풀었다 수축하는 몸을 따라 점점 느려졌다.
고개를 들어 시선을 돌리니 내 키만 한 책장이 눈에 들어왔다. 책장 안에는 내가 학창시절에 받았던 권투 대회 상패와 트로피들이 그대로, 먼지가 쌓인 채로 보관되어 있었다. 그 옆에는 ‘2022년 펜타닐 쇼크’의 용의자로 지목된 나의 이름 세 글자와 사진이 실린 신문 지면이 붙어 있었는데, 아마 내가 없을 때 희연이 거기에 옮겨 놓았나 보다.
펜타닐.
화학식 C22H28N2O. 아편계 마약성 진통제로서, 혈관에 주사할 필요 없이 피부에 부착하는 패치 형태로 흡수되는, 치사량이 몇십 마이크로그램 수준으로 낮아 과다투여가 쉬워 몹시 위험한 성분이다. 그 위험성 탓에 이미 오래 전부터 대다수의 국가에서 규제를 하고 있고, 대한민국의 경우 펜타닐을 마약으로 분류해 엄격하게 감시 중이다. 대학교 새내기 시절 희연과 나는 몇 명의 동기들과 함께 사진 촬영 소모임을 만들었다. 예술적인 영감에 목이 말랐던 우리들은 60년대 미국에서 벌어졌던 히피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우리들 중 일부는 소위 ‘디자이너 드러그’라 불리는 변형 약물들에 손을 대기도 했다. 그것은 사실이다.
2022년 펜타닐 쇼크.
세관을 기만하기 위해 편지지로 위장한 형태의 펜타닐 패치 수만 장이 항공우편을 통해 국내로 유입되었다. 그렇게 흘러 들어온 펜타닐은 대학생들 사이에서 무분별하게 유통되었다. 당시까지도 사회에 만연하던 소위 ‘헬조선’ 담론들—나날이 늘어가는 빚, 구직난, 빈부격차 등—은 젊은이들을 지치고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러한 세상에서 대학생들이 현실도피의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 펜타닐이다.
펜타닐이 대중화된 후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전국적으로 최소 수백 명이 사망하거나 의식 불명이 되었다. 사망자 수가 급격히 늘어나자 당국은 펜타닐이 유행 중인 서울의 대학가 주변을 이 잡듯 쓸기 시작했다. 당시에 이미 필로폰 투여로 마약 전과가 있었던 희연은 당국의 주요 감시 대상이었다. 희연이 속해 있던 우리들의 소모임이 언론에 노출되는 건 시간 문제였다. 우리 멤버들은 여러 번에 걸친 검찰 조사에 응해야 했으며, 조사 결과 총 네 명으로 구성된 우리 소모임 멤버들은 저마다 다른 방법으로 마약류 유사 물질을 오용해 왔음이 밝혀졌다. 그렇지만 한국의 마약관리법으로는 우리들을 처벌할 만한 근거가 없었고, 따라서 우리들의 행동은 어디까지나 합법적이었다. 하지만 검찰은 전국에 만연한 펜타닐 쇼크를 하루라도 빨리 종식시키기 위해 소모임의 리더인 나에게 모든 책임을 지웠다.
내가 펜타닐 쇼크에 연루되었음을 입증하는 증거는 아직 없으나 곧 ‘생겨날’ 것이다. 그러니 혹시라도 당신이 이 기록을 듣고 있을 것을 대비해—틀림없이 듣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솔직히 고백하겠다. 우리들의 소모임은 당국이 지목한 ‘2022년 펜타닐 쇼크’와 전혀 관계가 없으며 그 주동자로 낙인 찍힌 나 역시 지금까지 불법적인 행위를 저지른 바가 없다. 하지만 진실은 더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의 삶을 둘러싼 현상들은 어차피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들은 한평생 환상을 현실로 착각한 채 발버둥칠 뿐이라는 것을, 나는 지난 경험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당신이 나를 믿어 줄 거란 기대는 않는다. 당국의 터무니없는 주장에 따르면 나는 펜타닐 밀수로 수많은 대학생의 목숨을 앗아간 학살자다. 그렇지만 당신이 아주 잠깐만이라도 의심의 시선을 거둬 준다면, 그래서 내가 당신에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한낱 환상에 불과하다는 자각을 일깨워줄 수 있다면, 나의 목소리는 곧 사라져 버릴 것임에도 나름의 가치를 가지리라 믿는다.
2013년부터 2016년까지 나는 청소년부 아마추어 권투선수로 활동했다. 170cm에 72kg이었던 나는 미들급 경기를 주로 뛰었다. 동 체급에 비해 작은 키를 갖고 있었지만, 나는 권투를 시작한 지 육 개월 만에 첫 우승을 한 이후 여러 대회를 휩쓸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권투를 계속할 줄 알았다. 훈련을 하던 어느 날 발목을 심하게 다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야 이거 심각한데. 쓸 수가 없겠어. 바닥에 주저앉은 나를 내려다 보며 코치가 나지막이 내뱉었다. 그는 마치 쓸모가 없어진 사냥개를 대하듯 담담하게 말했고 더는 나를 그의 선수로 여기지 않았다.
오른쪽 인대가 늘어나 더는 뛰어다닐 수 없을 거라는 진단을 받았다. 다행히 영구적인 장애는 아니었으나 시합 전 꾸준한 훈련이 필요했던 내게는 치명적인 상황이었다. 의사는 이제 운동을 접고 재활치료에만 전념해야 한다며 나를 설득했다. 결국 부상을 입자마자 체육관을 그만둔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뒤늦게 입시 경쟁에 던져졌다.
학창시절의 대부분을 주먹으로 경쟁해 오던 나의 두 손에는 어느새 연필과 지우개가 쥐어져 있었다. 연필과 지우개로 이뤄지는 학생들의 싸움은 3분 3라운드로 진행되는 권투와는 전혀 달랐다. 링은 무한히 컸고 상대 선수들은 끊임없이 링 위에 올라 왔다. 그것은 시합이 아니었다. 링에 갇힌 우리들의 주먹은 서로를 향해 있지 않았다. 되려 무엇도 맞추지 못하고 허공을 때리는 듯했다.
마음을 다잡고 공부를 시작한 끝에 나는 서울 소재의 한 대학교에 기적적으로 합격했다. 합격통지서를 받을 때만 해도 나는 지금까지 나를 괴롭히던 고통에서 해방될 줄 알았다. 혈투 끝의 휴식은 내게 오랫동안 당연하게 주어져 온 보상이었으니. 하지만 권투가 아닌 경쟁 방식에 권투선수를 위한 휴식은 존재하지 않았다. 합격의 기쁨을 누리는 것도 잠시, 나는 400만원에 달하는 등록금을 벌기 위해서 지방으로 내려가 막노동을 해야 됐다. 그곳에서, 마땅한 이유 없이 나를 깔보는 늙은 막노동꾼들의 훈계와 비아냥을 들으며 나는 그들과 함께 늙어 갔다.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그들의 권위주의는 나의 여린 살갗을 벗겨지게 만들었고,
그들의 염세는 내게서 물기를 앗아가 영혼을 메마르게 했다.
패배자들이 쌓은 무덤에서 돌아온 대가로, 내 통장에는 360만원이란 현실감 없는 숫자가 찍혔다. 눈매가 변한 내 얼굴을 보며 아버지는 내게 “미안하다”고 말씀하셨던 것 같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말에 나는 갑자기 화를 내며 집을 뛰쳐나왔다. 아버지의 얼굴에 곰팡이처럼 번진 좌절을 인정하기 싫었던 나는 그 날 이후로 집에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생선의 뼈는 누군가에게는 가시가 된다. 허나 그것은 처음부터 가시도 뼈도 아니었다. 자유로운 바다 속에서는 뼈로—남들의 접시 위에서는 가시로—그것을 둘러싼 세상에 의해 정의가 변할 뿐이다.
갑자기 어른들의 세상으로 밀려나 버린 내게 남은 것이라고는, 재활 시기를 놓쳐 다섯 걸음 이상 뛰지 못하는 병신이 되어 버린 몸뿐이었다. 세상이 변하자 그동안 나를 지탱해 오던 뼈대는 나를 괴롭히는 가시로 돌변했다. 링 위의 나를 돋보이게 만들곤 했던 또래보다 작은 나의 키는, 더는 나를 권투선수처럼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그 이후로 나는 누구에게도 내가 한때 권투를 했다고 밝히고 다니지 않았다. 너가 권투를 했었다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가? 남들이 비웃을까 봐, 말할 수가 없었다.
돌이켜 보면—땀 흘리는 선수들의 세계에서도, 피 터지는 수험생들의 세계에서도, 현실에 눌러 붙은 따개비들의 세계에서도, 나는 어디에서도 환대받지 못하는 이방인이었다.
2017년 2월. 엄마의 끈질긴 권유로 어쩔 수 없이 참석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도 내가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지방에서 상경한 아이들은 원래부터 서로 알고 지냈다는 듯 그들만의 무리를 이루고 있었고 나처럼 서울에 사는 아이들은 전부 잘난 척하기 좋아하는 깍쟁이들뿐이었다.
발목은 여전히 아팠다.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걸음걸이를 들키지 않으려고 나는 최대한 적게 움직였다. 이동의 반경이 작으니 말할 기회도 자연스레 사라져 갔고, 그럴수록 동기들 사이에서 나의 입지는 점점 더 좁아지다 나중에는 걸음을 먼저 내디딜 수 없을 정도의 크기로 찌그러졌다. 어딜 가도 등 뒤에서 ‘병신’이라고 내뱉는 소리가 메아리 치는 듯했다. 비웃음은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는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병신이 되지 않기 위해 남들의 눈에 띄지 않는 길을 택했다. 어쩌면 그 모습이 나를 더욱 병신처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희연을 처음 만난 날은 아마 3월의 마지막 주였을 거다. 그녀와 나는 1학년이라면 필수로 들어야 하는 어느 교양 수업에서 우연히 같은 조가 되었다. 그녀는 밝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나처럼 운동을 좋아했고 사진 찍는 일에 관심이 많았으며 내가 굳이 연락하지 않아도 먼저 나의 안부를 묻곤 했다. 그녀와의 대화는 죽어 가던 나의 정신에 활기를 불어 넣어 줬다. 그리고 그녀 덕분은 아니었겠지만 그 무렵에 나의 인대는 거의 회복되었다.
“재미있게 살고 싶어. 남들과는 다르게.”
금요일이었다. 희연과 나는 둘 다 공강이었고 딱히 할 일이 없었고 벤치에 앉은 채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재미있는 게 뭔데?”
“사진 찍는 거. 너도 사진 좋아하잖아.”
“좋아하지. 하지만 좋아한다고 해서 잘할 거란 보장은 없어.”
“치—” 내 대답에 기분이 상했는지 그녀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꼭 잘해야만 해? 다른 사람들한테 기껏 잘한다는 소리 하나 들으려고, 걔들이 정해 준 방식대로 살아야 해? 나는 그렇게 살기 싫어. 나는 그렇게 부품처럼 썩기 싫다고.”
부품처럼 썩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나. 망가진 기계가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일개 부품일지언정 멀쩡한 기계의 부속으로 남는 편이 낫다는 걸 알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렇게 사는 거다. 등을 돌리고 내게서 멀어지는 그녀를 붙잡고 싶은 욕구가 끓어올랐다. 당장에라도 그녀를 세워 ‘좋아하는 일에 너무 매달리지 말아라. 사람 일은 모른다. 언젠가 너가 좋아하는 것을 더는 할 수 없는 상황이 온다면, 그 때는 오히려 그것을 다시 언급하기조차 싫어질 것이다. 좋아했던 것이 하나둘씩 변질되어 버리는 순간의 절망은 직접 겪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허나 나는 권투에 묶인 채 가라앉은 나의 옛 기억을 다시 들추고 싶지가 않았다. 아무리 그녀일지라도 말이다. 아니—오히려 그녀였기에, 그녀가 나를 패배자로 볼 것이 두려워, 말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가 강의동 건물 사이로 사라질 때까지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었다.
며칠 후 희연은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불쑥 나를 찾았다.
“사진 동아리를 만들자. 친구들도 불러 왔어.”
“사진기는 있어?”
“이제부터 사면 돼.”
희연은 해외에서 카메라 렌즈 사업을 하고 계시는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우리들을 지원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고 했다. 그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이틀 뒤 그녀는 350만원에 달하는 카메라 세트 다섯 개와 동아리 계획서를 가져와 내 눈앞에 내밀었다.
동아리를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복잡한 절차를 필요로 했다. 희연과 나는 다른 조항들을 최대한 조율하고 타협해 가며 동아리 설립을 계획했지만, 동아리를 구성하는 최소 인원 10명을 모아야 한다는 대목에 이르자 누가 먼저라 할 거 없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의 신념은 일치했다.
“열 명은 너무 많아. 산만해. 분명히 언젠가는 흐지부지 될 거야. 네 명이 적당해.”
그래서 우리는 동아리 대신 소모임을 만들었다. 학생회관 소속으로 등록되어 감찰을 받는 동아리와는 달리, 소모임을 만드는 일은 어렵지 않았고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웠다. 소모임 홍보는 희연과 내가 각자 믿을 수 있는 이들에게만 신중히 이뤄졌다. 350만원짜리 카메라 다섯 대는 일개 대학교 소모임이 보유한 장비치고는 아주 매력적인 것이었다. 이십 명 남짓의 희망자들을 추리고 추린 끝에 우리는 네 명의 정원을 채웠다.
최영호. 나의 고등학교 동창이자 초등학생 시절부터 기원을 다니던 애다. 그는 바둑 말고도 보드게임이라면 뭐든 좋아했는데 덕분에 그의 자취방에는 항상 놀 거리가 많았다.
정민철. 소위 말하는 금수저 도련님이다. 그의 아버지가 친가 쪽의 재력을 기반으로 재선된 국회의원이라는 얘기를 했을 때 나와 영호는 조금 놀랐지만, 평소에도 남들을 깔보는 투로 잘난 척을 많이 하는 그의 성격으로 미루어보아 그쯤은 예상하고 있었다.
김희연. 내가 대학교에서 처음 사귄 친구이자, 민철과 마찬가지로 잘 사는 집안의 외동딸이다. 활발하고 붙임성 좋은 성격인 그녀 주변에는 친구가 늘 많았다. 그녀 역시 필요에 따라 본인의 매력을 활용할 줄 알았지만 그녀에게는 악의가 없었다. 친구들을 통해 핸드폰을 싸게 산다든가 과제물을 쉽게 완성한다든가 하는 사소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나. 아직 아무에게도 밝힌 적이 없었지만 전직 청소년부 권투선수였고. 남들보다 잘하는 것이라고는 주먹질밖에 없는, 그저 그런 집안에서 태어난 그저 그런 놈이다.
소모임 활동은 매주 월요일에 영호의 자취방에서 만나 공동 주제를 정한 다음, 같은 주 금요일에 영호의 자취방에 무단 침입해 각자 찍은 사진을 공유하며 의견을 나누는 식으로 이뤄졌다. 멤버들이 다녀갈 때면 그의 자취방은 여기저기에 쏟아진 보드게임 조각들로 엉망진창이 되곤 했으나, 나의 불쌍한 친구 영호는 바닥에 널브러진 보드게임 조각들을 줍느라 불평할 시간조차 없었다.
하지만 매번 변화 없이 반복될 뿐인 소모임 활동은 우리 모두를 질리게 만들었다. ‘남들과 다르게 살고 싶어’ 만든 소모임 활동이야말로 남들과 다를 게 없었다. 우리들의 작품은 재능 없는 아마추어 사진작가들이나 내놓을 법한 비루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성과 없는 모임이 계속되자 다들 슬슬 지겨워하는 기색이 역력했고, 창립 멤버인 나와 희연은 모임 약속을 어기고 단둘이 따로 놀기도 했다. 해이해져 가는 소모임의 기강을 바로잡으려 노력한 사람은 민철이었다. 어느 날 그는 소모임 멤버 모두를 모아 놓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얘들아. 우리에겐 변화가 필요해.”
그걸 누가 모르나. 그의 말에 다들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알아. 근데 어떻게 할 건데?”
민철은 아까보다 더 진지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대마초를 밀수하자. 예술가들도 대마초를 피우며 영감을 얻는다 하잖아. 미국 래퍼 위즈 칼리파는 아예 대놓고 대마초를 피우는데, 심지어 그의 이름을 딴 대마초 브랜드도 있을 정도야.”
대마초라니. 한국에서? 터무니 없을 정도로 비현실적인 이야기였지만 그의 태도가 워낙 진지했기에 우리들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꽤 오랜 정적이 흘렀음에도 아무도 나서지 않자 그가 말을 이었다.
“사실 내가 미국에서 유학을 할 때 대마초를 몇 번 피워 본 적이 있거든.”
그는 세간에 잘못 알려진 대마초의 유해성과, 꾸준한 연구 끝에 대마초의 의료적 효과가 있음이 밝혀지고 있다는 따위의 이야기를 역설하며, 한동안 연설을 멈추지 않았다. “—아무튼 그래서 대마초를 피우며 시간을 보내는 거야.”
“하지만 대마는 불법이잖아.”
희연이 먼저 입을 떼자 내가 덧붙였다. “게다가 밀수는 사실상 불가능해. 세관이 바보냐? 엑스레이 통관 단계에서 모조리 걸리고 말 거야. 지금까지 비행기 많이 타 봤으니 너도 잘 알 거 아니야?”
“역시…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겠지…?”
우리가 부정적인 반응으로 일관하자 민철이 그제서야 한 걸음 물러섰다. “농담이야 농담. 하하, 얼굴 좀 풀어 얘들아.”
이후에도 대마초는 없었지만 그날 그가 했던 말은 쉽사리 잊히지 않았다. 누군가가 엎지른 철가루를 자석으로 쓸어 담는 것처럼, 기억에서 지우려 들수록 오히려 의식 어딘가에 끈끈하게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말마따나 우리에게는 변화가 필요했다. 그날부터 나는 밤낮으로 인터넷 검색을 한 끝에 한 가지 대안을 생각해 냈다. 대안이 떠오르자마자 나는 소모임장의 권한으로 멤버들을 긴급 소집했다. 멤버들은 ‘결국 고심 끝에 소모임 해체를 결정했나 보다’ 같은 단정을 짓고 왔는지 다들 뭔가 숙연한 표정이었다. 그런 멤버들을 놀릴 겸 나는 한참이나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정답은 육두구야.”
민철이 대마초 얘기를 처음 꺼냈을 때 다른 애들이 지었던 멍한 표정으로, 그가 나를 보며 되물었다.
“뭔 개소리야? 향신료 육두구 말하는 거야?”
“육두구가 향신료가 아니면 뭐겠냐? 유두겠냐?”
뜬금없이 튀어나온 영호의 농담에 나는 큭, 하고 웃었다. 하지만 희연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는 헛기침과 함께 설명을 했다.
“맞아. 향신료로 쓰이는 육두구에는 과량 복용 시 환각을 일으키는 성분이 있다고 해. 잘은 모르겠지만—너희들, 카페인이나 아편 같은 물질들의 작용이 사실은 식물들의 알칼로이드 때문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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