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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가지 길

운영자 2022.06.27 10:01:12
조회 259 추천 11 댓글 1

고등학교 시절 그 친구는 항상 머리를 빡빡 깍고 다녔다. 느릿느릿한 낮은 어조의 말투에 행동도 신중했다. 나는 그를 ‘달마’라고 불렀다. 왠지 수도승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느리지 않았다. 운동장에서 백미터 달리기를 할 때였다. 평소 명상하며 산책하는 듯 걷던 그가 몸을 한번 활같이 뒤로 뒤채더니 신호가 떨어지자 총알같이 달려가 신기록을 세웠다. 공부도 마찬가지였다. 평범해 보이는 그는 남들의 추격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성적이 뛰어났다. 그렇다고 그가 일류과외를 하거나 학원을 다니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바로 서울법대에 들어가고 재학 중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그래도 그는 젊은날 빠지기 쉬운 가벼운 건방이나 오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내가 철원에서 법무장교생활을 할 때 그는 상급 부대의 검찰장교였다. 그는 더러 내 숙소에 놀러와 이런저런 말을 하고 돌아갔었다. 그가 제대를 하고 검사가 됐다. 그 얼마 후였다. 우연히 만난 자리에서 그가 이런 말을 했다.

“검사 이 짓 못 해 먹겠어. 여태까지 내가 해 왔던 일 중에 가장 지저분하고 힘든 짓이야. 어떤 일을 해도 이보다는 쉬울 것 같아.”

그의 인간을 대하는 시각이 남들과 다르다는 걸 나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내가 몇 달 동안 잠시 검사직무대리를 할 때였다. 인권변호사로 알려진 고교 선배인 조영래변호사가 변론을 하기 위해 검사실로 찾아왔었다. 그는 내게 수갑에 포승까지 차고 들어온 피의자에게 그 묶인 줄을 풀어주고 자판기 커피 한 잔 주어 보라고 했었다. 인간을 보는 마음의 눈을 가지라는 귀한 잠언이었다.

어느 날 고교동기인 그가 사표를 내고 지방의 작은 도시에 소박한 법률사무소를 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로부터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그가 말기간암으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는 소식을 끊고 세상에서 사라진 것 같았다. 마치 짐승들이 죽을 때가 되면 아무도 모르는 자기만의 장소로 찾아가서 웅크리고 있듯이. 몇 년 후 살아난 그를 우연히 만났었다. 그는 자신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과정을 내게 얘기해 주었다.

“우리 집안은 아버지도 형도 간암으로 죽었어. 그런데 어느날 나도 간암진단을 받은 거야. 벌써 얼굴에 기분 나쁜 어두운 그림자가 생기고 몸에서 냄새가 나더라구. 어쩌겠어? 내게도 그 시간이 운명같이 닥쳐온걸. 방에서 죽음을 마주하면서 누워 지냈지. 그런데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저주가 쏟아져 나오더라구. 왜 내가 이래야 하느냐고 말이야. 도저히 받아들여지지가 않았어. 그러던 어느 날 그 광경을 보고 나는 도저히 그대로 죽을 수 없었어.”

“그게 뭔데?”

보통은 그렇게 저항하다가 죽음을 받아들이기 마련이었다..

“어느 날 한밤중에 아파서 눈을 떴어. 벽에 걸린 시계가 밤 한시를 알리고 있더라구. 그런데 그때 조금 열려진 방문 틈으로 희미한 불빛이 비쳐 들어오는 거야. 내가 기어서 문틈으로 무심히 내다 봤어. 거실 구석에 있는 촛불이 켜져 있었는데 그 앞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녀석이 무릎을 꿇고 하나님 우리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비는 거야. 그걸 보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지. 그 맑은 눈망울을 뒤에 두고 도저히 그냥 저승으로 갈 수가 없는 거야. 일단 살려고 노력하는 데 까지 해 보기로 결심했어. 전 재산을 팔아 미국에 가서 간이식수술을 해보기로 했지. 급하게 집을 팔려고 하니까 값을 반으로 후려치는데 세상이 참 잔인하더라구. 미국을 가서 교통사고로 죽은 흑인 고등학생의 간을 이식받았어. 그 학생 덕분에 나는 다시 살게 된 거야.”

그 이후 그의 삶은 은자같이 조용했다. 그의 성품으로 미루어보아 그가 어떤 삶을 사는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이십년 쯤 후였다. 우연히 일이 있어 서울에 올라온 그를 그를 보았다. 그의 옆에는 젊고 잘생긴 청년이 있었다. 그는 자기 아들이라고 내게 소개했다. 아마도 촛불 아래서 기도하던 그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들인 것 같았다. 그 아들도 변호사라고 내게 소개했다. 길에도 세상 길이 있고 또다른 하늘길이 있는 것 같다. 검사를 하고 국회의원 장관을 하고 대통령이 되는 사람이 있다. 성공을 거머쥔 세상길이 아닐까. 그 친구같이 검사직의 사표를 내고 죽음의 강을 헤엄쳐 건너편 언덕에 올라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한 삶을 사는 경우도 있다. 어떤 영혼이 더 행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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