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이는 결혼을 가까운 미래로 생각하고 원석이는 먼 미래로 생각한 게

어긋난 지점인 듯.

둘이 전에도 종종 싸웠지만 대화보다 몸으로 푼다는 식으로 말했었고.

결혼처럼 극명하게 서로의 생각이 부딪히는 시험을 겪기 전부터 이 둘을 삐꺽대고 있던 거.

애초에 대화가 부족한 커플인데 (사실 서로 사랑한다는 거빼고 그닥 공통점도 없어. 여자애는 서비스업이고 남자애는 전형적인 공돌이고. 여자애가 흥미 가지는 일에 남자애가 흥미가 없고 남자애가 흥미 가지는 일에 여자애가 흥미가 없고. 원석이가 지 일이나 관심사에 관해 신나게 떠들려고 하면 랑이가 못 알아들을 소리 또 한다면서 입을 막아버리잖아. 실제로 랑이한테는 못 알아들을 소리기도 했고. 랑이가 보고 싶던 연극은 한참 유행했던 연극인데 원석이는 제목도 몰라 뒤늦게 랑이 기분 풀어준다고 예약해도 엉뚱한 거로 헛발질하고. 서로 관심사가 전혀 다르고 대화도 안 통하고 미래에 대한 청사진도 다른데 그런 차이점이 노출될 때마다 부딪히기 싫으니 둘이 점점 아예 입을 닫아 대화는 점점 사라진거고. 

드디어 랑이 맘이 슬슬 급해져서 자기가 원하던 것들을 슬슬 풀기 시작했는데 원석이는 바로 압박을 느낀거고.

그동안 구질구질하게 자기 일에서 죽쑤고 있는 거 자세히 이야기 안 했으니 랑이는 원석이 사정이 어떤지 잘 못 느낀거고.

솔직히 사무실은 번듯했자나. 사정이 그렇게 어려운지 랑이가 짐작이나 했겠어. 랑이가 착각하는 걸 원석이가 수정 안 해줬고 랑이 입장에선 원석이도 이제 어엿한 사회인인 줄 알았겠지. 옥탑방도 목돈을 더 빨리 모으기 위해 잠시 지나가는 통과의례쯤으로 생각했겠지. 원석이한테는 그게 현실인데.

랑이가 철이 없는 게 아니라 랑이가 원석이네쪽이 어떤지를 너무 모른 거. 원석이가 일얘기만 하면 랑이가 입을 막은 탓도 있고 원석이가 자기 구질구질한 상황을 솔직히 말 안 해줬으니 랑이 입장에서 그간 50만원씩 몇년을 같이 부었다고 알고 있으니 결혼할 자금은 이미 어느 정도 모았고 원석이가 결혼 언급할 때가 슬슬 되었는데 왜 안 하지 하고 이상해할만 하지. 그간 랑이가 이런저런 미래 청사진을 흘렸을 때 (가령 아파트는 너무 우리 형편에 비싸니까 나중에 더 모아서 가자, 이러지 않고 원석이가 그래 가자. 이러잖아) 원석이가 태클을 안 거니 당연히 원석이도 동의하는 줄 안 거지. 보증금은 지가 냈지만 50만원씩 지만 저축하고 있다는 걸 전혀 상상도 못한 걸 보면 원석이가 생활비는 가져다 줬을 듯. 그러니 랑이 입장에선 원석이랑 원석이네 회사가 그렇게까지 돈에 쪼들리는 걸 잘 몰랐던 거 같아. 랑이는 원석이가 회사에서 어떻게 깽판치고 지혼자 토낀 건지도 잘 몰랐자나. 그냥 잘 정리했겠거니 했지. 랑이가 직장에서 결혼하고 그만두는 후배들 속속 나오고 어린 후임들한테 눈치 보이면서 버티는 거 원석이에게 랑이는 랑이대로 제대로 하소연 못하면서 살았자나. 요즘시대에 무슨 전업주부냐 철없다 이러던데 솔직히 랑이가 자기직장에서 그 나이에 서빙보는 여자애들 중 대빵 먹는 분이기인 거 보면 랑이가 있는 쪽 자체가 중장년이 될 때까지 오래오래 하는 직업이 아님. 보면 랑이보다 다들 어리잖아. 랑이 또래친구조차 직장에 없는 상황. (물론 주임인가 뭐시긴가 랑이 구박하던 놈은 랑이보다 나이가 위로 보이던데 그 사람은 남자라서 직장내에서 취급자체가 다른 케이스고.) 랑이는 분명 매우 능력있는 직장선배로 보이는데 문제는 그닥 인정을 못 받고 있고 장래가 보이는 직업이 아님. 어차피 서빙쪽이니 소물리에라든가 하는 서비스업이면서도 전문가코스를 공부해두었어도 좋을텐데 랑이 꿈은 전업주부니까 그러지도 않았고. 원석이가 나 자리 잡을 동안 너도 버텨줘야 한다 대신 터지면 우리 같이 실컷 누리자 이렇게 솔직히 다 이야기했으면 랑이도 뭔가 장기 직업대책을 세웠을 수도 있는데 그건 랑이가 원하는 루트랑 너무 다르니까 원석이가 입도 뻥긋 못 한거고.

그렇다고 원석이만 탓하기도 그런 게

랑이 입장에선 결혼이 가까운 미래고 원석이 입장에선 아직은 먼 미래니 서로 해온 준비가 다를 밖에.

원석이네쪽 일이 기업들 중에 성공하는 케이스가 대부분은 절대 아니지만 일단 터진 회사들은 한방에 크게 터지는 쪽이니 

지금 자기네 회사 사정이 참 개떡같아도 자기 실력에 대한 믿음이 있던 원석이는 지금 50만원씩 못 부어도 좀 더 해서 터지면 한방에 랑이 원하는 것들 내가 못 해줄까 하는 마음이었을 듯. 그동안 랑이가 실망 느끼거나 조바심치거나 지금 하는 일 포기하라고 할까봐 입닫은 거고. 근데 그렇게 막연한 기간의 미래(원석이 입장에선 짧게 잡아도 5년) 안에 자기가 성공만 하면 랑이가 원하는 거 다 해 주는데 문제가 없다고 여겨서 딱히 랑이를 속인다고 생각하지 않고 지냈을텐데 랑이가 원석이 생각보다 너무 일찍 청구서를 들이민거지.(랑이 입장에선 엄청 기다린건데.)

그래서 꿈만 쫓던 애가 갑자기 현실에서 정산을 해보니 도저히 랑이 바라는 건 자기가 이뤄줄 수 없다고 자괴감에 빠진 거고.   

이 커플의 비극은 직장에도 있어.

세희네 회사도 결혼한 거 세희뿐임.(그나마 사실은 계약결혼)

당장 마대표도 세희도 30대 후반인데 아직 결혼을 안 했었지.

원석이네 회사는 마대표 회사보다도 더 뒤에 런칭했을거고 더 어린 사람들이었을테니 당연히 결혼한 사람 없었을 거고.

그러니 원석이 입장에서 결혼이 먼 이야기일 밖에.

반면 랑이네는 랑이보다 더 어린 신입들이 쑥쑥 결혼해서 끊임없이 퇴직하고 더 어린 애가 들어오고 이미 결혼한 주부도 없고 그냥 어린 예쁜 미혼여성들이 일하다가 취집하고 퇴사하는 분위기. 당연히 결혼이 늘 독촉받는 현실임. 물론 랑이 옆에 수지도 지호도 같은 나이에 미혼이긴 한데 수지는 번듯한 직장이 있지만 어머니 문제로 결혼자체를 꺼리는 애고, 지호는 꿈 먹고 사느라 연애조차 못 해본 애고. 랑이 입장에선 걔들이 예외적인 케이스였을 듯.(실제로 동창회 나갔을 때 결혼한 애들이 많기도 했고.)

서로 사는 세계와 속한 세계가 다르니 결혼에 대한 생각도 전혀 다르고..

둘이 성숙한 애들은 아닌데 그렇다고 마냥 철이 없어서만 벌어진 일은 아닌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