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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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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보이지 않는 위험
이두나는 푸른 정원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하늘은 새파랗게 맑고, 사방에 알록달록한 꽃들이 한껏 만개했다.
더없이 아름다운 날이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나비가.......”
이두나의 머리 위로 나풀거리던 나비 한 쌍이 위태롭게 흔들리다가, 추락하듯 잔디 사이로 툭, 스러졌다.
그러자 그 순간, 나비가 떨어진 곳에서부터 검은 불길이 치솟더니 순식간에 거대한 화마가 되어 들판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놀란 이두나는 옆으로 손을 뻗으며 어서 도망치자고 말했다.
<누구를 찾아?>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정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야, 내가 혼자 있었을 리가 없어.’
분명 누군가와 이곳에 같이 있었다.
이 정원처럼 빛나고 아름다운 사람. 그 사람이 꽃을 꺾어주었는데.......
더듬더듬 시선을 옮기자, 손에 걸친 샛노란 프리지아 생화가 불길에 휩싸였다.
타오르는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세상은 검붉은 파스텔로 뒤덮여갔다.
목소리가 조금 전보다 더 선명해졌다.
<뭐가 더 잘났다고 네가 선택을 받은 거지?>
“그게 무슨 말이야?”
순식간에 뼈를 파고드는 추위를 느끼며 이두나는 얼떨결에 되물었다.
‘선택? 무슨 선택?’
<네 얼굴을 보고 있으면, 갈기갈기 찢어서 죽여 버리고 싶어. 알아?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다고.>
“.......”
나는 여기가 어디고 네가 누군지도 모르겠는데.
속으로만 삼키고, 대신 이두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저기, 일단 진정하고 나 좀 도와주지 않을래? 우리 뭔가 오해가 있나 본데-”
<입 다물어!>
형체가 없는 미지의 목소리가 화를 낼수록 주변이 점점 추워졌다. 추위도 추위지만, 머리를 자꾸 뒤집어놓는 촉감에 이두나는 멀미도 느꼈다.
<잘 들어. 널 정말 죽이고 싶지만, 그러면 주인님이 아파할 테니까. 그 사람이 아픈 건 내가 더 싫어. 젠장, 역시 너보다 내가 훨씬 소중하게.......>
목소리가 말끝을 흐림과 동시에 얼었던 몸이 서서히 녹는 것 같았다. 어두컴컴한 세계 저편에서 불빛이 조금씩 들어왔다.
이때다 싶어서 이두나는 목소리의 방향을 헤아리며 은근히 물었다.
“그런데 여기는 어디야? 꿈인가? 네 주인님은 또 누구고.”
<...... 아무튼 계속 지켜보겠어.>
목소리는 이두나를 무시하면서 말했다.
<네가 이제라도 분수에 맞게 행동할지. 그게 아니고 또 나를 자극한다면, 그때는 며칠 쓰러지는 거로 끝나진 않을 거다.>
“그것참 살벌한 작별 인사네.”
이두나의 중얼거림에 목소리는 날카롭게 비웃으며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기억나지 않는 건 그대로 고이 묻어 두는 게 신상에 좋아.>
‘기억나지 않는 거?’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싶어서 이두나는 갸우뚱했다.
곧 목소리의 비웃음이 허공으로 흩어지면서, 마침내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지고 빛무리가 이두나의 눈을 쪼아댔다.
그리고 언제부터 조각나있었는지 모를 기억들이 차례대로 물밀 듯이 돌아왔다.
내 이름은 이두나, 태양의 자손. 지금은 아렌델의 비서장. 19년 동안 차곡차곡 쌓아왔던 삶의 흔적이 다시 수복되고 있었다.
그런데 딱 하나의 자취가 잡힐 듯 말 듯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그 사람.’
정원에서 꽃을 건네주었던 그 사람은 누구지?
알 수 없었다. 아니, 누군가 자신에게 꽃을 건넸다는 사실조차 희미해져 갔다.
이두나는 떠올려보려고 끙끙거리다가, 얼핏 육체에 공기와 피가 순환하는 것을 느꼈다. 조금씩 오감이 살아난다. 막혀있던 혈관이 펑 뚫리는 쾌감과 함께.
‘으음.......’
오랜만에 움직여서 그런지 삭신이 찌뿌둥했다. 양옆에서 조잘대는 소리에 이두나는 인상을 구겼다.
“...... 비서장님, 들려요?”
“눈을 뜬 거 같은데?”
“맙소사, 이두나 양!”
그리고 사흘 만에 잠에서 깨어났다.
***
아그나르는 흠 없는 왕세자가 되기 위해 어려서부터 마음 다스리는 법을 배웠다. 심박을 늦추고, 숨을 고르고, 생각을 정리한다.
별거 아닌 것 같아도 그런 행동 가짐을 익히다 보면 인내심을 단련하는 데 도움이 됐다. 실제로도 정적들과 설전을 벌일 때 드러난 아그나르의 자제력은, 보는 이로 하여금 굉장한 귀감이 되곤 했다.
“하아.”
그런데 오늘, 아그나르는 그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르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비서장님, 몇 개로 보이십니까.”
셰리아가 손가락으로 숫자 삼을 만들고 흔들면서 말했다.
“세 개잖아. 내가 바보가 된 줄 알아, 셰리아는!”
검진이랍시고 엄숙한 표정을 하고서 정작 하는 질문은 엉뚱한 기사단장의 행동에, 이두나는 킥킥대면서 웃었다. 방금까지 쓰러져있던 사람이 맞나 싶을 만큼 낙천적인 모습이었다.
‘...... 괜찮은 건가.’
이두나가 깨어났다는 보고를 듣고 회의를 파하면서까지 달려온 아그나르는, 막상 그녀를 마주하자 두려움에 망설였다.
껴안고 둘이서만 이야기하고 싶은데, 섣불리 다가갔다가 다시 저주가 발동할까 싶어서. 방심은 금물이기에 건강 상태부터 체크하기로 한 것이다.
시녀들이 우르르 고개를 들이밀고 이두나를 불렀다.
“비서장님! 제 이름은?”
“로라.”
“저는, 저는요?”
“라냐.”
“그럼 이분은요?”
“...... 헉! 누구더라?”
이두나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머리를 부여잡자, 그들은 해악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순간, 방 안에 긴장되는 공기가 흘렀다.
“풉.”
“?”
“푸하하하하!”
“.......”
자신들이 속았다는 걸 깨달은 시녀들이 툴툴거리고, 이두나는 자기 이마를 탁 치면서 반대 손으로 침대를 쿵쿵 두드렸다.
“다들 쫄기는! 내가 어떻게 겔다를 잊을 수가 있겠어?”
“하.......”
“비서장 맞네.”
겔다도 그제야 식은땀을 닦으며 안심했다. 진지한 순간에 장난치면서 남들 애간장을 태우는 건 이두나의 주특기였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던 아그나르가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서서 셰리아에게 물었다.
“왜 갑자기 깨어난 거지? 일단 이대로 둬도 괜찮을까?”
“악한 기운은 전부 사라졌습니다.”
셰리아는 주먹 옆으로 이두나의 무릎을 살짝 쳤다. 띠용 하는 것처럼 반사적으로 다리가 올라왔다.
“신체 기능도 정상이네요.”
“그래?”
‘그럼 다행이긴 한데.......’
좀 꺼림칙한 부분이 있었다.
범인이 갑자기 죄책감이라도 느꼈나? 아니, 죄책감 정도로 주술을 풀어버릴 거였으면 애초에 시작도 안 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냥 주술사가 죽어버린 걸지도.
어느 쪽이든...... 뭐, 결과적으론 잘된 일이었다.
이두나를 아프게 한 사람을 직접 찢어 죽이고 싶기는 하나, 그녀가 멀쩡히 저에게 다시 돌아왔다는 것 자체에 감사해야 했다. 게다가 지금은, 이두나만을 보고 싶었으니까.
“다 나가 있어.”
쉰 목소리로 이두나를 제외한 모두에게 축객령을 내리자 시녀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이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방을 빠져나갔다. 셰리아를 마지막으로 문이 닫히고, 아그나르는 오랜 연인에게 다가갔다.
“폐하?”
“보고 싶었어.”
이두나의 어깨 위에 코를 묻고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녀에게서 달콤한 메이플 시럽 향기가 났다. 오직 이두나만이 가지고 있는.
“저, 폐하, 걱정해주신 건 감사한데......”
“애칭으로 불러줘.”
“애, 애칭이요?”
부끄러워서 그런지 이두나는 눈을 멍하니 뜨고 어정쩡하게 굳어버렸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아그나르는 더욱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응. 둘이 있을 때는 항상 아그나라고 불렀잖아.”
“제, 제가 언제요?”
아그나르는 서운한 마음에 그녀의 손가락을 자신의 입술로 가져가며 천천히 키스했다. 나름의 표현이었다. 내가 이렇게나 너를 원했다고. 네가 돌아와서 너무 기쁘다고.
그런데 이두나가 그걸 거부했다.
“악! 그만 하세요, 폐하!”
“?”
아그나르는 어깨가 밀려나며 몸이 주춤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쫘악
빛의 속도로 뭔가 날아들어서 고개가 저절로 돌아가더니, 이내 뺨이 얼얼하게 아려왔다.
‘뭐지.’
나 지금 싸대기 맞은 건가?
아그나르가 상황을 인식하기도 전에, 이두나는 꿈틀대며 침대 머리맡으로 도망치고는 이불을 코까지 끌어올렸다. 그리고 뭔가 아주 소중한 것을 빼앗긴 요조숙녀처럼 씩씩거렸다.
“그런 건 서로 좋아하는 사람이랑 하는 거라고요!”
저건 또 무슨 소리인가.
우리가 그 ‘서로 좋아하는’ 사이잖아?
아그나르는 방금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생각해봤지만, 전혀 떠오르는 게 없었다. 이렇게 대놓고 스킨쉽을 싫어하는 반응을 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아무튼 일단 사과부터 해야 했다.
“혼자 너무 나간 거라면 미안해. 하지만 이보다 더 진한 것도 많이 했잖아? 우리.”
“지, 진한 거?”
만회하려다 더 어긋나버린 느낌에, 아그나르는 침착하라며 애써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이미 이두나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 이유가 설레어서가 아니라 수치심 때문이었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 저, 이두나?”
“나가.”
“못 들은 걸로 해주-”
“당장 나가라고, 이 파렴치한아!”
그 말과 함께 이두나 옆에 있던 베개며 실내화가 총알 세례처럼 날라왔다.
본능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낀 아그나르는 몇 마디 말을 더 붙여볼 새도 없이 방에서 쫓겨나왔다.
“아.......”
그리고 밖에는 늘 그랬듯이, 시녀들이 줄지어 앉아서 둘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이건 또 뭔.......”
“불쌍한 폐하!”
“저희는 못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암요.”
“괜찮아요, 폐하. 싸우면서 더 깊은 사이가 되는 거죠, 뭐.”
“.......”
아그나르는 양손으로 자기 얼굴을 길게 쓸어내리며 탄식했다.
***
최근 대륙에서 정체불명의 무장 단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규모는 일개 제후국 방위군에 미칠 만큼 미미했지만, 그들 개인의 국적과 신분을 특정하기 힘들었고, 무엇보다 조직적으로 무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위협적이었다.
이에 각국의 수뇌들은 유대를 돈독하게 하는 서신을 주고받으며 군사적 협력을 도모했다.
오늘 셰리아가 소집했던 국무 회의에서도 그 건이 주가 되었다.
“단장의 뜻대로 지원군을 보내는 것이 좋겠네. 그리고 해당 군의 관할은 셰리아 단장이 제일 적임자가 아닐까 싶군.”
아그나르 왕은 셰리아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비서장을 진료하고 난 후부터 받게 된 신임이었다. 왕의 신임을, 고작 성기사의 통찰을 이용한 진료 한 번에 말이다.
“.......”
비서장.
왕에게는 언제나 비서장이 최우선이었다. 그렇다고 결코 국정을 소홀히 하거나 가볍게 여긴 것도 아니다. 다만 국가와 비서장을 두고 저울질을 했을 때, 그가 비서장을 택한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는 것이다.
그만큼 왕은 이두나를 사랑했다.
‘아무렴, 잘 진행되고 있던 회의를 흐지부지 끝내버리고 달려갈 만큼 사랑하겠지.’
하지만 셰리아는 그게 잘못된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게 얼마나 고달픈 일인지, 자신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곱씹으며 셰리아는 축객령을 받고 퇴근하는 길이었다.
“이것들아, 나 공주라니까? 기억 안 나? 저번 달에 여기 왔었잖아. 너희 왕 대관식 하는 거 보러!”
성문을 지나 집으로 향하려는데, 해자를 연결하는 다리 앞에서 실랑이가 벌어진 듯했다.
셰리아는 경비병들을 헤집고 소리 나는 쪽으로 갔다.
“무슨 일입니까?”
흙탕물이 잔뜩 묻은 로브를 걷자, 곱상하고 귀족적인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셰리아가 아는 얼굴이었다.
“그래, 드디어 상관이 나오는군. 나는 바사르의 루나 공주다. 어서 나를 왕한테-”
공주는 말을 하다 말고 셰리아를 찬찬히 뜯어보다가, 갑자기 기억이 났는지 소리쳤다.
“어! 너 몇 년 전에 우리 쪽으로 유학 왔던 기사지? 얼굴 보니 알겠네. 이름이 뭐더라? 뭐시기...... 쉐이크?”
“셰리아입니다. 대관식 때는 치안 유지 때문에 경비를 서느라. 인사를 못 드렸네요.”
“그래서 성안에 없었구나!”
공주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면서 히죽 웃었다.
“맞아. 그때 오빠가 너 보고 싶다고 데려오라고 난리도 아니었지.”
“네?”
그 다혈질 또라이 말입니까?
라는 생각은 생각으로만 놔두고, 대신 셰리아는 정중하게 되물었다.
“펄린 왕자님이 말입니까?”
“그래. 다음에 한번 휴가 내고 바사르로 놀러 와. 오빠가 좋아하겠네.”
좋아하다니? 내가 아는 그 왕자 펄린이?
“자, 아무튼 지금은 나를 네 주군에게 안내해보실까? 암살하러 온 거 아니니까 걱정 말고.”
께름칙한 농담을 하며 공주가 호기롭게 셰리아의 어깨를 탕탕 치자,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응접실까지 에스코트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머리로는 생각이 멈추질 않았다.
성격 급한 바사르의 왕가의 남매. 프린스 펄린과 프린세스 루나.
바사르 왕궁에서 훈련을 받은 경험이 있는 셰리아로서는 둘 다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특히 펄린 왕자라 함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앞뒤 안 보고 달려드는 우악스러운 작자였다. 셰리아가 유학 가 있던 시절에, 아렌델 최정예의 콧대를 꺾어주겠다며 몇 번이나 셰리아에게 대련을 신청하고서 매번 보기 좋게 털렸다.
그렇게 열등감과 경쟁의식을 가지게 만들었으니, 결코 그와 좋은 사이였다고 말할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런 사람이 나를 왜?’
셰리아는 계속 궁금해하면서도, 신나서 뛰어다니는 루나 공주를 응접실까지 정중히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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