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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플] Fragile_02

ㅇㅇ(112.162) 2020.02.27 04:41:45
조회 751 추천 39 댓글 8


Fragile_01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drama109&no=180495




오랜만에 정주행을 하다가 상플을 슬쩍..


· 문제시 삭제.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엄마는 화류계의 여자였다. 부친인 오 회장은 우연히 만난 그녀에게 아주 잠깐 눈길을 주었으나 그것은 한창 혈기가 왕성한 남자라면 한번쯤은 가질 수 있는 호기심일 뿐이었고 결혼 후에는 더는 그런 부류의 여자와 말조차 섞지 않았다고 새엄마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 말을 처음 들은 건 화류계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던 일곱의 나이였다. 여과 없이 쏟아지던 원색적인 말들은 기억 속에서 가공과 변형을 반복했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엔 기분 내키는 대로 악랄하게 지껄여대던 새엄마의 증오에 찬 얼굴만이 기억에 남았다.


‘모르지. 또 어디에서 그렇게 웃음이나 팔면서 상스럽고 구질구질하게 살고 있을지.’


마음속에 묻어두고 애써 외면해오던 그 존재를 찾으려 하던 것은 R그룹 계열의 호텔에 평사원으로 입사하여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던 무렵이었다. 새엄마는 지나가는 말을 하듯 그렇게 말했다. 오 회장은 단 한 번도 그녀에 대해서 제대로 말을 해준 적이 없어서 왜곡이 되었든 그렇지 않든 모든 정보는 새엄마의 입을 거쳐야만 알 수 있었다.


“… 출산 직후 사망하신 것 같습니다.”


새엄마의 표독스럽기 그지없는 말들을 곧이곧대로 믿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나마 그녀와 이어져있다고 여겼던 보이지 않는 끈들이 모두 끊어져 나가는 순간이었다. 말을 전하던 젊은 수행원은 도리어 자신이 참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를 누가, 어디에 모셨는지까지는 알아내지 못했다는 침울한 음성에 오랫동안 혼자서 억눌러오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그 난잡한 피가 어디 가겠어?’

‘그런 부류의 여자가 낳은 널 거둔 게 난데, 네가 감히.’

‘노블레스 오블리주. 그거 하나만 생각했어. 내가 지금 이렇게 수많은 애들을 후원하고 있는데 너 하나 거두지 못할까. 그저 후원하는 그 많은 애들 중 하나일 뿐이라고 여기면서 여기까지 왔어. 써니 너라면 그게 가능하겠어?’


써니. 새엄마는 전혀 다정하지도 않은 목소리로 늘 그렇게 이름을 부르곤 했다. 구태여 성을 붙여 부르지 않는 것은 사람이라면 생을 살아가면서 한번쯤은, 사람이 사람에게 가질 법한 일말의 동정과 연민 따위의 뭉글한 감정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생이 다하는 순간까지 오 씨 집안의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새엄마의 굳은 의지였다. 어느 날 갑자기 오 회장이 데리고 온 처치곤란의 존재를 호적에서 흔적도 없이 지워낼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용의가 있는 사람이 새엄마였다.


때로는 그런 작자가 하는 가시 돋친 말이라도 여느 평범한 가정의 엄마들이 그들의 자식에게 할 법한 잔소리처럼 생각하고 싶을 때가 있었다. 엄마와 새엄마. 한 끗 차이로 너무 다른 의미였지만 그래도 엄마는 엄마일 것이라고 그런 것도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싶었던 시절이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 비교적 어린 나이에 아이를 가졌지만 모정만큼은 각별한 사람이었다. 물론 그것은 본인의 자식에게만 국한되는 이야기였다. 애초에 인류애라는 것이 없는 이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한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남들에게는 다 있는 것 같은 엄마가 왜 내겐 없을까. 어릴 때부터 가져온 의문이었다. 그럼에도 막연히 어딘가에는 존재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안은 채였다. 그것은 오랫동안 지속되던 새엄마와 배다른 동생의 등쌀과 은근한 무시를 견뎌내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그런데 출산 직후에 사망한 것 같다니. 사망했으면 사망한 것이지 사망한 것 같은 게 무슨 소리냐며 별 시답지 않은 꼬투리를 잡아 눈앞에 서있는 젊은 수행원에게 다짜고짜 온갖 분풀이라도 하고 싶은 상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쓰던 시간들이 그렇게 부질없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무엇을 위해 치열하게 버티고 부딪치고 아등바등 살아왔는지도 모호해져갔다. 오랜 시간동안 맞지도 않는 신발에 발을 욱여넣으려던 미련한 자만이 덩그러니 남았을 뿐이었다. 별안간 수행원이 스탠드를 끄고 음악을 틀었다. 열세 살 때 납치를 당한 일이 있고 난 후로는 단 한 번도 침실의 스탠드를 꺼본 일이 없었다. 언젠가 목이 졸리던 그때 그 순간처럼 어두운 공간이 주는 공포감에 금방이라도 질식할 것 같았다.


“괜찮으시면 여기에 계속 있겠습니다.”


그 어느 것도 선명하지 않은 어둠속에서 수행원이 손을 잡아왔다. 일찌감치 오 회장이 붙여줬다고는 하지만 어차피 결국엔 어쩔 수 없는 새엄마의 사람일 것이면서 수행원은 마치 아군인 양 굴었다. 지시하지도 않은 일을 행하는 수행원을 새엄마가 본다면 분명 주제 넘는 짓이라며 신랄하게 깎아내릴만했다. 손등으로 퍼져나가는 타인의 온기는 어릴 적 남몰래 가끔 잡아보았던 오 회장의 손을 떠올리게 했다. 이젠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어린 시절 그 순간이 재현되고 있었다. 아빠. 늘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고 싶던 그 말은 그때도 지금도 그럴 수 없는 말이었다. 여느 또래 아이들처럼 온갖 응석을 부리고 아무런 계산도 생각도 없이 그 넓은 품으로 파고들어 하루를 보내보는 것은 마치 다른 세상의 이야기 같았다.


불현듯 턱밑까지 울음이 차올랐다. 그러나 늘 이런 비슷한 순간이 올 때면 진짜 감정은 타인의 앞에서 나올 리가 없다는 확신이 있어 그 상황이 퍽 당황스럽진 않았다. 이때까지 지나온 시간이 그것을 증명했다.


아무도 축복하지 않는 출생.


시작부터 삐거덕거리던 인생이었다. 살아온 그 생에 어느 누구도 제대로 돌아봐주는 이 없었다. 아무리 시종일관 위선적이고 모순적인 말과 행동을 일삼는 실망스러운 모습의 어른으로 성장하였다고는 해도 저라도 스스로를 두둔하지 않으면 삶에 제 편은 하나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상대가 누구든 그 눈에 들기 위해 때론 너무 유약해보이지 않기 위해. 매순간 연극 아닌 연극을 하며 살았다. 그것은 몸에 배여 버린 버릇이자 살아남고자 하는 본능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수행원으로부터 삶을 뒤흔들만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서도 기를 쓰고 동요하지 않으려드는 상황은 촌극이 따로 없었다. 자멸감이 들었다. 처량하고 구질구질하고 초라했다. 삶의 시작이 그러했고 끝도 어김없이 그럴 것만 같았다.


처음부터 철저하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다. 그저 그런 것인 줄로만 알았다. 어릴 적 새엄마의 입으로 전해지는 말들은 모두 사라지지 않고 뇌리에 남아 그 자체로 세상이 되었다. 화류계의 여자는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멋대로 재단했고 한 번도 찾아와주지 않는 얼굴도 모르는 그녀를 오랜 시간동안 죽도록 증오했다. 술이 싫었다. 여자가 남자들 틈에서 즐겨 피웠다던 담배도 싫었다. 어딘가에 여자의 일터가 있을 난잡한 네온사인으로 점철된 거리마저 죽도록 싫었다. 여자는 그 존재만으로 낙인이었고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하는 족쇄였다.


그럼에도 참 오래도록 그려왔었다. 한 번도 본 적 없음에도 자꾸만 보고 싶던 그녀를.


어둠에 적응하기 시작한 눈으로 보이는 것은 창문 너머의 어지러운 불빛들이었다. 그것들 하나하나가 그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는 지금 이 순간의 마음 같아 헛웃음이 나왔다. 감미로운 클래식 선율이 방안에 울려 퍼졌다. 마치 그 음악이, 그 순간이. 젊은 날에 생을 마감해야했던 한 여자와, 지독한 애증으로 그 존재를 좀처럼 놓지 못하던 어린 딸을 위로하는 것 같았다. 더는 발을 딛고 설 곳도 구태여 그래야 할 이유도 없었다. 모든 것이 의미를 잃어가는 시간이었다.


“누구 마음대로 스탠드를 꺼.”

“그게 나을 것 같아서요.”

“그러니까 왜.”

“……”

“됐어요. 지금 그딴 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그나저나 오늘은 얘기할 거리가 좀 있겠네요.”

“……”

“오 써니가 소식을 듣고 아주 볼만한 표정을 짓고 있더라…….”

“그런 것도 시시콜콜 보고를 해야 하는 겁니까.”

“……”

“… 그런 거나 보고하려고 치열하게 입사한 거 아닙니다.”

“진즉에 얘기하려 했는데. 난 그쪽이 마음에 안 들어요.”

“……”

“그 웃기지도 않는 이름도, 시종일관 착한 척 하는 얼굴도.”

“……”

“눈에 다 보이니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런 능력을 가지고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나한테 득이 될지 실이 될지 너무 잘 보여서.”

“……”

“정 수행원.”

“네.”

“말 나온 김에 뭐라고 변명이라도 해 봐요. 지금 얘기한 것들. 그거 전부 다 내 주관적인 생각들일 수도 있잖아.”

“없습니다. 생각은 자유니까.”


정말 웃기지도 않아.


“이렇게 이런 내 모든 생각들을 여과 없이 전해 듣고도… 당장 내일이 되면 아무렇지도 않게 날 마주할 수 있겠어요?”

“……”

“난 지금 온통 발가벗겨져서 도심 한복판에 서있는 기분이에요. 정 수행원이 알 정도면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는 거니까. 난 당장 내일이 되면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도저히 그쪽이 용납이 안 돼.”

“……”

“살아있는 도청장치 하나가 실시간으로 날 까발리고…… 내 치부를 파헤치는 것 같아서.”

“그럼 이번 일은 저한테 왜 맡기신 겁니까.”

“……”

“살아있는 도청장치를 어떻게 믿고.”

“확인하려고.”

“……”

“진짜 당신이 누구 편인지.”

“……”

“……”

“그래서. 확인은 하셨습니까?”


사실은 없었다. 우습게도 그런 일을 맡길만한 사람이 도저히 아무도 없었다는 걸 죽어도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 글쎄. 난 중립적인 척 하는 사람들이 제일 가증스러워. 지금 정 수행원, 당신이 그래.”

“원래 을(乙)은 힘이 없죠.”

“누구한테나 인류애라는 건 조금씩 있겠지? 적어도 사람이라면.”

“… 뭐. 아마도요.”

“그럼 그 인류애에 한번만 호소할게요.”

“……”

“오늘 내가 한 말들… 그냥 개소리다 하고 제발…… 넘겨요. 쓸데없이 미주알고주알 동네방네 소문내서 피곤하게 하지 말고. 기분이 진짜 뭣 같아서 그런지 자꾸 말이 많아지네.”

“걱정 안하셔도 될 것 같은데요. 원체 말하는 걸 싫어합니다. 그냥 앞에 있는 게 봉제인형이다 생각하시면 되겠네요.”

“그 봉제인형한테 녹음기능이 있을 것 같은 게 문제지.”

“… 봉제인형 좀 억울합니다.”


별 시답지도 않은 답이 돌아왔다.


“남의 치부 파헤치고 소문내는 취미 같은 거 없습니다. 그리고.”

“……”

“그런 건 치부가 아닌 것 같은데요.”


필요 이상으로 담백하고 나긋한 음성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봉제인형을 자처하는 수행원이 멋대로 틀어놓은 음악 따위는 들리지도 않을 만큼.


“마치 새엄마한테 보고를 안 할 것처럼 말을 하네요.”

“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어디든 발을 걸쳐놓으려는 모양인데. 잘 들어요. 지금 나한테 오면.”

“……”

“… 그건 실(失)이에요.”

“……”

“라인을 잘못 탔어요. 난 정말로 다른 사람들이랑 다를 바 없이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평사원으로 입사했는데 배다른 동생은 이미 제대로 경영수업을 받고 있어요. 그리고 진즉에 풍문으로 들어 알겠지만 난 출생 비화도 뭣 같아서 상속 여부도 불투명해요. 회장님은 남들 눈에 띄지 않게 내게 잘해주시지만 그뿐이거든. 결국 난 이집에서 아무 것도 아니라는 소리야.”

“……”

“뒤에 새엄마가 있는 거면 그냥 적당히 보고만 열심히 하고…… 그게 아니라 멀리 보고 내게 공을 들이는 거라면.”

“……”

“헛수고예요.”

“이때껏 많은 시간을 함께했지만… 이렇게 말씀이 많은 건 처음 보네요. 매번 네, 아니요, 됐어요. 그런 말씀만 하셔서.”

“……”

“긴 대화를 나눠본 게 처음이라 신기하네요. 일기라도 써야겠어요.”

“… 봉제인형 따위가 무슨 일기를 써.”

“봉제인형 따위가 무슨 일기를 써. 봉제인형 따위가 무슨 일기를 써.”

“뭐하는 거예요, 지금.”


병신미가 낭낭한 목소리에 정말 생각지도 않은 포인트에서 웃음이 터졌다. 웃지 않으려고 했는데.


“알고 보니 녹음이 되는 봉제인형이더라고요.”


수행원이 답지 않게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기만 해. 진짜 가만 안 둘 테니까.”


그러다 문득 그 얼굴이 궁금해졌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또 어김없이 사람 좋게 미소를 짓고 있을까.


“뭐라고 맞장구라도 치고 싶은데 한낱 봉제인형이 이해하기엔 얘기가 상당히 복잡해서요. 아무래도 제가 살고 있는 세상 얘기는 아닌 것 같아서.”

“……”

“전 그냥 수행원입니다. 영화를 너무 보셨네요. 어쩌다보니 처음부터 배정을 그렇게 받았고 지금 생각하시는 것처럼 그런 뭔가 대단한 계획 같은 것도 없습니다. 그럴 머리도 없고요. 근데 이왕 주제넘게 마음대로 스탠드를 끈 김에 마음대로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어차피 길게 얘기해도 듣지도 않으실 것 같아서.”

“……”

“개썅 마이웨이.”


정말이지 그 입으로는 절대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뜬금없는 소리였다. 당황스러움을 넘어 금방이라도 또다시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뭐요?”

“막 살라고요.”

“아니, 무슨…… 발음을 그렇게.”

“… 그냥 잊어버려요.”

“……”

“어떻게 해볼 수도 없는 과거잖아요. 자책도 후회도. 모든 게 다 지나가버린 이 순간엔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

“……”

“그리고 지금 제 눈으로 보기엔 충분히 멋있어요. 입사해서 열심히 살고 있고. 또 집안의 누구처럼 아버지 도움도 받지 않고 이렇게. 잘 컸잖아요.”

“……”

“그냥 오늘을 살면 됩니다.”

“……”

“유경험자의 말이니까. 믿어도 됩니다.”


어둠이 내려앉은 그 공간에 계속 함께 있어도 괜찮다는 허락은 그 후에도 없었다. 그럼에도 수행원은 날이 새도록 곁을 지켰고 써니는 그것을 두고 더는 뭐라고 하지 않았다. 수행원과 함께 한 그 ‘오늘’로 몇 년을 버텨낸 건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이야기였다.






Fragile_02

이혁 X 오써니






하루 종일 몸이 좋지 않았다. 일 년에 한번. 어느 날이 되면 어김없이 겪는 일이었다. 보고 있던 서류를 제쳐두고 써니가 숄더백을 집어 들었다. 오후에 비가 온다더니 정말이지 성가시게도 빗소리가 들려왔다. 로비로 걸어 나왔을 때는 제법 큰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스팔트 위로 떨어지는 굵은 빗물이 만연한 가을의 끝자락을 물들여갔다. 건물 밖으로 우산 하나가 펼쳐졌다. 후드득. 귓가로 온통 비가 와 부딪히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써니의 시선은 멀리로 보이는 거리 어딘가에 애매하게 머물러있었다. 금방이라도 커다란 우산을 들고 누군가가 마중을 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늘 같은 날은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저 정신이 나가도록 비우고 또 비우면 그만이었다. 일 년 중 형편없이 흐트러져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유일한 날이었다. 포크 아래로 잔뜩 뭉개져있는 과일들이 꼭 풀리지 않는 생각들 같았다. 세상이 기울어졌다. 어지러웠다. 써니는 이미 반쯤 취해있었다.


거지같은 사파이어 목걸이.


써니가 짜증스럽게 눈을 내려감았다.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상황에서 너에겐 내가 뭐라고 할 말이 없다. 어떻게 압력을 넣었는지 오 회장은 따로 마련한 둘만의 저녁식사 자리에서 그렇게 말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국내 굴지의 그룹 회장도, 괄목할 만한 족적을 남긴 기업인도 아닌 그저 딸을 걱정하는 아버지였다. 결국 사파이어 목걸이는 오 회장의 의지가 아니라는 소리였다. 글라스가 기울어졌다. 오늘 같은 날 딱 어울리는 독주(毒酒)였다. 속눈썹이 깊게 드리운 써니의 눈동자가 한층 더 어둡게 내려앉았다.


‘사파이어 목걸이. 다음에 만날 때까지 잘 가지고 있어요.’


그러나 다음은 없었다. 의도적으로 연락을 피하는 느낌이었다. 마치 그대로 결혼까지 가기라도 하려는 듯 하루가 멀다 하고 인편으로 선물 아닌 선물들이 전해졌다. 좀처럼 그 속내를 알 길이 없었다.


‘남의 일엔 함부로 끼어드는 게 아니지. 아까도 지금도.’

‘당신이 누군데요.’

‘구면인 사람.’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굴던 눈이 생각났다. 구면이라며 관계를 엮으려는 희한한 수작도, 잠시나마 제게 흔들렸던 마음을 눈치채버린 영악한 모습까지도.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기분이 더러워졌다. 겨울로 접어드는 입동의 비는 밤이 깊도록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생각보다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은밀한 분위기가 감도는 공간으로 잔뜩 몸을 움츠리며 들어서는 객(客)들이 더러 눈에 띄기 시작했다. 써니는 표정 없는 얼굴로 무심하게 주위를 둘러보다가 다시 글라스를 들어올렸다. 술이 거의 없었다.


“괜찮아요.”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짓을 보고 오려고 하던 바텐더가 다시 자리로 되돌아갔다. 써니가 고개를 들었다. 직전까지도 계속 머릿속에 멋대로 지분을 차지하고서 들어앉아 있던 인물이 눈앞에 있었다.


“여길 왜,”

“데리러.”


이런 상황에나 그 남자에게나. 정말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무슨 말이에요.”

“수행원이 제발 데리고 좀 들어가라고 전화가 와서.”

“말이 안 되잖아요, 상식적으로.”

“보고 싶어져서.”


써니가 남자를 쳐다보았다. 낭만적이라기엔 상당히 건조한 음성이었다. 엄숙하고 정갈해 보이는 블랙 수트 차림의 남자가 윗단추를 끄르며 맞은편에 걸터앉았다. 마치 당연한 듯이 흘러가는 상황에 어쩐지 기가 막혔다. 그럼에도 며칠 만에 보는 얼굴이 생각보다 좋지 못해서 써니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나한테 전화 엄청 했다고 하던데.”

“……”

“이렇게 직접 오면 되잖아. 그렇게 보고 싶으면.”


잠시나마 분위기에 눌려 말을 아낀 것이 우습게 되는 순간이었다. 써니가 같잖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는 써니의 앞에 놓인 글라스를 멀리 치우며 다리를 꼬고 앉았다.


“말을 진짜 이상하게 하는 재주가 있네요.”


퉁명스러운 그 말에 뭐가 웃긴지 남자가 혼자서 픽픽 웃어댔다.


“R그룹은 얻기 힘들 거예요.”

“……”

“내가 안 할 거니까.”

“……”

“그때도 말했죠. 난 안 한다고. 더는 회장님 찾아뵙는 일 없었으면 하는데요.”

“……”

“원체 거절을 어려워하는 분이에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 상대가 누구든 의가 나게 되는 걸 꺼려하세요. 그래서 사람이 많이 따르는 거겠죠.”

“… 얘기가 온통 R그룹이랑 회장님뿐이네요.”

“할 얘기가 곧 R그룹이잖아요. 그렇지 않고서야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갑자기 나랑 엮이려들 이유가 없겠죠.”

“……”

“나보단 오 상무를 잡는 게 더 빠를 거예요. 회장님 신임이 남달라서 아마 오래지 않아 재계에서 그 이름을 매일 같이 듣게 될 날이 머지않은 것 같거든요. 아무리 봐도 헛수고 하는 것 같아서요.”

“……”

“회장님과 두어 번 만났다고 들었어요. 그 웃기지도 않은 권력으로 회장님 번거롭게 하는 일… 내 귀에 더는 안 들렸으면 하는데.”

“……”

“아, 그런데.”

“……?”

“진짜 황제는…… 맞아요?”


하하하하. 무표정으로 듣기만 하던 남자가 제대로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이지 웃을 때와 웃지 않을 때의 간극은 참 기가 막혔다. 냉한 얼굴이 완전 무장 해제 되듯이 풀어지는데 그 느낌이 상당히 희한했다.


“그건 왜요.”

“아니, 확인은 해야 할 것 같아서. 얼굴 보면 아닌 것도 같고. 황제가 도통 매스컴을 안 타니 알 수가 있어야죠.”

“내가 어때 보이는데요.”

“… 좀 사짜 느낌이 나서.”

“아니, 왜?”


그것은 아마도 남자 자신도 모르는 사사로운 버릇일지도 몰랐다. 써니의 시선이 무심결에 힐끗 남자에게 향했다. 장난을 걸어오듯 말꼬리를 늘어뜨리며 되묻는 얼굴에 미간이 슬쩍 패여 있었다. 한눈에 봐도 여자가 지나치게 많이 꼬일 상이었다.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오 상무는 본 적도 없고 내 관심사도 아니고. 회장님은 선약이었고.”

“……”

“그리고 권력으로 협박한 적 없어요. 아, 회장님 물음에 답변은 했어도.”

“……”

“난 당신 마음에 든다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남자를 빤히 쳐다보던 써니의 얼굴 위로 언뜻 피로감이 떠올랐다. 그 날. 아무리 곱씹어 봐도 그 날의 감정은 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더 확실해졌다. 대놓고 뻔뻔하게 구애를 하는 남자의 눈은 저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남자는 저를 매개로 사업을 하려는 것이었다. 남자는 상대가 관심을 가질 만한 게 뭔지를 너무나 잘 파악하는 사람이었다. 어쩐지 수치심이 들었다. 세상에는 어떻게 된 게 죄다 저를 견제하거나 이용하고자 하는 이들 뿐이었다.


“오늘은 몇 명이나 안고 왔어요?”


원색적인 질문에 남자의 미간이 또 한 번 슬쩍 패였다. 남자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뭐?”

“그날도 지저분하게 노는 걸 직접 봐서. 총 몇 명이에요?”

“……”

“그게요, 원래 소문이 있었어요. 아, 이미 알고 있죠? 워낙 유명해서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던데. 매일 광란의 파티를 하는데… 여자가 분 단위로 바뀌고, 날이 새도록 같이 약도 하고.”

“……”

“하도 사고를 쳐서 실상은 그때 유학을 간 게 아니라 황실에 찍혀서 쫓겨났다는 얘기도 있던데. 뭐가 맞아요?”


수치심을 안겨주고 싶어서 시작한 치기어린 말들이었다. 그것은 사교계에서는 공공연하게 떠도는 소문이었고 거리낄 것이 없이 구는 눈앞의 이 작자가 그런 추문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구태여 이 자리에서 입에 올린 것은 독주만큼이나 독하게 이 거지같은 관계를 단번에 끝내고자 하는 의지이기도 했다.


“… 여자가 분 단위로 바뀌면. 내 몸이 남아나겠어요?”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박혀들었다. 정작 수치심을 느낀 쪽은 남자가 아니었는지 써니는 도리어 제 낯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안심해요. 또라이는 맞아도 약쟁이는 아니니까. 그리고.”

“……”

“어차피 지금 나한테 스크래치 내고 싶으면서 뭘 망설여요.”

“……”

“어떻게든 흠집 한번 내보려고 하는 거잖아.”

“……”

“궁금해요? 내가.”

“… 더는 할 말 없어요. 아까 다 했으니까.”


별안간 써니가 가방을 열었다. 남자가 가만히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 머리가 어지러워서 좀처럼 행동 하나하나가 마음 같지 않았다. 결국 써니가 짜증스럽게 가방을 엎었다. 안에 있던 자잘한 소지품들이 여과 없이 쏟아져 내렸다.


“……”


난잡한 소음이 났다. 어수선하게 어질러진 테이블 너머의 남자는 생각보다 참을성이 있었고 그 어떤 채근도 없었다. 관망하듯 구는 태도가 그 순간 희한하게도 도리어 거슬렸다. 무슨 생각인지 읽히지도 더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써니가 익숙한 듯 케이스를 집어 들었다.


“인편으로 보내면 되돌아오고 또 되돌아오고.”

“……”

“대체 언제쯤 만날까 싶어서 몇 날 며칠을 무겁게 갖고 다녔어요. 난 주인도 아닌데.”

“……”

“이제야 돌려주네요. 사파이어 목걸이.”


써니가 무표정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테이블 위로 잠깐의 적막이 내려앉았다. 금방이라도 일어날 생각이었다. 볼일이 다 끝난 마당에 더 앉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때 제 앞으로 내밀어진 케이스를 내려다보던 남자가 별안간 자리에서 일어났다. 써니가 그 움직임을 따라 남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곧이어 케이스가 열렸다.


“그새 바꿔치기 한 건 아니겠죠.”


개소리도 그런 개소리가 없었다. 써니가 짜증스럽게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가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이윽고 내용물을 확인하려는 듯한 남자의 모습에 써니는 감흥이 없는 얼굴로 소지품들이 어질러져있는 테이블에 손을 뻗었다.


“……”


테이블 너머로 몇몇 사람들이 힐끗거리는 것이 보였다. 목덜미에 내려앉는 차가운 금속의 느낌이 여실히 느껴졌다. 언뜻언뜻 뒷목을 스치는 기다란 손가락의 촉감이 그렇게 낯설 수가 없었다. 무심결에 써니가 목 언저리에 손을 갖다 대었다. 어김없이, 사파이어 목걸이였다.


“내가 황제라서 부담스러운 거면.”

“……”

“황제가 아니라 희대의 사짜라고 하면. ”

“……”

“나한테 올래요?”


써니가 기가 막힌 눈으로 곁에 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려면 이혼해야 되는데.”


남자가 픽 웃었다. 별반 놀라지도 않는 얼굴이었다.


“빨리 정리하자, 오 써니. 서류에 얼른 싸인도 하고. 도장도 찍고.”

“……”

“그 반지도… 좀 빼고.”


뻔뻔하게 주절거리며 테이블 위를 같이 정리하기 시작하는 남자가 그렇게 기가 막힐 수가 없었다. 진짜 미친놈일까. 친근한 척 구는 그 사소한 행동들이 정말이지 웃기지도 않았다.


“폐하.”

“……”

“더 크게 얘기할까요.”


남자는 잠깐 아무런 말이 없었다.


“… 당장 목걸이 들고 꺼져요. 안 그러면 더 크게 말할 거니까.”

“……”

“아무리 그래도 황제도 체면이 있는데 이런 데서 난처해지고 싶진 않겠죠.”

“……”

“또 하나의 추문이 추가되기 전에 현명하게 일어나시죠. 나도 이렇게 술을 많이 마신 적은 없어서 어디까지 치닫을지 모르겠으니까.”


써니가 투박스럽게 목걸이를 빼내었다. 남자가 정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별 수 없다는 듯 써니가 남자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폐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별안간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의 상체가 기울어졌다. 묵직한 향이 그대로 훅 끼쳐왔다.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입술로 번져가는 뜨거운 감촉이 온통 머릿속을 흔들어놓았다. 그것은 평소 남자의 언행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도 지나치게 부드럽고 느긋했다. 결국 써니가 남자의 어깨를 밀쳐내고 그대로 테이블 위에 있던 물이 담긴 글라스를 들어올렸다.


“……”


남자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보던 써니가 싸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 그때……, 말했죠. 선을 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

“목걸이 가져가요. 난 정말로 주인이 아니니까.”

“……”

“그리고 앞으로 어떤 상황으로든 다신 이렇게 얼굴 마주하는 일… 없었으면 해요.”


밖으로 걸어 나가는 내내 써니는 혼자만의 생각에 깊게 잠긴 채였다. 몇 마디 나누지 않았던 시답지 않은 대화는 어느새 모두 사라져버리고 입술 위로 번져나가던 감각적인 느낌만이 잔상처럼 남아 끈질기게 머릿속을 헤집어놓았다.






근래에 들어 보기 드문 청명한 날이었다. 드넓은 부지를 배경으로 내로라하는 정재계의 인사들과 무리지어 서있는 기자들 위로 군림하듯 차분히 울려 퍼지는 이지적인 음성은 연륜이 묻어났고 모두를 납득시킬만한 권위가 깃들어 있었다. 곳곳에서 플래시가 터졌다. 드문드문 보이는 나이 지긋한 인사들도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서서 단상 위로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모든 것이 우아하고 완벽했다. 그때였다. 별안간 귀를 찢는 커다란 마이크 소음이 장내를 뒤덮었다. 난데없이 리조트 기공식 단상으로 뛰어든 낯선 남자 하나가 마이크를 쥐어들었다. 모자를 깊게 눌러쓴 그는 어딘가 모자란 것처럼 보였고 다소 격양되어 있었다. 과장된 몸짓으로 마이크에 대고 뭐라고 소리치던 남자가 말미에 손으로 느릿하게 목을 긋는 제스처를 취하며 싱글거렸다. 한발 늦게 우르르 단상으로 뛰어올라온 경호원들이 단숨에 남자를 제압했다. 그를 가만히 지켜보는 오 회장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어갔다.


“끌어내리겠습니다.”


남자의 어깨를 발로 거세게 내리누른 경호팀장이 오더를 기다리듯 나직이 말했다. 술렁이는 장내와 동떨어지게도 단상 위에는 몇 초간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공격적이던 조금 전과는 달리 남자는 별다른 저항 없이 구겨진 자세로 붙들려있었다.


“… 괜찮습니다.”

“예?”

“보내드리세요.”


무슨 생각에서인지 손수 남자를 일으켜주고 어깨까지 살뜰히 다독인 오 회장이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여기저기서 기다렸다는 듯 플래시가 터졌다. 이윽고 도망이라도 치듯 어설픈 모습으로 내달리는 남자를 지켜보며 오 회장은 경호팀장 역시 도로 단상 아래로 내려 보냈다. 그렇게 사건이 일단락되는 듯하였다. 뒤에서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듯 쉴 새 없이 달려 나가던 남자는 대담하게도 앉아있는 사람들 사이를 헤집듯 걸어가다가 마치 모든 것이 커다란 계획의 일부인 양 망설임 없이 어느 한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야이씨, 오 써니!!”


이복동생인 주승이 답지 않게 경악하며 소리쳤다. 순식간에 주위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로부터 45도 방향에 대치하던 경호팀장이 다급하게 경호용 총을 꺼내들었고 그 뒤로 분명히 들리지는 않았지만 오 회장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경호팀장에게 뭐라고 거칠게 소리쳐대기 시작했다. 써니는 저 멀리서 황망한 표정으로 저를 보는 오 회장을 보았다. 단상 위로 몇 초간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 점차 목덜미로 더욱 깊게 들이밀어지는 서늘한 날의 느낌이 모든 신경을 일깨워가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가까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거침없는 발걸음이었다. 일순간 써니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귓가로 살이 짓이겨지는 소리가 선명했다. 툭. 크리스탈이 촘촘히 박힌 우아한 클러치가 땅으로 떨어졌다. 이윽고 그 위로 점차 검붉은 핏방울이 점점이 흩어져갔다.


‘이제야 돌려주네요. 사파이어 목걸이.’

‘앞으로 어떤 상황으로든 다신 이렇게 얼굴 마주하는 일… 없었으면 해요.’


부아아앙. 별안간 커다란 굉음과 함께 빠른 속도로 기공식 현장에 들어선 것은 짙게 윈도 틴팅된 검은 차 한 대였다. 그때까지도 좀처럼 종잡을 수 없이 굴던 괴한은 그대로 내달려 차에 올라탔다. 빠르게 멀어져가는 차 뒤로 자욱한 먼지바람이 일었다. 써니는 그 사이로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한 사람을 보았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경악하며 그를 보는 써니의 눈빛이 확연히 흔들렸다.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앞으로 걸어가던 써니는 자신의 목에 자리하던 쉬폰 스카프를 투박스럽게 끌어내렸다.


‘당신이 누군데요.’

‘구면인 사람.’


잊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처음 만나던 그날 밤. 흔들림 없이 쳐다보던 묘한 눈빛. 희한하게 눈길을 빼앗던 사소한 행동들. 마주쳤던 몇 안 되는 순간은 죄다 짜증나게 좀처럼 잊히지 않는 기억들뿐이었다. 써니가 남자의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손에 쥔 스카프가 바람에 흔들렸다.


“……”


매끈하던 손이 엉망이 되어있었다. 주위에 보는 눈이 많았다. 매듭을 짓는 써니의 손이 눈에 띄게 떨렸다. 빠르게 젖어들어 금세 쓸모가 없어진 스카프가 피범벅이 되어 흐늘거렸다.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 아까 목이,”


평상시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써니가 고개를 들었다. 남자는 조금 전의 사고로 붉어진 써니의 목덜미를 보고 있었다.


“지금 내가 중요한 게 아니라,”

“……”

“인근에 병원 있어요. 데려다 줄 테니까,”

“여기에 있지 말고 경호팀장한테……,”


호흡이 딸리면서 낮은 목소리가 잦아들어갔다. 써니가 남자를 불안하게 쳐다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 말 좀 들어,”


써니에게 잡혀있던 손을 뿌리치던 남자가 별안간 품으로 안겨왔다. 모든 것이 느려졌다. 뜨겁게 복부 부근으로 번져나가는 선혈은 써니의 것이 아니었다.


‘멋대로 그러기만 해, 내가 너 진짜 가만히 안 둬…….’

‘… 알았어요 ………,’


쉽게 정의내릴 수 없는 감정이 통렬하게 마음을 가르고 들었다. 빠르게 달려오는 사람들도 여기저기서 터지는 플래시도 점차 보이지 않았다. 써니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고급스러운 화이트 톤의 투피스가 핏빛으로 커다랗게 물들어갔다.








정말 밑도 끝도 없이 의식의 흐름대로 쓰는 상플..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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