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하야마가 가장 주목하는 선수로 이즈키를 꼽았던 것에 대해 따지듯 물었다. 코타. 나는 망설임없이 너를 선택했는데, 어째서 넌 내가 아닌거야? 어찌보면 유치한 미야지의 질문에 하야마는 미야지를 반하게 한 그 천진한 얼굴로 대답했다. 미야지상은 세손가락만으로도 쉽게 뚫렸으니까요. 이즈키는 네개째 버텼어, 흔치 않아요, 정말 멋져! 영웅담을 늘어놓듯 방방 신나는 목소리로 연인인 미야지 앞에서 다른 이에게 찬사를 보내는 하야마에게 미야지는 상처를 받았었다. 연인으로써가 아닌, 하야마를 상대한 적 있는 선수로써의 무력감과 박탈감. 애초에 하야마라는 이 충성스런 개의 탈을 쓴 소악마를 믿어서는 안됐다.
"미야지상은 약하지만, 그래도 좋아해요."
하야마의 말은 미야지에게 하나하나 비수를 꽂아놓았다. 하야마와 미야지는 재능의 그릇이 다르다. 무관의 오장, 기적의 세대가 없었더라면, 어쩌면 그 이름을 대신 차지했을지도 모를 천재들. 노력을 아예 하지 않은건 아니겠지만, 노력이 보여주는 성과는 일반인과 수준이 다르다. 그 중 하나인 하야마 코타로, 그는 인지하지 못한 채 미야지에게 수도 없는 잔인한 말을 던진다. 하지만 미야지로써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것이, 이 천진하고 악랄한 소악마를 믿는것을 넘어서, 이미 사랑하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미야지가 그렇게나 죽고 못살던 미유미유는 하야마를 만난 이후 뒷전으로 밀려버렸거늘, 입을 헤 벌린 채 미야지의 옆에서 천사같은 얼굴로 세상 모르고 잠든 하야마는 그 사실을 알 턱이 없으니 미야지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가기만 한다. 거기다가, 누가 개새끼 아니랄까봐, 섹스도 막무가내인 탓에 밤마다 미야지의 눈에는 눈물이 마를 일이 없었다.
"이 얼굴을 파인애플로 갈아버릴까."
어디사는 누구때문인지, 못견디게 욱신거리는 전신을 바르르 떨며 주먹을 꽉 쥐던 미야지의 시선이 고른 숨을 내쉬는 하야마의 귀여운 얼굴과, 바르작거리는 탄탄한 가슴께로 향한다. 젠장. 미야지는 부끄럽지도 않은지 쿵쿵 지랄맞게 뛰는 심장을 괜히 나무라며 조심스레 촉촉한 하야마의 짧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겨본다. 아기의 머리카락마냥 부드러운 촉감에, 괜스레 가슴이 찡해진 미야지는 한참을 망설이다, 천천히 고개를 숙여 곤히 잠든 하야마의 부드러운 이마에 입을 맞춘다. 공주에게 굿나잇 키스따위를 날리는 왕자님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어 못견디게 간지럽지만 그만큼 하야마의 잠든 모습은 사랑스럽다. 눈두덩이에 한번, 광대에 한번, 그리고... 발간 입술 위에서 잠시 고민하던 미야지는 갑자기 번쩍 뜨인 눈에 놀라 악, 단말마 소리를 지르며 뒤로 넘어가야 했다.
"미야지상, 변태."
자는사람에게 뭐하는거에요? 장난조로 말하는 하야마가 얄미워 미야지는 아린 엉덩이를 문지르며 하야마를 노려본다. 그런 미야지를 귀엽다는 듯 함박웃음을 지으며 내려다 본 하야마는 중얼거린다. 도둑키스를 하려면 제대로 하지, 입술 위에서 그렇게 뜨거운 숨을 불면 저주로 잠들었던 공주님까지 깨겠어요. 그렇게 놀리는 하야마는 닥쳐, 하는 말과 함께 가운데손가락을 들이미는 미야지는 아랑곳 않고 말을 잇는다.
"키스해달라고 하면, 자다가도 번쩍 일어나서 해줄텐데."
물론, 섹스는 말할것도 없고. 눈을 찡긋 감으며 되도않는 느끼한 미소를 지으려는 하야마의 배를 발로 차려는 시늉을 한 미야지의 얼굴은, 방금 사랑에 빠진 감수성 넘치는 소녀마냥 발갛게 달아올랐다.
**
미야지상, 좋아해요. 하야마의 입버릇 중 하나이다. 좋아해요, 좋아해요. 처음에는 턱없이 귀찮았고, 최근에는 사랑스럽기 그지없었고, 현재는 불만이 눈덩이같이 불어났다. 좋아한다는 말을 융단폭격처럼 쏘아대 모르고 있었지만, 생각해보면 '좋아한다'는 말은 꽤나 애매한 말이다. 친구에게도 동료에게도, 애완동물에게도. 심지어 한낱 물건이나 음식따위에 대해서도 막연하게 좋아한다 말하는 건 흔하디 흔한 일이었기에 미야지는 불안함을 느낀다. 좀처럼 사랑한다는 말을 쓰지 않는 하야마는, 무뚝뚝하면서도 불같은 성격 탓에 마음을 표현한다는 것에 항상 어려움을 느끼는 미야지로써는, 참 답답할 노릇이었다. 어느날 용기내어 어이, 코타. 사, 사랑해. 라고 말했을 땐, 환한 미소와 저도요, 하는 답변, 그리고 섹스만이 돌아왔다. 결국엔 직접적으로 사랑해요, 사랑해. 하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것이다. 혹시나, 한창 왕성할 나이이니 육체적인 관계만을 바라고 만나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목구멍 끝까지 밀쳐올라와 결국 미야지는 하야마에게 묻고 말았다. 너 혹시, 나랑 섹스하려고 만나니?
"에? 아니, 그보다 미야지상 섹스 엄청 못하잖아요."
뻣뻣하게 굳어서는 힘도 잘 안풀어주고, 아프다고 매번 울기만 하고. 하야마의 상상을 초월할 대답에 울컥 눈물까지 올라온 미야지는 물기 가득한 목소리로 하야마에게 마구 쏘아붙인다. 개새끼, 정말 아픈데. 좋다고 앙앙거리는 것도 적당히 아파야 되는거지, 네 자지가 큰 걸 탓하란말이야. 안박혀봤음 말을 하지 말라고!
"내가 왜 너같은걸 사랑해서..."
그새 눈물에 젖어 붉어진 미야지의 눈을 한참 바라보던 하야마는 자신보다 10센치는 더 큰 미야지의 머리통을 끌어안아 발꿈치를 들어 콧잔등에 입을 맞춘다. 미야지상, 방금 사랑한다고 한거죠? 동문서답을 넘어서 정말 자기 맘대로 구는 이 독재자에게서 벗어나려 꽉 쥔 주먹으로 단단한 가슴을 밀어내려 하지만, 하야마의 따끈한 체취를 맡은 이상 미야지의 팔에 힘이 들어갈 리 만무했다. 솜방망이같은 주먹을 손쉽게 버티며 하야마는 미야지가 사랑스러워 마지않는 발랄한 목소리로 말한다. 미야지상, 울면 꼴려요. 섹스할 땐 통나무 자루 같지만, 그래도 좋아요. 그래도 울면 못생겼으니까, 울지 말아요.
"개새끼, 너, 정말 개새끼야."
미야지는 하야마의 말을 듣자마자 주저앉아 펑펑 울기 시작하고, 하야마는 아무말 없이 함께 쪼그리고 앉아 제 품에 이 사랑을 갈구하는 가여운 연인을 보듬는다. 울지 말라니까.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뿌리치면서도, 미야지는 그 다정한 손길이 너무나도 좋다는 사실에 치를 떨어야 했다.
**
[오늘은 일찍 들어와요. 늦게 오면 난폭하게 할테니.]
하야마가 보낸 문자에 잔뜩 골이 난 미야지는 그때부터 친구들과 연락을 잡기 시작한다. 너도 한 번 당해봐라, 후환이 두렵기야 했지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미야지는 반항하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친구들과 오랜만에 피씨방에도 가보고, 노래방에서 그리웠던 미유미유의 노래도 불러보고, 술까지 한 잔 걸치고 보니 벌써 11시가 넘었다.
"아아, 어쩌지."
뒤늦게 불안해진 미야지가 빠른 걸음으로 하야마가 기다리고 있을 집으로 향하다 불현듯 휴대폰을 보니, 부재중 전화가 족히 50통은 온 듯 보였다. 에라, 모르겠다. 택시를 잡아 빠르게 집 앞에 도착해보니, 익숙한 머리통이 손톱을 물어뜯으며 쪼그리고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코타?
"왜, 왜 이제 와요. 빨리 오라고 했잖아."
미야지는 처음으로, 그 하야마가 이를 갈정도로 분노하는 모습을 보았다. 왜, 오늘 무슨 날이라도 돼? 스스로도 놀랄만큼 건조한 목소리로 답한 미야지는 한순간에 치솟은 화로 녹아버릴듯 하던 얼굴이 죽을듯이 아픈 얼굴로 변하는 모습을 보고 당황하고 말았다. 너답지 않게, 코타. 미야지의 말에 하야마는 애써 평소와 같은 얼굴을 보이려 노력한다. 일단 들어가요. 들어가서 얘기하자. 차가우면서도 어딘가 삐진 어린아이같은 말투를 하는 하야마는 낯설다. 저기, 정말로 오늘이 무슨 날...
"어라."
집에 들어가자마자 이리저리 붙은 풍선들과 아기자기한 인테리어, 아무리 둘러봐도 파인애플로밖에 이루어지지 않은 케이크가 어색하게 미야지를 반긴다. 아, 그제야 생각난 듯 미야지는 멍청한 소리를 낸다. 나 생일이었지. 미야지는 조심스레 하야마의 얼굴을 살핀다. 미안, 진짜 잊고있었어. 고마워, 정말로. 말주변이 없는 자신을 원망하며 그렇게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하자 하야마는 금새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좋아, 오늘 생일이니까 용서할게요. 케이크, 먹을래요? 사실 먹을 생각이 없는 미야지였지만, 하야마의 목소리가 어딘가 절실해 어쩔 수 없이 먹겠노라 대답했다. 빵이나 생크림이 들어가긴 했을지, 거대한 파인애플 덩어리로만 보이는 케이크를 잠시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던 미야지는 포크를 들어, 구석을 조금 쪼개 먹는다.
"미야지상."
큽, 정적속에 달달한 파인애플을 씹던 미야지가 사레가 들릴 듯 급하게 씹기를 멈추고 하야마를 바라본다. 시계는 이미 미야지의 생일을 밀어버릴 듯 위태롭게 오늘의 마지막 시간을 지키고 있었다. 답지않게 분위기를 잡는 하야마가 익숙하지 않아 헛기침을 하려던 참에, 어색하게 들어올려진 손에 차가운 감촉이 닿아온다. 무슨 일인가 싶어 손을 내려다 보니, 은색으로 반짝이는 체인과 심플한 디자인의 반지가 놓여있다. 미야지의 눈이 놀라움과 경악으로 커진다. 이, 이게 뭐야?
"느긋하게 즐기다가 로맨틱하게 줄 생각이었는데, 누가 늦게오는 바람에 이렇게 급하게 주게 되었네요."
하야마가 한쪽 무릎을 꿇고 미야지의 앞에서 자세를 낮춘다. 미야지상, 미야지 키요시. 나와 결혼해줄래요? 하야마의 고백에 의지와 상관 없이 눈물샘이 터진 미야지는, 대답도 하지 못한 채 펑펑 울기만 한다. 바보, 남자끼리 어떻게 결혼을 해. 못할 건 뭔데요? 난 많이 무뚝뚝하고, 다혈질이고, 품에 쏙 안기는 작은 여자애도 아니고, 섹스도 못하고...
"나 미야지상에게 거짓말했어요."
하야마가 뜬금없이 내뱉은 말에 미야지는 순간 흐느낌마저 멈추고 하야마를 바라본다. 하야마는 눈물로 범벅이 된 미야지의 온 얼굴을 닦아주며 속삭인다. 우는 얼굴이 못생겼다고 한 것 말이에요. 거짓말이에요. 당신이 못생길 수 있다니, 말도 안돼. 항상 나한테는 제일 멋지고, 예쁘고. 하지만 정말로 우는 건 싫어요. 나때문이면 더더욱. 하야마의 말에 미야지는 커다란 눈을 더 크게 뜨고 하야마와 눈을 마주친다. 꿈 아니지, 정말로? 정말로. 말이 끝나자,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잡아먹을 듯 한 키스를 나누는 둘의 입안에서는, 눈물의 짠 맛이 가득했다. 그것은, 비단 미야지의 것 만은 아니었다.
거칠게 굴거라 문자로 예고했던것과는 다르게, 둘은 그 어떤때보다 부드럽게 섹스를 했다. 처음으로 쾌락에 허리를 비틀며 코타, 코타... 하야마의 이름을 부르는 미야지에게 쉴새없이 키스하며 하야마는 아껴왔던 사랑한다는 말을 숨기지 않는다. 사랑해요, 미야지상. 사랑해요. 그 말이 너무 절절해, 미야지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나도 많이 사랑해. 한시도 마주친 눈을 떼지 않는 둘의 눈에서는 뜨거운 액체가 쉴새없이 흘러 서로를 적신다. 미야지는 하야마의 단단한 등을 끌어안으며 생각한다. 비록 눈치없고 잔인할지라도, 미야지는 하야마가 아니라면 살아갈 수 없다. 하야마 또한 마찬가지이기를 바라며, 미야지는 절정의 신음과 함께 파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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