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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갤문학] 세뇌된 슬비 이야기 - 10화모바일에서 작성

ㅅㄱㄹㄷㄷ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6.02.26 23:26:55
조회 2127 추천 23 댓글 15


​​1. 이거 쓰다보니 게임 원본 설정이랑 점점 상관없어짐. 미안합니다. (아니, 이쯤되면 캐릭터 설정만 갖다 쓴 거 같아)  
2. 클갤 금손에 비하면 처참하디 처참함.
3. 한 사람이라도 보기에 핫산은 일한다.
4. 오늘은 좀 분량 조절 실패

1화 : https://m.dcinside.com/view.php?id=closers&no=1581840&page=1&serVal=ㅅㄱㄹㄷㄷ&s_type=all&ser_pos=-1579660

2화 : https://m.dcinside.com/view.php?id=closers&no=1582993&page=1&serVal=ㅅㄱㄹㄷㄷ&s_type=name&ser_pos=

3화 : https://m.dcinside.com/view.php?id=closers&no=1589972&page=1

4화 : https://m.dcinside.com/view.php?id=closers&no=1589993&page=1&serVal=ㅅㄱㄹㄷㄷ&s_type=all&ser_pos=-1589680

5화 : https://m.dcinside.com/view.php?id=closers&no=1605042&page=2&serVal=문학&s_type=all&ser_pos=

6화 :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closers&no=1614532&page=1&search_pos=-1618215&s_type=search_all&s_keyword=%EC%84%B8%EB%87%8C

7화 :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closers&no=1633386&page=2&exception_mode=recommend

8화 :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closers&no=1642042&page=2&search_pos=&s_type=search_all&s_keyword=%EB%AC%B8%ED%95%99

9화 :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closers&no=1650597&page=1&search_pos=-1651006&s_type=search_all&s_keyword=%EC%84%B8%EB%87%8C%EB%90%9C+%EC%8A%AC%EB%B9%84+%EC%9D%B4%EC%95%BC%EA%B8%B0


정도연이 그렇게 서지수를 유니온으로 재영입한 지 1년, 유니온 대대 총사령관 중 하나가 신경질적으로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들이며 막사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 앞엔 무수한 포탄 구멍과 부서진 탱크가 공동묘지처럼 널린 황야가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황야 한 가운데엔 이름을 알 수 없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외벽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요새 하나가 굳건하게 서있었다.
    
유니온이 공중 전함 75척 등을 대동한 역대 최대 규모 차원종 축출작전을 선포한 지 벌써 6개월이 지나고 있었다. 말이 축출 작전이지, 사실상 인류가 가진 거의 모든 전력을 끌어 모와 차원종 영토를 침략하는 전쟁이나 다름없었다. 이 작전의 목표는 가장 짧은 기간 동안 가장 짧은 거리를 골라 차원종 군단의 핵심인 애쉬와 더스트 남매를 섬멸해 차원종 군단을 와해시켜 버리는 것.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명료한 목적을 가진 작전이었다.
    
지금가지 유니온 군단은 나름 잘해왔다. 무려 35척의 공중전함을 잃는 등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지만 그래도 적어도 목표 달성 코앞까지 다가간 것이었다. 저 검은 요새의 외벽만 뚫을 수 있다면 유니온은 마침내 애쉬와 더스트 남매에게 손을 댈 수 있는 셈이었다. 그렇게 요새를 포위하고 하루에 20시간 이상 공격한 지 벌써 3일 째. 요새는 여전히 멀쩡했다. 공중전함으로 융단폭격을 가하고 주포를 발사했지만 외벽에 닿기는커녕 외벽 밖 전 방면에 펼쳐진 애쉬와 더스트가 펼친 농성전 전용 방어막조차 뚫지 못했다. 이대로 가다간 요새를 포위중인 유니온 군단은 북쪽에서 오고 있다는 차원종 군단의 지원 병력에 샌드위치 신세가 될 지경이었다.
    
    
그 때, 사령관의 막사에 통신병 중 하나가 뛰어 들어왔다. 통신병은 경례를 한 후 작은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거기엔 통신병이 방금 암호화를 푼 명령 하나가 적혀있었다. 사령관은 짧은 명령문 하나를 보더니 묵은 때가 벗겨진 듯한 시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탁자에 놓인 통신장비를 통해 어딘가로 무전을 걸었다.
    
    
"야, 난데. 지금 쏘고 있는 모든 전차부대를 제 3방어선까지 후퇴시켜."
    
사령관의 무전에 지금 전차부대를 이끌고 있는 부대장은 당황한 목소리로 답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퇴각은..."
    
"빨리 나와. 그 자리에서 증발하고 싶지 않으면."
    
사령관은 통신병에게 받은 종이를 힐끔 보며 일갈했다. 거기엔 '알파퀸, 북쪽에 진입중인 차원종 지원 세력 전멸 완료. 10분 내로 포위하고 있는 중앙군에 합류 예정.'이라 적혀있었다.
    
    
"여왕님 납신다."
    
    
    
    
    
    
그리고 10분 후, 폭탄과 고함 소리로 가득 찼던 황야는 고요해졌다. 그러나 그건 평화의 상징이 아니라 더 큰 뭔가가 이 정체상황을 찢어버리기 직전의 불길한 침묵이었다. 잠시 후, 그 불길한 예감을 증명이라도 하듯 하늘에서 공기를 찢는 소리가 들려왔다. 폭격기 하나가 북쪽에서 날아오더니 마치 시체를 노리는 까마귀처럼 요새 주위를 맴돌았다. 그리고 곧이어 폭격기 밑의 문이 활짝 열리면서 폭격기로부터 뭔가가 투하되었다. 그러자마자 폭격기는 뭔가에 도망치기라도 하듯 미친 듯이 고도를 높여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건 폭탄치고는 너무 작았다. 그렇다고 발칸포라고 하기엔 양이 너무 적었고 느렸다. 폭격기가 떨어트린 그 뭔가는 하늘에서 추락하는 물건치곤 굉장히 느리게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곧 모든 게 변했다. 폭격기가 투하한 물건이 푸르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치 로켓 추진제처럼 뒤에 푸른 불꽃이 퍼져나갔고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땅에 돌진하기 시작했다. 1초도 지나기 잔에 음속이라도 돌파한 듯 공기가 터져나가는 굉음이 주위를 사정없이 울렸다. 운석처럼 하늘에서 쏘아진 그것은 애쉬와 더스트가 펼쳐놓은 방어막과 격돌하더니 순식간에 스테인 글라스처럼 방어막을 산산조각냈다. 그리고 마침내 서지수의 유성검이 애쉬와 더스트의 요새에 작렬했다.
    
    
    
세상이 멸망하는 것 같았다. 공간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서지수의 유성검이 땅에 닿자마자 주위의 공기가 타들어가 없어진 듯 진공상태가 되어 유성검이 작렬한 곳으로 공기가 빨려 들어갔다. 하늘엔 차원종들의 재가 섞인 버섯구름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리고 잠시 후 요새 중앙에서 폭풍이 일어났고 산사태라도 일어나듯 흙이 해일처럼 사방을 찢어발겼다. 요새 안에 있던 도시는 그대로 파도를 만난 모래성처럼 고은 분자가 되어 사라졌고 3일 동안 위상탄을 맞고도 멀쩡하던 요새의 외벽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더니 안에서 바깥으로 터져나갔다. 그리고 영원할 것 같던 귀를 찢어발길 것 같은 폭음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요새가 있던 자리엔 모래가 유리가 된 폐허가 앉아있었다. 차원종이 20초 전에 멀쩡히 서있던 자리엔 거뭇거뭇한 검댕이만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 공동묘지 중심엔 칼을 땅에 꼽은 채 땅에 무릎 하나를 꿇은 서지수가 서있었다. 그녀는 예전에 김기태가 입었던 중갑 비슷하게 생긴 옷을 입고 있었고 언제나 똑같은 긴 포니테일 머리를 하고 있었다. 언뜻 보기엔 전쟁에 인 어울리는 아름다운 얼굴이었지만 두 눈만큼 아니었다. 말 그대로 먹이를 노리는 미친 짐승의 눈이 서지수의 눈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럼 얘들이 어디에 숨어 있을까~"
    
서지수는 숨바꼭질이라도 하듯 콧노래를 부르며 건블레이드를 땅에 질질 끌며 어딘가로 향했다. 거기엔 서지수의 유성검을 맞고도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건물이었다. 한 변 길이가 50미터인 그 거대한 정육면체는 다름 아닌 애쉬와 더스트가 상주하는 군단의 사령부였다.
    
    
서지수는 정육면체 앞에 선 채 눈으로 봐도 두께가 50cm은 족히 되어 보이는 금속 벽에 노크했다.
    
"애쉬! 더스트! 이리 나와서 이 누나랑 놀자?"
    
서지수의 천연덕스런 목소리에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 서지수는 그 반응에 예상이라도 했듯 건블레이드를 장전했다. 그리고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는 완력으로 건블레이드를 거대한 벽에 박아 넣었다.
    
    
"뭐, 싫어? 그럼 그냥 나 들어간다?"
    
그러고는 서지수는 건블레이드의 방아쇠를 당겼다. 그리고 서지수의 폭령검이 건물 안에 폭발했고 50미터 높이의 건물이 마치 고무찰흙처럼 사방으로 흩어져갔다. 순식간에 반쯤 사라진 건물 안으로 서지수는 반쯤 녹아내리고 반쯤 불탄 건물과 차원종의 잔해를 짓밟으면서 전진했다. 그 걸음걸이는 마치 죽은 사람이 걷는 듯이 힘없었지만 서지수의 눈은 오직 한 가운데를 향하고 있었다. 그 자리엔 두 소년, 소녀가 서있었다. 그들은 폭령검을 맨손으로 막은 듯 팔을 앞으로 내밀고 있었고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그들 뒤에 있는 땅은 다른 곳과 달리 그을려 있지 않았다.
    
    
"여전히 못 배운 여자네. 처음부터 이렇게 난폭할 줄은 몰랐는데."
    
애쉬는 폭령검을 막은 손을 천천히 내리며 서지수를 조롱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애쉬의 등에선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예전부터 탈 인간급 여자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지금의 서지수는 그것조차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다. 말 그대로 걸어 다니는 전략병기, 아니 걸어 다니는 재앙이었다. 애쉬는 태어난 이후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더스트 역시 애쉬랑 같은 심정이었는지 애쉬를 비난했다.
    
    
"그러게 처음부터 그 이슬비란 년을 군단장으로 써먹으려고 집작하지 말라고 했잖아! 이게 뭐야. 너 때문에 군단이 끝장나게 생겼어!"
    
"나도 이렇게 될 줄 알았겠어? 그리고 생각해보니 나중에 이세하를 슬비를 이용해 납치할 수 있다고 되게 좋아하지 않았냐? 그때랑 아주 말이 다르네?"
    
"너 정말..."
    
    
"야."
    
조용한 소리가 애쉬와 더스트의 말싸움을 끊었다.
    
"만담은 끝났니?"
    
서지수는 건블레이드를 공중에서 돌리며 몸을 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세하'라고 적혀있는 건블레이드를 다정하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있지, 우리 세하는 누구보다 이 세상을 좋아했어. 그런데 이 세상은 우리 아들을 기만하기만 했지. 너도 더스트도 그리고 이슬비도. 그걸 생각하면 너희가 눈을 말똥말똥 떠있는 동안은 세하가 천국에서도 눈을 편히 감지 못할 거야."
    
    
그리고 서지수는 하늘을 향해 팔을 크게 미친 듯이 웃었다.
    
"기다려 아들! 오늘 너를 망쳐놓은 놈들 중 두 놈 고기 타는 냄새가 풍길 거야! 조금이라도 편해지렴!"
    
    
"저거 단단히 미쳤네. 저거."
    
더스트는 광소를 터트리는 서지수를 바라보며 질색했다.
    
"그러게. 더스트. 저런 것한테 죽으면 우리 체면이 말이 아닐 거 같아."
    
애쉬가 위상력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말 서지수한테 만큼은 죽고 싶지 않는 듯 최후의 발악을 하기 시작했다. 눈 한번을 깜빡이기도 전에 서지수 주위로 6개의 보라색 구슬이 나타났다. 그리고 서지수가 눈을 다시 깜빡이는 순간, 구슬 6개가 폭발했다. 대전차 지뢰가 터지기라도 한 것 같았다. 서지수가 폭령검으로 날려버린 건물의 잔해가 미사일이라도 된 듯 사방을 향해 날아갔다. 고막을 찢고도 남을 폭음이 폐허를 찢어발겼고 흙먼지가 모래폭풍처럼 피어났다.
    
그러나 손짓 한 번에 이 정도 파괴력이 나올 수 있다는 그 미친 광경 속엔 더 미친 광경 하나가 있었다. 그 폭발을 맨 몸으로 맞고도 서지수는 고깃덩어리로 변해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았다. 갑옷이 살짝 깨진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은 서지수는 그대로 건블레이드를 땅에 꼽았다.
    
    
"이리온?"
    
서지수는 그대로 건블레이드의 스위치를 눌렀고 곧바로 충격파가 퍼져나갔다. 직경 100미터의 거대한 반구가 이 세상에 나타났다. 그리고 서지수 주변의 모든 것을 순식간에 먼지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금속 덩어리를 믹서처럼 갈아버리는 충격파조차도 애쉬의 방어막을 뚫지는 못했다. 서지수는 다시 건블레이드의 스위치를 눌렀다. 항성처럼 빛나던 충격파는 퍼져나가는 속도보다 두 배는 빠르게 수축했고 충격파에 날아가던 수없이 많은 건물의 잔해들은 누가 세상을 빨리 감기라도 하듯 엄청난 속도로 다시 서지수를 향해 모여들었다. 그리고 서지수 위에 모여들어 찌그러지기 시작했고 곧이어 운석을 떠올리게 하는 금속과 콘크리트로 이루어진 거대한 구가 만들어졌다. 서지수는 자신이 만든 운석을 영거리포격이라도 하듯 붙잡더니 투포환처럼 충격파를 버틴 애쉬와 더스트에게 던졌다. 그러나 더스트는 고속열차에 필적한 속도로 날아오던 콘크리트 운석을 한 손으로 캐치볼 하듯 받아냈다. 곧이어 더스트는 위상력을 콘크리트 덩어리에 집중했고 보라색으로 폭발 직전에 이른 덩어리를 다시 서지수를 향해 던졌다. 그리고 콘크리트 덩어리는 서지수 코 앞에서 심판하는 별 마냥 대폭발을 일으켰다.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타들어갈 것 같은 섬광이 세상을 밝혔고 버섯 모양 구름이 하늘을 뒤덮었다.
    
    
그러나 보라색 지옥 사이로 푸른 광선이 공간을 찢으며 더스트의 오른쪽 어깨를 불태웠다. 더스트는 비명을 지르며 오른쪽 어깨를 손으로 가리며 쓰러졌다. 서지수는 온 몸이 불타고 있는 이 마당에도 애쉬와 더스트에게서 눈을 떼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건블레이드를 더스트 쪽으로 향하고 있었고 공파탄이 발사된 지 얼마 안 됐는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애쉬는 상처를 보라색 불꽃으로 지지며 지혈하고 있는 더스트를 뒤로 보낸 이후 다시 위상력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이어 보라색 낙뢰가 천벌마냥 서지수에게 융단폭격을 가했다. 아니, 낙뢰라기보다는 거대한 기둥이 떨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애쉬가 만들어낸 빛기둥은 땅을 유리로 바꾸었고 주위를 진공상태로 만들어 하늘을 헤집었다. 서지수는 한쪽 무릎을 꿇고 이를 갈며 빛기둥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그러나 등에서 연기가 나기 시작해도 서지수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건블레이드를 땅으로 향했고 방아쇠를 당겼다. 건블레이드 끝이 폭발했고 서지수의 몸은 그 반동으로 위로 튕겨나갔다. 그리고 서지수는 공중에서 천천히, 하지만 명확하게 건블레이드를 투창을 하려는 듯 한 자세로 잡았다. 푸른 용암이 마치 폭발의 징조처럼 건블레이드 사이로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징조에 맞게 건블레이드는 대폭발을 일으켰고 서지수의 두번째 유성검이 작렬했다.
    
    
애쉬의 빛기둥에서 탈출한 서지수는 유성이 된 채 두 남매를 향해 돌격했다. 그에 맞서 애쉬와 더스트는 그 유성조차 막아낼 기세를 가진 장벽을 펼쳤다. 모든 것을 뚫고 불태울 창과 그걸 막을 수 있는 보라색 장벽. 말 그대로 모순의 싸움이었다. 유성검과 장벽이 충돌하는 순간, 세상은 그 말도 안 되는 충돌을 버틸 수 없었다. 땅은 유성검과 장벽이 충돌한 지점에서 두 절벽을 만들며 쪼개졌고 하늘은 두 갈래로 갈라졌다. 이치에 벗어난 광경이었다.
    
그러나 지각 변동에 가까운 일을 벌이고도 서지수는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애쉬와 더스트는 장벽에 충돌한 서지수가 그대로 몸을 공중에서 돌리는 것을 봤다. 천천히 건블레이드의 빛이 밝아지더니 이젠 도저히 볼 수 없을 지경이 되고 있었다. 애쉬와 더스트는 즉시 자기들과 서지수 사이에 있는 장벽을 수십 겹으로 늘렸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전소'가 오고 있었다는 것을.
    
    
아니나 다를까 용광로보다도 뜨거운 열기가 애쉬와 더스트를 덮쳤다. 한 번, 두 번, 세 번 불도 태울 것만 같은 열기가 애쉬와 더스트의 팔을 태워갔고 서지수의 건블레이드가 휘둘러질 때마다 애쉬와 더스트의 발은 점점 땅에 더욱 깊숙이 파묻혔다. 그러나 애쉬와 더스트의 장벽은 아직 굳건했다. 그리고 마침내 서지수가 두번째 추가타를 장벽에 망치처럼 내려찍는 순간, 애쉬와 더스트의 얼굴에 미소가 펴졌다.
    
    
"하! 알파퀸도 별 수 없군 그래? 이제 슬슬 끝내볼..."
    
"야."
    
서지수는 천천히 건블레이드를 위로 들었다. 푸른 용암이 여전히 건블레이드 사이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내가 언제 내 전소가 추가타 한 발 밖에 없다고 했냐?"
    
전소는 끝나지 않았다. 서지수는 불타는 푸른 도끼를 그대로 애쉬와 더스트에게 퍼부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또다시 한 번. 그리고 또다시 한 번. 마치 대장장이가 담금질을 하듯, 모든 울분을 퍼붓는 듯. 서지수는 계속해서 전소를 애쉬와 더스트에게 퍼부었다. 장벽이 마침내 깨지는 소리가 들려와도 전소는 끝나지 않았다. 애쉬와 더스트의 고통에 찬 비명은 곧바로 전소가 땅을 부수는 소리에 묻혔다. 그렇게 70초가 지나서야 서지수는 마침내 검을 휘두르는 것을 멈췄다. 그녀 주위는 70초 전과 달리 평지가 아니었다. 서지수는 어느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만든 깊이 50미터의 크레이터 안에 홀로 서있었다. 애쉬와 더스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이름대로 재와 먼지가 된 채 공기 중을 떠다닐 뿐이었다.
    
    
서지수는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땅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온 몸은 화상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세하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었다. 그것이 차원종과 인간의 전쟁이 다시 한 번 멈췄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러나 그건 승리의 포효도 위대한 연설도 아니었다. 그저 자기가 휘두르고 있는 무기 안에 아들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한 어머니의 고통에 찬 울분이었다.
    
    
    
    
    
    
    
그 이후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사람들은 상대의 지도부가 괴멸하면서 전쟁은 적어도 수년간은 다시 시작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이 날을 축복했고 정도연과 서지수는 순식간에 역사에 기리 남을 영웅이 되어가고 있었다. 특히 서지수는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꺼려하는 만큼 모든 스포트라이트는 '인류를 구한 젊은 과학자'를 향했다. 유니온 상층부를 제외하곤 정도연이 어떻게 전쟁을 끝낸 무기를 만들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어떻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언제나 결과만을 보기 좋아했고 정도연이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종전이란 명확한 결과를 내놓았다. 그리고 그 사실은 정도연을 모든 이의 귀감으로 올리는 데 충분했다. 신서울엔 정도연의 이름을 딴 대형 연구실이 생겨났고 유니온 최고 기술 조언자로 임명된 정도연에겐 모든 연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특권이 부여됐다. 역사는 그렇게 승자의 편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아무도 그 승자를 위해 희생된 세하와 슬비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파고들어가지 않았다. 적어도 2023년 6월 2일까지는.
    
    
    
신서울의 정도연 연구소의 중앙보안실. 경비요원 6명가량이 느긋한 표정으로 감시 카메라 화면을 본 채 만 채 하며 옆에 있는 소형 TV를 몰래 보고 있었다. TV엔 정규방송으로 정도연의 연설 현장이 중계되고 있었다.
    
"야, 막내야. 딴 데 좀 틀어봐라. 지겹다."
    
요원 중 가장 고참인 듯한 사람이 TV 바로 옆에 있는 요원에게 손짓을 했다.
    
"선배님 기대는 버리시는 게 어떠실지. 요즘은 모든 방송에서 정도연 국장님만 나온다고요."
    
그 말에 고참 요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저녁은 경비요원들에게 휴가나 마찬가지인 날이었다. 오늘은 정도연이 담당하는 거의 모든 중요 연구가 다른 연구소에서 여기에서 할 수 없는 처리작업을 받는 날이었다. 다시 말하면 오늘은 경비할 게 거의 없는 날인 셈이었다. 그런데 그런 날에 정도연만 보는 것은 그들에게 고역이었다.
    
    
"그런데 선배님. 오늘 이렇게 여유 부려도 되는 건가요? 그래도 서류상엔 그 '코어'가 돌아온다는데... 그거 보안 순위 1순위인데 그거 누가 훔쳐가기라도 한다면..."
    
"아, 그거? 냅둬. 그거 서류상에선 오늘 조정 작업 받는다고 적혀있긴 한데 그 아줌마가 자기 몸에서 그거 떼어 내는 거 봤냐? 그 코어는 사실상 우리가 지키는 게 아니라 그 아줌마가 지키는 거라고. 그러니 절대 누가 훔쳐갈 수가 없..."
    
그 때, 뭔가가 고참 요원의 말을 멈췄다. 잠깐이지만, 아주 잠깐이지만 연구실 외벽에 펼쳐져 있는 위상력 방지 보호막이 꺼져있다는 것을 알리는 붉은 점열등이 켜진 것이었다. 고참 요원은 눈을 비비며 다시 점열등을 살펴봤다. 점열등은 언제 그랬나는 듯 녹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슬슬 노안이 오나?"
    
고참 요원은 헛웃음을 지으면서 감시 카메라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고참 요원의 웃음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아무도 없던 중앙보안실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그 사람은 후드티를 푹 내리쓴 탓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봉긋하게 튀어나온 가슴과 작은 체구, 그리고 반바지 밑으로 드러난 얇은 다리 덕에 누가 봐도 여자인 것이 티가 났다. 그녀는 등 뒤에 자기 몸보다도 두꺼운 배낭을 메고 있었고 그녀로부터 50cm 뒤엔 공간이 웜홀처럼 둥글게 찢어져 있었다.
    
    
"야 미친! 경보 울려! 침입자.."
    
그러나 요원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후드티를 입은 여자는 중앙보안실 문을 열고 작은 통 하나를 굴려 넣었다. 잠시 후 통은 폭음이라기보다는 잡음을 내며 폭발했고 태양보다 밝은 빛이 중앙보안실을 휩쌌다.
    
    
"야 씨... 저년이 섬광탄을 터트렸어! 모두 바닥에 붙..."
    
그러나 고참 요원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누군가 빛 속을 가로 지르면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확히 네 번 그 누군가가 주먹을 휘두르는 소리가 들려왔고 마치 연습이라도 한 듯 모범적이게 요원들의 명치에 주먹이 처박혔다. 그리고 섬광탄이 폭발한 지 5초만에 요원 6명 중 4명이 쓰러져 있었다.
    
섬광탄이 효력이 떨어지자마자 요원 중 한명이 후드티 입은 괴한에게 전기 충격을 일으키는 제압봉을 들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괴한은 스파크 튀기는 금속 봉을 그대로 왼손으로 붙잡았다. 뭔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후드티의 팔 부분 천이 터져나갔다. 그 틈으로 드러난 것은 피부가 아닌 검은 금속이었다.
    
    
"아 씨. 의수 끼고 있었냐."
    
경비 요원은 곧 쓰러질 엑스트라처럼 투덜거렸다. 그리고 곧이어 괴한은 요원의 팔을 의수로 붙잡은 뒤 그대로 꺾어버렸다. 요원의 전기 충격 제압봉은 그대로 요원의 목덜미에 닿았고 요원은 그 자리에서 실험당하는 개구리처럼 움찔거리더니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자기 무기에 자기가 당한 요원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다른 요원이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리고 후드티 입은 괴한이 발을 움직이기도 전에 그는 괴한을 향해 테이저 건을 발사했다. 괴한은 날아오는 전극을 향해 의수가 아닌 오른팔을 내미는 미친 짓을 했다. 그러나 그 미치광이 짓을 한 괴한 바로 앞에 전극이 투명한 벽에 부딪히기라도 하듯 멈춰 섰다. 괴한은 파리를 쫓는 자세로 테이저 건의 전극을 옆으로 튕겨냈고 마치 세상에 오류라도 상긴 듯 요원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바로 다음 순간, 요원 머리 바로 위에 괴한이 공중에 거꾸로 떠있었다. 괴한은 그대로 두 손으로 요원의 양 어깨를 붙잡았고 몸을 공중에서 반동으로 회전시켰다. 요원은 말 그대로 채찍처럼 바닥에 패대기쳐져 기절했고 괴한은 그대로 바닥에 깃털처럼 착지했다. 그리고 마침내 괴한의 후드티가 벗겨졌고 허리까지 내려오는 흰 머리카락이 태피스트리처럼 휘날렸다.
    
    
슬비는 매고 있는 배낭을 풀어 큰 기계장치 하나를 꺼내 중앙보안실의 콘솔에 연결했다. 그런 후 기계장치에 손을 대 전기장을 약하게 넣어 기계장치를 충전했다. 그러자 모든 감시카메라 화면이 일렁거리더니 10초 후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슬비는 중앙보안실을 기록하고 있는 감시 카메라 쪽으로 눈을 돌렸다. 감시카메라 기록은 성공적으로 덮어씌워 지고 있었고 슬비는 투명인간이라도 된 듯 감시카메라에 찍히지 않고 있었다. 앞으로 1시간 동안은 경보가 울리지 않을 것이다. 슬비는 마지막으로 모든 걸 확인한 후 중앙보안실에서 나갔다. 그러나 역시 6명의 죄 없는 요원을 기절시킨 게 마음에 걸렸는지 다시 돌아와 사과했다.
    
    
"미안해요. 하지만 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슬비 눈앞에 거대한 격납고 같은 공간이 펼쳐졌다. 정도연 연구소 지하 20층에 도착한 슬비는 서류 하나를 품속에 꺼내 살펴봤다.
    
"알파퀸 전용 코어 '세하'가 재조정 받는 곳은... 13번 오염 격리실..."
    
슬비는 서류를 다시 접어든 후 거대한 약품 튜브와 정육면체 유리실을 지나치며 어두운 격납고를 걷기 시작했다. 그녀의 가슴은 터질듯이 뛰고 있었다. 슬비는 눈앞에서 녹아내리는 세하를 어쩔 수 없이 떠나면서 세하의 한 쪽만 남은 눈을 보며 약속했었다. '반드시 돌아오겠다.' 그리고 슬비는 1년 만에 그 약속을 지키기 직전에 도달했다. 비록 세하는 인간이라 불릴 수도 없는 상태였지만 슬비에겐 상관없었다. 그저 세하를 다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슬비는 자기가 겪은 1년 간의 역경에 드디어 보답받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13번 오염격리실 앞에 선 슬비는 허망하게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13번 오염격리실 안엔 세하가 없었다. 슬비는 텅 빈 오염격리실 앞에 서 허둥지둥 다시 서류를 펼쳐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 그거 서류상엔 '세하'가 거기 보관되어 있다고 나와 있을 텐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슬비 뒤에서 들려왔다. 슬비는 천천히 서류에서 눈을 뗐다. 등 뒤에선 누군가 칼이라도 들이밀 듯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슬비는 건블레이드를 한 손에 들고 있는 서지수와 눈을 마주쳤다.
    
    
"내가 말이야. 재조정이나 관리 작업할 때만 빼고 항상 이걸 몸에 품고 다니고 딴 데엔 보관을 안 하거든? 그거 허가받기 귀찮아서 서류 갱신 안하고 있었는데 설마 그게 네 년을 유인하는 수단이 될 줄이야."
    
서지수는 입맛을 다시면서 이슬비를 광포한 눈으로 노려봤다. 그야말로 먹이를 노리는 포식자의 눈이었다. 서지수는 금방이라도 슬비에게 뛰어들고 싶었다. 뛰어들어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 아들의 원수가 눈앞에 버젓이 서있었고 서지수는 당장이라도 그 원수를 눈앞에서 깨끗이 지워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애쉬와 더스트 전투와 달리 서지수는 곧바로 유성검을 슬비에게 내리꽂지 못했다. 물론 서지수의 결전기는 슬비를 이 땅에서 지워버리기 충분했다. 그러나 여긴 차원종의 영지가 아닌 신서울. 결전기를 썼다가는 이 도시 전체가 없어져버릴 수도 있었고 서지수에겐 아직 그 정도는 판별할 수 있는 이성이 남아있었다.
    
    
"서,서지수 씨 당신이 어떻게 여길? 경보는 분명 안 울렸을 텐데."
    
'장소 선정 잘못했네'라고 투덜거리며 침을 뱉는 서지수에게 슬비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 그거? 확실히 네 년 말대로 알람은 안 울렸는데. 너, 뒤를 조심했어야지."
    
그리고 서지수 뒤로 사람 3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식 요원복 차림에 완전 무장한 유리와 미스틸테인, 그리고 휠체어를 타고 있는 제이였다.
    
    
"우리 유리가 널 저녁 내내 따라다니고 있었다고? 그리고 너가 이 연구소에 침입하자마자 나한테 연락했지. 어이쿠 우리 유리 잘했어요? 이 누나한테 이런 기회도 마련해주고. 내일 고기 내가 쏠게?"
    
서지수는 유리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유리는 눈을 돌린 채 슬비의 눈을 피하고 있었다.
    
    
"유,유리야... 너가 어떻게?"
    
그러나 슬비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재빨리 주머니 속으로 왼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작은 개인용 블랙박스 하나를 꺼냈다. 슬비가 세하와 헤어지기 직전에 세하의 옷에서 떼어낸 블랙박스였다. 거기엔 슬비가 세하를 죽인 것이 아니라 정도연이 세하를 녹여버렸다는 사실이 담긴 유일한 증거물이었다.
    
    
"서지수 씨. 이걸 보세요! 세하는 제가 죽이지 않았어요. 아니, 세하는 지금도 멀쩡히 그 건블레이드 안에 살아있어요! 미친 소리 같지만 정말이에요. 여기 이 영상만 보신다면..."
    
서지수는 대답대신 방아쇠를 당겼다. 곧이어 공파탄이 건블레이드에서 터져나갔고 슬비는 즉시 올린 왼손을 내뺐다. 슬비의 왼손에선 연기가 나고 있었다. 만약 그 손이 의수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슬비의 왼손은 뼈만 남아있었을 것이다.
    
"어디서 개수작이야."
    
서지수는 코방귀를 끼며 건블레이드를 재장전했다.
    
    
"블랙박스..."
    
슬비는 '핫' 하며 비명을 지른 후 공파탄에 맞아 날아간 블랙박스 쪽으로 기다시피 달려갔다. 블랙박스는 불에 타고 있었다. 슬비는 고통을 참은 채 블랙박스에 붙은 불을 맨손으로 두들겨 껐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블랙박스는 공파탄에 불타 재생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게다가 그 블랙박스는 예전에 슬비가 소매치기로 몰래 '빌린' 유니온 신분증으로 재생은 가능했으나 고위 관리요원의 신분증이 없으면 복사본을 만들 수 없는 구조였다. 이제 슬비를 변호해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정신을 차린 슬비는 곧바로 검은 양 팀원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들이야말로 슬비의 마지막 수단이었다.
    
    
"유리야..."
    
슬비는 여전히 자기와 눈을 못 마주치고 있는 유리를 우선 불렀다.
    
"나야. 슬비라고. 내가 아직도 세뇌당한 것처럼 보여?"
    
"...."
    
"이 눈을 봐. 너랑 같이 학교를 다니며 남 몰래 세하 얘기를 꺼냈고 매일 천방지축처럼 뛰어다니던 너한테 잔소리하던 이슬비의 눈이라고! 차원종 따위의 눈이 아니란 말이야."
    
유리는 그 말에 마침내 슬비의 푸른 두 눈을 마주봤다.
    
    
"... 그러네. 확실히 슬비 눈이야..."
    
유리의 그 말에 슬비의 가슴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슬비는 금방이라도 유리라는 든든한 아군을 얻을 거라 기대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유리의 이어지는 말은 슬비의 정신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 모르겠어. 너 그 눈으로 세하를 속인 다음 세하를 죽였잖아? 그토록 널 구하고 싶었던 세하를... 넌 그 눈으로 세하를 보면서 배신했어. 이젠 아무것도 모르겠어. 바보 같지만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널 믿어야할 지 이젠 모르겠단 말이야!"
    
슬비의 얼굴이 굳어져갔다. 처음이었다. 유리는 그동안 누구보다도 슬비를 믿어왔었다. 그에 슬비 역시 유리를 자매처럼 믿고 있었고 둘은 마치 뇌가 연결이라도 된 듯 모든 비밀과 고민을 털어놓는 사이였다. 그랬던 유리가 난생 처음으로 슬비를 부정하고 있었다.
    
    
"제이 아저씨...?"
    
제이는 자기를 애처롭게 쳐다본 슬비를 외면하며 선글라스를 고쳐 썼다.
    
"슬비야, 미안하구나. 내가 그 때, 아스타로트 전 때 내가 대신 모든 걸 짊어 졌어야 했는데.. 그때 너가 모든 걸 짊어지는 바람에, 내가 그 때 어른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너가 이 지경이 되었구나... 정말 미안하다."
    
    
"테.. 테인이는 어떠니?"
    
슬비가 떨리는 목소리로 미스틸테인을 부르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곧 미스틸테인은 그 침묵을 깨버리고 말았다.
    
    
"미안해요. 슬비 누나. 하지만 마지막만큼은 슬비 누나를 슬비 누나로 보내주고 싶어요. 차원종이나 사냥감이 아닌. 그러니 더 이상 그러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슬비는 차라리 침묵이 계속 되길 원했는 듯 고개를 숙였다. 슬비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러나 머릿속엔 추억이 깨지기 시작했다. 강남에서 다 같이 팀원끼리 포장마차에 옹기종기 붙어 밥을 먹던 기억. 회의실에서 제이와 세하는 졸고 있고 유리는 보고서를 망쳐놓고 있고 미스틸테인은 스케치북에 낙서를 하던 기억. 미스틸테인이 세하와 슬비보고 손 좀 잡으라고 조르고 있고 부끄러워하며 둘이 손을 잡자 데이트 하냐고 놀리던 제이의 모습. 아스타로트 전 직전에 마지막까지 애쉬와의 계약을 고민하는 슬비 자기 자신의 모습. 그리고 세하를 비롯한 검은 양 팀이 죽을 각오를 하는 모습을 보고는 그들을 살리기 위해 애쉬와의 계약을 결심하는 바보 같은 자기 자신의 모습.
    
    
긴 3년 6개월이었다. 그 끝나지 않을 것 같은 3년 6개월 동안 슬비의 인생은 완벽히 고장 났다. 원하지 않았지만 차원종이 됐다. 원하지 않았지만 차원종 사이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혀 체포당했고 고문당했다. 원하지 않았지만 애쉬에게 세뇌 당했다. 원하지 않았지만 세하를 정도연에게 빼앗겼다. 원하지 않았지만 인간들 사이에서도 극악무도한 배신자로 몰렸고 목엔 수배령이 걸려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슬비의 인생은 슬비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끝나가고 있었다. 자기를 여태까지 지탱해 온 가족들에게 신뢰를 잃고 그들의 안타깝다는 눈빛을 받은 채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어머니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들어있는 무기로 불타죽는 것. 정말 최악의 결말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슬비는 주저앉아 버렸다. 눈물이 하염없이 슬비의 눈에서 흘러나왔다.
    
    
"세뇌 따위 안 풀리는 게 좋았어."
    
슬비는 그대로 정신이 부서지길 원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나마 슬비가 제정신을 차리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 세하에게 돌아오겠다고 한 약속 하나 뿐이었다.
    
    
    
"야, 신파극은 끝났냐?"
    
서지수는 건블레이드를 바닥에 끌면서 사형집행인처럼 주저앉은 슬비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나 서지수와 달리 슬비는 사형수처럼 굴지 않았다. 슬비는 다시 일어나 허리춤에 있던 단검 두 개를 뽑아들었다. 눈은 여전히 눈물과 절망으로 가득차 있었지만 포기했다는 감정만큼은 없었다.
    
    
"미안하지만, 이대로 끝내지는 않겠어요. 세하와 저를 위해서라도."
    
슬비는 기가 차다며 헛웃음 짓는 서지수를 노려봤다. 그런 후 슬비는 마지막으로 자기 왼팔에 달린 검은 의수와 오른쪽 단검을 살펴봤다. 거기엔 슬비가 1년 동안 준비해온 '비장의 수'가 담겨있었다. 건블레이드의 부품이 된 세하를 살릴 수 있는 수단. 그것이 슬비의 유일한 이길 수 있는 수단이었다.
    
    
서지수와 슬비는 서로 노려봤다.
한 쪽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은 채 미쳐버린 여왕. 아들의 복수만이 삶의 이유가 된 불쌍한 여자.
나머지 한 쪽은 검은 양과 유니온 요원이라는 유일한 마음의 고향을 방금 잃어버린 불행한 여자. 오직 세하와의 약속만 남은 여자.
한 쪽은 나머지 한 쪽을 무조건 죽이고 싶어 하며 다른 한 쪽은 무조건 한 쪽을 살리려고 하고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더니 약속이라도 하듯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한 쪽이 심하게 불리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1. 이 미천한 핫산 글 읽어줘서 고맙다. 갤럼들아
2. 이제 4화 남았다. 앞으로 3화동안은 클라이맥스 부분이고 1화 에필로그.
3. 이게 드디어 화수가 두자리 수가 되는 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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