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고뇌와 희열이 뒤섞인 목소리, 미국 드라마에서 확인해 보라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죽은 사람의 인생은, 그것도 재능이 만개할 무렵 요절한 사람의 인생은 클라이맥스가 막 시작할 무렵 갑자기 찍힌 마침표로 끝나는 소설과 같다. 뒤의 내용이 미치도록 궁금해지고 상상은 무한히 뻗어나간다. 결말 없이 영원히 클라이맥스가 이어질 거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요절한 뮤지션의 생애 또한 그렇다. 1960년대의 ‘3J’, 즉 지미 헨드릭스, 재니스 조플린 그리고 짐 모리슨은 돌연한 죽음으로 레전드의 반열에 올랐다. 커트 코베인과 엘리엇 스미스도 영원히 늙지 않은 모습으로 팝의 만신전에 들어갔다. 또 한 명의 뮤지션이 있다. 이 사람은 비극적 가계도 때문에 그렇다. 말하자면, 2대째 요절 뮤지션이랄까. 그의 이름은 제프 버클리다. 1994년 <GRACE>라는 유일한 음반을 한 장 남겼다. 그리고 한창 다음 음반을 준비하던 1997년 5월, 미시시피강에서 익사했다. 게다가 그의 아버지는 70년대를 풍미했던 포크 뮤지션 팀 버클리다. 아버지도 젊어서 세상을 떠났다. 그야말로 할리우드에서 탐낼 만한 가족사다. 제프 버클리의 팬이었던 브래드 피트가 영화 제작에 욕심을 낸 모양이다. 하지만 팀 버클리의 부인이자 제프 버클리의 어머니에게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나 죽은 다음에나 하슈”라는 말로.
극 중 장례식에선 〈Halleluja〉가
사망한 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제프 버클리의 음악은 종종 들린다. 그의 음악이 그저 트렌드를 반영하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목소리가 얼마나 숭고할 수 있는지, 목소리가 얼마만큼 듣는 이의 영혼을 울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증거다. 〈Grace〉는 그렇게 많이 팔린 음반이 아니었지만 듣는 사람들에게 성스럽기까지 한 체험을 주는 음반이다. U2의 보노가 한 말이 있다. “제프는 소음으로 가득 찬 바다 속의 순수한 물방울이었다.” 그가 미처 발표하지 못한 노래들과 대표적인 노래들을 모아 최근 발매된 〈So Real: Songs From Jeff Buckley〉는 보노의 회고를 또 한 번 실감나게 해주는 음반이다. 삶과 죽음, 고뇌와 희열이 뒤섞여서 어떤 소리에서든 흐느적대고 춤을 추는 그의 목소리를 만끽할 수 있는. 비록 음반 시장이 절멸할지라도, 음악은 죽지 않을 것이라는 순진한 믿음을 확인시켜주는 목소리인 것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이런 목소리를 가진 인간들이 있기에 레코딩이라는 기술이 존재 이유를 가진다고 하고 싶다.
제프 버클리의 대표적인 노래는 〈Halleluja〉다. 레너드 코헨의 원곡이지만 제프 버클리 버전으로 더욱 친숙하다. 이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음악 애호가뿐만 아니다. 미국 드라마 애호가들 또한 그렇다. 극중 누군가 사망하거나 장례식을 치르게 되면, 어김없이 제프 버클리의 구슬픈 음성이 흘러나온다. ‘나는 다윗이 연주하여 하나님을 기쁘게 했다는 전설의 비밀 화음이 어딘가 전해 내려온다고 들었어. 하지만 당신은 음악 따위 별로 신경쓰지 않지, 안 그래?‘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다. 일견 죽음과 직접 상관없는 내용이다. 그러나 기독교 문화권인 미국에서 ‘Halleluja’라는 제목만큼 죽음의 성스러움을 전하는 단어가 어디 있을까. 게다가 제프 버클리의 목소리로 끊임없이 ‘할렐루야’라는 단어가 읊어지는데야. 말하자면 이 노래는 한국 드라마에서 입영 장면이 나오면 어김없이 흐르는 <이등병의 편지> 같은 존재다.
나는 미국 드라마를 애청하는 편은 못 된다. <프렌즈> <섹스 앤드 더 시티>는 즐겨봤지만 한창 ‘미드 열풍’이 부는 요즘은 어쩌다가 <CSI: 라스베이거스>나 보는 정도다. 그럼에도 〈Halleluja〉가 미국 드라마에 종종 등장한다는 사실을 아는 건 <미드 100배 즐기기 시즌1>이란 책 한 권 때문이다. 요즘 트렌드를 알고 싶으면 ’미드’를 봐야 한다는 선배가 선물해준 책이다.
세상에는 많은 가이드북이 있다. 뭐가 뜬다 싶으면 어김없이 쏟아지는 분야이기도 하다. 그런데 대부분의 가이드북은 영화든 음악이든 뭐든 간에 단순한 지식의 나열로 그친다. 읽고 나도 그 분야의 흐름이라든가 배경은 전혀 알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설령 풍부한 설명이 있다 한들, 어찌된 영문인지 현학적 단어와 문장이 난무한다. ‘이런 것쯤은 알아야지!’라는 고압적 자세가 느껴지는 경우도 종종 있다. 요컨대 피상적 지식만 얻거나 주눅이 들거나 하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가이드북을 믿지 않는다. 만약 나에게 문자중독증이 없었다면 이 책도 그대로 서재에 꽂혔으리라. 그런데 심심풀이로 한 장 두 장 읽다 보니 세 장 네 장 넘어갔다. 장르별로 자세히 분류되고, 수많은 미국 드라마를 소개하는 건 가이드북의 기본이니 그렇다 치자. 풍부한 배경 설명과 관련된 정보가 성실하게 들어차 있었다. 무엇보다 읽기 쉬웠다. 마니아가 썼을 건 분명한데, 마니아 특유의 현학적이고 고압적 자세가 느껴지지 않은 것이다. 이쯤 되면 훌륭한 가이드북이다. 케이블방송 편성표를 찾아보거나 P2P 사이트에서 관심 있는 드라마를 검색하게 된다.
나도 가이드북을 써볼까
나의 책꽂이에는 많은 음악 서적이 꽂혀 있다. 다른 책은 버려도 음악 책은 버리지 않는 편이라 중학교 때부터 사들였던 ‘…명반 가이드’ ‘…필청의 앨범 100선’류의 책이 그대로 있다. 음반시장이 한창 활황이었던 때에도 안 팔린 책들이기도 하다. 좋지 않은 가이드였기 때문일 것이다. 음악의 세계로 관광을 떠난 이들에게 “이곳은 앙코르 톰입니다. 꼭 봐야 할 코스죠”로 설명을 끝내든지, “이 건물은 가로세로 몇㎥로, 3차 함수적으로 보면…” 이런 설명을 주야장천 늘어놓는 여행 가이드 앞에 사람이 모일 리 없었던 것이다. 쉽고도 풍부한 배경 설명으로 암기가 아닌 이해를 시키는 게 명강사의 자질이듯, 가이드북의 필수 조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미드 100배 즐기기 시즌1>을 본 뒤, 언젠가 음악 가이드북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직 첫 책 원고도 못 끝내는 주제에 뭔 소리냐고 출판사 편집장이 화를 낼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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