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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담 22나더모바일에서 작성

ㅇㅇ(175.223) 2018.03.20 00:20:55
조회 889 추천 59 댓글 21

														

추위가 물러나자 봄비가 내렸다. 며칠이나 지겹게 내리는 비는 봄비인데도 꽤나 빗발이 굵었다. 커튼 뒤로 빗소리가 들렸다. 옆에 누운 남자는 베개에 얼굴을 푹 파묻은채 깊이 잠들어있었다. 깨울까 하다가 전날 늦게 들어온게 생각나서 그냥 두고 살금살금 일어났다. 잠옷 위로 가디건을 걸치고 까치발로 내려가자 거실에 누워있던 고양이가 기지개를 쭉 켜고 따라왔다. 안녕, 하고 인사를 하자 다리에 몸을 비비며 아는척을 하는게 퍽 귀여웠지만 시끄럽게 울면 남자가 깰까봐 살며시 안아들었다. 다행히 고양이는 따뜻한 체온이 편안한지 얌전히 품에 안겨서 목을 울렸다. 그대로 대청으로 나갔다. 유리창 밖으로 빗발이 들이치고 있었다.

"야옹아, 비가 내려."

아직 공기가 차가운터라 고양이가 품에 얼굴을 파묻고 몸을 웅크렸다. 유리창 앞에 앉아 비구경을 했다. 시커먼 정원수 가지에 빗방울이 둥글게 맺혔다가 툭, 툭 떨어지고 있었다. 아직 추우니까 달팽이는 없을까? 달팽이는 겨울 내내 어디에 가있을까? 한참을 이런저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깨에 담요가 내려앉았다.

"아침부터 궁상맞게 뭐해."
"아, 일어나셨어요."
"옆에 없어서 놀랐잖아."

남자가 옆에 앉았다. 짙은 감색 나이트가운에서 향수 냄새가 났다. 새로운 취미 생활처럼, 남자는 어디서 구해오는건지 주말마다 웨딩잡지며 뭘 잔뜩 가져와서 일림과 같이 보곤 했다. 하지만 일림이 부담스러워하는걸 눈치챈건지 아직 시간이 있으니 결혼은 천천히 생각하고 연애부터 하자고 했다. 솔직히 그게 더 부담스러웠다. 연애를 해보기는 커녕 하고 싶다는 생각조차 해본적이 없으니까. 그래도 남자는 예전보다 상냥하게 일림을 대해주었고, 일림도 그게 싫지 않았다.

"잘 잤어?"
"네."
"날도 추운데, 이런데서 애기처럼 비구경이나 하고. 감기 걸리면 혼낼거야."
"으응."

남자가 어깨를 감싸안고 정수리에 뺨을 비볐다. 잠시 머뭇거리던 일림도 남자의 품에 머리를 기대고 허리를 감싸안았다. 잘은 모르지만, 영화나 드라마에서 연인들이란 응당 그런 행동을 했고 남자도 기뻐하니까.

"예쁜 내 아기."

역시나, 남자가 빙그레 웃었다. 이상한 사람이었다. 남자는 일림이 아기처럼 응석을 부리고, 떼를 쓰고, 우는걸 좋아했다. 얌전하게 있으면 괜히 화를 냈다. 되려 칭얼거리고 토라지면 예쁜 우리 아기, 착한 내 일림, 하고는 안아주고 달래주며 무엇이든 해주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사실 일림은 한번도 나쁜 아이였던 적이 없었다.

"우리 아기, 배고프지? 뭐 먹고 싶어."
"계란..."
"그럼 해줘야지. 금방 만들어줄게. 한숨 더 잘래? 아님 여기서 놀고 있을래?"
"여기 있을게요."
"좋아. 그럼 야옹이하고 있어. 이불 잘 덮고... 비 내리는거 보면서 밥 먹을까?"
"좋아요."
"그래. 착하게 기다려."

남자가 뺨에 입을 맞춰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

아침은 모양을 예쁘게 잡은 수란에 데친 시금치, 구운 아스파라거스와 베이컨이었다. 이런건 어디서 배운걸까. 창가에 웅크리고 앉은 일림이 오물오물 아침을 먹는걸 한참 빤히 바라보던 남자가 옆에 붙어앉았다.

"수란이 예쁘게 잘됐어."
"으응."
"베이컨도 보들보들하게 구웠어."
"바삭한거 좋아하시지 않으세요?"
"네가 싫어하잖아."

남자가 웃었다. 사실 일림은 무심한걸 넘어 미각상실이나 마찬가지였다. 주면 주는대로 먹고, 없으면 말았다. 시설 생활이란건 그런거였다. 원한다고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맛이 없다고 남기면 그저 배를 곯을 뿐이었다. 맛이 있든 없든 주면 먹는거였다. 남자는 음식에는 관심이 많아서 매번 뭘 먹고 싶냐던가 오늘은 뭐가 좋겠다던가 했지만 사실 별로 관심은 없었다.

"어때? 입에 맞아?"
"어..."

남자는 묘한 얼굴로 일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일림은 어색하지만 웃어보였다.

"맛있어요."
"그래? 많이 먹어. 더 있어. 계란도, 야채도... 아, 주스 더 줄까?"
"아뇨, 아직 많이 있어요."
"그래, 그래. 잘 먹어야지."

남자는 무척 기분이 좋아보였다. 그렇게 기쁜걸까? 영문을 모를 일이었다. 일림은 예쁘게 결이 잡힌 베이컨을 포크로 쿡 찍어서 흘러내린 노른자에 문질렀다.

+++

"비가 지겹게도 오네. 우리 아가 데리고 소풍 나가야하는데..."
"그러게요."
"갑갑하지? 오늘은 외출할까?"
"아니에요."
"그럼, 뭐할까?"

남자가 일림의 등을 문질렀다. 하얀 얼굴이 멍하게 꺼진 TV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웃는게 좋아. 이걸 주면 네가 좋아할까, 이걸 먹고 싶어하진 않을까 생각하지... 지난번에 남자가 잔뜩 취한채 손에 꼭 쥐어주던 사탕. 일림은 남자를 잘 몰랐다. 사실 남자가 일림에게 부탁할만한 일은 없었다. 한참 꼼지락거리던 일림은 팔을 뻗어 남자를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뭐야, 갑자기."
"심심한것 같아서..."
"귀엽긴. 야한거 하고 놀자고?"
"여기서 말고 침실 가서요."
"우리 공주가 하자면 해야지."

더운 팔이 몸을 껴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잠자리는 별로 무섭지 않았다. 통증도 없고, 창피하긴 하지만 버틸만 했다. 조금만 불편해하거나 우는 소리를 내면 남자도 신경을 써주었다.

"귀여워라, 심심했어?"
"으응."
"응, 착하지. 이리와, 안아줄게."

살금살금 다가가자 남자가 품에 꽉 안아주었다. 이 사람은 체온이 왜 이렇게 높은걸까. 금방 졸음이 밀려왔다. 눈을 비비자 몸이 뒤로 뉘여졌다. 얌전하게 누워있자 큰 손이 머리칼을 넘겨주고 더운 입술이 닿았다. 배운대로 눈을 감자 큰 손이 가슴을 꽉 쥐었다가 급하게 옷을 당겼다. 싫어라, 일림이 슬며시 손을 밀어내고 몸을 돌리자 남자가 인상을 썼다.

"하자며."
"이 옷, 마음에 드는거란 말이에요."
"새로 사줄게."
"그런거 아니에요."

성미가 급한 남자는 매번 일림의 옷을 잡아당겨서 늘어트렸다. 덕분에 어깨며 목이 늘어나서 망가트린 옷이 한두벌이 아니었다. 단추가 있으면 나을까 했지만 단추가 전부 튿어지거나 아예 이음새가 찢어져버리기도 했다. 매번 이러는게 무섭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해서 투정을 부리자 남자가 곤란한 얼굴로 쳐다봤다.

"급해 죽겠는데. 새로 사줄게."
"싫어, 무서워요."
"제길, 추워? 넌 양파도 아니고, 옷을 너무 껴입고 있잖아. 가디건에 원피스에 캐미솔에, 대체 몇겹을 입은거야. 일부러 그래? 나 돌아버리는거 보고 싶어서?"
"..."
"너한테 화내는거 아니야. 난 더워 죽겠는데... 난방을 더 해?"
"아니에요."
"집이고 둘 뿐인데 뭐 어때. 벗고 있어. 몸도 예쁜데 왜 그래."
"아이, 싫어라."
"말도 예쁘게 하지. 귀여운 속옷 사줄테니까, 그것만 입고 다녀. 집에선 그래도 돼. 적어도 잘땐 괜찮잖아."
"창피해, 싫어요."
"귀엽긴. 볼건 다 봐놓고 뭐가 창피해? 착하지, 우리 공주. 그럼 네가 벗어봐. 안망가지게..."

일림이 비죽거리다가 부끄러운 마음에 앞섶만 겨우 벌려두자 남자가 대신 옷을 벗겨주었다. 망설이지도 않고 단추를 풀어내리는 손길이 수줍어서 고개를 돌리자 뺨이 맞닿아왔다.

"귀여워, 내 아가."
"정말요?"
"그럼. 정말 귀엽지. 피부도 곱고, 목소리도 예뻐. 머릿결은 얼마나 부드러운지. 눈이 강아지처럼 커다래."

얼굴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예쁘다니, 그 누구도 해주지 않은 말이었다. 정말일까? 연인이란 그런걸까? 이 사람은 거짓말을 하는게 아닐까? 멍하게 올려다보자 남자가 웃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 싫어?"
"아니..."
"귀여운 우리 일림, 예쁜 내 공주님."

이상하게 가슴이 뛰었다. 거울을 보면서도 스스로 예쁘다고 생각한적은 한번도 없었다. 울보에 겁쟁이, 말라깽이. 늘 그늘이 드리운 얼굴에 떠도는 지독한 우울함. 그 누구도 다가오지 않았다. 아무도 사랑해주지 않았다. 스스로도 믿지 않았다. 아직도 일림은 이 이상한 남자가 무얼 원하는지 잘 몰랐다. 기대감은 독약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항상 일림을 원했다. 왜? 어째서?

"정말 날 좋아해요?"
"귀엽긴. 아직도 못믿어?"
"잘 모르겠어요."
"네가 조금 더 크고, 봄이 오면 예쁜 신부로 만들어줄거야. 네가 좋아하는 이 집에서 둘이서 살아야지. 너는 매일 나를 기다리고, 난 네가 좋아하는 꽃을 사오고..."

바보처럼 또 얼굴이 달아올랐다. 머리가 복잡했지만 지금 당장은 속아도 좋았다. 팔을 뻗어 더운 체온을 끌어안았다. 남자는 지치지도 않고 몇번이고 약속해주었다. 품 안의 네가 사라져버릴것 같아서, 지난번에 남자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직 연애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희미하게 그 말만은 이해할 수 있을것 같았다.

+++

일림은 요즘들어 기분이 무척 좋았다. 잠을 못이루고 서성거리는 일도 줄어들고, 식욕도 돌았다. 약간이지만 뺨에 살이 올랐고, 남자가 짓궂게 놀리면 발그레하게 혈색이 돌았다. 얼마나 예뻐, 귀엽기도 하지. 남자는 일림이 잘 먹고 푹 자는게 대견하다고 했다. 매일 작은 손을 붙잡고 어루만지며 참 예쁘다고 했다. 왼손 약지에 낀 반지를 어루만지며 결혼식땐 더 예쁜 반지를 해주겠다 약속했다. 그럼 이 반지는요? 이건 약혼 반지지. 또 얼굴이 달아올랐다.

"야옹아, 예쁘지. 새 옷이야."

얼마전에 남자가 출장을 다녀오면서 새 옷을 선물해주었다. 귀신처럼, 남자는 일림보다 일림의 몸을 더 잘 알았다. 입혀보지 않아도 몸에 꼭 맞는 옷을 늘 사오는거였다. 이번에 선물받은 옷은 허리에 꼭 맞는 플레어 스커트에 보드라운 블라우스였다. 일림도 예전과는 다르게 남자가 예쁜 옷을 사다주는게 좋아졌다. 새 옷을 입고 기웃거리면 남자가 예쁘다고 칭찬을 하는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발치에서 올려다보던 고양이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냥, 하고 울었다.

"안돼, 새옷인걸. 조금 있다가 안아줄게."

일림이 거울을 보다가 총총 나가자 고양이가 쭐레쭐레 따라나왔다. 오늘 저녁은 간만에 외출을 하자고 했다. 예쁘게 입고, 바람 쐬러 가야지. 먹고 싶은거 생각해둬. 남자가 마중을 나온 일림의 머리를 보듬어주면서 웃었다. 머리는 남자가 만져주는게 훨씬 예쁘니 가만히 두었다. 아직 남자가 돌아올 때까지 시간이 꽤 남아있어서 무얼 할까 고민하던 일림은 서재로 가서 책을 보면서 심심파적이나 하기로 하였다. 서재에는 오래된 책이 많아서 재미있었다. 낡은 종이 냄새를 맡으면서 읽다보면 시간이 가는줄 몰랐다.

"어..."

무얼 볼까 한참 고르던 차에 창가 구석자리 책장에 약간 비져나온 낡은 양장본이 보였다. 책등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살짝 빼어내보니 조금 낡긴 했지만 고급스러운 짙은 푸른색 비단으로 감싸여진 오래된 책이었다. 빳빳한 표지를 한장 펼쳐보니 책이 아니라 앨범이었다. 첫장에는 얼굴을 비단으로 가리고 커다란 조화를 품에 안은 새신부가 앉아있었다. 반듯하지만 흘려쓴 글씨체로 적힌 연도를 보니 아주 옛날이었다. 그리고 다음장을 펼친 일림은 좀 놀랐다. 머리를 단정하게 넘기긴 했지만 낡은 흑백 사진 속에는 남자가 서있었다. 아니, 남자보다는 조금 더 마르고 입매에 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사람이었다. 몸에 꼭 맞는 날씬한 양장을 입은 남자가 짚고 선 옆자리 의자에는 남자보다 훨씬 앳되어 보이는 소녀가 앉아있었다. 약간 긴장한 표정이긴 했지만 눈이 새까맣고 얼굴이 갸름한 소녀가 입은건 평범한 짙은색 장삼이긴 했지만 자세히보니 은은하게 문양이 들어간 고급스러운 비단으로 되어있었다. 조심스럽게 다음장을 넘겨보았다. 첫 두장을 빼고, 뒷장은 아주 세련된 스냅샷이 들어있었다. 귀밑머리를 곱게 땋아서 뒤로 넘기고 예쁜 나비모양 핀을 꽂은 소녀가 물가에 손을 담그고 웃고 있었다. 흑백 사진이고 낡은데도 이상하게 요즘 찍은것 같은 기묘한 느낌의 사진이었다. 한여름인걸까? 얇은 옷을 입고 창가에 앉은 소녀의 사진도 있었다. 수틀을 들고 있는걸 보니 얌전한 양갓집 아가씨였을까. 산수국이 가득 핀 물가 옆에 지우산을 들고 선 소녀는 양 뺨에 고운 보조개가 들어있었다. 눈에 띄게 화려한 미인은 아니었지만 시원한 이목구비가 사랑스럽고 밝아보였다. 몇장을 넘기지 않자 곧 머리를 곱게 틀어올린 소녀의 사진이 나왔다. 어딘가 익숙한 툇마루에 앉은...

"우리 할머님이셔. 미인이시지?"

깜짝 놀란 일림은 그만 앨범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남자가 뒤에 서서 웃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튼튼한 팔에 몸이 안겼다.

"우리 예쁜 꼬맹이가 어디있나 했더니, 서방님 마중도 안나오고."
"오...셨어요."
"그거, 할아버님 유품이야. 할머님 살아생전에 직접 찍으신거라고... 할머님을 많이 예뻐하셨거든. 필름도 귀한 시절이었는데, 세련된 구석이 있던 어르신이라."
"네..."
"어디보자, 새 옷은 잘 맞나?"

남자가 싱글벙글 웃으며 일림의 어깨를 잡고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이상하게 무서운 기분이 들었다. 일림이 눈만 커단하게 뜨고 있는걸 눈치챈건지,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그게..."
"이거 보고 그래?"

남자가 앨범을 집어들어 첫장을 펼치고 묘하게 웃었다.

"정말 닮았지? 난 부모님보단 할아버님을 더 닮았어. 다른 어른들도 내가 손자가 아니라 백조부님 아들 같다고 그랬거든."
"아..."
"왜, 나도 머리 길러볼까? 그럼 더 똑같을건데."
"싫어요."

무서운 기분이 들어서 얼른 허리를 껴안고 매달리자 남자가 웃으면서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무섭긴. 너도 너희 부모님이랑 닮았을건데?"
"몰라요."
"그래, 그래. 자세히 보면 조금 달라. 할아버님이 나보다 마르셨어. 눈매도 약간 다르고."
"..."
"겁쟁이. 아직 다녀오셨어요 인사도 안해준거 알지?"
"으응..."
"착하기도 하지."

뺨에 입을 맞춰주자 남자가 웃으면서 일림을 안아들고 앨범을 다시 제자리에 꽂았다.

"좋아, 외출 준비 다했어? 머리만 해주면 되겠네."
"으응."
"가자. 오늘은 비오니까, 예쁘게 묶어줄게."

남자가 서재의 불을 끄고 다시 침실로 돌아가는 와중에도 품에 매달린 일림은 남자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책장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상하게 덜컥 무서운 기분이 들어 너른 어깨에 얼굴을 파묻자 다정한 손이 툭툭 등을 두들겨주었다.

+++

저녁은 맛있는 생선 요리였다. 입이 짧은 일림도 스스로 놀랄만큼 잘 먹었다. 일림이 곧잘 먹자 남자도 무척 기뻐했다. 디저트도 맛있었다. 예쁜 그릇에 레몬향이 나는 부드러운 푸딩이 담겨왔다. 일림이 남김없이 먹는건 드문 일이었다.

"예쁘기도 하지. 매일매일 오늘처럼 잘 먹으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아가."
"맛있었어요."
"다음에 또 가자."
"네."
"피곤해? 조금 걷다가 갈까. 여기 꼭대기에 온실 정원이 예뻐. 네가 좋아할거야."

남자의 말대로 유리로 온실처럼 만들어둔 정원이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 아직 늦겨울이지만 온실은 무척 따뜻하고, 꽃도 화사하게 펴있었다. 늦은 시간이라 사람도 없어서 유리 천장 위로 빗방울이 툭툭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안쪽에는 인공 연못이 있고 알록달록한 잉어들이 유유히 헤엄을 치고 있었다. 잘 관리했는지 덩치도 크고, 깨끗한 하얀 몸에 빨강이며 검정 반점이 얼룩얼룩한게 예뻤다. 일림이 한참 잉어를 바라보자 남자가 곤란한듯 웃었다.

"넌 동물이면 뭐든 좋아하네."
"예뻐요."
"예쁘긴 네가 더 예쁘지... 그러다가 빠지겠다. 이리와."
"저기에 더 커다란 애가 있어요."
"잉어는 영물이라 오래 산다고 하니까... 생선 요리를 먹고 와서 그런가, 좀 징그러운데."
"뭐예요 그게, 이상해."
"가자."

남자가 손을 잡았다. 얇은 회색 모직 코트 아래로 굵은 손목시계가 나와있었다. 남자가 손을 잡아줄 때마다 어른 남자의 손이란걸 문득 느끼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자꾸 사진 속 남자의 하얀 손이 눈 앞에 선연히 떠올랐다.

"왜 그래, 머리 아파?"
"응? 아, 아니..."
"열나는거 아니지? 아까 와인 마신것 때문에 그래?"
"정말 괜찮아요."
"이상한데... 감기가 오려나. 얼른 집에 가야겠다. 업어줄까?"
"아이참, 아기 아니에요."
"아니긴. 얼른 가자."

남자가 코트를 벗어서 어깨에 걸쳐주었다. 이상하게 속이 울렁거렸다. 살며시 눈치를 보다가 손을 놓았지만 남자가 어깨를 끌어안았다. 고개를 숙이자 남자가 허리를 숙여서 정수리에 뺨을 대보더니 손등으로 머리칼을 넘겨주었다.

"착하지."

이상하게 울렁거리던게 가라앉았다. 눈을 들자 남자가 빙긋 웃어보였다. 다시 살며시 손을 잡자 남자가 손에 힘을 주었다. 어른의 손. 일림은 낯선 손을 꼭 잡고 정원을 빠져나갔다.

+++

집에 도착해서도 이상하게 열이 오른게 잘 가라앉지 않았다. 멍하게 앉아있자 뒤이어 씻고 나온 남자가 이마를 짚어보고 열이 난다며 두꺼운 담요를 몸을 감싸고 다시 이불을 덮어주었다.

"넌 아직 술은 마시면 안되겠어. 겨우 와인 한 잔 마셨다고..."
"그래요?"
"그래. 얼른 자자."

남자가 옆으로 누워 일림의 등을 쓸어주었다. 곧 눈을 감은 남자는 낮은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지만 일림은 도통 잠이 오질 않았다. 한참 굼지럭거리다가 담요 밖으로 손을 내어 살며시 남자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자꾸 무서운 기분이 들었다. 창 밖으로 들이치는 빗소리가 비가 아니라 늦은밤 찾아온 무서운 어떤것일것만 같아서 자꾸 겁이 났다. 한참 얼굴을 만지작거리자 남자가 실눈을 뜨고 웃었다.

"잘생긴 서방님 옆이라 잠이 안와?"
"그게 아니라..."
"아니긴 또 뭐가 아니야. 왜 그래."
"무서워요."
"옆에 있는데 뭐가 무서워? 너, 오늘 좀 이상하네."

남자가 팔로 머리를 괴고 일림을 내려다보았다. 무어라 할 말이 없어 입만 오물거리면서 물끄러미 올려다보자 남자가 씩 웃었다.

"너, 그 사진 때문에 그래?"
"아..."
"뭐가 그렇게 무서워. 친척 어르신이니 닮을법도 하지."
"그치만, 너무 닮았으니까..."
"닮은게 뭐가 이상해. 너도 내 얼굴 좋아하지 않아?
"..."
"그거 알아?"

남자가 일림의 머리칼을 큰 손으로 쓰다듬어 넘기고 뺨을 비볐다. 마주한 얼굴을 가만히 쓰다듬자 남자가 묘하게 웃었다.

"그거, 내 사진이야."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등으로 차가운 물이 쏟아져내린것처럼, 담요며 이불에 몇겹이나 싸여 따뜻한 품에 안겨있는데도 체온이 떨어졌다. 곱아가는 손 끝에 닿은 피부는 사람의 살갗이 아니라 낡은 앨범 속에서 바래가던 오랜 인화지의 감촉과 닮아있었다. 불에 댄듯 놀라 손을 떼자 남자가 크게 웃으면서 몸을 끌어안았다. 갑자기 다시 체온이 확 올라 놀란 일림은 울음을 터트렸다.

"귀엽긴, 그럴리가 있어? 아가, 우리 울보."
"미워, 싫어요."
"그러지마. 응? 서방님이잖아."
"저리가..."
"너 놀리면 금방 울어버리는거 보면 미안하다가도 어찌보면 우는 얼굴이 귀여워서 자꾸 놀리고 싶거든. 뚝, 우리 아가."

일림이 엉엉 울면서 버둥거리자 남자가 일림을 담요로 곱게 싸서 품에 안아들었다. 바보처럼 미운 품을 파고들 수 밖에 없었다.

"미안, 미안해. 그만 울어. 응? 우리 아기 뚝 그치면 선물 주지."
"필요 없어요."
"예쁘게 말해야지. 뚝 그치면 우리 아가 데리고 수족관엘 가지."
"아쿠아리움 싫어하잖아요."
"네가 가자면 어디든 못갈까. 거기 돌고래, 좋아했잖아? 이번에도 가면 인형 사줄테니까 뚝 그쳐."
"정말...?"
"그럼. 옳지, 뚝 그쳤네. 예쁜 얼굴 부어. 그만 울자."

남자가 타올을 적셔서 눈물을 닦아주었다. 어린애처럼 코를 훌쩍거리자 곧 몸이 다시 침대에 뉘여지고 따뜻한 이불이 내려앉았다. 익숙한 향기가 나는 품에 얼굴을 비비자 큰 손이 등을 쓸었다.

"놀려서 미안. 뚝 그치고 자자. 주말에 수족관에 가고."
"약속한거예요."
"그럼, 약속이지. 우리 공주님 명령이신걸."

열이 오른 눈을 들어보자 눈물로 젖은 어깨가 보였다. 손을 뻗어 옷깃을 꼭 쥐자 튼튼한 팔이 몸을 안았다. 일림은 기절한것처럼 까무룩 잠이 들었다.

+++

울다가 잠이 든 탓인지 몸이 무거웠다.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내려앉아있었지만 여전히 빗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는 머리에 내려앉은 둔한 통증을 쿡쿡 찔러대고 있었다. 겨우 눈을 떠보니 남자는 언제나처럼 베개에 얼굴을 푹 파묻고 잠들어 있었다. 이상하게 늘 그래왔던것처럼, 일림은 침대에서 살금살금 빠져나와 침실 밖으로 나왔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다리를 붙잡았지만 살금살금 복도를 걸어 서재로 갔다. 커튼이 쳐지지 않은 서재는 빗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홀린듯이 창가로 간 일림은 마치 다시 어제로 돌아간것처럼 책장 앞에 섰다. 분명 시선이 닿는 칸의, 중간쯤... 하지만 아무리 눈을 비비며 찾아도 새벽빛과 닮아있던 그 낡은 푸른빛 비단 커버는 보이지 않았다. 손 끝으로 책등을 하나하나 더듬으며 찾아보았지만 없었다. 문득 추위를 느낀 일림은 잠시 멍하니 서있다가 다시 침실로 돌아갔다. 어두운 침실은 따뜻했다. 다시 이불 속을 파고들자 큰 손이 몸을 더듬다가 등을 당겨 끌어안아주었다.

"쪼끄만게, 방울처럼 어딜 갔어."
"아... 고양이, 찾으러..."
"그 녀석은 밤새 돌아다니다가 자는걸. 서방님 옆에서 자야지."
"응... 미안해요."
"아직 새벽이네, 더 자..."

이마에 입술이 닿았다. 뺨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머리를 울리던 통증이 사라졌다.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어린애도 아니고, 그럴리가 없었다. 일림은 팔을 뻗어 옆에 누운 연인을 꼭 끌어안고 다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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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추천
설문 SNS로 싸우면 절대 안 질 것 같은 고집 있는 스타는? 운영자 24/05/06 - -
공지 중국연예 갤러리 이용 안내 [61] 운영자 05.07.29 32258 9
87660 이 분 이름 아시는 분ㅠ 중갤러(39.7) 23.11.22 307 0
87658 한국에서만 존재하는 황당한 중국 오줌맥주 열풍 [1] ㅇㅇ(1.237) 23.10.22 237 1
87657 독고천하에 나온여자 덩치또 크게해놧네 검색해봐서 어떤사진에서 키골격 좀 중갤러(14.138) 23.10.21 132 0
87656 '김건모→박수홍 저격' 유튜버 김용호, 부산서 사망 확인 osen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3.10.12 126 0
87655 우주소녀 성소와 불륜? 양조위 "터무니 없다" 분노 osen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3.08.18 188 0
87654 그런데 주중미군기지는 왜 없는 거야? [1] ㅇㅇ(121.159) 23.07.14 223 0
87651 여성시대 여시 네이트판 더쿠 인스티즈 위마드 메갈 해연갤 폐미 ㅇㅇ(14.53) 23.06.11 275 1
87650 중국인들이 가장 호감 갖는 나라는? [1] oo(14.34) 23.05.29 429 0
87644 왕이보가 주도하는 질서 왕이보가주도하는질서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3.05.09 738 0
87643 샤오잔 & 귀여운 댕댕이 ㅎㅎㅎ ㅇㅇ(210.97) 23.05.01 581 3
87642 여기서 회초리질하는거 그 익갤에서 퍼가면 ㅇㅇ(106.101) 23.05.01 332 0
87641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인가 [3] ㅇㅇ(210.97) 23.05.01 560 5
87640 +(번역글)+샤오잔은 '꿈 같은 꿈'의 '극악무도한 물'에 낙인찍혔고 ㅇㅇ(210.97) 23.05.01 462 1
87639 로드쇼에 무언가 날라왔다고 한다. 누가 왜 그랬을까??? [1] ㅇㅇ(210.97) 23.05.01 371 0
87638 지나가다가 ㅇㅎ ㅇㅇ(210.97) 23.04.30 312 0
87637 홍해 ㅇㅇ(210.97) 23.04.30 290 0
87636 어떤 것이 진짜 금이고 어떤 것이 놋쇠인지 ㅇㅇ(210.97) 23.04.30 243 0
87635 내 이름을 아는 모든 이에게 ㅇㅇ(210.97) 23.04.29 250 0
87634 GUCCI의 남자들 ㅇㅇ(210.97) 23.04.28 450 0
87633 왜 이러는 걸까 ㅇㅇ(210.97) 23.04.28 298 0
87632 야 와 아 가 되시겠슴다 ㅇㅇ(210.97) 23.04.28 238 0
87631 혼자 다 했써 누가 1005점이래 ㅇㅇ(210.97) 23.04.28 253 1
87630 잘 생각해 봐 ㅎㅎㅎ ㅇㅇ(210.97) 23.04.27 236 0
87629 이 애기는 잘 자랐고 ㅇㅇ(210.97) 23.04.27 273 1
87628 표면에 있는 3천만 명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며 ㅇㅇ(210.97) 23.04.26 247 1
87627 누가 좋아? ㅇㅇ(210.97) 23.04.26 241 0
87626 오늘 5주년 ㅇㅇ(210.97) 23.04.25 264 0
87625 이런 비하인드가 있었다 ㅇㅇ(210.97) 23.04.25 273 0
87624 드라마 무대에서 점점 더 편안해졌고 ㅇㅇ(210.97) 23.04.24 258 0
87623 매번 운 것 같아서... ㅇㅇ(210.97) 23.04.23 238 1
87622 3년 동안 72편의 드라마 출연,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ㅇㅇ(210.97) 23.04.23 270 0
87621 '꿈같은 꿈' Shenzhen Station의 공연은 4월 22일 시작 ㅇㅇ(210.97) 23.04.22 199 0
87620 떠날때는 말없이 ㅇㅇ(210.97) 23.04.21 248 1
87618 차이나닷컴 ㅇㅇ(210.97) 23.04.20 257 0
87617 우여곡절 줄거리는 너무 마술적이고 ㅇㅇ(210.97) 23.04.20 221 0
87616 마치 영화의 한장면 ㅇㅇ(210.97) 23.04.20 253 0
87615 잘 생겼대 ㅇㅇ(210.97) 23.04.19 293 0
87614 전설이 되었다 ㅇㅇ(210.97) 23.04.19 252 0
87613 가장 성공적인 남자 주인공 ㅇㅇ(210.97) 23.04.18 283 0
87612 시각적인 즐거움을 ㅇㅇ(210.97) 23.04.18 216 0
87611 밀라노 패션 위크에서 가장 인기가 있습니다! ㅇㅇ(210.97) 23.04.17 264 0
87610 마케팅 계정에서 거부하고 해당 사실을 폭로 ㅇㅇ(210.97) 23.04.17 291 0
87609 누구나 다 ㅇㅇ(210.97) 23.04.16 223 0
87608 사람들의 로망? 욕망? 열망? ㅇㅇ(210.97) 23.04.16 243 0
87607 Gucci [1] ㅇㅇ(210.97) 23.04.16 250 0
87606 Gucci ㅇㅇ(210.97) 23.04.15 217 0
87605 고향에서 깃발을 들었고 ㅇㅇ(210.97) 23.04.15 221 0
87604 궁극의 中國 美學 ㅇㅇ(210.97) 23.04.13 252 0
87603 쿨럭은 이런 말을 하는데 펄럭 기준은 하늘끝 천장인가? ㅇㅇ(210.97) 23.04.12 26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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