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의 짐작대로였다. 드디어 창밖이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할때까지, 메이는 쉼없이 무언가를 계속 떠들어댔다. 크리스는 메이의 그런 점을 결코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도움이 됐다. 그녀의 수다는 급격하게 변하는 상황을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던 크리스는 구원해준 존재였으니까.
"...결국 통치자가 마녀라는 이유로 공격할 수 있는 시대는 수백년 전에 끝났다는 거지. 오히려 요즘 시대에 마법은 신의 뜻을 내세워 권력을 잡을 수 있는 도구로까지..."
"엘사는 정령을 내세웠어. 신이 아니라."
잠자코 메이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크리스가 끼어들었다. 메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그렇다는 소리지. 엘사의 경우는 나도 특별하다고 생각해. 정령, 정령이라... 다소 이교도적인 표현이잖아."
크리스는 가만히 아무말 않고 주머니에서 수첩 하나를 꺼내들었다. 왕자는 수첩을 펼쳐보는 대신, 수첩의 겉표지를 아무 말 앉고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다이아몬드 정령석. 위대한 엘사 1세의 상징이지."
소녀가 입을 열었다. 크리스는 말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마름모꼴 모양 안에, 가로방향으로 그어진 두 개의 평행선. 이 두 평행선은 다이아몬드 모양 안에 두 개의 작은 정삼각형을 만들었다. 이게 바로 엘사가 전쟁 내내 깃발에 그리고 싸웠던 정령의 표식. 엘사는 이 표식이 상징하는 정령이 자신을 인도하고, 종종 직접 조언까지 내리곤 한다고 주장했다.
"나도 언젠간 이 깃발을 들고 싸우게 될줄 알았어. 이런 일은 꿈도 꾸지 못했지."
"안나 공주님은..."
메이가 뭔가를 물어보려다가 입을 닫았다. 크리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물어볼 게 있으면 해도 되잖아. 오랫동안 궁금했을텐데."
"그냥... 조금은 이해가 안가서 그래. 6월 21일의 그...사건."
"자매의 난. 나도 대체 왜 그래야 했던 건지 종종 어머니께 여쭤봤었어."
2년전 6월 21일, 안나는 비밀리에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난 노덜드라 무장저항 세력을 결집시켰다. 영국 위즐튼 대공에게 협력을 약속받고, 일부 장교들을 포섭한 안나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자신의 생일잔치 도중 군대를 이끌고 왕궁으로 들이닥쳤다.
엉성한 시도였다. 쿠데타군은 엘사의 털끝하나 건드리지 못했고, 직접 마법을 이용해 사태진압에 나선 엘사로부터 간신히 도망친 안나는 도주 도중 어깨에 총상 한 방을 입은 뒤 크리스토프, 크리스와 함께 위즐튼 군함에 타고 서던 제도로 도주했다.
엘사는 특별히 안나를 추격하지도 않았고, 영국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지도 않았다. 그냥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계속해서 노르웨이의 소국들을 굴복시키는데에 집중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코로나의 적극적인 참전을 경계했단 소문도 있고, 그냥 배신당한 충격이 너무 커서 그것을 애써 부정하고자 아무 일도 없었던 척 했던 것일수도 있었다. 아무튼, 안나는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뭐라고 하셨는데?"
"알려줄 수 없다 하시더라고."
"단호하게? 무슨 때가 되면 알려준다는,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단호하게 안될 일이래?"
"그래, 그렇다니까."
기차는 쉬지않고 덜컹거렸다. 두 사람의 나지막한 대화는 어느 새 쇠가 맞물려 나는 소음의 일부로 스며들어 있었다.
"사정이 있으셨겠지. 안나 공주님이시잖아."
"모르겠어, 나는."
크리스가 지금 이 순간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딱 둘 고르라면, 엄마와 아빠일 것이다. 왕자는 이 두 사람의 인생도, 생각도 이해하지 못했다. 대체 무슨 시대에서 무슨 삶을 살아온걸까. 그리고 지금은 무슨 생각을 하길래 친아들마저 이런 상황에 몰아넣은 것일까.
햇살은 새삼스러우리만큼 뜨겁게 느껴졌다. 도시를 벗어난 철로는 원시로 접어들었다. 그래, 이곳이 아렌델이다. 아직 도시와 도시 사이는 텅 빈 공허일 뿐, 군대가 지나가기 위한 길에 불과한 왕국. 이런 아렌델이기에 크리스에게도 희망이 있다는 거겠지.
"올라프는 대체 누구일까?"
메이가 생각하고 싶지 않던 화제를 꺼냈다. 크리스는 얼굴을 억지로 찌푸리며 동요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아렌델의 왕이지. 우리가 맞서야 할 최후의 적이고."
"그래, 네가 주장해야 할 왕권을 쥐고 있는 자이지. 그런데 그거 말고, 올라프가 진짜로 누구냐고. 그가 누구길래 대체 왕노릇을 하고 있는건지, 그런 건 생각해봤어?"
"눈사람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그냥 엘사 1세의 아들이란 소문도 있어. 그런데 대체 왜 다 소문이어야 하는걸까."
그건 메이의 말이 옳았다. 엘사조차도 가끔은 신문에 얼굴을 드러냈고, 또 가끔은 연설문이 신문에 실리기도 했었다. 서던제도에서조차 종종 엘사의 소식을 신문에서 찾아볼 수 있었지. 하지만 올라프는? 무작정 서던을 떠나온 지금 이순간조차 메이와 크리스는 올라프가 누군지, 사람이기는 한지조차 알 수 없었다.
"아렌델에 도착할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되겠지."
"괜찮을까, 정말로. 그런 안일함으로."
그렇게 말하는 메이도 '일단은 베르디오에 가야지'라고 말할 정도로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근데 정말 슬슬 점심때도 되가는 거 같아. 순무 씹을래?"
잠시 침묵을 지키던 메이가 물었다. 크리스가 창밖을 내다보며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너는 순무가 진짜 좋아서 먹는거야?"
"좋아해두는게 좋을걸. 질릴정도면 곤란하고. 생각해봐, 일이 꼬일대로 꼬이면 며칠 내내 순무만 먹고 살아야 할 수도 있어."
"대체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건데?"
"그야 우리가 기차탈선사고 같은 거에 얽혀버려서 산이나 평야에 고립되게 되면 비상식량이라곤 내가 챙겨온 순무씨 뿐이니까. 아마 뿌려둔 씨가 자라는걸 기다리면서는 순무를 먹어서 버텨야 할거야."
"말을 말자."
기술자에 가깝니 뭐니 해도 이 소녀는 노덜드라인이 분명했다. 유목민족스러운 사고방식. 음, 생존에는 도움이 될지도. 기차 탈선이라. 되도록 벌어지지 않기를 바랐지만, 바로 이곳에서 기차가 탈선을 해버린다면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기차가 바람을 받아 좌우로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군수품과 군인들을 나르기 위해 만들어진 철로고, 차체였다. 정복왕으로 알려진 엘사가 일을 그정도로 허술하게 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크리스는 눈을 감았다. 창 밖의 광경은 도시의 음산함을 담고 있지 않았다. 지금은 음산함에만 익숙해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런 시대니까. 음울하거나 미쳐있는 인간들만이 오래 살아가는 세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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