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5시, 한창 학교를 달궜던 태양은 서쪽으로 지며 주홍빛으로 하교길을 물들이고 있었다. 삼삼오오 짝을지어 집으로 가는 무리 속에 혼자 이어폰을 낀채 게임을 하는 이세하의 머릿속은 화면속 캐릭터보다 오늘 낮에 자신을 찾아왔던 소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있었다. 종잡을수 없는 그 여자애는 난데없이 나타나 자신의 힘을 빌려달라고 말했다. 힘을 빌려달라고? 목숨을 거는 일에 그렇게 쉽게 대답할리가 있을수가 있냐, 이세하는 게임에 더 집중하려고 했지만 이내 신경질을 내며 이어폰을 귀에서 뽑았다.

그녀와의 대화가 마음 한 구석에 남아 가슴이 자글자글 타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 이 세 하  ! "

자신의 이름마디를 딱딱끊어 부르며 달려오는 사람은 이세하의 얼마없는 친구 중 하나인 서유리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우연 아닌 우연으로 고등학교까지 같이 진학하게 된 그녀는 검도부의 차기 에이스로 점찍어진 서유리였다. 1학년임에도 불구하고 주전들을 제치고 전국체전에 나가 당당히 입상을 한 괴물루키라고 소문이 난 애였지만 뛰어난 운동신경 대신에 다소 굳은 머리를 가진게 흠이라면 흠이였다. 다다다하고 뛰어와 이세하의 어깨에 손을 얹은 서유리는 약간 더 높은 높이에서 그를 내려다 보았다. 이세하도 그렇게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모델같이 늘씬한 키를 가진 서유리는 또래의 남자애들보다 큰 키를 자랑했다. 그녀의 윤기있는 머리칼이 커튼처럼 부드럽게 그에게 내려앉았다.

우주를 담아놓은 것 같이 빛나는 그녀의 눈망울이 초롱초롱하게 빛나며 이세하를 담았다.

" 집에가는거야 ? "

" 너 연습은 어쩌고... "

" 에에이, 하루정도 재끼는건 괜찮다고! 편히 쉬어주지않으면 컨디션에도 문제가 생긴다구~ "

 그녀는 특유의 푼수끼가 가득담긴 웃음을 지었다. 보통 남자같으면 그 모습에 설레이기라도 했겠지만 이미 어릴적부터 봐온 이세하는 ' 또 푼수같은 웃음 '..이라고 중얼거렸다.

" 응 뭐라고 ? "

" 아니, 그보다 서유리, 너 클로저에 대해서 알아? "

서유리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내 그녀는 생각났다는듯 손가락을 튕겼다.

" 아! 그거 뉴스에서 봤어, 괴물들을 퇴치하는 퇴마사 같은거 아냐? "

" 얼추 비슷하겐 맞췄군. "

" 근데 왜? "

" 만약 내가 클로저가 되면 어떨거 같애? "

서유리에게 상담하는 자신이 바보같다고 느낀 이세하였지만 석양을 받아 빛나게 웃던 그녀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그녀는 한동안 말을 고르는듯 그의 옆에서 걷기만했다. 그녀의 얼굴끝에서 석양빛이 아슬하게 걸렸을때 서유리가 입을 열었다.

" 그거, 위험한거잖아. 잘못하면 죽을수도 있는거. "

그녀다운 간단명료한 답변이었지만 마치 말에 돌을 달아놓은듯이 무거워서 이세하는 선뜻 다음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명백한 부정의 의사가 진지한 그녀의 얼굴에 쓰여져있었다. 이세하의 특별한 힘을 알고있는 그녀에게 더 이상 클로저라는 화두를 이용해 대화를 이끌어간다면 이 단순무식 바보는 벌컥 울어버릴지도 몰랐기에 이 피곤한 상황을 넘기기 위해서 그저 물어본것이라고 말하려던 이세하는 멀리서 들린 폭발음에 입안에서 맴돌던 말을 도로 삼켰다.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성수대교 쪽의 공원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하늘을 덮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귀를 따갑게 울리는 요란한 사이렌 소리, 언젠가 학교에서 교육으로 들은적이 있는 차원종이 나타났을때 울리는 대피 신호음이었다.

이세하의 머릿속에 잠시나마 잊고 있었던 그녀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 네 힘이 필요해 '

' 위선따위가 아니야 '

" 미안, 먼저간다! "

그애의 옆에서서 그애를 확인하고 싶어졌다. 한 번더 그녀를 본다면 이 미묘복잡한 감정이 정리될것 같아서, 잃어버렸던 자신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것 같아서 이세하는 책가방을 동여매고 연기가 나는 쪽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당황한 서유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돌아오라고 소리쳤지만 이미 그의 뒷모습은 지는 석양을 따라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서유리는 입술을 깨물며 그의 뒤를 좇아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