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빈티지 만년필들의 글씨각인 닙이 너무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그래서 질렀습니다.

이 물건은 1948년부터 1953년도까지 미국 파커사의 분사였던 영국 파커사가 생산한 물건입니다. 사실 덴마크산도 있는 모양이지만 가장 흔한 버전은 영국산인듯 합니다. AF가 의미하는 것은 알루미늄 버튼필러입니다. 이 모델의 바로 전작인 NS까지는 미국 듀오폴드에서 보이는 버튼필러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델은 기존의 버튼필러 대신 새로운 디자인과 재질 그리고 유선형의 블라인드 캡(필러 막대부분을 가리기 위한 뚜껑)을 채용했습니다. 이 시기 듀오폴드들은 현행의 듀오폴드와 같은 파카의 플래그쉽 라인업이 아니었습니다. 

뚜껑을 닫았을 때 길이는 13cm, 배럴 끝부터 닙 끝까지는 12cm입니다. 무게는 저울이 없어서 잴 수 없었지만 20g도 나가지 않을겁니다. 상당히 작고 가벼운 펜입니다. 뚜껑을 배럴 뒤에 끼우면 15.5cm정도입니다. 무게 중심은 정중앙 쯤에 위치해있는 밸런스가 좋은 펜입니다. 다만 펜이 작기 때문에 손이 조금이라도 큰 사람들은 뚜껑을 뒤에 끼우고 사용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아, 물론 내 손엔 딱입니다. 

뚜껑이 닫으면 배럴에 간섭하여 스크레치를 만들 정도로 밀착됩니다, a4용지가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요. 이 듀오폴드 뚜껑에는 구멍 양 옆으로 2개나 있습니다. 이 구멍의 용도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한 해석이 없어서 구체적으로 뭘 위한 것인지 잘 모르겠네요.(*문갤에서 이 구멍의 용도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확실한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빗살무늬 링 쪽은 도금 상태는 상당히 좋은데, 클립 쪽은 분해까지 하여 확인해본 결과 뒤쪽과 측면의 도금 상태가 그리 썩 좋지 않습니다. 도금이야 어쨌든 캡 어디에도 크랙이나 깊은 스크래치가 없는 점이 다행입니다. 많은 빈티지 펜들의 뚜껑은 링 아래쪽으로 크랙이 진행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유럽 웹 쪽의 정보를 몇 가지 접해보면 이 펜의 닙이 세미-플렉스(약한 연성)를 띈다는 말들을 일부 볼 수 있었습니다. 솔직히 이 점은 걱정했는데, 실제로 경험해보니 약한 필압에서는 문제가 없는 수준입니다. 그냥 탄성 있는 닙 정도로 느껴집니다만...별로 실험해보고 싶지는 않네요. 닙의 전반적인 상태는 그냥 괜찮네- 정도입니다. 닙 위에는 PARKER DUOFOLD 14K PEN N 이라고 음각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N은 Newhaven공장에서 생산됐음을 의미합니다. 영국 듀오폴드 NS와 AF에서만 쓰인 닙인듯 합니다. 이후 영국 듀오폴드에서는 모델에 따른 숫자코드를 음각했습니다. 닙의 길이는 2.1cm로 파이롯트 5호닙과 비슷할 것 같습니다만, 닙 앞쪽의 두께는 현행 파이롯트보다 약간 더 두껍습니다.    

닙을 처음 봤을 때 가장 인상적인 점은 살짝 아래로 굽어있는 것과 두툼한 팁입니다. 정면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닙이 살짝 굽어있습니다. 파이롯트 카에데의 닙이 이와 비슷합니다만, 듀폴이 좀 더 낭창하다는 느낌입니다. 팁이 두툼한 점도 참 인상 깊습니다. 정말 크고 많이 달렸다는 느낌을 한눈에 받았습니다. 분할도 매우 잘 갈려있고 정렬도 완벽합니다. 전 주인들이 조금 사용하여 아주 살짝 마모되긴 했지만 편마모가 아니기 때문에 사용하는데 무리는 없습니다. 부드럽고 탄력 있는, 그런 재밌는 필감입니다. 두툼한 팁 때문에 유럽 m닙 정도로 나올 줄 알았지만 실제로는 f 정도의 굵기입니다.  

피드는 잔기스가 조금 있긴 하지만 윤기 있고 어디 한 곳 찍힘 없이 깔끔합니다. 피딩성능에 대해서는 아직 뭐라고 말할 수 없겠네요. 뒤에 후술합니다. 

이게 바로 알루미늄 필러의 버튼부분입니다. 생산연도에 따라 금색으로 도금된 물건과 아닌 물건이 있는거 같습니다. 어쨌거나 저 버튼을 누르면 안쪽의 프레셔바(쇠막대기)가 쌕(잉크주머니)를 눌러서 잉크를 빨아올리는 구조입니다. 누르는 느낌은 파이롯트 컨버터 con-70과 비슷합니다. 전 주인들 중 누군가가 사용하다가 쌕이 터졌는지 필러 나사선에 잉크때가 잔뜩 끼어있었습니다. 

중요한건 안에 쌕이 없습니다. 

영국셀러는 정직했습니다. 전반적인 세척과 오래된 쌕을 제거했다는 언급 그대로 입니다. 

버튼필러 자체는 작동하지만 쌕이 없으니 잉크 충전이 안 됩니다. 당분간 딥펜 신세를 면치 못하겠습니다. 흐름이나 피딩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어렵네요.     

그리고 셀러가 언급했던 블라인드 캡입니다. 셀러는 펜의 다른 부분에 비하면 검지 않다고 언급했는데, 실물로 보니 변색이 됐네요. 이 검정 플라스틱 안쪽을 라이트를 비추면 녹색빛을 띄는데, 이로 인해 블라인드 캡은 살짝 녹색끼가 돕니다. 다행히도 색상이 검정색이라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변색됐는지 쉽게 구분되지는 않습니다. 다른 듀오폴드AF 사진들을 보면 이 부분이 변색된 것을 꽤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각인 부분은 생각보다 선명하게 남아있었습니다. 초크 자국도 조금이나마 남아있습니다. 이 각인 부분은 두 가지 버전이 있는데 이 또한 생산연도에 따라 조금 차이가 있는 듯합니다. 전체적인 표면 상태는 사진 속에 보이는 것과 같이 잔기스가 덕지덕지 나있습니다. 변형, 크렉, 깊은 스크래치가 없는 것만으로 감사할 따름..

개인적으로 쌕을 갈아주고, 전반적인 폴리싱 작업도 좀 해줘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음에는 쉐퍼 라이프타임닙을 가진 녀석들도 한개 정도 들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