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 인디언
북미 인디언들은 사람과 자연,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나타날 수 있는 가장 흥미로운 공생 형태를 실현했던 것 같다.
수 족, 샤이엔 족, 아파치 족, 크로우 족, 코만치 족, 그 밖의 어느 부족을 막론하고 그들은 똑같은 원칙을 공유하고 있었다.
우선, 그들은 스스로를 자연의 일부로 여겼을 뿐 자연의 주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어떤 지역의 사냥감이 떨어지면, 사냥터에 다시 사냥감이 번성하도록 다른 곳으로 이주하곤 했다. 따라서 그들이 어디에 머물든 땅이 황폐해지는 일은 없었다.
인디언의 가치 체계에서 개인주의는 명예보다는 수치의 원천이었다. 자기를 위해 뭔가를 하는 것은 남우세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아무것에 대해서도 자기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인디언들은 자동차를 사면 그것을 가장 먼저 요구하는 인디언에게 빌려주는 것을 당연한 일로 알고 있다.
인디언 자녀들은 속박 없이 교육을 받았다. 사실 그들은 인생과 자연을 스스로 배워 나갔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식물을 접목시키는 방법을 알아내고 그것을 옥수수 잡종을 만들어 내는 데에 응용했으며, 파라고무나무를 이용하여 비가 새지 않는 천막을 만들 줄 알았다. 또 유럽 인들이 흉내낼 수 없을 만큼 무명을 곱게 짜서 옷을 지었으며, 아스피린(살리실 산)과 키넨, 심지어는 초콜릿의 유용성을 알고 있었다.
인디언 사회는 평등주의적인 사회였다. 물론 추장이 있었지만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그의 지도를 따를 때만 추장일 수 있었다.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신뢰의 문제였다. 우두머리를 뽑는 것은 상시적인 일이었다. 어떤 결정에 대해 90명이 따른다 해도, 그것에 찬성하지 않는 10명은 따르지 않을 수도 있었다. 각자 자기 생각에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행하면 되었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누구나 올바른 법률을 찾아내어 그것을 적용하는 셈이었다.
인디언 사회에서는 세습 권력도 영구 권력도 없었다. 어떤 결정을 내릴 때마다 파우와우(부족 회의)를 열어 각자의 견해를 개진하였다. 프랑스 대혁명보다 훨씬 전에 의회 제도가 있었다. 다수가 추장을 신임하지 않으면 그는 스스로 물러나야 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그들이 가장 빛나는 영화를 누리던 시절에도 직업적인 군대를 보유한 적이 없었다. 평시에는 사냥꾼, 경작자, 가장이었던 사람들이 필요할 때는 모두 전사가 되었다.
그들은 사람이든 짐승이든 목숨 가진 것은 다 소중히 여겼다. 그들은 적들의 목숨을 함부로 해치지 않았다. 적들이 자기들 목숨을 함부로 다루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남이 너에게 행하기를 원치 않는 일을 남에게 행하지 말라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사고 방식이다.
그들에게 있어 전쟁은 무엇보다도 자기의 용기를 보여 줄 수 있는 품위 있는 놀이였다. 상대의 몸이 다치는 건 결코 원치 않았다. 막대기의 둥근 끄트머리가 상대에게 닿는 것으로 전투의 목표는 달성되었다. 상대를 죽이는 것보다 그것이 더 명예로운 일이었다. 상대에게 공격을 가하는 것은 한 번으로 족했다. 피가 내비치면 전투는 즉각 중단되었다. 전투 중에 사망자가 생기는 일은 좀처럼 보기 어려웠다.
인디언끼리의 전쟁은 주로 적의 말을 빼앗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백인들이 벌이는 대규모 전쟁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백인들이 노인, 부녀자, 아이들을 가리지 않고 아무나 마구 죽이는 것을 보고 그들이 느낀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단지 무서운 정도가 아니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언어도단의 만행이었다. 그래도 북미 인디언들은 남미 인디언들에 비해 더 오랫동안 저항하였다.
남미 인디언 사회는 공격하기가 더 용이했다. 추장의 목을 자르기만 하면 부족 사회 전체가 무너졌다. 그것은 복잡한 계급 제도와 막강한 관료 제도를 가진 체제의 큰 약점이다. 그런 체제는 머리만 손에 넣으면 전체를 손에 넣을 수 있다. 북미 인디언 사회는 남미 쪽보다 더 분산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카우보이들은 수백 명씩 무리를 지어 이동하는 인디언들을 상대해야 했다. 움직이지 않는 머리 하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머리가 수백이었다. 1백 50명이 모인 한 부족을 굴복시키거나 학살하고 나면, 다시 1백 50명으로 이루어진 또 다른 부족을 공격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학살의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1492년에 1천만이었던 아메리카 인디언의 인구는 1890년에는 15만이었다. 그들 역시 백인들에게 묻어 온 질병 때문에 죽어가고 있었다.
1876년 6월 24, 25일에 치러진 리틀 빅 혼 전투에서 백인들은 최대 규모의 인디언들이 결집해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인디언들은 적게는 10명(그 중 전사는 3명)에서 많게는 1만 2천 명(그 중 전사는 4천명)까지 무리를 짓고 있었다. 인디언들은 커스터 장군이 이끄는 백인 군대를 완전히 궤멸시켰다. 그러나 좁은 지역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있다가는 굶어 죽기가 십상이었다. 그래서 인디언들은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은 백인들이 그런 수모를 겪었으니 다시는 자기들을 얕보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 뒤로 인디언 부족은 하나씩 하나씩 사라져 갔다. 인디언들을 적대시하던 미국 정부는 1900년 이후에는 그들이 흑인이나 멕시코 계, 아일랜드 계, 이탈리아 계 미국인들처럼 인종의 도가니에 통합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인디언들은 백인의 사회 ? 정치 체제에서 배울 수 있는 것들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들을 자기네들 것보다 훨씬 못한 것으로 여겼다.
1990년, 그들의 인구는 1백 50만이었다.
--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 베르나르 베르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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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저 시대에 저런 식의 사회구조가 너무 앞서나간 측면도 없지않아 있네요.
뭐 아리우스님이 말씀하셨던, 폴란드도 투표를 통해서 왕을 선출했고.........
사실 폴란드가 조금만 더 시간을 기다린 다음에 프랑스 혁명이 될 시점에 그걸했더라면 모르겠지만
문제는 폴란드 역시 너무 일렀고, 결국 폴란드는 지금 유럽에서 가장 우익 국가가 되었습니다.
뭐 인디언들도 인디언들 나름대로 질서라던지 이런 것이 있었으면 좋았다곤 생각하네요.
그나저나 천국이긴 천국이네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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