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들도 모두 알다시피 임진왜란 중에 여진의 누르하치가 뜬금없이(?) 조선에 구원병을 보내겠다고 제안한 일이 있었음.
조선으로서는 그 의도가 수상쩍어 보였기에 반신반의하고 있었음.
여진은 본래 조선을 부모의 나라로 섬겨온 처지였지만
이 때의 여진은 누르하치의 영도 하에 명나라마저 무시 못 할 정도로 강성해져 있었기에
섣불리 받아들였다간 이리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음.
그때 서애께서는,
"당나라가 안록산의 난 막으려고 위구르와 티베트에 원병을 청했다가 난리 났듯,
이걸 받아들이면 훗날의 우환이 될 수 있으니 거절하는 게 좋다.
다만 여진으로서는 예전부터 우리에 대한 원한이 크므로,
단호히 물리쳐 괜히 자극할 게 아니라
'도와준다는 건 고마운데, 지금은 왜란이 거의 평정되었으므로
굳이 너희한테까지 수고를 끼치고 싶지는 않다' 정도로 잘 사양하는 게 좋겠다"
라는 유연하면서도 실용적인 의견을 내셨어.
많이 요약한 거고, 『근폭집』에 실린 원문의 국역은 다음과 같아.
"가만히 듣건대 건주위(建州衛)의 달자(㺚子: 오랑캐)가 우리나라를 구원하여 주겠다는 말이 있다 하니 한심한 노릇입니다.
당나라 때에 안녹산과 사사명의 난리를 평정하지 못해서 회흘(回纥: 위구르)과 토번(吐蕃: 티베트)에게 구원병을 청하였다가
대대로 그 화를 입었던 것인데, 달자는 또한 이것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그러나 북쪽 오랑캐는 평소부터, 근년에 인삼 캐는 (오랑캐) 놈들을 우리나라에서 잡아 죽인 까닭으로 우리를 대단히 원망하고 있으니,
이제 저들이 오히려 좋은 말로 와서 대한다면 우리도 또한 마땅히 좋은 말로 대접할 것이며,
엄격한 말로 물리쳐서 그들이 노여움을 더 내게 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만 변장을 시켜 말하기를,
'우리나라가 너희들과 더불어 대대로 인국(鄰國: 이웃나라)이 되었는데,
이제 왜놈들이 난리를 일으킨 것을 듣고 와서 우리를 구원하고자 한다 하니,
그 뜻이 대단히 좋으므로, 조정에서 듣게 된다면 마땅히 칭찬하고 상을 줄 것이다.
다만 왜적의 환란이 이제는 이미 평정되어 가니,
너희들에게 멀리 오는 수고를 끼치기까지는 않을 것이다'
라고 하여 중지하기를 청해야 할 것입니다."
즉 우환은 우환대로 막으면서도,
기존의 꽉 막힌 세계관에 휩싸여 오랑캐를 강경하게 대하기보다는
현실적이고도 유연하게 대처하고자 했던 거지.
임란 이후 얼마 되지 않아 국제 정서를 또다시 오판하여 참혹한 병란을 겪어야 했던 조선.
서애 선생의 실용적인 경륜이 제대로 이어졌다면, 적어도 삼전도에서와 같은 치욕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물론 작정하고 쳐들어오는 놈;;들을 무슨 수로 막겠냐마는
최소한 불필요한 자극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대대적인 침략만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계속 듦.
아이러니한 건, 류성룡과 반목하게 된 광해군의 중립 외교 노선이
또 이와 일치했다는 것이니...
역사는 참 알면 알수록 묘한 것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p.s.
한편 여진이 이 때 조선에 구원병 제안을 한 것은,
다름아닌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 편입하기 위함이었던 게 아닌가 싶은 시각이 있어. (계승범)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군사적인 팽창으로만 일관하던 여진이,
오히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사적 행동을 일시적으로 정지하고
외교적 제스처를 취하기 시작했다는 거지.
즉 명이 일방적으로 주도하던 동아시아의 질서에 돌파구를 내고자
동아시아의 중요한 축 중 하나였던 조선에 대해 정식으로 접근했던 것.
이 점이 일본과의 중요한 차이점이라고 해.
그저 무식;;했던 일본은 닥돌 침략만을 통해
동아시아 패자 자리를 차지하고 일본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질서를 구축하고자 했지만
이는 오히려 명과 조선의 단결이라는, 일본 입장에서의 역효과만 내고 말았지.
반면에 여진은 동아시아 국제 질서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잘 이해했기 때문에
조선에 대한 외교적 접촉을 통해 명을 따돌리는 한편,
종국에는 조선뿐만 아니라 명을 뒤집어엎고 천하를 손에 쥘 수 있었다는 것.
시스템을 모르는 자와 시스템을 이해하는 자 사이의 차이랄까.
물론 청 역시 그 시스템에 깊이 취한 나머지
나중에는 또다른 오랑캐(서구 세력)에 패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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