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인사이드 갤러리

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갤러리 본문 영역

[클갤문학] 검은 용에게 바치는 영웅담 - 1

ㅇㅇ(1.233) 2016.02.27 01:14:47
조회 1074 추천 23 댓글 14

  전쟁영웅으로 살아간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글쎄, 물론 다양한 가능성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무런 죄책감도 가지지 않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영웅도 있을 테고, 반대로 전쟁의 상처를 이겨내지 못해 광인처럼 지내는 영웅도 있을 테고. 그러나 아무리 다른 가능성 속에 살고 있더라도, 영웅이란 존재는 어쩔 수 없이 하나의 결말을 보게 된다.


  시대는 전쟁을 잊었지만, 그들은 늘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걸.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이불을 붙잡고, 흔들리는 동공을 주체하지 못한 채 머리를 무릎에 파묻었다. 전쟁은 이미 없다. 그 누구도 그 불길한 단어를 입에 담지 않는다. 알고 있었다. 그래, 알고 있었다. 모르는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의 전투는 깊은 밤 돌연히 내 심장을 물어뜯곤 했다. 안구의 뿌리부터 표피의 말초신경까지 뜯어대는 그 짐승의 이름은 악몽이었다. 그림자가 내 목을 옥죄고, 나를 문책하고, 내가 지켜내지 못했던 모든 것이 무덤 안에서 손을 내젓고.


  차라리 내가 미쳐버렸으면 했다.


  그래서 난 내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선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으니까.



***



  “눈을 뜨니 내가 취조실에 있는 건에 대해서.”


  “묻는 질문에만 대답해, 이세하.”


  흐릿한 조명, 폐부를 들이 채우는 텁텁함. 미세한 먼지들이 유유자적 떠다니는 걸 보며 나는 탄식했다. 취조실이라니, 눈을 뜨자마자 취조실이라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내게 어울리지 않았다. 차원전쟁을 종결시키고 최강의 클로저라고 불리는 전쟁영웅이 취조실?


  정부의 음모라도 아니면 말이 되지 않았다. 그 증거는 또 있었다.


  “으르렁대지 마, 이슬비. 그보다 못 본 새에 많이 젊어졌네. 마치 10대처럼 파릇파릇한데. 얼마 전에 논문 냈다더니 새로운 미용법이라도 발견한 거야? 그럴 거면 가슴부터 하지.”


  “자꾸 대화가 맞지 않는 느낌인데, 이세하. 네가 해온 짓을 생각하면 당연한 처우야.”


  나는 흐음, 하고 느긋한 시선으로 내 눈앞의 인물을 훑었다. 꽃물을 들인 듯 청초한 연분홍빛 머리카락, 청금석을 닮은 눈동자, 새하얀 피부. 그리고 왜소하지만 잘 단련된 신체와, 강렬한 전의를 불태우는 그 눈빛.


  내가 알던 이슬비가 맞았다. 다만 과거로 돌아간 것처럼 보일 뿐이지.


  “내가 해온 짓?”


  잠시 침묵하고 눈을 감았다. 내가 해온 짓, 수도 없이 많았다. 이슬비한테 최근 가슴 가지고 놀린 게 너무했던 걸까. 그래서 살의까지 내비치는 걸까. 가슴처럼 아량도 좁은 여자라니깐, 그래도 남자가 돼서 사과는 해야겠지.


  그러한 생각을 하면서 입술을 달싹일 때, 이슬비가 내 말을 틀어막았다.


  “이세하, 검은 용.”


  나는 말하려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검은 용? 불길했다. 내 직감이 그렇게 말했다.


  “아, 아아! 그거 그리운 울림이네. 용 군단장에게 붙는 호칭이었…….”


  “데미플레인에서 검은 양 팀을 배신, 차원종 군당장이 되어 지상 침공을 속개. 신서울 남부 일대를 손에 넣고 공세를 늦추지 않는 중. 그리고 대규모 위상 변동을 보고 찾아갔더니 기절한 채로 발견. 그래서 지금 이 취조실에 있음.”


  그녀가 말해보라는 듯 내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농담이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슬비의 눈빛을 보고 그 생각을 접었다. 알 수 있었다. 진담이었다. 거짓말이 아니었고, 그렇다면 내게 편리한 가능성들은 무더기로 탈락한 셈이었다.


  빌어먹을. 나는 욕지거리를 속으로 중얼거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믿기 힘들 거 같은데, 이슬비.”


  “참고로 취조실에 묶인 상태에서도 모습을 보인 걸 확인했어. 본체는 아니란 말이겠지?”


  무신경한 말에는 거부할 수 없는 확신이 있었다. 아니, 그건 신뢰 따위가 아니었다.


  불신. 내 말은 결코 믿을 수 없다는 날카로운 적의가 그 판단의 근간이었다.


  최대한 신중히 단어를 골라야만 했다. 나는 천천히 내 의견을 피력했다.


  “그러니까, 그거 나 아니야.”


  “하.”


  냉소가 나에 대한 그녀의 신뢰도를 대변하고 있었다. 그래도 들어는 주겠다는 듯 아무 말도 없는 게 다행이었다.


  “물론 가능성 없는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사실 나도 지금 농담일 거란 의혹을 버리진 못했지만. 난 미래에서 온 거야. 네가 아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미래, 응? 배신은커녕 너희들이랑 전쟁터에서 구르다가 후유증 때문에 매일 일곱 빛깔 알약을 씹어 먹으면서 무지개빛 토를 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곳에서 온 거라고!”


  실수, 나는 말을 끝낸 직후 그 단어를 떠올렸다. 말하다가 중간에 흥분해버렸다. 그래, 약. 지금 생각해 보니 약을 먹지 못했다. 불안정한 정신 상태가 내 자제심을 흔들어댔다. 나는 가까스로 이를 악물고,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했다.


  이슬비는 조금 당황했는지 살짝 미간을 좁힌 채였다. 그렇다면 아직 발언권은 내게 있었다.


  “소설 같지?”


  “소설이 아닐 수도 있지. 네 머릿속에 주입된 거짓 기억일지도.”


  “일단 날 풀어줘.”


  “불가능한 일이라는 건 너도 잘 알잖아? 기어오르지 마, 넌 배신자에 불과해.”


  “날 풀어줄 수밖에 없을걸?”


  허공에서 나와 이슬비의 눈빛이 부딪혔다. 싸늘한 시선이 나를 조소하고 있었다.


  “내가 널 풀어주거나, 아니면 네 말이 진실이라는 증거를 보여준다면 며칠 동안 네게 순종적으로 굴어도 좋아. 그럴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또박또박 비수를 던지듯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서늘했다. 그래도 나는 아무런 부담감도 느끼지 못했다. 그녀가 제시한 조건은 너무나 당연한 거였고, 내가 관심 있는 건 상품이었으니까. 순종적인 이슬비라, 침대 위를 제외하면 본 적 없었다.


  그래서 나는 흐, 하고 얕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가 짜증난다는 얼굴을 보일 무렵에, 나는 내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그녀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위상력 억제 수갑. 아무리 그래도 인간이 만든 이상 억제할 수 있는 한계는 존재하지.”


  “S등급 차원종 두 체분의 위상력이 쏟아지더라도 견딜 수 있는 특제니까,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말도 안 돼.”


  이슬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나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참을 수가 없었다.


  수갑이 붉게 달아올라, 녹아내리고 있는 그 모습.


  마치 치트 캐릭터가 된 느낌이었다. 전쟁 중에는 느껴본 적 없는 여유였다.


  “아, 잠깐. 그런데 이슬비.”


  그러다가 문득 웃음을 멈추고, 나는 멍하니 내 수갑을 바라보는 이슬비에게 정색했다.


  “약 좀 가져다줄래? 자꾸 실없이 웃으니까 내가 미친 거 같잖아.”


  꿈일지도 모르지만, 아무래도 괜찮았다.



  오늘 밤은 악몽이 아닐 테니까.




추천 비추천

23

고정닉 0

0

댓글 영역

전체 댓글 0
등록순정렬 기준선택
본문 보기

하단 갤러리 리스트 영역

왼쪽 컨텐츠 영역

갤러리 리스트 영역

갤러리 리스트
번호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추천
설문 연예인 안됐으면 어쩔 뻔, 누가 봐도 천상 연예인은? 운영자 24/06/17 - -
1668696 여단장쟝 그려왔다.jpg [29] 뮤이티토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6.02.27 4072 46
1668669 공략글 초스압)티어매트 공략 [32] ㅇㅇ(59.7) 16.02.27 10939 85
1668637 이 짤 완전... [24/1] ㅇㅇ(14.63) 16.02.27 4310 43
1668625 얘들 한동안 얌전하더니 왜 또 이러냐 [11] 초전하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6.02.27 3106 29
1668351 여기서 아르피엘 깐다는 소식 듣고 달려왔습니다~ [55] 마키야(178.62) 16.02.27 3504 40
1668079 흔들으라 이기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66] 잭O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6.02.27 4135 21
1667913 클갤 단편 만화- 속전충 서유리 [9] 철밥통이갑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6.02.27 2546 24
1667521 [클갤문학] 건강이 최고 [3] 유동 닉네임(211.195) 16.02.27 713 15
1667025 [클갤문학] '맛' 1 [5] 문학용1(175.239) 16.02.27 1050 26
1666946 [클갤문학] 되돌리다 -2- [6] WhiteMap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6.02.27 826 25
1666909 스캇주의) 몇년전에그린그림 발굴함 [19] ㅇㅇ(220.70) 16.02.27 3518 30
1666841 [클갤문학] 빛나지 않는 눈물은 어디에 있는가 [4] 로은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6.02.27 1149 19
1666680 푸딩먹는 나타쟝 [12] ㅇㅇ(223.62) 16.02.27 3762 44
1666669 ??? : 어서오세요, 홍시영 감시관님. [30] Pile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6.02.27 4434 63
[클갤문학] 검은 용에게 바치는 영웅담 - 1 [14] ㅇㅇ(1.233) 16.02.27 1074 23
1666599 [클갤문학]네모난 사각링 위에 종은 울리는가(3) [12] 고스트록펠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6.02.27 606 20
1666475 ???:나타님 이사무실에 귀신이 나온다는거같아요 [28] 브루스 웨인(211.109) 16.02.27 4297 54
1666363 미모의 여성 클로저 [18] 브루스 웨인(211.109) 16.02.27 4539 38
1666271 아 씨바 슬비 간호사복보니 망상증이 도져버리네...txt [42] 잭O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6.02.26 3814 52
1666202 [클갤문학] 세뇌된 슬비 이야기 - 10화 [15] ㅅㄱㄹㄷㄷ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6.02.26 2127 23

게시물은 1만 개 단위로 검색됩니다.

갤러리 내부 검색
게시물 정렬 옵션

오른쪽 컨텐츠 영역

실시간 베스트

1/8

뉴스

디시미디어

디시이슈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