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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박 아니면 쪽박" 연예인들이 선택한 재테크 방법
CCBBLAB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8.12.27
조회 2015 추천 2 댓글 6
요즘 재테크는 누구에게나 필수처럼 자리 잡았습니다. 재테크는 이미 다양한 형태가 있고, 'O테크'라는 형태로 신종 재테크도 계속 나오고 있는데요. 모든 걸 다 시도해볼 수 없는 만큼 남의 재테크 방식을 참고해보는 것도 좋겠죠. 재테크 잘해서 대박 난 사람의 경우는 따라 해보고, 실패한 경우는 되새겨서 그런 실수를 하지 않도록 말입니다. 그중에서도 연예인들의 재테크 스토리는 방송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는데요. 우리가 방송에서 봐서 친숙한, 연예인들이 하는 재테크는 어떤 걸까요?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인기 연예인의 경우 큰돈을 버는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죠. 소위 신흥 재벌이라고 불릴 정도로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버는 그들도 재테크에 관심 많은 편이라고 합니다. 비교적 한 번에 큰돈을 벌지만 일반 직장인처럼 안정적인 수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산을 더 불리기 위해서입니다.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에서 박신혜가 잔고 확인할 때 느꼈던 행복을 누구나 느껴보고 싶을 테니까요.대박 재테크1. 알뜰살뜰 저축 위주, 안정 투자형재테크의 시작은 저축이라고 하죠. 동시에 안정적이고 위험 부담이 적어 누구나 시작하기 좋은 재테크 형태인데요. 금융상품 위주로 저축하고 투자하며 돈을 모아온 연예인들은 누가 있을까요?현영 인스타그램우선, 방송인 현영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현영은 고3 때부터 적금을 들기 시작했다고 하는데요. 어렸을 때부터 갖춰진 저축 습관이 현영 재테크의 기반이었습니다. 현영은 예금과 적금을 모두 활용하며 목돈을 모았다고 하죠. 그녀는 '통장 쪼개기'를 실천해온 연예인입니다. 실제로 현영의 통장이 2014년 기준 약 20개 정도였다고 알려져 있을 만큼 말이죠. 그녀는 통장을 분리해 돈을 모으며 혹시의 상황 역시 대비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복리를 활용하는 예금을 이용해 돈을 불리면서 급할 경우 해지할 자금으로는 적금을 택했다는 것이죠. 또, 현영은 제1금융권 대신 수익률이 더 좋은 저축은행 등을 적극 활용했습니다. 상대적으로 도산 위험이 크긴 하지만 더 빠르게 목돈 마련이 가능했기 때문이죠. 비과세 상품 역시 알뜰하게 활용했다고 합니다. 수익이 큰 만큼 세금 부담 역시 컸기 때문에 비과세 상품을 통해 절세 효과를 누리려고 한 것이죠. 글로벌 문화 뉴스, 파이낸셜 뉴스이외에도 저축을 추구하는 연예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승기 역시 저축을 추구하는 연예인 중 한 명인데요. 은행원이셨던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금융상품에 관심이 많다고 합니다. 연금, 펀드, 보험 등 분야별 통장을 10개 이상 소유하고 있다고 하죠. 2011년에는 저축의 날 표창을 받기도 했습니다.아는 와이프이처럼 안정적인 금융상품 위주의 투자를 할 경우, 적은 리스크로 돈을 모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단기에 파격적인 수익을 보는 것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안정적으로 목돈을 모으기 위한 재테크로는 제격입니다. 해당 은행이나 증권사가 망하지 않는 이상 원금은 보장되고, 5000만원까지는 대부분의 상품을 예금보험공사에서 보장해주기 때문이죠.2. 제2의 직업, 사업가형나혼자산다사업 역시 안정적이지 않은 수입의 연예인들에겐 재테크 방식으로 일컬어지곤 하는데요. 사업가하면 떠오르는 연예인 중 한 명이 바로 승리입니다. 승리는 빅뱅의 멤버뿐 아니라 사업가로도 꽤 유명하죠. 방송에서 연 매출 250억 원임을 밝혀 ‘위대한 승츠비’라 불리기도 했습니다.승리는 방송 <나 혼자 산다>와 <미운 우리 새끼> 등의 방송에서 사업 관련 이야기를 하기도 했는데요. 그 역시 이전 사업에서 실패한 적이 많다고 합니다. 그만큼 사업은 많이 벌 수 있는 계기가 되면서도 위험 부담이 큰 편입니다. 승리의 경우 그 실패들을 거름 삼아 신중을 기해 사업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춘설이' 블로그 / 나혼자산다<나 혼자 산다>에 출연한 승리는 빅뱅 인기가 아니라 ‘맛’으로 승부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요식업 CEO 다운 마음가짐을 보였습니다. 또, "제가 요리를 아는 건 아니지만, 맛있는 건 기가 막히게 안다. 사람들이 뭘 먹고 싶은지는 아는 거다"라고 말하기도 했죠. 방송 <미운 우리 새끼>에서 승리는 이상민과 함께 일본 라멘 시장 조사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요. 이렇게 꼼꼼하게 물어보고 확인하는 과정이 승리가 사업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나혼자산다승리 외에도 요식업으로 사업을 하는 연예인은 많습니다. 방송인 홍석천도 성공한 요식업 CEO로 꼽히곤 하는데요. 홍석천의 레스토랑은 이태원의 상징처럼 자리 잡기도 했죠. 무려 10개까지 운영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현재는 4~5곳 정도만 추려 운영 중이며 여전히 좋은 반응을 얻고 있죠.사업은 규모마다 업종마다 차이가 큰 편입니다. 그리고 인기를 얻는 연예인이 한정적이듯 사업으로 성공하는 사람도 일부라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또 정책과 시기별 사회 이슈에도 영향을 받아 순간에 극과 극을 달릴 수도 있습니다. 동업자가 있는 경우 내부 분쟁이 생길 수도 있죠. 이렇게 큰 리스크를 갖고 있지만 성공할 경우 자산의 규모를 획기적으로 불릴 수 있고 자신이 일궈냈다는 보람 역시 느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3. 조물주 위에 건물주, 부동산 투자형명단공개연예인들의 건물 매입에 관한 기사는 쉽게 찾아볼 수 있죠. 그만큼 많은 연예인들이 택한 재테크 방식이 바로 ‘부동산 투자’인데요. 개그맨 박명수, 배우 전지현, 이정재, 아이돌 출신 한승연, 다솜 등 많은 연예인이 부동산을 통해 재테크 수익을 얻고 있습니다.명단공개그중 지난해 결혼한 송중기-송혜교 부부도 부동산으로 재테크하는 연예인인데요. 결혼 전부터도 재테크로 유명했던 둘인 만큼 결혼하면서 더 규모가 커지기도 했습니다. tvN의 <명단 공개>에 따르면, 약 370억 원의 부동산 부자라고 하죠.명단공개배우 송혜교는 자타공인 부동산 부자인데요. 각종 보도를 보면 국내만 해도 서울 삼성동에 3채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 부동산들의 가치만 해도 230억이 훌쩍 넘는다고 합니다. 그뿐 아니라 송혜교는 해외 부동산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하는데요. 뉴욕 맨해튼에 있는 고급 콘도로 '회장님 콘도'라고 불렸던 곳이라고 합니다. 100% 현금으로 구입했으며 약 30만 달러의 시세차익을 남기고 매각했다고 하죠.명단공개배우 송중기는 결혼 전 25억 대 빌라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었는데요. 구입은 25억 대에 했지만 시세는 30억이라 실제로는 5억 정도의 시세차익을 봤다고 합니다. 또, 송중기는 이태원에 신혼집 목적으로 180평 대저택을 매입했다고 알려졌죠. 이곳은 남산이 근접해있어 이태원 최고의 부촌으로 알려진 곳이라고 하는데요. tvN <명단 공개>에서 한 전문가가 송중기가 약 100억 원에 매입한 이 집은 1년 새 110~120억 원의 시세가 될 것으로 추정된다고 언급하기도 했습니다.뉴스에서 부동산은 끊임없이 나오고 있는 단골 주제죠. 특히 '서울 집'에 대한 관심도가 높은 만큼 서울 부동산들에 관심 있는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동산 투자는 사실 어느 정도 이상의 목돈이 없으면 섣불리 시작하기 힘듭니다. 인기 연예인들은 현금 100% 혹은 대출을 끼더라도 준비된 목돈이 있는 편이지만 일반인이 그러긴 어려우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동산 투자는 거주 목적 외에도 전세, 월세를 내주거나 쉐어하우스 사업 등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고 부가 수입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재테크 방법으로 꾸준히 각광받고 있습니다.쪽박 재테크라디오스타하지만, 연예인 재테크라고 무조건 성공적인 건 아닙니다. 큰돈을 버는 연예인이라면 주위에 전문가가 붙어서 100% 성공할 것 같지만 재테크에 실패한 연예인들도 많습니다. 오히려 많은 인기로 번 큰돈을 한순간에 날리기도 했죠.1. 원금의 반 이상을 손해 본, 보험 투자연금저축만큼이나 펀드, 보험 등도 많이 보이는 투자 방식인데요. 보험 투자로 재테크에 실패했던 연예인도 있습니다. 한때 재테크 잘하는 연예인으로 꼽혔던 가수 이효리입니다. 그녀는 방송에서 “재테크를 시작하면서 한 달에 4000만 원씩 보험금을 부었어요. 그때는 평생 그렇게 잘 벌 줄 알았는데 쉬는 동안 음반 활동도 안 하고 광고도 안 하니 낼 돈이 없더라고요. 1∼2년 내다가 중간에 해지하는 바람에 원금의 반 이상을 손해 봤어요.”라고 밝히기도 했는데요.라디오스타보험은 대부분 꾸준한 납입과 장기간을 전제로 합니다. 그러다 보니 중간에 해지할 경우 리스크가 크죠. 특히 이효리는 안정적인 고정수입이 있는 일반 직장인과는 다르기 때문에 해지에 대한 것도 대비를 했어야 하는데요. 그걸 대비하지 못했고, 중간 해지하게 되면서 큰 손해를 보게 된 것이죠.이효리가 고백한 이 사연은 '수익률도 중요하지만 리스크도 충분히 고려해야 하며  만약의 상황과 해지 시 등 미래를 좀 더 설계하면서 투자하는 것이 좋다'라는 것을 보여준 사례가 되기도 했습니다.2. 달콤한 수익의 중독성, 주식투자스타특강쇼주식은 정말 양날의 검으로 불리곤 하죠. 주식을 통해 어마어마한 수익을 올린 사람들도 많이 보이는 반면 단기에 높은 수익을 낼 수 있다는 점에 혹해서 투자했다가 돈을 날린 사람들도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서울대 개그맨으로 유명했던 서경석도 주식 투자에 실패하며 억대의 자산을 잃었다고 합니다. 스타특강쇼서경석은 이윤석과 스키장으로 가던 중 차를 얻어타게 되면서 알게 된 증권 회사 직원들 때문에 주식 투자를 시작했다고 하는데요. 처음에는 돈을 맡겨 6개월 만에 2억 5천만 원의 수익을 얻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수익으로 마포에 집도 샀다고 하는데요. 그러한 달콤한 수익 덕에 당시엔 그 사람들이 주식의 신이라고 믿었다고 합니다.스타특강쇼하지만 날이 갈수록 욕심이 생겼던 서경석은 직접 주식 투자에 뛰어들게 됐다고 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주식이 수익을 가져다주는 건 아니죠. 서경석은 주식으로 손해를 입게 되었고 이후 경제 전문가들에게 조언을 구했으나 당시 자신은 전문가들조차도 믿지 못해 집을 구입한 금액보다 큰돈을 날렸다고 밝혔습니다. 또, 서경석은 이 사연을 공개하며 “20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이 나처럼 자신의 머리만 믿고 실패를 반복하지 않길 진심으로 바란다"라고 덧붙이기도 했습니다.주식은 '초심자의 행운'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어 오히려 처음 투자하는 사람이 수익을 얻기 좋은데요. 이때 얻은 달콤한 수익이 주식 투자의 늪으로 빠져들게 한다고 하죠. 주식 투자가 시중 금리보다 좋은 수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 것도 맞지만 누군가가 얻으면 누군가는 잃는 구조라는 걸 잊어서는 안됩니다. 3. 사업으로 대박을 노렸지만, 사업 실패빚의 아이콘으로 불렸던 이상민도 사업으로 인해 재테크 실패했던 연예인인데요. 그는 초반에는 유명 그룹을 다수 배출한 성공한 제작자였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모든 사업이 순탄할 거라고 생각했다고 하죠. 하지만, 그의 사업 길은 파란만장했습니다. 호박씨이상민은 이종격투기+레스토랑인 사업에 뛰어들었는데요. 당시 2개월 동안 손님 3,000명 오게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동업자의 가게에 보수와 리모델링에 7억 원을 더 투자했다고 하죠. 그 가게는 '김미 파이브'로 새 단장해서 오픈했고 초반에 대박이 났습니다. 그러나 이후 동업자와의 의견 충돌이 있어 2호점을 개점해 그만의 스타일로 새로 시작하고자 했죠. 그런데 당시 사회적인 논란들이 많이 생겨나면서 그 꿈은 접어야 했습니다.이상민은 이외에도 문어발식 사업을 했다고 합니다. 엔터테인먼트 회사, 홈쇼핑, 패션, 온라인 쇼핑몰, 레스토랑, 아카데미 등 다양한 사업에 뛰어든 것인데요. 결국 실패하면서 기존에 있던 빚까지 더해 약 69억의 빚이 생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상민은 이 빚을 갚기 위해 긴 시간을 고생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죠.이상민은 방송 <미운 우리 새끼>에서 "일단 내 전문분야가 아닌데 건설 사업에 투자를 많이 했다. 거기서 1원도 회수 못 하고 투자액이 전액 빚이 됐다."라고 밝히기도 했는데요. 약 48억의 자산이 있었다던 이상민이 자산 이상의 큰 빚을 지게 된 모습은 사업으로 성공한 사람도 많지만 실패할 경우 리스크가 크다는 걸 간접적으로 느끼게 해주었죠.연예인들은 각기 다른 재테크 방식으로 자산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예, 적금, 주식, 펀드, 사업까지 다양한데요. 재테크 방식이 날이 갈수록 다양해지는 만큼 특정 재테크가 옳고 그르다고 판단하긴 어렵습니다. 위의 사례들만 보더라도 같은 재테크 방식에서 성공한 사람도 있고 실패한 사람도 있죠. 100%를 보장하는 재테크는 사실 없습니다. 모든 수익에는 위험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정도의 차이일 뿐이죠.그리고 사실 연예인 재테크 방식을 안다고 해서 그들이 수익을 얻은 재테크라고 해서 선뜻 일반인이 도전하긴 쉽지 않습니다. 인기 연예인들과 상황이 같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죠. 다만, 그들이 직접 언급하거나 보도되는 자료에서 밝혀진 정보들을 보면서 우리의 투자 방향이나 앞으로의 돈 관리에 참고를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글 CCBB 에디터 피클시시비비랩
청와대 국민청원에 올라 온 중국집 랩포장, 정말 위험할까?
CCBBLAB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8.12.27
조회 4068 추천 18 댓글 31
출처: 티스토리 heyum12과거 "짜장면 시키신분!"을 외치는 철가방을 든 배달원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그만큼 중식은 초기부터 배달이 주를 이루었던 요식업인데요. 지금까지도 저렴한 가격과 배달이라는 편의성으로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음식입니다. 그런데 최근 청와대에 중국집에서 사용하는 랩 사용을 금지시켜달라는 국민 청원이 들어왔습니다. 중국집 뿐만 아니라 많은 배달업체에서 랩을 사용하고 있는데요. 정말 랩이 문제가 되는 일인 것일까요?1. 백종원은 알고 있었다중국집 포장에 대한 키워드로 비닐랩이 덮고 있는 그릇들이 대부분인데요. 보통 랩이 뜨거운 액체 닿으면 찢어지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중국집포장은 2~3겹씩 이중 포장을 해서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달이 오면 자신만의 랩 벗기는 기술을 선보이는 재미가 있죠. 그런데 백종원 홍콩반점의 포장법에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출처: 티스토리 shinlucky물론 홍콩반점 외에도 랩 대신 다른 재질의 덮개를 사용하거나, 용기자체를 일회용을 쓰는 곳이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백종원의 홍콩반점이 그 예로 들 수 있는데요. 그는 방송에서 환경호르몬에 대해서 자주 언급을 하며 잘못된 조리도구를 지적하는 모습이 많이 보였었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백종원은 랩의 유해성을 알고 있어서 이런 용기를 선택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2. 랩의 유해성 사실일까출처: 드라마 최강 배달꾼랩은 외식업체 뿐만아니라 가정에서도 필수 주방 용품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쓰임이 많을 뿐더러 주방일손을 덜어주는 녀석이죠. 우선 랩의 유해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재질을 알아봐야합니다. 일반적인 랩은 PVC(폴리염화비닐) 재질입니다. 통기성이 있어 야채류의 신선도 유지에 좋은 편이죠. 하지만 열에 약한 성질로 뜨거운 음식에 사용을 할시 환경호르몬이 검출될 가능성이 높습니다.사실 2005년 부터 냉동식품을 제외한 모든 식품에 PVC(폴리염화비닐)랩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규제하고 있습니다. 그때 대체용으로 나와 가정용으로 보급되었던 것이 PRF(고형연료)로 만든 PE(폴리에틸렌)재질의 랩입니다. 그런데 PVC(폴리염화비닐)랩에 비해 가격도 높고 신축성과 접착력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는데요. 그래서 대부분의 대형 매장에서 PE(폴리에틸렌) 대신 여전히 PVC(폴리염화비닐)를 사용하고 있는 이유인 것이죠.출처: 티스토리 wpswps20(좌)PVC는 신용카드, 힙상가죽, 파이브 등 다양한 소재로 이용되고 있는데요. 유연한 재질이라 다른 플라스틱에 비해 제품을 만들기도 쉽고 저렴합니다. 하지만 편리함의 이면에는 무서운 사실이 숨어있습니다. 바로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첨가되는 프랄레이트 같은 화학물이 생식 계통에 영향을 줘 기형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환경부가 이러한 이유들로 사용금지를 시켰지만 제대로 된 규제나, 단속을 한 사례도 거의 없기 때문에 아직도 사용이 되어 왔었고, 그렇기 때문에 올해 7월에 국민청원도 있었던 것이죠.3. 랩 사용시 주의할 것음식 포장재로 사용되는 랩, 국민의 건강이 걸려 있는 것이기 때문에 국가의 규제만큼이나 올바른 사용법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하는데요. 랩을 구매할 때는 PE(폴리에틸렌) 성분인지 PVC(염화비닐수지)성분인지를 확인을 하여 가능한 PE제품을 구매하시는 것이 추후에 발행할 피해를 막을 수 있습니다.PE재질이라도 100도의 뜨거운 음식에는 사용해서는 안되며 전자렌지 사용시에는 더욱 위험합니다. 특히 기름기가 있는 음식의 경우 랩이 녹아 유해성분이 흘러들어올 수 있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전자렌지 이용시에는 전용 덮개를 사용하셔야 가장 안전합니다.글 CCBB 에디터 스마트인컴시시비비랩
치과의사들이 진료하기 제일 곤란하다고 손꼽은 환자 유형
CCBBLAB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8.12.27
조회 9981 추천 12 댓글 32
충치 치료할 때 이가 갈리는 소리 아직도 귀에 생생한데요. 윙윙~ 하는 그 기계 소리와 함께 입안에서 느껴지는 고통은 공포 영화만큼이나 소름이 돋았습니다. "아프면 말하세요"라고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시지만 온몸에 전율을 주는 고통에 혼이 나가버립니다. 게다가 말해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죠. 악몽 같은 치과에 대한 기억으로 성인이 되어서도 치과를 가는 일이 쉽지가 않은데요. 그런데 치과의사들도 환자를 무서워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사랑니 발치를 위해 찾은 환자들 중에 있다고 하는데 어떤 이유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1. 치과의사를 곤란하게 만드는 사랑니인터넷 게시글에 올라온 치아 엑스레이 사진입니다. 나라를 팔아먹은 것 아니냐는 댓글이 달렸을 정도로 일반이 보았을 때도 심각한 상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보통은 양쪽 사랑니가 한 개씩 누워있는 경우도 최악이라고 하는데 저렇게 두 개씩 누워 있는 경우는 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네요. 게다가 신경과 가까이 붙어 있다는 것도 큰 공포네요. 윗니의 상황도 만만치 않아 보입니다. 아마 최악의 상황엔 8개 정도는 발치를 해서 임플란트를 해야 할 것 같은데요. 환자의 고통도 꽤 심할 것 같지만 일반 치과에서는 이 상태의 환자라면 대학병원을 추천하는 게 현명한 방법이 맞는 것 같습니다.2. 진료 전부터 사랑니 발치 거부한 환자가 무작위로 치과 15곳을 골라 사랑니 발치 문의를 했더니 13곳에서 거부 의사를 표했다고 합니다. 진료도 해보지 않고 거부를 하는 것에 치과의사들에 대한 비난이 있기도 했는데요. 하지만 이해가 되는 부분이 정상적인 방법으로 발치를 한 경우라도 사랑니의 해부학적 위치와 구조적 문제로 감각이상이 생기는 문제가 빈번하다고 합니다. 실제로 2000여명의 치과의사를 대상으로 한 설문 결과 44%는 사랑니 발치 후 환자로부터 감각이상을 호소 받은 경험이 있다고 하는데요. 그만큼 사랑니 발치가 어렵고 위험 부담이 많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열심히 해줘도 욕먹는 수술이고 말한다고 하네요. 또한 아무리 사랑니 발치 경험이 많더라도 사랑니의 경우 늘 케이스가 다르기 때문에 제일 힘든 수술이라고 하는데요.  그래서 보다 안전한 수술을 위해 타 병원을 권유하는 것도 그 이유라고 합니다.3. 사랑니 발치, 만만치 않다대체적으로 사랑니 발치가 힘든 케이스가 많다고 하죠. 그 이유가 신경관이 밀집되어 있는 곳에 사랑니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랑니 발치를 하다 신경을 건드렸을 때 응급조치 등 대책이 어렵고, 감각이상이나 신경 손상 등의 합병증이 생길 경우 의사로서도 책임감을 느끼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대학병원 기준으로 치과 사망사례의 1, 2위가 구강 암과 사랑님 발치로 인한 합병증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위험 수술로 미국의 경우는 치과의사가 매복치를 발치할 수 없고 구강외과 전문의가 발치를 담당한다고 합니다.  4. 사랑니 발치를 대학병원까지 가야 할까?그래서 사랑니 발치로만 전문성을 부각시켜서 영업을 하는 치과도 볼 수 있습니다. 가끔 '다른 치과에서 거절당한 사랑니 치료기'이런 제목의 글을 보았을 텐데요. 아무래도 사랑니 발치에 대한 경험이 많을수록 좀 더 안전한 발치가 가능할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5. 사랑니 발치 얼마나 들까?미국의 경우는 위험 부담에 대한 인식이 큰 만큼 발치 비용이 50-100만원 선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가장 어려운 경우의 사랑니라고 10만원을 넘지 않는다고 합니다. 어려운 수술임에도 수가가 낮은데 문제가 발생하면 수천만 원의 배상금 문제로 골머리를 썩게 되니 치과의사들이 피하고 싶은게 당연하지 않을까 싶습니다.글 CCBB 에디터 스마트인컴시시비비랩
시급 2만4천원 오페라 조연→삼성·현대그룹이 찾는 팝페라 퀸으로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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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역 배우에서 4년 만에 프리마돈나미국서 팝페라 가수 데뷔했지만, 빛 못 보고 한국행4옥타브 음역대 소화하는 실력파 가수…기부천사로미국서 오페라 공연으로 시간당 2만4000원 받던 조연 배우가 이제는 억대 수입을 올리는 팝페라 퀸이 됐다. 이사벨은 데뷔 10년 차 팝페라 가수다. 그의 이름 뒤에는 ‘팝페라 퀸·팝페라 디바’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닌다. 지난해 5월에는 '2016 아시아 모델 어워즈'에서 ‘아시아 특별상 크로스오버 부문’ 상을 받아 실력을 인정받았다. 말하자면 국내 최정상급 여자 팝페라 가수다. 그런 그가 ‘여자 임형주’라는 말에는 손사래쳤다. 임형주씨는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팝페라 가수다. 2003년 17세 나이에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에서 애국가를 불렀다. 로마 시립 예술대학 석좌교수로 있다가 최근 군에 입대했다. “제가 그렇게 유명했으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알아보고 사인을 부탁하거나 사진을 찍자고 했을 겁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오페라단의 프리마돈나 출신 여가수는 "쑥스럽다"고 말했다.CCBB◇"한국선 성악가 꿈이어도 밤 10시까지 야자 기본"-팝페라는 어떤 음악입니까“팝(Pop)과 오페라를 아우르는 장르입니다. 조금 대중적인 오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중가요보다는 오페라에 가까워요. 그래서 팝페라 가수는 성악을 전공한 사람이 많습니다.”-언제부터 가수가 되고 싶었습니까“노래는 7살 때부터 했습니다. KBS, MBC 어린이 합창단에서 노래하면서 조수미 선생님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때 KBS에서 했던 ‘누가누가 잘하나’라는 어린이 노래 대회에 나가서 3등을 했어요. 심사위원이 제 목소리가 좋다고 어머니께 말해 그때부터 성악을 시작했습니다.”중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대학교수였던 아버지가 교환교수로 미국에 있을 때였다. 방학 동안 몇 번의 음악 레슨을 받고 미국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 교습 방법은 한국과 다른가요“미국 선생님은 학생 중심으로 레슨을 해주셨어요. 일어서거나 앉아서, 때로는 눕거나 엎드려서 발성을 하도록 시키고 제가 가장 편안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부터 가르쳐 줬습니다. 반면 한국에서는 우선 고음을 내는 방법부터 알려줬습니다. 그러면 목이 금방 상합니다. 또 한국에서는 밤 10시까지 국영수 자율학습해야 했습니다. 저는 음악이 하고 싶은데 말이죠.  외우고 답하는 암기식 교육은 음악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습니다.”-언제 무대에 처음 섰습니까“1998년쯤 대학을 졸업하고 보스턴 리릭 오페라에 들어갔습니다. 그게 제 첫 번째 오페라단 활동이었습니다.”그는 미국 뉴잉글랜드 음악대학, 보스턴 음악 대학원을 졸업했다. 오페라 가수 활동은 대학원에 다니며 시작한 것이다. 시간당 20달러(약 2만 4000원) 정도의 리허설 페이를 받고 단역을 맡았다.이사벨 제공◇2만4000원 단역 배우에서 4년 만에 프리마돈나대학원 졸업 후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이사벨을 가르쳤던 교수가 샌프란시스코 오페라단  메롤라 영 아티스트 프로그램 디렉터로 옮기면서 함께 가자고 제안했다. 샌프란시스코 오페라는 미국 3대 오페라단 중 하나로 꼽힌다. 메롤라 프로그램은 젊은 예술인을 선발해 오페라 가수로 키우는 과정이다. 가수로서 인생이 활짝 필 것 같았다. 총괄 디렉터의 제안을 받았으니 주연을 맡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한 대로 일이 풀리지 않았다. “교수님이 오디션에서 저를 세 번이나 떨어뜨리셨어요. 가수로 성장할 가능성은 있었지만 아직 무대에 설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단역배우 역할을 계속 할 수밖에 없었다. 얼굴을 드러내지 못하고 무대 뒤에서 노래만 부르기도 했다. 한 시간짜리 공연에서 단 2분만 노래하기도 했다. 비중이 작다보니 1인 2역도 맡았다. 주연배우를 꿈꾸며 매일 훈련했다. 발성부터 연기까지 차근차근 3년동안 기초를 닦았다.  4번의 도전 끝에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의 프리마돈나 역할을 맡았다. 그리던 주연이었다. -뭐가 달라지던가요 “대기실을 혼자 사용할 수 있습니다. 비서 같은 개인 스텝이 생깁니다. 페이가 달라지죠. 여러 역할을 혼자서 소화하면서 한 번 공연하는데 160만원을 받던 조연배우는 몸 값이 서너 배로 뛰었다.이사벨 제공◇미국서 팝페라 가수 데뷔했지만, 빛 못 보고 한국행-오페라 대신 팝페라를 시작한 이유는 뭔가요“유럽 페스티벌 참가 제안을 받고 준비하던 과정에서 모든게 엎어졌습니다. 페스티벌을 기획하던 매니저가 저와의 계약을 파기하고 대신 이탈리아 오페라 가수로 교체했습니다. 그 매니저가 지도 교수님 전 남편이었어요. 이때 너무 충격을 받아서 목소리가 안 나왔습니다.”제대로 이유도 듣지 못했다. 배신당한 느낌이었다. 우울증이 찾아왔다. 말하는데 문제는 없었지만, 오페라 노래를 부르려고 하면 발성이 되지 않았다.  앞으로도 오페라는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주변에서 다른 노래를 해보는 것은 어떻겠느냐는 소리를 들었다. 오페라만 아니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가수로서의 삶이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다른 길이 보였다. 그렇게 선택한 게 팝페라였다. 하지만 팝페라 가수 활동도 순탄치 않았다. 2008년 미국에서 팝페라 혼성그룹 윈(W.I.N)으로 데뷔했지만 제대로 활동하지 못하고 해체됐다. 당시 리먼브라더스가 윈 소속사의 재정을 지원했는데 금융위기로 파산하면서 지원이 끊겼다. 윈도 동력을 잃었다. 그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사벨을 위한 무대는 많지 않았다. “노래가 하고 싶었습니다.”구세군에 연락해 거리 자선공연을 하겠다고 했다. “누구십니까. 저희가 이런 요청을 받는 게 처음입니다.” 구세군의 대답이었다. 이력서를 들고 찾아가 자신을 소개했다. 거리 공연으로 기부문화를 바꿔보고 싶다고 말했다. 12월, 꽁꽁 얼어 붙은 광화문 사거리 일민 미술관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시위 중이던 장애인 단체와 이를 막으려 서있던 경찰들이 관객으로 변했다. “긴장됐던 대치 분위기가 풀리는 것을 보면서 이게 음악의 힘이구나, 어디서든 노래할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 했습니다.”이사벨 제공◇4옥타브 음역대 소화하는 실력파 가수…기부천사 활동 그 뒤 해마다 12월 구세군 공연은 빠뜨리지 않고 있다. 구세군은 그 공로를 인정해 ‘이사벨’ 이름을 새긴 자선냄비를 선물했다. 구세군이 개인 이름을 넣은 자선냄비를 만든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자선공연으로 이름이 알려지면서 공연 문의도 늘었다. 2011년에는 폴포츠와 함께 공연 했다. 영국의 휴대전화 판매원 출신에서 세계적인 스타가 된 ‘폴 포츠’ 역시 팝페라 가수다. 2013년에는 드라마 ‘구가의서’의 OST 마이 에덴을 엠넷 클래식 차트 1위에 올려놓기도 했다. 그녀는 한 달 평균 2~3번 공연을 해, 연간 1억원 정도를 번다. 그리고 수익의 20%가량을 기부한다고 했다. 사실 국내에서 팝페라 가수는 설자리가 많지 않다. “대기업 행사나, 국제 행사, 스포츠 행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예를 들어 삼성그룹 창립 75주년행사, 아산재단 기념행사 같은 대기업 행사에서 공연했다.-힘든 일은 없나요"노래할수 있다면 행복합니다. 아침엔 광교 호수를 걸으며 발성연습을 합니다. 정해진 연습시간은 없지만 시작하면 화장실 가는 것도 잊고 노래를 부릅니다. 8~9시간 할때도 있고 컨디션이 좋으면 새벽까지 연습실에 있습니다. 다만 저를 너무 과대포장하는 기사가 나올때 힘듭니다. 7옥타브 소리를 낼 수 있다는 소문도 있는데 아닙니다. 그건 인간의 영역이 아닙니다. 저는 4옥타브 정도 냅니다. 제가 미국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재미교포라고 하셨던 분도 있습니다. 한국사람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저를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앞으로 계획이 있습니까"비주류 예술인을 위한 단체를 만들고 싶습니다. 미국에서는 공연을 앞두고 리허설만 해도 리허설비를 따로 줍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꿈도 못 꾸는 이야기더군요. 미국에서는 예술인들 단체가 있어서 공연 기획사가 이 단체에 돈을 미리 내도록 하고 배우나 가수들이 돈을 떼이는 일이 없게 합니다. 식비나 차비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으면서 공연을 기획하는 문화는 사라져야 합니다. 저도 공연비를 못 받는 일이 종종 있었어요. 예술인들이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글 CCBB 에디터 BH시시비비랩
교사 꿈 접은 이대 출신 개그우먼, 애인과 '방귀'로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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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교사 꿈꾸다 개그맨으로 전향개그맨 시절 유튜버 도전 중국 러브콜 등 8개월 만에 대박 ‘엔조이커플’이라는 이름의 소셜미디어 개그 채널이 최근 인기를 끌고 있다. 유튜브 계정 구독자는 84만명이 넘고, 페이스북 팔로워는 80만명에 달한다. 2017년 3월 첫 방송을 시작해 거둔 성과다. 엔조이커플은 개그맨 커플인 손민수(28)·임라라(본명 임지현·29)씨가 만드는 커플 유머 영상 채널이다. ‘다른 남자와 키스하는 여친을 본 남친 반응’, ‘여친 몸무게 알아보는 법’ 등 연인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재미있는 상황을 연기한다.방송 출연은 물론 기획·촬영·편집·업로드, 계정 관리 등을 손·임 커플이 다 한다. 2017년 1인 방송업계서 가장 ‘핫’한 개그 커플이지만, 방송국 공채 개그맨 시절엔 두 사람 모두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체육교사를 준비하다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진로를 바꾼 임씨는 특히나 마음고생이 컸다. 임씨를 만나 개그맨이 된 이유와 엔조이커플을 시작하게 된 사연을 들었다. 개그맨 임라라씨. 임씨와 임씨의 남자친구인 개그맨 손민수씨◇체육교사를 꿈꾼 ‘끼’ 많던 소녀 학창시절부터 사람들 앞에서 노래 부르고 춤추는 것을 좋아했다. 무대 체질이었다. 그러나 부모님 권유로 선생님이 되기로 했다. 운동에 흥미가 있어서 체육 교사를 목표로 했다. 2009년 이화여대 체육과학과에 입학했다. 1~2학년 성적이 상위권에 들어야 교직 이수가 가능했다. 대학 생활의 낭만은 없었다. 공부만 했다. 시험 기간 1~2주 전부터 집에도 안 가고 도서관에서 밤샘 공부를 했다. 등록금과 용돈도 벌어야 했다. 학기 중 헬스장 트레이너, 과외 아르바이트를 병행했다. 코피 흘리며 주경야독한 끝에 교직이수를 할 수 있었다. “앞만 보고 달려왔기에 좀 마음의 여유가 필요했어요. 휴학하고 잠시 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기로 했어요.”6개월간 캐나다 워킹홀리데이를 떠났다. 캐나다 사람들은 여유로웠다. 행복하고 평화롭고 가족 중심적이었다. 부러웠다. 체육교사가 정말 원하는 일인지 생각해봤다. 확신이 안 섰다. 안정성과 부모님의 권유, 주위 평판 때문에 맹목적으로 달려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래에 대한 회의를 품은 채 한국에 왔다. 교생 실습에 들어가기 전 중학교 교육 봉사를 나가서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확실히 깨달았다. 선생님으로 산다면 결코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어렸을 때 꿈인 ‘방송’으로 마음이 움직였다. 손민수-임라라 개그맨 커플◇신인 개그맨의 설움교생 실습을 포기하고, 언론정보학을 복수전공했다. 카메라 앞에 설 때 행복했다. 방송 프로그램 진행을 해보고 싶었다. 아나운서가 되는 것이 가장 확실한 길이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았다. 개그맨이 눈에 들어왔다. 개그맨으로 성공하면 여러 프로그램에 출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경기도 일산의 개그 극단에 들어갔다. 학교를 다니며 2년간 일주일에 4~5일씩 극단에 가서 발성·발음, 연기 연습 등을 했다. “생각보다 적성에 너무 잘 맞고 재미있더라고요. 학교 수업 들으면서도 힘든 줄 모르고 개그맨 시험 준비를 했어요.” 준비 2년 만인 2015년 SBS 공채 개그맨 시험에 합격했다. 경쟁률은 200대 1이 넘었다. 꿈에 한 걸음 다가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공중파 공개 코미디 방송이 쇠퇴기를 맞았다. 시청률이 2%도 안 나왔다. 신인이다 보니 무대에 오를 기회조차 거의 없었다. 계약금 200만원이 보장된 수입의 전부였다. 출연료로 월평균 40만~50만원을 겨우 벌었다.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부모님 뵐 면목도 없었어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걱정이 많았습니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죠.”손민수-임라라 커플(왼쪽)과 엔조이커플 유튜브 계정(오른쪽)◇엔조이커플에서 ‘엔조이부부’로돌파구는 ‘방송’에서 찾았다. 남자친구인 tvN 코미디빅리그 신인 개그맨 손민수씨도 임씨와 비슷한 처지였다. 둘은 서로의 ‘끼’를 믿었다. 둘만의 아이디어로 영상을 직접 촬영해 사람들 앞에 나서보기로 했다. 방송국에서 쉽게 받지 못한 기회를 소셜미디어 공간에서 찾기로 한 것이다. “해외의 소셜미디어 영상 채널에는 커플끼리 방송하는 경우가 많은데, 한국은 그렇지 않더라고요. 블루오션이라 생각했죠. 멍석만 깔아주면 얼마든지 잘 해낼 자신도 있었고요.” 독학으로 영상 편집술을 익혔다. 유명 유튜브 크리에이터들의 인터뷰도 빠짐없이 봤다. 유튜브 영상 채널을 시작하기 전 3개월가량을 준비했다. 첫 방송은 올해 3월 2일 두 사람이 만난 지 1000일 되던 날을 기념해 시작했다. 조회 수는 200 정도였다. 지인들만 보는 수준이었다. 전문가가 아니어서 손이 느린 탓에 영상 하나를 편집해 올리는데 8~10시간이 걸렸다. 밤샘 작업이 일상이었다. 거의 매일 만나서 아이디어 회의를 하고, 촬영해 편집했다. 꾸준히 일주일 2~3개씩 영상을 올렸지만 반응은 미지근했다. 수익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지방방송사 리포터 일을 하며 버텼다. 엔조이커플을 세상에 알린 '엘리베이터 방귀 몰카' 영상엔조이커플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건 2017년 9월. ‘엘리베이터 방귀 몰카’ 영상이 큰 인기를 끌면서다.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에서 화장실 용무가 급한 것처럼 연기하면서 장난감으로 방귀 소리를 내면서 사람들의 반응을 찍어 올린 것이었다. 고개를 돌리고 입술을 깨물며 웃음을 참는 일반인의 모습에 시청자들은 포복절도했다. 이 영상은 현재 358만 조회 수를 기록 중이다. 이 영상을 시작으로 채널이 인기를 얻으면서 ‘다른 남자와 키스하는 여친을 본 남친 반응’, ‘여친 몸무게 알아내는 방법’, ‘연예인 다이어트 명언에 대처하는 여친의 자세’ 등의 영상이 조회 수 100만~200만을 넘으며 대박을 쳤다. 최근에는 광고 제휴, 협찬 제의, 섭외 요청이 빗발치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중국에서도 엔조이커플은 실시간 검색어 1위를 차지한 바 있다. 중국 동영상 사이트에서는 두 사람에게 수개월째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매주 2개 정도 영상을 올리면서 그 외의 수많은 일정을 소화하려다 보니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 상황이다. 채널 개설 이후 현재까지 100개 가까운 영상을 올렸다. 자는 시간을 쪼개가며 일하고 있다. 하루 수면 시간은 3~4시간 정도다. “돈을 많이 벌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이 일을 시작하면 금방 지칠 수 있어요. 저희도 시작하고 6개월가량은 금전적으로 정말 힘들었어요. 하지만 저희가 좋아하는 개그 콘텐츠를 마음껏 만들 수 있다는 만족감이 컸어요. 이제 시작이고, 아직 불안한 부분도 많지만 좋아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직업입니다. 너무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해외도 진출하고, 엔조이커플을 넘어 ‘엔조이부부’로 까지 활동을 이어가고 싶습니다.”글 CCBB 에디터 JS시시비비랩
12년 경력의 메이크업 아티스트 '서아' 박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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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크업 아티스트 '서아' 박지혜씨뷰티 산업이 뜨면서 메이크업 아티스트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유명인을 메이크업하는 모습이 자주 방송을 타자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선망하는 젊은이들도 생겼다. 하지만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보이는 것처럼 화려한 일은 아니다. 낮은 임금을 받으며 배우고 연습하는 과정을 겪어야 한다.‘서아’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12년 경력의 메이크업 아티스트 박지혜(30) 씨는 얼마 전까지 대형 뷰티 살롱에서 부원장으로 일하며 걸그룹 EXID와 아이돌 그룹 세븐틴 등 유명 연예인의 메이크업을 담당했었다. 그러다 지난 달 서울 청담동에 꿈에 그리던 일인 뷰티 살롱을 열었다. 청담동 골목길에 위치한 ‘ADD(애드)’ 뷰티 살롱을 찾았다. 헤어를 담당하는 친구와 단둘이 운영하는 뷰티 살롱답게 아담했지만, 하얀색 벽돌 인테리어가 돋보였다. 서아 원장에게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세계에 대해 물어봤다.메이크업 아티스트 '서아' 박지혜씨 / CCBB- 본명을 놔두고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일할 때는 ‘서아’라는 이름을 쓴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메이크업 아티스트 중에 가명을 쓰는 사람이 종종 있어요. 저는 어쩔 수 없이 가명을 쓰게 된 경우에요. 큰 살롱의 메이크업은 팀으로 일하는 경우가 많은데, 4년 전에 일하던 곳 팀장님이 저와 이름이 같았어요. 일하다 보면 구분이 필요해서 가명을 지었어요. 저를 키워주신 선생님이 지어주셨습니다. 본명이 흔한 이름 같은 경우에는 자신을 기억하게 하고 싶어서 특정 이름을 지어서 가명으로 쓰는 경우도 많아요.”-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무엇을 하는 직업인가. 주요 고객들도 궁금하다.“의뢰하는 고객님들의 메이크업을 해드려요. 주로 새 신부님이나 방송을 하는 연예인, 아나운서, 그리고 취업을 앞둔 취업준비생 등이 주요 고객입니다. 일반인들 중에서도 특별한 날에 의뢰를 하시는 분들도 있어요.”배우 송강호·유해진, 김민선 알루 대표와 함께 / 박지혜씨 제공- 대형 뷰티 살롱에서 주로 연예인 메이크업을 담당했다고.“일인샵을 열기 전까지는 대형 뷰티 살롱에서 일했어요. 부원장이라는 직책까지 맡았죠. 주로 연예인들을 담당하는 일을 했습니다. 기획사들과 계약을 맺고 소속 연예인 메이크업을 꾸준히 관리해주는 역할을 했어요. 해외 출장도 많이 다녔어요. 연예인들의 해외 공연이나 해외 촬영 때 동행을 합니다. 그룹 EXID와 세븐틴을 비롯해서 다수의 연예인들을 담당했습니다.”- 본인이 했던 메이크업 중에 기억나는 연예인의 메이크업이 있다면.“제가 제일 자신 있는 메이크업이 그 사람 얼굴에 맞는 눈매를 찾아주는 것이에요. 걸그룹 EXID의 멤버 하니는 아름다움과 함께 섹시함과 걸크러시를 강조하고 싶었어요. 눈매를 아이라이너로 진하게 그리기 보다는, 눈 꼬리 쪽에 섀도우를 많이 써서 음영으로 눈매를 입체적으로 보이게 하는 메이크업을 많이 해줬어요. 저도 마음에 드는 메이크업이었고, 하니를 보고 문의한 사람도 많습니다.연예인 메이크업 도중 / 박지혜씨 제공- 비교적 어린 나이인데, 경력이 12년이다. 언제부터 이 일을 꿈꿨었나.“중학교 때 우연히 TV로 인생극장을 봤는데, 국내 1세대 메이크업 아티스트 조성아의 이야기였어요. 누군가의 얼굴에 혼을 불어넣는 모습이 너무 멋있었어요. 그게 제 인생을 바꿨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부모님을 설득해서 메이크업 아티스트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어요. 대학도 피부미용과에 입학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부터 청담동 뷰티 살롱에서 일하기 시작했으니까, 벌써 12년이 되었네요.”- 청담동 뷰티 살롱에서 일하는 게 처음엔 쉽지 않았을 텐데. ‘열정페이’라는 말도 나온다.“처음 일 했을 때는 정말 힘들었어요. 지금은 법이 바뀌어서 최저임금이 보장되지만, 당시만 해도 ‘배우면서 일한다’는 의식이 강해서 처음에는 최저임금보다도 못한 돈을 받고 일했습니다. 뷰티 살롱 메이크업 팀은 원장-부원장-실장-팀장-디자이너-어시스트 순으로 구성돼요. 디자이너 직급부터 자신의 고객을 확보하고 본격적으로 돈을 벌 수 있어요. 어시스트에서 디자이너가 되기까지 4년이 걸렸습니다. 이 일에 뛰어드는 젊은이들이 디자이너가 돼서 고객도 확보하고, 위로 한 단계씩 올라가는 자신의 모습을 꿈꾸며 일한다고 보면 됩니다.”- 디자이너 급으로 올라가면 페이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다.“고객을 확보할 수 있는 디자이너 급이 되면, 월급 보다는 능력만큼 돈을 받아요. 고객으로부터 얻은 수익을 뷰티 살롱과 디자이너가 나누는 방식입니다. 디자이너마다 수익 배분 비율이 달라져요. 저 같은 경우, 전에 부원장으로 일하던 곳에서는 연예인과 동행하는 해외 출장은 수당이 많았어요.”- 메이크업 아티스트 지망생이 많은 것 같다.“학생들에게 메이크업 아티스트에 대한 질문을 자주 받아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무대 뒤에서 일하는 직업이었어요. 그런데 최근 관련 방송 프로그램이 많이 생겼고, 인스타그램 같은 SNS에서도 뷰티가 유행하면서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셀럽 처럼 되어 가고 있기도 해요. 연예인과 함께 활동하는 모습 같이 화려한 면을 보고 지망하는 분들이 아직도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기본기부터 차근차근 배워나가야 하는 힘든 직업이라고 말해줘요. 나에게 메이크업을 맡기는 분들에게 신뢰를 주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들이 무척 많거든요. 엄청난 노력과 시간을 투자해야 인정받을 수 있는 분야입니다.”메이크업 아티스트 '서아' 박지혜씨 / CCBB- 일 하면서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인지.“개인 시간을 여유있게 갖기가 힘든 직업이에요. 주요 고객층이 결혼하는 신부, 연예인이기 때문입니다. 신부들이 몰리는 결혼식이 열리는 날은 남들 쉬는 날이 대부분이에요. 연예인의 경우 밤낮을 안 가리고 갑자기 스케쥴이 생기는 경우가 많아요. 함께 일하다 보면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게 거의 불가능해요. 그게 습관이 되다보니, 저는 오히려 뷰티 살롱에 있는 게 집처럼 편해졌습니다.”- 일하는 게 즐거워 보인다. 언제 가장 행복한지.“고객과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특별한 날에 만나요. 결혼을 앞둔 분들, 방송에 자신의 예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연예인들, 그리고 중요한 면접을 앞둔 분들. 모두 특별한 날을 준비하며 저를 만나러 오시는 거죠. 모두 행복한 표정으로 저를 만나러 옵니다. 일하면서 그 분들의 에너지를 많이 받아요. 제가 해주는 메이크업에 고객이 만족하며 더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 온 몸이 짜릿합니다. 일하면서 느끼는 이 매력을 놓기 싫어서 더 열심히 일하게 되는 것 같아요.”- 메이크업도 트렌드가 있는 것 같다. 그에 대한 공부는 어떻게 하는지.“요즘엔 메이크업이 많이 가벼워졌어요. 그리고 쉽고 간단한 메이크업을 선호하죠. 예를 들면 예전에는 눈, 볼터치, 입술을 화장하기 위해서 각각의 화장품을 다 들고 다니며 메이크업을 했었어요. 하지만 요즘에는 한 가지 화장품을 이용해서 세 군데 메이크업을 다 할 정도로 간편한 걸 좋아해요. 그게 통일감이 있어서 전체적인 느낌도 좋습니다. 이렇게 메이크업 트렌드가 시간이 흐르면서 계속 바뀌어요. 잡지나 인터넷을 항상 살펴보며 새로 유행하는 컬러나 메이크업 트렌드를 공부합니다. 새로운 방법들은 동료들끼리 연습해 보기도 하고 거울을 보며 스스로 시연해 보기도 해요.”- 유명 뷰티 살롱에서 벗어나 개인 샵을 열었다. 꿈이 있다면.“뷰티 살롱의 트렌드도 조금씩 바뀌고 있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대형 뷰티 살롱이 인기였다면, 최근에는 개인 샵에서 전용 공간 처럼 편하게 메이크업과 헤어를 하는 걸 좋아하는 분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길에 첫 발을 내딛으면서 언젠가는 내 브랜드로 인정받는 삶을 살아보고 싶었어요. 이제 다시 그 첫 발을 내딛은 거예요. 인스타그램(@parkjihye_seo_a)으로 이제 막 저를 알리기 시작한 첫 단계지만, 저는 도전하는 것에 늘 자신감이 있었어요. 아직 젊은 만큼 실패하는 건 두렵지 않습니다.” 글 CCBB 에디터 JC시시비비랩
‘넌 망할거다’ 소리 들으며 대기업 그만둔 30대 대리, 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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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는 용기 내서 하는 게 아닙니다”자신이 그린 웹툰 주인공 가면을 쓰고 촬영에 응한 김보통 작가. / CCBB암 환자들 얘기 다룬 ‘아만자’ 작가 김보통씨직장 관두고 나와 트위터에 올린 낙서 계기로 웹툰 작가 돼 “버티기 힘들면 참지 말고 도망치는 것도 방법…평생 만화가로 살고 싶지는 않아” ‘작가님, 저 죽고 싶어요.’한 고등학생이 웹툰 작가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너무 힘든 나머지 살고 싶지 않다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읽은 작가는 답장을 적어 내려갔다. 내용은 이랬다. ‘죽고 싶다는 당신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사실 없다. 하지만 이거 하나는 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당신 이름을 주인공으로 한 만화를 그려주겠다. 그것을 보려면 반드시 살아는 있어야 한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 웹툰 작가는 이 학생에게서 또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다시 살아보겠다’는 내용이었다. 약속한 대로 작품을 준비 중인 웹툰 작가는 김보통(37)씨다. ‘보통’이라는 필명을 쓸 만큼 자신을 드러내지 않지만 누가봐도 '보통은 아닌' 작가다. 2013년 데뷔작으로 내놓은 ‘아만자’(암 환자를 소리 나는 대로 풀어쓴 단어)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독자들은 암을 신파의 소재가 아닌 현실적으로 해결해야 할 삶의 문제로 다루며 담담히 풀어간 점에 열광했다. 인생의 길목에서 누구나 마주할 수 있는 고민, 장애, 슬픔 등을 토닥여주는 작가로 살고 있는 김씨를 만나봤다. ◇ 트위터에 그린 낙서로 웹툰 작가 길 들어선 사연  서른둘. 김 씨가 웹툰 작가로 데뷔한 나이다. 그는 대기업에서 일하던 직장인이었다. 꾸역꾸역 쌓인 스트레스 체증은 입사 4년 만에 폭발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와 6개월은 원 없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지냈다. 디제잉도 해보고 제빵도 배워보다가 로스쿨도 준비해봤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다. 트위터에 낙서 올리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던 시절 당대 최고 인기를 누리던 작가로부터 ‘만화 한번 그려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노동운동을 다룬 웹툰 송곳을 그린 최규석 작가였다. 생면부지 사람의 권유로 이 길에 들어섰다. -회사를 그만둔 이유가 뭔가. “회사 생활이 나와 맞지 않았다. 비인격적인 대우를 받았고 업무 강도도 너무 셌다. 말기 암에 걸린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의 상황에서도 회식에 참석하라는 강요를 받았다. 회사 와서 울상 짓지 말라는 얘기 같은 것을 일상적으로 들었다. 내가 과연 여기 있어야 하는 것일까라는 회의감이 계속 들었다. 우울증에다 자살 충동이 심해지니까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대리 달고서 2013년에 내 발로 걸어나왔다."  -평소 그림 그리고 글 쓰는 것을 좋아했나. 어떻게 웹툰 작가가 됐나.   “어릴 적 꿈은 세계 여행지를 돌아다니는 리포터가 되는 것이었다. 아버지께서 이미 암에 걸린 상태였고 집안에 돈을 벌 수 있는 사람이 나뿐이어서 회사에 취직했다. 회사 그만두고 놀고 있는데 최규석 작가가 트위터를 통해 연락을 주셨다. 정말 큰 행운이었다. 기대하는 바가 크지 않으니 부담갖지 말고 6개월 동안 만화를 그려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그때 로스쿨도 떨어졌을 때였다. 일단 해보기로 했다.”-만화를 그려본 경험은 있었나. “전혀 없었다. 만화를 시작할 때 사람들이 나에게 ‘근본 없는 그림 그린다’는 얘기를 했다. 욕도 많이 먹었다. 워낙 그림을 못 그리니까.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그림이 아닌 글로 승부를 보자는 것이었다. 나는 그림보다는 글에 소질이 있다고 생각해서 글에 신경을 많이 썼다.” -암 환자 얘기를 데뷔작으로 다룬 이유가 뭔가.“아버지께서 8년간 투병하셨다. 아버지는 마약성 진통제를 투여할 때마다 의식, 무의식의 세계를 왔다 갔다 하시는 것 같았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어머니와 그런 얘기를 했다. ‘아빠가 꿈속에서 재미난 모험을 하고 계시는 것 같다’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 아버지가 또 다른 어떤 세상에서 분명히 살아계실 것 같은 생각 말이다. 내가 겪은 얘기를 해보고 싶었다.” 김 작가가 그린 웹툰 '아만자'·'디피(D.P)'표지. / 본인 제공◇ “죽고 싶은 마음 사라지니 뭐든 할 수 있었다”아만자는 시장점유율 0.1% 수준의 웹툰 플랫폼을 통해 세상에 나왔지만 입소문을 타고 독자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2014년 '오늘의 우리 만화'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 올해 부천만화대상 부천시민만화상 등을 받았고 일본, 대만, 중국, 미국까지 진출했다. 이후 군대에서 탈영병을 잡는 군탈체포조의 이야기를 담은 디피(D.P)라는 웹툰을 냈다. 이 웹툰은 영화로 만들 준비를 하고 있다. 요즘은 스트레스 많은 현대인을 위한 글을 쓴다. -아만자가 독자들 반응을 이끌어 낸 원동력이 뭐라고 생각하나.“대부분의 암 환자를 소재로 한 창작물은 주인공에게 시련이나 비극을 주는 최종적인 무기로 암을 사용한다. 내 만화는 암 선고를 받는 주인공을 첫 장면에 넣었다. 암에 걸린 스물여섯 청년 앞에 닥친 돈, 보험, 연애 문제 등 다양한 고통을 세밀하게 표현했다. 암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아닌 받아들이고 정리해 나가는 과정을 그렸다. 그 부분이 독자들에게 와닿았던 것 같다. 암 환자뿐 아니라 의료진들로부터 메일을 많이 받았다. 지금까지 수천 명에게 암 선고를 했다는 한 의사는 웹툰을 보고 그동안 자신이 환자들에게 얼마나 기계적으로 대답을 해 왔는지 되돌아보고 울음을 터뜨렸다는 내용의 메일을 보내왔다. 만화 주인공처럼 마지막을 준비하고 싶다는 암 환자가 보낸 메일도 기억난다.” -밝고 경쾌한 이야기보다 이야기로 만들어지지 않을법한 얘기에 집중한다. “경험을 토대로 한 이야기들을 썼다. 아만자 이후에 쓴 디피는 군 생활 시절 내 얘기를 바탕으로 했다. 디피를 쓰기 전 ‘내 멋대로 고민상담’이라는 만화를 세 달 정도 연재했다. 익명으로 들어온 고민을 상담해주는 만화였다. ‘죽고 싶다’는 내용이 정말 많았다. 나도 그랬던 경험이 있어서 독자들에게 내 심경을 솔직하게 풀었다. ‘아직 불행하지 않아’, ‘어른이 된다는 서글픈 일’ 같은 책도 내 경험을 담았다.”-우울증은 결국 극복했나. “회사 그만두고 집에 온 날 경비원 아저씨가 날 보더니 ‘왜 실실 웃고 있냐’고 물었다. 지난 4년 동안 웃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면서 말이다. 회사 다니면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회사를 관두니까 그런 마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일단 죽지 않게 됐으니 이것으로 됐다 싶었다. 그러고나서 보니까 뭐를 해도 괜찮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요즘도 회사 다닐 때와는 다른 종류의 스트레스를 받긴 한다.” -필명을 김보통이라고 한 이유가 궁금하다. “신입사원 시절 연수를 받을 때 자꾸만 ‘너희는 우수한 인재야’라고 주입을 했다. 세뇌 당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냥 칼국숫집 아들인데 왜 자꾸 특별하다고 하지라는 반항심도 생겼다. 그때 ‘김보통(kimbotong)’이라는 이메일 주소를 만들었다. 마음속 안전장치 같은 것이었다. 그것을 필명으로 쓰기로 했다.” -얼마나 버나. “경기도 일산에 얻은 열다섯평짜리 사무실에서 직원 세 명에게 월급 주면서 살 정도는 된다. 먹고 사는데 큰 걱정은 없다. 통장 잔고는 늘 비슷한 수준으로 유지된다."연단에 선 김 작가. / 본인 제공◇ “멀리 있는 목표 좇지 말고, 지금을 대충 살아도 괜찮더라” 김 씨는 미디어에 얼굴을 공개하는 것을 꺼린다. 언론이나 미디어에 인터뷰 기사가 나갈 때면 '내 멋대로 고민상담'이라는 웹툰 주인공 ‘고독이’ 인형 탈로 맨 얼굴을 가리고 사진을 찍는다. “책을 내거나 인터뷰할 때 ‘대기업 박차고 나온 누구’라는 식으로 소개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굳이 내가 싫다고 박차고 나온 이력을 쓰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얼굴은 좀 더 유명해지면 알리고싶고요. 지금은 작품으로만 알려지고 싶어요.” -요즘 강연 나가면 어떤 질문을 많이 받나. “지금 고등학생 관련 만화를 준비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고등학교만 50곳 이상은 돌아다닌 것 같다. 학생들이 웹툰 작가에 관심이 많다. 놀라운 것은 그 꿈을 꾸기에 이미 늦었다고 생각하는 학생이 굉장히 많았다는 점이다. 나는 서른둘에 데뷔를 했는데 열아홉 살인 학생들이 너무 늦은 거 아니냐는 얘기를 하고 있다. 대비를 하지 못하면 안 될 것이라는 강박이 있는 것 같았다. 학생들에게 내가 하는 얘기는 이렇다. 나처럼 회사 갑자기 그만두고 백수였다가도 만화가 돼서 잘난척하고 떠들며 살 수 있다고. 뭐가 됐든 일희일비하지 말고 주어진 곳에서 충실히 하면 뭔가 돼 있을 거라고 말이다.” -흥미 없는 돈벌이를 관두고 싶어도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사표 쓰지 못하는 직장인이 더 많다.  “내 책의 독자층은 주로 30대다. 강연을 마치면 제일 많이 나오는 질문은 ‘작가님은 어떻게 용기를 내셨나요’다. 나는 용기를 내서 회사를 그만둔 것이 아니다. 그냥 도망친 거다. 이대로 있다가는 죽을까 봐. 사람들에게 말한다. ‘퇴사가 용기의 문제가 된다면, 아직은 해볼 만한 것이다’라고. 나는 그대로 있다가 죽을 것 같아서 도망친 겁 많은 사람일 뿐이다. 내가 용기의 말을 해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온 사람들은 실망하고 돌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이들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지금도 없다.”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 “만화가가 된 것에 대한 결의나 신념 같은 것은 없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할 수 있는 일이 만화가였다. 이것도 힘들면 도망칠지 모른다. 요즘에 메신저 이모티콘에 흥미가 생겨 그 작업도 하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5억 원 정도 모아서 장학 재단을 만들고 싶다. 공부 잘하는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는 것이 아니라 백분위 성적 50%대에 있는 학생들, 평균에 있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싶다. 모두 조금이라도 평균에 가까워지려면 전체적으로 뛰는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힘들어하는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대충 살아도 괜찮다고 얘기해주고 싶다. 대충 살라는 말이 그냥 막 살라는 얘기가 아니다. 너무 먼 목표를 갖고 살지 말라는 거다. 주어진 지금에 그냥 충실히 살면 되는 것 같다. 대기업 그만둘 때 다들 ‘너 망할 거야’라는 얘기를 들었지만 지금 난 망하지 않고 잘 살고 있다.” 글 CCBB 에디터 절미시시비비랩
'달마다 5백만원 들어오는' 카톡 이모티콘 만든 20대 여성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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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놀라게 한 한국화가 김현정 "미술 문턱 낮추고 싶다"“노란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중략)…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 할 것입니다.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그 중에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했다고. 그리고 그 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로베르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이다. 김현정(29) 작가는 이 시처럼 사람이 간 흔적이 보이지 않는 길을 가고 있다. 미국 포브스는 그녀를 “한국화 작품을 통해 기존 관습에 도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세계 3대 미술관 중의 한 곳)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한국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연 최연소 화가”라고 평가했다. 2017년 포브스가 선정한 '아시아에서 영향력 있는 30세 이하 30인'으로 꼽힌 김현정 작가(왼쪽). 오른쪽은 인터뷰 중인 김 작가(오른쪽)/포브스 캡처·jobsN지난 2017년 4월 ‘아시아에서 영향력있는 30세 이하 30인(30 under 30 2017 Asia)’에 그녀를 선정한 이유에 대한 설명이였다. 30인 명단에는 가수 제시카, 리우올림픽 양궁 금메달리스트 최미선과 축구선수 손흥민 등도 있었다. 또 국내 순수 미술작가로 이 명단에 이름을 올린 것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김 작가는 ‘한국화계의 아이돌’로 불린다. 2014년 인사 아트센터에서 연 개인전 ‘내숭올림픽’에는 센터 개관 이후 최다관객(2만3887명)이 들었다. 2016년 ‘내숭놀이공원’은 일일 최다 관객 5026명을 기록하는 등 총 6만7402명의 관객을 불러모았다. 신세대 화가답게 SNS를 활용해 대중과 적극적으로 소통한다. 종류별로 SNS 계정만 10개가 넘는다. 카카오톡 이모티콘을 통해서도 그녀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대학과 기업 강연도 꾸준히 이어가며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김 작가를 만났다.  ◇생활 속에서 살아 숨쉬는 한국화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는 ‘내숭 이야기’ 시리즈이다. 한복을 입고 있는 여인이 일상적인 행동을 하는 모습을 담아낸다. 한복하면 떠오르는 고상하고 단아한 이미지를 깨뜨리는 파격이다. ‘기존 관습에 도전했다’는 포브스의 평가는 바로 이런 그녀의 화풍과 연관이 있다.김현정 작가의 대표작인 '내숭이야기' 시리즈/김현정아트센터 제공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성이 방바닥에 앉아 라면을 먹는다. 이 여성의 시선은 정작 명품 핸드백과 스타벅스 커피에 쏠려있다. 다리를 훤히 내놓고 햄버거 배달 스쿠터를 타기도 한다. 얼핏보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겉과 속이 다른, 이른바 내숭이다. 자신이 원하는 삶과 타인이 원하는 삶의 사이, 경계인의 모습을 자신의 경험을 통해 녹여낸 것이다. “동양화나 한국화 하면 흔히 산수화, 인물화가 떠오르잖아요. 소재가 한정적이었던거죠. 새로운 소재를 찾기 위한 노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해준 것 같습니다.” 생활 속에서 살아 숨쉬는 한국화가 김 작가의 지향점이다.  4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내숭 시리즈는 “그리는 것도 재밌고, 보는 사람도 재밌는 그림을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어렵고 딱딱한 그림보다 이해하기 쉬운 그림으로 한국화의 ‘문턱’을 낮추고 싶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쉽게 만들 수 있는 건 아닙니다. 한 작품을 그리는데 두달 내지 여섯달까지 걸려요. 구도 계산 등 치밀한 계획과 연구가 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김현정 작가/김현정아트센터 제공그림에 나오는 배경도 실제 장소를 기반으로 한다. 모델은 자기 자신이다. 원하는 색감을 발현하기 위해 말리기와 덧바르기를 20차례 이상 거친다. 누드로 밑그림을 그린다. 그 다음 상의 부분엔 직접 염색한 한지를 붙여 특유의 질감을 표현하고, 하의 부분인 치마는 먹을 이용해 반투명으로 표현한다. 몸의 라인을 비치게 드러내 ‘그 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서양의 콜라쥬와 동양의 수묵담채 기법의 독특한 만남이다. ◇미대생이 경영학 전공 “화가는 왜 배고파야 하나”  김 작가는 서울대학교 동양화과를 거쳐 동 대학원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올해부터는 박사 과정을 다니고 있다. 학부 시절 미대생으로는 이례적으로 경영학을 복수전공했다. 인기 전공인 경영학은 수요가 많기 때문에 복수전공을 하려면 학점이 제법 높아야한다. 게다가 어릴 적부터 미술계의 길을 걸었던 김 작가에게 낯선 분야였다. 그러나 그녀는 우수한 성적을 올렸다. 낯선 경영학 과목을 들으면서도 동양화과를 차석 졸업했다.김현정 작가 작품/김현정아트센터 제공경영학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미술시장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었다. “화가는 왜 배가 고파야만하는지 궁금한데 아무도 알려주질 않았습니다. 조금이나마 의문을 풀어보려 경영학을 배웠습니다.” 색다른 분야를 배우며 세상을 보는 눈도 넓어졌다. 미술계가 아닌 다른 분야도 얼마나 치열하게 사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대형 강의는 1시간은 일찍 가야 앞자리에 앉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미술을 이렇게 치열하게 했나’ 돌아보는 계기도 됐어요.” 조금의 번짐이라도 있다면 그림을 아예 다시 그릴 정도로 완벽을 추구하는 습관이 자리를 잡았다.  경영학의 ‘케이스 스터디(사례연구)’를 미술분야에 적용해 스스로 공부했다. 고흐, 샤갈, 모네 등 유명 작가의 삶을 돌아봤다. 뿐만 아니라 현직에서 일하는 큐레이터, 화가, 학교 선배, 교수들을 찾아갔다. 이를 통해 내린 결론은 이랬다. “배가 고픈 건 부인할 수 없지만 성실한 예술가는 회사원만큼은 먹고 살 수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누군가가 그러더라고요. ‘회사원이 얼마나 열심히 사는지 아느냐’고. 미술가도 그 정도로 살면 궁색하게 살 지 않는다고요.” ◇1인 창업가 “새로운 길 열고 싶다” 강연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는 김현정 작가/김현정아트센터 제공배움은 깨달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화가들은 전시회를 열고, 그림을 팔아 먹고 산다. ‘내숭시리즈’가 인기를 끌면서 그녀는 이런 일반적인 길을 따라 그림 파는 것에만 집중한다면 먹고 살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녀는 새로운 길을 열고 싶었다. “재능 있는 친구들도 열정이 사라지는 걸 보며 안타까웠습니다. 화가도 도전할만한 직업이라는 것, 먹고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우리나라 미술시장 규모가 2000억 수준밖에 안 됩니다. 이 작은 파이를 놓고 다투는 것보다 시장 자체를 키워야한다고 생각합니다.”김 작가는 자신을 ‘1인 창업가’로 표현했다. 스스로 없는 길을 만들어간다는 상징적인 의미, 그리고 실제로 ‘김현정 아트센터’라는 회사를 꾸리고 있는 실체적인 의미 둘 다 담고 있는 표현이다. 단순히 작품 활동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미술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강연도 하고 있다. 기업이나 정부기관, 대학 등에서다. 에세이집과 칼럼을 통해서도 대중과 만난다. “기업과의 협업을 통해 광고 이미지를 제작하기도 합니다.” 작년에는 카카오톡 이모티콘 24종을 내놨다. 기존엔 보기 힘들었던 한국화 이모티콘이 나오자 반응이 좋았다. 출시 8개월만에 4000만원어치 가까이 팔렸다. 이것과 작품판매, 강연료 등을 합친 연수입은 대기업 회사원 수준이라고 한다. 카카오톡 이모티콘으로 재탄생한 김현정 작가의 작품/김현정아트센터, 바슈롬 제공팔로어 10만이 넘는 SNS 활용은 ‘대중에게 다가가는 미술’이라는 김 작가의 지향점과 맥이 닿아있다. 대중과 거리를 두는 기존 화가의 이미지에서 탈피한 것이다. 자신이 그린 그림을 SNS를 통해 공유하고, 의견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김 작가는 이를 ‘소셜 드로잉(social drawing)’이라고 표현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관객의 의견을 직접적으로 맞닥뜨린다는 것이다. ‘미술계의 격을 떨어뜨린다’며 튀어보이는 행동에 대한 비판도 있다. 우리나라 미술계에서는 작품을 드러내놓고 적극적으로 알리기보다는 항상 자신을 낮추고 겸손해야한다는 분위기가 있다. “제가 내놓은 작품은 자식이나 다름없어요. 부모라면 자식을 자랑스럽게 얘기를 하고 다니는게 맞는 것 아닌가요?” ◇울림이 있는 그림 그리듯…사회와 함께 호흡하는 작가   ‘본업’인 그림을 향한 그녀의 열정과 고민도 끝이 없다. 일주일에 6~7일 동안 화실로 출근한다. 여기에 박사 과정도 병행하고 있다. 1년 동안 쉬는 날이 손에 꼽는다. “정말 죽을 것 같다고 느껴질 때 쉽니다. 피카소는 그림 자체도 대단하지만 정말 치열하게 살았잖아요. 평생 1만3000여점의 그림을 그렸어요. 세상에 거저 되는건 아무것도 없습니다.”박사과정 신입생인 김현정 작가(왼쪽). 가운데는 후원활동을 했던 강남보육원, 맨 오른쪽은 모교에 장학금을 기탁했을 당시 모습/김현정아트센터 제공자신이 받은 사랑을 사회에 돌려주는 일도 하고 있다. 특히 교육쪽에 관심이 많은 김 작가는 후배 양성을 위해 모교에 장학금을 기부한다. 또한 한달에 한번씩 보육원 봉사활동을 하고 금전적으로도 지원한다. “처음엔 분유, 기저귀 등 필요한 물건을 기부하는 것부터 시작했어요. 더 중요한건 아이들에게 사랑을 주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우리 사회에 정말 애정에 목마른 아이들이 많습니다.” 앞으로의 목표에 대해 김 작가는 “꾸준히 사회에 환원할 수 있는 활동을 하고 싶다”고 했다. “SNS를 통해 감정이 메마른 사람들에게 행복이나 웃음을 안겨주는 것도 큰틀에서 보면 봉사활동의 일환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처럼 틀에 얽매이지 않고 계속 변화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카멜레온 같은 그녀가 다음엔 어떻게 세상을 놀라게할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글 CCBB 에디터 오유교시시비비랩
유재석·박명수 옆에 이 남자, 알고보니 ‘유재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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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유재석이라고 불리는 이 사람의 정체필리핀 유재석 ‘라이언 방’타갈로그어 못해 50번 NG 내기도“전 세계 사람을 웃기고 싶어요”"Korean heartthrob Ryan Bang Bang Bang~(한국의 여심저격남 라이언 방)”특유의 에너지로 방청객과 시청자에게 인사를 건네는 방송인. 그는 필리핀 시청률 1위 예능 프로그램 'It's Showtime'의 유일한 외국인 MC다. 유창한 타갈로그어(필리핀어)와 영어를 구사해 필리핀 사람으로 보이지만 서울이 고향인 한국인이다. 최근엔 무한도전에 출연해 ‘필리핀 유재석’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필리핀 유재석이 되려면 멀었다고 말하는 이 사람. 필리핀 인기스타 라이언 방(Ryan Bang·방현성·27)이다.잇츠쇼타임을 포함해 개그 프로그램 Banana Sundae, 여행 리얼리티 Kaya Mo Bang, 드라마 Sana Dalawa And Puso, 총 3개의 예능 프로그램과 한 편의 드라마에 출연 중이다. 방송 녹화가 없는 날엔 영화촬영을 한다.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쉬는 날 없이 바쁘지만 행복하다. 필리핀의 유재석이 현지서 성공하기까지 겪은 이야기를 들어봤다.라이언 방 / 방씨 제공◇홀로 유학 필리핀 싫어 도망 오기도15살 때 필리핀으로 유학을 갔다. 스스로 원해서 간 것도, 집이 부유해서 간 것도 아니었다. 14살 무렵 부모님은 이혼했고 어린 현성이를 키우기 위해 어머니는 밤낮으로 일했다. 그때마다 라이언은 혼자 집을 지켰다. 어머니는 그 모습이 싫었다. 아들만큼은 제대로 키우고 싶은 마음에 유학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돈을 벌어야 하는 엄마는 한국에 남고 라이언 혼자 필리핀으로 떠났다.그렇게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필리핀 마닐라에서 살았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하숙집에서 생활했다. "아무리 잘 챙겨주셔도 부모님 밑에서 자라는 것과 하숙집에서 생활하는 것의 차이가 컸습니다. 가족이 너무 그리웠어요. 결국 혼자 한국가는 비행기 표를 끊었습니다. 출발 직전에 엄마한테 전화해서 지금 비행기 타고 한국간다고 말했죠."한국에 도착하니 엄마가 공항으로 마중 나와 있었다. 반가워 달려오는 아들에게 엄마는 냉정했다. 그날 필리핀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표를 끊어 돌려보냈다. "그때 저를 받아주면 어머니도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서 그랬다고 말씀하시더군요. 당시에는 그저 어린 마음에 많이 원망 했습니다."방송 촬영 중인 라이언 방 / 라이언 방 인스타그램 캡처◇전교 회장 출마 후 방송 데뷔까지현지 고등학교 적응이 힘들어 2년 후 국제학교로 전학을 갔다. 그때 방황을 끝낸 계기가 있었다. "어느 날 엄마랑 통화하는데 한국에서 힘들게 일하고 있으니까 열심히 공부하면 좋겠다고 하시면서 우셨어요. 그날 이후로 마음잡고 공부를 시작했습니다."2009년에는 성적이 잘 나와 전교 회장 선거에도 나갔다. 국제학교 특성상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이 모여있다. 한국인, 미국인, 필리핀인끼리 따로 무리 지어 노는 것이 대부분이다. 라이언 방은 그 친구들을 함께 어울리도록 만들고 싶어 전교 회장으로 출마했다. 그때 꿈도 찾았다. 처음엔 막연하게 사업가를 하고 싶었다. 연설을 하면서 친구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웃는 모습에 행복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그의 꿈은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것으로 바뀌었다.유창하지 않은 영어와 필리핀어를 써가면서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 덕분인지 전교회장으로 뽑혔다. 그뿐 아니라 인기 서바이벌 리얼리티 쇼 '피노이 빅 브라더(Pinoy Big Brother)'출연 제안을 받았다. 학교를 돌아다니면서 섭외를 하던 작가 눈에 띈 것. 피노이 빅브라더는 30여 명의 학생이 한 집에서 생활하면서 미션으로 매주 2명씩 탈락시키는 경쟁 리얼리티 쇼다. 마지막엔 투표를 통해 가장 인기 많은 출연자 4명을 뽑아 수상을 한다.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아 고등학교 졸업 후 2010년 청소년 편에 출연했다. 경험 삼아 참가했지만 많은 인기를 얻으면서 준우승을 했다. 피노이 빅브라더 1위부터 4위는 필리핀 유명 방송에 한 번씩 게스트로 나간다. 그때 출연한 잇츠쇼타임에서는 한 코너의 심사위원으로 캐스팅됐다. 이후 Banana Sundae, Kaya mo bang 등에서 고정출연 섭외를 받았다.피노이 빅브라더 준 우승 후 필리핀 방송에 게스트로 출연한 모습 / 방송화면 캡처◇타갈로그어 못해 50번 NG 내기도광고는 물론 드라마에도 출연했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는 줄 알았지만 큰 걸림돌이 있었다. 언어였다. 영어는 학교에서 배운 만큼 했지만 필리핀어는 아니었다. "개그프로그램 촬영이 있던 날이었습니다. 촬영 전에 대본을 받았지만 뜻도 모르는 대사를 외워야했어요. 결국 촬영 당시 50번 정도 NG를 냈습니다. 이 프로그램 뿐 아니라 어디서든 필리핀말을 할 줄 몰라 힘들었죠."스케줄이 끝나고 집에 오면 필리핀어가 나오는 TV를 보는 것이 일상이었다. 잘 때도 틀어 놨다. 자신의 대사가 없더라도 다른 출연자 대사를 큰 소리로 읽고 잤다. 실력이 한 번에 늘진 않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틀려도 남들보다 많이 말하려고 노력했다. 언어가 통하지 않을 땐 몸으로 때우기도 했다.잇츠쇼타임에서는 메인 MC가 아닌 한 코너의 심사위원으로 시작했다. 일주일에 한 번 국민 문자투표를 받아 기준에 못미치면 하차해야 한다. 비정규직인셈이다. 그런 자리에서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채로 1년 동안 활동했다. 그의 노력을 알았는지 1년 후 정규직으로 승진했다. "언어를 공부할 때 귀가 뚫린다고 하는데 그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필리핀어가 한국어처럼 다 들렸어요. 1년 만이었죠. 노력하면 이루어집니다. 그 결과 잇츠쇼타임 메인 MC 자리를 잡았죠."필리핀을 방문한 박명수와 산다라박과 함께. 산다라박과는 2012년부터 인연을 맺었다. 필리핀에서 연예 활동을 먼저 시작한 산다라박에게 조언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좌). 무한도전 파퀴아오 편에 통역으로 출연했다(우). / 라이언 방 제공, 방송화면 캡처◇8년째 고정 MC, 목표는 미국진출한국에서는 2016년부터 다큐멘터리 프로그램과 예능 프로그램에 얼굴을 비췄다. 2017년엔 국내 MCN 회사 트레져헌터와 계약을 맺기도 했다. “MCN 회사 측에서 먼저 연락이 왔어요. 부모님께서 제가 활동하는 모습을 볼 방법은 유튜브 밖에 없어서 바로 한다고 했죠.” 필리핀에서 강원도 관광홍보대사인 라이언은 평창올림픽 성화봉송에도 참여했다. 연예계 데뷔 후 처음 출연한 세 프로그램은 8년째 하고 있다. 이밖에도 다수의 드라마, 영화에도 출연했다. 영화에는 항상 조연이나 카메오로 출연해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것이 하나의 꿈이었다. 올해 그 꿈을 이뤘다. 올 3월부터 자신이 남자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영화 촬영을 시작했다.바쁜 와중에도 봉사 활동에 빠지지 않고 참여한다. 동료 MC와 함께 어린이 병원을 찾아 공연하는 것은 물론 기부도 한다. 라이언은 “타갈로그어를 잘하지도 않고 잘 생기지도 않은 저를 이렇게 사랑해주시는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말한다. 필리핀을 웃게 만드는 그의 다음 목표는 미국 진출이다. “전 세계 사람들을 웃게 만들고 싶습니다. 방송인, 영화 주인공의 꿈을 차례로 이룬 것처럼 미국 진출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켜봐 주세요.”글 CCBB 에디터 하늘시시비비랩
'뭐하는 사람이냐'는 소리들었는데···12년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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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음악 사이에서... 순수 DJ로만 12년'꿈과 음악 사이에' 허윤희 PD 겸 DJ목소리·사연·음악 3박자로 동시간대 1위방송 초기에는 혹독한 신고식 치르기도···밤 10시부터 자정까지. 오늘을 마무리하고 내일을 맞이하는 시간에 CBS 라디오 ‘꿈과 음악 사이에(꿈음)’ 허윤희(37)씨가 늘 찾아온다. 그는 보기 힘든 순수 DJ다. 대개 라디오 DJ는 가수나 아나운서, 배우가 맡는다. 하지만 허씨는 입사할 때부터 ‘DJ’로 시작했다. 꿈음을 2007년 1월 1일에 시작했으니 2019년 새해가 밝으면 12년을 꽉 채운다. 5년전부터는 PD도 맡고 있어 작가와 단둘이서 프로그램을 꾸린다. 라디오 ‘황금시간대’로 부르는 밤 10시 방송의 강자다. 수년째 동시간대 청취율 1위를 내주지 않고 있다. 10년전부터 동시간대 경쟁자는 아이돌 슈퍼주니어, FT아일랜드의 이홍기, 이적, 타블로 등 팬층이 두꺼운 연예인들이었다. 지금 그의 경쟁자도 아이돌 B1A4의 산들, NCT, 아나운서 배성재 등 쟁쟁한 유명인사들이다. 꿈음은 왁자지껄한 토크쇼나 게임 없이 부드러운 목소리와 음악만으로 오랜 시간 사랑받았다. 2018년 한국방송대상 진행자상을 받았다.'꿈과 음악 사이에' 허윤희 PD 겸 DJ. /jobsN◇아나운서 꿈꾸다 전문 DJ로 그가 방송을 시작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어쩌다가”라며 되묻는 반응이었다. 그만큼 의외의 직업을 택했다는 뜻이다. “남 앞에 나서서 말하기를 두려워하는 소심한 성격이었어요. 어떻게든 극복하고 싶었습니다. 대학교 3학년 때 방송아카데미에 등록해 아나운서 스피치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아나운서를 꿈꿨습니다.”졸업을 앞두고 1년 내내 시험을 보러 다녔다. 지상파부터 지방 방송국까지 아나운서를 뽑는 곳 어디든 문을 두드렸다. 아나운서는 경쟁률이 높은 분야다. 방송사마다 1년에 남녀 각각 1명씩을 뽑는다. 그마저도 뽑지 않고 넘어가는 해도 많다. 지상파 방송국의 경우 경쟁률이 2000 대 1에 달한다. “계속 떨어지니까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게다가 아나운서의 경우 대학에 들어올 때부터 아나운서 하나만 바라보고 준비하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그에 비하면 저는 늦은 편이었죠.”‘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도전해 합격한 곳이 라디오 방송국인 경기방송이었다. 2005년 3월 허씨는 그렇게 처음 방송에 발을 들였다. 경기 지역의 주요 이슈와 시정 운영 방향을 다뤘다. 1인다(多) 역을 맡았다. 현장에 나가 취재를 하고 원고를 만들어 방송 진행을 했다. “제 성격과 정반대 일이었어요. 예를 들어 경기도에 어떤 정책을 두고 이슈가 있을 때 시민 의견을 들어야 합니다. 택시를 아무거나 잡아타고 기사에게 물어보거나 마트에서 장보고 나오는 분을 붙잡아 인터뷰를 요청해요. 첨엔 수없이 매몰차게 거절당하면서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정말 힘들었는데, 차츰 익숙해졌죠.”2018년 한국방송대상 진행자상을 받았다. /허윤희씨 제공이후 음악방송 진행자 제안을 받고 ‘감성터치’를 진행했다. 진행자·PD·작가로 일하며 1인 제작 시스템 노하우를 쌓았다. 2006년 CBS에서 ‘음악전문 MC’를 뽑는다는 공고가 났다. CBS 라디오 음악방송을 진행할 소속 프리랜서를 뽑는 자리였다. 허씨가 3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발탁됐다. 그는 혹독한 신고식을 치러야 했다. 처음 맡은 프로는 오후 4시 ‘가요 속으로’. 청취자가 중장년층으로 주로 1970~1980년대 노래를 틀었다. 팬층이 두꺼운 라디오는 진행자가 바뀌는 일에 청취자의 반감이 큰 편이다. 게다가 당시 허씨는 20대 중반이었다. ‘어린 친구가 옛날 노래 뭘 아느냐’는 반대에 부딪혔다. ‘순수 DJ’라는 점도 난관이었다. 보통 DJ 외에 본업이 따로 있는 유명인사가 진행을 맡는다. 하지만 허씨는 이름도 낯설고 본 적 없는 신인 DJ였다. 허씨에게 ‘뭐 하는 사람이냐’, ‘부끄럽지 않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그는 실제로 학교 시험공부하듯 방송을 진행했다. 노래방 책자를 펼쳐두고 ‘ㄱ’부터 ‘ㅎ’까지 7080 가요를 공부했다. 스스로 좋아하는 노래보다 부모님 어깨너머 들었던 노래들 위주로 틀었다. 음악을 좋아했지만 결코 즐길 수가 없었다. “어떤 부분이 미흡한지 조목조목 따져서 작성한 2~3페이지 분량의 편지도 받았어요. 방송을 사랑하는 분들의 애정 어린 의견이었죠. 그래서 원색적인 비난보다 더 가슴 아팠어요. 저는 누가 뭐라 하면 더 주눅 들어요. 비판을 많이 받다 보니 위축돼서 목소리도 작아졌습니다. 그러니 또 ‘목소리는 왜 그렇게 기어들어가냐’, ‘졸린다’는 악평을 듣는 악순환의 반복이었죠.”허윤희씨 제공◇“작은 확신만 심어드릴 뿐” 3년 같은 석달을 보내고 ‘꿈과 음악 사이에’ 진행을 맡았다. 그가 학창시절 즐겨 듣던 90년대 음악을 주로 다뤘다. 연령층도 2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했다. 그제야 맞는 옷을 입은 허씨는 훨훨 날았다. “이전에는 악평이 많았다면 꿈음에서는 큰 반응이 없었어요. 청취율도 조금씩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입소문만으로 서서히 단골 청취자들이 생겨났다. 진행을 맡은 지 4~5년째에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차지했다. 90년대 음악을 주로 틀던 꿈음은 이제 2000년대 노래도 즐겨 튼다. 청취자들은 한때 자주 들었지만 잊고 있던 음악이 흘러나왔을 때 ‘아 맞다, 이 노래 있었지’라며 반가움을 느낀다. “되도록 음악을 다양하게 듣고 저만의 목록을 쌓아둡니다. 오래 하다 보니 이젠 ‘어떤 사연에 뒤에 붙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되도록 3주~한달 내 틀었던 음악은 다시 틀지 않으려 합니다. 또 장르·템포·가수 남녀 성비 등을 생각해 다양하게 구성합니다.” 막상 음악을 틀고도 DJ는 음악을 즐길 여유는 없다. “음악 나갈 때 원고 보고, 사연도 봐야 하고 노래도 골라야 해요. 정신없이 움직여야 하죠.” 하루에만 1000~1500개씩 사연이 쏟아진다. 라디오 DJ의 특권은 청취자의 내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것. 특히 감수성이 발달하는 밤 10시에서 자정 사이에는 더욱 속 깊은 사연을 들을 수 있다. 청취자들은 친구나 가족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고민과 걱정을 털어놓는다. 아예 ‘이건 윤희씨에게만 이야기할게요’라고 시작하는 사연도 있다. 10년 동안 청취자들의 울고 웃는 인생사를 함께 했다. 허씨가 사연을 고르는 기준은 ‘공감’이다.10년 전에는 청취자가 보낸 사연 속 고민에 답을 해야 하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 현명한 답변을 주고 싶어 빨리 서른이 넘기를 고대하기도 했다. ‘답을 줘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이젠 공감할 줄 안다.“오히려 저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제3 자라서 고민을 털어놓기에 부담이 없어요. 청취자분들에게 제가 답을 드리진 못해요. 마치 일기를 쓰듯 사연을 적으면서 자신의 고민을 구체화할 수 있어요. 자신이 뭘 원하는지 알 수 있죠. 사연을 보면 모두 답을 갖고 계세요. 저는 작은 확신만 심어드릴 뿐입니다. 대개 우리는 작은 힘이 부족해 앞으로 나가지 못하니까요.” 그는 가방 속에 사연이 적힌 A4용지를 한뭉치씩 넣고 다닌다. 때론 사연을 스마트폰으로 사진 찍어 보관하기도 한다. “방송 중 사연을 소개해도 깊게 읽을 수가 없어요. 그때마다 눈에 확 들어오는 사연을 소개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나중에 읽어보면 눈에 들어오는 사연들이 있어요.” 그는 최근 11년간 꿈음에 도착한 사연을 추리고 모아 ‘우리가 함께 듣던 밤’이란 에세이를 냈다. 방송에 소개하지 못했거나 소개해도 곱씹을 여유가 없던 사연 뒤에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다. 그가 처음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기록한 책이기도 하다. 그는 방송에서 개인적인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다. 책에는 작은 부품공장을 운영하는 아버지와의 어린 시절 추억, 휴가철 할머니 무릎을 베고 듣던 빗방울 소리, 쿠바에서 미국으로 이민 간 친구와의 펜팔 이야기도 들어있다. 라디오 사연은 그 시대를 반영한다. “요즘엔 라디오 그 자체만을 즐기기보다는 야근을 하거나 시험공부를 하면서 듣는 분이 많아요. 유독 힘들다는 사연을 자주 봅니다. 임용고시나 경찰 시험을 준비하는 분들, 직장 그만두고 다른 길에 도전하는 분이 많아요. 또 가정에 집중하다 새직업을 찾았다는 경단녀(경력단절여성) 분들의 사연도 자주 보입니다.”청취자가 보내준 손글씨와 함께. /허윤희씨 제공◇뚜렷한 목표 좋지만 여러 경험해봤으면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출퇴근 시간에 제약은 없다. 방송 시작 1~2시간 전쯤 스튜디오에 도착해 방송을 준비한다. “계약상 월급을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수는 없어요. 방송국 진행자들 끼리도 서로 몰라요. 제 경우 일당으로 계산해서 월급을 받습니다. 가끔 다큐멘터리 내레이션 등의 일을 맡기는 하지만 어쨌든 주 수입은 꿈음이죠. 저는 방송 일에 몸담는 거 자체가 행복해요.”라디오 특유의 감성 탓에 DJ를 꿈꾸는 학생이 많다. 실제 그에게 ‘어떻게 하면 DJ가 될 수 있냐’는 메일과 쪽지가 쏟아진다. 하지만 허씨가 이렇다 할 답을 줄 수는 없다. 대부분 라디오 DJ는 아나운서·가수·배우 아니면 적어도 업계에서 유명인사이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라디오 DJ로 시작해 DJ만 본업으로 하는 건 그가 유일하다. “저는 운좋게 여기까지 왔어요. 아나운서라는 꿈을 이루진 못했지만 오히려 제게 맞는 일을 찾은 거 같아요. 라디오 방송을 재밌어하고 잘한다는 걸 첨엔 스스로 잘 몰랐어요. 나중에 생각해보니 어릴 때 이적씨가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을 매일 듣고 녹음해서 담날에 또 듣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꿈 많은 청춘들이 뚜렷한 목표를 갖는 것은 좋지만 하나에만 맹목적으로 매달리지 않기를 바란다. “‘이게 좋아’라고 하지만 직접 겪어보면 아닌 경우도 많았어요. 꿈음 사연 중에도 몇년을 매달려서 공무원 시험에 합격을 했는데 겪어보니 생각했던 것과 달라 그만뒀다는 분이 있어요. ‘이 길만 가겠어’라고 생각하기보다 이것저것 경험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잘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의 경계를 명확히 나누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직접 해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것 같아요.”글 CCBB 에디터 욘두시시비비랩
평범한 개를 억대 연봉 견공으로 바꾸는 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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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개도 억대 몸값 자랑하게 만드는 이 사람의 정체경찰견 훈련사 최승열씨연기견부터 수색견 훈련까지훈련사 하려면 인품 먼저 갖춰야60회 현장 출동·실종 생존자 2명·사망자 4명·증거품 2건 발견.경기북부지방경찰청에 근무하는 수색 탐지견 미르의 성과다. 미르는 독일산 셰퍼드 한 종류인 마리노이즈로 수색과 탐지에 적합하다. 그러나 마리노이즈라고해서 모든 개가 수색 탐지견으로 활동하는 건 아니다. 짧게는 1년에서 길게는 2~3년의 훈련을 거쳐야 한다. 20년 가까이 이 훈련을 연구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최승열(51)소장이다. 미르도 최소장 밑에서 자랐다.최소장은 1994년부터 코리아 경찰견 훈련소를 운영하고 있다. 수많은 경찰견 및 군견은 물론 TV나 영화에 출연하는 연기견들도 훈련시킨다. 오로라 공주에서 떡대 역을 맡아 월 출연료 1000만원을 받은 시베리안 허스키 통키도 최소장이 훈련시켰다. 그가 키운 경찰견들의 몸값도 1000만원 대가 훌쩍 넘는다. 개뿐 아니라 돼지에게도 수색 훈련을 시켰다. 돼지 이름은 '옥자'. 후각이 개보다 발달했지만 체력이 부족해 증거물 채취 업무 등에 적합하다고 한다. 이렇게 한평생을 동물과 훈련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최승열 소장 / 본인제공◇대학 대신 개 훈련 선택어렸을 때부터 개를 좋아했던 최소장은 건국대학교 축산학과를 지원했다. 그러나 성적이 부진해 떨어졌고 재수를 준비했다. 당시 우연히 개 훈련소에 들렸다가 시범을 보이는 훈련사와 개 모습에 푹 빠졌다. 훈련소장에게 자격증 취득방법, 훈련 방법 등을 물었다."훈련소장님이 다 설명해줬습니다. 그때 정규대학을 가는 것보다 훈련소에서 4년 생활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을 배우고 싶다고 얘기를 했는데 학생은 공부나 하라고 하더군요. 일주일 뒤에 다시 찾아갔죠. 거절당하면 또 찾아갔습니다. 수십 번을 반복하자 그제야 받아줬습니다. 그때가 1981년이었습니다."6개월 동안 훈련법을 배우고 개들과 친해지면서 훈련사 자격증 3급을 취득했다. 이후 군대를 다녀오고 개 훈련 문화가 앞서있는 일본으로 유학을 준비했다. 그러던 중 일본에서 훈련법을 배운 사람을 소개받아 3개월 정도 교육을 받았다. 막상 일본으로 가려고 하니 개들과 정이 들어 떠날 수가 없었다. 결국 한국에 남았다.(왼쪽부터)드라마에 직접 출연한 최소장, 떡대 역을 연기한 통키, 바라 역의 도그 / 본인제공, 오로라 공주 홈페이지◇경북 상주에서 시작, 전설의 고향 출연낮에는 건설 현장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훈련소를 찾아다니면서 훈련법을 익혔다. 개와 관련된 자료를 얻으려 서울 장안동에 있는 한 훈련소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미국에서 개 훈련 교육을 받고 온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에게 일주일에 한 번 3~4시간씩 이론교육을 받고 책을 외웠다. 6개월 후 1994년 경상북도 상주에 훈련소를 차렸다.50평짜리 땅을 빌려 작게 시작했다. 1998년 한 교수님 소개로 TV 프로그램 '전설의 고향' 출연 기회를 얻었다. "대본에는 검둥개3이라고 돼 있는데 당장 진돗개로는 훈련을 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대신 독일산 셰퍼드로 출연을 결정했죠. 5박 6일 동안 촬영했습니다. 촬영을 잘 마친 덕분에 계속 섭외가 들어왔습니다."연기견에게 중요한 것은 원거리 훈련이다. 카메라에 훈련사의 모습이 나오면 안 되기 때문에 멀리서도 말을 듣게 훈련해야 한다. 처음에는 코앞에서 가르친다. 말을 잘 들으면 1m씩 거리를 두면서 훈련한다. 또 누구의 말이든 잘 듣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른 연기자와 호흡을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손동작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닌 오직 말로 다 알아들을 수 있게 가르친다.훈련을 통해 많은 스타 연기견을 배출했다. 드라마 오로라 공주에서 떡대역을 맡은 통키, 식샤를 합시다 바라역을 맡은 도그도 최소장과 훈련했다. 다른 개는 워쇼스키 자매의 미국드라마 센스8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들은 웬만한 연기자만큼 출연료를 받는다. 떡대는 한 달 출연료로 약 1000만원을 받았다. 억대 연봉 견공이다. 어려운 연기를 할수록 출연료도 올라간다. 가장 어려운 연기는 사람을 무는 연기다. 실제로 물지만 상처를 내면 안 되기 때문이다.현장에서 수색견과 함께 / 본인제공◇G20 정상회담 42마리 경찰견 훈련 2008년 경기도 포천에 땅을 사 200평짜리 건물을 지었다. 국내 가장 큰 훈련소 중 하나라고 한다. 그러던 중 2009년 지인에게 G20 정상회담을 위한 경찰견을 모집한다는 말을 들었다. 일반 개를 경찰견으로 훈련시켜야했다. 좋은 품종 그리고 경찰견 조건을 갖춘 개를 찾기 위해 전국을 수소문했다. 1억원을 들여 셰퍼드, 리트리버, 마리노이즈 마리 등 150마리를 샀다.일주일만 데리고 있으면 경찰견으로 성장할 수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다고 한다. "튼튼한 신체구조·대담함·소유욕 이 세 가지를 봅니다. 아무리 다른 부분이 뛰어나도 신체 결함이 있으면 안 됩니다. 총소리에 놀라지 않고 어떤 위험한 곳이든 달려들 수 있는 대담한 성향이어야 해요. 또 공과 음식에 대한 강한 소유욕이 있어야 합니다."1년 동안 훈련해 150마리 중 42마리를 경찰견으로 뽑았다. 그들은 G20 정상회담에서 임무를 수행했다. 금전적으로 손해를 봤지만 자신이 훈련한 개들이 맡은 임무를 수행하는 모습을 보고 뿌듯했다고 한다. 이후로 매년 2~3마리 개를 훈련해 경찰청과 군으로 보내고 있다.실전에 투입하기 위해서는 훈련도 실제상황처럼 한다. 현장에서는 실종자 및 사체를 찾는 일을 많이 하기 때문에 훈련도구도 최대한 비슷하게 만든다. 직접 최소장 본인의 피를 묻힌 헝겊이나 머리카락을 모은다. 장의사가 염할 때 사용한 천을 얻거나 이발소에서 버리는 머리카락을 모으기도 한다. 이렇게 모은 훈련용 도구를 산속에 올라가 땅에 묻거나 나무에 매달아 놓는다. 그리고 일주일 뒤에 그것을 찾아오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훈련받은 개들의 몸값은 1000만원대가 넘는다. 실전에서 실적을 올리는 경우 5000만~6000만원이 훨씬 넘는다고 한다.본인제공◇훈련사 하려면 인품 먼저최소장과 훈련한 10여 마리의 개들이 전국에서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그중 경기북부경찰청 소속 미르도 직접 훈련했다. 미르는 올 6월 발생한 전남 강진 여고생 실종사건에서 시신을 찾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수색견은 경찰 수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최소장은 현실은 다르다고 했다. “경찰견이 적어 아쉽죠. 더 많은 수색견이 함께한다면 빠른 시간 안에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경찰 임무에 투입하는 개들이 늘었으면 좋겠습니다.”14년째 훈련사로서 일하고 있지만 자기개발을 멈추지 않는다. 2007년 강의 요청을 받아 1년 동안 우송정보대학교 애완동물학과 훈련교수로 활동했다. 당시 졸업장이 있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동아보건대학교에 입학했다. 지금은 서울디지털문화예술대학교 애완동물학부 3학년에 재학 중인 동시에 한국사이버복지대학교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끊임없이 배우는 이유는 ‘좋은 훈련사는 죽는 날까지 가장 좋은 훈련법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는 신조 때문이다.“과거의 훈련은 개를 강제로 내가 원하는 대로 따라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개의 심리를 이용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행동하게 하는 것입니다. 강제가 아니라 심리를 이용하는 거죠. ‘앉아’ ‘엎드려’만 반복하는 게 훈련이 아닙니다. 개가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 훈련이에요. 그러려면 계속 배우고 연구해야 합니다.”최소장은 마지막으로 훈련사를 꿈꾸는 후배들을 위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개를 좋아하고 인성과 성품을 제대로 갖춘 사람이 훈련사를 하면 좋습니다. 말 못 하는 짐승을 다뤄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훈련을 잘하려면 훈련사가 개가 되면 됩니다. 개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화를 내지 않고 또 강압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도 훈련할 수 있습니다.”글 CCBB 에디터 하늘시시비비랩 
“제 직업 1등 조력자는 바로 '시어머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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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품영양학 대학원생, 매일 시어머니와 대화하는 직업 찾은 사연매일유업 최지혜 연구원 인터뷰중장년 영양식 '셀렉스' 개발 주역최지혜 매일유업 선임연구원./매일유업 제공최지혜(31)씨는 매일 시어머니와 대화를 한다. 일과 가정을 함께 꾸려나가는 워킹맘인 최씨의 가장 큰 조력자가 시어머니다. 시어머니는 최씨의 28개월 짜리 아들을 돌봐주는 한편, 매일 같이 최씨의 연구 결과물을 평가해 주는 ‘제1 평가단’ 역할도 맡고 있다. 최씨의 직업은 매일유업 식품 연구원. 그 중에서도 중장년층을 타깃으로 내놓은 영양식 ‘셀렉스’ 개발을 맡았다. 현대인이 부족하기 쉬운 단백질을 보충해주는 음료·분말·시리얼바 시리즈다. 올해 4분기 출시돼 입소문을 타고 있다. 지난 2018년 12월 20일 서울 종로 매일유업 사옥에서 최씨를 만나 연구원의 삶에 대해 들어봤다. 최씨는 석사과정(서울대 식품영양학과) 졸업 후인 2012년 매일유업에 입사해 지금은 선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괄호 안은 편집자 주)- 당신은 누구인가. “50세 이상 중장년층을 위한 단백질 드링크를 만드는 연구원이다. 이전에는 분유 개발을 했다.”   - 시니어 영양식은 아픈 사람이 먹는건가. “아니다. 건강한 중장년층이 먹는 식품이다. 그동안 시니어 영양식은 드링크 등 ‘환자식’ 외에는 거의 제품이 없었다. 이를 바꾸려는 게 영양식 ‘셀렉스’ 시리즈다. 견과류 맛이 나는 파우치 형태 음료, 등산 중 간단히 씹을 수 있는 시리얼바, 분유처럼 타먹을 수 있는 분말(건강식품) 등 3종류다.”(식품업계에서는 노인식 개발이 신성장동력으로 떠오르고 있다. 초고령사회를 대비하기 위해서다. 농림축산식품부 조사에서는 실버푸드 시장이 2011년 5104억원 규모에서 2017년  1조1000억원으로 성장했으며, 2020년 16조원 규모로 급성장할 것으로 전망한다. 현재는 CJ프레시웨이·풀무원·아워홈 등이 씹기 편한 연화식을 개발해 요양병원 등에 납품하고 있다.)- 비만 인구가 늘어나는 영양 과다 시대에 영양식이 꼭 필요한지 의문도 든다. “비만 인구는 늘어나지만 필요한 영양소를 모두 챙겨먹는 것은 아니다. 한국인은 탄수화물에 치우친 식단을 유지한다. 편의점에서도 빵을 사먹고, 햄버거집에 가도 포테이토와 번(햄버거빵)을 섭취하는 비율이 고기와 요거트 위주로 먹는 미국보다 높다. 단백질의 섭취는 제한적이다. 물론 닭가슴살과 살코기 위주로 먹고 계란 흰자와 우유를 마시는 등 식습관으로 보충을 할 수 있겠지만 매우 번거롭다. 게다가 노년기로 갈수록 채식과 소식을 하는 사람이 많은 반면, 노화에 따른 근감소증(사코페니아)에 대해서는 마땅한 처방약이 없다. 그래서 단백질 영양식 시장이 승산 있다고 판단했다.”(보건복지부와 한국영양학회에서 발표한 ‘2015 한국인 영양소 섭취기준’에 따르면 우리나라 노년층의 1일 단백질 권장 섭취량은 남성 55g, 여성 50g이다. 하지만 국내 노년층 절반 이상이 단백질 1일 권장 섭취량을 먹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양식은 맛없다는 인식이 있는데.“그걸 바꾸려고 1년 이상 노력했다. 친근하면서도 튀지 않는 맛으로 만들었다. 가령 에너지바는 견과맛, 드링크는 견과류와 곡물맛이다. 분말가루는 (지금 중장년층이 유년기였던 50~60년대 어려웠던 시절의) 향수를 감안해 타먹는 분유맛 내지는 자판기 우유맛을 약간 살려서 출시했다.”- 반응은 어떤가. “건강한 노인층을 겨냥한 식품이 전무하다. 어르신들 사이에서 ‘고맙다’ ‘잘됐다’ 등의 반응이 꽤 있다. 실제로 93세 어르신이 회사 본사에 찾아와 ‘신문 기사를 보고 물건을 사려는데 귀가 잘 안들려 전화 주문을 못해서 직접 왔다’고 한 적이 있다. 70세 고객분도 대표이사실로 격려 편지를 보내왔다.”최지혜 연구원./매일유업 제공◇“연구원도 영업현장 나가요” 왜?어릴 적 최씨의 꿈은 교수였다. 그런데 우연찮은 기회로 기업체로 이직을 하게 됐다. - 식품회사 연구원이 된 이유가 있나. “본래는 교수를 꿈꾸고 박사과정 진학을 준비했다. 그런데 기업에서 경험을 쌓으면 좋을 것 같았다. 또한 석사 과정 재학 시절 매일유업 연구원들이 낸 연구논문도 몇 편 읽어본 적이 있다. 기업에서 꾸준히 논문을 내고 있다는 점이 좋아 보이기도 했다.”- 연구원 입사과정은 어땠나. “일반 대졸 공채와 거의 같다. 다만, 석사 논문 주제에 대해 자신이 발표하는 평가가 추가로 있다.”- 입사 후 본인의 대표 업적은. “입사 후 몇 년간 특수분유 개발을 맡았다. (국내 분유 회사 중 매일유업이 유일하게 특수분유를 생산하고 있다. 특이체질 어린이를 위한 분유라고 보면 된다.) 그 중에서 2013년 개발한 중국 어린이용 무(無) 유당 분유가 내 대표작이다. 중국 아기들은 설사를 많이 한다. 바이러스에 취약해서다. 그런데 분유의 유당 성분이 설사병 호전을 방해한다. 그래서 나온 것이 무유당 분유다.”- 하루 일과는 어떤가. “일과가 없다. 제품 개발 전에는 매일 연구와 실험을 한다. 제품 개발 중에는 하루 종일 실험을 하거나, 공장에 가서 계속 시제품을 만들고 연구한다. 제품 개발이 끝나면 영업도 나간다.”- 연구원이 세일즈를 하나. “세일즈를 직접하는 것이 아니다. 영업사원이 소비자 대상 이벤트를 할 때 같이 나간다. 일반 고객들이 궁금해 하는 영양학적인 문제나 제품에 대한 의문점 등을 답해주는 시간이 많다. 내가 답변하는 것에 따라 매출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 열심히 준비해 간다.”◇연구원도 워킹맘…“분유 연구에 도움돼” 위안  연구원 등 전문직이라고 하더라도 워킹맘의 고민을 비켜갈 수는 없다. 최씨 역시 시부모님이 아이를 돌봐주지만, 퇴근 후 아이를 돌보는 것은 오롯이 최씨 부부의 몫이다. - 연구하면서 애를 보려면 힘들지 않나. “힘들다. 하지만 내가 일하는 회사와 연관이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육아를 하고 있다. 또한 아이를 키워보고 분유를 먹여보는 것이 연구원에게도 큰 도움이 된다.”- 어떻게 연관이 있었나. “아기 덕분에 분유와 녹변(분유를 먹은 아기가 녹색 용변을 보는 것)의 상관관계에 대해 미세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아기에게 여러 가지 분유를 먹여보면서 변의 상태를 관찰했다. 유산균과의 배합에 대해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육아휴직 이후 팀이 바뀌어 지금은 분유를 안 만든다.”- 식품연구원으로서 직업병이 있다면.“마트에서 장을 볼 때 고르는 시간보다 제품 겉면에 있는 표시사항을 정독하는 시간이 더 길다. 타사 제품을 비교하면서 먹다보니 다이어트가 어렵다.”- 이 길을 걸으려는 후배들에게 조언한다면. “식품은 많은 사람의 건강과 삶에 직결되는 산업이다. 그런 점에서 보람이 있다. 분유 같은 제품은 내 아이가 먹는다는 자부심도 있다. 하지만 그만큼 다양한 사람이 이 식품을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해 고민도 많다. 그 고민을 바탕으로 꾸준히 연구하는 사람이면 좋겠다.”글 CCBB 에디터 밥값시시비비랩
박명수와 어깨 나란히 한 서열 1위 개그맨의 놀라운 사업근황
CCBBLAB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8.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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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에 손만 대면 망하던 한 개그맨이 있습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그에게는 시련은 4번이나 찾아왔었죠. 첫 사업은 맛집 주방장 이모님을 초빙해 시작한 감자탕 집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방장은 3개월 만에 돌연 퇴직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첫 실패를 발판 삼아 호기롭게 친구와 함께 실내포차를 엽니다. 실내포차는 매출도 잘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 매출은 그들의 건강과 맞바꾼 것이었죠. 유명인이었던 그들이 손님들과 함께 술을 마셔야 매출이 올라갔고 그들은 술병 때문에 더 이상 사업을 이어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 뒤로 골프장 스낵바, 닭 가슴살 제조업까지 다양한 분야의 사업에 도전했지만 줄줄이 실패의 쓴맛을 맛봤죠. 그런 그가 드디어 5번째 도전에서 빛을 봤습니다. 그는 유명 맛 집의 CEO가 되었고 책을 작가가 된 그는 바로 메밀국수 전문점 '메밀꽃이 피었습니다'의 개그맨 고명환입니다.1. 벤치마킹의 신출처: 블로그 룩하마이너스 손이었던 그가 어떻게 대박 맛 집의 CEO가 되었을까요? 그는 개그맨 생활을 하며 전국을 돌아다닌 경험을 살려 전국 맛 집들의 장점들만 벤치마킹해 메뉴를 개발했습니다. '메밀꽃이 피었습니다'의 메밀국수는 마산의 온메밀을 벤치마킹했지만 자칫 버릴 수도 있는 멸치육수가 아닌 홍게를 이용해 달짝지근하지만 시원한 그만의 특색을 살린 육수 개발에 성공합니다. 우리나라는 작지만 각 지역의 색이 강하기 때문에 지역의 음식을 콘셉트와 잘 녹여낸 것이죠.2. B급 상권의 반란출처: 양과장의 행복 바글바글 이야기그의 메밀국수 전문점은 시내에서 차로 15분, 상권이 좋은 편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만큼 큰 매장 면적과 30개가 넘는 테이블을 배치할 수 있어죠. 메밀국수의 성수기는 4월 초에서 추석 연휴까지,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1년 치 매출 달성해야 합니다. 출처 티스토리 aodudals때문에 유동인구는 적지만 테이블을 많이 넣을 수 있는 B급 상권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또 그는 회전율을 높이기 위해 선결제. 선주문 시스템을 도입합니다. 메밀면은 보통 국수 면 보다 두껍기 때문에 삶고 익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려 고안해낸 아이디어죠. 그는 더 이상 바지사장이 아닌 A-Z까지 가게의 시스템을 이해하고 운영하는 진정한 CEO가 된 것입니다.3. 1000권의 책 속에서 찾은 해답출처: 인터파크 도서그가 네 번의 실패를 맛보고 다섯 번째 창업에 도전하게 된 계기는 그가 평생을 몸담았던 개그 프로그램의 폐지였습니다. 결혼을 앞둔 상황에서 개그 프로그램 폐지는 그에게 큰 위기로 다가왔고, 누구보다 절박했죠.  그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앞서 경험한 것처럼 감 하나로 사업을 시작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해답을 인문학에서 찾기 시작합니다. 독서를 통해 자기 자신에게 몰입하기 시작했고 그 속에서 사업에 성공할 수 있는 노하우를 배우게 됩니다. 그가 실패를 극복할 수 있었던 성공 노하우는 뭐였을까요?목표를 명확하게 정해라사업으로 터무니없는 꿈과 희망을 따라가다 보면 쉽게 지치게 되죠. 40대인 그가 피나는 훈련을 하더라도 단거리 챔피언 우사인 볼트를 이길 수 있을까요? 절대 불가능합니다. 그에게 현실적인 목표는 마라톤 풀코스 완주 정도가 되겠죠. 목표 설정은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설정하되 실현 가능성이 가장 중요합니다.그러려면 자기 자신을 먼저 아는 게 제일 먼저겠죠. 그가 추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책, 스스로 생각과 사색을 통해 자신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인문학이란 인간이 그려온 무늬를 공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에 대해서도 탐구하지만 동시에 '인간'자체, 타인에 대해서도 깊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이 과정이 바로 트렌드를 읽어가는 능력을 키우게 되는 것이죠. 힘든 일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이라는 것을 명심해라출처: KBS요식업으로 예를 들면 직접 음식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기본 상식입니다. 그래서 도전하기도 어렵고 많이 기피하기도 합니다. '힘들어서 안 한다'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몸은 편하지만 손님이 없어 정신적으로 불행하다면, 차라리 몸은 좀 힘들더라도 성공을 통한 정신적 행복을 좇는 편이 훨씬 건강합니다. 노력이 들어가는 모든 일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고 싶다면 고통을 인내하고 실행으로 옮길 용기와 열정이 필요하죠. 힘든 일을 하는 것은 너무 쉽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확신을 갖고 당장 행동으로 옮겨보세요.스니저(Sneezer)를 이용해라출처: 한국강사신문스니저는 주변 사람에게 새로운 정보를 빠르게 확산 시키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제는 자기 스스로 하는 어필은 소비자에게 통하지 않죠. 그렇기 때문에 그가 생각해낸 것은 바로 블로그 이벤트와 그가 직접 하는 다이어트 강좌입니다. 그의 메밀 국수집은 다이어트 강좌를 하고 핸드드립 커피를 내립니다. 입소문은 어떤 광고보다 효율성이 높다는 장점이 있죠.퍼플 카우를 등장시켜라출처: 고양신문마케팅 전문가이자 베스트셀러 작가, 세스 고딘은 가족 여행 중 아이들이 창밖에 나타난 황색 소를 발견한 직후엔 열광하지만, 몇 시간 뒤 관심이 사그러든 아이들을 보며 커브길을 돌았을 때 보랏빛 소가 나타나면 아이들이 얼마나 좋아할까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는 이게 자신이 생각하는 마케팅 기법의 전부라고 설명합니다. 등장할 때 센세이션을 일으켜도 익숙해지면 지루해지기 마련이죠. 3년 동안 큰 변화가 없던 기존의 메뉴들이 황색 소라면, 그는 보랏빛 소 역할을 해줄 판 메밀, 메밀 콩국수 등 신 메뉴 개발을 게을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글 CCBB 에디터 스마트인컴시시비비랩
계산하기 귀찮아 가격통일했더니 대박난 국민 생필품 브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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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답안나오는 평범한 아저씹니다.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을 포함한 글로벌 시장에서도 어느덧 저렴한 가격으로 생활에 필요한 대부분의 물품들을 구매할 수 있는 '동네 만물상'이 된 다이소. 공격적인 전략과 박리다매에 가격 통일이라는 파격적인 마케팅으로 다이소는 일본 대표 유통 브랜드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였는데요. 이러한 다이소의 아이디어는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것일까요? 바로 다이소의 창업주이자 현 최고경영자인 야노 히로타케(矢野博丈, やの ひろたけ)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지하철 잡상인에서 계산이 귀찮아 가격 통일했다는 다이소로 큰 성공을 거둔 그에 대해 한번 알아볼까 합니다.일본 주요 도시에 가면 어디에서나 쉽게 ‘100엔샵’을 만날 수 있습니다. 천원샵이란 1000원 내외의 저렴한 생활용품을 대량으로 유통하는 슈퍼마켓을 의미하는데요. 이러한 사업형태는 1970년대에 처음 등장해 1990년 초 일본 거품경제 시기에 급성장했습니다. 그렇다면 야노 히로타케은 처음부터 100엔샵으로 성공하게 되었을까요?일본의 명문 사립대 주오대학 이공학부의 토목공학과를 졸업한 그는 아내를 만나면서 평범한 삶이 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히로시마 지방 유지의 딸이었던 아내 덕분에 물려받게 된 방어 양식장으로 사업을 시작했지만 곧 실패하며 3년 만에 700만엔(약 7천만원)에 이르는 엄청난 빚을 지고 빚쟁이들을 피해 다니는 처지에 몰렸는데요.자금 사정이 어려운 기업의 재고품을 저렴하게 매입해 판매하는 지하철 잡상인빚을 갚으며 세일즈맨, 화장지 교환업, 볼링장 아르바이트 등 9번의 이직으로 모은 종잣돈으로 다양한 잡화를 이동하면서 판매하는 야노 상점을 창업했습니다. 이 야노 상점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자금 사정이 어려운 기업의 재고품을 저렴하게 매입해 판매하는 것으로 행상인, 말 그대로 지하철 잡상인이었습니다. 생활고로 아픈 아내 몫까지 홀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상품 판매와 회계, 정리 등을 모두 하던 그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모든 제품의 가격을 원가와 관계없이 100엔으로 매긴 후 이를 판매하러 다니기 시작하였는데요. 바로 이것이 다이소의 시작이었습니다.가격 통일은 온전히 그의 아이디어는 아니었습니다. 1970년대 이미 모든 제품의 가격을 하나로 통일하고 이를 판매하러 다니는 행상인들이 존재했지만 100엔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는 사람은 야노 사장 한 명이었죠.1970년대 후반 오일쇼크 등의 문제로 제품 원가가 상승하자 이러한 균일가 행상인들은 자취를 감추었고 야노 사장은 비슷한 처지의 행상인끼리 모여 다니며 특정 장소를 하루 정도 임대해 판매를 진행하고 다시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려 실행하였습니다. 그렇게 시작하며 회사는 작지만 물건만큼은 크게 다루자는 뜻으로 다이소라 이름 지었습니다.일본 경제가 10년이 넘는 장기 침체에 빠져들게되며 소비자들은 저렴한 가격에 제법 쓸만한 품질의 제품이 많은 다이소로 몰려들기 시작그렇게 슈퍼마켓의 주차장에서부터 판매를 시작한 다이소는 주부들의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며 인기를 끌었고 적지만 벌게 돈으로 일본에서도 외진 다카마쓰시라는 곳에 첫 매장을 냈습니다. 때마침 일본의 거품 경제가 꺼지고 일본 경제는 10년이 넘는 장기 침체에 빠져들게 되며 소비자들은 저렴한 가격에 제법 쓸만한 품질의 제품이 많은 다이소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5000만 엔에 불과했던 자본금은 27억 엔으로 급증했고, 2000년에는 일본 '벤처 오브 더 이어'를 수상하기도 했는데요. 특정 제품을 대량으로 구매함으로써 해당 제품을 보다 저렴하게 공급받는 업계의 큰 손으로 자리 잡은 다이소는 백화점, 대형마트, 편의점에 이은 4번째 슈퍼마켓 모델로 인정받고 있습니다.다이소는 현재 일본에만 3150개, 전 세계적으로 4000개의 매장을 보유한 글로벌기업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UBS그룹 AG에 따르면 다이소는 2016년을 기준으로 6000억 엔(약 6조 원)의 매출을 올린 것으로 분석되는데요. 이러한 매출을 토대로 야노 사장의 재산은 19억 달러(약 2조 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고 합니다.방어 양식에 실패해 지하철 잡상인을 하던 청년 사업가가 50년간의 노력 끝에 다이소라는 새로운 사업을 개척한 억만장자의 반열에 오른 그의 삶은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그의 성공이 일본 경제와 맞물린 천운이든 노력의 산실이든 간에 현재 야노 사장의 다이소는 전 세계에서 많은 직원들에게 일자리를 창출해주고 있으며 저렴한 가격에 다양한 생필품을 판매하는 곳으로 급성장하였습니다. 자신은 평범한 아저씨임을 자처하는 그이지만 실패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동업자와의 상생을 통한 사업 발전과 공격적인 마케팅을 보며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분명 있어 보이네요. 이상 계산하기 귀찮아 가격 통일했더니 대박난 이 브랜드였습니다.글 CCBB 에디터 스마트인컴시시비비랩
이수만 회장님이 SM 직원들에게만 주는 특별한 복지혜택
CCBBLAB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8.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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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이 좀 주춤하나 싶은 순간들도 있었습니다. 자유로운 아티스트들이 활약하는 YG가 승승장구하고, 전 세계를 사로잡은 BTS를 앞세운 빅히트가 주목받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줄곧 아이돌 산업을 주도해온 SM이 그렇게 호락호락 물러날 리가 없죠. 한국 거래소에 따르면 SM의 주식은 지난 2018년 11월, 2011년 이후 6년 만에 최고가를 경신했다는데요. 코스닥 지수 상승률도 JYP나 YG의 상승률을 큰 차이로 압도했다고 합니다. 지난 2018년8월 말 이후 JYP에 엔터주 시가총액 1위를 내줬던 SM은 '대장주' 타이틀도 다시 탈환했죠.출처: SM TOWN회사가 이렇게 잘 되는데, 주주님들만 행복해서는 안 되겠죠? 오늘의 SM을 만드는 데는 소속 아티스트들과 직원들의 공이 컸으니까요. 그럼 엔터테인먼트계의 1위 회사는 동고동락한 직원들에게 어떤 복지 혜택을 제공하는지, 지금부터 살짝 들여다볼까요?1. 아티스트에게 주는 혜택아티스트 포인트SM은 2012년 청담동 금싸라기 땅에 지어진  대지 654㎡, 지하 2층~지상 5층의 빌딩을 사들입니다. 이 빌딩을 리모델링 한 것이 현재의 SM 사옥인데요. 미래지향적인 디자인이 돋보이는 이 건물 안에는 대리석과 핑크 톤으로 꾸민 예쁜 썸카페와, 아이돌 이름과 사진을 패키지에 입힌 마트 상품을 파는 썸마켓 등이 입점해 있죠. 출처: 인스타그램 @adcom99 / @woori_ssi음료나 디저트뿐 아니라 치킨, 버거, 파스타 등의 음식도 판매하는 썸카페의 메뉴들은 약간 높은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다는데요. 청담동이라는 지리적 조건을 생각하면 이해가 가는 정도이지만, 매일 가서 사 먹을 가격은 아니라는 이 카페가 SM 소속 아티스트들에게는 무료입니다. SM과 정식으로 계약을 맺고 소속 아티스트가 되면 각자의 이름으로 포인트를 쌓아 주는데요. 그 포인트로  썸카페, 썸마켓 등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이죠. 구내식당 무료또한 강호동 씨는 한 방송에 출연해 "YG 구내식당이 맛집이라고 소문났지만 SM도 맛있다. 소속 아티스트는 구내식당이 무료이고, 주변 제휴 맺은 식당은 50% 할인이다. 이는 소속 아티스트의 가족도 이용 가능한 혜택"이라며 소속사인 SM이 제공하는 복지혜택에 대해 자랑했는데요. 이에 함께 출연한 승리 씨가 "우리는 이름만 YG 패밀리고 가족은 안 해주던데..."라며 부러움을 표시해 웃음을 주기도 했습니다. 주차 무료서울에서 자가용으로 출퇴근하시는 분들은 항상 주차난으로 골머리를 앓죠. 쇼핑인구가 몰려드는 청담동의 경우 더 심할 텐데요. 땅값이 비싸다 보니 주차장을 매일 이용해야 한다면 주차비용, 발레 비용도 만만치 않을 겁니다. 그런데 SM에서는 회사에 등록한 차의 경우 주차가 완전히 무료라고 합니다. 별거 아닌 혜택인 것 같지만, 대기업들도 직원들에게 일정한 주차비를 받는다는 걸 생각해보면 청담동에 위치한 사옥에서 무료주차를 제공하는 건 꽤나 후한 복지입니다.미국에서도 극찬한 트레이닝 시스템무료로 뭔가를 제공해 주는 것도 좋지만, 사실 회사가 소속 아티스트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복지는 '잘 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이겠죠. SM의 트레이닝 시스템은 미국 ABC 뉴스에서도 다룬 적이 있을 정도로 정평이 나 있는데요. 최고의 선생님에게 보컬, 악기, 댄스 트레이닝은 물론 외국어와 퍼블릭 스피치 등의 수업도 받을 수 있습니다. 이제 K팝 아이돌에게 해외 진출은 당연한 수순이 되었으니까요.출처: 아이돌맘아이돌 그룹 블랙비트 출신의 장진영 씨는 엑소와 레드벨벳 등의 보컬 트레이닝을 맡은 SM 소속 트레이너인데요. 그는 '노래하는 사람'에서 '노래 들려주는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자신이 노래를 가르치는 목적이라고 말합니다. 장진영 씨는 엑소의 수호 씨를 트레이닝을 통해 크게 발전한 예로 꼽기도 했는데요. 수호는 연습생 시절 보컬 라인이 아니었으나 5, 6년간의 철저한 연습으로 엑소에서 보컬을 담당하게 되었답니다.  2. 일반 직원에게 주는 혜택소속 연예인의 성패에 회사의 명운이 걸려있는 만큼, 사실 SM 엔터테인먼트의 복지혜택은 주로 아티스트들에게 집중되어 있는 편입니다. 그렇지만 SM 직원만이 가질 수 있는 이점이 분명히 있기에 뮤직·엔터 비즈니스로의 진입을 꿈꾸는 취준생들이 SM 입사를 열망하는 것이겠죠. SM 최고의 장점은 '일을 폭넓게, 그리고 빨리 배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젊은 조직이기 때문에 회사 분위기가 자유로운 편이고, 연차가 낮아도 능력만 증명하면 중요한 업무를 맡을 수 있죠. 다방면으로 사업이 진출해 있어 여러 가지 일을 배우는 것도 가능하고요. 워라밸을 중시하기보다는 이 일을 정말 좋아하고, 이 바닥에서 꼭 성공해보겠다는 사람들에게 최적의 회사라는 의견이 다수였습니다. 치열한 엔터테인먼트 사업에서 버텨내려면 건강과 체력은 필수겠죠. SM은 전 직원에게 11개 병원에서 30만 원 상당의 건강검진을 받을 수 있는 복지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장기근속자에게는 현금을 지급하는 휴가와 리조트 회원권 등이 제공되기도 하고요. 이는 보통 대기업에서나 제공하는 혜택으로, SM은 소속 아티스트들이 모두 단단하게 자리 잡아 적자 걱정이 없는 회사이기 때문에 이런 복지가 가능한 거라고 하네요. 3. SM 타운 모두가 떠나는 해외 워크숍출처: SM TOWN아티스트 따로, 일반 직원 따로 받는 혜택도 중요하지만, 모두 한솥밥 먹는 식구인 만큼 다 같이 보내는 시간도 있어야겠죠. SM은 지난 2016년 8월, 창립 20주년을 기념해 전 직원 워크숍을 하와이에서 진행했습니다. 이수만 회장을 비롯해 350여 명의 SM 직원과 보아, 엑소,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f(x) 등의 스타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는데요. 출처: SM TOWN푸른 바다가 바로 내다보이는 리조트에서 꿀같은 시간을 보낸 이들은 회식비를 걸고 팀을 나눠 'SM 올림픽'을 진행하고, 석양이 물드는 아름다운 해변가에서 저녁 만찬을 즐기기도 했다는데요. 직원, 아티스트 모두의 친목을 다지는 기회가 되었겠네요.출처: 소녀시대 유리 인스타그램지금까지 SM이 소속 아티스트와 직원들에게 제공하는 혜택에 대해 알아보았는데요. SM은 90년대 말  H.O.T, S.E.S 등의 그룹을 잇따라 내놓으며 K팝 아이돌의 원형을 만든 기획사입니다. 때문에 회사 내에 후배들을 이끌어주고 도와줄 수 있는 '조상님'들이 많이 계신 것도 장점이죠. 아이돌 조상님과 꿈나무, 일반 직원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SM의 꿀 떨어지는 복지 혜택, 앞으로는 뭐가 더 나올지 기대해 보겠습니다.글 CCBB 에디터 스마트인컴시시비비랩
5년 전과 다르게 예쁜 속옷이 더 이상 팔리지 않는 이유
CCBBLAB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8.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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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입을 수도 없고...브래지어는 우리 여성들의 친구이자 적입니다. 처진 가슴을 예쁘게 모아주기도 하고, 없던 볼륨을 뿅 하고 만들어 주기도 하는 브래지어는 때때로 우릴 숨 막히게 하고 답답하게 하죠. 괜히 화려한 레이스나 리본이 달려 가격만 비싸지고, 오히려 겉옷의 라인을 망치기도 하고요. 그렇다고 안 입고 나가자니 혹시 비칠까 봐 걱정되죠. 벌거벗고 나가는 기분도 들고요. 말그대로 있어도 불편, 없어도 불편한 것이 브래지어입니다. 이런 여성들의 심정을 반영한 것인지, 요즘 속옷 시장의 판도가 조금씩 바뀌고 있습니다. 화려하고 섹시한 속옷 대신 편하고 가벼운 속옷이 각광받기 시작한 것이죠. 이런 변화가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지금부터 살짝 들여다보겠습니다.모든 모델들의 꿈, 빅토리아 시크릿'엔젤' 이라고 들어 보셨나요? 미국의 속옷 브랜드 빅토리아 시크릿의 런웨이에 서는 모델들을 일컫는 별명인데요. 엔젤이 되는 건 쉬운 일은 아닙니다. 보통 모델들처럼 키가 크고 날씬해야 하는 것은 물론, 속옷 브랜드의 특성에 맞게 적당한 볼륨도 있어야 하죠. 게다가 하이힐을 신고 본인 덩치의 배는 되어 보이는 날개를 단 채 런웨이를 걸어야 하니 균형감각과 근력도 좋아야겠네요. 이렇게 까다로운 조건을 만족해야 엔젤이 될 수 있는 만큼, 빅토리아 시크릿의 쇼는 많은 모델들의 꿈이기도 했습니다. 핑크색 새틴 가운을 입고 백스테이지에 앉아 그야말로 '천사'같은 미소를 날리는 그녀들의 모습이 소비자들을 강렬하게 매혹하기도 했고요.이런 명성에 걸맞게 빅토리아 시크릿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전 세계 속옷 시장의 1/3을 점유하고 있었죠. 하지만 재작년부터 매출 상승이 주춤하더니 급기야 지난해에는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섰습니다. 매출만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빅토리아 시크릿 모기업의 주가도 40%가량 곤두박질쳤죠. 지난 2018년 12월 2일 저녁 10시에 방영된 2018 빅토리아 시크릿 패션쇼도 역대 최저 시청률을 기록했다는데요. 세계 최고의 모델들만 기용하는 것도, 세상 어디에도 없는 화려한 쇼를 펼치는 것도 모두 그대로인데 왜 이런 일들이 생기는 걸까요?빛좋은 개살구는 그만빅토리아 시크릿 속옷은 확실히 예쁘긴 합니다. 반짝거리는 장식도 많고요. 색상도 화려하고 와이어도 짱짱하죠. 입으면 모델만큼은 아니어도 어딘가 섹시해진 기분도 드는데요. 하지만 그게 다 잠깐입니다. 샤워하고 나와 속옷을 입고 겉옷을 걸치기 전 한 1분 정도? 출처: 인스티즈나머지 시간은 그렇게 유쾌하지 못한데요. 밥 먹고 나면 항상 얹힌 것 같고, 찌는 여름에는 너무너무 덥습니다. 레이스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여줄 용도가 아니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요. 얇은 겉옷 위로 울퉁불퉁 보기 싫은 자국만 만들죠.출처: 인스티즈이런 기분이 혹시 여성들의 착각은 아니냐고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가슴 바로 아래를 브래지어 밴드가 조이고 있어 소화 장애를 일으키고 혈액순환 장애를 유발한다는 것은 오래도록 정설으로 받아들여져 왔죠. 게다가 금속 와이어가 림프의 흐름을 방해해 유방암에 걸릴 확률을 높인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는데요. 그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브래지어를 24시간 착용한 여성의 유방암 발병률은 전혀 착용하지 않는 여성에 비해 무려 125 배나 높다고 합니다. 예쁘다는 기준의 재정의출처: 인스티즈유방암에 걸릴 수도 있다는데, 그럼에도 여성들이 목숨 걸고 와이어가 들어간 브래지어를 입어 온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래야 한다'라고 들어 왔기 때문입니다. 브래지어를 하지 않으면 가슴이 처지고, 처진 가슴은 예쁘지 않다고 배웠죠. 가슴이 작은 여성들은 영혼까지 끌어 모아주는 와이어와 볼륨을 더해주는 패드, 일명 '뽕'이 부착된 브라를 하라고 권유받는 일이 흔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전부터 다른 움직임이 감지되었습니다. 나는 나다울 때 가장 예쁘고, 자연스러운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는 의식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죠. 체형의 다양성을 받아들이자는 캠페인, 광고가 늘어났고 다수의 브랜드에서 플러스 사이즈 모델을 기용하거나, 사이즈의 범위를 확대하기도 했는데요. 이런 움직임을 반영하듯, 속옷 시장에도 차츰 변화가 생겼습니다. 림프를 막는 와이어가 빠진 와이어리스 브라, 와이어가 없을 뿐 아니라 두꺼운 패드 없이 홑겹으로 만들어 통기성이 좋은 브라렛 등이 하나 둘 등장하게 된 것이죠. 팬티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작고 소재도 약해 신체의 보호와 위생이라는 본래의 기능을 할 수 있을까 싶던 팬티들은 차츰 신축성이 좋고 몸을 제대로 감싸는 형태로 변해갔습니다. 사이즈도 다양해졌는데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는 비싼 브랜드에서나 가뭄에 콩 나듯 C컵이나 D컵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밑 가슴둘레는 작고 컵만 큰 브라는 아예 없었고요. 해외 브랜드 제품들도 한국에는 작은 컵 위주로만 수입되었죠. 지금은 C컵 이상을 취급하는 브랜드들도 많아졌고, 작은 밑 가슴둘레에 큰 컵, 즉 65F 컵까지 제작하는 업체들도 생겼습니다. 속옷은 입는 사람이 중요해이러니 빅토리아 시크릿이 휘청하지 않고 버틸 리가 있나요. 게다가 빅토리아 시크릿의 속옷을 구매하는 주 소비자는 여성인데, 빅시의 쇼는 남성의 판타지를 실현하기 위한 무대라는 의견도 많습니다. 비현실적인 몸매의 여성들이 날개까지 달고 사랑스러운 미소를 날리며 흩뿌리는 금박 사이로 걸어 나오니까요. 그런 면이 연인이나 배우자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은 여성들의 소비심리를 자극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속옷을 입는 주체인 여성을 시선의 대상으로만 국한시킨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출처: 인스타그램 @ina.official반면 요즘에는 현실적인 몸매의 여성들이 현실적인 포즈로 등장하는 광고들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 속옷을 입으면 얼마나 예뻐질지 보다 얼마나 편안하고 활동성이 좋은지를 강조하는 광고들도요. 속옷은 여성들에게 '특별한 이벤트'가 아닌 '일상을 함께하는 생활용품'에 가까우니까요. 아무리 건강에 더 좋다고 해도, 브라를 입지 않은 채 바깥을 활보하는 게 100% 편안한 한국 여성분들이 아직 많지는 않을 거예요. 그래도 처지는 가슴보다는 소화불량과 유방암을 더 걱정하는 제품들이 나오고 있다는 건 반가운 일입니다. 앞으로 더욱 다양한 종류와 사이즈의 속옷이 등장해 모든 여성의 선택지가 쭈-욱 늘어나기를 기대합니다.글 CCBB 에디터 스마트인컴시시비비랩
말레이시아에서 2천억 매출찍고 국민 브랜드 등극한 한국기업
CCBBLAB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8.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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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정수기 사업하면 대박 나겠다혹시 유럽 여행하면서 이런 생각 해보신 분 안 계시나요? 레스토랑에서 생수를 사 먹자니 비싸고, 공짜로 주는 수돗물을 마시자니 괜히 탈 날 것 같고, 석회도 많다고 하니 찝찝하잖아요. 여기 이와 비슷한 생각으로 해외에 진출해 큰 성공을 거둔 한국 정수기 업체가 있습니다. 유럽이 아니고 말레이시아지만요. 이 기업은 어디고 왜 말레이시아를 선택했는지, 그리고 성공의 비결은 무엇이었는지 지금부터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한국에서 1차전, 말레이에서 2차전글로벌 뉴스 통신 GNA사실 한국의 정수기 시장은 포화 상태가 된 지 오래입니다. 정수기를 들여놓을 집들은 거의 다 들여놓았죠. 국내에서 렌털 사업을 하는 기업 수도 최근 10년 새 10여 곳으로 늘어났다고 하는데요. 이에 한국의 정수기 업체들은 해외 진출을 모색하기 시작합니다. 그 첫 주자는 '정수기'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코웨이였습니다. 코웨이는 2006년 말레이시아에 처음으로 진출해 렌털과 관리 서비스를 선보였는데요. 그 뒤를 이어 쿠쿠홈시스와 청호 나이스, 최근에는 SK 매직까지 말레이시아로 사업을 확장했습니다.왜 말레이시아일까?출처: 네이버 블로그 큰덩치미그렇다면 다른 나라를 두고 업체들이 우르르 말레이시아로 몰려간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말레이시아의 수돗물 수질에 있습니다. 말레이시아는 주로 생물학적 산소요구량, 암모니아성 질소, 부유 고형물과 같은 주요 오염원의 비율이 높은 하천에서 물을 끌어온다고 하는데요. 이에 따라 상수도의 물을 그대로 마시기도 어렵고, 물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 또한 높았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말레이시아의 개방적인 시장구조와 비교적 높은 정치제도의 투명성도 한몫했다는데요. 인구나 경제 규모로만 따지면 이웃의 인도네시아가 훨씬 월등하지만, 정치 경제 방면의 모든 리스크까지 계산했을 때는 말레이시아가 안전하다고 판단한 것이죠. 또한 위치상 동남아 국가들의 중심에 있는 것도 장점입니다. 여기서 성공을 거두고 나면 말레이시아를 근거지 삼아 가까운 싱가포르, 태국 등으로 진출하기에 용이하겠죠. 같은 이슬람권인 중동 국가로 사업을 확장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계산도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코웨이의 승승장구 비결은코웨이는 2006년 말레이시아 시장에 진출해 지역 정수기 시장에서 30%의 시장 점유율을 확보했습니다. 10년 뒤인 2016년에는 매출 5억 1,000만 말레이시아 링깃(한화 약 1,379억), 지난해에는 매출액 7억 9,000만 말레이시아 링깃(한화 약 2,136억) 을 기록했죠. 코웨이는 어떻게 우리와 별 관계도 없는 나라에 가서 이렇게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요? 비결은 바로 렌털 서비스 및 코디 서비스였습니다. 한 코웨이 관계자에는 정기적인 제품 관리 서비스 개념이 부재했던 말레이시아에 이러한 서비스들을 한국과 동일한 높은 수준으로 제공했기 때문에 큰 호응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현지 정수기 업체들은 소비자가 직접 필터를 교체해 사용해야 하는 불편이 있었기에 관리 서비스에 대한 반응이 더욱 좋았다고 하네요.현지 문화와 관습에 대한 이해도 말레이시아에서 성공하는 데 도움이 되었는데요. 코웨이는 2010년 정수기 업체 최초로 말레이시아에서 '할랄 인증'을 획득했다고 합니다. 할랄 인증은 이슬람교도가 먹거나 사용할 수 있도록 이슬람 율법에 따라 도살, 처리, 가공된 식품에만 부여되는 인증 마크입니다. 할랄 인증 획득은 무슬림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말레이시아 국민들이 안심하고 코웨이 정수기 물을 마시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고객에게 신뢰를 주는 단정한 옷차림도 말레이시아 국민들에게 어필했습니다. 코웨이를 따라 사후 관리 서비스를 도입한 현지 업체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통상 작업복 등의 차림으로 고객의 집을 방문한다는데요. 이에 비해 깔끔한 유니폼 차림의 코디들에 대해 현지인들이 좋은 인상을 받은 것이죠. 또한 일자리를 구하기 힘든 싱글 맘이나 경력 단절 여성 등이 주로 코디로 일한다는 게 알려지면서 코웨이의 기업 이미지도 좋아졌답니다.한국 업체의 레드오션 될까외국에서 한국 업체들이 잘 나간다고 하니 뿌듯하긴 한데, 일각에서는 걱정하는 목소리도 들려옵니다.  최근 SK 매직이 말레이시아 법인을 설립하면서 국내 정수기 업계의 대표주자들이 한 나라에 모여 경쟁을 펼치는 구도가 연출되었기 때문인데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지 않고 길들여진 소비자와 인프라가 갖춰진 나라에 들어가 타사 조직을 빼앗는 방식으로 이윤을 올리려고 한다면, 결국 제살 깎기 밖에 되지 않겠죠. 이에 업계 관계자들은 "경쟁 없는 시장을 고르고 특화된 역량을 개발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각각의 기업과 국가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습니다.글 CCBB 에디터 스마트인컴시시비비랩
“여기는 회사에 충성을 다하겠다는 사람 안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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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봉 2억인 곳에서 일하는 문과 출신 한국인의 성공 비결[해외취업 허와 실①]에어비앤비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유호현씨미국 대학원서 박사과정 밟다 실리콘밸리서 취업“조직 헌신보다 자기 실력 키우는 사람 원해⋯전문성 갖추는 게 급선무”<편집자주> 2017년 해외 취업자 수가 5000명을 넘어섰습니다. 국내 고용 한파가 계속되면서 일자리를 찾기 위해 일본, 싱가포르, 미국 등으로 향하는 청년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성공적으로 안착한 이들도 있지만 적응에 실패해 한국으로 U턴하는 쪽도 적지 않습니다. jobsN이 해외취업 성공, 실패담을 들어봤습니다. “여기는 회사에 충성을 다해 성실히 일하겠다고 말하는 사람 안 좋아합니다.” 구글, 페이스북, 애플 등 글로벌 IT(정보기술) 기업이 몰려 있는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6년째 직장인으로 살고 있는 유호현(38)씨는 “근면 성실한 여러 명보다 전문성을 갖춘 한 사람을 원하는 곳이 실리콘밸리”라며 이렇게 말했다. 유 씨는 텍사스주립대 오스틴 캠퍼스에서 박사과정을 공부하다가 실리콘밸리 스타트업에서 인턴으로 일한 것을 계기로 현지에서 취업 한 경우다.유호현 씨. / 본인 제공◇ 문과 출신이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취업하기까지 에어비앤비에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는 유 씨는 공대 출신이 아니다. 어릴 때부터 컴퓨터를 좋아했지만 대학은 인문계로 진학했다. 연세대 인문학부에 입학해서도 컴퓨터에 미련이 남아 영문학과 함께 프로그래밍을 배울 수 있는 문헌정보학을 함께 전공했다. 미국서 문헌정보학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가 되겠다고 결심한 유 씨는 대학 졸업 후 위스콘신대학에서 석사를 마치고 2010년 문헌정보학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텍사스주립대에 입학했다. 그런데 난관이 생각보다 빨리 닥쳤다. “지도교수는 컴퓨터 사이언스를 전공한 분이었어요. 첫날부터 컴퓨터 전공도 아닌 저에게 리눅스 컴퓨터를 주고 일을 시키는데 눈앞이 깜깜하더라고요. 너무 어려워서 매일같이 조교를 쫓아다니며 질문하기 바빴어요. 정말 꾸역꾸역 수업을 들었어요. 괴롭고 힘들지만 열심히 공부했어요. 제가 연구한 분야는 컴퓨터 언어가 아닌 사람들이 쓰는 자연어 처리 정보검색이었어요. 그다음 해에는 빅데이터를 접목해 연구를 이어갔어요. 그러던 중 오스틴에 있는 스타트업으로부터 인턴 제안을 받았습니다. 미국에서는 박사과정 중 경험을 쌓기 위해서 기업에서 인턴을 하는 것이 흔한 일이죠.”미국에서 첫 인턴은 인포침스(Infochimps)라는 데이터를 다루는 스타트업에서 시작했다. 빅데이터와 머신러닝을 다룰 줄 아는 엔지니어가 필요했던 회사는 유 씨를 적임자로 봤다. “제 백그라운드가 문과라는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어요. 회사는 빅데이터를 연구한 사람을 찾는다는 점에 중점을 뒀던 것 같아요. 우리나라였다면 문과 출신이라 아마 서류에서 탈락했을 겁니다.” 그곳에서 3개월간 인턴을 마친 후 학교로 돌아온 그는 틈틈이 스타트업에서 일할 기회를 얻었다. 이후 구인구직 사이트인 인디드닷컴(indeed.com) 인턴을 거쳐 트위터에서 3년을 일했다. 지금은 에어비앤비에서 3년째 페이먼트 팀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다. “박사과정을 하면서 기업에서 일해 보는 경험을 하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미국에서 일자리를 찾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링크드인에 이력서를 올려뒀죠. 2012년 링크드인을 통해 트위터에서 연락이 왔어요. 당시 트위터는 ‘정보검색을 잘하면서 자연어 처리를 할 줄 아는 한국인 엔지니어’를 찾고 있었어요. 한국어를 할 줄 아는 본토 사람을 찾고 싶었던 것이죠. 마침 제가 이런 자격들을 갖추고 있던 사람이었고요. 실리콘밸리 회사들은 우리나라처럼 공채로 인력을 충원하지 않아요. 상시로 필요한 역할에 맞는 사람을 뽑죠. 모든 회사가 엔지니어를 채용할 때 '공대를 졸업한 프로그래밍 실력이 최상인 사람'만을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실력을 갖추고 있어야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박사 과정을 그만두고 간 트위터에서 3년 일했어요.”한국에서 한 미디어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유 씨. / 본인 제공◇ 실리콘밸리 회사들은 어떠냐고요? “연애하는 기분”트위터에 입사하기까지 고민이 많았다. 애초 미국 땅을 밟은 이유는 교수가 되려는 꿈 때문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서른네 살. 우리나라에서는 신입으로 취직하기 쉽지 않은 나이다. “박사과정을 그만두고 회사를 갈지, 공부를 이어갈지 고민이 많았어요. 당시 지도교수를 포함해 미국 동료들은 공부는 언제든 할 수 있으니 좋은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 한다는 조언을 많이 해줬어요. 반면 한국에 있는 분들은 반대였어요. 박사 학위 공부를 마치고 취업해도 늦지 않다는 얘기들을 많이 해주셨죠. 가다 중단하면 아니 간 것만 못하다는 것이죠.”결국 유 씨는 대학원을 중단하고 실리콘밸리 직장인의 삶을 택했다. 이런 기회를 지금 잡지 않으면 후회가 더 클 것 같았다. 박사과정에서 연구한 경력을 인정받아 들어간 첫 직장인 트위터에서는 정보검색과 자연어 분야를 연구하는 엔지니어로 3년간 일했다. 트위터에서 일하던 중 에어비앤비에서 연락을 받았다. 링크드인에 올려둔 유 씨 이력서를 보고서다.  “공유숙박이라는 사업에 매력을 느꼈어요. 아직 상장을 하지 않은 곳이라 주식 상장이 잘 되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것도 이직을 결정한 주요 이유였습니다. 회사 주식을 받는다는 것은 실리콘밸리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 중 하나에요. 연봉보다 더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니까요.” 현재 유 씨가 에어비앤비에서 맡고 있는 직책은 백엔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다. 에어비앤비가 호스트에게 지불해야 하는 비용을 보낼 때 필요한 최적화 프로그램을 개발한다. 삶의 터전으로 미국을 택한 것에 대해 아직까지 후회는 없다. 이곳 생활의 가장 큰 매력으로 ‘프로의식을 갖고 일하는 분위기’를 꼽았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여기 사람들은 적어도 잘리지 않기 위해 일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몸담고 있는 직장의 임원이나 CEO가 목표인 사람들도 물론 있겠지만요. 몸값 높은 축구 선수들이 현재 리그에서 최선을 다해 골을 넣고 팀플레이를 하는 이유는 그곳에서 잘리지 않기 위해서라기보다 몸값을 높여 그곳을 떠나기 위해서잖아요. 실리콘밸리도 비슷해요. 지금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직장은 프로페셔널한 사람들이 와서 자신의 커리어를 만들어가는 곳으로 여겨요. 그래서 회사는 조직에 충성하겠다는 사람이 아닌 전문가로서 최고의 퍼포먼스를 낼 수 있는 사람을 뽑고 싶어 하고요.”유 씨(사진 오른쪽)와 '실리콘밸리를 그리다' 저자들이 함께 한 모습. / 본인 제공실리콘밸리 회사들이 복지나 근무 여건을 최고 수준으로 제공하는 이유는 직원들을 전문가로 대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한국에서 실리콘밸리를 조명할 때 예쁜 오피스, 유연한 근무제 같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그것을 무작정 따라 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런 것은 본질이 아닌 겉만 본 것이죠. 실리콘밸리 회사들의 복지는 직원들을 전문가로 대하고 이들이 최상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죠. 프로를 뽑고 프로처럼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겠다는 것이 실리콘밸리 스타일입니다."실리콘밸리에는 ‘평생직장’ 개념이 없다. 유 씨는 실리콘밸리 생활을 ‘연애하는 것’에 비유했다. “많이 달라지고 있다고 해도 지금도 한국에서는 회사를 또 하나의 가족처럼 여기는 것 같아요. 여기는 좀 달라요. 저는 회사와 연애하는 것 같아요. 나와 맞는 회사로 언제든 움직일 수 있다는 점에 대해 두려움이 없어요. 회사가 나보다 잘 나가면 나를 차버릴지 모르고, 그 반대면 제가 회사를 떠날 수도 있는 것이죠. 저도 몇 년 후 어떤 모습으로 어떤 곳에서 일하고 있을지를 장담할 수 없지만 불안하지 않아요. 내가 뛸 무대는 있다고 믿으니까요.”◇ “모든 사람이 미국 생활 맞는 것 아냐…자신의 성향 파악해야”실리콘밸리 일대에 거주하는 것으로 추정하는 한국인은 1만 명 정도. 실리콘밸리 물가가 살인적이기로 유명하지만 이곳에서 일하는 이들의 연봉으로 감당할 만한 수준이라는 것이 유 씨 설명이다. 대졸 초봉은 한국 돈으로 1억 5000만~2억 원 수준. 스톡옵션을 포함하면 액수는 더 커진다. 워킹맘 아내, 아이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 유 씨는 “침실 하나에 거실이 있는 원 베드 룸 아파트에 살려면 한 달에 3000~4000달러(340만~450만원) 세를 줘야한다”며 “연봉을 공개할 수 없지만 집세 등을 부담하고 생활하는데 크게 어려움은 없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유 씨처럼 안착한 경우도 있지만 다양한 이유로 한국으로 U턴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후회 없는 해외 취업을 위해선 무엇보다 자신의 성향부터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유 씨가 실리콘밸리에서 일하고 있는 대학 동문들과 함께 쓴 책 ‘실리콘밸리를 그리다’에서도 이런 내용을 풀었다. “책을 쓴 이유는 간단해요. 사실 우리도 여기 문화가 잘 이해되지 않았어요. 회사가 직원들에게 왜 이렇게 잘 해주는 걸까 말이죠. 여기 정착한 대학 동문들과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깨달았죠. 이것은 동양과 서양의 문화 차이도 아니고 단순한 수평, 수직 문화의 차이도 아니라는 것을요. 이곳의 문화는 혁신이 필요한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업무 환경의 일환인 겁니다. 실리콘밸리 회사들은 면접을 거의 하루 종일 봐요. 지원자가 갖춘 자질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죠. 미국 기업은 성실하게 시키는 일만 잘 하는 사람이 아닌 전문가로서 자신의 능력을 100% 발휘해 회사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인재를 원합니다.”아내와 함께 한 유 씨. / 본인 제공미국에서 직업을 갖길 원한다면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다고 조언한다. “미국에서는 대학원을 학위 따러 가는 곳이 아니라 전문성을 기르는 장소로 여겨요.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했다는 것을 전제로 미국 취업을 원한다면 일반 대학원입학시험(GRE)부터 준비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해외 취업자들이 비자를 받기 더 힘들어진 게 사실입니다. 여기 많은 회사들이 대학이나 대학원 졸업 후 일 년 동안 쓸 수 있는 임시 비자라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면접 기회를 주려는 상황이고요. 하지만 물리적인 여건보다 앞서 고민해야 할 것은 내가 어떤 문화에 잘 적응하는 사람인가를 판단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에 따라 위계 조직이 맞는 경우가 있고 미국 기업처럼 그 사람의 역할을 중시하는 조직문화가 맞는 사람이 있어요. 어떤 것이 더 우월하다고 말할 수 없는 부분이거든요.”<유호현씨가 꼽은 해외취업 성공을 위한 키워드>-'시키는 일만 한다’는 자세를 버려라. 실리콘밸리는 성실한 사람이 아닌 '재능'을 갖춘 인재를 원한다. 전문가로서 능동적으로 생각하며 회사를 이끌어갈만한 사람을 찾는다. -회사가 아닌 나의 커리어를 위해 일한다는 마음을 가져라.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언제든 떠날 준비가 돼 있다. 회사가 언제나 실력을 갖춘 전문가를 찾기 때문이다. 이말인 즉슨 '실력'으로 무장해야 한다는 얘기다. -링크드인(Linkedin)을 활용하라. 유 씨가 박사과정 중 인턴 제안을 받고 이후 기업 입사 제의를 받는 것은 모두 링크드인을 통해 이뤄졌다. 링크드인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기회 선점 시기가 달라질 수 있다.글 CCBB 에디터 절미시시비비랩
일본에서 3년 일한 한국인이 말하는 연봉과 구인난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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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는 한국인 직원 못 구해 난리라는데…그 진실은?[해외취업 허와 실②]일본 파소나그룹 직원 김영주씨 일본 취업 실패 후 재도전해 안착“일본은 글로벌 진출 꿈꾸기 좋은 도약대···비싼 물가 수준 등 감안해야”<편집자주> 2017년 해외 취업자 수가 5000명을 넘어섰습니다. 국내 고용 한파가 계속되면서 일자리를 찾기 위해 일본, 싱가포르, 미국 등으로 향하는 청년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성공적으로 안착한 이들도 있지만 적응에 실패해 한국으로 U턴하는 쪽도 적지 않습니다. jobsN이 해외취업 성공, 실패담을 들어봤습니다. 외국인에게 이민자에 준하는 거주 자격을 주는 등 외국인 노동자를 대폭 늘리는 일본의 출입국관리법안이 2018년 12월 8일 참의원 본회의를 통과했다. 아베 내각은 2019년 4월부터 5년간 34만5150명의 외국인 노동자를 수용하는 계획을 올해 확정할 방침이다. 배경은 고령화와 저출산으로 인한 구인난 때문이다. 수년 전부터 구인난을 겪는 일본에 취업하고 싶어 하는 한국 취준생이 많다. 일본 파소나그룹(Pasona group)에서 일하는 한국인 김영주(33)씨도 그중 하나였다. 파소나그룹은 일본에서 처음 인력파견업을 시작한 회사다. 적잖은 고비를 겪고 일본 취업에 성공한 그에게서 일본 취업 시장의 현주소를 들어봤다.파소나 글로벌 사업부에서 근무하는 김영주씨. /김영주씨 제공◇파란만장한 커리어 격변기 김씨가 일본에 정착한 것은 2016년. 그전까지 파란만장한 커리어 격변기를 거쳤다. 경기대 관광학부 03학번인 김씨는 2005년 대학교 3학년 때 일본 어학연수를 갔다. 2008년 대학 졸업 후 일본에서 취업할 생각이었지만 2008년 리먼브라더스 사태가 일어나면서 일본 구직 시장은 빙하기에 들어섰다. 어쩔 수 없이 한국에서 일자리를 알아봐야 했다. 1년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며 취업을 준비했지만 쉽지 않았다.2011년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다시 한 번 일본으로 향했다. 하지만 동북대지진이 일어나 일주일 만에 또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던 곳에서 적극적으로 일하는 그를 본 상사의 추천으로 일본 3대 화장품 브랜드 코세(KOSE) 한국지사에서 마케터로 2년간 일했다. 이후 삼성디스플레이 통역사 2년을 거쳐 일본에 정착했다.“취업도 이직도 힘들었습니다. 남들이 말하는 ‘좋은 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었고 문과생 여자였습니다. 나이도 서른이 넘었어요. 일본에서 유학한 경험을 살려 일본으로 눈을 돌려 알아보다 파소나 채용공고를 발견했어요. 먼저 파소나에 입사한 한국 분이 길을 잘 닦아놓은 덕분에 회사 내 한국인에 대한 이미지가 좋았습니다. 한국인은 적극적이고 회사에 대한 충성심이 높고, 일을 잘한다는 인식이 있었어요.”이후 2016년부터 현 직장인 파소나에서 일하고 있다. 직원 수가 9000명이 넘고 지주회사 ‘파소나’를 중심으로 자회사 60여개를 거느리는 대기업이다. 김씨는 파소나 글로벌 사업부에서 잡 페어(JOB FAIR)에 관한 일을 담당한다. 한해 그가 담당하는 채용설명회만 20개에 달한다. 일본 내 50개 이상 대학을 돌며 채용설명회를 한다. 한국과 대만·일본에서도 채용설명회를 연다. 한국에서 매년 10월에 여는 채용설명회는 김씨가 회사에 제안해 시작했다. 닛산 자동차, 미츠비시 전기 등 내로라하는 일본 기업에 한국 취준생들이 진출한다.파소나 사옥 모습. /파소나 홈페이지◇ “글로벌 취업 꿈꾼다면 첫출발로 일본이 제격” 일본에서는 2020년 도쿄올림픽 개최 영향 때문인지 건설과 제조, 여행·관광, 서비스 분야의 고용이 늘고 있다고 한다. 일본 내 대졸 인구가 줄면서 대졸 외국 인력에 대한 수요도 여전하다. 영어를 잘하는 한국인은 경쟁력이 있다는 것이 김씨 설명이다. 특히 궁극적인 목표가 ‘글로벌 커리어 쌓기’라면 첫 해외 진출국으로 일본이 적격이라고 말했다. “일본인은 대체적으로 해외지사에 가는 걸 꺼려 합니다. 험지가 아닌 실리콘밸리·홍콩·싱가폴인데도 불구하구요. 반면 한국인은 해외지사 근무를 기회로 생각하죠. 이런 장점을 보고 일본 기업이 한국인에게 해외 지사 근무를 많이 제안합니다.”  김씨가 중요하게 꼽은 일본 취업 성공 포인트는 이랬다. ①스펙 “일본도 학력 중심 사회”자기소개서 대신 ‘자기PR’이라 부르는 경력기술서를 쓴다. A4용지 1장에 어떤 공부를 했고 어떤 일을 했는지, 장·단점 등을 적는다. “우리나라 자기소개서는 몇천 자를 써야 하고 스토리텔링이 중요한데, 일본에선 사실만 담백하게 적어요.” 일본은 한국 못지않은 학력사회다. “중견급 이상 기업은 채용공고 아래 과거 채용한 경험이 있는 대학을 적어놓습니다. 적어도 이 정도 수준은 돼야 한다는 뜻이에요. 외국 대학의 경우 QS(Quacquarelli Symonds)나 THE(Times Higher Education) 세계 대학 순위를 참고합니다.”  출신 대학이 좋지 않으면 포기하란 소리는 아니다. “환상만 갖고 도전해선 안된다는 뜻입니다. ‘구인난이 심해 일본어 못해도 괜찮다’는 얘기가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일본어 실력은 비즈니스 수준이어야 합니다. 한국에서 취업하는 데 들이는 노력만큼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김씨가 입고 있는 옷이 파소나의 잡페어 브랜드 JOB博(JOBHAKU·잡하쿠) 유니폼이다. /김영주씨 제공②면접 “정형화된 절차 속에 숨은 의미” 신입 면접 과정이 한국에 비해 길다. “일본에선 6~8차가 기본입니다. 면접에만 3~4개월 이상 걸려요. 다양한 직급과 부서 사람들을 만나게 하는 게 목적입니다.”  면접 복장과 매너가 중요하다. “채용 시즌에는 백화점에서 면접용 정장과 구두, 가방을 함께 모은 ‘리크루트 세트’를 팝니다. 투피스 정장에, 색은 검은색 아니면 진한 남색으로 모양이 모두 똑같아요. 여성은 5~7cm 정도 굽이 있는 구두에 살색 스타킹을 신어야 합니다. 남자는 이마를 드러내야 하고 젤이나 왁스를 써서 깔끔하게 고정해요.  면접장에선 문 열고 들어가 인사를 한 후 의자 옆에 서서 기다리고 면접관이 앉으라고 할 때 ‘감사합니다’하고 앉아야 합니다. 작은 실수에도 ‘준비가 미흡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어요.” 정형화된 면접은 달리 보면 ‘지원자 자체만 바라보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주관적인 기준에 영향을 주는 요소를 애초에 차단하고 면접 내용에만 집중하겠다 뜻이에요.”  면접에서 반드시 대비해야 할 질문도 꼽았다. ‘왜 일본에 오고 싶은지’다. 채용 당락을 결정할 만큼 중요하다. “한국 취업이 어려워서 왔다고 하면 절대 안 됩니다. ‘일본 문화를 좋아해서’도 안돼요. 명확한 이유와 목표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회사에 초점을 맞춰 ‘이 회사에 가고 싶은 이유는 이렇고, 그 회사가 일본에 있어서’라는 흐름이어야 합니다.” ③인재상 “현재 경쟁력보다 잠재력 봐” 일본에선 신입사원을 평가하는 기준이 ‘경쟁력’이 아닌 ‘잠재력’이다. “일본에선 한국 취준생의 대외활동 경험을 듣고 놀래요. 우리나라는 대회에 나갔을 때 수상 경험만 씁니다. 성과를 내야만 이력서에 쓸 수 있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일본에선 대회 참가 경험만 적어도 도전 정신과 노력을 높게 평가해요. 한국 구직 시장에선 빛을 못 본 경험이어도 일본 기업에 도전할 때는 어필하길 바랍니다.” ④채용방식 다양화  기업마다 채용 기간이 다른 한국과 달리 일본은 모든 기업이 똑같은 일정으로 신입을 뽑는다. “기업 60~70%가 가입한 경제단체연합회가 있습니다. 경단련이 발표한 ‘채용일정’에 따라 기업이 일제히 채용을 시작해요. 인적성검사도 제각각이 아니라 취업정보회사 리쿠르트사에서 만든 검사 방식을 모든 기업이 씁니다. 10월에 취업을 확정한 내정자가 이듬해 봄에 대학 졸업과 함께 입사해요.” 하지만 앞으로 이런 채용 방식이 변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것이 김씨 설명이다. 경단련은 2021년 봄 입사자부터 지침을 폐지하기로 했다. 앞으로 기업들이 저마다 독자적인 채용 방식을 만든다는 뜻이다. 일본 취업을 노린다면 앞으로 2~3년 안에는 승부를 봐야 한단 소리다.(왼쪽부터) 경단련 채용전형에 대한 지침에 따른 일정표(대졸자 기준), 채용전형에 대한 지침 변화 /KOTRA 일본 오사카무역관 제공◇한국보다 힘든 일본 현지 생활김씨는 누구든 준비하고 노력하면 일본 취업을 통해 성공적인 직업인으로 발돋움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준비 없이 막연하게 뛰어드는 현상을 경계했다. “일본이 구인난이긴 하지만, 이제 한국인을 타깃으로 뽑는 일본 기업은 별로 없습니다. 일본 기업이 동남아로 진출하고 있기 때문에 채용시장도 베트남·인도네시아·싱가폴 등으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일하는 것만큼 ‘생활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급여가 한국 대비 크게 높지 않고, 물가도 비싸요. ‘헬조선’이란 말을 많이 하는데, 어느 나라에나 부조리는 있어요. 현실도피를 위해 일본으로 간다면 반드시 후회할 겁니다.”①급여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격차 적어”“일본은 ‘월급제’로 이해하는 게 좋습니다. 기본 월급에 상여금과 각종 수당이 붙습니다. 보통 대기업 인문계 신입은 20만~21만엔(약 200만~210만원) 사이, 이공계는 22만~24만엔이 기본급입니다. 신입 초봉이 높기로 유명한 라쿠텐 기본급은 30만엔입니다. 일본이 좋은 점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격차가 크지 않다는 겁니다. 인문계 출신 중소기업 신입이 18만엔 정도 받습니다. 상여금도 기업·산업 분야마다 다릅니다. 대기업을 예로 들면, 한해 4개월치 정도의 상여금이 나온다고 봅니다. ‘기본 월급×16개월치’를 연봉으로 칠 수 있겠네요.” 기본급이 낮은 대신 복리후생을 지원한다. “대부분 기업이 출퇴근 비용을 100% 지원합니다. 시간외 근무수당도 철저히 지켜요. 1분 단위로 수당을 주는 회사도 있어요. 중견급 이상 기업은 주거비를 지원합니다. 또 기숙사가 있는 경우 반드시 1인 1실입니다.”파소나 잡하쿠에서 한국산업인력공단과 함께 개최한 일본취업박람회. /파소나 잡하쿠 공식 페이스북②세금과 생활 “1년 차에 씀씀이 조절해야” 일본은 세 부담이 큰 나라다. OECD가 집계한 36개국 2017년 예비조사치를 보면 일본 국내총생산 대비 세수 비율은 30.6%다. 한국은 26.9%다. 월급에서 소득세·사회보험금·후생연금·주민세가 빠져나간다. 소득세와 사회보험금·후생연금은 기업과 근로자가 반씩 부담한다. “계약서를 쓸 때 예측한 연봉의 30%를 덜 받는다고 봐야 합니다. 주민세가 복병인데 소득과 지역에 따라 다릅니다. 도쿄 내에서도 구 단위에 따라 달라요. 제가 도쿄 에도가와구에 사는데 주민세로 한달에 우리 돈으로 9만원쯤 냅니다. 서울로 치면 강남인 시나가와구에서는 월 16만원입니다. 문제는 주민세가 처음 거주하는 1년 동안 부과되지 않다가, 2년차 6월부터 부과된다는 점입니다. 이걸 모르는 한국인들이 당황합니다. 1년 차에 절약 습관을 길들이는 게 좋습니다.”일본 취업을 준비하는 외국인 취업준비생들. /파소나 잡하쿠 공식 페이스북③기업문화 “아무리 작은 것도 상사에게 보고” 일본에선 신입사원을 처음 1년 동안 육성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미츠비시 전기 같은 경우 3개월간 집체교육을 하고 부서 배치를 합니다. 그리고 또다시 1년 동안 교육을 합니다. 일본이 ‘잠재력’을 인재상으로 보는 이유입니다.” 일본 기업은 절차와 체계를 중시한다. “‘호렌소’라는 단어가 있는데 ‘시금치’를 뜻하는 동음이의어입니다. ‘호’는 보고, ‘렌’은 연락, ‘소’는 상담을 뜻해요. 아무리 작은 것이어도 상사에게 보고해야 하고 혼자 결정해선 안됩니다. 직급에 따라 권한도 정해져있어요. 절차와 체계를 중시하는 문화는 나라 전체 분위기이기도 합니다.” 수직적인 관계는 있지만 ‘꼰대 문화’와는 다르다. “일본은 개인주의도 강합니다. 비합리적인 갑질은 없어요. 점심을 반드시 상사와 먹어야 한다거나 회의에 무조건 들어가지 않아도 돼요. 우리 회사의 경우에는 직급이 사업본부장과 부장 그리고 멤버로 구성되는데, 직급에 상관없이 ‘누구누구 상(씨)’이라고 부릅니다.”글 CCBB 에디터 욘두시시비비랩
한국에선 상상도 못할 일 “문제 생겨도 주말엔 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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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조직 문화로 야근·주말 근무 없어"[해외취업 허와 실③]Spotify 데이터 엔지니어 김나헌씨국내 IT기업 근무하다 스웨덴 회사의 데이터 엔지니어로"'팀'조직 문화로 야근·주말 근무 없어"<편집자주> 2017년 해외 취업자 수가 5000명을 넘어섰습니다. 국내 고용 한파가 계속되면서 일자리를 찾기 위해 일본, 싱가포르, 미국 등으로 향하는 청년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성공적으로 안착한 이들도 있지만 적응에 실패해 한국으로 U턴하는 쪽도 적지 않습니다. jobsN이 해외취업 성공, 실패담을 들어봤습니다.“주말에 회사 시스템에 장애가 생기더라도 팀 전체가 메신저에 모이는 일은 없습니다.”전 세계 1억7000만명 이상이 사용하는 세계 1위 음악 스트리밍 업체 스포티파이(Spotify)에서 데이터 엔지니어로 일하는 김나헌(30)씨의 말이다. “직무는 다를지라도 팀내 담당자 한 명이 전체 업무를 이해하고 있을 정도로 적은 인원이 팀을 구성하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게 설명이다. 문제가 생겨도 한 명이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이유는 회사의 애자일(agile)조직 구조덕분이다. 애자일 조직 구조는 각 팀이 상황에 민첩하게 대응하고 그때그때 주어지는 문제를 독립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만든 문화다. 이 조직문화로 스포티파이는 설립 10년만에 기업 가치 30조원을 달성했다.김나헌씨는 이 글로벌 기업에 지난 7월 경력직으로 입사했다. 입사 전에는 네이버에서 4년 반동안 개발자로 근무했다. 그러던 중 새로운 삶과 일을 찾아 해외 이직에 도전한 것이다. 준비한 지 6개월 만에 합격해 본사가 있는 스웨덴 스톡홀름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새로운 곳에 정착한 지 5개월 째인 그에게 이직 과정과 조언을 들었다.김나헌씨 / 본인제공◇재미있는 일 찾아 해외로김씨는 고등학생 때부터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의 꿈을 키웠다. 인하대학교 컴퓨터 정보공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2014년 네이버에 입사해 백엔드(backend) 엔지니어로 일했다. 그가 이직을 생각한 건 2년 차부터였다. "회사가 싫어서 이직을 생각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맡은 일 외에 더 어렵고 재밌는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단지 그 일이 회사 안에 없을 뿐이었죠. 언젠가 회사를 옮겨야겠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했습니다."이직을 위해 국내가 아닌 외국 회사를 알아봤다. 해외 회사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잘 나가는 스타트업이 미국이나 유럽에서 생겨났어요. 이런 회사들은 어떻게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일하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한 번 외국에 나가면 더 많은 기회가 생길 거라고 생각했어요. 2017년 11월부터 본격적으로 이직을 준비했습니다."◇회사탐색부터 합격까지①회사 탐색: 기준 세우고 선택지 좁혀나가기막연하게 해외 취업에 대한 환상으로는 제대로 된 이직 혹은 취업을 할 수 없다. 일하고자 하는 국가 그리고 회사를 자신만의 기준을 세워 선택지를 좁혀나가야 한다. 김씨는 세 가지 기준을 세웠다.“첫 번째는 ‘영어권 나라’입니다. 제가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언어는 영어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는 제가 희망하는 ‘데이터 엔지니어 직무가 있는 회사’입니다. 마지막으로 작은 스타트업은 지원하지 않았습니다. 해외에서 생활할 수 있을 정도의 연봉을 받으면서 안정적으로 일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기준은 각자 다르더라도 왜 해외에 나가야 하는지, 왜 이 회사여야 하는지가 확실하면 좋습니다. 제 기준을 바탕으로 10여 곳으로 추려 이직을 준비했습니다.”②레쥬메(resume): 계속 읽어보면서 변화주기회사에 지원하기 위해서는 레쥬메, 즉 이력서는 필수다. 이력서는 자신의 이력을 한눈에 볼 수 있게 정리하는 것이 핵심이다. 김씨는 ‘이름·연락처 및 링크드인URL·학력·경력사항·특기와 관심사’ 순으로 이력서를 정리했다고 한다. "자신의 경력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수치를 활용하는 거예요. 만약 앱을 개발해 출시했다면 다운로드 수나 이용자 수 등을 함께 쓰는 것이죠. 이런 수치는 면접 전에 숙지해둬야 합니다. 돌발 질문을 받을 수 있고 수치에 대해 꼬리 질문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외국인이 모르는 내용은 이해하기 쉽게 풀어쓰든지 아니면 과감히 삭제합니다. 한국에서는 유명한 네이버나 카카오일지라도 외국인들에겐 그저 '외국회사1'입니다. '카카오톡 서버 개발'을 적고 싶다면 '한국의 1등 메신저 서버 개발'로 고쳐 쓰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경력은 일관성 있게 정리합니다. 여러 일을 했더라도 지원한 직무에 맞춰 쓰는 것이 좋습니다. 이력서 작성을 끝냈다면 읽어보면서 첨삭 과정을 거칩니다. 또 변화를 주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예를 들어 같은 회사라도 이력서를 다른 방식으로 써서 지원해보고 합격한 이력서 방식을 따르는거죠. 저는 15개 회사에 이력서를 냈고 다섯 군데에서 합격통보를 받았습니다."③면접: 기록으로 남기기김씨는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 총 3번의 면접을 거쳤다. 1차는 리크루터 면접, 2차는 전화 면접과 코딩테스트였다. 3차는 직접 회사에서 진행하는 온사이트 면접이었다. 그는 면접이 끝나면 그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를 통해 부족한 부분을 점검하면서 다음 면접을 준비했다고 한다. “리크루터 면접은 이력서를 바탕으로 진행합니다. 이때 본인의 경력에 대해 잘 숙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력서에 적은 수치를 헷갈려 당황했던 적도 있습니다.전화 면접은 면접관과 함께 코딩 문제를 풀어야 해요. 같이 얘기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식으로 면접을 진행합니다. 표준편차를 설명해봐라 등 직무 관련 전반적인 지식을 물어봅니다. 대부분 회사에서 어떤 방식으로 시험을 보고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미리 알려줍니다. 그걸 바탕으로 준비하면 됩니다. 마지막 관문은 온사이트 면접입니다. 4월 초 회사에 연차를 내고 스웨덴 본사에 갔습니다. 중간에 함께 점심도 먹으면서 5시간에 걸쳐 면접을 봤습니다. 코딩, 시스템 설계 등 직무 관련 질문이 대부분입니다. 또 회사 문화와 잘 맞는 사람인지 확인하기 위해 개인적인 질문도 합니다. ‘회사에서 사이가 안 좋은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관계를 해결할건지’ 등을 묻습니다. 직접 마주하고 시간을 보내면서 함께 일해도 괜찮은 사람인지 평가하는 시간이에요. 제게도 앞으로 생활할 수도 있는 도시와 회사를 알아가는 중요한 단계였습니다. 온사이트 면접 바로 다음 날 합격통보를 받고 연봉·복지·비자 문제 등을 협의하는 시간을 가졌죠.”회사 옥상과 회사 내부 모습 / 본인제공◇주말에는 개인시간 지킬 수 있어김씨는 한국과 스웨덴의 기업 문화는 비슷한 듯 다르다고 했다. 출퇴근 시간은 한국과 비슷하다. 출근 시간은 오전 9시, 퇴근 시간은 오후 5시 30분에서 6시 사이다. 한국과 다른 점은 6시 이후에 남아있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일 때문에 주말에 사내 메신저에 불이 나는 경우도 없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스포티파이의 조직체계 덕분이다. 이 부분이 한국과 가장 다른 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스포티파이에서 팀은 스쿼드(Squad)로 부른다. 보통 8명 이하로 구성한다. 이 스쿼드는 작은 스타트업 개념이다. 서비스 기획부터 개발, 출시까지 책임지기 때문이다. 의사 결정권도 각 팀에게 있기 때문에 번거로운 보고와 승인이 필요 없다. 그래서 문제가 발생하면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고 주도적으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업무 특성상 근무시간 외에도 문제가 생겼을 때는 집에서 그 문제를 처리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문제가 생기면 해당 팀이 메신저에 모여 함께 해결했습니다. 주말에도 일을 해야하는 경우가 생기는 거죠. 그러나 이곳에는 담당자 한 명이 문제를 처리합니다. 팀원끼리 일주일씩 돌아가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담당자를 맡는데, 이를 ‘on-call’이라고 합니다. 계약서 쓸 때부터 업무시간외 근무, 즉 온콜에 동의한다는 서명도 따로 받습니다.”임금체계도 한국과 다르다. 스웨덴은 한국처럼 정해진 법적 최저임금이 없다. 임금은 정부가 아니라 직종별, 회사별 노동조합과 회사가 결정한다. 스웨덴 최대 노동자 조합 유니오넨(Unionen)은 매년 직장인 월급을 조사한 통계자료를 발표한다. 이 자료를 보면 2018년 스웨덴에서 일하는 개발자 초임(20~24세 기준)은 2만6000~3만1000크로나(약 322만~384만원)다. 김씨의 연봉을 정확히 밝힐 수는 없지만 스포티파이 개발자 평균 월급은 4만5000크로나로 한화로 따지면 약 557만원이다. 세금은 월급에서 30%정도 낸다고 한다.김씨는 스웨덴 스톡홀름 물가가 평균적으로 서울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다만 월세가 비싸다고 한다. “시내에 있는 원룸 크기의 작은 아파트 월세가 최소 1만1000크로나(약 136만원)입니다. 저는 다른 친구들과 함께 살고 있어 한 달에 1만 크로나(약 123만원) 이하로 월세를 내고 있습니다.” 대체로 스웨덴에서 삶은 조용하고 외롭다고 한다.외국인이 스웨덴에서 친구 만들기가 어렵다는 것은 현지사람들도 잘 알고 있다는 게 김씨의 설명이다. “조용한 생활을 즐기지 못하는 사람은 적응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저는 퇴근 후 운동하고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스포티파이 건물과 회사 내부 / Jon Åslund, mormondancer 제공◇해외 이직 TIP①이직을 위한 영어 먼저“언어는 현지에서 직접 부딪히면서 배울 때 실력이 가장 많이 늘어요.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면접을 볼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 있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지금 당장 언어가 유창하지 않더라도 현지에 가면 더 많이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직을 준비할 때는 이력서 작성이나 면접을 위한 영어를 공부하는 것이 우선입니다.”②채용공고를 많이 읽어라“공고가 올라오는 자사 홈페이지와 링크드인(linkedin)과 글래스도어(glassdoor) 탐색은 기본이자 필수입니다. 당장 지원하지 않더라도 평소에 공고를 숙지하고 지원하고자 하는 회사가 어떤 사람을 원하는지 알면 미리 계획을 세울 수 있습니다.”③행동력과 믿음“계획 세운 것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직을 준비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확신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외국회사에서 내 이력서를 봐줄까, 면접볼 때 버벅거리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과 불안 때문에 더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최종합격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실력이 기준에 못 미치는 것 같아도 자신을 믿고 지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글 CCBB 에디터 하늘시시비비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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