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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간지 연산군(2)

지랄 2006.12.09 19: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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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사화가 있은 것은 연산군이 등극한지 사년째 되는 해였으니, 연산군의 나이는 그때 스물세살이었다. 나이가 스물세살이면 색(色)에는 완전히 눈을 뜬 판이요, 게다가  무슨 일이나 맘대로 하게 되었으니 그의 음탕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벌어지게 되었다.  이때 연산군은 왕비 신씨와 궁인 곽씨(郭氏) 이외에 따로  윤훤(尹萱)의 딸을 맞아 숙의(淑儀)를 삼았다. 연산군이 여자를 좋아한다는 소문은  차츰 세상에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이 눈치를 알아차린 김효손(金孝孫)이란 사람은 자기 처매(妻妹)인 장록수(張綠水)란 여자를 연산군에게 천거했다. 당시 장록수는 예종의 둘째 아들인 제안대군(齊安大君)의 여자 종(婢)으로 있었다.  그녀는 성질이 영리하고 노래 잘 부르고 춤 잘 추기로 이름이 높았으며, 그 목소리는 매우 맑고도 깨끗하여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연히 기쁜 마음을 갖게 했다. 나이는 그때 삼십이며 연산군 보다도 몇  살 위이지만 이팔의 소녀와도 같이 앳되게 보이고 아름다왔다. 연산군은 장록수를 한 번 만나보고 매우 마음에 흡족하였다.  곧 장록수를 맞아들여 숙원(淑媛)을 봉하였다. 연산군의 장록수에 대한 사랑은 날이 갈수록 깊어만 갔다. 이후부터 임금이 조회에도 나아가지 않고 더욱이 경연은 물론 다른 대궐에 거동도 않고, 그저 장록수 옆에  있는 것이 가장 기쁘고 유쾌한  시간이었다.  이제 장록수의 옆을 떠나서는 살 수 없을이만큼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임금이 장록수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장록수는 차츰 교만해져서 마침내는 임금을 조종하게 되었다.  임금은 마치 장록수 앞에서는 죽은 사자와도 같이 온순할 뿐이었다.  임금은 아무리 노여웠다가도 장록수만 보면  웃음이 저절로 피오 올랐다.  따라서 장록수의 일거수 이투족(一擧手一投足)은 온 백성에게 영향 주는바가 컸다.  그때 벼슬자리를 얻으려든가 감투를  쓰려든가 무슨 청할 일이 있으면 임금이나 조정 비변사(備邊司) 등에 청하기보다 장록수에게 청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고, 제일 빠른 길이었다. 이 때문에 장록수의 집 앞에는 인마(人馬)가 끊일 새 없었고  값비싼 물건이 사방에서 날아들었다.  장록수의 말 한 마디면 죽을 사람도 살릴 수 있었고, 살 사람도 죽일 수 있어서,  그는 실로 한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장록수의 부귀와 영화가 어찌나 극진했던지 그때의  사람들은 아들 낳기를 원하지 않고 오히려 딸 낳기를 원하여 다음과 같은 노래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즉 張使天下父母心 ㅡ 장록수는 천하의 부모들 마음에 不重生男重生女 ㅡ 아들보다 딸을 더 중하게 여기도록 만들었다. 연산군은 장록수를 기쁘게 해줄 양으로 각 관청의 비자(婢子)나 여염집 딸이라도 여덟살부터 열두살까지 얼굴 예쁘게 생긴 소녀들을  대궐로 들여다가 노래와 춤을 가르쳐 연회에  참가케 하였다.  이밖에도 당시의 유명한 기생인 해금기(奚琴妓), 광한선(廣寒仙) 등 네 사람을 택하여 대궐로 불러들이고, 또는 가야금, 아쟁牙箏) 잘타는 기생들도 각각 한  사람씩 불러들였다. 이때부터 궁중에 곡연(曲宴)이 없는 날이 하루도 없었고, 연산군은 하루도 취하지 않는 날이 없었으며, 연산군의  곁에는 늘 장록수가 앉아  있었다.   그때만 해도 창덕궁의 담이 낮아서 담  밖에서 대궐 안을 엿볼 수가  있었다. 대궐 안에서 매일 연회가 벌어지고 노래소리에 춤을  추며 야단법석을 떨면 그것을 구경하느라고 담밖에는  수백명의 군중이 모여들어  나중에는 잘한다 못한다하는 소리까지 군중들  입에서 튀어나올 때가 있었다.  실로 대궐 안의 체모에 손상되는 일이 많았다. 연산군은 당장에 도승지 이극균(李克均)을 불러 아래와 같은  어명을 내렸다. "대궐 담장을 새로이 두 길 높이로 쌓아올리고 담장밖에  있는 민가(民家)들은 모두 무너 버려라. 그리고 대궐 안이 내려다 보일만치 높은  곳에 있는 복세암(福世庵), 인왕사(仁旺寺), 금강굴(金剛窟) 등도 모조리  철폐시키고 또한 백악(白岳)이나 인왕산(仁旺山)이나 사직산(社稷山) 같은  데는 잡인(雜人)의 입산을 일체 엄금하라!" 어느 해 봄날이었다.   연산군은 대궐 안에서 장록수와의 연락에도 염증이 생겼든지  하루는 내시(宦官) 몇을 거느리고 정업원(淨業院)으로  미행(微行)을 나온 일이  있었다. 전부터 이 정업원은 늙은 후궁들이 살 곳이 없으면 이곳에  와서 여생을 편하게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후궁이 나가 살게 되면 젊은  궁녀들도 몰래 빠져 나와 함께 지내는 일이 많아서 이러한 여승들  중에는 뜻밖에도 미인이 섞여 있었다.  연산군은 이런 자를 엽색(獵色)하려는 것이다. 연산군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이 정업원에 나타났다.  법당 안에서는 여러 비구니들이 불경을 읽다가 불시에 나타난 임금을 보자 일제히 일어나 합장하고 "상감마마 만수무강하사이다." 그러면 임금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여러 비구니들은 어서 독경을 계속하라." 하고 옆에 서서 조용히 독경하고 있는 비구니들을 번갈아  바라본다. 머리에 곱게 접은 고깔을 쓰고 흰 손에는 염주를 들고 눈을 감은  채 소곤소곤 독경하는 비구니들!  그 중에는 정말 아리따운, 매력 있는 젊은  비구니들도 많이 있었다. "...음..." 연산군은 뜻모를 미소를 지었다. 연산군은 여러 비구니들 중에서  젊고 아리따운 비구니들만 몇을 헤아려 보고 "자, 이제 모두들 물렀거라,  그리고 과인이 지적하는 다섯 명만 남아  있으라." 연산군은 손을 들어 젊은 비구니 다섯명을 일일이 가리켰다. 속세를 떠난 비구니라 할지라도  어명을 거역할 길은 없었다.  물러가라는 명령을 받은 늙은 비구니들은 제각기 염불을 외우며 합장 배례를  하고 선원(禪院)으로 사라져 갔다. 이날 연산군의 황음(荒淫)은 차마 눈을 뜨고서는 볼 수가 없도록 어지러웠다. 일찌기 한사람 한사람의 여성을 상대로 음탕한 행동을  한일은 많았으나, 일시에 여러 계집을 상대로 그토록 어지러운 행동을 취해 보기는 연산군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이어 대궐로 돌아와 광한선과 또 놀아나니, 이때부터 연산군의  황음이 본격적으로 심해지게 되었다. 한 번은 연산군의 계모인 왕대비 윤씨가 임금을 위로하기  위해 창경궁(昌慶宮) 안뜰에서 큰 잔치를 베푼 일이 있었다. 이 자리에는 정승(政丞), 사헌부(司憲府), 승정원(承政院)의 고관들도 배석하고 있었다. 이날  왕대비는 연회를 흥겹게 하기 위해 여기(女妓) 광한선, 내한매(耐寒梅)  등을 불러 임금을 모시게 하였는데 연산군은 술이 취하자 왕대비를 비롯하여 여러 중신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한매, 광한선의 두 기녀를 한품에 껴안고 "자, 모두들 이 어여쁜 기생의 이름을 시제(詩題)로 삼아서 시를  지어 보아라." 하고 분부를 내렸다. 기생의 이름을 시제로 해서 중신들더러 시를 지으라니 그처럼 중신들을 모욕하는 일은 없었다. 중신들은  모두 이맛살을 찌푸렸으나 그렇다고  감히 불평을 말하는 자도 없었다. 그러던 중 대사헌 이자건(李自健)이가 "기생의 이름으로써 시를 짓게 하는 것은 중신들의 체면을 손상케 하는 분부로 아룁니다." 하고 용감히 반대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에게 이런 반대가 통할 리 없었다. 연산군은 끝내 고집을 부려 중신들로 하여금 기생의 이름으로써 시를 짓게 하였다. 할머니에게 박치기, 갑자사화(甲子士禍) 연산군은 자기 어머니 윤씨가 폐위를 당하였다가 약사발을  마시고 죽었다는 일은 대강 눈치로 알았으나, 다만 그 일은 부왕이 윤씨를  미워하여 그렇게 한 일이라고만 알았지, 그 자세한 내막까지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연산군 신하 가운데 가장 신임받는 사람은 연산군의 처남되는 신수근(愼守勤), 그 다음이 임사홍(任士洪)이라는 사람이었다. 임사홍은 일찍이 성종 때에 당상관(堂上官)의 벼슬까지 지낸  자로서 그의 맏아들 임광재(任光載)는 예종의  부마(駙馬=사위)였고 둘째 아들  임숭재(任崇載)는 성종의 부마였다.   더우기 그 둘째 아들 숭재는 남의 미첩(美妾)을 빼앗아다가 임금에게 드린 까닭에 연산군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하루는 옆에 모시는 사람도 없는 조용한 틈을 타서 임금과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폐비 윤씨에 관한 얘기를 끄집어내었다. "폐비 윤씨로 말씀 올리자면 본래 성질이 나빠서 성종대왕의  미움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엄숙의 정숙의가 투기심이 강하여 성종대왕께 자주 고자질을하여 결국 성종의 노여움이 극도에 이르러 그렇게 폐출당한 것이옵니다. 돌아가신 것도 약사발을 내려서 돌아가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연산군은 그만 정신이 아찔하였다. "뭐 엄숙의와 정숙의가...?" 지금은 후궁에서 안일한 여생을 보내고 있는, 선왕의 총애를  받아오던 엄숙의와 정숙의가 생모에게 그처럼 원수일 줄은 전연 몰랐던 일이기 때문이다. '생모의 원수를 바로 눈 앞에 두고도 여지껏 모르고 있었구나!' 연산군은 이제 의심해 볼 생각조차  없었다. 그는 그만 분통이 터져  올라 그 길로 대궐로 돌아와 엄씨와 정씨 두 숙의를 불러내다가 대궐 뜰에 세우고 "네년들이 과인의 생모를 독살시켰지?  이 죽일년들아!" 하고는 자기 주먹으로 당장에 두 사람을 때려 죽였다. 연산군은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 엄씨와 정씨의 시체를 여러  갈래로 찢어서 소금에 절여가지고 까막 까치나 뜯어 먹으라고 산에다 그냥 버려두게 하였다. 대궐 안에서 이렇게 큰 소동이 일어나는 바람에 궁녀들이나 하녀들은 그냥 벌벌 떨고만 있었다. 바로 이때였다. 인수대비가 시녀들의  부액을 받으면서 나타났다.  연세가 이미 칠십이 가까운지라 후궁에서 한가한 여생을 보내고  있었는데 연산군이 대궐에서 엄숙의와 정숙의를 때려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달려온 것이었다. 인수대비는 노여움이 북받쳐 임금을 향해 "아무리 그 두사람의 숙의가 잘못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선대왕(先大王)께서 사랑하던 사람인데 그렇게 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 하고 소리를 높여 호령을 하였다. 그러나 꾸짖는 말을 공손히 듣고만 있을 연산군이 아니었다.  연산군은 한참 인수대비를 노려보고 있다가 "이 늙은 할망구가 뭐 어쩌구 어째?" 하고 비호같이 덤벼들어 가슴팍을 머리로 받아서 쓰러뜨렸다.  (이 부분에 대해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연산군이 칼을 빼들고 가서 박치기를  했다고 전하고 있고 야사에서는 발길질로 걷어찼다고 전하고 있다.) 인수대비는 쓰러지면서 "으윽... 세상에 이런 법이 있나....  이런 법이 있나." 몇 마디 이렇게 주워대다가 그만 인사불성이 되고 말았다. 연산군이 이어 정숙의 몸에서는 난 안양군(安陽君)과 봉안군(鳳安君) 형제에게 큰칼을 씌워 옥에 가두어 버렸다. 때는 연산군 십년 갑자(甲子) 삼월 이십일이었다. 인수대비는 이때 쓰러진 것이 원인이 되어 얼마동안 신고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얼마나 원통했으면 눈을 못감은채 죽었다. 인수대비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누구든지 폐비 윤씨에 대한 일을 입밖에 내어서는 아니  된다 해서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더니 그만 임사홍이가 발설하여 이러한 참극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인수대비가 세상을 떠나자 이제는 아무런 제한도 없게 되었으므로 폐비 윤씨의 생모되는 신씨(申氏)가 자유로이  대궐 안에 출입하게 되었다.  폐비 윤씨가 죽을 때 피묻은 수건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얘기한 바있거니와, 신씨는  인수대비의 감독이 심해서 대궐에  들어갈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다가 이제  인수대비가 돌아간 기회를 타서  대궐로 들어가 그 피묻은 수건을 연산군에게 보이며 그때의 현상이며 윤씨의 전하는 이야기를 자세히 설명하였다. 엄씨 정씨의 죽음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춘추관(春秋 )에 명령하여 폐비사약 시말단자(廢妃賜藥 始末單子)를 작성하여 올리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생모 윤씨의 사사(賜死) 사건에 관계되는 모든 인물을 조사하여 바치라는 명령이었다. 그런데 [폐비사약 시말단자]에 의하여 최초로 희생을 당한 사람은 선왕 성종 때에 승지(承旨)로 있던 이세좌(李世佐)였다.  이세좌는 왕명에 의하여 폐비 윤씨에게 약사발을 들고 갔던 바로 그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승지로 있는 놈이 반대는 못할망정 사약을 가지고 갔으니 이는 도저히 용서 못할 일이다. 그놈을 거제도(巨濟島)로 귀양을 보내라!" 연산군은 이세좌에게 처음에는 그런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암만해도 그런 정도로는 직성이 풀리지 않았던지 이세좌가 거제도로 귀양을  떠나간지 사흘 후에 연산군은 그를 죽이라는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귀양 가던 길인 곤양군(昆陽郡) 양포역(良浦驛)에서 사사(賜死)의  명령을 받은 이세좌는 아무런 원망도 없이 그날 밤에 스스로 목을  매고 죽어버렸다. 폐비사약 시말단자에 기록된 인원은 한두 사람만이 아니었다. 윤비를 폐출하는데 적극적으로 찬동한 사람은 물론이려니와, 비록 찬동은 아니 했더라도 반대를 못한 사람들까지 모두 조사해 올리라는  명령이었으므로 시말단자에 기록된 명단이 수백명이나 되었다. 그리하여 폐비 사건에 관련이 있는 사람은 모조리  대역죄로 삼족(三族)을 멸하였는데 아무리 경한 형벌을 당한 사람이라도 팔촌(八寸)까지는 형벌을 면지 못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한 형벌을 받은 사람들은  윤필상(尹弼商), 한치형(韓致亨), 한명회(韓明澮), 정창손(鄭昌孫), 이세겸(李世謙), 심회(沈澮), 이파(李波), 김승경(金升卿), 이세좌(李世佐), 권주(權柱), 이극균(李克均), 성준(成俊) 등의 열두명으로서 연산군은 그들을 이륙간(二六奸)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그중에 살아 있던 윤필상, 이극균, 이세좌, 권주, 성준 등은  참형을 당하고 이미 죽은 사람들에게 대하여는 김종직의 예(例)에 따라 부관참시(剖棺斬屍)를 하였는데, 이번에는 한걸음 더 나아가  쇄골표풍(碎骨飄風)이라고하여 무덤을 파고 송장 허리를 잘라 그 뼈를 갈아서 가루를 만들어 바람에 날리기까지 했었다. 이 해가 바로 갑자년이고, 또 대역죄로 죽은 사람의  대부분이 선비들이었으므로 후세에 이 사건을 가리켜 갑자사화(甲子士禍)라 부르게 되었다. 흥청(興淸) 속의 나체춤과 주지육림(酒池肉林) 어느날 장록수의 집에 난데없는 글발 한 장이 날아 들었다. 그 내용인즉 임금이 장록수를 너무 지나치게 사랑함을 조롱한 글이었다. 연산군은 이것을, 전에 정소용이나 임숙의  밑에 있다가 지금은 귀양을 가  있는 궁녀 전향(田香)과 수근비(水斤非)가 한 짓이라하여 그 두 사람의 부모 형제와 친척들을 모두 붙잡아 들여 때리고 불로 지지고하여 여러  가지로 고문하였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도 자백하는 사람은 없었다.  임금은  의금부 낭청(郎廳)을 강계(江界)와 온성(穩城)  각각 보내어 전향과  수근비를 능지에 처해 버렸다. 생모 윤씨의 원한을 풀어준다하여 전국  각지에 걸쳐 여러 천명의  선비와 그의 가족을 죽인 연산군은 또다시 사람을 죽이기 시작했다.  전향과 수근비를 죽이고도 다시 전향의 친척인 최금산(崔今山), 그의 어머니, 아우 춘금(春今), 향비(香非) 등도 능지를하여 죽이고, 그 친척이며  수근비의 부모, 동생, 숙모(淑母) 등은 형장을 때려 국경 지방으로 쫓아 버렸다. 그해 칠월 십구일이었다. 이른 새벽에 신수영(愼守英)이라는 사람이 임금 앞에 나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오늘 아침 한 사나이가 소신을 찾아와서, 자기는  제용감정(濟用監正) 이규(李逵)의 심부름꾼이라고 하면서 난데없는 글  한 장을 주고 갔는데  그 글을 보온즉 거기에는 전하를 노골적으로 비방하는 무엄한 사연이 씌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신은 우선 그  사실을 알려 드리고자 배알한 것입니다." "그래 그 글에 나를 뭐라고 비방을 했는고?" "내용인즉 다름이 아니오라 전하가 몹시 난폭하시고 또 너무  호색을 하신다는 비방이 씌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투서의 글자는 한문이  아니라 모두 정음(한글)인데다가, 대궐에 여의(女醫)로 있는 개금(介今),  덕금(德今), 고온지(古溫知), 조방(曺方) 등이 한자리에 모여 앉아 전하를 그렇게 비방하더라는 사연입니다." 그 소리를 들은 연산군은 당장 이규를 불러다가 "그대는 신수영에게 이런 글을 보낸 일이 있느냐?" 하고 손에 들고 있던 투서를 이규 앞에 내던졌다. 이규는 자기  앞에 던져진 서장을 주어 보았다.  그러나 전부가 정음으로 씌어있는지라 정음을 모르는 그로서는 읽을 재주가 없었다.   그는 정음을 몰라 이 글을 읽을 줄도 모른다고 대답했다. "음, 그대는 정음을 모른다." 정음을 모른다면 그가 투서를 했다고는 볼 수 없었다. 연산군은 다시 그 투서 속에 씌어 있는 개금, 덕금, 고온지, 조방 등 여의들을 모조리 불러들여 투서에 대한  문초를 시작했다.  허지만 누구 하나 투서를 했다는 사람이 없었다. 연산군은 그만 노여움이 북받쳐 그 글 쓴 사람이 도망칠까봐 서울 성 주위에 있는 여덟 문을 굳게 닫아 교통을 끊어버리고 군사들로  하여금 성문을 지키게 하는 동시에 중신들을  불러 현상체포(懸賞逮捕)의 방침을  세우고 죄인을 붙잡는 사람에게는 베(布) 오백필을 상으로 준다는 것을 의금부 문에다가 크게 써붙였다. 그와 동시에 이후부터는 정음 가르치는 것과 배우는 것을  금지시키고, 이미 배운 자는 다시는 정음을 쓰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다. 한편 연산군은 정음을 아는 자를 한성(漢城) 오부(五部)로 하여금 조사하여  정원에 알리게 하는 동시에 그 필적으로 투서와 대조하였다.   즉 정음 아는 사람은 각각 한문과 정음 글씨를 쓰되 네벌씩 써서 그것들을 모아 큰 책을 만들어서 의정부,  사헌부, 승정원에 각각 배치하여  때때로 투서의 글씨와 대조케 한 것이었다. 그때 사람들은 정음을 아는 것을 한 개의 수치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한문을 진서(眞書)라 하고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언문이라 한 것도 그러한 뜻에서 나온 말인 것이다. 이렇듯 정음이 천대와 멸시를 받던 그때에 설상가상(雪上加霜)격으로 연산군의 학대를 당하고 보니 세종대왕께서 애써 만들어 놓은 우리의  글이 그만 오유(烏有)에 돌아갈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연산군은 정음을 배우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이미 정음으로  써놓은 책들도 모두 불에 태워버렸다. 다만 중국말을 해석하거나 그 발음에 대한 설명 같은 것만 남기고는 무슨 기록이건 소설이건 하나도 남기지  않고 불질러 버렸던 것이다. 서울 여덟 대문이 칠월 십구일에  닫혔다가 팔월 육일에야 열리게  되었지만,  그동안 죄인은 잡지 못하고  공연히 교통 차단으로 백성들만 괴롭힌 결과가 되었다. 이렇게 교통을 차단한다, 정음 배우는 것을 엄금한다, 정음 책을 불사른다 하고보니, 백성들만이 아니라 임금을 가까이 모시고 있는 내시들까지도 임금이 잘못한다고 비난을 하기에 이르렀다. 연산군은 이런 소리가 듣기 싫어서 내시들에게 목패(木牌)를  하나씩 채워주어 그 목패에 씌어진 대로 지키지 않으면 엄벌에 차한다고 선언을 했다.   그 목패에는 구시화지문(口是禍之門), 즉 입은 화난의 문이요, 설시참신도(舌是斬身刀)라, 즉 혓바닥은  몸을 베이는 칼이니,  폐구심장설(閉口深藏舌)이면, 즉 입을 닫치고 혓바닥을 깊이 감추면,  안심처처뇌(安心處處牢)라, 즉 안심하고 간 데마다 편할 것이라는 뜻이다. 연산군은 날마다 궁녀들에게 갖은  음란을 다부리면서도 장록수에게  대한 사랑만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따라서 장록수의 세도는 날이  갈수록 확대되어 이제는 팔도강산을 마음대로 뒤흔들게까지 되었다. 장록수는 대궐 안에서만 연락(宴樂)에 취하느니보다는 산과 들로 돌아다니면서 사냥도 하고 잔치도 열어보는  것이 더욱 흥미 있으리란  생각을하여 그 뜻을 임금께 말했다.   누구의 말이라고 그  말을 연산군이 거부하랴.   곧 서울을 중심삼아 사방 몇 십리의 주위를 사냥과 오락장으로  만들어 거기에는 금표(禁標)를 세워 공사(公事)이외에는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즉 동쪽으로는 한강(漢江),  삼전도(三田渡), 광나루(廣津),  묘적산(妙寂山), 퇴현(槌峴), 천마산(天摩山), 마산(馬山), 주엽산(注葉山)에  이르는 곳까지요, 북쪽으로는 돌참(石岾), 홍복산(洪福山), 게넘이참(蟹踰岾)까지요, 서쪽으로는 파주 보곡현(坡州寶谷峴)까지요, 남쪽으로는  용산(龍山), 한강, 노량진, 양화도(楊花渡)까지 이르는 광대한 범위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그 금표 안에는 사람의 통행을 금지할  뿐 아니라 그 안에 살던  사람들도 모두 다른 곳으로 철거 시키고 무인지경(無人之境)을 만들어 놓았다.   이렇게 한 후에 임금은 장록수와 그밖에 미인들이며 호위하는 군사들이며 사냥꾼들을 거느리고 산곡과 숲 사이로 돌아다니며 노루와 산돼지, 꿩, 토끼 등을 잡는 것을 큰 재미로 여기었다. 한편 장악원(掌樂院)의 기녀(妓女)들을 그전보다 갑절로 늘이되, 될 수 있는 대로 나이 이십미만으로 얼굴이  예쁜 처녀만 선택하여 그들에게  취악(吹樂)과 현악(絃樂)을 가르쳐 연회에 참여케 하는 동시에 처용무(處容舞)도 가르치게 했다. 그리고 악공(樂工)을 광희(廣熙), 기악(器樂)을 흥청(興淸) 혹은  운평(運平)이라고 하였는데 흥청악은 삼백, 운평악은 칠백으로 수효를  정하였다. 흥청은 사예(邪穢) 즉 더러운  것을 씻어버린다는 뜻이요, 운평은  운태평(運太平) 즉 국운이 태평한  때를 만났다는 뜻이었다. 그들이  처용무라는 춤을 출 때에는 여러 가지 난잡한  행동을 보여 심지어는 옷을 입지  않고 춤을 추는 일도 있었다. 그때 내시에 김처선(金處善)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김처선은 옷을 벗고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차마 못본 척할 수가 없어 임금에게 여러번 간언(諫言)을 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은 그런 말을 듣기는커녕 오히려  김처선을 미워하기에 이르렀다. 하루는 김처선이 대궐에 들어가기 전에 자기 집 가족들에게 "상감께서 처용문가 뭔가 하는 추잡한  춤을 추는데, 오늘은 내가  끝까지 강경하게 반대할 생각인즉 아마 살아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집을 떠났다.    그날도 역시 궁중에선 처용무가 벌어졌다. 김처선은 보다 못하여  임금 앞에 나아가 "이 늙은 것이 세조대왕 때부터 사대(四代) 임금을 모시고 대궐 안에서 살아왔지만 이처럼 추잡한 춤은 처음 보았습니다.  소신은 사기(史記)도  읽어 임금의 몸으로서 이토록 황음에 빠지신 임금은 고금에 없는  일인 듯하오니 상감께서는 깊이 생각하시고 몸을 삼가시기 바라옵니다." 하고 낭랑한 목소리로 기탄없이 떠들어 대었다. 이에 연산군의 분노는 극도에 달하고 말았다. 시녀에게 활을  내어라 하고는 잔뜩 활시위를 메워 김처선의 가슴을 향해 쏘았다. 화살은 김처선의 갈빗대에 가서 푹! 하고 박혔다.   그러나 김처선은 아픔을 참아가면서 다시 큰 소리로 "조정의 충신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거늘 이 늙은 고자놈이야  무어 죽는 것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다만  원통한 것은 우리 상감께서  저러다가 임금 노릇을 오래 못할 것이 걱정일 뿐입니다." 연산군은 그 소리에 더욱 화가 나서 또 한 번 활을 쏘아 갈겼다. 김처선은 마루바닥에 쓰러졌다. 연산군은 김처선의 다리 하나를 찍어 버리고 "일어서 물러가지 못하겠느냐?" 하고 호통을 쳤다.   김처선은 임금을 쳐다보면서 "상감께서는 부러진 다리로 걸어갈 수 있습니까?" 하고 대답했다. 이에 연산군은 그 혓바닥마저  잘라버렸다. 그러자 김처선은 자기  손으로 자기 배를 갈라서 창자를 끊고 숨이 질 때까지 입으로  무엇이라고 지껼였다. 연산군은 더욱 노하여 그 시체를 호랑이에게 주어 먹게  하였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분노가 풀리지 않아서 "김처선이라는 놈은 나쁜 놈이나가 김처선이라는 처자(處字)가 들어  있는 글을 읽거나 말을 하지 말라." 하고 명령까지 내렸다. 그리고 또 김처선의 양자인 김공신(金公信)을 죽이고 그의  재산과 가옥을 몰수하는 동시에, 그의 본관(本貫)이 전의(全義)라하여  전의읍(全義邑)을 폐해 버리고 그의 부모의 무덤을 파헤쳐 평지를 만든 뒤 그의 일가를 칠촌까지 중벌을 주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김처선의 이름인 처자(處字)가 들어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부르기 싫다하여 처서(處暑)라는 절계(節季)의 이름을, 저서( 暑), 또 처용무(處容舞)를 풍두무(豊頭舞)라고 까지 고치었다. 연산군은 장악원의 기녀들 수를 좀더  늘이어 규모를 크게 하려고  구영수(具永壽)라는 사람으로 장악원  제조(提調)를 임명하였다. 제조라는  것은 지금 말로 총감독이라는 뜻이다.   오늘날 [파고다] 공원에 있던 원각사(圓覺寺)의 중들을 모두  내쫓고 장악원을 그 곳에다 옮겨 가흥청(假興淸) 이백, 운평 천, 광희(廣熙)  천을 두고 총률(總律) 즉 음악 지휘자 사십명을 두어 그들을 가르치게 했다. 연산군 십일년 오월 오일에 대궐 안에서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여기 모인 사람들은 왕후들의 친족을 비롯하여 남자 손님이 천여명에 여자 손님이 이백팔십명이나 되었다하니 얼마나 큰 잔치인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연산군은 여자들 손님 윗저고리 가슴에 누구의 아내 아무개라고 명패를 써서 붙이게 했다.  그 까닭은  그중에 나이 젊고 얼굴이 예쁘게 생긴 사람을 기억해 두었다가 훗일에 다시 불러보려는 심산에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 후에도 중신들이 연회에 참석할 때에는 반드시 동부인 출석하도록 분부를 내렸다. 연회에 참석하였던 여자 가운데 남보다 뛰어나게  아름다운 여자가 있으면 푸른 옷을 입은 하인을 시켜 "대궐에 들어오는데 화장을 잘못하여 예의에 어그러졌다." 하며 책망하는 듯 비밀실로 끌고 오게 한다. 그러면 그 비밀실에는 연산군이 지키고 있다가 맞아들여 욕을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니 정경부인(貞敬夫人)이나 정부인(貞夫人)이나 숙부인(淑夫人)이나 하는 양반의 부인일지라도 결국 임금에겐 반항하는 도리다 없어 욕을 보게 마련인데 일단 욕을 당한 부인들은 그것이 창피하여 말을  내지도 못했다. 그중에는 그 것을 영광으로 알고 대궐 안에서 며칠씩 머물러  있는 사람도 있기는 했지만...  그리고 그 곳을 한 번 거쳐나온 여자의 남편은 그 이튿날 벼슬자리가 한급 혹은 두급씩 뛰어오르는 게 항례였다.  이리하여 승진을 갈망하는 사람이나 감투를 바라는  사람은 은영중 자기 아내가  임금의 사랑을 받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행동은 물론 연산군 자신의 호색 취미도 있기는 했지만 실상은 그보다도 장록수의 지휘에 의한 것이었다. 장록수가 자신이 종의 딸로 사회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던 몸이라  그 아니꼬운 양반의 부인네들을 좀  욕보여 복수를 해보자는 심삼이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양반의 부인네들이 얼마나 정조를 지키며 얼마나 점잖을 빼나 두고 보자는 태도로 연산군을 시켜 그 정조를 유린케 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장록수가 장난 삼아 시험해  보았던 것이 이제는 그만  버릇처럼 되어 장록수도 금할 수가 없게  되었다. 연회 때에만 부르는 것이  아니고 일단 미인이라고 지정된 여인은 아무 때나 임금이 마음 내키는  대로 불러들였다. 연산군은 유부녀 농락에 새로운  맛을 붙인 것이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연산군은 유생(儒生) 황윤묵(黃允默)의  소실 최보비(崔寶非)라는 여인을 사랑하였는데 최보비는  말이 적고 웃음을  잘 웃지 않았다.  최보비가 웃지 않는 것은 본 남편 황윤묵을 생각하기  때문이라하여 연산군은 아무 죄없는 황윤묵을 죽여버렸다. 그리고 또 영남(嶺南)서 데려온 어떤 유부녀가 음식상에  돼지머리를 통으로 삶아 놓은 것을 보고 혼자 웃음을 지우자 연산군은 즉석에서 그 연유를 물었다. "너는 왜 실실 쪼개고 있느뇨?" "다름이 아니오라 소첩의 전  남편이 돼지처럼 생겼는데 지금  돼지머리를 보온즉 남편 생각이 떠올라서 웃었습니다." 연산군은 그 말을 듣기가 무섭게 승지를 불러다가 그 여인의 남편 목을 잘라오게 하였다.   그리하여 며칠 후에 그 사나이의 목을 소반에 놓아 그 여인에게 보여 주면서 "자, 네가 그리워하던 돼지 서방을 실컷 보아라." 하였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경회루(慶會樓) 옆  연못가에 만수산(萬壽山)이라는 커다란 산을 쌓아올린 뒤에 봉래궁(蓮來宮),  일궁(日宮), 월궁(月宮), 훼주궁(蘂珠宮) 등을 짓게 하였다.  그리고 오색이 영롱 한 비단으로 꽃을 만들어 장식하고, 연못 속에는 은금 보화로 산호림(珊瑚林)을 만들어 세우고 물 위에는 용주(龍舟)를 띄워 놓았다. 이 모양으로 산은 산대로 백화가 만발한 듯 오색이 영롱하고  연못은 연못대로 호화찬란한데다가 다락 위에는 붉은 비단 장막을 쳐놓으니 바람이 불 때마다 꽃과 장막이 물결처럼 흔들리는 폼이 하늘의 무지개조차 무색할 지경이었다. 연산군 십일년 유월에는 이계동과 임숭재를 채홍준사(採紅俊使)라하여 전라도와 충청도로 각각 보내어 좋은 말(馬)과 미녀를 구해오게 했다. 팔월에 이르러 미녀 육십삼명, 양마(良馬) 백오십필을 구해오자 임금은 크게 기뻐하여 두 사람에게 노비 열 사람씩을 주고 지위도 높여주었다. 구월에는 이손(李蓀), 홍숙(洪淑), 조계상(曺繼商), 성몽정(成夢井)  등을 평안도로 보내어 다시 한 번 채진(採進)케 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채청사(採靑使), 채응견사(採應犬使)를 팔도로  보냈는데, 채청사란 아직 출가치 않은 처녀로서 얼굴이 잘 생긴 여자를 채택하는 것이고, 채응견사란 좋은 매(應)와 영리한 개를 구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연산군은 남의 아내이건 처녀이건 할  것 없이 그저 잘 생긴  여자라면 상하귀천을 막론하고 붙들어 오게 하였다. 이렇게 전국에서 붙들어 온 남의 아내, 첩, 색시, 기생, 시종들, 무당들의 총 수효가 만여명이나 달하고 보니 이제는 그 거처할 곳과  그들의 생활품 조달이 큰 골치덩이가 되고 말았다. 원각사에다 방도 많이 만들고 대궐 안에도 방을 만들었건만 그래도 부족하였다. 이렇게 많은 여자들  가운데 한 번 임금의 부름을 받아 사랑을 입은 여자는  천과흥청(天科興淸)이라 부르고, 아직 기다라고 있는 여자는 지과흥청(地科興淸)이라 불렀다. 임사홍의 며느리요, 임숭재(任崇載)의 부인인 휘숙옹주(徽淑翁主)는  선왕 성종의 서녀(庶女)로서 연산군에게는 서매(庶妹)에 해당하는  여인이었다. 그렇건만 연산군은 임사홍 집에 자주 드나드는 사이에  자기 서매에게조차 욕심이 생겨서 마침내는 그를 능욕하였다. 임숭재는 임금에게 아첨하기 위하여  남의 미첩(美妾)을 빼앗아다가  들인 까닭에 임금에겐 특별한 총애를 받아오던 터이나, 이제 자기  부인까지 욕을 당하고보니 그 심정은 좋을 까닭이 없었다. 그러나 임숭재는 겉으로 그런 표정을 드러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불쾌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연산군은 임숭재가 아무런  표정도 드러내지 않건만, 혹시나  그가 딴 생각을 가지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에서 그에게 아무 잔소리도  말라는 뜻으로 쇳조각을 입에 물게 하였다. 이렇게 되자 임숭재는 그만 풀이 죽어서 말조차 자유로이 할 수 없어 상심(傷心)한 끝에 홧병으로 죽고 말았다. 연산군이 왕족 부녀를 능욕한 사실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성종대왕의 형님이요, 연산왕의 백부(伯父)인 월산대군은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부인 박씨(朴氏)는 미인으로 유명하였는데 월산대군이 타계한 후에는 과부로 쓸쓸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연산은 이 박씨가 뛰어나게 예쁜 것을  그대로 둘 수 없다 하여,  백모(伯母)가 되는 것도 잊고 능욕을 하였다. 박씨는 한편으로 분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부끄럽기도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연산군은 박씨의 그 수줍어하는 태도가  도리어 예쁘게 보여 더욱  마음이 달아서 사랑했다. 이리하여 그를 승평부대부인(昇平府大夫人)이라는  존호(尊號)를 주고 그의 아우인 박원종(朴元宗)에겐 관직의 한 계급을 높여 주었다. 부부인(府夫人)이라는 것만 하여도 대군(大君)의 부인이라야 갖는  칭호인데 부대부인(府大夫人)은 그보다 더 높은 지위이며  정일품(正一品)이상이었다. 박씨의 마음은 쓰리고 아팠다. 그러나 임금 앞에서는 그러한  태도를 공공연하게 드러낼 수도 없어 그날 그날 살아가는 것이  죽기보다도 괴로왔다. 그러다가 배가 부르기 시작했다.   박씨는 이제 이 아이까지 낳으면 무슨 낯으로 세상에 얼굴을  내놓으랴 하고 고민하다 못하여 마침내 독약을 마시고 자살해버렸다.(자살한것인지 자살당한것인지 어째든 죽음)   죽을 때 자기 아우 박원종에게 유서를 남겼는데, "나는 이렇게 인륜(人倫)에 어긋난 일을 당하고, 사람이라고  얼굴을 들고 다닐수가 없어 죽음으로서 청산하는 바이니 이 억울하고 분통한 일을 자네가 꼭 갚아주길 바라네." 박씨가 죽기 전에 너무나 마음  고통이 심하여 신병이라 핑계하고  임금의 연회에도 잘 나타나지 않으므로 연산군은 그를 위로하기  위해 북도절제사(北道節制使)로 가 있던 박원종을 서울로 불러올렸다. 그러나 연산군 십이년 유월 이십일에 박씨가 세상을 떠나고 보니 박원종의 분노와 침통한 심정은 여간 크지가 않았다. 박원종은 이때부터  누님의 원통한 일을 설분(雪憤)하고 저 망나니 같은 임금을 몰아낼 생각을  갖게 되었다. 어느날, 이조참판(吏曹參判)  성희안(成希顔)은 연산군이  양화도(楊花渡) 월산대군 별장에서 연회를 열고 중신들에게 시를 짓게 할제,  임금이 하는 일이 하도 마땅치가 않아서 ㅡ 성심원불애청류(聖心元不愛淸流) [우리 임금께서 원래 청류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라는 글을 지어올렸다. 이 글을 본 연산군은 자기를 조롱한 것이라하여 곧 성희안을 파직(罷職)시켰다. 이후 성희안은 관계(官界)에 발을 들여놓지 않고 초야에  묻혀서 친구들과 함께 시나 짓고 술이나 마시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이때 마침 박원종은 그 사람됨이 충실하고 사심(私心)이 적은 까닭에 무사(武士)들에게 추앙을 받고, 또 근일에는 자기 누이가 음독자살까지 하였으니 그 심정이 움직일만 한데 어떻게 하면 그와 만나볼 수 있을까  하고 여러 가지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같은 동리에 사는 군자부정(軍資副正) 신윤무(申允武)란 사람이 박원종과 둘도 없는 절친한 사이란 것을 알았다. 신윤무는  벌써 성희안과는 그때 의기상통해 있는 우국지사(憂國之士)의 한 사람이었다.  성희안은 신윤무를 통하여 박원종의 의향을 슬며시 떠보게 하였다. 한편 박원종은 신윤무한테서 성희안의 인물이며 그가 품고 있는 생각을 듣자, 당장 팔을 걷어 붙이며 "그러한 생각은 내가 누구보다지지 않을 만치 가지고 있소. 그런데 누구와 어떠한 방법으로 일을 일으켜야 될지 알 수가 없어서 오늘날까지  참고 기다려 오던 중이요." 하고 자기의 뜻한 바를 신윤무 편으로 성희안에게 전하였다.  성희안은 곧 박원종의 집을 찾아가 서로 손목을 꼭 잡고 눈물을 흘리며 "사내 자식으로 나라가 장차 위망(危亡)해 갈 운명에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어찌 그대로 있을 수가 있을 것인가.   자 오늘부터 생사를 걸고 큰 일을 같이 도모해 봅시다." 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굳은 언약을 했다. 성희안은 박원종과 뜻을 통하게 되자  일시에 천군만마를 얻은 듯이  기뻤다. 박원종과 성희안은 그때부터  함께 극비밀리에 동지들을 널리  규합한 결과 이조판서(吏曹判書) 유순정(柳順汀)과 우의정 김수동(金壽童)을 끌어들였다. 연산군 십이년 구월 일일, 이날은 연산군이 미인들을 거느리고  장단 석벽(長端石壁)에 새로 지은 정자로 놀러갈 생각을 하고 있던  날이다. 박원종과 성희안 등은 이날을 기하여 임금이 장단에 놀러갔다 돌아오는  길에 군사를 숨겨 두었다가 임금을 붙들어 가두어 두고 임금의 아우되는 진성대군(晋城大君)을 모셔다가 임금으로 추대할 계획을 세웠다. 이것을 실행하기 위하여 군자부정(軍資副正) 신윤무, 전수원부사(前水原府使) 장정(張珽),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 박영문(朴永文),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 홍경주(洪景周) 등을 시켜 무사들을 모아 일일 저녁에 훈련원에 모이게 했다. 그런데 연산군은 이러한 일이 있는 줄 알 길이 없는데 무슨 예감이 들었는지 갑자기 장단행(長端行)을 중지하라는  분부를 내렸다. 이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떠들썩하니 준비하던 일을 중지하고 말았다. 그러나 박원종과 성희안 등은 애써 모아놓은 무사라든가 그밖에 여러 사람들을 그냥 돌려보냈다간 비밀이 탄로될 것이라하여 그대로  예정한 계획을 실행하기로 했다. 박원종은 유자광이 꾀가 많고 여러번 이런  일에 경험이 있다 해서 그에게도 사람을 보내어 이 일에 참가를 시켰다. 우선 신윤무를 보내 임사홍, 신수근,  신수영의 집으로 가서 임금을  잘못 인도했다는 뜻으로 때려 죽이고, 개성유수(開城留守)로 가 있는  신수근의 동생되는 신수겸(愼守謙)은 따로 사람을 보내 죽이게 했다. 한편, 무사들이 훈련원에 모였다는  소문이 퍼지자 서울 장안에  기운깨나 쓰는 사람들은 대개 모여들었다. 이에 그 많은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부서를 정한 후 그들을 인솔할 사람도 대개 작정되자,  윤형로(尹衡老)를 진성대군 관저로 보내 뜻 있는 사람들이 의기(義旗)를 들고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리는 동시 무사 수십명으로 하여금 시위(侍衛)케 하였다. 이날 밤 성희안 등은 돈화문(敦化門) 앞에 나아가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대궐 안에 연산군을 모시고 있던  장사(壯士)며 시종 들던 내시등이  대궐 밖에서 일어난 일을 알게 되자 모두 하수도 구멍으로 빠져  도망쳐 버려서 대궐 안은 이미 사람 없는 쓸쓸한 곳이 되고 말았다. 입직승지(入直承旨) 윤장(尹璋), 조계형(曺繼衡), 이우(李 ) 등이  사변을 일어난 것을 알고 창황히 들어가 임금께 알리었다. 연산군은 곧 활과 칼을 가져오라 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박원종은 내시 몇 사람을 앞장 세워 장사 수십 명을 거느리고 대궐 안으로 들어가 임금께 국보(國寶) 즉  옥새(玉璽)를 내놓으라 하고, 임금  앞에서 아첨만 떨던 전동(田同), 심금손(沈今孫), 강응(姜凝), 김효손(金孝孫) 등을 죽여버렸다. 그리고 새벽이 되자 궁문이 열리는 것을  기다려 경북궁으로 나아가 성종대왕의 계비(繼妃) 윤씨에게 "주상전하(主上殿下)께서 크게 군도(君道)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천명과 인심이 벌써 진성대군에게로  돌아갔으므로 여러 중신들이  대비전하(大妃殿下)의 뜻을 받들어 진성대군을  맞아 모시려 하는 바이오니  성명(成明)을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청했다. 이에 대비도 "모든 준비를 예도(禮度)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거행하라." 하는 분부를 내렸다. 곧 유순정이 진성대군의 잠저로 가서 진성대군을 경북궁으로  맞아들였다. 이날로 근정전(勤政殿)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여  백관의 치하를 받으며  새 임금이 왕위에 올랐다. 한편 즉위식을 거행하고 만세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올 때에  연산군은 승지를 불러도 누구하나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고, 장록수, 전비(田非), 김귀비 등 가장 사랑하던 여인들은 부들부들 떨면서 울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자 박원종이 대궐로 들어와 연산군이 보는 앞에서 장록수, 전비, 김귀비 등을 죽여버리고 그 재산을 몰수하였는데 그때에 장록수의 재산은 국고(國庫)의 절반을 넘었다 한다. 그리고 연산군은 강화(江華)섬밖에 있는 교동도(喬桐島)에 유폐시키고  세자(世子)는 강원도 정선(旌善)으로 귀양 보냈다. 조선왕조의 이단아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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