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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그릴, 96년 역사의 마지막 그릴

Nitro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1.11.30 17:59:44
조회 2529 추천 65 댓글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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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여파로 인해 수많은 식당들이 문을 닫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충격을 안겨준 것이라면 역시 서울역 그릴의 폐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925년에 문을 연, 한국 최초의 양식당 '서울역 그릴'.


일제강점기를 거쳐 한국전쟁과 경제불황도 버텨가며 오늘까지 이어져왔건만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전염병의 습격에는 백여년에 달하는 전통의 식당도 손 쓸 도리가 없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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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그릴의 내부. 


무게감이 느껴지는 테이블과 의자, 관록이 있어보이는 도자기 타일벽, 


그리고 무엇보다도 엄청난 크기의 샹들리에가 "경양식이지만 역사와 전통의 식당이다"라고 웅변하는 듯 합니다.


예전의 경양식 레스토랑들은 음식 자체의 맛도 중요하지만 일단 '분위기'로 고급스러움을 강조하는 게 일종의 정체성과도 같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돈 좀 써서 고급스럽게 먹는 것을 "칼질하러 간다"고 말하기도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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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들렀던 그릴의 창가 좌석에서 바라본 풍경.


도쿄 여행 갔을 때 시부야 스타벅스 2층 자리에 앉아서 스크램블 교차로의 바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한 적이 있는데


(https://blog.naver.com/40075km/220926861730)


이곳 역시 바쁜 도시의 일상을 관찰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입니다.


어마어마한 양의 버스와 택시, 사람들이 숨가쁘게 빙빙 돌며 움직입니다.


그리고 백여년 전의 풍경은 어땠을지 저절로 상상하게 됩니다.


물론 원래 그릴이 개업했던 자리는 옛날 기차역 건물 2층이라 각도는 약간 다르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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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릴의 대표 메뉴, 돈가스.


경양식답게 깍두기와 크림 수프, 샐러드가 동시에 나옵니다.


수프와 샐러드에 김치와 단무지 조합은 아마 전 세계에서 한국 경양식집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조합 아닐까 싶네요.


엄청 고급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나름 기본은 지켜서 '추억의 맛'이라고 할 정도는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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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양식집의 또 다른 특징, 접시에 펴서 담은 쌀밥.


그리고 돈가스가 함께 들어옵니다. 곁들이로는 으깬 감자와 모듬 채소가 올라왔네요.


상당히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게, 가게 인테리어만큼이나 옛날 입맛에 맞춘 요리라서입니다.


부드럽고 두툼한 고기를 선호하는 요즘과는 다르게, 칼로 써는 맛과 씹는 맛이 있는 - 달리 말하면 약간 질긴 - 고기라던가


산미가 약간 느껴지는 소스 등은 확실히 옛 추억을 불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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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후식, 커피 한 잔까지 모두 식사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쩌다보니 이상의 '날개'라는 소설에 경성역에서 마신 커피 이야기가 나오면서 이 레스토랑이 당대 문인들이 자주 찾던 장소처럼 인식되기도 했습니다만, 사실 그럴 확률은 높지 않습니다.


소설에서는 "일,이등 대합실 옆 티룸"이라고 서술했는데, 그릴은 그보다 한층 더 위인 2층에 자리잡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경성역 그릴은 음식값 비싸기로 유명한 당대의 핫플레이스였기 때문에 가난한 작가들이 턱턱 문 열고 들어가 요리를 먹거나 커피를 마시기란 쉽지 않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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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30일을 마지막으로 폐업한다는 소식을 듣고 오늘 다시 찾아간 그릴.


뻔한 표현이지만, 그 마지막을 슬퍼하는지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온 김에 구역사 2층의 원래 그릴이 위치했던 자리를 한 번 둘러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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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넓은 방을 가득 채웠던 테이블과 은식기와 사람들을 상상해봅니다.


먼 길 떠나는 가족과 친구를 배웅하고 또 재회하며 이 곳에서 스테이크를 썰고 와인잔 기울이던 모습을 말이죠.


당시 기차 여행이라고 하면 오늘날의 비행기 여행 못지않은 큰 일이었고


그 여행객 중에서도 그릴에서 밥 먹을 정도의 재력이라면 어딜 가나 부자 소리 들을 법한 위치였을 겁니다.


하지만 원래 매달려있던 화려한 샹들리에는 어디로 떼어갔는지 초라한 대용품이 흔들거리고


오래된 벽난로의 굴뚝은 막히고, 창 밖에는 신역사 건물이 눈 앞을 가로막는 것이


과거의 영광은 사라지고 그 흔적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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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의 양식당이다보니 여기서 사용한 것들은 어지간해서는 국내 최초 딱지가 붙는 것들이 많습니다.


엘레베이터를 구경해본 사람도 드물었을 시절에 덤웨이터(음식용 엘레베이터)까지 설치해서


지하 주방에서 만든 음식을 바로 그릴로 올려보냈을 정도니까요.


잘나가던 시절에는 요리사만 40명이었다고 하니 그 위용을 짐작하게 합니다.


당시에는 그릴에 방문한 손님 뿐 아니라 기차 식당칸 손님들을 위한 요리도 함께 만들었다고 하니까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15전짜리 설렁탕도 큰 마음먹고 주문해야 했던 시절, 3원 20전짜리 양식 코스요리는 그야말로 별세계였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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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업을 앞둔 서울역 그릴에서의 마지막 식사.


이제 영업이 끝날 업장이라 대부분의 음식은 주문할 수가 없고, 돈가스와 오므라이스 등 4가지 요리만 주문이 가능합니다.


마지막 날이라 문의 전화가 많이 오는데 "재료 소진되면 영업 종료입니다"라는 걸 보면 그나마도 한정 수량 판매인 모양.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정식은 주문 안되나요?" 물어봤더니


"혼자 오셨죠?"라고 혼밥러 확인사살을 진행하고는 "한 개만 시키실거죠?"라고 재차 확인한 뒤 "딱 한 개 만들 재료가 남았네요."라는 희소식을 들었습니다.


백년 전통의 양식당 그릴, 그 마지막 그릴 정식을 제가 먹는다니 왠지 기분이 묘하네요.


돈가스 정식과 다른 점이라면 샐러드와 밥은 본 식사에 함께 나오고, 수프와 마늘빵이 우선 서빙된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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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벅스테이크, 꼬치구이 그릴, 생선까스와 새우튀김으로 이루어진 그릴 정식.


하나하나 놓고 보면 분명히 "엄청 맛있다!"는 아닌데, 그래도 경양식 평균 이상은 합니다.


다만 가격이 28,000원이라 가성비로 놓고 보면 좀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데,


수프와 빵, 커피까지 코스로 먹는 가격인데다가 서울역 외식 물가가 평균보다 비싼 점을 감안하고


무엇보다 그 오랜 전통과 과거의 향수가 떠오르게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납득 가능한 금액입니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모듬요리로 나오는 경양식집 정식 메뉴는 어릴적 시험점수 잘 나오면 부모님이 사주시던 어린이 정식 메뉴를 떠올리게 하는지라 먹을 때마다 즐거운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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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나온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우리나라 양식 레스토랑의 시작과 끝을 동시에 마주합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테세우스의 배" 역설입니다.


그리스 영웅, 테세우스가 타던 배를 보관하고 있었는데 세월이 흐르고 목재가 낡아서 하나 둘씩 교체하다가 원래의 배 부품은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면 이 배를 여전히 태세우스의 배라고 할 수 있냐는 철학적 질문이지요.


사람 역시 일정 시간이 지나면 몸을 구성하고 있던 세포가 모조리 바뀌니 정체성의 유지라는 건 물질적인 것 이상의 무언가를 포함하는, 쉽게 생각할 수 없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서울역 그릴 역시 위치가 바뀌고, 주인이 바뀌고, 메뉴가 바뀌고, 손님들이 바뀌어가며 개업 초창기의 모습은 하나도 남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이 지켜오던 상징적 의미가 강하기에 상실감이 큽니다.


그래서 처음에 폐업 소식 듣고는 "정말? 그럴리가 있나..."라며 검색하다가 알게 된 또 하나의 사실.


강남 롯데월드몰에도 1925 서울역 그릴이라는 패밀리 레스토랑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야말로 현대식 크루즈선을 테세우스의 배라고 우기는 뜬금없는 컨셉이라고 생각하다가도


원조 그릴이 폐업하게 된 이상, 어찌 보면 유일하게 남은 희망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언젠가는 강남의 그 짝퉁 그릴이 서울역 구역사 2층으로 이전하며 원조의 명맥을 이을 수도 있는 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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