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림은 그렇게도 바라던 대학에 입학했다. 말하지도 않았는데 남자가 더 부산스럽게 입학식에 입고 갈 옷을 선물해주고, 입학식을 마치고 나오자 커다란 꽃다발까지 안겨주었다. 겨우 입학식인데 민망할 정도로 기뻐했다. 그런데 비해서 요즘 일림은 남자가 어색하고 불편했다. 결혼하자는 말을 들은 이후로 더 그랬다. 남자를 만나면 얼굴이 확 달아오르며 열이 났다. 손을 잡거나 잠자리를 하고 나면 창피하고 싫은 기분이 들었다. 남자가 우리 아기, 하고 끌어안고만 있어도 울고 싶어졌다. 저녁을 먹고나면 내내 옆에 붙어앉은 남자 때문에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결국 책을 보는건 포기하고 멍하게 앉아있는데 남자가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슬쩍 밀어내자 큰 손이 가슴을 더듬었다. 손을 떼어내자 남자가 다시 몸을 꼭 끌어안았다.
"내일은 학교 가야하니까..."
"무슨 상관이야. 서점은 잘 나갔었잖아."
"그치만..."
"그럼 만지기만 할게. 허락해줘."
"그럼 하게 해달라고 할거잖아요."
"종일 보고 싶었단 말이야."
남자가 어린애처럼 졸라댔다. 밀어내도 자꾸만 엉겨붙어서 아기처럼 떼를 쓰니 어쩔 수가 없었다. 일림이 모른척 자리에서 일어나서 차를 내리자 남자가 뒤에서 허리를 끌어안고 어깨에 기댔다.
"그거 마시고 잘거야?"
"네."
"그럼 마시지마. 나랑 이야기해."
"졸려요."
"요즘 왜 그래? 입학하고나서 내내 그러잖아."
남자가 짜증을 냈다. 못들은척 느릿느릿 다기를 정리하자 남자가 어깨를 돌려 눈을 맞췄다. 정말 싫었다.
"너, 무슨 일 있어?"
"아무일도..."
"그럼 왜 그래. 요즘 제대로 눈도 안쳐다보고, 매번 모른척하고. 불만이 있으면 말을 해."
"불만 없어요."
"지난 주말 후로 한번도 섹스 안한거, 알고 있어?"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섹스라니, 너무 노골적인 단어였다. 일림이 고개를 떨구자 남자가 뺨을 감싸서 다시 눈을 맞췄다.
"왜 내가 조르고 빌어서 섹스를 해야해."
"..."
"내가 그렇게 우스워?"
"그럼...전 싫다는 말도 못해요?"
"뭐?"
"하기 싫어요."
남자를 밀어내고 다시 등을 돌렸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늘 시키는대로, 하자는대로 따랐던 일림이었다. 꽤 용기내서 반항한거였다. 그리고 사실이었다. 그냥 두면 밤마다 하자고 졸라댈 사람이었다. 일림은 체력도 약하고 몸도 작은 편이라 남자를 받아들이기가 사실 힘들었다. 남자는 덩치도 일림보다 훨씬 크고 지칠줄을 몰랐다. 자다가도 이름을 부르며 몸을 더듬었다. 반쯤 기절한 상태로 한적도 있었다. 그렇게 밤새도록 괴롭힘을 당하고 나면 다음날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공부도 해야 하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더이상 버티기가 힘들었다.
"넌 나랑 하는거, 싫어?"
"..."
"왜?"
남자는 얼굴이 빨개졌지만 화를 내진 않았다. 참고 있는 모양이었다. 일림이 도리질을 하자 남자가 일림의 손을 잡고 응접실로 데리고 가서 앉았다.
"왜 그래. 응? 말을 해야지."
"힘들어..."
"뭐?"
"아프고 힘들어요. 싫어..."
"안아프게 할게. 아가, 착하지."
남자가 손목을 끌었다. 도망치려하자 허리를 붙잡혀 안겼다. 침실로 들어가자마자 도망가지 못하게 남자가 옷을 벗겼다. 창피하고 싫었다. 이불로 몸을 가리고 오들오들 떨자 남자가 이제 와서 뭐가 그렇게 부끄럽냐며 웃었다. 침대 위로 올라온 남자가 재미나다는듯이 이불 뒤로 숨은 일림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아가, 어디갔어? 하고 어린애를 달래듯이 물었다. 대답하지 않고 몸을 웅크렸지만 더운 팔이 몸을 끌어안고 뒤로 뉘였다. 버둥거려도 소용없었다. 결국 포기한 일림이 늘어지자 남자가 만족스럽게 품에 머리를 비벼댔다. 어두운 침실, 이불 위를 스치는 마찰음, 몸에 닿아오는 뜨거운 체온,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들.
"허리 들어. 들어갈 수가 없잖아."
"..."
"착하지... 다리 벌리고. 응..."
남자가 깊게 숨을 내쉬었다. 아팠다. 눈을 꼭 감고 숨을 참았다. 침대가 삐걱거렸다. 일림이 훌쩍훌쩍 울기 시작하자 남자가 손으로 뺨을 더듬어 눈물을 닦아주었다. 싫어요, 만지지 말아요. 일림이 어깨를 밀어내도 남자는 오히려 품 안으로 더 파고들 뿐이었다.
+++
지난주, 하혈을 하고 통증이 있어서 학교를 마치고 병원에 갔었다. 산부인과에 가는건 처음이라 무서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누군가 마주칠까 무서워서 버스를 타고 몇정거장이나 멀리 떨어진 병원을 찾아갔다. 어색하게 이름이 불리고 진찰실에 들어갔다. 차가운 의자에 다리를 벌리고 앉아있는 것도 고역이었지만, 진찰도 우울했다. 안쪽으로 상처가 났다고 했다. 몸이 작으시니까 신경을 쓰셔야해요. 미혼이신가요? 그럼 상대방한테도 충분히 설명을 하셔야 해요. 염증이 심해지고 감염되면 안되니까 한동안은 쉬셔야 해요, 하고 의사가 말을 했었다. 하지만 더 조심스러운건 그 다음 말이었다. 부정출혈이에요. 임신할 계획이 있으신가요? 그렇지 않으면... 연고와 항생제를 처방받고 나오면서 창피하고 무서워서 혼자 울었다. 일림은 겨우 열아홉살이었다. 남자는 거의 매일 저택으로 찾아와서 곁에 붙어있었고, 밤마다 일림을 원했다. 주말이면 아침부터 밤까지 떨어질줄을 몰랐다. 제발 그만하라고 울며 빌어도 그저 귀엽다며 웃어넘길 뿐이었다. 결국 남자에겐 아무말도 하지 못했고, 상처는 아팠다 나았다 했다.
+++
눈이 퉁퉁 부어서 일어나보니 남자는 없었지만 아침은 차려져있었다. 입맛이 없어서 그냥 두고 학교로 갔다. 수업을 들으면서도 멍했다. 피곤하고 졸렸다. 머릿속에 자갈이 잔뜩 들어가서 달그락거리면서 흔들리는것 같았다. 꾹 참고 겨우 수업을 다 들었다.
"아가."
잔뜩 지쳐서 집으로 돌아오자 남자가 현관에 서있었다. 일찍 퇴근한건지 벌써 실내복을 입고, 안에서 음식 냄새가 나고 있었다. 지난번에 일림이 예쁘다고 했던 니트였다. 인사를 하기도 무안해서 묵묵히 들어가자 남자가 손목을 붙잡고 끌어안았다. 덜컥 겁이 났다. 일림이 눈을 들어 올려다보자 남자가 빙그레 웃고는 이마에 뺨을 비볐다.
"아가. 다녀왔어요, 해야지."
"죄송해요. 다녀왔어요..."
"왜 아침 안먹었어. 네가 좋아하는거 만들어뒀는데..."
"못봤어요..."
"그러지마. 너 속상하면 밥도 안먹고, 말도 안하잖아. 너 그럴때마다 나 미치는거 알고 그러는거지."
"..."
"어제는 내가 미안해. 화풀어. 네가 좋아하는거 만들어줄테니까... 아가, 완두콩 좋아하지? 스프 만들어줄게. 그거랑..."
"생각 없어요."
매번 이런식이었다. 일림이 우울해하거나 힘들어하면 남자는 이렇게 사과를 하고, 맛있는걸 먹여주거나 선물을 안겨주었고 조금 나아졌다 싶으면 이내 몸부터 찾았다. 이제 그러지마, 알았지? 짐승을 길들이는것과 다를게 없었다. 토라진 짐승에게 간식을 준 뒤에 쓰다듬어 달래어주고, 다시 길들이고. 일림은 착하고 말 잘듣는 짐승이었지만 말 그대로 짐승이었다. 궁지에 몰리면 사람을 물 수 밖에 없었다.
"내일 시험 있어요. 공부하다가 잘게요."
"아가."
"미안... 정말 생각없어요."
일림이 손목을 빼내고 돌아서서 계단으로 가는데 큰 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돌아보니 무표정한 남자의 발치로 화병이 산산조각난채로 흩어져있었다. 그 자리에 붙박혀있자 남자가 성큼성큼 계단 위로 올라와서 어깨를 붙잡았다.
"사람 미치게 하는 짓 좀 작작해. 내가 얼마나 비참해져야해?"
"아..."
"왜 내가 너한테 이렇게 빌어야해. 내가 너한테 얼마나 더 알랑거려야하는데. 얼마나 더 잘해야하고, 얼마나 봐줘야 하는건데."
"..."
"대답해!"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아주 어릴때, 이불 속에 웅크린채 듣던 큰 소리들이 다시 들려오는것 같았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울지말고... 이제 그러지마. 알았지? 착하잖아."
일림이 뚝뚝 울기만 하자 남자가 목소리를 낮추고 몸을 끌어안았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양팔을 뻗어서 목을 꼭 끌어안자 남자가 등을 토닥였다. 소리지르는 사람은 싫었지만, 너무 무서워서 무엇이든 매달리고 싶었다. 목을 안고 매달리자 남자는 화가 풀린듯 계단에 앉아 일림을 품에 꼭 끌어안고 한참을 다독였다. 문득 서글퍼졌다. 화내고 혼을 내더라도, 설령 발에 차이고 목이 졸릴지언정 애완동물이 사랑하고 믿을 수 있는건 주인 뿐이었다. 맞아요, 나는 당신의 애완동물인걸요. 남자가 바라는건 애인과 결혼이 아니라 얌전한 애완동물과 목줄이었다.
+++
"제길, 아... 제기랄... 아가, 힘 좀 빼. 죽겠어, 젠장..."
금요일 마지막 수업을 마치자마자 남자에게 끌려갔다. 며칠전에 울린게 미안하다며 주말동안 여행을 가자고 했다. 너랑 둘이서 주말을 보내려고, 내가 얼마나 열심히 일한줄 알아? 남자가 빙긋 웃었다. 하늘이 파랗고 바람이 선선한 예쁜 가을날이었다. 남자는 무척 기분이 좋아보였고, 예쁜 새 원피스와 구두를 사주었다. 참, 이제 너도 대학생인데. 어색한 새 옷에 구두를 신은 일림에게 남자가 또 새로운 선물을 주었다. 립스틱이었다. 얼굴이 희고 깨끗해서 레드립이 어울리세요. 안목이 있으시네요. 점원이 칭찬을 해주었지만 일림은 거울 속의 얼굴이 낯설고, 입술은 이상하게 간지럽고 갑갑하기만 했다. 남자는 다시 일림을 차에 태우고 먼곳으로 갔다. 예쁜 산책로를 걸었지만 높은 구두 때문에 이내 발이 아팠다. 그걸 눈치챈 남자가 조용한 카페에서 데려가준건 좋았지만 야외 테라스는 너무 눈이 부셨고, 일림은 커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피곤하고, 자고 싶었다. 입맛도 없는데 저녁 시간이 왔다. 야경이 예쁜 레스토랑이었지만 야경도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음식에선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호텔이었다. 우리 공주님, 오션뷰가 좋아? 아니면 최상층이 있다는데. 남자가 귓가에 속삭였다. 아무거나요, 대강 대답하자 남자가 뺨에 입을 맞춰주고는 키를 받아들었다.
"아파..."
"제기랄, 네가 자꾸 힘을 주고 버티니까 그런거...젠장, 힘 빼."
눈 앞이 흐릿했다. 남자의 입가로 희미하게 번진 립스틱이 핏자국처럼 보여서 섬뜩했다. 거친말을 하면 일림이 겁을 내고 싫어하는걸 알게된 후로 남자는 꽤나 노력했지만 잠자리에서는 잘 절제가 안되는 모양이었다. 배가 아팠다. 호텔 침대는 너무 푹신거려서 더 불안했다. 일림이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자 남자가 손가락을 엇갈려 꽉 잡았다. 반지를 낀 약지가 아팠지만 빼낼 수가 없었다.
"제기랄, 쪼끄만게... 응? 대학생이라고? 네가? 이렇게 작은데."
"..."
"아... 제기랄, 어쩌지, 아가, 일림... 일림아, 내 아가..."
듣기 싫어, 숨을 들이쉬고 모른척하자 남자가 반대편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다가 약간 힘을 주어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내보내기 싫어, 제기랄... 밖에 내보냈다가, 다른 새끼랑 붙어먹으면 어쩌지? 응? 아저씨는 걱정인데... 우리 아가 학교 보내고, 아저씨는 종일 불안해. 알아?"
"..."
"임신할래? 일림, 아저씨 아기 가질까? 학교 그만두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일림이 화들짝 놀라 얼굴을 쳐다보자 남자가 씩 웃었다. 매끈한 턱선을 따라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싫어, 일림이 마구 버둥거리자 남자가 허벅지를 꽉 눌러 젖혀 몸을 시트에 깊숙히 밀어넣었다.
"시, 싫어, 싫어요, 안돼..."
"왜? 아기 갖기 싫어? 일림이 닮으면 예쁠건데. 응? 좋아, 아저씨 아기 임신해줘. 우리 아가처럼 예쁜 아기 낳아줘."
"제발, 안돼, 안돼요, 그만... 싫어, 그만..."
붉게 물든 입가가 짐승의 그것 같았다. 도망치려고 버둥거릴수록 남자는 더 힘을 주어 일림을 짓눌렀다. 숨을 쉬기가 힘들 정도로 심장이 빨리 뛰고 있었다. 결국 일림이 엉엉 울어버리자 남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울긴. 아가, 그렇게 싫어? 아저씨 섭섭해."
"싫어, 싫어요..."
"왜, 오늘 위험해?"
일림이 하얗게 질린채로 멍하게 바라보자 남자가 금방 빙긋 웃고는 테이블에 손을 뻗어 무언가 집어들었다. 다행히, 귀퉁이가 찢어진 포장지였다.
"겁쟁이."
힘이 빠졌다. 남자가 크게 웃고는 일림의 머리를 쓰다듬고 뺨에 입을 맞췄다. 귀엽긴, 우리 아가. 남자가 무어라고 놀리면서 달래어주었지만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하긴, 잠자리를 하면 아기가 생길 수 있는건 당연했다. 덜컥 겁이 났다. 관계가 끝날때까지 일림이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못하자 남자가 다정하게 욕실로 데려가서 몸을 씻겨주고, 머리를 말려주었다. 침대에 웅크리고 훌쩍거리자 우리 아기, 하고 불러서는 아이스크림을 먹여주었다. 착하지? 안그럴게. 뚝, 그치자. 남자는 내내 웃는 얼굴이었다. 그렇게 재미있을까? 꼭 어린애 같았다. 괜히 강아지의 꼬리를 꾹 밟고 낑낑대며 아파하는걸 보고 미안, 미안해, 하고 안아주는 어린애... 일림은 다시 한번 자신의 위치를 깨달았다. 그리고 남자의 품 속으로 파고들었다.
"응, 착하지. 우리 울보..."
"무서워요."
"무섭긴. 이제 괜찮아, 이거 다 먹고 자자."
바보 같아, 겨우 결혼하자는 말에 놀라선. 일림은 남자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남자가 원하는건 재미있게 가지고 놀고, 짓궂은 놀림에 깜짝 놀랄 착한 애완동물이었다. 간식을 주고 체벌을 하는 대신 남자는 일림을 학교에 보내주고 겁을 주는것 뿐이었다. 바보처럼 결혼하자는 말에 속아서 떨렸던게 바보 같았다. 착한 강아지가 그러하듯, 일림은 작은 손으로 남자의 옷깃을 꼭 쥐었다. 큰 손이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그대로 눈을 감고 몸을 웅크리자 불이 꺼지고 따뜻한 이불이 몸을 감쌌다. 잘자요, 주인님. 오늘 나는 착한 강아지였나요? 이제 말 잘 들을게요. 혼내지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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