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인사이드 갤러리

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갤러리 본문 영역

러시아, 소금싸막 2

딥딥-검은홀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9.06.30 15:10:51
조회 426 추천 0 댓글 0
														



3월 28일. 블라디보스톡



이날의 아침을 시작하기 전에,

내 뿌리깊은 무기력함을 먼저 말해보려고 한다.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특징으로는

몇십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비릿함,

불안과 초조에 떡칠되어 탈주범처럼 보내는 매일.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한심한 건, 한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바뀌지 않는 내 모습이다.

한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한심한 행동을 그만두지 못하고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하지 못한다.

거대한 지구에 살면서 고작 뇌속에만 틀어박혀 사는 꼴.

왜 그런지는 모른다.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할수록 더럽게 비참한, 한심한 내 모습에 더 달라붙을 뿐.

아무리 사소한 일, 가령 집 앞 은행에 가는 일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걱정거리로 삼기도 민망한 것으로 늘 걱정하고 고민했다.

그 느낌은, 심장을 약한 불에 졸여가며 서서히 익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핸드폰만 하는 느낌?

설명하기 힘들다. 그런 기분이다.

지금도 완전히 떨쳐낸 것은 아니지만, 이 즈음은 상당히 심했었다.



그러므로 내가 이날의 첫 문장을

깨어나긴 했어도 일어나기는 싫었다.

라고 써도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원래는 이 날 횡단열차를 타려고 했었지만 그냥 다시 자고 싶었다.

사실 무엇보다도 당장 오늘부터 뭘 할지조차 모른다는게 막막했다.

표값만 20만원인, 꿈꿔오던 외국에까지 백수질이냐?

출발 전에야 뭐 자유니 방황이니 했지만 막상 뭘 할지 모르는 여행이란 건 불안하기만 했다.

계획을 세우지 않은 건 내 자신이지만, 대체 이게 백수생활과 다른 게 뭔가 싶었음.

군대에서 꿈꾸던 해외여행을 스스로 오염시키는 느낌이었다.

내 끈적한 나태함으로..

잡생각들에 잠도 오지 않았다.

당연한 수순인 듯 핸드폰을 잡았다. 숙소는 와이파이가 가능했음.

이유모를 불안함에 답답해하면서도 근처 지도는커녕 이미 본 웹툰이나 돌려봤다.

금딸한다고 한 뒤 폭딸친것마냥 기력없이 누워서 시발.. 거리고만 있었다.
차라리 이렇게 된 거 하루 더 머물며 근처나 돌아다닐까도 생각했지만, 그건 싫었다.
그냥 지금 제일 편해보이는걸로 도망치는거 아닌가? 싶어 불편했기에..
그렇게 이것도 저것도 싫다며 누워있기만 했다.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한심함의 이유를 찾는 것부터 지금의 실패까지.

하나하나 곱씹다보니 정말 더럽게 비참한 기분이었다.

울컥해서 찔끔 눈물까지 나올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울컥하고 나니까 상당히 누그러져 진정할 수 있었다.

찾아온만큼 이유없이 사라졌다고 해야 할까,

한숨 한 번 쉬고 툭툭 가슴 두들기며 생각을 다잡았다.

어쨌거나 이곳은 이미 러시아, 그리고 이건 내가 선택했다.

그건 누구한테도 탓할 수 없다는 소리.

처음, 떠나자고 신나있었을 때를 떠올리며 그 느낌을 되새겨봤다.

무슨 느낌이었지? 뭐가 나를 그토록 설레게 만들었을까

방랑과 자유.

김삿갓 이야기처럼 발 닿는대로 방랑해보고 싶었다.
계획도 안락함도 없겠지만 구름처럼 누구보다도 자유롭다.

분명 그 느낌에 대한 동경 하나로 무작정 떠나온 길이다.

이 생각만으로 상황은 같았지만 상당히 다른 기분이 되었다.



이러니 저러니 하면서도 결국 떠나온 건 자유롭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내 마음을 짓누르는, 짓무르게 하는 것들로부터.
입대 전에는 나름 무전여행도 했는데 뭐가 무서워서 이러고 있는거지?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숙소도, 물도 돈도 넉넉하다.

팔다리도 장애는 아직 없고, 내 생각대로 잘 움직여준다.
단지 외국일 뿐이고 내 주관이 없을 뿐이다.
직접 모은 경비로 직접 떠나온 길이다.

남 눈치를 볼 것도, 불안해할 이유도 없다.

일단 움직이자. 무엇부터?
열차표. 바이칼 호수로 가는 열차표를 끊자.

기차역 위치도 대강 알고 있겠다, 나가면 또 헤멜테니 지금이라도 빨리 출발하자.



viewimage.php?id=2bb2c223ecd536&no=24b0d769e1d32ca73fee8efa11d02831027538f7794a651c79560564d6465416de27597e155159bafbc999a09281100560847936757de6378246ca6175e235734699


표를 끊어도 바로 타지는 못하겠지만, 혹시 모르니 전날 들렀던 바다나 보고 가기로 했다.
처음엔 해변가만 둘러볼 생각이었는데 헤메다 멋진 장소까지 발견했다.

투명하고 하얀 하늘빛 아래 물결치는 바다.
저 부두 위로는 파도도 넘실거려서 더 영화같았다.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붙잡고 같이 보고 싶었음. 그정도로 예뻤다는 소리.

조금 구경하고 다시 기차역으로 출발했다.

의외로 헤메지는 않았지만, 기차역을 설명하는 게 어려웠다.
러시아에서 기차역은 레일웨이라고 해야 알아들음. 써브웨이 트레인 ㄴㄴ.



viewimage.php?id=2bb2c223ecd536&no=24b0d769e1d32ca73fee8efa11d02831027538f7794a651c79560564d6465416de27597e155159bafbc999a09281100560847936757de460d545cd6224b735737465


길거리 음식은 왠만하면 안 먹으려고 했는데 먹었다.

애초에 음식 살 돈으로 더 오래 머무르려 집에 돌아다니던 다이어트 가루까지 챙겨왔는데,

너무 맛있어보여서 하나 사먹었다.

사진은 케밥인데 주문하면 바로 옆에있는 고기 꼬치에서 잘라서 말아줌.

메뉴는 글자를 못 읽어서 그냥 크고 양 많아보이는 걸로 주문.
맛있었다.

먹다가 한조각씩 던지면 어디선가 비둘기도 날아왔다. 갈매기까지..
바다에서 꽤 떨어져 있었는데 어떻게 알고 온건지 모르겠다.



viewimage.php?id=2bb2c223ecd536&no=24b0d769e1d32ca73fee8efa11d02831027538f7794a651c79560564d6465416de27597e155159bafbc999a09281100560847936757db630d2139e6471e735738d6c


이건 기차역 내부.

러시아는 철도청 (기차역) 입구에 x레이 기계가 있어 들어갈 때마다 소지품 검사를 한다.

처음에는 신기했는데 나중에는 세상 귀찮았다.

아무튼 저기 왼쪽 기계에서 번호표를 뽑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와중에 한국인 아저씨를 만났다. 저기 왼쪽에 까만 분.
처음에는 이것저것 물어보는게 마냥 귀찮았는데 별개로 또 좋기도 했다.

음.. 설명하기 힘드네.

외국에서 한국말을 듣는 건 좋았지만, 귀찮을 정도로 말이 많으셨다.

굿.

여튼 이야기하며 목적지도 공유했다. 아저씨는 하바롭스크, 나는 이르꾸츠크.

순서는 아저씨가 먼저 내리는 건데, 어차피 탈 거 같이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얘기하다보니 재밌기도 했고.

우연인지 아저씨도 같이 다녀보지 않겠냐고 하셨다.

어떡하지..

같이 타는 건 몰라도 같이 다니는 것 까지?

혼자 다니기 무섭고 걱정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몇개 없는 내 다짐을 깨기는 싫었다.
한편 다른 목적지나 목표가 있던 것도 아니어서 좋겠다 싶기도 했고.

결국은 거절했다.

이게 굉장히 애매한건데, 이유는 모호한 내 느낌이었다.

같이 다니고 싶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불편할 것 같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표를 사는 건 다행히 영어가 가능한 역무원을 만나 잘 마무리됬다.
호스텔 직원이 적어준 "시베리아 열차를 타고싶어요" 를 보여주며 이르꾸츠크를 반복했다.

뿌듯하기도 하고 일이 잘 풀려서 기분도 좋았는데, 사실 문제가 있었다.

50만원을 주고 구매한 것을 20만원으로 알아들었던 것.

당시 환율에 익숙치 않아 암산에 실수가 생겼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나는 모르고 좋아하기만 했는데, 옆에서 아저씨가 계속 딴지를 걸었다.

우리가 러시아어를 못하니까 사기를 친 것 같다고. 바가지를 썼다고.

처음에는 그냥 한 귀로 흘렸지만 계속해서 이어지니 언짢아지기 시작했다.

내 표까지 사기라고 하니까, 또 친절했던 역무원까지 의심하니까 말이다.

여튼, 이 때가 아침 11시쯤이었는데 밤 7시, 8시 표여서 일단 주변이나 둘러보기로 했다.



viewimage.php?id=2bb2c223ecd536&no=24b0d769e1d32ca73fee8efa11d02831027538f7794a651c79560564d6465416de27597e155159bafbc999a09281100560847936757db53adc129d6123e5357374fa


블라디보스톡 역. 사진에는 없지만 왼쪽으로 가면 위에 먹은 케밥집이 있다.

아저씨한테 케밥 맛있다고 하니까 사서 반 잘라주셨다.

금세 언짢았던 마음이 부끄러워졌다..

근처 좀 돌아다니다 다시 바다로 갔는데, 중간부터 슬리퍼로 갈아신었다.

발가락이 계속 전투화에 눌려 너무 아팠다.



viewimage.php?id=2bb2c223ecd536&no=24b0d769e1d32ca73fee8efa11d02831027538f7794a651c79560564d6465416de27597e155159bafbc999a09281100560847936757de531851ece6675b13573c0cb


이쉬보번 훈년병 지금 무순 지쉽니꽈
응 내년 예비군~

꺄르륵



viewimage.php?id=2bb2c223ecd536&no=24b0d769e1d32ca73fee8efa11d02831027538f7794a651c79560564d6465416de27597e155159bafbc999a09281100560847936757db13bd0109f3124b63573faec


연어마냥 돌아옴. 위에 그 장소.

개인적으로 너무 예뻐서 아저씨도 모시고 왔다.



이 이후로는 아저씨의 숙소로 향했다.

나는 애초에 짐을 다 챙겨서 나왔지만, 아저씨는 짐을 숙소에 놓고 왔던 것.
가는 길에 작은 시장도 서있길래 저녁에 기차에서 먹으려고 치즈도 삼.
몰랐는데 러시아 낙농업이 강하다고 했다.

그리고 다시 숙소로 향했는데, 이쯤부터 지치기 시작했다.
전날에도 돌아다닌 길이었던데다가 아침에도 돌아가녔던 길이었음.

거기에 중간에 대형 마트도 들러 동선까지 꼬였었다.
가방 무게도 무시할 수 없었고.
그 상태로, 상당히 예민해진 상태였다.

아저씨가 다시 열차표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사기먹은 것 같다고..
몇 번 그러냐고 하다가 알았으니까 숙소나 좀 가서 찾아보자고 쏘아붙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저씨가 잘못 계산했다고만 생각하고 있어서 짜증밖에 나지 않았다.
한번 쏘고나니 괜히 어색해져 나머지는 떨어져서 걸었다.



아저씨의 숙소는 내가 잤던 곳보다 더 높은 언덕에 있었다.

대충 진짜 힘들었다는 소리 ㅇㅇ.

어쨌든 도착해서 좀 앉아있다가 환율을 검색했다. 아 괜히 같이 다녔다 하면서..

그런데



뭐라고 설명해야 할 지 모르겠다.
타짜에서, 누나 돈 다 말아먹은 곤이마냥,

가슴이 조여들고 심장이 쿵쾅거리고 식은땀이 났다. 진짜 믿고 싶지 않았다.
내가 13만원짜리 표를 50만원에 샀다니
머릿속에 좆됬다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가뜩이나 피곤했고 겨우 좀 쉰다 했는데, 말도 막히고 숨도 잘 안쉬어졌음.

지금이야 그깟.. 할수도 있지만 당시에는 정말 심각했다.

외국에서 경비의 1/4이 날아갔으니까. 심지어 타고 온 비행기보다 비쌌음.

말도 잘 안통하는 외국에서, 친절해보이던 역무원에게 당했다 생각하니 세상이 무너진 기분이었다.

처음 자취해서 월세계약서를 썼는데, 나중에 읽어보니 장기매매 동의서였다 뭐 이런 느낌?

거기다 환불도 출발 5시간 전에나 가능하다 했는데, 8시 차에 이미 3시였기에 불가능해보였고.

어찌됬건 앉아있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닐테니 다시 철도청으로 향했다.

가는 내내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는 기억이 잘 안난다.

다만 난 왜이렇게 병신같지란 생각과 당장 어떻게 할 건지나 생각하자라는 생각이 얽혀있던 것 같음.

아저씨는 나보다 손해를 덜 봐서 그런지 좀 행복해보였다.

여튼 툭 건드리면 정말 울어버리거나 주먹부터 날렸을 정도로 날이 서 있었다.

그냥 그만큼 머릿속이 시끄러웠다고 해야겠다.

도착해서는 다행히 10만원정도 수수료를 내고 환불했다.

내가 참 약았다고 느낀게,

환불 직후에는 세상 부러울 게 없었는데 조금 지나니 손익을 계산하며 화내고 있었다.

수수료를 생각하면 다음 표값은 최대 40만원 아래여야한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아저씨가 있었던 것.

혼자가 아니어서, 또 여행은 원래 이런 거라며 위로해주던 아저씨가 있었던 것이었다.



사실 알고보면 사기랄 것도 없었다.

처음부터 제대로 알아보지 않은 내 잘못이지.

횡단열차는 3개의 등급이 있다. 비행기에서 이코노미, 비즈니스, 퍼스트마냥.

노선은 블라디에서 시작해 모스크바까지인데. 그 중에서도 블라디 - 이르꾸 구간은 가장 인기가 많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블라디에 도착해 이르꾸 (바이칼 호수)로 향하니까.

당연히 그만큼 표 경쟁도 치열해 최소 1주일 전에는 미리 예약해야만 저렴한 3등석 표를 살 수 있었을 텐데,

나는 당일날 구입했으니 당연히 가장 비싼 1등석밖에 없었던 것.

이 정보들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인터넷을 못 쓰고 있었으니까.



환불까지 끝나니 힘이 쭉 빠졌다.

더 할 수 있는 일도, 할만한 힘도 없었다.

당시에는 마냥 낙관적이었다.

그냥 호스텔에서 하루 더 자면서 3등석 예매하자..

그래그래.


ㅅㅅ : 일단 호스텔로 가서 하루 더 머물고 표 예매해서 내일이나 출발해야 할 것 같아요.

ㅇㅇ : 그러면 같이 가자. 어차피 시간도 좀 남고 그 호스텔 명함도 받게


이렇게 같이 호스텔로 향하게 되었다.

도착하니까 전날 "횡단열차를 타고 싶어요" 를 적어줬던, 기차역 방향까지 알려줬던 직원이 있었다.

열차 타지 않았냐고 물어봤는데 그냥 웃어넘겼다.

쪽팔려서 어떻게 말하냐. 또 실제로 말할 방법도 없고;



하루 더 결제한 뒤, 짐도 풀고 밖으로 나갔다.

근처 산책 겸 아저씨 배웅.

나는 점심에 사진찍은 바닷가로 가려 했지만, 아저씨가 거절했다.

한 번 봤으니 다른 곳으로 가보자고 하셨음.

그래서 바닷가 옆쪽으로, 언덕을 따라 걸었다.

러시아는 언덕이 무지하게 많음.

걸으면서 평화로움을 느꼈다.

주변엔 꼬맹이들, 영화관, 코카콜라 건물과 하얀 첨탑같은 전망대가 있었다.

외국 영화관에서 모르는 말로 자막 뜨는 것을 보면 무슨 기분일까

어차피 못 읽으니 정말 영화의 분위기에만 집중할 수 있지 않을까?

나중에 자막달고 다시 보면 완전 새로운 영화를 보는 기분이겠다.

이런 뻘생각이나 하며 올라갔다.



오르막길의 끝.

다시 내리막길이 되는 지점에서 아저씨와 헤어지기로 했다.

반나절 남짓, 만난 시간은 짧았지만 가슴이 뭉클해져 한 번 끌어안고 헤어졌다.

50대에 가족에게 허락받고 배낭여행을 하시던 아저씨.

진짜 멋있었다.

그 때 여러모로 고마웠어요.



이어지는 저녁, 표를 알아보다 굉장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져온 카드가 해외사용등록이 안 되있어 사용하려면 핸드폰 인증이 필요하다는 사실.

부모님이 쓰시던 카드니 당연할수도 있지만,

지금 난 유심칩을 사지 않아 핸드폰 인증을 할 수가 없다.

주변 사람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시간이 생명이다.

3등석은 이미 다 매진, 그나마 2등석이라도 구하려면 빨리 예매해야 한다.

하지만 연락도 잘 안되고 그나마도 기다리다보니 2등석까지 매진.

그리고 과정도 전부 영어에 상당히 복잡했어서 재촉하기도 미안했고.. 여러모로 답답했다.

결국 다음 2등석 표는 최소 1주일 뒤. 심지어 3등석은 2주 뒤까지 매진이었다.

남은 건 다시 1등석을 사거나 기다렸다가 2등석을 타거나

여기서 터져버렸다. 아침과 똑같은 침대 위에서, 시간만 바뀐 채로.

1등석이야 당연하고, 어떻게든 2등석을 산다고 해도 환불 수수료를 합치면 1등석과 같은 가격.

이럴거면 차라리 오늘 1등석에 탔으면 되는거잖아.

이런 생각들이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하루종일 얇은 실 위에서 줄 타던 감정이 미끄러졌다.

너무 ㅈ같아서, 너무 비참해서, 또 쪽팔려서, 이 시간들과 돈이 아까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냥 집으로 돌아갈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진지하지는 않았다.

울면서 가출한다는 꼬맹이처럼 감정에 북받쳤을 뿐이었다.

탓할 사람도 없었다.

신물나게 역겨운 내 모습이 부끄러워 누워서 뭉그적거렸다.

한참을, 느껴지기에 한참을 그렇게 누워있었다.

그러다가 생각을 추스렸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건 아침에 한번 겪어봤다는 것.

어찌되었던 누워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2가지로 선택지를 좁혔다.

1주일을 더 머물고 2등석을 타거나 집에 돌아가기로.

사실 머무르는 것도, 돌아가는 것도 견디기 힘들만큼 무서웠다.

머무른다면 직원이 날 어떻게 생각할지가, 돌아간다면 또 다시 병신처럼 살게 될 것이.



그래도 어느정도 생각을 정리한 후 일어났다.

일단 일어나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일기를 쓰기로 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지금 생각해도 기적이라고 밖에 할 수 없을만한 일이 일어났다.

umar 라는 형을 만나게 된 것이다.


ㅇㅇ: ㅎㅇ

ㅅㅅ: (뒤적뒤적) ㅎㅇ

ㅇㅇ: 왜그렇게 표정이 어두워? 무슨 일 있어?

ㅅㅅ: 아 사실은..


이런 식으로 일기를 쓰던 중, 옆에 앉은 사람이 말을 걸었다.

어쩌다보니 자연스럽게 내 사정을 얘기하게 되었다.

영어를 거의 모르는 형이라 번역기로 소통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솔직히 실질적인 도움은 바라지도 않았다.

그냥 누군가 하소연할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러다가


ㅅㅅ: 열차표가 없어서 이르꾸츠크에 못 가는데, 무계획으로 온 거라 이제 뭘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

ㅇㅇ: 이르꾸츠크를 가는 거면 비행기를 타도 되잖아?


처음엔 장난치는 줄 알았다.

도시를 이동하는데 비행기를 탄다고????

내게 비행기란 사치의 절정이어서 국내선이란 것은 상상조차 못하고 있었다.

당연히 거절했다. 몇 번이나.

그런데 막상 찾아보니 20만원밖에 하지 않았다.

철도와도 비슷한 정도.

이 정도면 괜찮고말고. 예매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아직 남아있는 문제. 결제는?

20만원은 내일 표값인데 내 카드는 온라인 결제가 안된다.

내 상황을 말했다.

그리고 조금 의논한 끝에 근처 atm기에서 현금을 빼 형 카드에 넣고 예매하기로 했다.

그렇게, 밤 12시에 러시아 밤거리로 나섰다.

그 무섭다던 스킨헤드의 나라를 반바지로 한밤중에 돌아다니고 있다는게 믿기지가 않았다.



호스텔 주인에게 눈총을 받으며 나온 밤,

곧 은행에 도착했다.

거기까지만 해도 반쯤 꿈꾸는 기분이었다.

고등학교 때 잘나가는 형의 오른팔이 된 것마냥 아드레날린이 솟구쳐 웃으면서 뛰어다녔지만

막상 돈을 뽑을 때가 되니 의심과 불안감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갈 수는 없으니까.. 넣기는 했지만

형이 내 여권으로 예매할 때 몰래 여권도용사례를 검색하고 있었을 정도로 불안했었다.

30분쯤 지났을까, 갑자기 형이 장난을 쳤다.

갑자기 boom!이라며 양 손바닥을 펼쳐 보여줬는데,

응 니 돈 다 터짐~ 뭐 이런건줄 알았다.

그 순간 온갖 생각을 다 했다.

경찰서에서 번역기로 설명을 하고있는 모습부터

선빵을 날리면 이길 수 있을까.. 러시아 감옥에 갇히면 뉴스에 나오는건가..

별 생각을 다하며 주먹을 꽉 쥐었는데,

내 표정을 보고 형도 당황한 것 같았다.

갑자기 왜그러냐고 물어봤음.

다행히 괴상하긴 했지만 번역기로 오해는 다 풀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하지만

곧 다른 걱정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당연히 형과 같이 간다고 생각했는데, 형이 가지 않는다고 한 것.

과연 내가 러시아 국내선을 타고 공항에서 길을 찾을 수 있을까..?

이미 같이 바이칼에 도착해 안내받는 것까지 생각했는데 어떻게 이럴수가

배신감부터 무섭고 당황스럽고 놀란 마음에 뭐라고 막 말했다.

그런데 이게 뭐 어떻게 방법이 있던 것도 아니고..

형은 계속해서 나를 안심시켜줬다.

넌 군인이야.. 괜찮아.. 형한테 연락하면 형 친구들이 도와줄거야..

정말 패닉이었지만 이상하게 군인이란 말에 조금씩, 어느정도 진정이 되었다.

그러면 내일 블라디 역에서 이르꾸츠크 - 모스크바 표를 사서 가야겠다 까지 생각할 정도로.

그제야 피로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하루종일 팽팽히 조여져있던 볼트가 미끄러진 듯, 긴장이 풀리자 견딜 수 없는 피곤함이 몰려왔다.

그래도 자려니까 또 불안해지더라.


이날의 일기.

일어나서 굉장히 답답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니.. 그냥 여기서 하루 더 자고 하루종일 바다를 볼까도 생각했지만, 너무 비겁한 것 같았다.

난 돈을 갖고 있지만, 더 갇혀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히려 이 조금의 돈이 나를 더 묶고 있었다. 모르겠다. 지금도 정해진 건 없다.

그냥 갈 뿐이다. 지금과는, 예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또 다를 모습을 향해. 난 자유롭고 싶을 뿐이다. 이 정체모를 불안함, 두려움, 답답함, 강박으로부터..


여긴 철저히 나 혼자만의 공간. 부모님이나 친지의 도움이 껴들 수 없는.


계속해서 기가 죽어. 왜? 이럴 땐 엄마가 다 해결해줬으니까.


착각하지 말자. 내가 불안해하는 건 '외국'인 현재가 아니라 스스로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인거야.


그리고, 여기서나 돌아가서나.. 또 똑같을 것 같다는 직감과 이어질 Fucking bored할 무기력함에 대한 진절머리..염증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열차를 기다렸다 타도 후회하고 안 타도 후회할 것 같다면, 뭐 어쩌라는 건데?

어떤 것을 선택하고 어떤 것을 책임질건데? 이 문제의 핵심은 돈, 시간, 타인, 의미가 아니야.

얼마나 책임질 수 있는데? 음악 하나로 기분이 좌지우지되고 인사 한 번으로 우울해지기도 하며 급한 상황이 되면 어쩔 줄 몰라하는..

작은 손해 하나에도 지독히 괴로워하는 현재 상태에서 어디까지 책임질 수 있는데?


추천 비추천

0

고정닉 0

0

댓글 영역

전체 댓글 0
등록순정렬 기준선택
본문 보기

하단 갤러리 리스트 영역

왼쪽 컨텐츠 영역

갤러리 리스트 영역

갤러리 리스트
번호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추천
설문 SNS로 싸우면 절대 안 질 것 같은 고집 있는 스타는? 운영자 24/05/06 - -
27578 귀국할때 술 싼거 2리터정도 캐리어가방에 넣어도돼? [1] ㅂㅂ(106.181) 19.08.05 223 0
27574 <소녀상지킴이! 전국소녀상대행진> 참가자 대모집!!!! 미끌비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9.07.29 295 0
27573 호치민 최초 룸 클럽 Max 가라오케 입니다 박남정(1.55) 19.07.28 465 0
27572 님들 저 중국에서 하루 머물건데 봐주셈 ㅇㅋㅇ(218.157) 19.07.28 117 1
27571 <소녀상지킴이! 전국소녀상대행진> 참가자 대모집합니다~~~ 미끌비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9.07.27 262 0
27569 홍콩 물가비싸여? [2] 크레이지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9.07.22 492 0
27568 시애틀 매리너스 홈구장 투어 다녀왔습니다 로드뷰(1.235) 19.07.20 181 1
27567 제주도 호텔 추천 하이(118.129) 19.07.18 232 0
27566 태국 여행 4박5일 여행 경비 얼마정도 듭니까? [2] ㅇㅇ(119.71) 19.07.15 546 0
27565 러시아, 소금싸막 4-2 딥딥-검은홀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9.07.14 278 2
27563 러시아, 소금싸막 4-1 딥딥-검은홀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9.07.14 433 3
27562 다다음주쯤 중국 여행 갈려는데 에그 질문 좀 ㅇㅇ(218.55) 19.07.14 274 0
27561 해외여행 할때 짐보관 [2] ㅇㅇ(223.62) 19.07.13 154 0
27559 와이키키 맛집좀 추천해주세여... 토린이(173.198) 19.07.13 137 0
27558 뉴욕 여행 생각중인데 1주정도면 ㄱㅊ나요?? [1] ㅇㅇ(223.33) 19.07.12 179 0
27557 본인 배낭여행 코스인데 어때보임??? ㅇㅇ(110.10) 19.07.09 203 0
27556 멕시코 칸쿤 all inclusive 호텔 후기 밥 술 무제한 [1] 봉타스틱TV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9.07.09 644 0
27554 노을공원(Noeul Park) GZSS(61.76) 19.07.07 117 0
27553 혼자 여행가기 좋은 곳 ㅇㅇ(39.7) 19.07.06 199 0
27552 괌 가본사람? [1] ㅇㅇ(220.80) 19.07.06 527 0
27551 터키 가본 친구들 있니 ?? [1] 낭아풍풍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9.07.04 250 0
27547 러시아, 소금싸막 3 [6] 딥딥-검은홀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9.07.01 548 4
러시아, 소금싸막 2 딥딥-검은홀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9.06.30 426 0
27543 러시아, 소금싸막 1 딥딥-검은홀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9.06.30 691 2
27542 항공사 특가 프로모션이래!! ㅇㅇ(211.243) 19.06.29 196 0
27538 블라디보스토크 여행에서 찍은 영상입니다. [1] dlfqhsdirud(219.240) 19.06.27 271 0
27537 코타키나발루 선셋 닥터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9.06.27 307 0
27536 항공사 프로모션 여행 특가래 ㅇㅇ(183.100) 19.06.25 214 0
27535 배낭여행 추천지 [1] ㅇㅇ(61.82) 19.06.24 222 0
27534 쿠알라룸푸르 가고싶은데 [9] II3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9.06.24 271 1
27533 여행자보험 주목 테리코(1.229) 19.06.23 187 0
27532 베를린 FKK 및 체코 SHOWPARK 후기 및 썰 ㅇㅇ(42.35) 19.06.23 3686 1
27531 가까운 일본여행후기 [1] ㅇㅇ(211.36) 19.06.22 425 0
27530 세상에서 제일 가까운 해외관광지 ㅇㅇ(58.239) 19.06.21 349 0
27527 National Institute Of Ecology GZSS(223.56) 19.06.18 106 0
27526 크루즈 타면 고퀄음식 무한 무료라더니 실화네 ㄹㄼㄹ(114.207) 19.06.18 443 0
27525 여행 부심 쩐다는... 미여니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9.06.18 233 2
27521 짐 로저스가 말하는 북한의 관광산업 ㅇㅇ(39.7) 19.06.11 195 0
27519 제주도 여행코스 짜다 발견함 봉태규 전 여친 맞죠? 건강하게 얌암(110.70) 19.06.06 700 0
27517 SBS 집사부일체 후쿠시마 아오모리현 방송 청원 부탁 드립니다 ㅇㅇ(119.195) 19.06.05 135 1
27511 해외 나가는데 [1] 데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9.05.25 249 0
27510 비행기 티켓팅할때 여권필요함? [2] ㅇㅇ(175.223) 19.05.24 286 0
27507 캄보디아는 에이즈 위험국인가??? 굉장하다(117.20) 19.05.23 186 0
27505 3년간 사귄 연인 알고보니 근친상간? [1] 국뽕한사발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9.05.20 398 0
27503 여름 방학때 스포츠 경기 볼수있는 여행지 추천좀. [1] ㅇㅇ(223.39) 19.05.16 117 0
27501 북한여행 다녀올사람 앙기모띠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9.05.13 194 0
27500 형들 베트남 유흥여행이면 어디로가야대? ㅇㅇ(223.38) 19.05.13 295 0
27498 유럽쪽 여행가면 후회안함?? 하얀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9.05.11 199 0
27495 Mokpo Ceramic Livingware Museum 여행가(211.204) 19.05.11 221 0
27490 선생님들 여기 어디야? ㅇㅇ(222.239) 19.05.10 153 0
갤러리 내부 검색
제목+내용게시물 정렬 옵션

오른쪽 컨텐츠 영역

실시간 베스트

1/8

뉴스

디시미디어

디시이슈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