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에 글 올린 S전자에 재직 중인 선배다. 대강 갤러리에 있는 글을 읽다보니, 연봉을 묻는 질문도 있고, 한남대에서 대기업 가봐야 생산직을 한다느니 X소리도 있고, 패배의식/자기비하에 빠져있는 글도 많더라. 나는 취업 시 학교 이름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아니 그보다는 오히려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생각보다 많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리고 아무리 본인이 구제불능이어도 의지에 따라 뒤짚을 기회는 충분히 잡을 수 있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몇 가지 오해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a. 명문대, 인서울, 지방대는 배정되는 업무가 다르다? 답은 아니다. 직군(연구/개발직, 사무직, 생산직 등등) 등은 학력 또는 전공에 따라 나뉘지 학벌에 따라 나뉘지 않는다. 즉, 동일 전공의 서울대 출신과 한남대 출신은 동일한 업무를 한다. 고졸 or 대졸/대학원졸 여부에 따라 생산직과 사무직(연구/개발, 디자인 등 포함)이 나뉜다. 추가로 학/석/박사의 차이는 (단지) 경력의 인정 여부다. 즉, 학사로 입사하면 3년차에 석사 신입사원과 연봉이 같아진다.
b. 대기업은 학벌을 많이 본다? 일단 S는 아닌 쪽에 가깝다. 입사를 하게되면 모든 관계사(계열사)의 학/석사 신입사원들이 함께 그룹 연수를 받는다. 그룹 전체에서 1년에 약 1만명의 인원이 입사하므로, 차수별로 약 200명씩 연수를 받게 된다. 연수 기간 동안 한 개 차수를 총 열개의 팀으로 나누어 관리를 한다. 내가 연수받을 당시 우리 팀은 23명이었는데, 나를 포함하여 절반인 12명이 지방대 출신이었다. 물론 비공식적으로는 고과를 주는 부서장의 개인 성향에 따라 다를 수는 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학벌로 인사 고과를 차별하는 정황이 포착되면 부서장이 인사 징계를 받는다.
c. 신입사원 연봉 7천설 https://m.dcinside.com/view.php?id=hannam&no=75169&page=1&serVal=센빠이&s_type=subject&ser_pos= 신입사원 연봉 7천..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누가 댓글로 신문 기사를 링크했던데, 기사 내용 그대로다(단, 직급/근속연수/고과가 같아도 직군이 다르면 연봉이 다르다는 이야기는 틀렸다). 근속년수가 같으면 연봉계약서에 사인하는 금액은 비슷하지만(이전 해 인사고과에 따라 근소하게 다를 수도 있다), 사업부별로 성과급이 다르다. 성과급은 영업직처럼 개인 성과급으로 나가는 게 아니라 사업부 성과급이기 때문에, 매년 비슷하다. 즉, 운이 좋게 돈 잘버는 사업부에 배치되면 매년 max 찍는다. 나의 경우 회사 생활 2년차 때, 앞자리가 저 금액보다 높았다. 세전 기준이고, 야근/특근/출장 수당, 또는 경조사비, 복지비 등의 추가 수당은 제외한 금액이다.
+ 당부하고 싶은 말 마지막으로 후배님들께 당부하고 싶은 말이다. 이런 당부따위는 필요없을 정도로 훌륭하게 살고있는 후배님들도 많겠지만, 혹여나 도움이 되는 사람이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쓴다. 가장 먼저 본인의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하길 바란다. 내가 정말 내 전공을 공부하고 싶은가. 나는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건 무엇인가. 단지 해당 전공이 취업이 잘되서, 또는 돈을 많이 번다고 해서 선택했다면,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보길 권한다. 차라리 자퇴를 하고 수능을 다시봐서 의대에 들어가는 게 낫다. 첨언하자면 문과생들은 문송하다며 너무 좌절하지 마라. 어차피 산업과 트랜드는 돌고 돈다. 내가 복학하던 십여년 전에는 이공계 기피현상이 전염병처럼 번졌고, 약 5년 전에는 인문학을 키워야 한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지금이야 전화기가 취업 깡패라지만 훗날엔 일용직 코더 양성소가 될지 모를 일이다. 다음으로 지레짐작 '난 안될꺼야'라며 겁부터 먹지말고, 일단 도전하길 바란다. 젊을 때의 실패는 경험이다. 하다보면 길이 보인다. 나는 한남대 학부 시절 공모전에서 무려 16번이나 연거푸 고배를 마셨다. 학과에서는 모두들 손가락질하며 어차피 떨어질건데 왜 또 나가냐고, 차라리 그 시간이면 술이나 한 잔 더 마시겠다며 비아냥댔다. 대학(원)부 대회는 전부 팀전인데, 그래서 타학교 팀들은 전부 팀을 꾸려서 나오는데, 본선에 가면 나만 혼자였다 항상. 하지만 낙선할 때마다 보완을 함은 물론 계속 도전하다보니 전국대회에서 경쟁했거나 수상을 했던 타대 친구들이 다음에는 같은 팀으로 출전하자고 제의를 하더라. 게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이전 대회에서 수상했던 사람들은 하나 둘 졸업을 하니 경쟁자도 줄어들었다. 그렇게 17번째 대회부터는 계속 상을 타게 되었다. 예전에 취업 특강을 갔을 때, 4학년 학생들에게 질문을 한 적이 있다. 8월 말부터 11월 말까지 대/중견기업 공채 시즌인데, 한 군데라도 지원해본 사람 있냐고.. 딱 한 명 있더라. SK 한 군데.. 나머지는 애당초 공채가 뭐냐는 표정이었다. 더욱 놀라운 건 왜 지원을 안하냐는 나의 질문에 대한 답변.
'어차피 떨어질텐데 뭐하러 지원해요.'
... 원서라도 써봤냐? 써봤어? 내가 대학원을 타대(이하 A대)로 갔는데, 딱히 명문은 아니었고 일류대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냥 전통적으로 공대(만) 명문이라고 알려진 학교였다. 여기서 조교질을 하면서 발견한 한남대 학생들과의 차이점은 단 한가지였다. 의지. 한남대 학부 시절 교수님 중 가끔 보너스 점수를 걸고 숙제(정규 숙제가 아닌)를 내는 분이 계셨다. 공식을 프로그램으로 구현해 오는 숙제였는데, 일주일 뒤에 딱 한 명이 C언어로 작성해온다. 나... 또 일주일이 지나면 또 한 명이 매틀랩으로 해온다. 또 일주일이 지나면 또 한 명이 그나마 엑셀로 해온다. 나머지는 안한다. 애당초 어차피 상대평가니까 '다 같이 하지 말자 주의'다. 반면에 A대에서 내가 숙제를 내면 이 놈들은 인터넷을 뒤지든 책을 뒤지든, 100%는 다 못해서 30%만 해오든 뭘하든 어찌되었든 해오더라. 수업시간에 잘 놈은 똑같이 자고, 땡땡이 치는 놈은 한남대와 똑같은데 적어도 할 건 한다. 이건 의지의 차이다. 다음으로 막연히 교수님이나 선배의 후원은 바라지 마라. 어차피 세상은 네 손으로 살아가는거다. 내가 한남대에 다닐 적에 이런 말을 하는 친구들이 참 많았다. 교수님이 추천해주시겠지. 그 회사에는 우리 선배가 있어서 들어갈 수 있을꺼야. 난 인맥이 좋아서.. ... 선배가 대통령 할아버지여도 너의 인생 책임져줄 수 없다. 만약 주변에 내가 너 밀어줄께 라고 말하는 선배가 있다면 당장에 의절해라. 아마 알고보면 본인 살기도 막막한 사람일꺼다. 마지막으로 네가 취업이 안되는 걸 학교나 사회 탓으로 돌리지 마라. 할놈은 다 한다. 학점 4.0에 토익 900인데 취업이 안되서 헬조선이라고? 기업 입장에서 네 토익 점수가 900이든 910이든 하등 중요하지 않다. 단지 토익 점수가 높은 사람은 전국에 깔릴만큼 깔렸거든. 학점은 높으면 높을수록 좋지만, 일정 수준 이상이면 사실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학점을 중요시 하는 건 성실성의 척도로 보기 위함이지, 애당초 신입사원에게 큰 걸 바라지 않는다. 즉, 낮으면 불성실하다는 오해를 살 순 있으나, 3.9인 지원자와 4.0인 지원자를 놓고 평가할 때 반드시 후자를 뽑는 건 아니다. 어차피 인터뷰는 10분 내외로 끝나기 마련이고, 그 안에 면접관으로 하여금 얼마나 너라는 사람을 궁금하게 만드느냐가 관건이다. 그런 의미에서 남들이 쉽사리 선택하지 않는 너만의 장점을 만들어라. 요즘 취업이 참 어렵지. 내가 졸업하던 2009년도도 어려웠다. 그 유명한 리먼 사태가 일어났던 시기였고, 세계적으로 불황이었거든.. 2월 졸업식 때(나는 8월에 졸업) 우리 과에서 취업에 성공한 사람이 서너명 뿐일 정도로 어려운 시기였다. 물론 전부 중소기업. 참고로 IMF 이전에는 모르겠지만 IMF 이후로는 우리 과에서 대기업에 합격한 게 내가 처음인 것으로 안다(그 사이에 대학원 졸업생 중에서는 SK간 사람이 한 명 있다고는 하더라). 당시 졸업하던 내 선배/동기들은 '학벌만 보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말을 참 많이 했다. 내가 옆에서 봤을 때 어차피 안될꺼라면서 공부안하던 분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쯤에서 나의 이야기를 좀 할까 한다. 강스압이니 시간되는 사람만 봐라.
학과의 요청으로 매년 취업 특강을 갈 때마다 하는 이야기이지만, 대학 시절 나는 '낙제생'이었다. 군대 가기 전 4학기 동안 평균 평점이 1.4였으니까.. 애당초 특기자 전형으로 입학했기 때문에 공부에 관심이 없었다. 부모님께 자퇴하고 싶다고 했다가 쫓겨나기도 했었지. 입대 전의 나는 정말 구제불능 이었다. 군대에서 타학교 같은 전공의 동기를 보고 부끄러움을 느꼈다. 말년 때 어쩌다 전공 이야기를 하는데 외계어를 듣는 기분이었거든. 그래서 전역 하자마자 도서관에서 공부만 하기 시작했다. 3학년 1학기로 복학했을 때, 나 자신을 시험해보기로 했다. 반 년만 눈 딱 감고 공부만 해보자고.. 이번에도 성적이 개판이면 차라리 자퇴하고 기술을 배우자고.. 그렇게 한 학기를 마쳤을 때 3.91이 나왔다. 기적이었지. 공부.. 막상 해보니까 재미있더라. 그 때부터 정말 눈코뜰새 없이 산 것 같다. 계절학기마다 한 번도 쉬지않고 9학점 씩 꼬박 수강하다보니, 8학기를 마칠 시점에는 평점 평균이 3.29가 되었다. 1.4에서 3.29로.. 일단 기쁘긴 했는데, 그런 생각이 들더라. 나중에 내 자녀가 '아빠는 공부 잘했어?'라고 물을 때, 뭐라고 대답할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의 심리적 마지노는 3.5였으므로, 한 학기를 더 다니기로 했다. 그렇게 5학년 1학기를 마치고, 3.5가 되었다. 당시에 이미 S에 취업이 된 상황이었으므로 이대로 졸업할 수도 있었다. 헌데 낙제생일 땐 몰랐는데, 대학을 제대로 다니니까 너무 재미있더라. 그렇게 제대로 대학을 다닌 기간이 2년 뿐이고, 이대로 직장인이 된다는 게 서글펐다. 그래서 입사를 포기하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사실 한남대 대학원으로 갈 수도 있었고, 몇몇 교수님께 러브콜도 받았지만, 왠지 재미가 없을 것 같았다. 물론 몸과 마음은 편하겠지만 마치 추가학기로 9학기(5학년 1학기)를 다닌 것처럼 그렇게 2년을 더 다니는 느낌일 것 같았다. 카포에 부교수로 있는 사촌형이 오라고 했다. 물론 입학 자격에 비해 영어 점수가 부족해서 지원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거야 1년 정도 죽어라 공부하면 못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괜히 누구 덕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도 않고, 막상 가서 수업/연구를 못 따라가면 피해만 줄 것 같아서 다른 학교를 택했다. 사실 영어 공부가 싫기도 했다. A대 대학원에서 보낸 2년 간의 석사 기간 동안에는 더욱 눈코뜰 새 없이 바빴던 것 같다. 우리 연구실은 프로젝트는 안했다. 그래서 조교 장학금과 연구 장학금, 외주 프로젝트를 통해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었다. 사실 집이 잘살아서 등록금이나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할 필요가 전혀 없었지만, 나는 당시에 유행처럼 번지던 반값등록금 시위에 동의하지 않았기에 직접 벌어서 살아보기로 했다. 대학원생임에도 불구하고 외주 프로젝트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당시 한 달 평균 수입이 320이었다. 여자친구와 만나는 주말을 제외하고는 눈을 뜬 시간 내내 오로지 공부, 프로젝트(회의 포함) 또는 조교 업무만 봤다. 일단 누워서 잔 날이 거의 없었다. 석사 3학기 때는 사업에까지 손을 대면서 거의 정신이 육체를 초월했던 것 같다. 석사 마지막 학기(4학기) 때, 졸업 시험 날짜가 국제대회의 한국 국가대표 선발전 날짜와 하루 차이로 잡히면서 위기가 오기도 했지만, 뭐 이건 운 좋게 잘 넘어갔다. 2년 간 A대 대학원 연구실에 소속되어 석사 과정을 밟으면서 은근한 차별도 있긴 있었다. 대부분은 내 출신에 대해 신경도 안쓰는데 꼭 하위권에 머무르는 몇몇이 학벌 부심을 부렸다. 지방대 출신에게 뒤쳐진다는 걸 인정하기 싫은거다. 사실 내게 있어 한남대는 모교이면서도 꿈을 꿀 수 있게 한 고마운 곳이다. 학부 시절 특히 날 아껴주시던 교수님이 세 분이 계셨는데, 그 중 한 분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만난 수 많은 은사님 중에 가장 존경하는 분인데 한남대 재학 시절 당시 학과장 교수님이다. 내가 그 분의 수업을 들은 건 5학년 1학기 때였는데, 종강을 앞두고 교수님께서 인생 이야기를 해주신 적이 있었다. 본인이 왜 이 분야를 공부하게 되었고, 왜 교수가 되었는지, 오늘 날 어떤 마음 가짐으로 강의에 매진하고 있는지.. 짧은 이야기였지만 내겐 인생의 터닝 포인트로 강렬하게 남았다. A대 대학원으로 떠나던 날, 훗날 반드시 후배들에게 모범적인 선배가 되어 돌아오겠다는 다짐을 하고 대전을 떠났다. 대학원을 다니는 동안에도 앞서 언급한 교수님 세 분과는 종종 편지를 주고 받았다. 간혹 고민 상담을 요청드리기도 했다. 대학원 졸업 후, 한남대 교수님을 찾아 뵌 적이 있었다. 마침 교수님들이 모두 계셨는데, 학과장 교수님이 다같이 식사를 하자고 하셨다. 교수님들 사이에서 식사를 하는데, (타학교 대학원에 진학했다고) 날 탐탁치 않게 여기시던 다른 교수님 한 분이 이런 질문을 던지셨다.
교수님 : 'A대하고 우리 학교 중에 어디가 더 좋아?' 나 : '저는 한남대가 더 좋지요. A대는 '내 학교'라는 느낌이 들지 않아요.' 교수님 : '에이.. 나는 그 이유를 알지. 자네가 한남대 다닐 적에는 1등이었는데, A대에 가서는 꼴찌였으니까 그렇지'
웃어 넘겼지만, 솔직히 좀 어이가 없었다. 반론을 하자면 나는 A대에서도 최상위 그룹이었다. 일반적으로 내 전공에서 석사 졸업 시까지 2편 정도의 논문을 발표하고, 보통 1저자로 4편 정도 발표하면 졸업할 때, 대학원장상을 받는다. 학부로 따지면 수석으로 졸업하는 셈이다. 나는 석사 당시 A대 소속으로 국내에 총 4편, 독자적으로 해외에 총 1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A대 소속으로 발표한 4편 중에 1편이 3저자라서 그렇지 만약 모두 1저자였다면 대학원장상도 노려볼만 했다. 뭐 어쨌든 연구 성과도 우수한 편에 속했다. 그리고 A대 대표로 국제대회의 한국 국가대표 선발전에 출전해 3위를 기록했다. 안타까운 점은 거의 매년 A대에서 배출되던 국가대표의 명맥을 끊은 게 나라는 사실.. 내가 출전했던 그 해부터 지금까지 더이상 A대에서 국가대표가 나오지 못했다. 이야기가 옆으로 샜는데, 어쨌든 그 날 그 교수님의 비아냥(?)은 씁쓸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갖는 선입견이 이렇구나 싶었다. 공학 석사를 마치고 입사를 했다. 억세게 운이 좋았는지 석사 과정 말미에 독자적으로 쓴 논문이 미국컴퓨터학회(ACM)의 국제 컨퍼런스에 등재되어 발표를 하기 위해 북경 칭화대에 다녀온 적이 있다. 그 해 등재된 논문 중 한국 논문은 우리 것과 대전의 K대에서 낸 논문, 이렇게 단 두 편이었다는 점이 은근히 자랑스러웠다. 투고할 땐 학생 신분이었는데, 발표할 땐 신입사원이 되어 있었다. 내 연구를 발표하고 다른 발표자의 연구를 지켜봤는데, 한 일본인 대학원생의 연구가 흥미로웠다. 발표가 끝나고 그 친구에게 가서 당신의 연구가 흥미로웠다. 자료가 있으면 복사 좀 해달라며 이런 저런 대화를 했는데, 그 대학원생의 나이가 23살이었다. 좀 충격적이었다. 당시 나는 28살이었고, 나 스스로 국내에서 내 나이 또래 중 상위 0.5%안에 들어간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그동안 우물안 개구리였구나 싶었다. 부끄러웠다. 처음부터 모든 것은 자만이었다. 호텔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당시 신촌의 Y대 대학원에 다니던 논문의 공저자 친구에게 말했다. 내가 여기서 멈추고 자만심에 빠져서 더 이상 공부를 안하면 내 뒤에 후배들이 뭘 보고 배우겠냐고. 죄 짓는 기분이라고. 더 공부를 해야겠다 다짐에 다짐을 했다. 막상 그렇게 한국에 돌아오니 그냥 가방들고 회사만 왔다갔다하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장기적으로는 내 전공으로 공학 박사 과정을 가기로 했다. 회사를 때려치우고 바로 대학원에 갈까도 싶었지만, 박사 과정은 공부를 정말 잘하는 사람도 6~7년 걸리는데, 더더군다나 공부를 잘하는 타입이 아닌 나는 중간에 포기하면 어쩌나 싶었다. 만약 중간에 포기하더라도 어디든 다시 취업을 하려면 적어도 4~5년 정도의 경력은 있어야겠다 싶어서 일단은 그냥 다니기로 했다. 그렇게 4~5년 정도 후에 진학하는 것으로 계획하고나니 남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이번엔 아주 다른 전공을 공부해보자 싶어서 회사를 다니면서 회사 근처의 B대 경영대학원 석사 과정에 다니기 시작했고, 논문을 기한 내에 쓰지 못해서 졸업 연기까지 한 끝에 2년 6개월만에 겨우 경영학 석사(MBA)를 받을 수 있었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학업을 병행하는 건 정말 힘들긴 했다. 그런데 그것도 익숙해지니 할만하더라. 무서운 사실이지만 사람이란 동물은 생각보다 적응을 잘한다. 뭐 그렇다고 회사 생활을 적당히 한 건 아니었다. 자랑을 좀 하면 그 사이 회사에서 표창도 받았고, 발탁으로 조기 진급도 했다. 십여년 전, 갓 전역을 해서 학교에 돌아왔던, 학점 1.4 구제불능 낙제생의 인생 시험은 생각보다 결과가 괜찮은 것 같다. 그 후로 S대가 얼마나 대단한지 한 번 확인해보겠답시고, 박사 과정은 S대 대학원을 준비했다. 영어 과외도 받고 방송통신대의 영어영문과에 편입해서 다니기도 하고.. 아. 근데 S대의 벽은 높더라. 이건 실패 인정. 꿩 대신 닭이라고 지금은 C대 대학원에서 공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언젠가는 나도 학과장 교수님이 그러했던 것처럼 누군가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되길 바라면서 말이다.
이야기는 장황하게 했지만 하고 싶은 일을 쫓다보니 어찌어찌 여기까지 온거 같다. 지난 일을 생각해보면 나는 그냥 한줄기의 콩나물이었던 것 같다. 콩나물에 물을 주면 아래로 다 쏟아내듯이, 공부할 땐 한 귀로 들어서 한 귀로 흘려보내는 듯 했는데, 어느 순간 뚜껑을 열어보니 성장해 있더라. 그런데 한 가지 확실한 건, 한 가지 목표를 이룰 때마다 꿈은 무한히 커지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대학생 때는 단지 식충이만 되지 말자 싶었는데, 졸업하고 직장에서 밥벌이를 하게되니, 내일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지 하는 것 말이다. 신입 사원 연수 때 돌아가면서 향후 1~2년 간의 인생 계획을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당시 우리 팀 23명 중에 나를 포함한 석사 3명을 제외한 20명의 학사들 중에 무려 19명이 '2년 안에 반드시 대학원에 진학하겠다.'라는 계획을 말했다. 하지만 그 19명 중에 대학원을 가서 꾸준히 공부하는 사람은 (아직까지) 없다. 초심이란 생각보다 유지하기 어렵고, 시간은 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아서 하루하루 미루다보면 어느 새 훌쩍 지나가기 때문이다. 물론 직장과 병행한다는 게 쉬운 선택도 아니긴 하고.. 당시에 나는 내 이름으로 저서를 출판하겠다고 했는데, 4년이나 걸렸지만 지난 해에 결국 이루긴 했다. 뭐..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건 항상 생각을 하고 자신을 채찍질하자는 거다. 그렇지 않으면 사는대로 생각하게 되거든.
난 여러분이 참 부럽다. 사실 나이가 서른이 되고 가정이 생기고나면 선택할 수 있는 폭이 좁아진다. 여러분은 그 어떤 도전을 했다가 실패를 해도 용서가 되는 시기다. 그런 엄청난 자산을 가지고서도 자책/자기 비하에 빠져있는 모습을 보면 참 안타깝다. 나 같은 낙제생도 밥 벌어 먹고 사는데, 의지만 있다면 여러분은 그 이상도 될 수 있다. 여러분은 빛나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다. 요즘 인생은 90까지라는데, 단지 중고교 6년 바짝 공부한 수능 점수만으로 인생 결정되기엔 앞으로 살아갈 60~70여년의 시간이 너무 아깝지 않나? 인생은 90까지라는데 1~2년 정도 죽었다 생각하고 공부에 매진해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댓글 영역
획득법
① NFT 발행
작성한 게시물을 NFT로 발행하면 일주일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최초 1회)
② NFT 구매
다른 이용자의 NFT를 구매하면 한 달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구매 시마다 갱신)
사용법
디시콘에서지갑연결시 바로 사용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