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략...
폴링양. 연령 불명 출신지 불명.
‘폴링’이 성인지 이름인지조차 알 수 없는 그녀는 모두 알다시피 이곳 TF에서 관리자의 지시에 따라 모든 일처리를 맡고 있다.
그 많은 일을 해내면서도 용병들이 일으키는 자잘한 실수들 또한 폴링 선에서 전부 해결했다.
예를 들어 방향을 잃은 포탄이 인접한 마을과 너무 가까이 떨어지는 바람에 용병들이 싸우는 전장이 발각될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가짜 서류를 작성한다던가. 그 외에도 이곳 TF의 존재에 의문을 품고 다가오는 이들을 깔끔한 솜씨로 매장 한다던가.. 등등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업무를 폴링양 혼자서 전부 해내고 있었기에 폴링양에겐 보통 사람들이 가지는 주 1회의 휴무일을 누릴 수도,
친구를 사귈수도(이성친구는 더더욱!), 모자란 잠을 늘어지게 푹 잘 수도 없었다.
다른 날과 별다를 게 없는 평범한 날.
6시 50분. 이른 아침이지만 용병들의 전투가 보통 8~9시 정도부터 시작하기에 폴링은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다.
오늘 전투에 필요한 업무를 해내기 위해.
“헤이 폴링양~~~제가 치킨바구니를 한 상자..”
“스카웃, 당신이 쓰고 있는 스캐터건의 탄약은 보급창고 31번의 2층 A열 라인에 진열돼 있어요. 보급품을 옮기던 사람이 유탄 구덩이에 빠져서 다리가 부러지는 바람에 당분간은 보급품들은 본인이 직접 가져와야 해요. 서둘러요!”
왠일로 이시간에 깨어있는 스카웃의 속사포 같은 실없는 소리에 답변을 해주기엔 너무나도 바빴던 폴링양은, 그보다 더 빠른 속도의 말투로 용건을 건낸 후 다음 일을 처리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7시에 문을 여는 식당에 들러 바구니에 쌓여있는 옥수수 스콘 한조각을 집어들고 바로 다음으로 가야 할 장소로 걸어나간다.
다리가 꼬이지 않다록! 한무더기의 서류철이 쏟아지지 않도록! 다음 일처리 절차를 생각해두면서! 폴링은 옥수수 스콘을 크게 한입 베어물었다.
서류철 위에 빵가루들이 흩날렸지만 그걸 방지하기 위해 맨 위엔 언제든 버려도 되는 이면지를 올려두었다.
“휴..이런 젠장”
폴링의 아침식사는 늘 이런식이다. 먹고 남은 빵들을 담은 바구니에서 꺼낸 촉촉한 기라고는 다 사라진 스콘 종류나 너무 구워져버린 토스트 조각들. 좀 부지런한 담당 조리사가 출근하는 날에는 일찌감치 헤비가 생명처럼 여기는 그 맛좋은 샌드비치로 속을 든든하게 채울 수 있었지만-물론 헤비가 먹는 샌드비치는 메딕이 무언가 알수없는 약물을 가득 첨가한 전술용 도구에 가까웠다-
그마저도 한달에 며칠 되지 않는 날이었고 늘 말라비틀어진 빵을 주워 입에 우겨 넣은게 폴링의 아침식사였다.
점심식사는 그.나.마 5분간의 짬이 났다. 앉아서 스푼이나 포크를 사용하여 먹을 수 있는 따뜻한 음식을 일어나자마자 처음으로 먹는 순간이었다.
중간중간 영양가라곤 설탕덩어리 밖에 없는 -파이로가 좋아하여 곳곳에 널브러져 있는-
과자류로 허기를 달래고 저녁은 일회용 종이컵에 담을 수 있는 샐러드류 한컵으로 식사를 마무리 했다.
입가심용 차를 탈 시간이 없어 잠깐 스폰룸에 들러 정수기에서 따뜻한 물을 한컵 뽑아든 후 전투가 시작되기 전 필요한 모든 준비들을 마친다.
전투가 시작된 후 긴장이 풀린 폴링은 컵에 담긴 식어빠진 물을 천천히 들이키며 매일아침 겪어오는 긴장감을 살짝 내려놓았다.
"...4
3
2
1
FIGHT!"
관리자의 목소리와 함께 전투가 시작되었다. 폴링은 관리자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조금 다른 톤이라 느꼈다. 피곤함? 긴장감?(설마..)권태감? 그녀의 목소리에서 감정을 읽을 순 없지만 뭔가 다른 느낌이라는것은 확실하였다. 요 며칠 강한 모래바람이 불어와서 그런걸까?
첫 전투가 끝난 후 용병들의 팀별 성적을 매기는 잠깐의 시간에 관리자를 만나 그녀의 건강상태를 체크해둬야 겠다고 마음먹었다.
폴링의 오전근무는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이런 씩씩한 폴링에게도 햇병아리 시절이 있었다.
폴링의 나이 열여섯.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폴링이 어떻게 이 TF에서 일하게 된 지는 관리자만이 알 것이다. 말 그대로.
관리자는 이곳으로 흘러들어온 폴링을 모든 면에서 이끌었다.
폴링은 자신이 관리자와 처음 만났던 그 순간을 생생히 기억한다.
모던한 느낌의 사무용 가구들이 늘어져 있는 높은 천장의 사무실. 그녀는 그 어두컴컴한 사무실 안에서 보랏빛 물감을 콕 찍어 놓은것마냥 거기 있었다.
좋은 원단으로 개인의 몸에 꼭 맞추어진 보라색의 정장을 입은 중년의 여성.
그녀의 옷은 주인의 편안한 자세를 허락하지 않는듯 했지만 관리자의 몸짓에서 불편감이 느껴지진 않았다.
관리자는 눈길 한번 주지 않으며 서류상에 적혀있는 폴링의 인적사항을 훑어보고 있었다.
“...그렇군. 앞으로 자네를 폴링양이라고 부르겠네”
“헙..옙..”
“그럼 가보게.”
“어..그....저..저기...”
폴링은 시선을 감히 자신의 나이 많은 상사에게 두지 못한 채 땅바닥을 바라보며 말을 더듬었다.
“저는 그럼 그..쪽을 뭐라고..불러야 한다고 말해야하나...음...그..여사님의 성함이..?”
“그냥 간단하게 관리자라고 부르게”
“예 알겠습니다. 관리자님”
“용건은 간결하게 대답하는 쪽이 앞으로의 업무에 지장이 없을것이네. 폴링양.”
“예!”
폴링이 문앞을 나설때까지도 관리자는 폴링에게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처음 주워졌던 업무들은 결코 쉬운 업무가 아니였다. 관리자가 어지럽게 늘어놓았던(거의 다섯박스나 되는!) 서류들을 순서대로 정리하기,
그녀가 이동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하기, 그녀가 어딘가에 전화를 걸면 옆에있는 보조 수화기를 들어 상대방과 그녀의 대화를 모두 기록하기,
그녀가 미쳐 신경쓰지 못할 자질구레한 정도의 간단한 일은 폴링선에서 알아서 해결하기 등등...
관리자의 곁에서 일하며 폴링이 느낀것은 관리자는 폴링의 보조를 받고 있긴 해도 어마어마한 양의 일을 혼자서 전부 해내고 있었다는 점이다.
수기로 작성되는 서류들은 대충 눈으로 훑어보아도 문법이나 문장 구조에 작은 흠조차 없었다. 그녀의 인상처럼 날카로우면서도 예리한 필체는 손을 가져다 대면 베일듯이 차가우면서도 부드러웠다. 어느정도 일이 익숙해진 지금의 폴링역시 아무리 따라하려 해도 이것만큼은 잘 되지 않았다.
일의 순서가 복잡하게 꼬인다 해도 관리자는 15분 안에 완벽하게 해결해냈다. 마치 머릿속에 철저하게 지어진 궁전의 설계도가 있는것처럼. 웅장한 궁전 어딘가에 보석장식 하나가 떨어져 나가도 고치는건 아무 일도 아닌듯이..
이제껏 자신이 똑똑한 편이라고 생각했던.. 실제로 TF사의 지적능력 검사에서도 지능이 높게 나온 폴링이지만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관리자의 새발의 피도 못따라 간다는것을 받아들였다.
그런 완벽주의자 성향의 상사의 밑에서 일하는건 고된 일이었다. 폴링에겐 모든 일들이 너무나도 힘들었다.
일적인 부분 외의 다른 일상적인 대화가 없이 명령만 내리는 관리자. 그녀를 백업하기 위해서 백방으로 들이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보상은 적었다.
일에 맞먹는 충분한 금전적 보상도, 심적 보상도, 무엇하나 충분치 못했다. 아무도 없는 탕비실 한켠이나 화장실 마지막칸을 걸어잠그고 울었던 적도 많았다.
하지만 똑똑한 폴링에게는 갈곳이 없었다.
폴링을 보살펴줄 가정이라는 울타리도..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재산도.. 어렸을적엔 다행히 보호소에서 지낼 수 있었으나 이마저도 나이가 어느정도 든 폴링에게 보호소 예산 삭감이라는 명분 하에 퇴소압박이 이어졌다. TF에서 관리자의 밑에서 일하는것은 힘들었지만 이곳에 있었으면 숙식과 안전이 보장된다.
힘들지만..그것만으로 족하다고 생각하고 폴링은 눈물을 닦았다.
그런 폴링이 관리자와 눈을 제대로 마주쳤던것은 TF에 입사한 후 8개월 만이었다.
무언가의 보고서(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를 보고 결재를 내리며 관리자가 처음으로 칭찬을 했었던 날이었다.
“나쁘지 않군..폴링양. 이대로 계속 한다면 곧 실적을 낼 수 있는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감사합니다 관리자님”
“자네는 앞으로도 계속, 나를 믿고 따라오면 된다네.”
폴링은 관리자의 마지막 한마디를 들었을 때 고개를 들어 무심코 관리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순간 서로의 시선이 맞닿았다. 2초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폴링은 심장이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칭찬일세”
관리자는 손을 뻗어 폴링의 어깨를 살짝 두드려주었다.
폴링은 재빨리 고개숙여 인사한 후 관리자의 사무실을 빠져나와 자신의 숙소를 향해 달려나갔다.
‘칭찬일세’
관리자의 그 한마디가 폴링의 귓가를 맴돌았다. 고장난 카세트 테이프처럼 계속하여 반복되며.
사무실을 나간 후에도 관리자의 손길이 어깻가에 남아있는 느낌이 들었다.
TF에 입사한지 3년이 넘은 어느날이었다.
새로운 용병들이 도착하는 날.-그러니까 지금의 용병들을 말하는 거다- 폴링에게 브리핑을 하던 관리자는 갑자기 옆으로 고꾸라졌다.
“관리자님!관리자님!!구급차를 부르겠습니다 관리자님!!!”
“후우...후우...아닐세...됐네...”
관리자는 둘째 서랍칸을 열어 작은 담뱃갑을 꺼냈다. 그안에는 담배가 아닌 얇은 약봉투 몇 개가 들어있었다. 약봉투 속 알약들은 작은 진주만한 사이즈로 황금처럼 빛나고 있었다. -아마도 오스트렐리움이 조금 첨가된 무언가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폴링은 그 당시엔 오스트렐리움의 존재조차 몰랐었으니.- 관리자는 자그마한 알약들을 물도없이 삼켰다.
“관리자님...”
“...호들갑 떨지 말게 폴링양... 급한불은 꺼뒀으니...자넨 평소처럼 이 자료들을 정리해오면 되네.”
눈가가 벌게진 폴링은 푹신한 소파에 관리자를 조심스럽게 앉혔다. 널브러진 종이들을 차곡차곡 주워서 옆에 있던 종이백에 넣은 후 문을 향해 걸어갔다.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던 폴링은 방향을 돌려 관리자의 옆자리에 앉았다.
관리자의 두 눈에 시선을 맞추고
“관리자님은 병원에 가셔서 전문적인 의료적 조치를 받으셔야 해요!”
“폴링...병원에 간다고 해결될일이 아니야...이건 내가 더 잘알아...”
“고집부리시 마시고 가셔요!”
“...여지껏 날 잘따라와 주지 않았나. 지금 우리에겐 더 급한일이 있지 않은가? 새로운 용병들이 도착하였네 그들에 관한....쿨럭 쿨럭...”
“하지만 관리자님!!!”
폴링이 뭐라고 더 말하려 했지만 관리자는 손을 들어 폴링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관리자의 손은 생각보다 훨씬 야위고 가늘었다.
그리고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하지만 폴링을 만지는 손길은 부모가 사랑하는 아이를 쓰다듬듯 부드러웠고 따뜻했다.
“......”
“언젠가 자네는...아닐세...”
관리자의 이 한마디는 폴링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폴링은 관리자가 처음으로 눈을 마주쳐주었던 그날처럼 종이백을 들고 전속력으로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관리자가 지시한 것들 중 당시에 폴링이 이해가 가지 않은 일들도 시간이 지나면 퍼즐이 짜 맞춰지듯 완벽하게 맞춰졌다.
그날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폴링은 관리자가 하는 일에 의심을 버리고 전적으로 믿으며 따랐다.
진심으로...
다시 현재-
점심으로 향해가는 시계 초침을 바라보며 관리자의 사무실 앞에 다가선 폴링은 긴장감을 애써 감추려는 표정을 짓고
관리자의 사무실에 노크를 했다. 그전처럼 큰 병세가 아니길..
-똑똑-
노크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폴링이 들어왔다. 관리자의 뒷편에 있는 무수한 모니터들의 빛이 폴링의 얼굴을 사납게 때려왔다.
“관리자님..”
“지금 이시간, 이곳에서 자네가 해야할일은 딱히 없다네 폴링양. 잘 알고 있을텐데?”
“관리자님의 목소리를 들었어요. 평소와는 달라서 건강상태가 걱정되어 잠깐 와봤습니다.”
관리자는 의자를 돌려 문앞에 있는 폴링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오늘 아침에 스카웃이 찾아왔더군.”
“ ? 예. 보셨군요. 다른때랑은 다르게 오늘은 좀 일찍..”
“자넬 짝사랑 하고 있는게지.”
뜬금없는 관리자의 말에 폴링은 이를 악물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말도안돼.
“훕.. 아니에요 관리자님.”
“그렇군. 자네는 그렇게 생각하는군. 하지만 스카웃 쪽의 마음은 그게 아닌것 같던데?”
“절대 그런게 아닐겁니다 관리자님.”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원래 스카웃은 말이 많고 주변이 고요한걸 못참는 성격입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제가 아닌 솔저였어도 실없는 소리를 장황하게 늘어놨을 거에요. 아마 만화로 그려진다면 스카웃에게 달린 말풍선이 엄청나게 커야 할거에요.”
관리자는 피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구겨서 껐다. 아직 중간도 태우지 않은 기다란 담배가 힘없이 꺾였다.
“자내는 내 곁에서 모든 걸 배워왔지. 일뿐만이 아니라 내적인 부분들까지도.. 난 그런 자네를 보며 자네가 이성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것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었네”
폴링은 그런 말을 하는 관리자의 의중을 알수없었다.
“단지 일이 바빠서 그런 것일까..?”
관리자는 의자에서 일어나 건너편에 서있는 폴링을 향해 다가갔다.
3미터
“1년에 한번뿐인 휴가로는...”
2미터
“이...이성친구를 사귈 틈이...”
50센치
“...아시는 바와 같이...”
잠깐의 시간.
“모르겠는데?”
관리자는 폴링에 몸에 자신의 몸을 포갰다. 폴링의 두 뺨은 잘 익은 사과처럼 빨갛게 물들은 지 오래였다.
마치 숨 쉬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 마냥 불규칙적인 숨을 내뱉는 폴링의 등을 쓰다듬던 관리자는
폴링을 부드럽게 끌어안으며 폴링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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